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기독교와 신비주의
현대 기독교와 신비주의
박순용 목사/하늘영광교회/2008.6.1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14: 8-9)
Ⅰ. 서론 : 왜 갑자기 신비주의인가?
요한복음의 이 본문에서 빌립이 예수님께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 주소서’라는 질문을 합니다. 이 질문은 바로 신비주의적인 질문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빌립에게 ‘너의 추구가 참 갸륵하구나.’ 하고 칭찬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책망하고 있습니다. 빌립이 시도한 신비주의적인 추구는 역사 속에서 계속되었고, 지금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신비주의자들이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을 보고 대변하여 그와 합일 하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신비주의 문제가 크게 대두 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반드시 이 문제를 잘 분별하여 알아야 합니다. 한국교회의 일부의 목회자들과 신학대학교 교수들이 신비주의를 마치 한국기독교의 위기의 대안으로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과연 그러한 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1. 신비주의란 무엇인가?
신비주의에 대한 정의는 신비주의가 개인의 주관성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그 정의도 다양합니다. 존 맥아더 목사의 정의를 인용하면 ‘신비주의란 역사적 사실이나 하나님의 객관적인 계시보다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직관이나 경험에 의해 하나님, 또는 궁극적인 실재에 관한 지식을 직접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비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목적하는 ‘하나님과 연합하는 체험과 그 신비 체험을 통해 얻은 지식이 인간의 지각올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의미를 이성으로 제대로 포착하는 것은 물론이고 말로서 제대로 설명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라고 말합니다. 문제는 이들이 하나님을 체험하고 초월적인 지식을 얻었다는 것이 모두 자신들의 감각, 감정에 의한 것이어서 각각 설명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서 자신이 깨닫고 경험한 것을 신비로 유지하려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 l9세기의 탁월한 신학자 B.B. 워필드가 ‘그것은 사실 신비주의자들이 말로 표현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무언을 고집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끝없이 깊은 침묵과 묵상 속에서 자신의 감정과 감각을 발견하려고 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신비주의자들은 자신이 심연에 접해있을 때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고 말하면서 오히려 그것을 신성시 합니다. 그런데 그 막연한 감정과 두려움을 신성시하다보니 그때 보거나 경험한 것을 신으로 간주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힌두교의 브라마가 될 수도 있고 제우스가 될 수 있고 알라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굳이 설명하지면 성령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모든 종교의 신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안감정에 근거한 신비주의적인 하나님과의 합일은 이런 면에서 너무 위험하고 모호하다는 것입니다.
2. 신비주의와 기독교의 차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두 종류로 나눕니다. 바로 계시의 종교와 비계시의 종교입니다. 계시 종교는 하나임으로부터 기인했다는 것이고 비계시의 종교는 사람들의 사상으로부터 기인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입니다. 따라서 권위의 종교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해 온 신비주의는 계시가 없는 정신의 종교요, 따라서 권위가 없는 종교입니다. 성경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비주의자들은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정신의 종교요, 감정과 감각의 종교 방식을 따르는 것은 기독교가 가진 고유하고 특별한 권위를 스스로 내던지는 것이요, 무시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안에 들어온 신비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원천인 성경, 곧 기록된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객관적인 계시를 무시하거나 부수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대신 자신의 종교적 감정과 체험으로 대치시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추구해 나가는데 있어서 자신의 내부, 종교적인 감정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기독교는 모든 종교적인 체험을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해석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체험을 인도받고 지시받으며 교정함으로서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을 표준으로 삼습니다. 신비주의자들의 가장 큰 문제는 긍정적인 요소를 일부분 담고 있다손 치더라도 결정적인 결함이 바로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기초와 표준에서 빗나갔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계시보다 자신들의 감정에 근거한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Ⅱ. 본론 : 기독교 플러스 신비주의
1.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원인에 대한 여러 설명들
왜 조국교회에 이렇게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일들이 불 일 듯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영성에 대해 간단한 글을 쓴 김상재 목사의 말을 인용하면 ‘과거의 전통적인 언어와 메시지와 제도적인 틀과 신앙적인 사고와 예배 방식과 사유로서는 오늘날의 다양한 갈등과 욕구들을 효과적으로 치유하고 섬겨주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 쉽게 말해서 계속 전해오는 메시지와 제도와 예배 방식을 통해서는 현대인들의 욕구를 채워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장신대의 유해룡 교수는 ‘관상기도에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오늘날 한국교회 성도들이 기도생활에 대한 열망은 전과 다름없는데 기도생활에 대한 만족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만족도의 충족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영성훈련과 관상기도를 크게 보급하고 있는 최일도 목사는 ‘그동안 한국교회가 외적 성장에 주력했었는데 이제 성도 개개인의 내적치유와 내면적인 성숙에 심을 가지면서 카톨릭 교회에서 이야기 되어 왔던 영성 수련과 관상기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말하기 시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신대의 권명수 교수는 ‘관상기도를 더 많이, 더 지주 실천하면 할수록 한국의 기독교인이 점점 성숙해지고 교회가 건강한 방향으로 나갈 것’이라고 진단했습니다.
