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해방 후 한국교회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이상규 교수
교회 사랑하기 (9)
B0402
해방 후 한국교회의 민주화우농과 통일운동-이상규 교수 | 교회 사랑하기 2006.12.08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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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한국교회의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
이 상 규(고신대학교 교수, 교회사)
일반적으로 역사가들은 한 세대의 역사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한 세기 곧, 30년이 지나야 한다고 말하는 데 해방 이후 현재까지의 한국교회의 사회활동 혹은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의 역사와 의미, 그리고 그것이 갖는 의의를 해명하는데는 제약과 한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 이후 우리 사회의 주요한 과제였던 이 주제들에 대한 한국교회적 반응과 대응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오늘의 현실에서 신앙고백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신자들과 한국교회에 의미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해방 후 민족적 과제와 교회
해방과 함께 분단된 우리 민족현실에는 3가지 과제가 주어져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첫째로는 일제청산, 곧 식민지적 삶과 역사를 청산함으로써 민족정기를 바로잡는 일이었고, 둘째로는 자유.민주.복지국가의 건설, 곧 민주화운동이었다. 셋째로는 우리 민족 최대의 과제인 외세에 의한 분단의 근원적 해결, 곧 민족통일의 과제였다. 이 3가지 과제는 상호 관계가 없는 별개의 과제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의 이념적 틀을 지니고 있고 상호 깊은 관계를 지니고 있다. 이 3가지 과제수행의 주체가 견지했던 근본이념 또한 민족.민주.통일에 대한 역사적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반대로 이 과제수행에 있어서 그 대립적 이념의 틀을 형성했던 친일적 기회주의적 행태, 반민주적 권력지향, 그리고 반통일적 냉전논리 또한 동일한 선상에 있었다. 서경별곡의 가사처럼 식민주의 이데올로기와 해방 후의 반민주.반통일 냉전논리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이들을 "꿰매는 줄은" 하나인 셈이다. 이 점은 이념집단을 구성하는 조직체를 인적(人的) 배경분석을 통해 해명하는 네이미어(Lewis B. Namier, 1888 -1960)의 이론에 기초해 볼 때 더욱 분명해진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해방 이후 1950년대를 거쳐가면서 반민주 세력, 반통일 세력 곧 분단상황을 고착화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한 세력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친일적 전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점은 기독교계에도 동일했는가? 이점에 대해서는 차항에서 해명할 것이지만 적어도 1960년까지는 동일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961년 4.19혁명 이후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4.19혁명은 한국기독교계에 역사현실에 대한 인식의 높이와 깊이를 새롭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해방 이후 우리 민족현실 앞에 대두된 이 숙제에 대해 한국교회가 어떻게 인식해 왔는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흥미로운 성찰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민족정기의 확립, 민주복지국가의 건설, 민족통일의 과제 등과 같은 문제는 교회공동체가 감당해야 할 일차적 과제라고 볼 수는 없다. 교회는 그것을 위해 부름받은 공동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 그러한 "민족적" 과제가 기독교의 보편적 윤리와 상치될 수 있다면 더욱 그러하다. 도리어 이것은 국가적 혹은 시민적 과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의 교회공동체와 그리스도인의 현존은 세속사회의 현실과 유리될 수 없으며,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적인 삶은 그 시대적 정황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므로 그리스도인의 고백적 삶과 신앙적 결단, 곧 그 시대적 과제에 대한 기독교적 대응은 역사 속에서의 기독교회의 존재양식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제 순차적으로 친일청산의 문제, 1950년대 이후의 민주화운동, 그리고 주로 1980년대의 통일운동에 대한 한국교회의 대응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 전제(前提) - 한국기독교와 친일청산의 좌절
8 15해방은 우리민족과 교회에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역사의 전환기였다. 이 역사의 전환은 친일세력 청산을 통해 이룩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것은 우리민족에게나 교회에 동일한 것이었다. 35년간 일제 강점 하에 있었던 우리민족은 친일세력 청산을 통해 민족정기를 바로 세워야 했고, 기독교회는 신사참배 등 배교적 행위와 일제의 기독교 통치 혹은 말살정책에 협력했던 친일적 종교지도자를 제거 혹은 자숙케 함으로써 신앙정기를 바로잡음으로써 교회쇄신을 이룩해야 할 과제를 지니고 있었다. 말하자면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파를 제거하고 식민 잔재를 청산하는 일은 역사의 당위였다. 그러나 우리 민족과 교회, 그 어느 쪽도 친일세력을 제거하거나 잠재우지 못함으로써 식민지적 상황은 그 이후의 한국사회와 교회현실에 영속적으로 부정적 영향을 끼쳐왔다. 그 부정적인 영향이란 앞에서 논급한 바와 같은 반민주적.반통일적 논리와 행태라고 할 수 있다.
