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화란과 한국의 개혁주의 역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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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목표는 진보신학이 원하는 사회역할론으로 나가는 글입니다.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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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개혁주의자여, 통일 물꼬를 터라
네덜란드 칼빈주의자,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국가 번영 주인공 돼
평화통일과 사회통합은 한국교회 교인이 반드시 성취해야 할 과제
2008년 07월 01일 (화) 15:01:01 기독신문 ekd@kidok.com
"특별기고" 역사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네덜란드 독립과 한국의 평화 통일
▲ 안인섭 교수 (총신신대원 ·교회사)
I. 들어가는 글
풍차와 튤립의 나라! 이 네덜란드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는 개혁신학의 요람으로 유명하지만, 일반 국민들에게는 2002년을 기점으로 그 시각이 크게 달라졌다. 그 반전은 한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개최한 월드컵에서 일어났다. 월드컵 본선에서 단 한 번도 이겨보지 못했던 대한민국이 세계 4강이 되어 "꿈은 이루어진다"는 격언을 만들어 내면서, 이 작은 네덜란드는 히딩크 감독의 나라로 주목을 받았다. 한국뿐 아니라 호주와 러시아 등 대단한 평가를 받지 못하던 축구팀들을, 장래성 있는 선수들이 가득 찬 강력한 팀으로 탈바꿈하게 만든 히딩크의 놀라운 리더십의 이면에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오히려 귀한 열매를 만들어 내는 화란인들의 고난 극복의 역사와 지혜가 엿보인다.
II. 칼빈주의 사상과 네덜란드의 독립
네덜란드는 지리적으로 독일과 프랑스, 그리고 바다 건너 영국이라고 하는 소위 유럽의 빅3 (Big Three)에 둘러싸여 있는 조그마한 나라에 지나지 않는다. 인구는 약 1600만 명으로 서울과 주변의 위성도시 인구를 합친 정도가 될까 말까 하다. 게다가 이 네덜란드는 늘 땅이 물에 잠기는 지리적으로 열악한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이 나라는 지정학적으로, 또 문화 교류사적으로는 매우 중요한 요지였다. 유럽 대륙에서 영국과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러시아로 나가려면, 반드시 네덜란드를 지나가야 했다. 또 해양에서 대륙으로 들어가는 진입로였다. 이런 중요한 위치는 오히려 네덜란드를 17세기까지 신성로마제국의 식민지로 남아 있게 만들었다.
사실 이 네덜란드가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독립을 하겠다고 각성하게 된 것은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에 존 칼빈(John Calvin)의 신학 사상이 소개되면서부터다. 네덜란드 칼빈주의자들은 1565년 헤이제(Geuze) 동맹을 결성한 이후 1568년에서 1648년까지 무려 80년에 걸친 용맹한 반-가톨릭, 반-스페인 독립전쟁을 전개하였다. 이때부터 네덜란드 독립운동은 강력한 칼빈주의 신학을 세우자는 주장과 거의 동일한 의미가 되었다. 결국 이 작은 나라 네덜란드는 17세기에 이르러 신앙적으로 칼빈주의를 그 기반으로 하는 네덜란드 공화국을 수립하면서, 황금의 시대라고 지칭되는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이 시대는 문화가 꽃피웠던 관용과 평화의 시대였다. 이런 역사적 전통 위에서 독립 후 360여 년간 네덜란드에서는 전통적으로 칼빈주의가 정치와 사회를 이끄는 동력이 되어왔다.
신학적으로 살펴보면 칼빈주의 5대 교리는 바로 이 네덜란드의 독립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화란에 전파되었던 칼빈의 신학은 보다 성숙되어1618~1619년에 화란의 도르트에서 칼빈주의 5대 교리로 꽃피웠던 것이다. 이 칼빈주의 신학 사상은 네덜란드 해상 상인의 배를 타고 페테스부르그와 스칸디나비아 반도뿐 아니라, 전 세계로 확산되어 네덜란드는 칼빈주의를 실어 나르는 수레의 역할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다해 왔다.
III. 한국 기독교인들의 통일에 대한 비전
눈을 돌려 한국을 생각해 보자.
먼저 네덜란드와 한국은 지정학적이고 역사적인 면에서 매우 유사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최근에 북핵 문제에서 잘 드러나듯이, 세계의 시선이 모아지고 있는 한반도는 남한과 북한뿐 아니라 주변의 Big 4, 즉 미국, 일본, 중국 그리고 러시아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수렴되는, 작지만 중요한 요충지이다. 아시아 대륙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교량 역할을 하는 핵심적인 곳이기 때문에, 해양 세력이 대륙으로 뻗어가려고 할 때나, 대륙의 강국들이 힘을 키워 바다로 나아가고자 할 때, 한국은 언제나 긴장의 근원지가 되어왔다. 이런 지정학적 위치는 삼국시대 이후 고려시대나 조선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주변의 강대국들이 한국의 역사에 깊이 개입하도록 만들었다.
만약 우리의 시선이 여기에서 그치게 된다면, 작아서 서러운 것이 한국의 운명인 것처럼 체념하게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결단코 그렇지 않다. 역사는 보는 시각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도출한다. 만약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주어진 환경을 오히려 잘 활용하면서 선명한 비전을 갖게 된다면, 미래의 역사는 새롭게 창조될 수 있다. 마치 히딩크 감독의 리더십이 무기력 했던 팀을 진취적인 승리의 주역으로 바꾸었듯이 말이다.
한국의 개신교를 회고해 보면, 120여년 역사의 절반(1884-1945)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 하에서 진행되었다. 한국 교회의 그 나머지 절반의 역사(1945-현재)는 한국의 분단과 통일의 과정 위에서 전개되고 있다. 과거 일본의 식민지 지배 시대에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적 민족 운동에 헌신했다. 비록 소수이기는 했지만, 신사참배 반대를 통해서 신학적, 민족적 기개를 세우기도 했다.
