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교회의 정치 참여 - 6.29는 교회가 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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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회의 정치 참여 - 6.29는 교회가 주도


...한국의 민주화운동

CBS, 6월 항쟁 특집 좌담에 출연…오충일 목사, "6월 항쟁은 기독교가 주도"

2007/06/12 오후 1:24 | ...한국의 민주화운동


이만열 교수, "한국교회 윤리성 회복해라"
CBS, 6월 항쟁 특집 좌담에 출연…오충일 목사, "6월 항쟁은 기독교가 주도"
입력 : 2007년 06월 11일 (월) 17:57:32 / 최종편집 : 2007년 06월 11일 (월) 19:59:59 [조회수 : 366] 이승규 ( hanseij )




▲ CBS가 마련한 특집 좌담에 출연한 이만열 교수(맨 오른쪽)와 오충일 목사(맨 왼쪽). ⓒ뉴스앤조이 이승규

"한국교회가 유신정권과 신군부정권 하에서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열심히 노력한 사실은 한국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정체성과 영성을 잃어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다. 100년 전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윤리성을 회복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한국교회도 이 윤리성을 제대로 회복해야 한다." (이만열)

"한국교회가 예언자의 목소리를 회복해야 한다. 20년 전 교회가 민주화운동에 앞장섰지만, 지금은 아니다. 개인적인 신앙생활도 중요하지만,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데, 교회가 앞장서야 한다." (오충일)

이만열 교수(전 국사편찬위원장)가 한국교회의 윤리성 회복을 강조했다. 이 교수는 6월 9일 CBS가 6월항쟁 20주년을 기념해 특집으로 마련한 특별 좌담에 출연, 이같이 말했다. 그는 그러나 당시 운동으로 민주 헌법을 쟁취하는 것은 성공했지만, 민주정권을 얻지 못한 것은 뼈아픈 실수였다며, 절반의 성공이었다고 평가했다.

이 교수는 그러나 국민의 자발적 개혁정신이 6월항쟁을 가능하게 했다며,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학생운동권과 재야 민주인사, 야권의 정치인 등이 힘을 합쳐 군부정권을 무너뜨렸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며, 앞으로도 잘 살려나가야 할 정신이라고 덧붙였다.

이 교수와 함께 나온 오충일 목사(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6월항쟁 당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집행위원장) 역시 6월항쟁의 의미를 높게 평가하면서도,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의 후보 단일화만 이루어졌어도, 과거 군사정권의 역사적 과오를 청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오 목사는 당시 함께 운동했던 계훈제 선생의 말을 빌려 6월항쟁은 기독교의 운동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인적 물적인 자원이 거의 기독교 쪽에서 나왔고, 국민운동본부의 사무실이 KNCC 사무실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 얘기를 한 것 같다고 했다.

이 교수 역시 이런 평가에 동의했다. 그는 한국교회가 해방 직후 정권과 유착해 비판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5·16군사쿠데타 이후 예언자적 사명을 회복했다고 했다. 이런 연장선에서 신군부정권 아래서도 한국교회가 앞장서서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것이다.

많은 국민들이 그렇게 민주화운동을 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 이 교수는 당시 비민주적이었던 헌법에 대한 국민의 모멸감이 있었다고 했다. 그는 우리 국민들은 한국전쟁 당시에도 대통령을 직접 뽑는 경험을 했고, 독재정권에서도 민주화를 이뤄냈다고 했다. 그런데 1972년부터 1987년까지의 헌법은 국민들이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없는 법이었기 때문에 거기서 오는 모멸감이 심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가뜩이나 폭압적이었던 신군부정권에 지배받는다는 생각이 다수의 국민들 마음에 수치심으로 자리 잡고 있어 분노를 폭발할 곳을 찾고 있는데, 1987년에 그런 계기가 제공됐다는 것이다.

다음은 좌담 요약문이다.