모두 요즘의 신비주의적인 추세의 원인을 한국교회의 부정적인 현실과 상황 때문이고 그것에 대한 대안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중세 교회에서 신비주의가 크게 대두되었던 것도 당시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과 반발에 의해서 일어났다고 일반적으로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근본적인 이유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2. 그러나 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1) 교리보다 개인의 체험을 선호하는 인간의 본성과 무르익은 시대적인 분위기 때문
그러면 무엇이 더 근본적인 원인일까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교리보다 개인의 체험을 선호하는 인간의 본성과 무르익은 시대 분위기 때문이라고 진단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말씀 속에서 은혜를 경험하고 그것을 탐구하는 것 대신에 개인적이고 신비적인 체험을 추구하는 대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같은 현상은 세계적인 추세이고 그 흐름을 주도하는 중심에는 북미가 있으며, 미국과 캐나다의 영성가들이 큰 역할을 감당하고 있으며 한국교회가 그 뒤를 바짝 쫓고 있습니다. 1900년에 죽은 반기독교적인 철학자 니체가 현재 야기되는 서구 교회의 이런 모습을 미리 예견하며 ‘교리적인 기독교는 종말을 고했다’고 탄식하면서 ‘서구는 이제 새로운 불교를 정착시켜야 할 것’이 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기독교에서 말하고 예배하는 하나님이 죽게 되면 신(神)들이 비같이 내리게 될 것’이라고 하는 놀라운 예견을 했습니다. 니체는 ‘신(神)은 죽었다’고 말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가 말한 ‘하나님의 죽음’은 ‘서구 사회는 모든 진지한 산학적인 자각이 끝났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사람들의 의식가운데 하나님의 존재의미가 없어지게 될 것’을 ‘신은 죽었다’라는 말로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죽고 나니, 교회가 교리를 내어 던지고 나니, 신들이 비같이 내리게 되고 허무주의가 활발하게 활동하게 될 것이며, 새로운 불교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견했던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은 여러 신(神)들 중의 하나로 여겨지는 일이 생겼으며, 기독교는 서서히 내면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관상기도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내면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입니다 . 니체가 말한 것처럼 새로운 불교의 양태로 발전한 것입니다. 교리가 교회에서 사라지고, 그것을 말해도 죽은 교리가 되다 보니까 뒤따르는 것은 새로운 불교가 교회 안에 태동되는 일이 있게 된 것입니다.
정말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전통적으로 믿어온 하나님’이 죽고 ‘교리’를 버리게 되자 니체 말대로 신들이 비처럼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니체가 말해서가 아니고 기독교 신앙의 본성상 그렇게 됩니다. 교회가 교리를 버리고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않으면 다른 신들로 채워지거나 하나님을 바꾸는 일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체스터톤은 ‘성경의 하나님을 부인하게 되면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이나 다 믿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2) 사람을 위하는 신학과 가르침 때문
마이크로 호튼은 현재 미국교회가 다시 영지주의로 돌아가서 감정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이고 뉴에이지 사상에 물들게 된 그 최초의 원인을 ‘하나님 주권 교리’와 ‘은혜의 교리’를 거부한 데에서 찾고 있습니다. 미국이 정착한 초기 청교도들이 붙들었던 ‘하나님 주권’과 ‘그의 은혜에 대한 말씀’으로 균형을 이룬 그들에게서 ‘코람데오’ 곧 ‘하나님 앞에서라는 의식’을 가지고 삶을 살면서 자신의 전 존재를, 몸과 마음과 영혼을 하나님께 바쳤던 그들의 모습에서 이탈해서 한걸음 뒤로 물러나서 ‘사람을 위한 신학으로 점진적으로 발전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조지 횟필드는 다시 그런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원죄와 하나님 주권과 칭의 교리, 특별히 조지 휫필드는 선택의 교리를 영적 각성을 외치는데 메시지로 사용하였습니다. 이런 선포를 통해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끌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각성하게 하면서 그런 교리에 의해서 영혼들이 회복하고 각성된다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찰스 피니를 중심으로 한 부흥운동에서 메시지가 하나님에서 인간으로 바뀌게 됩니다. 에드워즈를 중심으로 한 1차 대각성 운동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를 강조점에 두었는데, 그러나 피니를 중심으로 한 2차 대각성 때는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올 해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는 메지지가 주류를 이루고 강조점을 두었습니다. 이것은 신학과 교리에서 감정으로 변화하는 장면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으로 계속 발전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주권과 원죄와 칭의 교리와 하나님을 향한 전인적인 삶이 무너지자 알미니안 신학과 함께 개인적이고 감정적주의적인 신앙이 자연스럽게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찰스 피니 이래로 교회는 사람의 전존재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감정을 변화시키는데 초점을 두는 현상이 교회에 자리매김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신비주의적인 추구는 간단히 말해서 객관적인 진리를 뒤로하고 인간 중심의 신앙과 감정에 의한 신앙으로 변화된 것에 따른 것입니다.
