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한국교회 설교사 연구 - 이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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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한국교회 설교사 연구 - 이상규


이상규의 한국교회 설교사 연구/ 한국교회 강단을 말한다. 한국교회에서의 설교, 그 역사와 평가 | 설교 2006.11.29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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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의 한국교회 설교사 연구/ 한국교회 강단을 말한다. 한국교회에서의 설교, 그 역사와 평가





. 시작하면서

설교는 가장 단순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해석과 적용이다. 탁월한 성경강해자이며 두 차례에 걸쳐 웨스트민스터 채플의 담임설교자였던 캄벨 몰간(Campbell Morgan)은 “설교란 계시된 진리의 말씀의 선포”라고 하였다. 1) 미국북장로교 선교사이자 평양의 신학교에서 설교학을 가르쳤던 곽안련(Charles A. Clark)은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고 사람을 구원하려는 계획과 목적에서 사람을 감동하도록 권면하는 종교적 강화이다.”라고 정의했다.2) 말하자면 설교란 바로 ‘그 시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설교자들은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설교했을까? 이 글에서는 이 점에 대해 주목하고자 한다.

현재 한국에는 통계상 약 3만 7천여 교회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등록되지 않는 교회까지 합하면 그 수는 약 5만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현재 한국교회의 정기적인 설교자는 약 8만명에 달한다. 기독교가 한국에 전래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설교자들은 이 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설교가 어떠했는가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 글에서는 한국교회 설교의 일반적 추세 혹은 경향에 대해 검토해 보고자 한다. 한국에서 장로교회는 전체교회의 68%를 차지하고 있고, 감리교회는 13%에 달한다. 즉 장로교회는 한국에서 주도적인 교(파)회이므로 장로교회는 설교를 포함한 교회적 활동의 모든 영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이 글이 비록 장로교 중심의 논의가 될 수 있으나 한국교회 설교의 일반적 경향성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우선 한국교회의 설교 유형을 편의상 몇 시기로 나누어 역사적 측면에서 고찰하였다. 설교는 인간의 삶의 자리에서 성경적 삶을 살도록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고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설교자 자신이 의식하던 의식하지 못하던 설교는 ‘그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즉 본문(text)은 상황(context) 가운데 주어졌고, 설교는 ‘그 시대’의 질문에 대한 신학적 응답이다.3) 따라서 한국교회 설교의 역사는 한국교회 신학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4) 한국에서의 설교도 교회가 처한 그 시대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이 글 후반부에서는 한국교회 강단의 쇄신을 위하여 고려해야 할 몇 가지 점에 대해 주목했다. 청교도들이 이해했듯이 설교는 교회를 갱신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이 글이 한국교회에서의 설교의 쇄신을 위한 작은 동기를 제공할 수 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2. 한국교회 설교의 역사적 개요

2.1 초기 선교사들의 설교

한국에서 첫 개신교회가 설립된 때는 일본의 1872년보다 11년 늦은 1883년이었다. 이때 설립된 솔내(松川)교회에 이어 1886년 인천 내리교회, 1887년 새문안교회가 설립되면서 점차 서울, 부산, 평양 등 주요 도시에 교회가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감리교회의 첫 목사가 배출된 때는 1901년이었지만, 장로교회의 경우 첫 목사가 배출된 때는 1907년이었다. 이 때 한국장로교회는 전국적으로 785개에 달했고, 세례교인은 1만 8천 여명, 전체교인은 7만 2천명에 달했다.5) 또 목사선교사는 49명이었다. 1912년에는 장로교총회가 조직되었는데, 이 당시 교회는 약 2천 여개 였고 신자수는 12만 7천명에 달했다. 그러나 한국인 (장로교)목사수는 69명에 지나지 않았고 목사선교사는 77명이었다. 한사람의 목사가 한 교회를 담임한다고 가정하면, 목사가 시무 하는 교회는 전체교회의 오직 7%에 불과했다. 따라서 거의 대부분의 교회가 선교사들의 관할 하에 있었고 선교사는 여러 교회를 관장하고 있었다. 결국 설교자들은 주로 선교사들이었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의 설교관이 어떠했는가 하는 점은 그 이후의 한국교회의 설교형식과 내용을 결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당시 영향력 있는 선교사들로는 원두우(H. G. Underwood, 1859-1916), 곽안련(C. A. Clark, 1878-1961), 마포삼열(S. A. Moffett, 1864-1939), 배위량(W. M. Baird, 1862-1931), 이눌서(W. D. Reynolds, ?-1951) 등이었다. 이들의 설교가 어떠했는가를 말할 수 있는 자료는 많지 않다. 장로교의 첫 신학잡지인 ?신학지남?이 창간된 때는 1918년이었는데, 이 잡지에 선교사들의 설교가 게재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곽안련은 설교, 설교에 대한 많은 논문과 예화, 그리고 유관 서적을 소개하는 글을 게재하였다. 한국에서 최초의 설교집이 발간된 때는 1920년이었는데, 그것은 언더우드의 ?원두우 강도취집?이었다. 그러므로 그 1920년대 이전의 선교사들의 설교에 대해 정확하게 말하기에는 약간의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상황을 비추어 볼 때 설교 형식은 주로 제목설교(topical preaching)라고 불리는 주제중심의 설교였다.61) 이런 설교방식은 1900년대를 전후하여 미국교회에서 유행하던 설교 방식이었다. 이 설교는 설정된 주제를 강화시켜 가야 했으므로 많은 예화가 도입되었다. 따라서 인간의 경험에 의존하는 경향이 짙은 것이었다. 성경신학적 이해가 크게 결핍된 당시의 이 주제중심의 제목설교는 상당한 호소력을 지니고 있었다. 제목설교는 예화를 필요로 했으므로 정성구에 의하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한국장로교회의 최초의 신학 잡지인 ?신학지남?에서는 설교에 필요한 예화들이 “강도에 인용할 만한 비유”라는 제목으로 3호부터 게재되기 시작하였다고 지적한다.7) 다시 말하면 한국교회 초기부터 다양한 예화가 설교에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고 설교 형식은 제목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설교의 내용은 복음과 영생, 속죄, 구원, 하나님의 사랑 등이 포괄적 주제였는데, 그것은 당시의 시급한 요청이었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의 설교는 천당과 지옥, 예수와 사탄, 선과 악 등을 대비하여 설교하는 단순한 것이었고, 그 내용은 복음적이었다. 이런 초기 교회적 설교경향은 1970년대까지 주된 설교양식이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설교방식이 그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 설교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고 또 끼치고 있다는 점이다. 초기의 한국의 신자들은 대체적으로 유교적 전이해(前理解)를 가진 이들이었기 때문에 설교는 자연히 도덕적인 혹은 유교적 가르침에서 기독교의 그것과 유사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특히 강조하는 성격이 짙었다. 다시 말하면 설교에서의 도덕적 성격이 짙었다. 초기 한국인 설교 또한 선교사들의 설교 형식에서 탈피하지 못했다.



2.2 초기(1920년대까지) 한국인 목회자들의 설교

앞에서 언급했듯이 초기 한국교회는 선교사들의 절대적 영향 하에 있었으므로 설교에 있어서도 선교사들의 설교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인 사역자들의 설교란 선교사들의 그것을 모방하는 경향이 농후했다.

이 당시 주로 활동한 설교자로는 1907년 목사안수를 받은 7인의 목사인 서경조(1852-1938), 한석진(1868-1939), 양전백(1870-1933), 방기창(1851-1911), 길선주(1869-1935), 이기풍(1865-1942), 송린서(?-1967)와 김익두(1874-1950), 감리교의 전덕기(1875-1914), 최병헌(1858-1927), 김종우(1883-1940) 등이었다. 비록 목사안수는 받지 않았으나 근대 한국인으로서 최초의 신학도였던 윤치호(1865-1945)도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이들의 설교를 헤아려 볼 수 있는 자료는 1920년에 출판된 ?백목강연?(白牧講演)8)인데 이 설교집은 한국 최초의 설교집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설교집에는 주로 1910년에서 1920년 어간에 교회에서나 기타 모임에서 선포된 설교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설교집을 중심으로 고찰해 볼 때 이 시기 설교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9)


1) 영생과 구원, 하나님의 사랑 등 구원에의 초청이 주된 선포였다는 점
2) 새로운 윤리의 표준으로서 기독교 신앙을 제시하고, 해야 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강조하는 계율적인 요소가 짙었다는 점
3) 도덕적 요소, 곧 권선징악(勸善懲惡) 혹은 상선벌악(賞善罰惡)적 강조에 치우쳤다는 점
4) 현세적 삶에서의 신앙보다는 내세적인 경향이 짙었다는 점
5) 충군애국(忠君愛國)적 설교가 많았다는 점이다.

이 당시 설교자들이 본문설교(textual serman)를 시도하기도 했으나 그것은 한국어 설교의 자구적(字句的) 해석에 지나지 않았다. 성경신학에 대한 이해나 신학전통에 대한 이해가 결핍되어 있었으며 진정한 의미의 본문설교이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성경본문을 exegetish 하기보다는 eisegetisch하는데 그쳤다.10) 그래서 설교의 형식은 여전히 제목중심의 풍유적(allegorical) 설교와 유비적(analogia) 설교가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이 당시로 볼 때 풍요적 설교는 설교자에게나 청중들에게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풍유적 설교란 본문보다는 본문 배후에 있는 뜻을 밝혀내는 것을 해석의 중요한 과제로 삼기 때문에, 이런 설교는 설교자의 영적 능력을 과시하는 것으로, 청중들에게는 영적 신비로움으로 받아 드려졌던 것이다. 아마도 이런 매력 때문에 오리겐(Origen) 때부터 이런 설교가 유행했는지 모른다. 유비적 설교란 성경의 가르침을 한국적 상황에서 비유적으로 설교하는 방식인데 이런 유형은 당시의 지배적인 방식이었다.

이 시기 설교는 그 내용면에서 선교사들의 설교와 두 가지 면에서 달랐다. 그것은 설교에서 도덕적 요소가 강했다는 점과 충군애국적(忠君愛國的) 성격이 짙었다는 점이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헤아려 보는 것이 유익하다.

