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하나님의 자존성 등에 관련 된 중요 자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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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하나님의 자존성 등에 관련 된 중요 자료...[1]


[헤르메스의 빛으로](39) 대화의 변증술
입력: 2007년 10월 19일 15:08:02
-오직 진리만을 찾아가는 것-

# 로고스(logos)에 얽힌 몇 가지 의문들


플뢰리-프랑스와 리샤르의 ‘타소와 몽테뉴’(1821년). 1581년 계몽주의 철학자 몽테뉴가 격정적인 시인 타소의 만난 곳은 정신병자 수용소였다. 밝은 곳에서 내려온 몽테뉴와 어두운 곳에서 낭만주의적 망상에 사로잡혀 시를 쓰고 있는 타소의 만남.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연상하게 하는 근대 계몽주의적인 이상이 형상화된 것일까?
강대국이 자기 이익을 위해 약소국을 힘으로 친다. 게임방에서 쓸 돈을 얻어내려고 지나가는 초등학생을 협박해서 돈을 뜯어내는 못된 중학생의 행동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강대국이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듯, 그 중학생도 할 말은 있단다. 양심의 가책은 없다. 꺼리는 것이 있다면, 그런 짓을 하다 들통이 났을 때 곁에서 쏟아질 비난과 더 강한 힘으로부터 올지도 모를 보복이나 처벌뿐이다. 세상엔 그런 사람, 그런 일 투성이다.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세상은 합리적인가? 아니면 비합리적인가?

서구엔 세계를 이성으로 보려는 합리주의의 전통이 굵게 흐른다. 그 흐름은 로고스(logos)라는 말로 대표된다. 로고스는 세계의 맨 처음(arche)에 신(theos)과 함께 했던 신 자체이며, 세계를 창조했던 힘이었고, 영원히 존재를 섭리하는 원리다. 아무 것도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벗어난다면 그것은 타락이다. 즉시 개선되거나 계몽되어야 한다. 아니면 없애버려야 한다. 그래서 로고스로부터 벗어나 이성적인 것 바깥에 주름 잡혀 있는 비합리적인 모든 것들은 일그러진 악마로 형상화되기까지 한다. 그때 합리적인 힘이 비합리적인 힘에 대해 가하는 폭력은 정당화되며, 폭력 자체가 제멋대로 합리화되기까지 한다.

하지만 로고스만이 있었고, 그것이 신이었으며, 그를 통하지 않고는 어떤 것도 나오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논리적이며 신의 섭리에 따른 것이라고 해야지 않겠는가? 죄악, 전쟁, 살인과 폭력, 미움과 증오, 질병, 착란…. 모든 것이 신이 허락해서 벌어진다고 해야 한다. 로고스에 따른 질서를 따른다고 해야 한다. 세상에 이루어지는 모든 일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고 해야만 한다. 합리주의에 충실하다면 결국 그렇게 믿을 수밖에, 별 다른 도리가 있을까? 로고스는 거대한 품으로 세계 전체와 온갖 좋고 나쁜 존재와 현상들을 품어 정당화시키며, 인간 이해의 범위를 넘어서는 역설적인 포용성, 아니면 냉혹한 폭력성을 갖는 것 같다.

# 로고스에서 디아로고스(dialogos)로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신이란 완전하여 자족적인 존재인데, 왜 이 세상을 만들었느냐는 물음이다. 완전한 채로 홀로 존재한다는 것은 신에겐 견딜 수 없는 것이었을까? 완전함이란 자기 완결성에 갇혀 있지 않고, 반드시 역동하며 넘쳐나 뭔가를 창조해내고야 마는 것일까? 아니면 신은 자기 완결성을 확인하기 위해 불완전한 존재가 필요했던 것일까? 자신을 갈망하고 찬양할 존재를 원했던 것일까? 신은 어쩌면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단지 인간을 비롯해서 다른 존재보다 좀 더 나은 존재일 뿐, 그래서 자기의 불완전성을 채우기 위해 이 세계를 창조한 것은 아닐까? 완벽한 존재에게도 결함을 갖지 못한다는 유일한 결함만은 피할 수 없는 법, 이 단 하나의 결함을 없애기 위해 완벽한 신은 결함 투성이의 불완전한 존재를 자기 바깥으로 전개시키며 자기 완결성을 이룩한 것일까?