3. 신비주의자들이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해 갖는 여정 또는 단계들
일반적으로 신비주의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해서 갖는 여정을 3단계로 구분을 하는데 그것은 정화, 조명, 하나님과의 연합을 말합니다. 첫 번째로 ‘정화’라는 것은 깨끗케 하는 단계로서 자아를 살피고 회개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거룩한 삶으로 나가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서 사람들은 물질과 육적 욕망을 포함해서 세상적인 것들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고 죄를 죽이는 일을 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고행, 금식을 하기도 합니다. 둘째로 ‘조명’은 내적인 소리와 통찰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때 사람들은 참된 영적 진리를 알고자 애를 쓰고 하나님의 사랑과 아름다움의 초점을 맞추고 영혼의 내면의 눈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상상하려고 힘쓰면서 하나님을 묵상합니다. 이런 모든 추구와 알고자 하는 노력도 이성을 사용하기보다 ‘직관적인 앎’을 추구합니다. 이성이란 것을 이야기 하지만 그래도 최종적인 결정은 ‘직관적인 앎’이 감정에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깊은 것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관상기도는 바로 이 조명 단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신비주의자들은 조명 단계서부터 하나님과 합일하여 황홀경으로 들어간다고 하면서 이 단계를 중요시 여깁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과의 연합은 앞의 것을 실현하게 되었을 때 사람들이 하나님과 합일하게 되는 단계입니다. 이것이 모든 신비주의자들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이것을 토마스 아퀴나스와 그 몇몇 사림들은 지복의 비전, 곧 아름다우심과 엄위로우심과 영광과 사랑 가운데 하나님을 보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되는 것으로 말을 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과 합일하게 되면 그 순간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 적인 황홀경, 무아경올 경험하게 되고 모든 장애물들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며 자신이 신에게 전가되어 초자연적인 통찰력을 가진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 속에서 이들은 죄와 은혜, 하나님의 성육신 같은 진리를 다 뒤로 해버린 채로 아무런 중개 없이 직접 하나님과 합일 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이성적인 사고과정이나 정상적인 자각 경험, 일종의 이런 지각 활동들, 이런 경험을 철저히 배제하고 조명과 하나님과 연합의 과정 속에서 무척이나 사랑을 강조하고 인간의 감정에 의존합니다.