1870년대를 거쳐가면서 조선은 더 이상 ‘은자의 나라’(Hermit nation) 이거나, ‘조용한 아침의 나라’(Land of Morning Calm) 일 수 없었다. 배외쇄국(排外鎖國)의 이데올로기는 외세에 의해 허물어져 가기 시작하였고, 흥선대원군의 실각(1873)과 운양호사건(1875)으로 조선은 비무장 한 채로 냉엄한 국제질서의 현장에 노출되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런 민족적 위기 앞에서 기독교는 우리나라에 전래되었고, 교회는 민족과 함께 있어 왔다. 또 임오군란(1882)을 전후한 청과 일본의 각축전, 그리고 러시아의 남하정책, 동학혁명, 갑신정변(1884), 청일전쟁(1894-5), 민비시해사건(乙未事變, 1896) 의 와중에서 백성들은 어떤 구원의 손길을 갈망하고 있었다. 선교사들이 발간하던 코리안 리포지토리(Korean Repository)에서는 “이 가련한 조선인들은 고난과 불안의 와중에서 두 손을 뻗쳐 하나님을 찾고 있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독립신문?의 시각처럼 충군애국(忠君愛國)과 신앙구국의 길을 걷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한국인들의 설교는 이중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파악된다. 즉 순수한 복음에의 초청과 신앙구국의 소명이 그것이다.



2.3 1930년대 이후의 설교

1930년대를 거쳐 가면서 한국교회에는 신학적 변화가 일고 있었다. 그 변화를 3가지로 말할 수 있는데, 첫째는 자유주의 신학의 대두였다. 한국교회 초기부터 성경적 설교를 했던 분이 사무엘 마펫(Samuel Moffett)인데 그는 1934년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오늘 어떤 신 신학자들은 나를 너무 보수적이라고 비난한다. ...... 근래에 신 신학이니, 신 복음이니 하는 말을 하며 다니는 사람이 있는 모양인데 우리는 그러한 인물을 삼가야 한다. 조선에 있는 선교사들이 다 죽는다든지, 혹은 귀국하든지 조선교회 형제여 40년 전에 전파한 그 복음을 그대로 전하자” 11) 이것은 자유주의 신학의 출현에 대한 분명한 경고였다. 자유주의 신학이 보다 분명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1930년대이지만 이미 1920년대 후반부터 이 신학은 태동되고 있었다. 소위 자유주의 신학에 근거한 설교가 함경도 지방을 중심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12) 한국초기의 복음주의적 설교가 1930년대를 거쳐 가면서 비록 제한된 범위 안에서 나타난 현상이기는 하지만 자유주의적 설교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첫 인물이 김장호(金庄鎬, 1881-?)목사였다. 그는 공개적으로 성경의 기적을 부인하기 시작하였다.13)

두 번째로는 신비주의 혹은 신령주의(神靈主義)의 대두였다. 이 운동은 주로 원산에서 일어났는데, 비신학적 주관적 성경해석, 예언과 방언, 신림(神臨)을 강조하였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황국주, 백남주, 이용도 등이었다. 이용도는 독일의 에크하르트와 비교되기도 했는데, 그의 부흥집회를 통해 나타난 신비주의적 경향성은 암울한 이 시기의 영적 탈출구였다. 자유주의가 ‘교회 없는 신학’운동이었다면, 신비주의 운동은 ‘신학 없는 교회’ 운동이었다. 결국 신비주의는 신학적 전통을 무시하는 주관주의 운동으로 발전하여 교회에 적지 않는 해악을 끼쳤다.

셋째는 무교회주의의 대두이다.14) 무교회가 일본의 교회에 큰 영향을 주었듯이 한국교회에도 적지 않게 영향을 주었다. 무교회주의는 경남 일우(특히 김해지방)에서는 신진리파(新眞理派)란 이름으로 나타났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무찌무라 간조의 책이 없는 목회자들이 거의 없었을 정도로 그의 책은 한국인 목회자들 사이에 폭넓게 읽혀졌다. 그러면 왜 무교회주의자들의 저술이 그처럼 애독되었을까? 당시 한국인들의 저서나 저작은 많지 못했고, 일본의 기독교 관계 서적은 쉽게 유입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한국인 목사들은 대체적으로 영서(英書)는 읽지 못했으나 일본어는 읽을 수 있었으므로 후지이 다께시(藤井武),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 1861-1930), 야나이하라 다대오(失內原忠雄) 등의 무교회 인사들의 저작은 요긴한 설교의 안내서였고, 이들의 저작은 소리 없는 영향을 끼쳤다. 또 한국 설교자의 설교에 만족하지 못했던 의식 있는 젊은이들은 보다 차원 높은 가르침으로 인식했던 무교회주의자들의 서적에 탐닉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무교회주의는 한국교회에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물론 무교회 인사들의 저서 외에도 구로사끼 고기찌(黑崎幸吉), 가가와 도요히꼬(賀川豊彦) 등의 저서들도 한국인 목회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어떻든 이상과 같은 한국교회의 신학적 변화와 함께 1930년대를 거쳐가면서 한국교회의 설교가 그 내용면에서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그 이전 시대의 설교는 복음적인 성격이 강했고 그 내용이 단순했으나, 이제는 주관주의적인 신비적, 탈교의적 설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어떤 점에서 설교는 설교자의 신학을 반영한다.

이 시기 대표적인 설교자들은 장로교회의 경우, 길선주(吉善宙, 1869-1935), 김익두(金益斗, 1874-1950), 오인명(吳仁明, 1893-1976), 주기철(朱基徹, 1897-1944), 감리교의 경우는 이용도(李龍道, 1901-1933), 성결교의 이명직(李明稙, 1890-1973), 이성봉(李聖鳳, 1900-1965) 등이었다.

이 시기 설교를 헤아려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자료는 ?조선의 강단?15), ?한국교회 순교사와 그 설교집?16) 그리고 ?희년기념 목사 대 설교집?17) 이다. 후자의 경우 당시 목회자들의 170여 편의 설교가 게재되어 있는데, 다소 특이한 점을 말한다면 3가지 사실을 지적할 수 있는데, 첫째 주관주의적, 신비적, 그리고 탈 교의적 성격의 설교가 있다는 점, 둘째로는 설교배후에 민족의식이나 그 성격이 나타나 있다는 점, 셋째로는 내세 지향적 성격이 강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특징은 이 시대적 상황과 관련되어 있다. 정치적으로 볼 때 1930년대 이후는 민족적 시련기였고 역사 현실에서의 소망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만주사변(1931), 상해사변(1932), 중일전쟁(1937) 그리고 태평양전쟁(1941)에 이르기까지 ‘15년 전쟁’은 한국인들에게 현실적 허탈감을 안겨 주었다. 역사현실에서의 구원의 가능성은 무망했던 것이다. 현실이 암담하면 할수록 내세 지향적, 묵시문학적 성격이 힘을 얻게 된다. 또 현실에서 기대할 수 없는 것을 내세에서 구하고자 하는 경향이 나타나 탈 역사적 상황이 나타난다. 그래서 이 시기 설교는 묵시문학적 성격이 강했다.

또 구약의 출애굽기, 다니엘이나 에스겔서, 그리고 신약의 계시록에 대한 설교가 의식 있는 설교자의 중요한 본문이 되었다. 공개적으로 말하지는 않았다할지라도 출해굽기를 설교하면서 민족해방을 고취하려고 하였고, 에스겔 골짜기를 통해 민족의 소망을 주려고 했다. 후일 총독부가 출애굽기나 에스겔서 요한계시록을 설교하지 못하도록 금지한 사실에서도 설교에 있어서의 민족의식은 분명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런 것이 그 당시 설교의 전부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특히 장로교목사들의 설교는 자유주의나 신비주의, 그리고 무교회주의에 대항한 변증적 설교도 적지 않았다.


이 글에서는 1930년대 이전과 이후 교회에 큰 영향을 준 장로교회의 3목사, 곧 김익두, 길선주, 주기철의 설교에 대하여 간단히 정리해 두고자 한다.

장로교회의 길선주목사(1869-1935)는 29세 때 친구인 김종섭의 인도로 신앙을 갖게 되었고 1907년 한국교회 대부흥운동 기간에는 부흥의 역사를 불러온 한국인 주역이었다. 그의 설교 제목들인, “지옥을 취하랴, 천당을 택하랴?”, “마음의 문을 열고 성신을 영접하라” 등이 보여주는 바 처럼 그의 설교는 복음적이고 성령의 역사를 구하는 내용이 많다. 그는 설교의 목적을 “죄의 더러움과 마귀의 권세 가운데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광명한 빛 가운데로 인도하는 행위”18)로 보았기 때문에 그의 설교는 회개, 중생, 그리스도의 대속이 중심을 이루었다. 그의 신학 중 종말론은 다소 특이한 점이 있다. 그는 전천년설을 주장했는데, 특히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을 믿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의 재림을 강조하였다. 재림이야말로 영생세계의 전제이며, 복음의 승리요, 교회의 결론이라고 보았다.19) 길선주목사는 회개 중생, 대속, 곧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내세적 소망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의 현세적인 민족의 구원과 해방을 강조한 점이 특이하다. 그는 성경을 다독했지만 특히 요한계시록은 1만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는 내세적 소망을 강조하는 많은 설교를 했는데 이것은 암담한 현실로부터의 탈출이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설교 속에는 민족 현실에서의 독립과 해방의 메시지를 선포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두 가지 경향성, 곧 내세적인 것을 그토록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역사 현실의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많은 해석자들은 한 사람이 내면적, 영적인 것에 깊이 심취하면 심취할수록 현실적인 것에 무관심하고, 반대로 현실문제에 집착하면 할수록 영적인 문제에 무관심해진다 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견해가 옳지 않다는 점을 길선주의 삶과 설교를 통해 보여준다. 그는 영적 지도자인 동시에 민족의 지도자였고, 그에게 양자의 동시성이 있었다.20)

또 한사람의 설교가인 김익두목사는 부흥운동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1910년 목사안수를 받았고 1920년에는 장로교 제9회 총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1921년부터 부흥사로 활동하기 시작하였고 곧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부흥사가 되었다. 그가 특별히 강조한 것은 회개와 기도였다.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 천당 등이 설교의 중심 주제였다. 따라서 그의 설교는 복음적인 것이었고 그 내용은 매우 단순했다. 그는 이적을 행했으나 그것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상당한 신뢰와 지지를 얻고 있었고 따라서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그의 영향으로 약 200여 명이 목사가 되었는데, 진보적 신학자 김재준(金在俊), 순교자 주기철(朱基徹)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의 설교에는 계몽적인 측면도 없지 않았다. 그는 미신과 악습을 폐지하고자 시도하였다. 앞서 언급한바 있는 김장호목사가 자유주의적 설교를 했을 때, 그는 김장호의 신학과 설교에 반대하고 순수한 복음, 곧 구원과 영생의 도를 설교의 중요한 주제로 삼았다.