권혁률 (이하 권) : 6월항쟁이 왜 일어났고, 어떻게 국민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나. 그 당시 상황을 먼저 말해달라.



▲ 오충일 목사는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6월항쟁을 이끌어 냈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이승규

오충일 목사(이하 오) : 1972년 유신헌법이 선포된 뒤부터 청년·학생들은 물론이고, 재야·종교계 등에서 민주주의의 실종된 역사를 바로잡아야겠다고 끝없이 투쟁해왔다. 그 뒤 1980년 광주항쟁 이후 군사독재정권의 폭압적 정치에 국민의 분노가 점점 확산됐다. 그럴 즈음 재야 특히 기독교에서는 이렇게 끝없이 동시다발로 분노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것을 한 곳으로 모을 수 있는 조직을 만들어보자는 논의가 1986년 겨울부터 있었다.

그러다가 1월 달에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국민의 분노는 대단했다. 당시 수사관이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했는데, 박종철 군의 시체를 검시한 의사가 물고문에 의해 죽었다는 진실을 폭로하면서 이 문제는 정치 문제에서 군부정권의 도덕성 문제로 옮겨졌고, 국민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서울 종로 5가에 있는) 기독교회관을 중심으로 모여 고문치사사건을 규탄하고, 민청학련 사건을 전후로 고문의 역사가 시작되기 때문에 차제에 고문을 없애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수차례 모여 집회했다.

그러다가 4월부터 본격적으로 조직을 하고, 5월에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결성했다. 6·10항쟁을 앞두고 그 전날, 연세대학교에서 학생들 시위하다 이한열 군이 직격탄에 맞아 거의 절명하는 사태를 맞았다.

권 : 당시 국민의 분위기는 어땠나.

이만열 (이하 이) : 당시 분위기라기보다 6월항쟁을 가능하게 한 매우 중요한 국민적 의지랄까 이런 게 대단히 중요한 것 같다. 그것은 비민주적 헌법에 대한 국민들의 모멸감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는 1952년 6·25전쟁 중에도 대통령을 직접 뽑는 경험을 했고, 자유당 독재정권에 대해서는 4·19를 통해 민주화 이뤘다. 1972년부터 1987년까지의 그 헌법은 백성들이, 국민들이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없는, 거기서 오는 국민적 모멸감이 많았다. 또 하나는 신군부정권에 폭압적이고 거짓된 정권에 지배받는다는 국민적 수치감 있었다. 속은 분노로 들끓었는데, 폭발할 계기를 찾고 있었다. 분노가 폭발하기 위해서는 계기와 조직이 필요했는데 이런 것들을 1987년에 다 제공했다.

권 : 시위 양상은 어떻게 전개됐나.

이 : 6월 10일에 성공회 성당에 있는 종소리를 치는 것으로 성공회 안에 있는 차량이 경적을 울리고 그걸 이어받아 시내 자동차들이 경적을 울리는 것으로 항쟁 시작하자고 했다. 그래서 상당한 시위가 있었는데 결국 탄압에 의해 명동성당으로 들어갔다. 6월 10일부터 6월 15일까지 성당에서 민주화투쟁을 계속했다. 낮에는 명동 지역 회사원들이 넥타이를 매고 투쟁세력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또 이 지역 상인들도 옷과 먹을 것을 주기 시작했다. 여기서 힘을 얻었다.

권 : 오 목사는 당시 지도부로서 성공회 성당 안에 있지 않았나. 시위가 끝나고 바로 연행됐나.

오 : 6·10대회 다음날 연행됐다. 여기서 우리가 좀 생각할 것은 일반적으로 국민운동본부가 있어서 이들 지휘 하에 6월항쟁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고 하는데, 그건 아니었다. 당시 모든 지역, 남녀노소, 종파를 초월해 3·1만세운동 했듯이, 모든 국민이 주체가 돼서 함께한 것이다.

권 : 기독교가 주도적으로 참여했다는 평가에 대해서는.

