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11. 그의 책망과 사랑
김현봉 목사는 누가 잘못한 경우에 보통은 책망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냥두기 어려운 경우는 오래 생각하다가 기도하며 벼르다가 듣는 이가 감당할 범위 내에서 책망했다.
교인 중에 아름답지 못한 이야기가 들려오면, 그 교인을 불러다 앞에 앉히고 "요즘 믿음 잘 지키시오?" 하고 물었다. 감히 누구 앞이라고 교인은 일체 사실을 고한다. 다 듣고 나서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이오?" "조심하겠습니다." "안 되지. 집을 팔아라. 교회 가까이 이사할 것이지." 했다.
어느 명령이라고 그 교인은 당장 집 팔아 시키는 대로 이사했다. 김목사는 교인들 집을 될 수 있는대로 아현교회 가까이 모이게 했다.
서울 용산구 남영동에 있는 원성교회에서 김현봉 목사의 사경집회가 있었다. 김목사의 집회는 대개 월요일 새벽부터 시작한다. 그의 집회소식을 들으면 그를 따르는 교역자들은 모두 그 교회로 모여왔다.
당시 A 목사도 그 집회에 참여하여 오전 공부를 끝맺고 화장실에 갔다가 김목사와 마주쳤다. "오후 예배에 오겠오?" "예!"
A 목사는 오후에 명수대에 가서 볼일 보다가 오후 공부시간에는 참석 못하고 저녁 시간에야 집회에 참석했다. 다음날 오전공부 마치고 나서 김목사는 그 목사 보고 "A 목사! 저 있는 방에 좀 오시오." A 목사가 따라가서 강사방에 들어가니 방에는 그 교회 어느 장로도 곁에 앉아 있었다.
김목사 거실에는 어느 때나 먹을 것이 많았다. 젊은 목사들이 들어가면 그것을 내놔 함께 먹는 것이 재미였다. 그런데 그날은 분위기가 달랐다. 김목사는 곁에 앉아 있는 장로 보고 "장로님, 나가시오" 명해 놓고는 "A 목사! 어제 오후 예배에 참석했어?" "예, 어제는 명수대 교회에 갔다가 그만 일에 잡혀서..."
김목사는 A 목사의 변명을 막으며, "아아아아, 내가 그 소리 들으려는 것이 아니오..." A 목사가 변명하려면 김목사는 "아아아"하며 못하게 막았다.
"A 목사님, 직업을 바꾸시오!" 김목사는 기연한 태도로 단도직입적으로 충고하며 얼마나 호되게 책망하는지, "목사가 제 입으로 말해 놓고 제가 지키지 않으면 그 목사가 교인 가르치겠소? 그것이 목사요? 다른 직업으로 바꾸시오!"
이렇게 책망하면서 김목사는 "내가 그 심정을 압니다. 그럴때면 어제 내가 물을 때면 "예!" 할 것이 아니라, "내가 참석하려는데 사정이 좀 있다."고 하는 것이오. 그런 목사 교훈을 누가 받겠소?" "예, 고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오늘날 교회 목사들이 책임없는 말을 얼마나 하는지 압니까? 아무쪼록 죽은 목사 되지 마시오."했다.
그후 김현봉 목사가 세상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A 목사는 뛰어가서 김목사 유해 앞에 꿇어 앉으니 눈물이 앞을 가리웠다. "아, 나를 책망해 주시던 어른이 죽었으니 이제는 누가 나를 책망해 주겠는가?"고 통곡하며 말했다.
김현봉 목사는 "교회에서 사람을 칭찬해 주는 일은 독약을 먹이는 것이지"했다.(눅 6:26)
김현봉 목사는 나이 80이 되어서도 사람들을 대할 때 20대 청년에게라도 반말을 안 쓸 사람에게는 언제나 존대했다. 그러나, 처음에 반말 안쓰다가도 자기 심복이 된 후에는 반말을 썼다.
사람따라 대우가 달랐다. 그런둥만둥 하는 사람에게는 좋던 궂던 무관심 했지만, 책망해야 할 사람에게 대해서는 얼마나 호되게 책망하는지 그 사람이 그 교회에 다시 나올 마음이 없어지리만큼 책망했다. 언제 봤드냐는듯이 사정보지 않고 책망했다.
그러나 그후 다시 불러서 쓰다듬고 위로해 줄 때는 얼음 녹듯 다 녹아지고 나오게 된다. 순종할 때는 자기 간이라도 빼 먹일만치 지극히 사랑했다. 김목사의 사랑받는 비결은 순종이다. 그 교회 교인들은 목사님께 사랑받는 경쟁을 했다. 그것은 첫째는 잘 믿는 일로, 그리고 순종하는 일로이다.
