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한부선...[14]
‘신사참배반대..개혁신앙이 바탕’
한국교회사연구소..신사참배반대운동 재조명
친일문제를 비롯한 과거사를 청산하려는 국내의 움직임과 더불어 한국교회 내에서도 일제에 의해 저질러졌던 한국교회에 대한 최대 박해였던 신사참배문제를 재조명해야 하는 필연성과 더불어 일제말기의 한국교회가 신사참배 강요를 받아들임으로써 일본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정치적, 종교적 이데올로기를 수용함으로 기독교의 보편적인 본질에서 떠났던 사실을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는 촉구의 목소리가 높아져 가고 있다.
이에 한국교회사연구소(소장 박용규)는 오늘(6일) 오전 10시 제5차 정기학술세미나를 통해 철저히 개혁신앙에 바탕을 둔 신사참배운동을 벌였던 한부선(Bruce F Hunt, 1903~1992)선교사의 삶을 재조명함으로써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정치적, 종교적 이데올로기로 인한 종교탄압에 한국교회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논의했다.
이날 세미나에서는 박응규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역사신학)가 ‘한부선의 개혁신학과 신사참배운동’이라는 제목의 주제강의를 맡았으며 박 교수는 “한부선 선교사와 만주의 신사참배반대자들은 종교개혁의 원리 중의 하나인 ‘오직 성경으로’라는 원칙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외에 그 어떤 것도 신앙과 행위의 최종적인 규범이 될 수 없다고 천명하였다”라며 한부선 선교사의 신사참배반대운동이 철저한 개혁주의 신앙에 기반을 둔 것이었음을 강조했다.
특히 박 교수의 발표는 지금까지의 신사참배 반대자들에 대한 연구가 주로 순교적 신앙을 숱한 역경속에서도 지켜온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던 반면, 개혁신앙의 유산 속에서 한부선 선교사가 펼쳐나갔던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부각시키고 평가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박 교수에 따르면 한부선 선교사는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성경을 신앙과 삶의 궁극적 권위로서 인정하는 가운데 그의 사역을 전개해 나갔으며, 언약사상과 교회와 국가의 분리개념, 그리고 양심의 자유를 강조하면서 신사참배라고 하는 정치적 혹은 종교적 이데올로기에 일관성 있게 저항하고 그런 상황을 개혁하려고 시도했다.
박 교수는 한부선 선교사가 가지고 있었던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그의 섭리에 따라 역사가 진행된다’는 확고부동한 신념은 신사참배강요가 지향하고 있었던 천황에의 절대적 복종을 대항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고 설명했다. 또 “일제에 의한 박해가 점점 가혹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한부선 선교사는 한국인 성도들이 기독교 신앙이 흔들리고, 한국이라는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심이 약화되는 것을 인식하면서 신사참배강요에 대항할 수 있는 교리적 준거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39년 1월 평신도 지도자들과 함께 ‘장로교 언약문서’를 완성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장로교 언약문서는 7개의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주된 내용은 신사참배는 명백한 우상숭배이므로 기독교인들은 절대로 해서는 안되며 우상숭배를 행하는 교회는 기독교의 본질을 상실하고 참된 교회이기를 포기한 교회이기에 이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박 교수는 한부선 선교사는 일제가 교회를 지배하는 것은 기독교인의 양심과 장로교 정치와 일본제국의 헌법에 분명히 위배됨을 지적하면서 반대운동을 이끌어 나갔다면서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심을 철저히 신봉했던 한부선 선교사는 교회의 영역은 세속군주에 의해 조종될 수 없는 영역임을 강조하였다. 또한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분리되어 있으며, 교회에 의한 정치운동이나 정치권력에 의한 교회탄압을 반대했다”고 밝혔다.
하나님의 주권과 언약사상을 강조하는 개혁주의 신학의 전통에서는 국가에 의한 교회의 지배나 간섭을 철저하게 배격한다. 또 그 어떤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민족주의라는 테두리 속에 교회와 기독교 신앙을 종속화시키는 것을 반대한다.