마침내 한반도는 1945년에 해방이 되었다. 그러나 현재까지 세계에서 유일하게 냉전으로 인한 분단국가로 남아 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존엄성은 심각하게 도전을 받아 왔다. 그렇다면, 분단과 통일 준비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재의 한국 기독교인들은 당연히 남북한의 평화 통일에 우선적인 가치를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마치 식민지배 시대에는 신사참배 반대가 소중했듯이 말이다.
통일된 한국이 대륙과 해양의 강대국들의 역학 관계 속에서 능동적인 평화의 매개 역할을 할 때, 건강하게 세워진 한국의 개혁주의는 그 신학 선교의 사명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IV. 칼빈에 근거한 통일을 위한 교회의 역할
17세기 네덜란드의 독립과 21세기 한국의 통일에 있어서 기독교인들의 소임이 중요하다고 할 때, 필자는 교회사가로서 16세기 칼빈의 제네바라고 하는 실제 역사 속에서 그 한 모델을 찾아보기 원한다.
먼저 사도행전 2장에 등장하는 초대 교회의 모습에 대해서 칼빈은 "그리스도의 왕국의 살아 있는 그림"이라고 격찬하고 있다. 특히 교회가 "전적으로 힘써야" 할 것들이 42절에 등장한다. 이 중에서 처음 등장하는 "사도들이 전해 준 말씀"과, 끝에 나오는 "기도"는 명확히 이해가 된다. 문제는 그 가운데 있는 구절들이다.
16세기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는 제롬(Jerome)의 불가타(Vulgate) 성경을 읽고 있었는데, 그들은 가운데 구문을 "떡을 떼는 성도의 교제"(communicatione fractionis panis)라고 해석했다. "교제"(commnicatio)는 독립적인 의미를 갖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14세기 네덜란드에서 시작되었던 Devotio Moderna(공동생활형제단)에서 영향을 받은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는, ad fontes(근원으로)의 정신에 따라 직접 헬라어 성경을 읽었다. 그는 사도행전 2장 42절에 등장하는 교회가 힘써야 할 것을 네 가지로 교정했다.
참으로 다행스럽게, 칼빈은 이 에라스무스가 편찬한 헬라어 성경을 손에 쥘 수가 있었다. 따라서 칼빈은 교회가 전적으로 힘써야 할 요소를 ①사도들의 가르침 ②교제 (communicatio) ③떡을 뗌 (fractio panis) 그리고 ④기도함으로 보았다. 이에 대한 칼빈의 해석에 의하면 "교제"는 "자선 사업"을 뜻하는 것으로, "떡을 떼는 것", 즉 "성만찬"을 의미하는 것과 각각 독립적인 요소가 된다. 그는 43절에서 47절에 나오는 공동체 안에서 서로 구제하고 섬기는 것을 잘 포착한 것이다. 요즘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사회 복지 사업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칼빈의 뛰어난 점은 자신의 신학을 현장에서 그대로 실천하는 데 있다. 1530년대에 개신교를 믿는 독립 도시국가가 된 제네바는 1535년에 "Hospital General"(의미를 따라 현대 언어로 해석하자면 종합복지관)을 세웠다. 칼빈은 이것을 강화하여 구제 제도를 개혁했다.
우리의 주제와 관련하여 주목을 끄는 것은, 1545년부터 칼빈에 의해서 시작된 "Bourse Francaise"(프랑스 구제연금)이다. 프랑스에서 박해 받던 칼빈주의자들이 같은 불어권인 제네바로 몰려 왔을 때, 칼빈은 앞장서서 이 난민들을 돕고 섬기기 위해서 이 기구를 설립했던 것이었다.
이상과 같은 칼빈의 신학과 사역은 통일을 준비하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해 준다. 오늘날 남북한의 통일은 단순한 정치적인 체제의 통합에 국한되는 사안이 아니다. 60년 동안 서로 다른 사고 체제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문화적이고 심리적인 괴리감이 크게 존재한다. 통일에 대한 남남의 갈등 또한 손쉬운 점은 아니다. 특히 현격한 경제적 차이는 남한의 국민들에게 큰 숙제거리를 제공한다.
이 모든 문제들이 종합적으로 통합되고 조율되어야 한다고 할 때, 칼빈은 남한의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유익한 조언을 하고 있다. 대 전제는 이것이다. 한국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야 할 곳 중에 하나가 "통일"이라고 하는 것이다. 평화적 통일과 사회의 통합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는 믿음을 요청한다. 더 나아가 교회가 전적으로 힘써야 할 사역 중에 하나인 "교제"(communicatio), 즉 자선과 구제를 통해서 한국 교회는 북한의 백성들을 돕고 새터민들을 잘 섬겨야 할 것이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프랑스 난민에게 헌신했듯이 말이다.
V. 나오는 글
개혁주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나라는 창조부터 종말까지 점진적으로 성취되어 간다고 고백한다. 인간의 모든 역사 중에서 단 1센티미터라도 하나님의 다스리심(Regnum Dei)이 미치지 아니하는 곳은 없다. 네덜란드라고 하는 작은 국가가 갖는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칼빈주의자들은 국가 독립과 번영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칼빈주의 교리가 확립되어 전 세계에 전파되었다. 그렇다면 한국의 칼빈주의자들은 남북 통일을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한국 교회는 통일의 과정에서 신학적으로 또 실제적으로 어떤 일들을 감당해 내어야 할까? 이 역사적 과제는 하나님의 통치를 금과옥조처럼 소중히 여기는 한국 개혁주의자들의 어깨 위에 놓여서 미래를 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