주기철(1897-1944)은 이 시기에 영향을 끼친 또 한사람의 장로교 목사였다. 어떤 점에서 그의 영향력은 그가 살아 있을 때보다 그가 순교한 이후에 더욱 컸다고 볼 수 있다. 김익두목사의 부흥집회에 참석하여 목회자의 길을 결심한 주기철은 1922년 3월 평양의 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925년 9월 이 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후 그는 부산 초량교회(1926-1931), 마산 문창교회(1931-1936), 평양 산정현교회(1936-1944)에서 시무하였고, 신사참배 반대로 1938년 2월 제 1차 검속 이후 약 7년간 투옥되었다가 1944년 4월 21일 밤 49세를 일기로 순교하였다.

그의 설교가 어떠했는가를 논함에 있어서 문제점은 그가 직접 쓴 설교원고는 불과 몇 편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의 설교는 현재 32편이 남아 있으나21) 그가 직접 쓴 설교는 오직 7편에 지나지 않으며22) 주목사가 남긴 설교 요약문을 기초로 김인서(金麟瑞)가 확대한 것이 9편이다.23) 그 외의 15편 중에서 2편은 김인서가 주목사의 설교를 듣고 기록한 것이며24), 1편은 유기선(劉基善)이 들은 설교를 김인서가 기록한 것25), 2편은 이숙경(李淑京)이 들은 설교를 김인서가 기록한 것26), 나머지 6편은 밀양읍 교회 주남석(朱南石)장로가 기록한 것이다.27) 물론 이 설교를 통해서도 주기철의 설교의 내용과 형식을 헤아릴 수 있으나 그의 설교는 그의 삶의 여정 속에서 읽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의 설교에는 하나님 중심 사상, 신전의식(神前意識)과 영적 생활, 신앙적 절개, 예언자적 성격 등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 그의 설교에서 특이한 점은 불의한 권력에 대한 예언자적인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설교가 1935년 5월초 금강산 수양관에서 200여 목사 앞에서 행한 “예언자의 권능”이라는 설교다. 이 설교는 결국 일경에 의해 중지 당 했으나, 그는 엘리야, 예레미아, 세례요한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예언자적 권위를 강조하였다. 이 설교에는 불의한 권력에 대한 강한 저항사상이 나타나 있다. 동시에 신앙적 정의를 지켜 가기 위한 불의한 권력에 대한 투쟁과 예언자적 역할을 강조하였다. 그는 이 설교에서 설교를 “하나님의 예언적 음성”(the prophetic voice of God)으로 인식하였다.


그의 신사참배 반대와 저항에 대해 두 가지 잘못된 해석이 있어 왔다.28) 첫째는 그의 신사참배 반대 자체를 무의미하게 보는 견해이며, 다른 한 가지는 주기철의 삶과 순교를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다. 그에게 민족의식이 강했던 것은 사실이나 그의 삶의 여정을 민족주의 관점에서 읽는 것은 그의 삶의 의미를 왜곡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런 해석이 잘못이라는 점은 특히 그가 1936년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행한 “3가지 신앙”이란 제목의 설교에 잘 나타나 있다.29) 그는 길선주나 김익두 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민족의식과 복음운동을 구별하고 있었다. 그는 순수한 복음주의자였고, 그의 삶과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신뢰와 순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는 가장 민족적일 수밖에 없는 삶의 여정가운데서도 가장 선명하게 복음의 핵심과 민족적인 것을 구분하고자 했다.


해방이전까지의 설교를 정리해 보면 내용 면에서 다음의 몇 가지 특징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순수한 복음적인 설교로서 이교적 문화나 관습을 버리고 복음적인 삶을 살도록 요청하는 내용이다. 이 경우에 성수주일, 금주, 단연, 조상제사 금지30) 등 구습으로부터의 탈피를 요청하는 성격이 강했다. 둘째 내세 지향적이고 탈 역사적인 설교가 많았다는 점이다. 일부의 의식 있는 설교자의 경우는 예외이겠지만 대체로 설교는 내세 지향적이었고, 역사현실에 대한 관심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지는 않다. 셋째 민족 현실과 해방,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설교도 이 시대 설교의 한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이런 경향의 대표적인 인물이 감리교의 전덕기(全德基)였다. 이런 특징은 그 이전에도 있었지만 여전히 이 시대 설교의 한 유형이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이런 설교는 많지 않고, 또 이 당시 출판된 설교에는 분명히 드러나 있지는 않다. 그것은 총독부의 검열 때문에 의도적으로 삭제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어떻든 모세나 여호수아의 생애와 활동이 설교되었고, 에스겔과 다니엘서가 의도적으로 설교되었으나 그것이 보편적인 현상이었다는 증거는 없다. 정성구는 성서공회의 부총무였던 허엽(許燁)목사의 설교, “연중총”(燃中叢)을 민족해방을 고취하는 비유적 설교로 지적하고 있으나31) 사실 그런 성격의 설교로 보기에는 상당히 미흡하다. 허엽목사는 출애굽기 3:2절을 본문으로 불속의 가시덤불이란 의미의 이 설교32)에서 “불쇽의 가시덤불은 환란중에 예수교회와 ?다 ?수 잇으니 불노 사를지라도 업셔지지 아니?니다.”라고 하고 있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민족 구원을 비유적으로 설교했다고 보기에는 미흡하다.

설교의 형식면에서는 해방 이전까지 여전히 제목설교, 보범적 설교가 유행하였고, 도덕주의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일제말기 일제의 탄압은 더욱 가중되었다. 예배와 설교, 찬송에 대한 세심할 정도의 간섭은 당시 교회의 설교가 민족해방과 독립을 고취한다고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교회의 공식적인 집회를 제한하였고, 민족해방이나 민족주의 성격이 강한 출애굽기나 다니엘서, 내세사상이 강한 요한 계시록 등을 삭제하고 설교하지 못하도록 요구하였다. 찬송 중에는 “내주는 강한 성이요”나 “믿는 사람들아 군병 같으니,” “천부여 의지 없어서” 등은 부르지 못하게 하였다. 일제는 ‘종교보국’(宗敎報國) 혹은 ‘일본적 기독교’를 의도하였고, 한국기독교회를 소위 ‘국체(國體)를 밝히는 야소교’로 강제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시기 한국의 자유주의 신학과 그 설교는 일제의 민족정신 말살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비극적인 지성’으로 전락하였다. 다시 말하면 일제는 우리 민족 밑바닥에 흐르는 민족의식, 독립정신 등을 제거하고자 했다. 그래서 앞서 언급한 바처럼 민족해방의 전거(典據)가 될 수 있는 출애굽기나 에스겔서, 다니엘서 등을 설교하지 못하도록 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출애굽시의 홍해를 건넌 사건은 민족해방이라는 조선의 현실적 과제 앞에 소망을 주고 있었다. 그런데 자유주의자들은 홍해를 갈대밭으로 설명함으로서 홍해 도강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말하자면 일제가 그토록 추구했으나 이루지 못했던 민족의식의 기초를 제거하는 일을 자유주의자들이 대신한 것이다.



2.4 해방 후 1950년대의 설교

1945년 해방 이후 한국교회에서는 교회재건, 회개, 자숙이 강조되었다. 해방과 함께 교회재건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이것은 노회나 총회 등 일제하에서 해산된 기구적 재건이 아니라 영적 쇄신이었다. 영적 쇄신이란 바로 회개와 자숙운동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 설교는 교회재건과 회개, 자숙을 강조하는 경향이 짙었다. 특히 이런 경향은 1952년 총노회의 조직으로 출범한 고신교회는 더욱 그러했다.33) 고신교단은 일제하에서의 신사참배 죄에 대하여 철저한 회개를 강조하였는데 그것은 해방된 조국에서의 새로운 교회건설의 기초라고 보았다.

한상동목사가 ?파수군? 2호에 쓴 논설 “현하 대한교회에 (上) ”34)는 사실은 논설이 아니라 설교였다. 우상숭배와 불신앙의 길을 걸어 온 한국교회에 대한 진노를 선포하고 진정한 회개를 촉구한 이 글은 이 당시 설교의 방향을 대변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52년 9월 2일 진주 성남교회에서 고신교단의 첫 치리회인 총노회를 조직할 때 설교자인 이약신목사의 설교 제목이 요한일서 2장 12-17절에 근거한 “하나님 앞에서 자숙하자”였다. 1950년대 고신교회는 이런 기초 위에서 하나님 앞에서의 생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폭적인 순종을 강조하였다. 비진리에 대한 불 타협적인 생활의 엄격성은 설교의 주된 요구였다. 이런 점 때문에 한국의 다른 교회들로부터 바리세주의라는 비난과 지나칠 정도의 의도적 폄하가 없지 않았다.