그런데 신은 로고스며, 세계의 모든 원인이 로고스에 있다고 하면, 창조와 분출은 피할 수 없다. 왜냐고? 로고스란 본질적으로 홀로일 수 없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 한 구절은 로고스의 본성에 대한 기막힌 정보를 제공한다. “말(logos)이란 세 가지로 이루어진다. 말하는 자와 말에 담기는 내용, 그리고 말이 향하는 대상이다. 말의 목적은 마지막 것과 관련되어 있다. 듣는 사람(akroates) 말이다.”(1358a37-b2) 이 세가지 요소 가운데 어떤 것 하나라도 없으면, 말(logos)은 말로서 제 구실을 못한다. 특히 말을 들어주는 대상이 없을 때, 말이란 허공으로 날아가는 화살과 같다.

내가 유학을 갔을 때, 나를 맞아주었던 친구와 선배가 해준 이야기는 아직도 생생하다. 외국에 나오니 말이 통하지 않고, 말을 하고는 싶어 죽겠고, 그래서 그랬는지 자기도 모르게 이상한 습성이 생겼다고 한다. 친구는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스스로에게 말을 걸곤 했다고 한다. “그래, 그 느끼한 소시지가 맛있냐?” “아니. 그냥 먹는 거야.” “그래 먹고 힘내라. 빨리 끝내고 한국에 가야지.” 선배도 그랬단다. 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컴컴한 방에 불을 켜고 혼자라는 사실을 확인해야 했다. 그를 맞이하는 이는 거울 속의 그였다. 그에게 말을 걸었다고 한다. “잘 있었냐? 심심했지? 그런데 왠지 핼쑥해 보인다, 너?” “좀 피곤해서. 그래도 야, 너 참 잘 생겼다.” “고마워. 그래 너밖에 없다.” 듣고 있던 나는 그들이 읊조렸을 혼잣말을 상상하며 소름이 돋았다. 말할 수 있는 존재가 말할 수 없고, 말을 나눌 상대가 없다는 것은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나보다. 그들은 그런 시간이 좀 더 지속되었다면 아마도 미쳤을 거라고 했다. 사실 나는 그때 잠깐이지만 그들이 어쩌면 이미 살짝 맛이 간 상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들이 나를 진하게 반기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새벽녘까지 대화를 나누고도 아쉬워했다.

이 일화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여실히 실증한다. 독백, 혼잣(mono-)말(logos), 그것은 참된 뜻에서 로고스라 할 수 없다. 사실 모노로고스란 자기가 스스로를 타자로 설정하고 그에게 말을 거는 행위로 해석할 수 있다. 일종의 자기분열을 전제로 할 때만 독백은 의미를 갖는다. 내가 또 다른 나에게 말을 거는 행위, 그렇다면 혼잣말 역시 듣는 이를 기형적인 방식으로 가정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모든 로고스는 말하는 자와 듣는 자 사이에(dia) 오고 가는 대화(dialogos)의 꼴을 갖출 때 제 값을 갖는다. 참된 대화란 로고스를 갖춘 인간을 건강하게 지켜주는 힘이다. 어쩌면 로고스인 신은 디아로고스의 대상을 얻기 위해 자기를 타자(他者)화시키며 자유롭고 자율적인 존재로 전개한 것일지도 모른다. 로고스에서 디아로고스로의 전이, 그것이 바로 신이 세계와 인간을 창조했던 참된 뜻일지도 모른다. 로고스인 신에게도 피할 수 없이 대화가 필요했던 것이다.

