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 이인재
신사참배 반대 운동가, 출옥 성도, 온유한 목회자
이인재 목사
제 2차 대전 때 한국을 점령했던 일본경찰은 일본 천황을 모시는 신사에 한국의 모든 국민들을 강제로 인사하게 하여 신사참배를 강요 하였다. 그때 당시 32세의 평양신학교 신학생 이였던 이인재는 한상동목사외 몇몇 신앙동지들과 같이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적으로 추진하였다. 신사참배는 십계명을 억기는 행위며 하나님을 모독하고 기독인으로써의 신앙을 배신하는 행위로 판단하여 생명을 걸고 반대운동에 나선 것이다. 그 결과로 1940년 5월 13일에 이인재는 평양 결찰서에 체포되었고 감옥에 감금되어 5년 4개월의 옥고를 치루었다. 주기철 목사 및 여러 신앙동지들이 옥에서 순교하게 되었고 1945년 8월 17일에 (해방후 이틀) 약 십 여명의 신앙동지들이 살아 남아 평양감옥에서 석방되었다 (출옥성도들의 사신).
신사참배핍박으로 약 200여 교회가 문을 닫게 되었고 약 2000여명의 신도들이 체포되어 감금되었고 그중 약 50여명이 순교하게 되었다고 한다.
출옥 후 이인재 목사는 한국 전역에서 부흥 강사로 복음을 전파했으며 곳곳에 많은 교회들을 개척하고 섬겼다. 1974년에 68세의 나이로 미국에 이민 왔으며 80중순까지 끈임 없이 복음전파와 목회에 전염하다가 90세의 나이로 2000년에 필라델피아에서 임명하였다.
그는 1906년에 밀양에서 태어났으며 두 번의 혼인으로 4남 2녀를 두었다. “어린양과 같이 순한” 이인재목사는 온유한 목회자였고 쉬지 않고 전했던 복음을 통하여 많은 신자들에게 은혜를 끼쳤으며 노경에 이르기 까지 자신의 신앙 성장에도 끈임 없는 노력을 기하였다.
그의 생애를 기념하고 또한 (계획한바) 그와 뜻을 같이하여 믿음을 지키기 위해 신사참배를 대항하여 담대히 투쟁하였던 여러 신앙동지들의 생애와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웹싸이트를 세웠다. 한국교회역사와 그 보급에 조금이나마 기여가 되기 바란다.
이정수
저희 아버님께서는 1974년 6월 29일68세의 나이로 미국에 이민오셨습니다. 한국을 떠나기 전 송별회 때 "나도 이제는 바울과 같이 전 세계를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겠다"고 여러 동요목사님들 앞에서 선포하셨습니다. 과연 아버님께서는 Chicago, Jersey City, Philadelphia, Erie, Denver, Boston, Greensboro, San Jose, LA, Vancouver 등 10여개 이상의 도시와 8개주 이상의 여러 지역에서 복음을 쉬지 않고 전하셨습니다.
처음에 미국에 오셔서 Chicago에 거주하실 때, 저희 집 앞에 한 야간 대학교 (Truman Community College)가 세로설립되었썼고 민병철씨가 거기서 영어회화반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아버님은 자명을 야곱으로 지으시고 과거 옥중생활때 성경구독이 허락되지않아 선택했던 영어공부를 이제 약 30년후 다시 실시하게되어 그 공부에 열중하셨습니다. 아버님은 야곱을 좋아하셨고 또한 야곱처럼 험난한 삶을사시면서 신앙을 지키셨습니다. 아곱이 말년에바로 왕 앞에 서서 말하기를: "내 나그네길의 세월이 백삼십년....우리 조상의 나그네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아버님도 야곱과 같이 그의 삶에 많은 풍난풍파를 경험하셨으나 하나님을 바라보는 단순한 신앙으로 자신의 험란한 순간들을 이겨내셨습니다. 야곱이 말로에 바로를 축복했듯이 아버님도 어려운 삶 가운데서 수많은 사람들께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전달 하셨습니다.