박 교수는 이와 함께 “적어도 17세기 말까지는 양심의 자유라는 개념과 영역주권사상이 미국의 정치사상을 형성하는 주요한 요인들로 작용하였으며, 각종 법적인 제도들의 분리를 옹호하는 근거로 이용되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정부 혹은 국가라는 제도도 ‘분리된, 특수한, 그리고 제한된 조직’이라는 견해가 우세했다”며 “이러한 개념을 소유한 한부선 선교사는 공권력을 이용하여 신앙의 자유뿐만 아니라, 양심의 자유마저 유린하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정책에 맞서 나갔다”고 전했다.
박 교수는 이러한 전통이 한부선 선교사뿐만 아니라 미 장로교 선교사들에게도 강하게 계승되고 신사참배 강요에 반대했던 한국의 대표적인 순교자인 주기철 목사에게서도 이러한 전통이 매우 강하게 나타났음을 주지하기도 했으며 “이러한 한부선 선교사의 삶은 “무엇보다도 성경적 신앙을 복원하는 것이 한국의 교회와 민족이 살 길임을 고난 속에서도 자신의 희생과 헌신을 통해 제시했던 이정표가 된다”라고 평가하면서 “그 신앙의 지표야말로 국내외 정세가 걷잡을 수 없이 혼탁해지고 있는 지금에 더욱 유효한 자세가 아닐 수 없다”라고 말했다.
(2004. 11. 6. 크리스천투데이 / 류정희 기자)
한부선 선교사님
한부선 선교사님의 사진 기록이 드디어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사랑센터를 방문하십시오. 한위렴, 한부선 선교사님 부자의 선교 사역 사진 기록이 생생하게 있습니다.
http://sarang.wts.edu/cgi-sarang/ImageFolio31/imageFolio.cgi
이 소중한 자료를 digitize하는 중에 놀라운 은혜와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버지 한위렴 선교사님은 황해도 재령에서 1906년부터 1939년 은퇴하여 귀국하기까지 사역하셨습니다. 재령의 여름성경학교를 초창기 1907년에 몇 십 명의 참가자들이 1930년을 전후해서 2천여명으로 불어났습니다. 성경학교 수강생들이 황해도 각지에서 보따리 싸들고 1주일간 말씀을 배우러 오는 행렬은 장관이었습니다. 재령 동부교회, 서부교회를 건축하는 모습도 있습니다.
한부선 선교사님, 고신이 잊어서는 안 될 어른이십니다만, 많은 사람들이 고신 태동 이전의 한부선 선교사님을 많이 알지 못합니다.
평양에서 태어나, 재령과 평양을 오가며 청소년기를 보냅니다. (1903-1919)
시카고 근교의 휘튼 칼리지를 입학하나 뉴저지의 럿거스 대학교에서 졸업합니다. (1919-1924)
박형룡을 선배로, 한경직, 김재준, 송창근을 후배로 두고 프린스톤 신학교에 다녔습니다. (1924-28)
만주의 하얼빈 감옥에서 신사 참배 반대하여 봉천 노회에서 제명됩니다. (1939)
계속하여 신사 참배 반대 이유로 만주 옥중에서까지 투쟁하신 분입니다. (1941-42)
일제로부터 해방 후, 고려파 교회의 출발과 고려신학교와 칼빈신학교와 복음병원에 남긴 그 분의 족적은 자이언트의 그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경상, 전라 지역에 산재한 6.25 한국 전쟁 후 부모 잃은 고아들을 수도 없이 방문하며 도왔습니다.
돈 많은 미국 나라에서 왔기에 도울 수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한부선 선교사님이 소속하셨던 교단은 정통장로교회 (OPC: Orthodox Presbyterian Church)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 OPC는 자유주의로 치닫는 미국 북장로교에서 갈라져 나온 교단입니다. 때는 1936년. 일제가 식민지 팽창 야욕을 중국의 만주에까지 뻗치던 때입니다. 일제가 신사 참배 강요를 위한 조직적 압살 정책의 강도를 높이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갈라져 나온 교단, 참으로 보잘것없는 시골의 작은 교회로부터 후원 받으신 한부선 선교사님입니다. 그 분의 삶 자체가 얼마나 검소하였는지, 그 분을 직접 접한 많은 분들의 증언을 통해 지금도 들을 수 있습니다.
참고로, 한부선 선교사님과 OPC에 대해 전문가적 수준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의 정보를 가지시길 권합니다. 한부선 선교사님을 사모한다면, 고신은 OPC의 태동 역사를 배우시길 권합니다.
http://www.opc.org/what_is/the_opc.html을 방문해서 간단한 역사를 공부해 보십시오.
