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 주기철의 창씨개명과 독립자금 지원 거부에 대하여
“주기철 목사 창씨개명 했다” 칼럼 논란
한 칼럼니스트가 주간지에 기고한 글에서 주기철 목사가 창씨개명을 했으며 일제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다고 주장해 논란이 되고 있다.
한의사이자 열린우리당 여성위원인 고은광순(52)씨는 지난달 20일 여성 시사주간지인 우먼타임스에 기고한 칼럼에서 "주기철 목사는 일찌감치 신천기철(新川基徹)이라고 창씨개명을 한 사람으로, 적극적인 항일의 몸짓을 보여준 바 없다"며 "신사참배 거부도 적극적인 항일운동 차원이 아니라 다만 성서에 따라 종교적 결단을 한 것임에도 건국공로훈장을 주고 국립묘지에 안치한 정부의 태도도 딱하다"고 썼다. 그는 또 1926년 부산 초량교회에 부임한 주 목사가 독립자금 지원을 중단하고 한푼도 지원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주 목사의 아들인 주광조(75) 영락교회 장로는 "1942년에 어머님이 형무소에 계신 아버님을 면회하러 갔다가 주기철이라고 신청서에 쓰니 "그런 사람이 없다"는 얘길 듣고 지난달에도 면회를 했는데 무슨 일인가 백방으로 수소문한 적이 있었다"며 "당시 문중에서 창씨개명을 하기로 결의하고 호적에 있는 이름을 바꾸면서 아버님 이름까지 한꺼번에 바꾸는 바람에 옥에 갇혀있던 당사자는 물론이고 가족들도 모르게 바뀐 적이 있다"고 설명했다.
또 적극적인 항일 활동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에 대해 주 장로는 "일제에 저항하지 않은 사람이 왜 형무소에서 죽었겠느냐"며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에 있기에, 그 이상의 저항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우리 형제의 돌림자가 "영"이었지만 내 이름만 "광조(光朝)"여서 어릴 적에 투정을 부린 적이 있다"며 "그때 선친께서 "조선아 빛나라"는 뜻이라고 일러주시며 독립정신을 불어넣어줬다"고 일화를 소개했다.
독립자금 지원 문제에 대해 그는 "정확한 사실은 알지 못하지만, 알다시피 부친은 독립운동은 개인자금으로 해야지 하나님께 바친 헌금으로 해선 안된다는 입장이었다"며 "그것에 유추해본다면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교회 언론회는 25일 고은씨의 글에 대해 논평을 내고 "집권당의 국회의원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던 사회 지도층 인사가 검증되지 않은 내용으로 무책임하게 기독교를 비난하는 것을 자중하고, 주 목사의 명예를 훼손시킨 데 대해 깊이 사과해야 한다"고 밝혔다.(2007. 5. 24. 국민일보 / 김지방 기자)
근대 인물한국사 313
주기철
지은이:민경배
펴낸이:김병관
펴낸곳:동아일보사
주기철목사의 마지막 투옥 (1940.9__1944.4)
신사참배 반대의 체계적인 확산을 우려한 일경은 1940년 6월
손양원(1902__1950)목사를 검거하였다. 손목사는 1948년 여순사건 때 그 자신도
6^3456,12,15^전란 때 인민군에 의해 총살된 일가족 3부자 순교의 목사였다. 그리고
1940년 9월에 한상동, 주남선 외 수십 명이 교회 재건운동의 음모가 있다 하여
투옥되었다.
"내 주님, 내 어머님을 부탁드립니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이경들이 주일날 산정현교회에 물려와, 주기철목사에게 향후
설교를 못한다고 경고한 것이다. 그는 설교권은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인 만큼
경찰이 간섭할 수 없다 하면서 일본 헌법에 예배자유 조항을 지적하였다. 이것은
상황만을 회피하기 위한 논리가 아니었다. 그는 국법을 위반했다는 의식을 진심으로
가져본 적이 없다. 그래서 1940년 창씨개명에도 순응하여 신천기철이라 이름을 바꾼
일도 있었다. 그는 혁명을 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전능자 하나님, 그 분을
성서대로 믿는 것, 그 길만을 간 것이다.
주기철이 이 말을 하고 강단에 섰을 때 그 모습은 "무어라고 형용할 수 없이
엄엄숙숙 비장"하였다. 그때 그 곳에 김인서가 앉아 있었다. 김인서는 주기철
주변에서 떠난 일이 없이 그의 설교나 형태를 가능한 한 많이 기록 보존한 위대한
예언자적 역사가였다. 그의 이런 노력이 없었던들 우리는 주기철 역사 구성에
심각한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날 설교만은 김인서도 기억
못한다고 했다. 그 날의 긴박감, 공포 분위기가 어떠하였는지 능히 짐작할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