이 시기 존경받던 인물이었던 손양원목사는 “성경대로 살자”는 설교를 즐겨했는데, 이 설교35)는 1950년대 설교의 주된 주제였다. 이런 경향 때문에 당시 설교가 비블리시즘으로 흐르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성경신학적인 고찰이나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통전적인 이해 없이 문자적 엄격성이 곧 진리 파수라고 믿는 순진함이 바로 그것이다. 어떻든 1950년대 설교자들은 진리 파수와 진리운동의 계지(繼持)를 설교자들의 중요한 임무라고 인식하였다. 그래서 설교에 있어서 성경적 원리 혹은 원칙은 강조되었으나 그것의 실생활에서의 적용은 미흡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1950년대 설교에서 천국의 소망과 함께 하나님의 통치와 심판을 강조한 것은 특기할 점이다. 이것은 뚜렷한 역사의식을 반영해 주는데, 하나님께 대한 소망과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 대한 확신은 이 땅에서의 신자의 삶의 행로를 결정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한상동을 비롯한 출옥성도들의 설교 속에는 하나님의 역사 심판에 대한 의식이 설교와 생활, 그 기저에 확연히 나타나 있다. 따라서 그들의 설교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소망, 신전의식, 거룩한 생활을 강조하였다. 한상동목사의 설교집 제목, “신앙세계와 천국”, “고난과 승리”는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신뢰와 소망, 그리고 역사통치와 심판에 대한 그의 생애적 확신을 대변해 주는 것이었다.
이 당시로 볼 때 그래도 목회자들은 본문설교에 치중하였다. 비록 제목 설교라고 할지라도, 본문의 의미를 천착하고자 노력하였고, 예화나 사적 경험보다는 성경을 인용하고 성경의 교훈을 제시하려고 힘썼다. 어떤 점에서는 강해설교에 가까운 설교를 시도하였다고 볼 수 있다.



2.5 1960-70년대의 설교

1960년대는 한국사회의 중요한 변혁기였다. 이 새로운 한 시기는 1960년 학생혁명과 이듬해의 5. 16 군사혁명으로 시작되었다.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정권은 경제성장을 제일의적 과제로 추구하였다. 이것은 군사혁명의 당위성을 꾀하는 명분확보로 강조되었다. 경제성장은 궁국적으로 물질적 부요를 추구하는데, 이 시대의 구호 ‘잘 살아 보세’철학은 정신적 가치에 대한 관심을 배제한 체 물질적 풍요를 향한 최선의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따라서 1960년대 이후 한국사회에는 물질주의 혹은 성장지상주의(成長至上主義) 이데올로기가 뚜렷이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성장지상주의란 이름 그대로 경제성장을 제일의 가치로 수용하는 사회공동체적인 인식인데, 경제성장을 추구함에 있어서 특히 GNP의 성장에 가장 큰 초점을 맞추는 가치체계를 의미한다. 좀 천박하게 말하면 돈이면 제일이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성장지상주의는 다른 모든 규범에 선행하는 보편적 가치로 추구되었고 197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문제는 이런 성장제일주의는 ‘성장’ 이외의 가치는 경시하거나 무시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성장만 이룰 수 있다면 다른 것은 무시하거나 경시해도 된다는 사고이다. 그래서 한국에 수많은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를 양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바로 이런 한 시대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1960년대 이후 한국교회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960년대를 거쳐 가면서 한국교회가 크게 성장하기 시작하였고,36) 이 시기 ‘교회성장’은 최선의 요구이자 최선의 가치였다. 그래서 이 시기의 설교의 가장 주요한 주제는 성장이었다. 그래서 전도운동이 강조되었고 총동원 전도라는 이름의 대중 초청집회가 유행했다.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눅14:23)37)는 교회의 표어이자 설교의 주제였다. 전도가 강조된 사실 자체는 좋으나 하나님의 나라 건설이라는 넓은 의미의 전도명령의 수행이라기보다는 개 교회 성장에 보다 큰 강조점을 둔 교회의 수적 확장을 의도한 것이었다.
또 물질적 풍요와 축복이 강조되었다. 기독교 신앙은 물질적 축복을 위한 전거로 강조되었고 현세적 안녕이나 소원성취를 위한 방편으로 강조되었다. 이 시기에 흔한 설교제목은 ‘축복의 비결,’ ‘축복 받는 생활’ 등 이었고, 신명기 28:1-6, 빌립보 4:13, 요3:1-2 등은 인기 있는 설교본문이었다.38) 그래서 기복신앙(祈福信仰)은 이 시기의 한국교회의 특징이 되고 있었다. 이러한 신앙양태는 심각한 문제를 지니고 있었다. 구약은 한국특유의 기복신앙의 관점에서 축복과 저주라는 맥락에서 이해되었고, 이를 위한 모범으로 그리고 예화로 인용되었다. 특히 이 시기 많은 설교자들의 성경해석은 알레고리칼(allegorical)한 것이었다.


이 시대의 축복 지향적 설교와 목회 경향성에 영향을 준 것으로 위에서 언급한 박정희 정권의 경제제일주의 정책 외에도 두 가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그 첫째는 서울 순복음교회의 조용기목사의 영향으로 판단된다. 조용기(趙鏞基)목사는 현재 세계 최대의 교회를 세운 인물로 세계교회에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현재에도 한국 교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조용기목사는 1958년 5월 서울 서대문구 대조동에서 천막교회를 시작하였고, 1970년 현재의 여의도로 이전하여 세계 최대의 교회당을 건축하였고 약 50만의 신자를 가진 교회로 성장하였다. 그의 설교는 각종 전파를 타고 전국에 소개되었고, 그의 순복음중앙교회는 성장하는 교회의 모델로 목회자들의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 고신의 목회자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신의 목회자들조차도 교회만 성장한다면 신학은 문제시하지 않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이런 교리 경시 풍조가 1970년대 이후 한국교회를 지배하였다. 우리는 이런 시대적 경향성을 ‘비교리적 시대’(undogmatic age)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이 시대의 경향성은 이 시기 설교에도 뚜렷이 반영되었다.
다른 한 가지 영향은 풀러신학교 교회성장학파(Church Growth School)의 영향으로 판단된다. 1970년대 이후 이 학파의 이론이 각종 세미나에서 소개되었고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가지 예는 이 시기에 시작된 아시아 연합신학대학(ACTS) 목회학 박사학위 논문제목에 잘 나타나 있다. 아시아연합신학대학은 1970년대 말부터 미국 풀러신학교와 연계하여 목회학 박사학위과정(DMin Programme)을 개설하였는데, 1983년 첫 학위를 수여한 이후 1997년까지 234명에게 목회학박사 학위를 수여하였다. 그런데 이들 중에 직접적으로 교회성장의 문제를 취급한 논문이 84편으로 전체논문의 36%에 달했다.38) 간접적인 논문까지 고려한다면 약 40%의 논문이 교회성장과 관련된 논문이고 그것도 개 교회를 중심으로 한 사례 연구이다. 특히 이 논문들은 기본적으로 풀러신학교 교회성장학파의 이론에 근거하고 있다. 이 점을 보면 교회성장이 목회자들의 가장 큰 관심사였고, 풀러신학교의 교회성장학파의 영향이 지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시대적 경향성 때문에 이 시기 설교는 물질적 축복을 강조하는 경향이 지대하였고, 흉(凶)과 화(禍)를 피하고 길(吉)과 복(福)의 추구를 신앙의 이상으로 삼기 때문에 차원 높은 생활윤리나 공의(公義), 가치의식, 혹은 삶의 문제를 제시하지 못했다. 결국 이것은 기복신앙이라는 왜곡된 형태의 신앙행태를 불러왔다. 기독교 신앙을 양제(讓災)나 치병(治病) 등과 같은 측면으로만 본다면 본래적 기독교회가 가르치는 이타적(利他的) 성격은 크게 훼손되고 말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국교회 현실에 대해 자성과 비판이 있었다는 점은 매우 다행한 일이었다. 이 비판은 미국 나성한인교회 담임목사로 일하던 교회사학자 김의환박사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는 한국교회에 풍미하는 그릇된 축복지향적 설교와 목회형태에 문제를 제기하고, 성경적 축복이 무엇인가를 제시하는 ?성경적 축복관?이란 책을 1981년 출판하였다.40) 이런 책이 출판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 시대의 문제의 심각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한국교회는 중병을 앓고 있다고 진단하고, “예수 믿으면 세상에서 잘 된다는 값싼 복음 때문에 복을 받기 위해 몰려든 무리를 보고 부흥되고 있다고 자랑하는 한국교회가 되었다.”고 개탄하였다. 그리고 축복개념이 지극히 물량적인 차원에서 취급되고 있음을 경고하였다.41) 그리고 이재야말로 번영의 신학(theology of prosperity)을 극복하고 복음의 바른 이해, 곧 건실한 신학운동이 필요한 때라고 지적하였다.42)

성장지상주의는 종교개혁자들이 참된 교회의 표식으로 일컬어 왔던 정당한 치리(治理)의 시행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엄격했던 치리가 사라지고 교회의 연대성, 공동체적 성격이 파괴되었고, 결국 개교회주의가 심화되었다. 그래서 이 시대의 설교는 “번영을 위한 설교”(preaching for prosperity)였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주로 보수적인 혹은 복음주의적 교회를 중심으로 언급했지만 1970년대 이후의 진보적 교회의 설교는 박정희정권에 대한 저항이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가 아니라, 저항의 설파였고, 인권과 민주화는 설교의 주제였다. 그래서 인권운동이나 민주화 운동이 강조되었고, 이를 뒷받침 해주는 설교가 행해졌다. 이들의 설교는 시사강연과 같았고, 그 설교는 어설픈 성경인용과 모범적 강조였다. 이는 마치 다윗의 몸에 드리워진 사울의 갑옷과 같았다. 이미 어거스틴이나 17세기 화란의 아메시우스(Amesius, 1576-1633)가 말했지만 성경만이 설교를 위한 유일한 원천이라고 했으나43) 자유주의자는 성경보다는 상황을 더욱 중요한 설교의 원천으로 보았다. 엄요섭은 1970년대의 이런 경향에 대해 “오늘의 어떤 설교자들처럼 성경은 예배순서의 하나로 읽기만 하고 신문 사설 같은 이야기로 열변을 하고 나서 설교를 하였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고 지적했다.44)

여기서 한까지 지적해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은 1970년대 이후 한국교회가 보수, 진보계로 양극화되었던 것처럼, 교회의 설교에서도 양극화 현상이 뚜렷했다는 점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당시 설교의 유형은 보수나 진보가 다같이 모범적(example) 설교였다는 점이다. 비록 설교 내용이나 설교의 목표는 달랐다 할지라도 그 설교의 방식은 모범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보수적인 설교자들은 현세의 축복을 말하기 위해서 구약성경을 모범으로 원용하였고, 진보적 인사들은 구원과 해방을 설교하기 위해서 출애굽사건을 모범으로 해석하였다. 보수와 진보적 설교자들의 차이점이란 ‘무엇을 모범으로 했느냐’의 차이에 불과했다.



