[역사] 주경효 - 주남선 둘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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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주경효 - 주남선 둘째


주경효 (朱璟孝)
생년월일 1929-03-27
경남생명보험(주) 대표이사 사장



주경효 서울기독실업인회장 - 역경의 열매 신앙 간증 모음
2008/02/07 19:02

http://blog.naver.com/karamos/80048023398





주경효 서울기독실업인회장





(역경의 열매) [국민일보]1993-02-09




◎선친의 명성 뒤엔 고통의 가족사/부친 주남선목사 독립운동 등 한국교회사 “우뚝”/식구들 토굴생활… 누군가 굴 입구에 식량 놓고 가




선친 주남선 목사.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평양형무소에 투옥됐고 한상동목사와 함께 고신대학을 세웠던 분이다. 한국교회사에 선친의 이름이 남아있지만 우리 가족이 얼마나 고통스런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한다는 이유 때문에 공동묘지에서 토굴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 주남선 목사는 전혀 소식이 없었고 일본 형사들에 의해 격리된 삶을 살아야 했다.

굶주림과 추위에 떨던 우리에게 어머니는 이런 말씀을 들려주셨다. 『네 아버지는 이 민족 전체를 위해 일하고 계신다. 이 정도 고통쯤은 참아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중에 큰 상을 주실게야』 토굴속에서도 우리는 어김없이 가정예배를 드렸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가끔 토굴 앞에 보리나 쌀이 든 자루가 놓여있다는 것이었다. 누가 이곳에다 식량을 던져놓고 가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만약 누군가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우리 가족은 토굴 속에서 굶어죽었을지도 몰랐다. 아침에 일어나 굴 밖으로 나오면 입구에 식량이 놓여 있곤 했다.


『누가 우리에게 식량을 갖다놓았을까? 이 귀한 것들을…』

어머니도 짐작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배가 너무 고플 때에는 공동묘지를 돌아다니며 그곳에 놓아둔 과일이나 음식을 주워 먹기도 했다. 어머니는 조석으로 기도하는 일을 잊지 않으셨다. 아침에도 한 시간이 넘게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셨다. 『이 민족을 지켜주시옵소서. 일본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게 하옵소서』 어머니의 기도소리를 들으며 자란 우리의 마음속에도 조그마한 신앙이 자리 잡았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해서는 원망스런 마음도 있었다.


『우리가 이렇게 고생하는 것을 알고 계실까?』

어느 날 아침, 나는 어떤 흐느낌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났다. 어머니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며 흐느끼고 있었다. 『저는 주 목사님으로 인해 신앙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그 은혜에 보답하는 길을 찾던 중 가족이 이곳에서 토굴생활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
토굴 앞에 식량을 던져놓고 간 사람을 드디어 찾아냈던 것이다. 그 사람은 부산에서 오랫동안 목회를 했던 어느 목사님이었다. 『주 목사님은 제게 있어 생명의 은인입니다. 이 식량을 받아주십시오』 체격이 매우 건장한 그분은 연신 어머니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면서 또 감사의 뜻을 표했다. 『하루빨리 좋은 세상이 와야 될텐데요. 일본사람들이 하나님 무서운 줄을 몰라요. 저러다가 큰 화를 당할 거예요』 어머니와 식량을 짊어지고 온 사람은 토굴 앞에 서서 한참동안 통성기도를 드렸다. 아직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공동묘지에서의 기도소리를 들으며 내가 토굴 밖으로 나왔을 때 어머니는 나를 와락 끌어안으셨다.


『경효야 아버지께 전도를 받은 분이 지금까지 식량을 몰래 갖다 놓았다는구나』 어머니는 눈물을 닦으시면서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집에 머무신 적이 거의 없었다. 독립운동을 하느라 집을 비우신 적이 많았으며 일본 형사들에게 붙잡힌 뒤에는 형무소에 수감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4남 2녀는 어머니가 당했던 시련을 훨씬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다.




