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저주 받은 36-38세 - 한겨레신문

일반자료      
쓰기 일반 자료 초기목록
분류별
자료보기
교리 이단, 신학 정치, 과학, 종교, 사회, 북한
교단 (합동, 고신, 개신, 기타) 교회사 (한국교회사, 세계교회사)
통일 (성경, 찬송가, 교단통일) 소식 (교계동정, 교계실상, 교계현실)

[사회] 저주 받은 36-38세 - 한겨레신문


‘저주받은’ 36~38살…저주의 끝은 어디
기사입력 2008-12-25 19:15




[한겨레] 98년 졸업문턱에 외환위기 맞은 세대들

취업시장 전전 겨우 자리잡자 금융위기

“결국 임금동결…아이 커가는데 한숨만”

위기의 계절이다.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위기는 금새 우리나라 경제를 강타했다. 기업 부도설이 연일 나오고, 급기야 구조조정이 시작됐다. 지난 1997년 겨울에 닥친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를 떠올리게 하는 시절이다.

외환위기 당시 취업난에 휘말린 대졸 사회 초년생을 가리켜 ‘저주받은 학번’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이제 30대 중반으로 우리 사회 중추를 이루고 있는 그들은 그 시절 못지않은 위기를 다시 맞고 있다. 이들의 인생 역정 11년은 한국 사회의 생생한 역사이기도 하다.

국가부도사태가 임박한 1997년 겨울은 당시 대학 졸업반이던 이효민(37)씨에게 떠올리기 싫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현재 신용카드사에 몸담고 이씨는 91학번 외환위기 세대이다. 이 씨는 졸업을 석 달 쯤 앞둔 1997년 12월4일 조그마한 컨설팅 회사에 입사했다. 첫 출근날 저녁 텔레비전에선 아이엠에프 미셸 캉드쉬 총재와 임창열 경제 부총리가 악수하는 화면이 흘러나왔다.

“경제가 어려워진다는 건 느끼고 있었죠. 당장 과사무실에선 입사 요청서가 뚝 끊어졌으니까요. 그래도 ‘나랏님’들이 어련히 알아서 할까 싶었어요. 위기, 위기 했지만, 내 일 같지 않게 느꼈죠. 전 취직도 했고…. 아이엠에프 총재가 방한했다는 뉴스를 봤어요. 뭔가 돌파구가 마련되나 보다 했죠.”

상황은 급변했다. 10여 일 출근했을까. 회사 상사가 잠시 쉬라고 언질을 줬다. 이씨는 그렇게 첫 일자리와 이별을 해야 했다. 당혹스러웠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그는 젊었다. 노동부 취업지원센터(현 고용안정센터)를 내 집 드나들듯 다녔고, 채용공고를 찾아 신문을 샅샅이 읽었다.

“정말 부리나케 뛰어다녔어요. 그런데 말이죠. 시간이 흐를수록 더 두려워지더라고요. 학교 다닐 때 생각했던, 아니 선배들이 다니던 괜찮은 ‘잡’(일자리)은 없었어요. 졸업(1998년2월)은 다가오는데, 정말 죽을 맛이었습니다.”

밥벌이 전공(통계학)과 무관한 곳에서 시작했다. 대학시절 학비를 벌기 위해 건설 현장 일용직으로 일을 했었는데, 그곳에서 만난 ‘형님’들의 조언으로 따놓은 전기설비·소방설비 자격증이 호구지책이 됐다. 일은 손에 맞지 않았지만, ‘백수’로 지내는 과 동기들을 생각하면 다행이다 싶었다.

“막노동할 때 형님들이 자격증만 빌려주면 1천만원을 받는다고 했어요. 당시 현대건설 대졸 초입 연봉이 1700만원 정도 했거든요. 큰돈이죠. 옳거니 싶어 자격증 땄죠. 근데 그게 본업이 될지는 꿈에도 몰랐어요.”

방황 이제 시작이었다. 이 씨는 1999년 초 1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서울의 한 컴퓨터학원에 들어갔다. 전산 공부를 위해서였다. 당시 김대중 정부는 정보기술(IT) 산업 육성 프로그램을 마련한 게 계기였다.

“저처럼 컴퓨터와는 담 쌓은 사람들도 학원에 부지기수로 몰렸어요. 세 번이나 떨어진 뒤에야 학원에 들어온 사람도 있었죠. 전산 붐(boom)이었죠. 나라에서 아이티 산업 육성한다고 하니 좋은 일자리는 거기밖에 없다고들 생각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전산 쪽에도 괜찮은 일자리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1년 동안 세 번 직장을 옮겼다. 회사를 키우기보단 정부 보조금만 챙기는 곳이 태반이었다. 뿌리내리지 못하고 이직이 잦을 수 밖에 없다 보니 패배감에 젖어들었다. 여자친구마저 떠나갔다.

“당시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법이 뭔지 아세요? 방안 커튼을 모두 내린 채 이불 뒤집어 쓰고 유투(U2)의 ‘사랑이여 나를 구원하소서(Love Rescue Me)’를 반복적으로 듣는 거였어요. 비싼 돈 들여 대학까지 나왔는데, 변변한 일자리도 못 찾고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저 자신이 미웠어요. 패배의식요? 저도 모르게 그런 게 생기더라고요.”

위기 다시 찾아왔다. 2003년에 지금 몸담고 있는 직장으로 옮겼고, 그 사이 결혼도 해 18개월 된 딸아이를 둔 가장이 됐다. 어깨는 더 무거워졌다. 1997년 위기가 취업난으로 다가왔다면, 2008년 금융위기는 ‘임금동결’로 현실화하고 있다.

“몸이 편찮으신 부모님이 걱정이긴 하지만 안정을 찾았다 싶었어요. 그런데 서브프라임(미국에서 저신용층에게 판매된 주택담보대출) 위기네 뭐네 하더니 또 금융위기가 오더라고요. 제 인생엔 다시는 없기를 기원했는데도 말이죠. 회사는 당장 임금을 동결시켰어요. 아이를 낳고 해서 돈 들어갈 곳은 많은데, 걱정입니다.”

이씨는 요즘 외벌이를 선택한 것이 잘한 일인지 싶다. “결혼한 지 3년이 넘도록 아이가 안 생긴 탓에 아내더러 직장을 그만두게 한 게 잘 한 일인지, 요즘 들어 괜히 후회가 돼요. 직장을 그만둔 덕택에 아이가 생긴 것은 축복이지만, 외벌이를 하다 보니 돈이 안 모여요. 노후는커녕 힘들게 얻은 딸아이 뒷바라지라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고민이에요.”

꿈 뭐냐고 물었다. “내 집 장만이죠. 금융위기가 좋은 점도 있더라고요. 불과 1년 전만 해도 집값이 너무 비싸 내집 마련은 영영 어려울 줄 알았는데, 금융위기 덕택에 희망이 보입니다. 아직 모아놓은 돈은 부족하지만 저한테도 한번쯤 기회가 있겠죠. 전세 6천만원 집에 평생 살 수는 없잖아요. 아이도 커가는데….”

김경락 기자 sp96@hani.co.kr

세상을 보는 정직한 눈 <한겨레> [한겨레신문 구독 | 한겨레21 구독]

ⓒ 한겨레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