2.6 새로운 모색- 1980년대 이후 한국교회 설교

여전히 한국교회에서는 제목 설교와 ‘모범론적’ 설교가 유행하고 있지만 1980년대 초반부터는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 변화란 구속사적(heilsgeschichtlich) 설교45)가 소개되고 설교에 있어서 새로운 시도, 곧 강해설교가 강조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물론 이 시기에 와서 처음으로 강해설교 혹은 성경에 대한 구속사적 접근이 시작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 이전부터 이런 설교를 하는 이들이 없지 않았다. 김홍전(金弘全) 목사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이미 1940년대부터 강해설교자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1980년대를 거쳐 가면서 비로소 구속사적 설교에 대한 관심과 강해설교가 한국에 폭넓게 소개되고 이런 새로운 방식은 상당한 호기심과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새로운 설교에 대한 관심은 화란에서는 이미 1930년대에 전개되었으나 한국교회에서 1980년대에 이 운동이 일어난 것은 격세지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1980년대 초반부터 강해설교에 대한 외국학자들의 책이 번역되고, 강해설교에 대한 저술 혹은 논문들이 발표되기 시작하였다.46)

이와 같은 변화는 그 동안 설교가 지나치게 제목 중심의 모범 위주의 설교였다는 반성이 가져온 결과였다. 제목설교는 두 가지 위험이 있다. 첫째는 메시지의 내용이 성경본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회중의 요구에 맞춘다는 점에서 인간의 사상을 전할 위험이 있다. 다른 하나는 설교가 성경의 사상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의 사상을 전하기 쉽고, 성경이 설교자의 사상을 뒷받침 해 주는 전거(proof reading)로 전락할 위험이다. 말하자면 성경이 우리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성경을 이용하기 싶다. 그래서 패커(J. I. Packer)는 이 점을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종교적 전문가에 의해 퇴색, 변조되게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모범설교 또한 두 가지 위험이 있다. 첫째는 성경의 역사성을 무시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역사적 본문을 모범으로 볼 때 계시의 진정한 의미는 상실된다. 그래서 스킬더는 역사적 본문을 모범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성경의 통일성을 부인하는 것이라 하여 이런 해석법을 “단편적 해석”(fragmentary interpretation)이라고 칭하였다. 이것은 본문을 성경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분리시키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성경을 오직 도덕으로 이해할 위험이다. 그래서 구속사적 의미를 간과할 위험이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 시기에 와서 제목설교 혹은 모범식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적절한 설교방식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한 것만으로도 상당한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대체적으로 젊은 세대 설교자들이 강해설교를 선호하지만 여전히 제목설교가 오늘의 한국교회 설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3. 반성과 평가: 한국교회의 설교 문제와 과제

이상에서 우리는 한국교회에서의 설교가 어떠했는가를 한국교회가 처한 상황과 관련하여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보았다. 설교는 그 시대를 반영한다는 전제 때문이었다. 한국교회에는 설교 구성에 있어서 3대지(三大旨) 설교가 지배적이었다. 이것은 설교의 내용을 3가지 항목으로 요목화(要目化) 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제목설교이든 본문설교이든 동일하다. 이러한 형식의 설교는 이미 초대교회 때부터 있었던 관행이므로 한국교회의 특징으로 볼 수는 없다. 또 이런 설교형식이 설교의 내용을 간명하게 정리하여 준다는 점에서 한국교회에 상당한 유익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설교가 거의 정석으로 이해될 만큼 굳어져 있다는 점에서 한국교회 설교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필자는 이런 설교 관행은 박윤선목사의 영향이 크다고 믿고 있다. 박윤선은 성경전권을 주석한 첫 한국인으로서 그의 주석은 해방 이후 한국교회에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는데, 그의 주석에는 많은 설교가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그의 설교는 거의 전부가 설교하고자 하는 바를 요목화하는 대지(大旨) 중심의 설교 형태를 뛰고 있고 이러한 설교형식이 독자들의 설교 구성에 상당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이런 설교방식의 문제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설교가 성경 본문의 의미를 얼마나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제 종합적으로 한국교회 설교에서의 문제와 과제에 대하여 정리해 보고자 한다.



3.1 ‘모범론적’ 설교

한국교회에 풍미하는 가장 대표적인 설교방식은 ‘모범론적’ 방식인데, 이것은 성경의 인물, 사건, 제도를 통해 어떤 ‘모범’(example)을 찾으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설교는 특히 인물 설교에 집중되는데, 성경의 인물을 우리가 본 받아야 할 이상적인 모범, 혹은 피해야 할 경고적인 모범으로 제시한다. 즉 성경의 인물이나 사건을 하나의 모델로 사용하여 영적, 도덕적 교훈을 취하려는 설교라고 정의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이런 설교는 성경을 통해 우리가 본 받아야 할 어떤 모범을 발견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여기는 설교인데, 이런 방식의 설교를 홀웨다(B. Holwerda)는 ‘모범론적’ 혹은 ‘모범주의적’ 설교라고 명명했다. 홀웨다는 이런 설교는 결국, 성경의 역사를 우리에게 모범이 되는 다양한 독립적인 역사들로 해체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지적한다.47) 이런 설교는 구약의 역사적 본문에서 역사적 간격을 고려하지 않고 평면적으로 비교하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구약시대의 사람들과 오늘날의 사람들 사이의 역사적 단절을 간과함으로서 과거와 현재 사이에 역사적 등식부호(historical equation mark)를 그어 준다. 이런 설교가 대체적으로 구약 사건에서 도덕적 귀감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도덕적 설교로 흐르기 싶고, 결과적으로 성경의 구속사적 멧세지를 상실하게 하는 위험이 있다.


우리가 ‘모범론적’이라고 할 때, 이 "모범"(example)이라는 단어는 영어의 어의처럼 본받아야 할 모범(example)을 의미할 수 도 있고, 어떤 용어나 사건이나 사례를 설명하기 위한 예화(illustration)를 의미할 수도 있는데, 그 지향점이 동일하기 때문에 모범론적인 설교는 그와 유사하거나 동일한 사례나 예화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이런 모범론적인 설교는 많은 예화를 사용하여 주제를 강화시킨다. 이런 설교가 청중들에게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 본문의 진정한 의미나 구속사적 의의를 놓치게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구약 본문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심지어는 본문의 의미를 완전히 왜곡할 수도 있다.

이런 설교는 성경의 세계와 현대 사이의 역사적 문화적 간격(then and now)을 무시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일어난 사건의 특수성을 무시하고 평면적으로 보편화하는 특징이 있다. 또 이런 설교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가운데서 나타나는 성경의 인물들에 대한 진술(description)을 오늘을 위한 규칙(prescription)으로 변형시켜, 본문의 진정한 의미를 왜곡하기 싶다. 성경의 기록자는 그의 독자들에게 어떤 행위의 규칙을 주기 위해 성경의 인물들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설교는 하나님 중심적인 초점을 인간중심적인 초점으로 변질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48) 그래서 성경의 인물들이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어떤 의미, 어떤 사명을 지니고 있는가가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이 성경인물들에 대해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되는강 초점을 두게 됨으로서 인간 행동이 성경 본문의 핵심으로 오인될 수 있다.


근본적으로 이런 설교가 이상적인 설교라고 볼 수 는 없다. 성경은 근본적으로 어떤 인물이나 사건, 제도를 우리가 본받아야 할의 모범으로 제시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리어 구약성경은 인물, 사건, 제도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하고,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이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기술하고 있고,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교훈과 경고를 주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지만 보다 중요한 점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해 무엇을 행하시는가가 더 중요한 것이다. 근본적으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구원의 역사이며, 인간의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성경의 핵심을 놓치기 싶다.49)


이런 설교의 문제점 혹은 제한점은 창세기 50장 15절 이하의 요셉과 형들의 대회를 일예로 들 수 있다. 필자가 조사한 창세기 설교에 대한 한국교회 설교자들의 설교집에서 형들의 죄와 허물을 용서한 요셉의 신앙인격을 강조하고, 사랑과 관용의 덕을 강조하는 내용의 설교가 적지 않았다. 창세기 말미에 기록된 이 본문이 과연 요셉의 인격의 어떤 점을 강조하고 그것이 본문의 핵심인가?


물론 이런 ‘모범론적’ 설교가 한국에서만 행해지는 설교 관행만은 아니다. 이미 1세기 말의 로마의 클레멘트에게서 이런 접근의 흔적이 보이고, 알렉산드리아의 교부들에게서도 이런 유형이 있어왔다. 불트만에 의하면 유대회당에서도 이런 유형의 성경해석이 있어왔다고 한다.50) 화란 개혁교회에서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1930년대에 심각한 토론이 전개된 바 있다.



3.2 풍유화(諷諭化, Allegorizing)와 신령화(神靈化, Spiritualizing)

성경의 세계와 현대 사회 사이에 존재하는 역사적이고도 문화적인 차이를 간과하는 설교의 또 다른 한 형태가 성경 본문을 풍유화 하거나 신령화하는 경우이다. 이 양자는 본문이 주어진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풍유적(諷諭的) 혹은 우의적(寓意的) 해석이라고 일컬어지는 해석법은 성경 문자 배후에 어떤 신령한 뜻(眞意)이 숨어 있다고 보고 그 뜻을 찾아내는 것을 설교의 목적으로 이해한다. 즉 풍유적 해석이란 ‘진리 이면의 진리’(truth behind the truth)를 찾는 해석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방법은 성경의 어떤 구절들은 문자적으로 취급될 수 없고 ‘영적인’ 해석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이런 겨우, 역사적 문맥을 무시하거나 비역사적인 것으로 보는 특징이 있다. 그 이유는 역사적인 것은 우연적이고 유동적인 반면에 영원한 것은 부동적인 존재로 보아 역사적인 것을 참된 실재성으로 받아드릴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 이 풍유적 해석은 본문에 대한 주관적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이런 식의 성경해석과 설교는 헬라(플라톤)철학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에 의해 받아드려지고 오리겐에서 종교개혁 시까지 광범위하게 이용되기도 했다. 오늘의 한국교회에서도 이런 풍조가 편만하다. 영해(靈解)라는 이름의 해석이 이런 범주에 속한다.