2 (역경의 열매)


◎아버지는 「목사대물림」 원했지만…/목회자 집안의 고통 “생생” 그 고난의 길 자신 없어/일단 뜻 따라 신학대 시험… 결국엔 포기 의사 밝혀


만약 내게 신앙이 없었더라면 아버지에 대한 한을 품었을지도 몰랐다. 『한 가정의 가장이면 가족들을 책임져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아버지는 우리를 위해 무엇을 했단 말인가』 때로는 아버지를 원망하며 울부짖기도 했다. 음산한 공동묘지의 한 귀퉁이에서 몸부림친 적도 있었다. 아버지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다고 하지만 가족들의 희생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독립운동가의 아내,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투옥된 목사의 아내는 감정표현을 자유롭게 할 수도 없었다. 굶주림 속에서도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사랑하신다. 머지않아 광복이 올 것이야. 우린 더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어머니의 한결같은 말씀이었다. 아버지는 평생동안 거의 가정을 돌보지 못하셨다. 1920년대에는 지하신문 「신한보사건」에 연루돼 진주형무소에서 1년6개월동안 옥고를 치렀다. 그후에는 만주에서 독입운동자금총책을 맡았으며 평양신학교 2회 입학생이었으나 졸업을 하기까지는 10년이나 걸렸다. 언젠가 아버지는 4남2녀를 한자리에 모아놓고 이런 명령을 하셨다.

『장남은 고향을 지켜야 한다. 내가 집을 자주 비우니 네가 실질적인 가장노릇을 해야한다. 둘째는 사업가가 되었으면 좋겠구나. 어머니와 동생들의 생활은 네가 책임을 져야 한다』 아버지는 셋째인 나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씀이 없었다. 워낙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명령을 받아들일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하신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은근히 나를 「목회자감」으로 점찍어 놓으셨다. 해방이후 고신대 초대이사장을 맡으신 아버지는 내게 신학대 진학을 권유했다.

『고신대학에 갈 준비를 하거라. 네가 아버지의 대를 잇기 바란다』 어머니의 엄청난 희생을 생생하게 목도한 나로서는 목사가 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목회자의 길은 형극의 길이다. 나는 못한다. 도저히…』 나는 민족적인 지도자가 되고 싶었다. 무지한 백성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아버지 앞에서 차마 내뜻을 낱낱이 밝힐 수가 없었다. 고신대 입학시험은 비교적 잘 치렀다. 시험문제중에는 「신의 위계를 논하라」는 문제가 있었다. 이것은 몇개월 전에 아버지로부터 교육받았던 내용이었다. 「신의 위계」란 성부 성자 성령을 말하는 것이었다. 시험을 마치고 박윤선박사가 면접을 실시했다. 『자네는 왜 신학을 공부하려 하는가. 목사가 될 결심이 서있는가』 박목사의 질문에 대해 나는 도저히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평신도 지도자가 되고 싶습니다. 아버지의 권유로 시험을 치렀습니다만 심한 갈등을 느낍니다』 박목사는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더니 다시 물었다.


『자네는 고난을 극복해낼 자신이 있는가?목사로서의 고난말일세』 이 질문에 대해서도 대답을 못했다. 목회의 길이 얼마나 험란한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면접을 마치고 아버지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내 속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이제 네 뜻을 알겠다. 목회란 사명감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네가 가고 싶은 길을 가거라』 아버지는 약간 실망스런 표정을 지으면서 내뜻에 동조했다.



◎“신학문 배우자” 일본유학/“주일성수 꼭 지켜라” 아버지격려 받으며 출국/간절한 기도로 자신감… 메이지대학 합격 영광

신학대학 진학을 포기하자 일본유학의 길이 열렸다. 일본의 고베에서 고무공장을 운영하던 형님이 계속 내게 편지를 보냈다. 『일본에서 한번 공부를 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 신학문을 공부하지 않고서는 경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형님의 편지는 내게 커다란 도전을 주었다. 「뭔가 새로운 세계에서 공부를 해보자. 민족적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경험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결심을 하고서 어머니께 내 뜻을 말씀드렸다.