이 : 기독교는 해방직후 정권과 유착해 비판적인 평가를 많이 받았다. 그러나 5·16쿠데타 이후 예언자적인 사명을 회복한다. 그 연장선상에서 신군부가 등장했을 때도 기독교가 앞장서서 민주화운동을 척결해나가려고 했다. 구체적인 예로서 5월 24일 광주에서 550여 명이 목회자들이 모여 시국기도회를 했고, 서울에서도 목요기도회 등 시국기도회를 열었다. 국민운동본부 지도부 가운데 목회자들이 많다. 우리 기독 교수들, 목회자들, 신자들이 예배 등을 하며, 의식을 고양하고 행동에 앞장서서 일어났다는 것은 뜻 깊은 일이다.

오 : 오해가 있을 것 같아서 한마디 덧붙이겠다. 계운제 선생이 국본 집행부에 같이 있었다. 6·10대회 이후 나를 포함해 13명이 감옥에 갔다. 출소한 뒤 교회에서 휴가를 줬다. 마침 계운제 선생이 몸이 아프다고 해 심방을 갔다. 이분 말씀이 "6·10항쟁은 기독교의 운동이었다" 그렇게 표현하더라. 그 말은 기독교가 주축이었다는 거겠지.

권 : 6·29선언을 평가해달라.

오 : 6·29선언 당시 나는 감옥에 있었다. 이 선언을 듣고 국본이 환영성명을 냈는데, 그 점 잘못된 것이다. 왜냐면 군부독재 세력이 사실은 항복한 건데, 국본이 찬성을 해주니까 군부독재는 환영의 사인인 줄 알았다. 이것이 첫 번째 잘못이다. 또 양 김이 통합하지 못해 노태우 정권이 나왔다는 것이 두 번째 잘못이다. 국민운동을 정치권에 바친 건 지금도 죄책고백으로 갖고 산다. 만약 당시 후보가 단일화됐다면, 민주정부가 수립되고 과거 군사정권의 역사적 과오를 청산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이다.

권 : 6월항쟁의 정신은 어떻게 평가하나.



▲ 이만열 교수는 6월항쟁은 온 국민이 힘을 합쳐 군부 정권을 무너뜨렸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이승규

이 : 민주 헌법은 쟁취했다. 그러나 민주 정권을 얻지 못한 것은 아픈 일이다. 결과적으로 군부 정권의 계산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민주 정권을 세우지 못한 것은 절반의 성공을 뜻하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국민의 자발적인 개혁 정신이 6월항쟁을 가능하게 했고, 절반의 성공이지만 성공으로 이끌었다는 것, 그리고 6월 항쟁 정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학생운동권과 종교계, 재야 민주인사, 야권 정치인 등 이런 사람들이 연합하고 힘을 합해 군부 정권을 무너뜨렸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앞으로 잘 살려나가야 할 정신이다.

권 : 한국교회 사회참여 전통의 이어가는 것은 어떻게.

오 : 당시 보수 교회가 항쟁에 참여한 교회나 목사를 용공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그런 시대는 지나갔다. 그동안 민주화 역사의 장정 속에 교회가 앞장서 왔다. 개인적 신앙생활도 중요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함께 자유롭고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데 교회가 항상 앞장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권 : 교회사적으로는 평양대부흥100주년인데 사회참여와 영적각성의 전통이 어떻게 어우러져야 할까.

이 : 한국 기독교가 유신정권과 신군부정권 하에서 예언자적 목소리를 높이고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인권신장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는 것은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기독교적 정체성과 영성을 잃어가지 않았나 하는 우려가 있다. 이런 때에 평양대부흥 100주년을 맞아 한국 기독교가 사회 참여의 정신을 고양할수록 자기절제를 통해 영성을 회복해야 한다. 1907년에 일어난 대부흥에서 윤리성 회복이 가장 중요했다. 이를 제대로 회복해야 한국교회의 소명과 예언자적 사명을 제대로 견지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사회성 회복과 영성회복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