# 대화의 기술, 디아렉티케(dialektike)

그러나 대화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내 생각을 전달하기도 쉽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말의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언어가 생각과 뜻을 담아내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대화에 임하는 사람들의 자세가 닫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화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들이 자기 생각을 정확하고 솔직하게 전달하며, 상대방의 말에 대해 정성껏 귀를 기울일 수 있을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 내 생각을 말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서로 따져 가며, 잘못된 것은 버리고, 잘된 것만 골라낸다. 선택되는 것은 누구의 것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옳고 참되며 잘된 것을 찾아내는 일. 따라서 자기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분명해졌을 때, 미련 없이 버릴 줄 알아야 한다. 상대방의 말이 옳고 맞을 때, 그깟 자존심 버리고 거기에 자기 생각을 맞출 줄 알아야 한다. 고집스럽게 자기 의견을 굽히지 않는 태도로는 대화(dialogos)를 대화로서 움직이게 하지 못한다. 이해와 합의, 양보와 타협, 참된 길을 찾아가려 함께 하는 노력이 없다면 대화는 마비된다. 그건 대화도 아니며, 논쟁조차도 아니다. 오로지 두 개의 혼잣말(monologos)만이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번갈아가며 시끄럽게 울릴 뿐이다. 잘못된 것, 모순을 버리며, 오로지 진리만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디아로고스(dialogos)의 기술, 말하고 듣는 사람들 사이에(dia) 서로 말을 하는(legein) 기술(-ike)인 디아렉티케(dialektike)다.

대화의 기술을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적인 방법으로 모색한 사람이 소크라테스였고, 그의 방법론을 계승하여 체계화시킨 사람이 플라톤이었다. 소크라테스는 뭔가를 안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을 만나 진지한 대화를 청했다. 묻고 답하는 가운데 소크라테스는 상대방이 알고 있던 것을 논파했으며(elenchos), 상대방은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다고 고백해야만 하는 궁지로 몰렸다. 이제 두 사람은 지금껏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을 버리고 새롭게 진리를 찾아가기 위한 대화를 해야만 한다. 플라톤은 이 논파의 대화술을 진리를 찾아가는 대화의 기술로 정교하게 다듬었다. 일단 가설(hypothesis)을 세우고 대화를 전개하며, 주어진 대상을 개념적으로 추슬러 모은(synagoge) 후에 이를 제 형상(eidos, idea)에 따라 나누며(diairesis), 그 본질(ousia)을 밝히는 방법으로 세운 것이다. 이것이 변증술이라 번역되는 디아렉티케(dialektike)다.

플라톤은 철학자가 다스리는 이상적인 국가를 그리면서, 통치자의 교육을 위한 프로그램을 제시하였다. 산술학과 기하학, 천문학과 화성학을 가르친 후, 변증술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한다(‘국가’ 제7권). 지하의 어두컴컴한 동굴에 갇혀 벽에 비추인 허깨비, 그림자만을 보도록 목을 묶인 인간들에게 밝은 진리의 빛이 빛나는 곳으로 이끌어가는 힘, 그것은 감각에 휩싸이지 않고 오로지 이성적인 사색(noesis)과 논의(logos)를 통해 대화를 이끌어가는 기술, 곧 변증술이다. “따라서 변증술의 방법만이 그런 방식으로, 즉 가정들을 하나하나 버리고, 결론을 탄탄하게 하기 위하여 맨 처음의 원리(arche) 자체로 나아간다. 그리고 진정으로 그 어떤 몽매한 구렁텅이에 빠져 묻혀있는 영혼(psyche)의 눈을 조금씩 부드럽게 이끌어내어 위쪽으로 인도한다.”(533c-d) 그것이 플라톤이 말하는 철학이기도 하다. “밤과도 같은 낮에서부터 참된 낮으로 영혼을 돌려 이끄는 것, 진정한 존재로 오르는 길, 그것을 우리들은 참된 철학이라 부를 것이다.”(521a) 철학은, 이른바 고독한 바퀴벌레의 독백이 아니다. 그것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 신으로부터 받은 로고스의 능력을 통해 서로 대화를 나누며 무지와 몽매의 어둠으로부터 진리의 빛으로 향하는 참된 대화의 기술 그 자체다.