4. 하나님 경험 여정 속에서 가장 중시하는 정서
신비주의자들은 무척이나 사랑을 강조하고 인간의 감정에 의존합니다. 만약 지금 출판된 영성에 관한 책들을 보면 사랑에 대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말하는 사랑의 뿌리는 신비주의적인 사랑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플라톤이 인간의 육체에 갇힌 영혼이 추구하는 사랑, 곧 에로스를 말하는 것입니다. 신비주의자들이 하나님과 연합하기 위해서 플라톤이 말하는 에로스, 헬라 신비주의자과 신플라톤주의자들이 강조하는 그 사랑을 느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느낀다고 합니다. 지금도 영성 훈련하는 사람들이 관상과정을 겪으면서 무엇인가 하나님의 사랑을 느낀다고 하면서 끝없이 감각적이고 감정적인 느낌에 의해서 매력을 느끼게 됩니다. 신비주의 또는 영성을 말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이 관상의 모든 과정을 사랑의 과정으로 말 하는데 이것은 사실 플라톤 철학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인 것 같지만 일단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것을 구별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에 이미 그런 영혼의 숭고한 지식으로서 간주된 헬라 철학의 에로스 사랑, 이것이 영지주의적인 부류들의 영향을 받아서 특별한 지식인 것처럼 말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지주의자들이 말한 그노시스 곧 지식은 플라톤이 말한 에로스(육신에 갇힌 영혼이 추구하는 에로스)와 같은 것임을 알고 정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을 말할 때 헬라 철학자들이 말한 에로스와 구별해서, 또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말하는 그노시스 지식과 대비해서 ‘아가페 사랑’을 말했던 것입니다. 우린 바울이 왜 고전 13장에서 ‘아가페 사랑은 사라지지 않지만 지식은 폐할 것이다’라고 말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신비주의자들이 추구했던 그 지식, 에로스적인 사랑, 영혼의 숭고한 사랑과 구별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신비주의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사도 바울이 배격하고 정죄한 영지주의자들의 지식, 곧 영혼이 갖는 신비적인 지식이요, 더 높은 지식, 헬라 철학자들이 말한 육체에 갇힌 영혼으로 하여금 영원한 곳으로 나가게 하는 에로스 사랑을 그대로 차용해서 하나님과 합일을 추구하는 것은 뿌리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비록 사랑을 이야기하고 기독교의 양태를 말하고, 예수를 이야기해도 헬라 신비주의자들과 영지주의자들이 말하는 에로스는 인간 중심적인 획득적인 사랑이요 신에게 이르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사랑이며 자기중심적인 사랑입니다.
5. 복음주의자들의 신비주의 수용 과정
종교개혁 이후에 복음주의 진영 내에서 신비주의적인 경향을 갖도록 영향을 미친 사람들과 무리 들을 살펴보면 먼저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17세기에 이성을 무시한 개인의 신앙 감정을 중시한 ‘독일 경건주의자들’을 들 수 있습니다. 18세기로 넘어와서는 윌리암 로, 또 그에게 영향을 받은 요한 웨슬리, 어떤 학자는 웨슬리가 복음주의 안에서 가지고 있는 장점과 신비주의의 장점을 잘 취합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너무 긍정적으로 웨슬리를 본 것입니다. 왜냐면 웨슬리가 주장하는 성화론인 ‘그리스도인의 완전교리’가 바로 신비주의의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9세기에 미국의 찰스 피니와 영국의 케직 사경회 그룹들의 성결운동이 신비주의적인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뒤를 이어서 20세기 초에 케직 성결운동에 열심이었던 제스판 루이스, 또한 그에 영향을 받은 워치만 니, R.A. 토레이 신부 이런 사람들이 다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면 됩니다.
20세기 중반이후에 가장 크게 개신교회에 신비주의를 열어놓은 사람은 리차드 포스터입니다. 리차드 포스터는 1960년대에서 70년대에 카톨릭 교회에 신비주의를 대중화하는데 기여를 했던 ‘토마스 머튼’의 사상에 많이 동조해서 신비주의를 개신교 안에 전한 ‘개신교의 토마스 머튼’입니다 20세기 후반 이후에 지금까지 리차드 포스터 뒤를 이은 유명한 영성 작가 들이 그 역할을 개신교 복음주의 안에 신비주의를 흡수하는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개신교 안에 신비주의가 자연스럽게 들어오는데 기여를 한 사례 중 하나는 개신교 출판사들이 번역하고 있는 신비주의적인 글과 그 영향을 받아 쓴 고전들의 번역본들입니다. 일반 신자들은 개신교의 출판사에서 출판되니까 문제가 없다고 접하게 되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월리암 로의 책이나 토마스 아캠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이런 책이나 은성 출판사에서 나오는 옛날 신비주의자들의 책들, 잔느 귀용 부인의 책들, 제스펜 루이스의 책들, 토마스 머튼의 책들 이것이 다 개신교에서 출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이런 것들이 어떤 배경이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Ⅲ. 결론과 적용 :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모든 ‘내적 체험과 추구’를 ‘외적인 권위’에 복종시켜라!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내부에서 발견하는 것, 또는 체험하는 것, 추구하는 것을 외적인 권위에 철저하게 복종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외적인 권위는 하나님의 계시를 말하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신 것과 십자가와 부활,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대속 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하셨다 하는 사실들 이런 외적인 권위에 우리의 모든 발견과 체험과 추구를 굴복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발견하고 체험하고 추구하는 것은 우리 내면에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 안에서 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 다시 말해서 나의 주관적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과 그의 행하심, 특히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들 그런 것들을 더 알고 체험하고자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적으로 알아야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계시 안에서입니다. 내면의 무엇으로 신앙생활하려고 하지 말고 외적인 권위에 향상 눈을 고정시키고 특히 우리 주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 무한한 것에 온 마음과 시선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벗어나면 아무리 놀라운 체험을 해도 길을 잃게 됩니다. 아니 기독고가 아닌 곳으로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고 경험하도록 주신 은혜의 수단들에 충실하라!