1988년 Denver에서 목회 하실 때에 San Francisco에서 부흥회를 마치시고 돌아오셔서, 무척 피로하셨든지 갑자기 왼손바닥에 대상포진(shingles)이라는 고약한 신경통 관계의 피부병에 걸리게 되셨습니다. 이 병은 완전히 나을 수 없는 병으로 어느정도 나은 후에도 평생동안 후유증을 앓는 병입니다. 한참 고통이 심하실 때는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고통을 생각하시며 그 고통에 동참하는것으로 여기시며 견디어 내신다고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은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내게 하려 함이라" (고후4:10)는 성경구절을 제에게 직접 찾아 읽어 주시며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하지 않고는 자신의 고통을 이겨 내지 못하였을 것 이라고 말씀 해 주셨습니다.
그 다음 해 1989년 5월 Chicago에 거주했던 둘째아들 (정신)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Boston 에서 Chicago로 오시면서 공항에 도착후 마중나온 동생 이명재목사님과 과거에 같이 신사참배 반대 운동에 나섰던 박인순권사님을 보며 터뜨리셨던 울음소리는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이어서 1990년초 과거에 매우 사랑하셨던 친구 차재선 전도사님의 사모되시는 백영희권사님이 세상을 떠나게 되셨을 때도 무한한 애통의 눈물을 흘리셨다고 합니다.
1960년대의 아버님은 무척 엄격하신 분이였던 것같습니다. 라디오나 TV를 하나의 세속주의의 도구로생각하시고 그런것들을 엄히 막으셨습니다. 그 외에도 신신학이나 교단분열 및 올바른 교리성립 등의 문제에 많은 열중을 보이셨읍니다. 그러나 미국이민 이후부터는 교리적인 문제보다는 성령강림 또한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는 삶에 대한 교훈을 많이 연구하시며 가르치셨읍니다.
점심식사시간에 그 날 아침연구에서 깨닭은 진리를 종종 저희식구들과 합께 나누곤 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 있는 예수님의 마지막 작별기도에 많은 관심을 두고 연구하셨던 것이 기억남니다. 요한복음 14:20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안에, 내가 너희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하는 말씀을 혼자 반복하시던 음성이 지금도 귀에 생생합니다.
어느 날 아버님께서는 저에게 말씀하시길, 로마서 15:3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라는 말씀을 한 젊은 목사님께 목회의 비결이라고 가르쳐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그외 또 아버님께서 즐기시던 성경구절은 고후 3:18 입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말미암음임이니라" 라는 말씁니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영광은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죽는 생활에 있는 것이다"라고 한 설교 ("날마다 죽는 생활,”하늘에서 온 방문객, 176) 에서 말씀하셨던것 같이, 날마다 자아를 죽이고 그리스도의 영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 기독인의 가장 큰 과제와 영광로 생각하시며 그것을 가르치시고 실천하려고 노력하셨습니다.
신사참배 반대로 의해 치르신 여려운 옥고는 저희 가족들이나 그외 다른사람들에게 많이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위에 언급한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옥고를 가볍게 평가했습니다: "때가 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용감히 생명을 내어던져 순교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영광은 날마다 죽는 생활이다”(176). 신사참배반대운동과 순교의 각오는 그때당시 기독인으로써는 누구나 으례히 했어야 하는것으로 여기셨던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옥고나 업적을 자랑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님의 오른 쪽 눈은 이미 수년 전부터 거의 상실된 상태였습니다. 아마 옥중에서 영양부족으로 시력을 상실하신것 같습니다. 그 이후 왼쪽눈으로만 시력을 지탱하시며 독서에 열중하셨습니다. 그러나 작고하시기 약 2년 전 어느 날 아침 침실에서 기립하시면서 "내가 이젠 이삭과 같이 됐다"고 하시면서 시력을 완전히 잃어버리시게 되셨습니다. 의사 설명에 의하면 왼쪽 눈동자 뒤의 잔 핏줄이 터져 시력이 상실되었다는 것입니다. 평소에 즐겨 읽으시던 성경과 설교집들을 더 이상 읽지 못하게 되시며, 평상시 즐기시던 산책도 중단해야만 하시게 되셨습니다. 온종일 하루를 침상에서 거의 지내셔야만 했던 안타까운생활을 하시게 되셨습니다.