이와 같은 합리주의의 전통은 서구의 거대한 흐름의 하나를 이끈다. 근대의 막바지에 헤겔은 플라톤의 변증술(dialektike)의 개념을 절대정신의 자기 전개의 운동원리라는 변증법(Dialektik)의 개념으로 옮겼고 현대의 문턱에서 마르크스는 인간과 사회의 역사적인 운동의 유물론적인 변증법(materialistische Dialektik)으로 바꿔놓았다. 그런데 서구 전통 속의 합리적 이성의 힘을 비이성적이고 이기적인 욕망을 충족시키고 정당화시키는 도구적 이성으로 악용하는 힘이 서구라는 야누스의 얼굴 한쪽에서 음험한 미소를 번뜩이는 요즘이다.

〈김헌|서울대 협동과정 서양고전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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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메스의 빛으로](38) 로마인의 교육(1)
입력: 2007년 10월 12일 14:57:07
-인문학 궁핍 로마인들, 그리스 노예에게 자녀를 맡기다-

힘으로 그리스를 정복했던 로마는 정신의 가난함으로 인해 그리스의 학문과 문화에 의해 역으로 지배당했다. 사진은 로마의 교실 풍경.

“정복당한 그리스가 사나운 정복자 로마를 사로잡았고 야만스러운 라티움에 학문을 가져다 주었다.”(서간문 2.1.156~157행)

“Carpe Diem(카르페 디엠, 오늘을 즐겨라)”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기원전 65년~8년)의 말이다. 이 말은, 로마가 힘으로 그리스를 정복했지만 역으로 그리스의 학문과 문화에 의해서 지배당했던 현실을 언급할 때 늘 인용되는 구절이다. 이 글에서는 정복당한 그리스가 정복자 로마를 어떻게 정복했는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로마인의 교육을 담당했던 그리스 출신 노예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소수의 지식인을 제외하고, 로마인들이 자식의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문(법)학을 로마에 처음으로, 내가 생각하기에는, 도입한 사람은 아리스타르쿠스의 학문적 맞수였던 크라테스 말로테스였다. 크라테스는 아탈로스 왕의 사절로 로마 원로원을 방문했는데, 이 시기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끝나고 제3차 포에니 전쟁이 막 시작하는 그 사이였다. 그러니까 시인 엔니우스가 임종했던 즈음에 로마에 온 셈이다. 그는 로마 근교의 팔라티움 지역의 하수구에 빠지게 되었는데, 이때 그만 정강이가 부러졌다고 한다. 그는 사절 기간과 동시에 부러진 다리가 다시 이어지는 동안 내내 많은 청중을 대상으로 강연을 지속적으로 했고 성실하게 강의에 임했는데, 이것이 우리 로마인이 모방하게 되는 모범 선례가 되었다.”(수에토니우스, ‘문(법)학자들에 대해서’ 제2장)


로마인의 필기구
이렇게 스토아 철학의 대가였고 당대 지중해 세계의 최고 인문학자였던 크라테스(기원전 3세기)의 강연에 감동을 받은 로마인들의 마음 속에서는 문법과 문학에 대한 관심이 싹트게 되었고, 이러한 관심은 자식의 교육열로 이어졌다. 로마인들의 교육열은 날로 높아져만 갔는데, 이는 다음 인용에서 잘 나타난다.

“이후 문(법)학에 대한 호의와 관심이 높아져 갔는데, 아주 저명한 인사들도 자신들이 몸소 문법학에 대해 뭔가를 저술하는 것을 결코 꺼려하지 않았다. 문(법)학을 배우려는 학생들로 가득찬 문(법)학 학교가 20곳이 넘게 성업했던 시기가 로마에 있었다고 전한다. 문(법)학 선생들의 몸값과 강의료도 천정부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예컨대 라이비우스 멜릿수스가 이름을 빗대어 ‘판의 애인’이라 놀려댄 루타티우스 다프니스는 70만냥(세스테르티우스)에 퀸투스 마르쿠스 카투루스에게 팔렸다가 노예신분에서 풀려났다고 하고,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는 로마 출신으로 기사 신분에 로마에서 내로라하는 갑부였던 아이피키우스 칼비누스로부터 연간 40만냥을 받고 오스카에서 문법을 강의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는 곧 문법이 속주에까지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주 저명했던 문법 학자들 중 몇몇은 국외에서 가르치기도 했는데, 특히 알프스 이남 지역에서 그랬다고 한다. 이들 중에 옥타비우스 테우케르와 페스켄누스 이악쿠스와 옵피우스 카레스를 손에 꼽을 수 있다. 특히 옵피우스 카레스는 죽기 직전까지 교편을 놓지 않았는데, 이미 제대로 걷지도 보지도 못할 지경이었음에도 문(법)학을 가르쳤다고 한다.”(수에토니우스, ‘문(법)학자들에 대해서’ 제3장)