『네 뜻이 정 그렇다면 가거라.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지켜주실 것이다. 어려움이 닥칠때마다 기도하는 것을 잊지 말아라』 아버지께서도 나의 일본행에 찬성하셨다. 서구화된 문명을 배우지 않고서는 조국을 위해 봉사할 수 없다는 것이 아버지의 주장이었다. 『주일성수만큼은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라』 아버지의 격려를 받으며 동생과 함께 일본에 도착한 것이 1950년. 형님은 일본에서 기독교계 학교를 졸업한뒤 사업가로서 비교적 성공한 편이었다. 고무공장은 이미 안정권에 접어들고 있었기 때문에 형님으로부터 생활비를 얻어쓰게 됐다. 「내가 일본에 건너온 목적이 무엇인가. 무위도식하며 이렇게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일본에 온 것은 신학문을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무작정 눌러지낼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어느날 나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 제게 길을 가르쳐 주시옵소서. 공부를 계속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옵소서』나는 답답한 심경으로 꿇어엎드렸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분명한 음성을 들려주시지 않았다. 잠못이루며 괴로워하던 새벽무렵에야 마음속으로부터 기쁨이 솟구쳐올랐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불가능이 없다. 뚜렷한 목표를 갖고 시험을 준비하라. 자신감을 가져라」 이런 확신이 드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약 6개월동안 무섭게 공부를 했다. 목표는 메이지대학이었다. 영어는 이미 한국에서 어느정도 공부를 했기 때문에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일본어를 얼마만큼 구사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만약 일본에 와서 대학에 들어가지도 못한다면 이건 정말 망신스러운 일이었다. 6개월동안의 스파르타식 공부를 마치고 시험을 치렀다. 그때 벌써 입학시험문제로 미분과 적분이 출제됐다. 시험은 예상했던 것보다 어렵지 않았으며 쉽게 합격을 했다.


『합격을 축하한다. 학비는 내가 도울테니 걱정하지 말고 학업에만 전념하거라. 네가 참으로 자랑스럽다』 형님의 축하를 받으며 나는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일본인 학생들과의 경쟁에서도 결코 뒤지지 않을 자신감이 생겼다. 그때 나는 동경한인교회 출석하고 있었다. 주일성수를 강조하신 아버지의 말씀을 기억하며 열심히 교회에 출석했다. 막상 일본에서 생활을 하다보니 아버지에 대해 가졌던 미운 감정들이 하나씩 사라지는 것이었다. 독립운동과 신사참배반대운동을 하느라 가족을 전혀 돌보지 못했던 아버지에 대해 일종의 한을 품고 있었던 내가 조금씩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조국광복과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 몸부림쳤던 아버지의 삶이 위대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유학중 아버지 소천… 귀국 못해/한평생 청빈한 삶… 전국서 조문객 몰려 10일장/독립운동·목회헌신 귀감… 어린이 전도에 열성당시 일본 유학생 중에는 현 서울대학교 이인영교수, 연세대학교 황영금교수, 동방유량 남해용부회장등이 있었다. 일본에서는 조총련의 정치세력이 강했으나 나는 이에 맞서는 대한청년단 재일유학생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나름대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기독교인은 결코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로부터 끊임없이 들어왔던 말이었다.

1952년 5월. 나는 조국으로부터 비보를 접했다. 일본인들과 인민군들에게 모진 고문을 당했던 아버지가 그 후유증으로 소천했다는 소식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한·일간에 비행기나 배편이 부정기적이었기 때문에 귀국을 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소천소식을 접한 날은 이미 소천일로부터 일주일이나 지난 후였다.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 평생을 당신만 바라보며 살아온 아버지를 살려주십시오. 오늘날에도 기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십시오』 나는 사흘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를 드렸다. 아버지는 그때 거창읍교회에 시무하고 있었으며 전국 각지에서 몰려드는 조문객들로 인해 10일장을 치렀다. 그리고 우리가 토굴생활을 하던 공동묘지터에 묻혔다. 아버지가 소천을 하고나자 독립운동가요 목사였던 아버지의 존재가 더욱 크게 부각됐다. 아버지는 거의 불필요한 말씀은 하지 않으셨다. 성경묵상과 기도가 생활의 전부일 정도로 경건한 삶을 사셨다. 항상 한복을 입으셨으며 특히 어린이전도에 열심이었다. 주머니에는 항상 사탕이 가득 들어 있었다.