이 방법은 3가지 점에서 문제를 지니고 있다. 첫째, 이런 해석은 성경의 ‘역사적’ 문맥을 무시한다. 즉 본문의 본래 주어진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역사적 단절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둘째, 성경을 우의적 내용으로 구성되었다고 보아 우의적 해석만이 성경의 의문을 해결할 수 있다는 잘못된 전제를 가지고 있다. 셋째, 이 방법은 성경을 주관적으로 해석함으로서 본문의 진의를 곡해할 위험이 크다는 점이다.


이런 설교의 대표적인 경우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이다. 누가복음 10장 25절 이하의 본문은 “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누가 우리의 이웃인가를 교훈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적이지만 풍유적 해석은 이 본문의 의미를 완전히 왜곡하고 만다.

종교적인 용어에는 상징적인 뜻이 있고, 우의적 해석을 요하는 본문이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이 방법을 절대시하거나 이 방법에만 의존하면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임의로 해석하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51)


성경해석이나 설교에서 풍류화의 위험성은 일반적으로 인정하지만 신령화의 경우는 간과되기 싶다. 어떤 점에서 이런 식의 설교가 권장되기도 한다. 신령화의 경우는 성경 본문이 주어진 역사적인 실재를 고려하지 않고 그것을 영적으로 유추함으로서 그 때와 지금(then and now)의 간격을 해소하려고 한다.52) 이 방법은 풍유화와 비슷한 방법으로 성경을 이해하지만 보다 광범위하게 받아드려지고 있다. 특히 복음(개혁)주의 설교자들이 풍유적 해석은 멀리하지만 신령화의 문제는 거의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풍유화는 본문의 역사적 의미를 완전히 무시하지만 신령화는 역사적 맥락을 완전히 무시하지 않고, 단지 적용을 위해서 몇몇 요소들만 선택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를 사시기 14장 5-9절을 주해하는 경우에서 보게 된다. 랑게(Lange)는 이 본문에 대한 주해에서 “삼손이 사자의 사지를 찢은 것과 같이 그리스도도 사탄의 왕국과 사망을 찢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부터 우리를 찾아다니는 사자는 지금도 두려움이 대상이다. 사자와의 싸움은 지금에 와서 매일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53)라고 말하고 있다. 랑게는 본문을 신령화하여 오늘의 독자들에게 적용을 시도하고 있지만 이 본문에서 삼손의 위치와 특별히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한 이유를 설명하는 일을 그냥 지나치고 있다. 하나님은 삼손에게 능력이 있음을 보여줌으로서 이스라엘의 사사로서의 직무를 수행하도록 하신 것이지만 이 점은 간과되고 있다. 박윤선박사도 이 본문에서 포도원을 신자의 평안한 생활로, 사자는 마귀로 해석하여 신자는 늘 복음의 전신갑주를 입고 전투해야 할 것이라고 적용하였다.54) 브니엘에서의 야곱의 육체적인 싸움(창32:13-32)을 우리의 영적 싸움을 강조하는 본분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이런 범주에 속한다.

그래서 풍유화처럼 신령화도 본문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는 다리인 샘이다. 역사적 문맥이나 본문을 정당하게 다루지 않는 신령화는 본문의 멧세지를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변형시키는 것이다. 이것 또한 주관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 이렇게 볼 대 존 스탓트(John Stott)가 성경해석에서 ‘역사의 원칙’을 강조한 것은 의미 있는 일 아닐 수 없다.



3.3. 구약본문에 대한 소홀

한국교회에서 구약본문에 대한 설교는 매우 소홀하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한국교회만은 아닐 것이다. 미국교회에서도 신약에 비해 구약 본문에 대한 설교가 상대적으로 작다. 그래서 여류 구약학자인 악트마이어(E. Achtemeier)는 “미국교회가 구약을 상실할 단계에 있으며 구약을 상실한다는 것은 신약을 상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의 복음을 올바로 선포하기 위해서는 구약을 다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55) 그리고 그는 이런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신구약 중 어느 하나의 본문을 택하여 설교할 것이 아니라 성구집(lectionary)을 사용함으로서 구약과 신약의 본문을 하나로 묶어 선포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구약 본문에 대한 소흘은 호주교회에서도 동일하다. 그래서 호주장로교신학교 교수인 나이젤 리(Nigel Lee)는 구약본문에 대한 설교의 극심한 소홀을 지적하면서 적어도 구약설교를 신약본문의 4배 이상해야 균형 잡힌 설교가 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한국교회에 강단에서도 구약이 소흘히 취급되었다. 1982년 한국신학대학의 장일선교수의 조사에 의하면 당시의 대표적인 설교자 20여명이 출판한 설교집에 나타난 설교본문을 조사해 본 결과 구약이 설교본문으로 채택된 경우는 전체 설교의 25% 미만으로서 전체 설교의 4분지 1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구약 중에서도 주로 창세기, 시편, 이사야, 출애굽기에 크게 편중되어 있다고 지적하였다.56) 다시 말하면 빈도에 있어서 구약설교는 전체 설교의 4분지 1에 해당하고 그 중에서도 4권의 책이 주로 설교되고 있으므로 다른 35권의 구약 본문은 비록 의도적이지는 않다 할지라도 거의 무시되거나 경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경향은 현재도 동일하며, 보수주의 혹은 개혁주의적 설교자들에게도 동일하다.57) 이와 같은 현실은 한국교회 설교자들이 구약본문의 역사적 배경이나 신학적 의미에 대해 무지하거나 무관심하다는 점을 반영하고 있다. 또 역사적 본문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에 대한 이해의 결핍 때문일 것이다. 그 결과 구약은 주로 기복신앙을 위한 예증이나 모범으로 이해되었고, 구속사적 관점보다는 도덕적, 윤리적 설교에 치중하였다.



3.4. 신학과 신앙전통에 대한 상대적 무관심

과거와는 대중교통수단의 발전, 자동차의 급격한 보급, 다양한 방송매체에 힘입어 소위 유명한 설교자들의 설교를 자유롭게 들을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 또 구변에 능한 튀는 설교자들이 싶게 부상할 수 있는 환경에 살고 있기 때문에 진지하고도 사려 깊은 설교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희박해 졌다. 성경 본문에 대한 진지하고도 신실한 관심보다는 청중의 요구와 기호에 부응하려는 경향 또한 심화되었다. 기복주의적인 설교, 비신학적인 설교, 혹은 웃기는 설교가 유행하는 현실에서 이런 환경에서 생성된 설교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웃기는 설교나 재미있는 설교가 전적으로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경향은 성경신학적 관심이나 신학과 교회 전통에 대한 관심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래서 한국교회 설교에서 신학적 혹은 교리적 설교나 가르침은 상대적으로 미약했다. 설교에서 건실한 신학 전통이나 신학적 기초가 강조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장로교회의 설교가 감리교나 성결교의 설교와 다른 점이 없고, 침례교회의 설교가 장로교회의 설교와 다르지 않다. 말하자면 신학이나 신앙전통은 설교에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다. 즉 설교에서 ‘비 교리적 성격’이 강하다는 점이다. 물론 설교 속에 기독교의 기본교리와 구속의 도리가 가르쳐지고 있지만 신자의 삶에서 기독교교리 체계를 체계적으로 가르치거나 설교하고자 하는 시도가 매우 빈약하다. 구원서정(ordo salutis)에 대한 설교조차도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설교가 교리나 신학강의 일 필요는 없다. 또 모든 설교가 교리적 설교이어야 할 이유도 없다. 단지 교리적 설교가 결여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할 따름이다. 건실한 신학적, 교리적 기초 없는 설교는 주관주의나 신비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고 설교자 자신의 어떤 것을 고양할 위험이 있다. 그래서 설교자에게 교리, 신학적 기초가 매우 중요하다. 신학적 건실성은 설교에 대한 신뢰도를 높여주기 때문이다.



3.5. 성경 원전에 대한 이해력 재고

한국교회를 갱신하는 최선이 길은 강단의 개혁이며, 강단을 쇄신하는 최선의 길은 성경원전을 해독할 수 있는 언어적, 신학적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설교자에게와 설교를 듣는 청중 양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해명하는 일이다. 번역 성경의 한계를 극복하는 일은 설교자의 임무이자 특권이다. 성경번역자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해소되지 못한 언어적, 문화적 문법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진지한 노력이 있어야 한국교회 설교를 한 단계 높여줄 수 있을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설교자는 성경언어에 박식해야 하고 이러 훈련이 보다 성경적인 설교(biblical preaching)를 가능하게 한다고 믿는다. 이와 동시에 성겨을 바르게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소양을 필요로 한다.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그레꼬-로망사회와 역사와 문화를 아는 것도 설교자가 갖추어야 할 소양일 것이다. 이런 점은 바르게 번역되지 못했거나 불분명한 의미로 번역된 성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일예를 든다면, 요한복음 19장 12절의 “가이사의 친구”(φ?λο? το? Κα?σαρο?)가 “가이사의 충신”으로 번역된 경우나, 로마서 16장 2절의 “보호자”(προστ?τι?, 남성의 경우는 προστ?τ??)라는 단어는 성경언어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로마 사회의 문화를 이해하지 않으면 그 의미를 바르게 해명할 수 없다. 갈라디아 3장 28절의 경우도 헬라어에 대한 이해만이 아니라 그 시대의 사회와 문화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3.6. 목회자의 과다한 설교 횟수 - 설교 갱신의 장애 요인
오늘 한국교회에서 목회자의 과다한 설교 횟수는 설교 갱신의 저해 요인이 되고 있다. 일본이나 외국의 교회 목회자의 경우 일주일에 2, 3차례 설교하지만, 절대다수의 한국의 목회자들은 새벽기도회를 포함하여 6-10회 정도의 설교를 하고 있다. 이것은 대단히 많은 수이며 매 경우마다 성경을 깊이 강해하고 석의적(釋義的) 설교를 할 수 없게 하는 요인에 되고 있다. 따라서 과다한 설교 횟수는 설교 갱신의 장애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4. 맺는 말: 도전 받는 설교