인용은 이제 문법과 문학이, 즉 인문학이 “돈이 된다”는 것을 로마인들이 알게 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그러자 어떤 이들은 남의 책을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하는, 이른바 도작(盜作) 행위까지 서슴지 않는다. 요즈음 문제가 되고 있는 이른바 표절 시비의 원조에 해당하는 사건이 로마에서 벌어지는데, 이렇다.

“모든 연관 부분을 체계화해서 문법을 정립시키고 성장시킨 사람은 루키우스 아이리우스 라누비누스와 그의 사위 세르비우스 클로디우스이다. 두 사람은 모두 기사 신분이었고 로마 출신이었는데, 그들은 학문에 있어서 박학다식했으며 공공 활동에 있어서도 다양하고 활발한 행보를 보였다. 장인 아이리우스에게는 두 개의 별칭이 있었다. 하나는 프라이코니우스인데, 그의 아버지가 공보직(公報職)을 수행했다 해서 얻은 칭호이고, 다른 하나는 스틸로(Stilo, 철필)이다. 이 칭호는 부탁한 이가 상류 귀족이면 누구이든지 간에 연설문을 대필해주었다 해서 얻은 별명이다. 그의 귀족파에 대한 열렬한 지지는 메텔루스 누미디쿠스의 국외 추방 길을 동행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사위 세르비우스는 장인의 저술을 자신의 저작인 양 도작(盜作)하려 들었다가 발각된 사람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가는 곳마다 문전박대당했으며, 창피함과 혐오감을 못 이겨 로마를 떠나 낙향했다. 그는, 발가락 통풍(通風)에 걸렸는데, 통증을 참다 못해 발가락에 독을 약으로 발랐다가 중독되어 치명상을 입었고, 신체 일부가 마비되어 반신불수로 거의 반사(半死)의 상태로 생을 유지했다고 한다.”(수에토니우스, ‘문(법)학자들에 대해서’ 제3장)

사실 로마인들이 교육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오랜 전쟁을 끝낸 로마를 이끌 사람으로 전쟁 기술에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보다는 말 기술(oratio)로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고 사회를 이끌고 갈 수 있는 자들이 사회적으로 요청되는 계제에 로마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말 잘하는 사람(orator)’이 출세하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에 부응해서 로마인들은 자식들의 출세를 위해서 교육에 전폭적인 투자를 하기 시작했다. 일부 돈 많은 유력가 집안은 그리스에서 최고의 학자들을 독선생으로 모시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서, 가장 비싼 사교육을 받은 사람은 아마도 키케로일 것이다.

“그런데 내가 (아마도 키케로) 철학 공부를 하게 된 것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었네. 나는 어린 시절부터 결코 모자라지 않은 노력과 정성을 철학 공부에 쏟아 부었다네. 공부의 진척 상황이 아주 보잘 것 없다고 생각했으나 실은 가장 많은 철학 공부를 나는 한 셈이었네. 왜냐하면 나의 연설들은 철학자들의 견해에 기초해 나오는 것들이고 그 안에는 가장 학식 높은 분들의 우정이 깃든 것들이기에 그렇다네. 그 시절 우리 집은 철학자들로 백화만발했다네. 저 최고의 선생님들 디오도투스, 필론, 안티오쿠스, 포시도니우스가 나의 스승이셨다네.”(키케로 ‘신들의 본성에 대하여’ 제1권, 6장)