아세아 연합신학대학의 박웅규 교수가 내 놓은 “한부선 평전”을 참고해도 좋습니다.
(2005. 5. 10. 아틑란타 기쁨의교회)
“Am I Brother"s Keeper?”
앞 선 글, “아르메니아인 학살 90주년”에서 20세기 초에 있었던 아르메니아인들의 비극을 지정학적으로 낀 약소국의 역사를 통해 조명해 보았다. 아르메니아는 200만 명에 달하는 참혹한 학살을 당한 후에도 나아진 것이 없었다. 1919년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의 제물이 된 후 구소련이 붕괴되기까지 이름 없는 민족으로 20세기를 지나왔다.
같은 기간동안 한민족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지정학적으로 낀 약소국, 조선은 1910년 한일 합방의 치욕을 맛보았다. 살육은 40년이 지나서 발생했다. 강대국 간의 대리전(代理戰)으로 치른 동족 간의 전쟁 6.25 전란이다.
무엇을 배울 것인가? 지정학적으로 ‘낀 민족’의 비극은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주변 열강의 동맹과 지원 약속을 마냥 믿을 수만 없다는 교훈이다. 지금 한반도에 일고 있는 핵무장과 관련한 우리 민족의 운명은 어떻게 되나? 미국에 운명을 걸어 볼까? 아니면 중국에?
아르메니아인들이 제정 러시아에 기대어 살려고 몸부림 쳤건만 처참한 역사를 기록했듯이, 조선인들 역시 미국에 기대어 낭패를 본 역사를 기록했다. 이 사실을 한부선 선교사님의 보고서를 통해 확인해보자.
“... 조미통상수호조약(1882년)을 준수하기 위해, 조선인들이 돛을 단 배를 타고 미국으로 간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미국인이) 조선으로 증기선을 타고 갔습니다. 이 조약을 통해, 우리의 관심은 조선반도의 섬과 해변에서 불행하게 좌초한 해군들의 안전을 보호받는 것이었습니다. 무역업자가 교역상담을 하고 광산업자가 금은 광석을 캐는 허가를 받아내는 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조약으로 기술자들이 전국에 철도를 깔고 전차를 달리게 하고 발전소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우리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할 자유도 원했습니다.
우리는 이 조약을 통해 조선인의 주권을 인정하기로 했고, 조선이 다른 나라로부터 불공정하게 취급된다거나 주권이 침해당하면 이 조약에 따라 행동하며 지켜줄 것을 동의했습니다. 조선도 우리 미국에 대해서 동일하게 할 것을 조인했습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조선이 조인한 다른 많은 문호 개방 조약들이 조선을 궁지로 몰게 되었습니다. 먼저 청일 전쟁이 한반도에서 발발했습니다. (1884년). 이후 일본의 조선에서의 이권이 강화되었고, 급기야 일본은 러시아를 공격해 러일전쟁이 터졌습니다. (1905년).
이 전쟁 종식을 위한 평화조약이 우리 미국 땅에서 있었습니다. 뉴햄프셔의 포츠머스에서 데오도르 루스벨트 대통령의 중재 하에 조인되었습니다. 조선인들의 반대와 조선에 주재한 우리 외교관 대표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조인된 포츠머스 조약은 미국 정부의 중재 하에 일본으로 하여금 조선의 주권을 위협하는 힘을 부여한 것입니다.
그 주권은 명백히 우리가 마땅히 존중하고 지키기로 약속한 조미통상수호조약에 명시된, 바로 그 조선의 주권입니다. 일본은 얼마 지나지 않아 (5년 만에) 1910년에 조선을 합병했습니다.
우리가 그 조약을 지키지 않았고, 조약에 충실하지 않았다고 하는 조선인들의 생각은 정당합니다. 그러나 조선인들의 연약함으로 인해 저들이 할 수 있는 힘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한부선 선교사님이 이 보고서를 미국 정통장로교회 선교부로 보낸 때가 지금으로부터 55년 전, 1950년 4-5월쯤으로 기억 한다. 얼마 안 되어 한국에는 6.25라는 동존 상잔의 비극이 일어났다. 소위 미국의 한반도 방위 라인 후퇴 발표와 맞물려, 소련의 팽창 전략의 일환으로 김일성이 밀어붙이기에 승산을 건 오판에서 비롯한 우리 민족의 비극 말이다.