끌라스 루니아(Klaas Runia)는 이미 1980년에 ?도전 받는 설교?(The Serman Under Attack)라는 책을 쓴 바 있다. 이것은 우리 시대가 당면한 현안을 반영하고 있다. 한국에서 설교는 도전 받고 있다. 첫 번째 도전은 소위 ‘열린 예배’라는 이름의 청중 중심의 여흥적 예배이다. 1980년대 후반기를 거쳐 가면서 한국에서는 교회성장이 둔화되었고 여기에 대한 대안으로 소위 열린 예배라는 청중 중심의 예배, 설교가 유행하고 있다. 열린 예배는 예배의 갱신이 아니라 청중의 기호에 영합하는 운동이라는 비판이 없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청중의 요구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재는 ‘설교자’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자’를 요구하고 있다. 이미 1988년 스탠포드 리드(Stanford Reid)가 지적하였듯이 한국에서도 예배가 하나님께 대한 경배(worship)가 아니라 회중을 위한 여흥(entertainments)으로 변모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런 경향성은 말씀에 대한 진지한 요구가 자리를 잃어 가고 있다. 두 번째 도전은 설교에 대한 저조한 기대감이다. 칼빈은 보통 1시간 이상 설교하였고, 스코틀랜드에서의 교회개혁의 선구자인 조지 윗샤트(George Wishart)는 3시간 이상 설교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40분 혹은 그 이상의 설교가 행해졌으나 이제 설교는 25-30분을 이상적으로 보고 있다. 그럼에도 설교에 대한 기대감이 상대적으로 쇠해지고 있다. 이것은 비단 한국의 경우만은 아닌 것 같다. 이미 15년 전인 1988년 미국에서는 ?지루한 설교를 듣는 동안 할 수 있는 101가지 방법?이라는 책이 출판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한국교회의 갱신은 한국교회 설교자의 갱신에 있고 설교자의 갱신은 궁극적으로 양질의 신학교육을 실시하는 것이다. 칼빈이 말했듯이 “설교는 교회의 힘줄인 동시에 그 영혼이다.” 설교를 성경에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섬기는 사역(ministering of the word of god as given in the Scripture)이라고 할 때,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일차적인 과제는 성경 본문의 뜻을 해명하는 일일 것이다. 설교자들이 가져야 할 보다 우선하는 과제는 멧세지를 어떻게 잘 전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설교학적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본문의 멧세지가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해석학적인 관심이다. 청교도 설교가인 윌리엄 퍼킨즈(William Perkins, 1558-1602)의 말처럼 설교자의 일차적인 목표는 성경이 성경자체를 말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오늘의 한국의 현실에서 볼 때, 그것이 좋은 설교인가? 혹은 그 설교가 회중들에게 감동을 주며, 삶의 변화에 도 전을 주었는가 하는 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정직한 설교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이런 논의 자체가 부끄럽기는 하지만 우리 가운데는 미숙한 신학과 정직하지 못한 설교가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바른 설교자를 양성하는 일은 한국교회의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고신대학교 교수