그러나 대부분의 로마 시민들은 자식들의 교육을 그리스 출신 노예에게 맡겼다. 자식의 교육을 노예에게 맡긴다는 것은 어찌 보면 이상하게도 보이겠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로마 정신의 가난함 때문이었다. 어찌 되었든, 이렇게 교육에 대한 로마인의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이른바 ‘치맛바람’ 현상도 로마에 나타나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또한 책 제목이 ‘억지에 대해서(Perialogias)’인 저술에서 오르빌리우스가 부모들의 극성과 ‘반대로’ 지나친 무관심으로 인해 교사들이 겪어야 했던 부당함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한 데에서도 잘 드러난다.”(수에토니우스, ‘문(법)학자들에 대해서’ 제9장)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교육열이 높아짐에 따라 로마의 학교에서는 진풍경이 펼쳐졌는데, 다름 아닌 노예 출신의 교사가 자식을 두들겨 패도 부모들이 이를 수긍하고 인정했던 점이다. 다음은 당시 로마 교사의 폭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준다.

“오르빌리우스의 신랄함은 학생들을 다룰 때에도 유감없이 위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예컨대 호라티우스는 그를 ‘미친 몽둥이(狂木)’이라 부른다. 아울러 도미티우스 마르수스도 쓰기를, ‘누가 되었든 오르빌리우스는 몽둥이와 채찍으로 휘갈겨 큰 대(大)자로 눕혔다네.’”(수에토니우스, ‘문(법)학자들에 대해서’ 제9장)

정복당한 노예가 정복한 주인을 다시 정복하고 있는 순간인 셈이다. 어마어마한 변화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들을 노예가 큰 대자로 때려 눕혀도 로마인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자식들을 직접 교육할 만한 역량의 소유자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신의 양식인 인문학을 자신들의 언어인 라틴어로 연구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고, 따라서 자신들의 아이들에게 읽힐 만한 라틴어 텍스트도 전무한 상태였다. 그래서 그들은 정신 문화의 선진국인 그리스의 텍스트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그리스인들을 노예가 아닌 선생으로 모시는 것은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이는 로마가 정신적으로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비롯된 일이었다.

이렇게, 역설적이지만, 로마의 정신적 가난을 극복하는 데 앞장섰던 사람들은 정복당한 그리스 출신의 노예들이었다. 이러한 그들의 공적 때문에 노예 출신 교사를 대하는 로마인들의 태도도 변하는데, 이는 로마인들이 노예 출신이었지만 로마의 교육에 큰 기여를 한 플라쿠스를 기리기 위해, 그가 죽은 뒤, 도시의 광장에 세워 준 기념 동상에서 잘 드러난다. 이에 대한 전거는 다음과 같다.

“마르쿠스 벨리우스 플라쿠스는 해방 노예의 후예로 특히 강의 방식으로 명성을 휘날렸다. 학생들의 재능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경쟁 체제를 도입했는데, 학생들로 하여금 글을 작성하도록 주제를 미리 제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상품을 걸어 우승자가 가져가도록 했다고 한다. 상품은 어떤 미장(美裝)의 희귀 고서였다. 이런 명성 덕분에 아우구스투스는 그를 자신의 손자들의 선생으로 삼았다. 그러자 그는 학교 전체를 팔라티움으로 이사했다. 그러나 이후 더 이상 다른 학생들은 받지 못했다. 당시는 팔라티움의 일부였던 카툴루스의 집 안마당에서 강의가 이루어졌고, 강의료는 연간 10만 세스테르케스를 받았다. 세월이 준 인생의 몫을 다 채우고 티베리우스 황제 때에 세상을 하직했다. 프라이나스테 도시에 있는 광장의 가장 높은 곳에 동상이 세워졌고 주변에 반원형의 의자가 마련되었고, 그곳에는 플라쿠스의 강의 계획표가 대리석 벽에 새겨져서 강의 일정을 알리고 있다.”(수에토니우스, ‘문(법)학자들에 대해서’ 제17장)

〈안재원|서울대 협동과정 서양고전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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