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13. 마지막 사경회
1964년 12월에 김현봉 목사는 조금 감기 기운이 있은채 아현동 집에서 목욕을 하다가 쓰러지면서 뒷머리를 땅에 쳤다. 그때 마침 흥암교회로 사경회 인도차 떠나려던 참이었는데, 곁에서 몸이 불편하니 집회를 연기하도록 전보를 치려고 해도, 아니라고 예정대로 간다고 고집하고 떠났다.
그때 흥암교회 내에는 교회 노선 대립으로 내분이 있었는데, 김현봉 목사는 그 교회 맡은 김조사에게서 그 이야기를 다 들으시고 저녁 집회 후에 밤 늦게까지 김조사에게 훈계하고 어려워도 그 교회에 더 있으라 권면하며 함께 부둥켜 안고 울었다.
밤에 잠잘 때는 방문마다 안으로 문걸이를 만들어 걸고 잤다. 김목사 몸에는 언제나 저고리 안주머니에 수십만원의 거액을 넣고 다녔기 때문이다.
이튿날 새벽 3시 반, 김조사가 방문을 노크해 봤으나 숨소리는 들리는데 대답이 없었다. 문틈을 째고 손을 넣어 고리를 벗기고 김목사를 보니 요 위에 앉아 벼개를 의지하여 기도하시다가 벼개에 의지한채 쓰러졌는데 코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 교회 문제를 걱정하며 철야기도하다가 그렇게 된 듯 했다.
김목사 시중하기 위하여 늘 따라 다니는 간호하는 처녀를 불러 들여 응급주사를 놓고 약을 쓰며, 한편 사람을 시켜 고장난 자전거를 따고 20리 밖에 있는 의사를 불러다 주사를 놓으니 좀 숨이 순조롭고 가래가 나오나, 눈은 못 뜨고 말은 한 마디도 못했다. 반나절 그런 상태가 계속됐다.
할 수 없이 김조사가 목사를 업고 택시 타는 데까지 찾아가는데 목사님의 몸이 어찌도 무거운지 간신히 차에 태우고 "안녕히 가십시오."하니 김목사는 손을 흔들고 있었다.
서울 아현동 사택에 돌아오니 문병객이 계속 찾아들었다. 도저히 안정할 수가 없어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시켰어도 김목사를 아버지같이 따르는 교인들은 거기도 계속 줄을 지어 찾아왔다.
할 수 없이 아무도 오지 못할 비밀 장소로 옮기고 면회사절을 시키고 비대한 몸의 살이 빠지도록 계속 치료하니 좀 회복이 되어 그후 사람의 부축을 받으면서 강단에 올라가 앉아서 설교를 하게끔 됐다.
처음 흥암교회서 졸도했다가 혼수상태에서 의식이 깨어났을 때, 아직 피를 흘리면서도 "참 기쁘다! 예수 잘 믿으라."는 말을 세번이나 되풀이 했다. 측근인들의 추측으로는 그때 김목사는 혼수상태 속에서 낙원을 구경한 것이 아닌가 짐작했다.
김조사는 그때 김현봉 목사가 기도하다 쓰러져 흘린 피를 볼 때 성경에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뜻이 깨달아지더라고 소감을 말했다. 그는 자기를 위해 김목사가 피흘린 것 같이 느껴졌다.
흥암교회 집회는 흐지부지 되고 말았으나 김목사의 피흘려 쓰러지심을 보고 교회 문제는 저절로 서로 오해가 풀리고 화해됐다.
흥암교회 집회 후 3개월 지나, 1965년 3월 12일 오전 9시 50분, 김현봉 목사는 기어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석달 동안 그의 몸은 살이 다 빠져서 임종한 그의 시신은 얼굴도 몸도 작은 소년만치 되어 버렸다.
장례식은 그를 따르던 이병구 목사 집례하에 거행하고, 시신은 생전 김목사 정신 따라 리어카에 실어 끌고 갔다. 김목사는 평소에 교훈하기를 예수 믿는 사람은 장례 때 울지 말라고 가르쳤어도 1200명의 교인들은 리어카 뒤를 따르며 통곡했다.
다시 누가 이런 지도자를 만나겠느냐는 아쉬움에서였다. 시신은 화장을 했다. 그것이 평소 김현봉 목사 정신이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