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인디안도 인간인가? - 1550년의 신학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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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인디안도 인간인가? - 1550년의 신학 논쟁


‘문명 유럽’의 수치, 인디언 학살
라스 카사스와 세풀베다의 논쟁: 제국과 파괴

(원제 La controverse entre Las Casas et Sepulveda :
Precede de Imperialisme, empire et destruction)

바르톨로메 드 라스 카사스 지음
네스토르 캅데빌라 주|브랭|2007년|318쪽|32유로
김명섭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입력 : 2007.08.31 21:02




1550년 아메리카 대륙이라는 사상 최대의 물권이 걸린 논쟁이 벌어졌다.

장소는 에스파냐의 북부 도시 바야돌리드.
아메리카로 가는 길을 열었던 콜럼버스가 숨을 거둔 도시이다.

논전의 주최자는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5세였다. 그는 대서양 너머로 콜럼버스를 파송했던 이사벨라 여왕의 손자였다. 교황의 특사 살바토레 론시에리 추기경이 사회를 맡았다. 그는 교황의 최종결정을 위한 보고서를 작성할 것이다. 먼저 당대의 석학이 하루에 걸쳐 발언했다. 아메리카 대륙의 소유권이 유럽인, 특히 조국 에스파냐에게 있다는 주장을 펼친 세풀베다(1494~1573)박사. 그의 논점은 아메리카 원주민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동등한 인류가 아니라는 데 있었다. 이어서 라스 카사스(1484~1566)주교가 등단했다. 라스 카사스는 1502년 콜럼버스의 두 번째 여행에 아버지와 함께 동행하여 ‘신대륙’과 인연을 맺었다. 라스 카사스는 미리 준비한 반론을 닷새에 걸쳐 읽어 내려갔다. 사안이 중대했기에 오히려 목소리는 높지 않았다. 한 줄의 발언이 종교재판의 화형대로 끌고 가는 밧줄이 될 수도 있었다. 사상 최대의 물권과 더불어 논자의 목숨이 걸린 논전이었다.


세풀베다 박사가 의거했던 책은 세 가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그는 이 책의 라틴어 번역자이기도 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 그리고 ‘성경’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적 노예상태에 관한 이론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죄에 대한 징벌로서의 노예상태에 관한 이론에 비추어 볼 때,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을 뿐, 평등한 주권을 주장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우상숭배, 식인풍습, 인신공양 등이 ‘노예상태’를 반증하는 근거들로 제시됐다. 원주민들의 소유가 될 수 없는 ‘신대륙’은 유럽인들, 그 중에서도 1493년 교황 알렉산더 6세가 인테르 케테라 칙령을 통해 정한대로 에스파냐제국의 경계 안에 있는 땅일 뿐이었다.

라스 카사스 주교 역시 성경적 표준에 따라 반론을 펼쳤다. 아메리카 대륙의 물권을 원주민의 범죄를 근거로 박탈할 수 있는가?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땅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가나안인들의 우상숭배에 따른 결과가 아니었다. 그 이전에 신과의 약속이 있었다. 이에 비해 ‘신대륙’은 유럽인들의 가나안일 수 없다. 아즈텍과 잉카의 찬란했던 도시들이 보여준 공동체의 모습을 보라. 기독교로의 개종은 중요하지만 이미 발달된 공동체가 있는 만큼 반드시 동의의 과정을 거쳐야 하고 오로지 평화적인 수단만이 동원되어야 한다. 영토에 대한 법적 정당성을 가질 때만이 군사적 수단이 동원될 수 있으며, 교황이나 기독교 군주가 보편적인 정치적 정당성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아메리카를 군사적으로 정복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 라스 카사스의 결론이었다.