『천국에서는 어린이가 제일 큰 자이니라. 우리도 어린아이처럼 깨끗한 마음을 갖지 않고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 아버지는 한복 고름으로 어린아이들 코를 닦아주곤 했다. 그래서 한복에는 항상 아이들의 코가 잔뜩 묻어있곤 했다. 이를 보다못한 어머니가 항의를 한적도 있었다. 『여보, 빨래하는 일이 그렇게 쉬운 줄 아세요? 휴지로 닦아주면 되잖아요』
아버지는 어머니의 투정을 이렇게 받아넘겼다. 『천국가는 것에 비하면 빨래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오. 어린아이들에게 신앙을 심어주어야 우리 민족의 장래가 밝을 것이오』 여름에는 항상 오른손에 부채를 들고 계셨다. 찾아오는 손님이 무척 많았는데 그중에는 내또래 어린이들도 있었다. 아버지는 대화를 나누면서도 오른손으로는 어린아이들에게 부채질을 해주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어머니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자식들에게는 한번도 부채질을 안해주면서 남의 자식들에게는 참 친절하시군요』
아버지는 이에 대해서는 대꾸가 없으셨다. 오랜 감옥생활로 몸이 쇠약해진 아버지는 병든 몸을 이끌고 전도를 다니셨다. 우리 가족들은 아버지가 출옥한 후에도 계속 죽을 먹어야 했다. 교회에서 사례비를 받아오시면 그중의 절반은 이웃의 불쌍한 사람들을 도우는데 쓰셨기 때문에 가정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여보, 이제 제발 가정도 좀 돌보세요. 최소한 하루 세끼는 먹어야할 것 아니예요』 어머니가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리자 아버지는 화를 벌컥 내셨다.

『하루에 한끼도 못먹는 형제들이 많은데 목사가 어떻게 세끼를 배불리 먹는단 말이오』 이토록 청빈한 삶을 살아오신 아버지였다



◎대학교수 꿈 포기… 일본서 귀국/인종차별 심해 우수한 학교성적 불구 미래 불안/관료생활하며 교만 가득 장로장립 투표서 고배

아버지는 한 고위층 인사로부터 국회의원 출마권유를 받은적이 있었다. 그때 아버지는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목사란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오. 정치에는 관심도 없소이다』 목회자로서 분명한 소명의식을 갖고 살아오셨던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들이 하나씩 떠오를 때마다 나는 울면서 기도를 드렸다. 굶주림과 추위에 몸을 오들오들 떨던 토굴속에서 나는 얼마나 아버지를 원망했는지 모른다. 『가정을 돌보지 않는 독립운동가는 비난받아야 한다. 아버지가 우리 가족을 위해 한 일이 무엇인가』 이런 원망들이 하나씩 존경심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아버지도 아내와 자녀들이 분명 사랑스러웠으리라. 당시 아버지는 거창읍교회를 맡고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드는 조문객들로 인해 10일장을 치렀던 것이다.

나는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을 마음에 간직한채 열심히 공부했다. 내가 무엇이 될것인가에 대해 나름대로 목표를 설정했다. 대학교수. 이것이 나의 목표였다. 그러나 일본에서도 인종차별이 심했다.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법학을 공부했던 나의 성적은 우수한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대한 보장이 전혀 없었다. 『경효야, 일본이란 나라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차라리 내게 와서 사업을 운영하는 방법을 익히거라』 형님은 이미 내 형편을 꿰뚫고 있었다. 대학교수가 되겠다던 꿈을 포기하고 형님이 운영하는 고무공장에 취직했다.

『한국에 돌아가서 사업을 하거라. 내가 적극 도와주겠다』 약 9개월동안 형님으로부터 사업을 배웠다. 그러나 이 일은 내 적성에 맞지가 않았다. 『내가 공장에 취직하기 위해 일본유학까지 왔단 말인가. 차라리 내 조국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일을 시작해보자』 내가 귀국한 것은 1958년이었다. 당시 정부는 국제방송국설립에 따라 일본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젊은 엘리트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공보실 사무요원으로 발탁됐던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윤봉기목사님이 시무하시던 서울중앙교회에 출석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사랑·믿음·봉사·겸손」이라는 가훈을 남기셨으나 나는 결코 겸손하지가 못했다. 워낙 성격이 급했을뿐만 아니라, 젊은 시절부터 관료직에 몸담았기 때문에 교만한 마음이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었다. 또 하나님께서 내게 항상 좋은 일자리를 허락해주셨다. 그러나 재물에 대한 복은 허락하지 않으셨다. 만약 내가 풍성한 재물까지 소유하게 된다면 교만이 극에달할 것이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미리 알고 계셨다. 70년에는 한국중앙교회에서 장로장립을 위한 투표가 있었다. 투표결과 나는 여지없이 고배를 들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제가 좀더 겸손한 사람이 되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나는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내 스스로 생각해보아도 장로가 될 자격이 없었다. 세상일은 무엇이든지 닥치는대로 할 수 있었으나 교회의 일만큼은 매우 조심스러웠다. 교회의 직분에 대해서도 나는 일종의 경외감을 갖고 있었다.