이것을 내다본 한부선 선교사님은 보고서에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는 제목을 붙였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자 아벨을 찾는 하나님의 추궁에 대한 궁색한 답변이다. 한부선 선교사님은 미국의 크리스천 양심들을 일깨우려 한 것이다. 일촉즉발의 전쟁을 코앞에 둔 ‘한반도 아우’를 지켜야할 책임이 ‘미국 형’에게 있지 않느냐 라는 의미로 가인의 첫 인류 살인 사건에 빗대서 질책한 것이다. 왜 미국에 책임이 있는가? 1950년 당시로부터 뒤돌아 본 70년 전 조미통상수호 조약에 담겨 있는 약속 때문이다.
이 보고서를 읽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내 기억의 필름을 되돌려 보았다. 1975년, 유신 반대 데모가 한창일 때, 미국의 역할에 대해 학생들은 의심을 품고 있었다. 한일 합방이 미국이 조선과의 신의를 헌신짝처럼 벗어던진 결과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한부선 선교사님의 보고서를 통해 확인했던 것이다. 대한민국 현대사는 미국의 아름다움(美)만 가르쳤지, 강대국의 속마음을 읽을 능력을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한부선 선교사님의 글은 충격이었던 것이다.
한부선 선교사님은 1940-41년에 만주에서 신사참배로 만주의 하얼빈 감옥에서 옥살이를 한 경험이 있었다. 불과 9년 전의 일이니 얼마나 기억에 생생했을까 상상할 수 있다. 그 전에 1939년 한부선 선교사님은 봉천노회가 자기를 제명하는 경험도 당하였다. (그 사유에 대해 노회 기록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한부선 선교사님이 조미통상보호조약을 들어 미국 정부를 질타하고 미국의 기독교인들의 각성을 촉구한 것은 언약 사상과 신앙에 기초한 것이라고 본다. 그는 1936년 이후 만주 지역에 교회를 개척할 때 혼자서 28 교회, 800여 교인들을 돌보았다. 그리고 정식 교인이 되려면 언약도(言約徒: 언약을 지키는 무리)가 되어야 한다. 요즈음처럼 단순한 세례를 받고 일정기간이 지나서 교인 (member)이 되는 것과 질적으로 틀린다. 교인 즉 멤버는 교회에서 권리를 주장할 뿐 아니라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멤버십에 대해 권리와 더불어 철저한 의무 사항이 뒤따르게 마련이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당시 만주 유랑민 한국교인들에게는 언약도란 생소하였을 것이다.
어쨌든...이런 아픈 역사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나?
우리의 정체성이 두 동강 나, 반쪽으로 축소된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남한의 한 강변 도시에 태어난 사내다.
너는 누구인가? 너는 북한의 한 산간 촌락에 태어난 계집애다.
나는 네가 그곳에 태어났다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너도 내가 휴전선 남쪽 어느 곳에서 자랐다는 것을 상상 못했을 거다.
나의 조국은 휴전선 이남뿐이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너는 휴전선 이북이 너의 땅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겠지.
나는 휴전선 이북이 우리가 되찾아야할 땅, 회복의 대상으로 보았고,
너는 휴전선 이남에 미군을 쫓아내고 해방시켜야 할 땅으로만 보았을 뿐이다.
둘이 합하여 하나가 될 수 있다는 패러다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요받으며 살아왔다.
이름 하여 너와 나의 세계관은 ‘반쪽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장애인의 그것이다.
내 머리 속에는 한반도 허리 윗부분이 자리 잡지 못했다.
너의 뇌구조 속에는 한반도 허리 아래 부분이 잘려 나간 지 오래다.
누구 때문에?
왜 우리는 같은 피가 흐르고 말이 동일한 이쪽저쪽 사람들을 우리의 세계관에서 지웠는가를 질문하지 않는가!
나한테 너가 없고, 너한테 내가 없이 어찌 하나가 될 수 있나!
그러니 Am I Brother"s Keeper?라는 궁색한 답을 오늘도 우리는 토해내고 있다.
한부선 선교사님이 원했던 바,우리는 서로 covenantal partner가 될 수 없을까? (쥬빌리)
(2005. 5. 19. 아틑란타 기쁨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