이 책은 바야돌리드의 논전이 4년 전인 1546년에 작고한 또 다른 석학의 유산을 반영한다고 본다. 석학의 이름은 프란시스코 데 비토리아. 라스 카사스와 세풀베다의 논전에 배석했던 다른 세 명의 법학자들은 모두 그의 문하생들이었다. 비토리아는 라스 카사스와 마찬가지로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으로서 파리에서 학위를 받은 후 살라망카 대학의 교수가 되어 살라망카 학파를 창시했다. ‘전쟁과 평화에 관한 법’(1625)을 써서 국제법의 비조라고 알려진 네덜란드의 그로티우스는 사실 비토리아의 후예였다. 비토리아는 직접 책을 출판한 적이 없었지만, 그의 강의록 필사본에 제자들의 난외 주기가 더해지면서 널리 읽혔다.

비토리아의 강의록에는 ‘인디안론’(1532)과 ‘야만인에 대한 에스파냐전쟁에 관한 법’(1532)이 있었다. 비토리아는 이교도인 ‘인디안’들에 대해서도 자연법상의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아메리카 대륙에서 행해지고 있는 에스파냐의 약탈행위를 불법행위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비토리아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교통과 교제의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인디안’들이 정당한 이유없이 이런 권리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전쟁의 정당한 원인이 된다고 보았다. 이른바 정의의 전쟁론이었다. 비토리아의 정전(正戰)론의 관점에서 보면, 아메리카 대륙은 원래 원주민의 정당한 소유였으나 그들이 범한 잘못으로 인해 유럽인들에 의해 정당하게 ‘박탈’된 것이다.

라스 카사스는 아메리카 대륙이 원래 원주민 소유였다는 비토리아의 주장을 계승하면서, 그 물권을 박탈당할 만큼의 잘못을 원주민들이 범한 적이 없다는 논지를 펼쳤다. 이에 비해 세풀베다는 인신공양과 같은 원주민들의 악습을 들어 유럽인의 개입은 정당화된다는 비토리아의 정전론을 계승하면서도, 비토리아와는 달리 아메리카대륙에 대한 원주민의 본래적 소유는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세계지성사의 대논전을 다룬 이 책의 상당부분(318쪽 중 200쪽)은 현재 파리10-낭테르대학에서 정치철학을 강의하고 있는 캅데빌라(Nestor Capdevila) 교수의 저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저자는 바르톨로메 드 라스 카사스로 되어 있다. 라스 카사스에게 지적 소유권을 헌정한 것이다. 이 책이 많은 선행연구들을 섭렵했으면서도 트라블레(David M. Traboulay, 1994)의 ‘콜럼버스와 라스 카사스: 아메리카의 정복과 기독교화, 1492~1566’와 같은 기존연구를 검토하지 않은 것은 의아하다. 물론 트라블레의 책이 역사적 서술이라면, 이 책은 철학적 해석이기는 하다.

아메리카 대륙의 소유권에 관한 논쟁은 ‘신대륙’에서의 ‘대량학살’에 대한 평가와 직결된다. 조상 대대로 살아왔던 땅에 대한 소유권조차 가질 수 없다고 여겨진 사람들에게 생명권인들 존중될 것인가? 이 책은 1492년부터 1560년 사이 ‘신대륙’에서 약 4000만명이 사라졌다는 통계를 제시한다. 하루 평균 1611명이 죽었다는 또 다른 통계도 나온다. 여기엔 유럽에서 전파된 세균에 면역성을 갖추지 못한 원주민들의 죽음이 포함돼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량몰살에 대한 유럽의 책임은 분명하다.

오늘날 유럽은 스탈린과 히틀러에 의한 대량학살을 역사가 흘러가지 말아야 할 좌우의 양극단으로 삼는다. 그러나 유럽 바깥에서 자행된 유럽 제국의 반(反)인류적 행위에 대한 반성은 여전히 미흡하다. 비(非)유럽인이 ‘명품진보’인 양 유럽이 내세우는 인권적 표준에 맞춰 쉽게 장단을 맞출 수만은 없는 이유이다. 이 책은 비유럽인들이 유럽의 포스트모던적 파라다이스에 매료되기 앞서 모던적으로 계산해야 할 역사적 장부가 아직 남아 있음을 일깨워주는 유럽인의 성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