『나는 목회자의 아들이다. 일거수일투족을 조심해야 한다』 항상 이런 마음을 갖고 있었다. 나는 「교만」을 떨쳐버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성경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조금씩 늘려가기 시작했다. 성경공부 모임서 신앙 성숙/믿음 이끌어주신 어머니 장로장립 못보고 소천/아버지 정신 깃들인 고신대 발전위해 동분서주68년부터 기독실업인회의 성경공부모임에 참석한 것이 내 신앙생활에 큰 도움이 됐다. 이런 신앙훈련과정이 있었기에 나는 장로장립투표에서 고배를 들고서도 감사할 수가 있었으리라. 75년에 다시 장로장립투표를 거쳐 장로직분을 받았다. 어머니는 내가 장로장립받기를 간절히 원하셨다. 그러나 74년에 소천을 하셨기 때문에 장로가 된 아들의 모습을 지켜볼 수 없었다.


『하나님을 거역하면 큰 화를 당한다. 순종하는 삶을 살아라』 이것이 어머니의 한결같은 충고였다. 어머니는 빌립보서4장 4∼6절을 들려주시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하라고 말씀하셨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한가지 감사한 것은 내가 고신대학이 대학인가를 얻는데 미력하나마 일조를 했던 일이다. 65년도에 고신대학의 법인체설립허가서를 들고 관계부처를 드나들던 일을 잊을 수가 없다. 일부에서는 고신대학의 인가에 강력한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인가가 나오면 여러모로 간섭을 받게 된다. 차라리 현재의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는 게 나을성 싶다』 나는 그들을 설득하느라 무척 고심했다. 『지금은 법과 질서가 통하는 사회입니다. 학교도 교육법을 따라야 합니다. 운영이 편하다고 해서 이대로 방치한다면 학교는 점점 퇴보하게 됩니다』 선친의 신앙과 정신이 깃들여있는 고신대학에 대해 나는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었다. 나 역시 이 학교의 입학시험을 치른 경력이 있었다. 만약 일본유학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고신대학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을 것이다.


당시 나는 학교 관계자들에게 또 하나의 사실을 강조했다. 『복음을 전하는 데에는 의료활동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고신대학내에 의과대학을 만드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 제안에 대해서도 찬반으로 의견이 나누어졌다. 영남지방에 복음을 전한 사람들은 주로 호주선교사들이었으며 그들이 주로 의료선교활동을 했다는 점에서 의료선교사 양육을 강조했던 것이다. 『좋습니다. 의료전도는 정말 효과적입니다』 이렇게 해서 신학대학내에 의예과가 설치됐다. 나는 교회의 청년, 대학생들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서울중앙교회에서 남선교회장으로 봉사할 때에도 시골의 목회자 자녀들이 서울에 유학, 어렵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학사관설립을 제안했다. 『농어촌교회 목회자 자녀들이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우리가 도웁시다』 나는 학사관설립준비위원장을 맡아서 6년 전에 한옥을 구입했다. 지금은 십여명의 시골목회자 자녀들이 이곳에서 생활하며 대학에 다니고 있다. 나는 민족적 아픔을 가장 가까이에서 체험한 바 있다. 공보실에서 사무관으로 근무할 때에 4·19가 일어났으며 나도 마산으로 내려갔다. 마산대학에서 법학을 강의하고 있었는데 서울에서 연락이 왔다. 『무역진흥공사가 설립될 예정이다. 네가 이곳에서 일하면 좋겠다』