1) “Preaching is the proclamation of the word, the truth as the truth has been revealed." John R. W. Stott, Between Two Worlds, The Art of Preaching in the Twentieth Century (Grand Rapids, Eerdmans, 1982), 85.
2) 곽안련, ?설교학? (대한기독교서회, 1960), 16. 곽안련의 ?설교학?은 최근까지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설교학 교과서로 사용되었다. 1925년 10월 초판이 발간된 이후 1989년 7월 제 26판이 발간되었을 정도로 한국교회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쳤다.
3) 이런 점에 대한 진지한 토론은 Greidanus, S., The Modern Preacher and the Ancient Text: Interpreting and Preaching Biblical Literature (Grand Rapids: Eerdmans, 1988)를 보라.
4) 그 동안 한국교회의 설교에 대한 반성이나 평가가 많지 않았다. 한국교회 설교에 대한 연구로는 정성구의 ?한국교회 설교사?(총신대학교출판부, 1995)가 있을 뿐이다 그 외에도 설교의 갱신, 교회성장을 위한 설교 등의 주제에 대하여 목회학 박사(D Min) 논문으로 쓰여진 몇 편의 글이 있다. 정성구의 ?한국교회설교사?는 저자가 ?신학지남? 192호(48권 4집, 1981)부터 208호(53권 2집, 1986)까지 연제했던 원고를 수정보완하고 재편집한 것이다.
5) 이만열, ?한국기독교 수용사 연구? (두레시대, 1998), 364.
6) 정성구, ?한국교회 설교사? (총신대출판부, 1995), 18. 임희모는 제목설교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의 주된 설교방식이었고, 길선주, 김익두, 박형룡 등은 제목설교의 지지자들이었다고 지적한다(Hee-Mo Yim, Unity Lost- Unity To Be Regained in Korean Presbyterianism, 160). 곽안련은 제목설교의 장점으로 3가지를 지적했다. 첫째, 한가지 주제에 집중함으로 설교의 통일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 둘째, 제목에 대해 충분하고 철저한 토의를 할 수 있다는 점, 셋째, 설교자의 분석 능력과 창의적 능력을 개발한 다는 점이 그것이다(곽안련, 37-38).
7) 정성구, 32.
8) 양익환(梁翊煥)이 편집한 이 설교집 1권은 1920년 5월 경성의 박문서관(博文書館)에서 출판되었다. 본래는 백인의 설교를 수록하여 4권의 ?百牧講演?을 출판하려고 기획했으나 애석하게도 2권을 내고 중단되었다. 1권과 2권에는 각각 25인의 설교가 게재되어 있다.
9) 이 분석은 ?백목강연? 1권을 비롯한 당시 설교를 중심으로 한 필자의 분석인데, 이 설교집에는 아펜셀라, 로라복, 게일 등 선교사들과 최병헌, 이명혁, 이명직 등 목사들과의 설교, 홍병선, 이범진, 이병주 등 전도사들의 설교와 김환란, 윤치호, 그리고 이화학당의 교사였던 신준려 여사 등의 설교 총 25편이 수록되어 있다.
10) Hee-Mo Yim, Unity Lost- Unity To Be Regained in Korean Presbyterianism (Peter Lang, 1996), 156.
11) 원문은 다음과 같다. “--- Today some modernists criticize me as a being too conservative --- There are those who go about talking a new theology, a new Gospel, today, but let us beware of them. Even though the Korean missionaries should all die or leave the country, let the brethren of the Korean church continue to preach the same Gospel as forty years ago. --- ” 김양선, ?한국기독교해방십년사? (총회종교교육부, 1956), 190-191 참고.
12) 한국에서 자유주의적인 설교를 한 대표적인 인물은 평양신학교 7회 졸업생인 김장호목사였다. 그는 1914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재령 주재 북장로교 선교사인 공위량(W. C. Kerr)의 비서로 일한바 있는데 아마도 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16년 자유주의적인 설교로 황해노회 총대권을 박탈당한 바 있고, 1918년 12월에는 제 15회 황해노회에서 이단으로 지목되어 면직, 제명당하기도 했다. 그 후 그는 “조선기독교회”를 조직하였다. 1930년대를 거쳐 가면서 주로 캐나다 선교자역에서 자유주의 신학과 그 가르침의 영향으로 자유주의적 설교가 나타났다.
13) 김장호목사의 자유주의적 설교의 두 가지 경우만 소개하면, 첫째 출애굽과정에서 홍해 도강(渡江) 사건을 밀물과 썰물의 예로 설명하면서, 간만의 차를 이용하여 강을 건넌 것이라고 하여 초자연적 이적을 부인하였다. 또 오병이어(五餠二魚) 사건은 기적이 아니라고 하였다. 한 소년이 예수님께 자신이 가져온 도시락을 드렸을 때 감동을 받은 모든 군중이 각자 준비한 것을 내 놓았을 뿐이라고 했다. 이런 설교는 당시로는 큰 충격이었고 한국교회 설교의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후일 그는 제명을 당했고, 당시 대표적인 복음주의자였던 김익두와 일대 논쟁을 벌이게 된다.
14) 흔히 무교회운동은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제자들인 김교신(金敎信, 1901-1944), 함석헌(咸錫憲, 1901-1989) 등 6인이 일본유학에서 돌아온 1927년부터 한국에 소개되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무교회운동은 일본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정 중심의 성경공부를 강조하였고, 문서를 통한 활동을 중시하였다. 마키타(牧田吉和) 고베신학교 교장은 일본에서 무교회 인물은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했다고 지적했는데, 한국의 무교회적 인물들에도 이런 점이 나타나지만 그것이 무교회 신앙체계와 관련된 것으로 볼 근거가 없다. 무교회 신앙잡지인 ?성서조선?의 동인이었던 함석헌은 이 잡지에 “성서로 본 한국역사“라는 글을 게재하였는데 후일 이 책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란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 책은 한국 ‘민족의’ 역사를 ‘신적 섭리’라는 관점에서 기술하였다. 또 김교신은 복음에 대한 강한 열정과 함께 조선의 역사, 민족, 자연에 대해 큰 애정을 갖고 있었다. 그는 조선의 자연과 지형을 노래한 유명한 시를 남기기도 했다.
15) 1928년 김춘배(金春培)목사가 편집한 이 설교집에는 정춘수, 박용의, 오기선, 김길창, 김인영, 전영택, 박형룡, 이명직, 전필순, 배은희, 곽진근, 채필근, 변성옥, 이성휘목사 등 교파를 망라하여 35명의 설교 35편이 수록되어 있다.
16) 김인서가 편찬한 이 설교집(부산: 신앙생활사, 1962)에는 길선주(“감독의 책임”, 행20:28), 김익두(“七重의 좁은 문”, 마7:13-14), 임종순(“금일에 복인가 금일에 화인가”, 신11:26, “신앙의 담력”, 딤전 3:13), 김선두(“내 집을 채우라”, 눅14:23), 낭궁혁(“은총의 삼단계”, 마13:23, “앞으로 나아가자”, 출14:15), 주기철(“삭개오의 신앙”, 눅19:1-10, “예언자의 권위”, 마3:1-12) 목사의 설교 9편이 수록되어 있다.
17) 정인과 편, ?희년 기념 목사 대 설교집? (서울, 1935).
18) 정성구, 위의 책, 143.
19) 정성구, 152.
20) 한국의 진보적 교회사가들은 길선주가 처음에는 민족적인 경향이 강했지만 점차 내세적인 것으로 관심이 전환되었다고 하여 내세적인 측면과 현실적인 측면의 동시성을 부인하기도 한다.
21) 한국교회순교자 기념사업회편, ?주기철설교집? (엠마오, 1992)에는 29편의 설교가 수록되어 있다. 이 책에 수록되지 않는 설교 3편이 있는데, “삭개오의 신앙”(?주간기독교?, 1974. 8월호; 민경배, ?순교자 주기철목사?, 대한기독교서회, 1997, 353-356)과 “기도지남”(?태화여자관?, 1938. 9월호; 민경배, ?주기철?, 동아일보사, 1996, 202), “魔鬼에 대하여”(?설교? 1937. 4월호; ?한국기독교백주년 기념 대설교전집?, 서울 박문출판사, 1974, 제3권, 53ff.)가 그것이다. 이상규, “주기철의 신사참배 반대와 저항”, ?기독교사상연구? 4호(1997. 7), 201 참고.
22) 그가 직접 쓴 7편의 설교는 당시 발간되던 간행물에 게제된 것인데, 다음과 같다(괄호안은 간행물명과 게제호임). “사의 준비”(?종교시보?, 1934, 8), “천하에 복음을 전하라”(?종교시보?, 1935, 2), “마귀에 대하야”(?설교?, 4호, 1937), “무거운 짐 진 자여 예수께로 오라”(?복음시대?, 1호, 1937), “박해하려 가는 길에 홀연 회개”(?복음시대?, 1937, 6), “겸손하기 위하야”(?신학지남?, 1939), “십자가의 길로 행하라”(?설교?, 1937, 9).
23) 이 9편의 설교는 “죄값은 사망”, “구원의 즐거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라”, “영으로 살자”, “새 예배당 입당예배의 기원”, “하나님을 두려워 하라”, “성신을 받으라”, “죽음의 준비”, “영으로 살자” 등이다.
24) 이 두편은 “일사각오”, “많이 준 자에게 많이 취하심” 이다.
25) 이 설교가 “오종목의 나의 기원”이다.
26) 이 두 편의 설교가 “주안에 무소불능”,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 이다.
27) 이 6편의 설교는 “이삭의 공헌”, “하나님을 열애하라”, “성신과 기도”, “하나님 앞에서 사는 생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의 재림” 등이다.
28) 자세한 논의는 이상규, “주기철의 신사참배 반대와 저항,” ?기독교사상연구? 4호, (고신대학교 기독교사상연구소, 1997), 197-232참고할 것.
29) 이상규, 231.
30) 이런 경우를 보여주는 한 예가 전도책자 ?구세론?에 나타나 있다. 이 책에서는 문답의 형식으로 기독교의 정신과가르침을 소개하고 있다.
문: 제사드리는 것이 마땅하뇨, 아니 마땅하뇨
답: 마땅치 아니하다
문: 예수교 하는 사람이 조상에 제사하는 것이 옳으뇨 옳지 아니하뇨
답: 옳지 아니하니, 일체 못하느니라.
문: 어찌하여 옳지 아니하뇨.
답: 조상이 이미 세상을 버리고 갔으니 능히 먹지 못할 것이매 제사는 헛된 일이 되고 또 정령히 여호와 계명을 범하는 것이니 외양으로 제내는 체도 못하느니라.
문: 내가 제사를 아니하면 어지 조상공경하는 마음을 표하리오
답: 조상을 사모하며 그 교훈을 생각하며 그 분부한 것을 좇아 행하며 평생에 잊지 아 니하는 것이 조상 공경하는 마음을 표하느니라. (이만열, ?한국기독교와 민족의식?, 지식산업사, 1991, 223 중인)
31) 정성구, 21
32) 양익환편, ?백목강연?, 42-53.
33) 이 시기 고신교회의 설교의 일반적 특징을 헤아릴 수 있는 대표적인 출판된 자료로는 ?파수군?(1949. 3-1961. 12)에 게재된 고신교단 목사의 설교와 한상동, ?신앙세계와 천국? (부산: 아성출판사, 1970), ?고난과 승리?(고려신학대학 교회문제연구소, 1980), 그리고 이약신, ?어떻게 살아야 할까? (칼빈문화출판사, 1961) 등이다. 또 오종덕목사의 설교 등이다. 고신대학교 신학대학원 도서관에는 한상동목사의 수기본(手記本) 설교 30여 노트가 보관되어 있다.
1950년대의 한국교회의 일반적 설교 경향에 대해서는 ?선교 70주년 기념 설교집 (상), (하)? (대한 예수교장로회 총회 종교교육부, 1954)를 참고할 것.
34) 한상동, “현하 한국교회에 (上), ?파수군?, 2호(1949. 4), 8-13.
35) 손양원, "성경대로 살자", ?파수군? 4호(1950. 4), 3-6.
36) 예컨대, 1955년 한국의 기독교신자는 약 60만 명으로 추산되며 1965년에는 약 120만 명으로 성장하였고, 이로부터 10년 뒤인 1975년에는 약 350만 명, 1980년의 경우 정부 통계에 의하면 개신교 신자가 718만 명으로 집계되어 있다. 그래서 1960년대 이후는 매 10년마다 배가 되었고, 1970년대 후반에는 하루에 6개 교회씩 설립되는 것으로 보고되기도 했다. 수적으로 말하면 1970년대 이후에는 매년 60만 명씩 증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7) 어거스틴은 이 본문에 근거하여 ‘정의에 근거한 경우’에 국가권력을 통해 이단을 박멸할 수 있다고 보고 이단 박멸에 있어서 국가권력의 무력행사를 정당화하는 이론을 제기한 바 있는데, 이것이 compelle intrare이다.
38) 예컨대 어느 목사의 구약설교는 시종 ‘축복’이라는 주제 일변도였다. “아담과 이브의 축복”(창1:24-31), “아브라함의 순종과 축복”(창 22:1-19), “요셉의 꿈의 성취를 통한 축복”(37:1-36) 등이다(예장총회교육부,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설교집?, 상권, 1979).
39) 아시아연합신학 교무처가 만든 “D Min 졸업생 논문제목 및 지도교수 일람표”(1997) 참고. 교회성장과 관련된 논문제목은 “교회성장에 있어서 목사의 역할에 관한 연구”, “교회성장과 설교”, “평신도 신앙훈련과 교회성장” 등과 같다.
40) 김의환, ?성경적 축복관? (서울: 성광문화사, 1981). 이 책은 ?신학지남? 190호(1981, 봄), 192호(1982, 가을,겨울)에 연제하였던 글을 묶은 것이다.
41) 김의환, 위의 책, 9.
42)위의 책, 12.
43) 허순길, ?개혁주의 설교? (기독교문서선교회, 1996), 13, 19.
44) 엄요섭, “한국교회 설교의 시대적 형태론(상),” ?기독교사상? (1972. 4), 126.
45) Holwerda는 이를 “그리스도 중심적”이라고 불렀다.
46) 이 때 출간된 구속사적 설교나 강해설교에 대한 대표적인 역, 저술서들은 다음과 같다(출간 연대순). 하돈 로빈슨(Haddon W. Robinson, 박영호역), ?강해설교? (Bible Preaching) (기독교문서선교회, 1983), 드 그라프(S. G. De Graaf, 박찬섭역), ?약속 그리고 구원?, I-IV, (크리스찬서적, 1985), 트림트(C. Trimp), (구속사적) ?설교학 강의? (De Preek) (기독교문서선교회, 1986), 고재수, ?구속사적 설교의 실제? (기독교문서선교회, 1987), 시드니 크레이다너스(Sidney Greidanus, 권수경역), ?구속사적 설교의 원리?(Sola Scriptura) (학생신앙운동, 1989) 등이다. 특히 시드니 크레이다너스의 책은 성경을 구속사적 입장에서 읽어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 준 대표적인 작품이다.
47) Sidney Greidanus, Sola Scriptura, 19.
48) Sidney Greidanus, The Modern Preacher ...., 163.
49) J. Goldingay, Approaches to Old Testament Interpretation, 39.
50) R. Bultmann, Theologie des Neuen Testaments (T?bingen: Mohr, 1953), 95ff. Sidney Greidanus, Sola Scriptura, 9, 10.
51) Sidney Greidanus, The Modern Preacher ...., 160.
52)ibid.
53) 랑게, ?랑게 구약주석: 사사기, 룻기?, 411
54) 박윤선, ?성경주석: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287, 288.
55) E. Achtemeier, The Old Testament and the Proclamation of the Gospel (Westminster Press, 1973).
56) 장일선, “한국교회와 설교,” ?세계와 선교? 79 (1982. 12), 36.
57) 그 대표적인 경우를 오병세, 박윤선 두 교수에서 찾을 수 있다. 오병세(吳秉世)교수는 구약을 전공한 교수였으나 그의 설교집, ?그러므로의 생애? (개혁주의 신행협회, 1980)를 보면 구약을 본문으로 한 설교는 오직 15%에 지나지 않았다. 한국의 대표적인 개혁주의 신학자이자 성경주석가인 박윤선(朴允善)목사는 1970년대에 3권의 설교집을 출판했는데 그의 설교집에도 보면 구약본문에 대한 설교는 21%에 그쳤음을 알 수 있다(아래의 표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