옥고를 한때 같이 치럿던 안이숙 여사께서 아버님을 가리켜 "어린양과 같이 순한 분"라고 그의 자서전 (죽으면 죽으리라)에서 표현하셨던것 같이 저희 아버님은 이삭과 같이 인자하고 온유한 분이셨습니다. "인자한 재상"이라는 자명의 뜻 그대로 아버님은 마지막 숨을 거두시기까지 모든 고통과 불편을 한 양과같이 준진하게 견디어 내셨습니다.
2000년 4월 30일 필라델피아의 벗꽃이 주루럭 떨어지는 한 주일 (부활절 이후 첫주일) 새벽 1시50분경에 가냘픈 봄바람과 같은 숨을 마지막으로 쉬시며 그는 아내의 목격하에 조용히 하나님품으로 떠나 셨습니다.
막내아들 이정수
손녀의 기념 글
한 5년 전 뉴욕의 한 여름 이였습니다. 저는 심한 열기를 피하기 위해 집의 지하실로 내려 왔었습니다. 앞에 보이는 고동색 책꽂이에 많은 책들이 꽂혀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별로 제 관심을 일으키지 않았던 책들중 그날 특별히 한 권이 눈에 티였습니다. 읽지 못하는 한국 책의 페이지를 막연히 넘기다가 마지막 페이지에서 내 눈이 멈췄었습니다. 거기에는 할아버지 이인재 목사님의 희미한 흑백 사진이 있었습니다. 그 순간 할아버지의 전기서를 내가 손에 들고 있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할아버지는 한 영웅적인 인물이십니다....
할아버지는 용감하신 분이였습니다. 1940년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고 있을 때 저희 할아버지를 5년 4개월 동안 감옥에 수감되어 굶주림과 구타를 당하셨고 추운 겨울의 차가운 감옥마루를 담요하나로 견디어 내셨습니다. 어린아이 주먹만 한 밥 덩어리 하나로 끈기를 태워내야만 했었습니다. 그 이유는 일본 신을 섬기는 것을 거절하였기 때문입니다. 일본인들이 신사참배 거부로 수감된 동요 자들을 할아버지와 함께 다 같이 사형 집행에 넘기려고 하던 중 8.15 해방으로 인해 그들을 다 해방 시켜야만 했었습니다. “왜 도망가지 않았어요?”라고 나는 아버지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아버지는 대답하기를 “많은 동요 자들이 산으로 피하여 도망갔으나 할아버지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대담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싸우셨지.”
할아버지의 용감성을 말해주는 또 다른 하나의 사건은, 어느 날 할아버지의 한 올케가 호롱불 밑에서 바느질하다가 깜빡 잠이 드는 바람에 옷에 불이 붙게 되고 곧 온방이 불덩어리가 되었을 때 할아버지가 용감히 뛰어 들어가 자신의 몸에 화상이 입기 까지 희생적으로 올케를 구해셨다고 합니다. 남을 위해 자기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았던 분 이였습니다.