◎형님 도움으로 사업 첫발/평탄한 직장생활중 80년 뜻하지않은 해직 아픔/신발회사 설립…

어려울때마다 아내와 함께 기도대한무역진흥공사에서 2년을 근무한 후 재무부장관 비서관으로 일을 한 적도 있었다. 중소기업 육성을 위한 금융정책입안에 참여, 상호신용금고와 신용조합등 일본에서 배워온 것들을 한국에 정착시키는 일에도 나름대로 일조를 했다. 내겐 「직장운」이 있었다. 재무부장관 비서실장, 조폐공사이사, 한국화재보험협회 감사, 대한보증보험부사장등 여러곳을 거쳤다. 「정의롭게 일하자. 결코 재물에 눈이 먼 사람이 되지 말자. 하나님께서 내 일거수일투족을 내려다보고 계신다」 이런 생각을 하며 조심스럽게 생활을 했다. 그러나 80년에 접어들면서 억울하게 직장에서 물러나게 됐다. 제5공화국의 출범을 앞두고 수많은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는 비극적인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나는 일본으로 건너가서 형님에게 내 사정을 털어놓았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할지 걱정입니다』 형님은 묵묵히 내 이야기를 듣고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신의 자녀들을 방관하지 않으실 것이다. 희망을 버리지 말고 더 열심히 기도하거라』 형님과 나의 삶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형님은 일본에서 사업가로 성장하기까지 무수한 시련을 겪었다. 자금난에 허덕이는 일은 예사였고 불황으로 문을 닫기 직전까지 이르렀던 위기가 많았다. 그러나 나는 어렸을 때에는 고생을 했으나 그 이후에는 비교적 역경이란 것을 몰랐다. 일본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후부터 내 인생은 순풍에 돛단듯 순조로운 항해를 계속했던 것이다. 젊은 나이에 많은 직원들을 통솔하는 위치에 올랐기 때문에 어쩌면 내가 느끼지 못할 정도로 「권위」와 「교만」이 몸에 배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 앞에는 항상 여러 갈래의 길이 놓여 있었다. 대학교수가 될 수도 있었고 또 좋은 직장들도 있었다. 나는 항상 여러 인생항로중에서 가장 좋다고 생각되는 것만 선택하면 될 뿐이었다. 이런 생활에 길들여져온 내가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고 오갈데 없는 신세가 됐으니 그 충격이야 오죽했으랴. 형님은 이미 내가 처한 상황들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이제부터 사업을 한번 해보거라. 무역업중심의 고무공업을 한다면 내가 기술과 자금투자를 하겠다』 대학을 졸업하고 형님이 운영하는 회사에 근무한 적이 있었던 나로서는 고무공업이 그리 생소하지만은 않았다. 『하겠습니다.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형님의 도움으로 「국보산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케미컬슈즈를 취급하는 사업이었다. 사업경험이 전혀 없었던 나로서는 이 사업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직원들을 관리하는 것은 물론 선적과정과 바이어들과의 만남등 모든 것이 생소했다.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나는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했다. 『하나님, 제게 용기를 주시옵소서. 어떤 시련에도 결코 좌절하지 않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나보다도 아내가 더 열심히 기도를 드렸다. 그때에 나는 사도 바울의 『고난이 내게 유익이라』는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됐다. 시련을 겪을 때마다 더 많은 기도를 드릴 수 있다는 것. 이것은 기독교인의 특권이었다. 보통사람들은 역경 앞에서 환경을 탓하지만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그것을 극복해낼 수 있는 것이다




◎평신도 봉사의 길 찾아나서/나이들면서 신학포기 아쉬움… 교회연합 활동/믿음깊은 아내만나 조급한 성격에 많은 도움

6년동안 회사를 운영했다. 난생 처음 해보는 사업이었으나 그리 큰 시련은 없었다. 내가 사업수완이 좋아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편 46편1절) 나는 나이가 들면서 때로는 신학을 공부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아쉬운 마음을 갖기도 했다. 고신대학의 입학시험까지 치르고도 결국 진학을 포기했던 것에 대해 일종의 부채의식을 느꼈다.