그래서 "성현능지성현(聖賢能知聖賢)"이란 말을 자주 사용했다. 목사들과 장로들도 아현교회에 많이 출석했는데, 김목사는 양(羊)만 거느리는 덕량(德量)보다 이리도 거느리며 양을 만드는 덕량을 갖춰야 이리도 빠져나가지 않는다고 가르쳤다.
아현교회에서는 김목사 말 한번 떨어지면 어디라고 누가 한 마디 말 못했다. 신자들 중에는 김목사를 하나님같이 여길만큼 됐다. 김목사는 들을만한 사람에게만 충고했다. 충고해도 받을 것 같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예 말하지도 않는다.
그러면서도 새로 나오는 교인은 사랑으로 특별 대우했다.
예배드리는 시간에 어린애들이 떠든다든지 울면 벼락이 떨어지나, 새로 나오는 교인의 어린애가 울 때는 아무 말씀도 안 했다. 그의 목회는 능숙능란했다. 개개인의 처지를 잘 알아 그 처지에 알맞게 사랑도 하고 책망도 했다. 그렇게 하니 사람들은 그에게 심복하여 자신의 머리도 깎고 전적으로 그를 따랐다.
아현교회에 다니던 교인 한 가정이 김목사를 버리고 안식교회로 간 일이 있었는데, 그때 김목사는 가난한 그에게 돈 8만원을 주어 보내고는 그 교인이 자기를 떠난 것이 아쉬워 가끔 "아까운 것들!"하고 못 잊어했다.
목사 사택을 찾아간 사람에게는 언제나 먹을 것을 내 놨다. 그는 실과나 단 것을 좋아했지만, 된장국을 잘 끓여주기도 했다.
어떤 교인이 된장국을 못먹는다고 대답하면 "그래, 그래, 된장국에 영양이 많은데..."하며 남의 자유를 존중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교회에서 특별한 행사는 없지만, 김목사는 털신, 목도리 등을 궤짝으로 몇 궤짝씩 사다가 교인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교인들은 존경하는 목사님께 선물받는 일이 기분좋은 일이었지만, 다 일제히 준 것은 아니고, 주일날 예배보고 나서 김목사가 교회 문앞에 섰다가 목사 앞으로 지나가는 교인에게 눈짓을 하면 그가 목사방에 들어가면 거기 집사가 기다리고 있다가 신발 맞는 것 하나씩 골라 신으라 해서 선물로 주었다.
못받은 교인들이 불평도 했으나, 목사님이 골라 선물 주는 상대는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믿음 좋은 사람을 골라 주는 듯 싶었다.
그 밖에도 자기를 따르는 젊은 목사들 중에서도 김목사가 알뜰히 사랑하는 이가 있었고 되는대로 대하는 이로 그 차별이 있었다.
자기가 알뜰히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만날 때마다 "장 가져 가거라, 쌀 가져 가거라." 선심을 썼다.
교회 처녀들도 만나면 사과도 주고 병들면 약도 사 주고 했지만, 교회서 월급받는 사찰에게는 그러지 않았다.
김현봉 목사는 교회재정을 자기가 관리하면서 아현교회가 있는 염리동과 연세대학 뒤 골짜기에서 거의 200채나 되는 판자집들을 사가지고 있었다 한다. 교인이 와서 어디에 집 팔려고 내 논 것이 있다고 하면 "얼마나 되나?" 묻고는 곧 사도록 하고, 교인 목수를 시켜 수리하게 하고 큰 방은 중간에 간을 막아 두어 세대가 살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는 집 없는 교인들을 입주시켰다. 그들은 의무적으로 아현교회에 출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교인수가 400명은 되었다 한다.
김현봉 목사 세상 떠난 후, 아현교회는 분열하면서 이런 판자집 입주 교인들도 거의 반반으로 갈렸다. 이 모 목사 측이 좀 더 많이 차지한듯 하지만, 양측에서 대표 3인씩 뽑아 서로 협상하고 돈을 물어주기도 했다.
김목사 생전에는 지방에서 새로 이사온 사람들이나 가난한 교인들에게 이 집들을 무상으로 빌려준 것이다. 그러면서도 소행이 나빠서 아내를 때리고 못되게 구는 이들이 있으면 두세번 타일러 훈계하다가 정 안 들으면 내보내고 말았다.
이런 많은 수효의 교회 집이 김목사 세상 떠난 뒤에 교회가 분열하면서 재산 싸움의 화근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