신비주의인 현재 기독교회의 추세에 대해서 우리들이 확고히 해야 될 것은 하나님께서 우이레게 나타내시고 은혜주시며 자신을 알고 경험케 하시는 수단, 바로 하나님께서 정하여 주신 은혜의 수단에 충실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하나님 이해에 대한 크게 두 기둥이 있는데 초월성과 내재성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나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 했던 것처럼 보면 죽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초월적이신 분입니다. 그 엄위로우심을 누구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사도 요한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뵐 때 죽은 자 같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육신을 입고 이 땅에 계셨던 분이라도 그분 자체에 부활하신, 승천하신 그 분 속에는 초월성이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자기 백성들 가운데 사람으로 오셔서 가르치시고, 섬기시고, 인도하시고 역사하시는 내재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신비주의자들이 크게 오해하는 것 중에 하나는 내재성만 주장합니다. 자기들이 하나님께 합일하다가 죽을 것은 생각 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다가오시기 위해 정하신 수단이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신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더 많이 경험하고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 자신이 정하신 그 수단에 우리가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의 수단은 ‘말씀, 기도, 성례’라고 세례 문답에서 이야기 합니다. 이 셋 중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경험하는데 먼저 중시할 것은 말씀과 성례입니다. 기도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말씀과 성례의 기초위에서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신비자들은 이 세 가지 중에서 기도를 무척이나 중요시 여기고 말씀, 계시는 뒤로 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주장했던 온혜의 방편들은 이런 것 외에도 묵상, 죄 고백, 훈련, 노동, 금식기도, 공부, 독거, 검소함, 시련 등 이런 것도 다 은혜의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철저하게 자기감정과 자기주관적인 경험들을 따라서 하나님과 그 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만나주시고 은혜를 주시는 수단조차 정해 주셨습니다. 자신의 ‘말씀’을 통해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시어 알게 시고, ‘성례’를 통해서 자신과 연합됨과 은혜 경험을 말씀하셨습니다. 신비주의자들은 하나님을 경험하고 합일하는 도구인 기도를 가장 중시하지만 말씀과 성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하나님을 아는 유익을 얻지 못하면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는 것은 계시 없는 이방 종교인들처럼 모호한 신올 찾고 만나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말씀과 성례의 수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 안에서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3. 영광의 신학을 버리고 십자가 신학으로 살라!
마지막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신비주의의 추세 속에서 점검하여 확고히 해야 할 것은 신비주의를 비롯해서 오늘날 개신교 안에 만연해 있는 이 ‘올라감의 신앙 체계’, 루터의 말로 표현하면 ‘영광의 신학’을 거부하고 그 대신 성경이 말하는 ‘내려감의 신앙 체계’ 곧 ‘십자가 신학’을 가지고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영광의 신학’이라는 것은 루터의 말을 빌리면 ‘벌거벗은 하나님’, 곧 엄위하신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경험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루터는 그것이 인간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고 가능하지도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고 만날 수 있을까? 그것은 오직 십자가 안에서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신학을 통해서 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신학은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와 같이 하나가 된 것이요 죄악 된 인류에게로 내려오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보는 신학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영광의 신학’은 절대 복종 명상 황홀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한다고 말하는 것이고 ‘십자가 신학’은 죄범한 우리에게 하나님 편에서 내려오시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비주의와 그런 신학 체계를 가진 사람들은 아니 오늘날 이 개신교의 추세는 자신들이 올라가는 것, 이 영광의 신학이 근거해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 한국교회나 세계 교회가 크게 이탈하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영광 신학으로 살려고 하지 말고 하늘의 은사를 받고 신비스런 체험을 하는 것도 좋지만 그런 것들보다 십자가 신학에 온 맘을 쏟으시고 바로 약할 때 하나님을 경험 하는 것을 하고자 하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진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