『평신도로서 봉사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 목회자요 독립운동가의 아들답게 사는 길이 무엇일까?』 이런 물음들이 나를 괴롭혔다. 오로지 현실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내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나는 신앙이 없었더라면 매우 교만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성격이 매우 급해서 실수를 할 소지가 많았다. 무슨 일이든지 시작을 하면 옆을 보지 않고 몰입하는 성격이었다. 그러다보니 때로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고 엉뚱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다.

아내는 이런 내게 참으로 훌륭한 내조자가 되어 주었다. 『여보, 한 박자씩만 늦추세요. 기독교인이 너무 급한 것도 탈이예요. 좀 느긋한 마음을 가지세요』 내 성격과는 반대로 아내는 매우 침착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교회일에도 열심이었다. 아내를 만난 것은 내가 대한무역진흥공사 총무부장으로 재직중일 때였다. 아내는 외대 영문과에 재학중이었으며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장로의 가정에서 엄하게 교육을 받으며 자란 처녀였다. 『내 아내는 최소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비교적 자유로운 성격을 가진 나였지만 결혼상대만큼은 반드시 신앙인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굳혀놓고 있었다. 그것은 비단 내 생각만이 아니었다. 어머니도 같은 생각이었다.

『예수님을 잘 믿는 아내를 만나는 것이 큰 복이다. 너는 사람을 사귈때 이 점을 명심하거라. 신앙이 같아야 화합이 되는 법이다』 어머니의 말씀을 나는 명심하고 있었다. 아내는 당시 연극반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어느날 내게 연극표 한장을 주면서 구경오라고 했다.
『셰익스피어 연극공연이 있으니 한번 와보세요』 그녀의 초청을 받고 공연장에 가보았더니 뜻밖에도 아내가 줄리엣역을 하고 있었다. 이런 만남을 통해 서로에 대한 애정을 갖게 됐고 5·16직전에 YWCA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나는 목회자가 되지는 않았지만 평신도활동에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장로협의회, 평신도단체협의회등 교회연합활동에는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은 것에 대한 최소한의 사죄요, 장로의 책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연합을 위한 모임이 있으면 부지런히 찾아다녔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교제의 폭을 넓혀주셨다. 물질을 절대로 풍요롭게 주지 않았으나 좋은 직장, 좋은 친구, 좋은 신앙의 선후배들을 허락해 주셨던 것이다. 72년의 수해사건이 바로 그 단적인 예였다. 당시 우리 집에는 동양화 몇점이 있었다. 구입할 때에는 그리 비싼 편이 아니었으나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그 가치가 폭등했다. 수십년 모은 우표·화폐 잿더미로/수해이어 불난리… 재물빼앗은 하나님 원망도/모든것 잃으니 되레 초연 “배부른 욕심 회개”폭우로 인해 그림과 책들이 모두 물에 잠기게 됐다. 과연 그것들이 어느 정도의 화폐가치가 있는 것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 일을 통해 나는 다시 한번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왜 내게 재물을 주시지 않습니까. 있는 것까지도 빼앗아가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처음에는 원망섞인 항변을 했다. 그때 마음속으로부터 잔잔하게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었다.

『내가 너를 굶겼느냐? 네가 지금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느냐? 자족하는 법을 배워라』 이때에 나는 무릎을 꿇고 회개의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할줄 모르고 욕심만이 앞섰던 저를 용서해 주옵소서』 91년도에도 잊을수 없는 사건이 있었다. 내가 지방에 출장을 가있는 동안에 아내로부터 급히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 큰일났어요』 아내는 울먹이며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오. 자초 지종을 이야기해 보시오』 아내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집에 불이 났어요. 모두 불에 타서 아무것도 건질 것이 없어요』 『다친 사람은 없소?』 나는 다급하게 물었다. 『누전으로 인한 사고였어요. 아무도 다친 사람은 없어요』 내가 급히 서울로 돌아왔을 때에는 집의 형태만 새까맣게 남아 있었다. 그것은 아늑하고 포근한 가정의 모습이 아니었다. 흡사 거대한 괴물이 입을 벌리고 먹을 것을 찾고있는 모습이었다.