저희 할아버지는 용감하신 반면에 또한 겸손 하셨습니다. 출옥 후 그는 갑자기 한 영웅의 대우를 받게 되었으나 그러한 대우를 사양하였습니다. 옥고를 치른 동역 자들은 유명하고 거대한 교회에 사역하게 되었으나 그러한 자리를 사양 하시고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시골교회들을 찾아 시무 하셨습니다. 교회를 개척하고는 다른 목양자들에게 맡기고 다른 곳으로 이전하신 적이 여러 번 이였습니다. 목회에 전렴하시고 한평생을 헌신하셨지만 그는 그의 엄적을 자랑하기를 꺼려하셨습니다. 온유, 겸손, 신의가 가장 귀한 성품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그의 설교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셨습니다. 그의 설교는 주로 긍정적 이였고 기쁨과 희망을 가져다주는 설교를 하셨다고 합니다. 그의 마음은 마르지 않는 자비의 원천 이였습니다. 한 예를 들어, 그의 설교가 저 외삼촌의 젊은 생을 새로이 바꾸어 놓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의 부친이 사업에 실패하여 한 해 동안의 생활을 겨우 유지해 가면서 좌절감에 빠져있을 때 할아버지의 설교를 한 저녁 예배 때 듣고 새로운 각오로 삶을 살게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부터는 기쁨과 평화로 생활을 할 수이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이런 모양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셨습니다.
2000년 4월 29일 [캘리포니아 시간으로] 할아버지께서 소천 하셨습니다. 그의 이별은 슬픈 일이나 그의 삶을 바라볼 때 오히려 기쁨이 생깁니다. 평생 하나님을 섬기는데 헌신 하셨으며 보람된 한 평생을 사신 것 같습니다. 목음전파에 온전히 한평생을 바치시며 많은 사람들의 심령을 감동시키시고 평화와 덕을 끼치신 분이셨습니다. 지금은 영광스러운 하늘나라에서 주님의 얼굴을 뵈오며 마땅히 받아야 할 칭찬과 상을 받으시고 계시겠지요. 먼 장례에 그를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 만나게 되겠지만 지금 현제 그는 나의 한 영웅이 되어 있으며 그가 남긴 엄적을 잊을 수 없습니다. 영원히 그는 나의 영웅이요 나의 본으로 남아 계실 것 입니다.
이 규 하
10세 손녀
2000년 5월
캘리포니아에서
이정수 번역
이정수
160 Clearview Avenue
Huntingdon Valley, Pennsylvania 19006
(215) 939-5831, (215) 359-1674 (팩스)
csl@injaelee.org chungsoolee@yahoo.com
이인재목사와 한국교회역사에 관해 발표하시고 싶으신 사항이 있으면 연락 주십시요. 브로그(계시판)에 발표해 드리겠습니다.
Rev. In Jae Lee
A Korean defender of
Christian faith
against the Japanese
Shinto worship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of Korea in the early part of the 20th
Century, the Japanese government forced Shinto worship upon Korean
people. As a seminarian, Rev. In Jae Lee actively campaigned against the
Shinto worship, believing that the Shinto worship (bowing toward the
Shinto shine) is a violation of the first three Commandments. As result of
his opposition, he was arrested on May 13, 1940 in Pyung-yang (N. Korea)
and was imprisoned for 5 years and 4 months. When he was released on
August 17, 1945 (after the Japanese government"s unconditional
surrender to the U.S.), he and 16 other surviving prisoners suffered near
starvation (see the photo taken after the release).
It is estimated that some 200 churches were forced to close and about 2000
Christians were imprisoned--of which about 50 died in the prisons--for
refusing to bow at the Shinto shrine.
Subsequent to the prison release in 1945, Rev. Lee traveled throughout
the Korean peninsula, preaching the Gospel and planting churches. He
immigrated to America in 1974 at age 68 and remained active as a
preacher and a church planter throughout the United States until his
death in April 2000 at age 90 in Philadelphia.
He was born in 1906 in Mil-yang, S. Korea, and fathered 2 daughters and
4 sons through two consecutive marriages.
“Meek as a lamb,” Rev. Lee was a humble servant of God who loved the
Word and inspired scores of people with the Gospel he tirelessly preached
and earnestly tried to practice.
This website is dedicated to his life and memory, and (as planned) to the
lives and memories of his friends and fellow defenders of Christian faith
in the early Korean church h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