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1. 주변 이야기들
김현봉 목사는 23세 때 기독교를 믿기 시작하여 한동안 러시아령 해삼위에 가서 살다가 귀국하여 평양신학교에 신학도로 입학했다. 그 때는 일제시대였다.
학창시절에는 키도 작고 말도 잘 할 줄 모르고 존재가 나타나지 않는 분이었다. 총각이었기 때문에 여학생들 중에서 인기가 있음직도 했지만, 워낙 못난 분이기 때문에 여학생들도 김현봉이라면 "픽!" 외면해 버렸다.
졸업 후 경기도 과천 부림교회를 맡아 농촌교회 일을 보는데 교인들이 농번기에 일하다가 예배시간 늦게 교회에 찾아오면 "예배 다 봤어"하고 예배도 안 보고 가버렸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농촌 교인들이 병들면 세브란스 병원에 데리고 가서 무료 치료해 달라고 떼거지를 썼다. 그 맛에 교인들이 따랐다.
그 후 서울 공덕동에 와서 교회 일을 보다가 장로들 등살 때문에 목회 실패하고, 염리동 굴레방다리 근처 고개에 자기 손수 처음 교회를 개척할 때에 닭장을 헐어 예배 처소로 만들고 소금장사 해 가면서 교회일을 보았다.
처음 모인 교인수는 자기 가족까지 합쳐서 8명이었다. 교인이 없어서 김 목사는 한길에 나서서 길가는 사람들을 쫓아가 옷소매를 잡아 끌면서 "한번 들어와보시오."하고 사정사정했다고 한다.
그때 끌려들어간 고등학생 중에 지금 목사가 된 이도 있다.
예배처소의 벽은 미군 잡지를 뜯어 손수 발랐는데, 잡지 그림에는 서양 여자들 나체화가 많아서 예배당 벽에 나체미인들 사진이 여기저기 붙어 장관이었다. 교회 같지도 않았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다.
어떤 외국인 선교사가 지나다니다 보니 너무 비참해 보여 좀 도와 주겠노라고 하니 김목사는 딱 거절하며, "아니요, 우리는 두움 받을 필요없어"해서 쫓아보냈다. 독립정신이 강한 분이다.
나이 40세가 되어서 세브란스 병원 간호원으로(간호과장?) 시집 못 가고 있던 올드미스와 결혼했으나 자녀를 낳지는 못했다.
김현봉 목사의 정신은 기독교의 형식주의, 교권주의를 배격하는 동시에, 교회건물을 크게 화려하게 짓는 일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여겼다. 교인이 늘어가면 자기 손수 교회 벽을 헐고 교회를 넓히고 지붕도 벽도 손수 쌓아올렸다.
건물의 미관엔 관심이 없었고, 창문을 많이 내어 다만 위생적으로 태양광선이 잘 들고, 예배에 편리하기만 하면 됐다. 건물을 크게 하든가 장식은 하지 않았다. 장소가 산비탈이었기 때문에 바닥의 바위를 정과 망치를 들고 일일이 깨가며 언제 가 보아도 김 목사는 늘 일하고 있었다.
교회 안에 다락을 매는 것도 손수 기둥을 받치고 마루를 깔아 그 교회는 기둥이 많고 볼품이 없어 별명이 "기둥교회" "누더기 교회"였다. 얼마나 기둥이 많은지 어두운데선 이마를 자주 찧게 마련이었다.
교인 하나 하나를 자기 손때를 묻혀 자기 정신 넣어 훈련시키고 길러갔는데, 그것은 세속 속의 수도원 같은 교회였다.
주일날이면 예배 드리고 흩어져 나오는 교인들을 보면 어느 피난민 수용소나 거지떼들이 흩어져 나오는 광경 같았고, 서울 복판에 이런 교회가 있을 수 있는가 의심할 정도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교회 이름은 "아현교회"라 했지만, 그 교회는 없는 것이 너무도 많았다. 교회 간판도 없고, 종도 종탑도 없고, 십자가도 없고 의자도 강대상도 없고, 성가대란 것도 없고, 장로도 없었다. (교회에 조직을 두지 않다가 한 번은 장로 1인을 세웠더니, 얼마 후 교인 12명을 이끌고 나가버렸다. 다시는 장로를 세우지 않았다.)
사치한 옷 입은 교인도 없었기 때문에 교회를 개척하여 5백명 교인이 되기까지 24년이 걸렸고, 그 후 교인이 날로 증가하여 10년 후에는 1200명이나 됐다.
처음엔 존재가 없던 김현봉이었지만, 이렇게 교회가 성장하고, 또 그렇게 잘 훈련된 교회가 되고보니 당시에는 전국에서 영락교회 다음으로 김 목사의 아현교회만한 교회는 없었다.
이로써 김현봉 목사는 교계의 관심을 모으게 되고 그를 배우려고 따르는 목사들도 많아졌다. 이렇게 교회 부흥 4년만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김현봉 목사는 자기 목회의 땀과 노력을 회고하면서 후배에게 교훈하기를 "목회자는 장기전으로 교회를 만들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