『저게 과연 내가 살던 집이었던가? 이럴수가…』 비통한 심정으로 참혹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는 장롱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던 중요한 물건을 떠올리고 그것을 열어보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미 재만 수북히 쌓여 있었다. 「중요한 물건」이란 내가 수십년동안 애지중지하며 모아두었던 세계 각국의 우표들이었다. 우표 뿐만 아니라 옛날 화폐들도 몇개 있었다. 나는 이것들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이 모든 것이 새까만 재로 변했던 것이다. 아내는 내가 깊은 절망감에 빠질까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평소 내 성격으로 보아서는 걷잡을 수 없을만큼 고통스러워할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겠습니다. 저를 더욱 연단시키시옵소서』 뜻밖에도 나는 이런 기도를 드렸다. 아내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족할 줄을 몰랐던 것이다. 세상 욕심에 취해 「귀한 것」들을 쌓아두려는 좋지못한 습관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까지도 나는 낱낱이 하나님께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다. 나는 체념이 빠른 편이었다. 일단 끝난 일에 대해서는 더이상 연연해 하지 않는 성격인 것이다. 이제 잿더미위에 다시 집을 짓고 삶의 보금자리를 꾸미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지 않은가.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마태복음 6장34절)




◎영혼구원 선친뜻 뒤늦게 깨달아/「희생·겸손·인내」의 가훈 되새기며 새로운 다짐/군림하려던 마음 회개…

봉사하며 살아가겠다선친 주남선목사의 삶에 비하면 나는 사치스러울 정도로 분에 넘치는 생활을 해왔다. 주목사님의 관심은 의식주문제에 있지 않았다. 『어찌하면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할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선친의 최대 관심사였다. 『그런데 나는 어떤 인생을 살아왔던가. 과연 몇사람에게 복음을 전했던가』 부끄러웠다. 화재를 당해 내가 소중히 여기던 모든 것들을 잃고도 서운함보다 부끄러움이 앞섰다. 「희생 겸손 인내」를 가훈으로 삼았으면서도 이를 실천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나였다. 교회에서 직분을 받을 때도 나는 「봉사의 정신」보다는 「지위」 그 자체를 중히 여긴 적도 있었다. 청년회장을 할때에도 군림하려던 마음이 앞섰다. 나는 이런 점까지도 낱낱이 회개기도를 드렸다.


한때는 내가 혹독한 비판을 가했던 주남선목사. 독립운동가요 목회자였던 남편으로 인해 혹독한 고난을 겪어야했던 어머니. 두분의 인생여정이 나의 삶을 제어해주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는 성격이 활달하고 적극적이었던 내게 이런 충고를 하셨다. 『겸손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를 사용하신다. 어디에 가든지 행동거지를 조심하거라』 어머니로부터 나는 잠언16장 18∼19절 말씀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겸손한 자와 함께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 당시에는 가볍게 들었던 성경말씀들이 지금은 내 삶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성경을 읽다가 문득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리며 새로운 결단을 한다. 『목사의 아들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자. 어머니의 기도를 잊지 말자』 내 어릴 적 기억으로는 겨울에도 어머니는 이불을 덮지 않고 주무셨다. 내가 이불을 끌어다가 어머니를 덮어주면 어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셨다.

『네아버지가 감옥에서 이불을 덮고 계시겠느냐? 나는 그래도 따뜻한 방에서 생활하는데 어찌 이불까지 덮는단 말이냐』 나는 더이상 어머니께 이불을 덮어드릴 수가 없었다. 이런 기억 하나하나가 지금은 소중하게 느껴진다. 누님은 두분의 뜻을 받들어 결혼도 하지 않은채 평생을 복음전하는 일에만 전념하고 있다. 비록 목회자는 배출되지 않았지만 누님이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구원을 위해 헌신해온 것이다. 이순을 넘기면서 나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해보게 됐다. 그리고 내가 남은 인생을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 본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요한계시록2장10절). 하나님께서 충성하는 삶을 살아갈 것을 다짐한다.

작년에 소천하신 형님께서도 일본에서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셨다. 사업가로서 숱한 시련을 겪었으면서도 기도로 이를 극복했다. 『나이가 들수록 부모님에 대한 존경심이 더하더구나』 형님의 그 말씀이 잊혀지지 않는다. 이제 나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담대히 복음을 전할 생각이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감사할 뿐이다. <정리=임한창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