친일세력의 변신의 과정은 상식에 속하지만 남한에서의 경우 이들은 미군정 하에서 관리로 등용되었다. 실용주의적 사고를 가진 미군에게 있어서 민족적인 문제와 개인의 전력(前歷)에 대해서는 중요하게 고려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해방 이후 반민족행위자, 부일협력자를 처벌하라는 국민의 강렬한 여론에도 불구하고 행정의 진공상태를 우려한 미군들은 일제하에서의 부일 협력자와 관리들을 그대로 등용하였으므로 친일파 제거는 처음부터 비현실적 요구로 인식되었다.
1948년 정부수립 후 이승만 정권은 인재부족을 이유로 친일세력을 이용함으로서 미군정의 성격을 비판없이 계승하였다. 국내에 정치적 기반이 없었던 이승만은 친일세력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이점을 간명하게 확인시켜주는 사건이 반민특위의 와해였다. 불란서의 경우 2차 대전 중에 불과 3년 미만 동안 독일군 점령 하에 있었으나 전후 나치 치하에서 협력한 자를 철저하게 가려내어 처단하였지만(사형 2,071건, 징역형 39,900명), 우리나라의 경우 35년간이나 일제지배하에 있었지만 단 1건의 사형집행도 없었다. 서중석은 1960년 1월말 당시 11명의 국무위원 중 독립운동자 출신은 한사람도 없고 모두가 일제 때 군수.판사 등 공직자 출신이거나 군출신이었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그 결과 해방된 조국에서 정치.경제.문화를 주도하는 이른바 파워 엘리트층은 일제하에서의 부일 협력자들에 의해 그 주류가 형성되었고 따라서 이 땅의 식민지적 이데올로기는 냉전논리 속에 수렴되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해방후 우리민족이 친일파를 제거하지 못한 것은 오늘의 민족현실에 가장 큰 불행이었다. 김학준의 말처럼 "친일세력이 분단체제의 고정화에 기여했고, 또 분단체제는 친일세력의 기득권을 보호.신장시켜주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 결과 6.25 동란을 정점으로 하여 민족 상호간의 적대감.불신감 및 경쟁의식이 과도하게 높아졌다.
우리 민족이 해방 후 친일파를 제거하지 못한 것이 민족정기를 바로잡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분단체제를 고정화하는 부정적 결과를 가져왔듯이 한국교회가 해방 후 친일 혹은 부일 기독교 지도자들을 제거하지 못한 것은 한국교회의 혼란과 분열의 근본적 원인이었고 또 정치권력에 대해서도 정당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해방 후 제일 먼저 교회재건을 외치고 일제하에서의 범과를 회개할 것을 요구한 이는 사실은 친일파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회개를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신속한 변신을 통해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기만적인 행태였다. 해방 후 한국장로교회는 신사참배에 대한 취소결의를 3번이나(1946, 1947, 1954) 한 일이 있다. 이것은 그 이전의 취소결의가 얼마나 무의미한 것이었는지를 자증하는 것이었다. 장로교회를 중심으로 말할 때 해방 후 교회재건을 위한 구체적인 노력이 일어난 곳은 3곳이었다. 첫째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이북지방이었다. 출옥성도를 중심으로 한 이곳의 교회재건, 곧 교회쇄신운동은 홍택기 목사 등 친일파들에 의해 처음부터 비난을 받았고 곡해되었다. 이북지방에서의 교회쇄신을 위한 시도는 소련군의 진주로 수포로 돌아갔고 오늘까지 침묵의 교회로 남아 있다.
서울에서의 경우,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교회쇄신이 아니라 일제하에서 와해된 교회조직의 재건에 지나지 않았다. 심지어는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을 유지.계승하려는 시도까지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친일의 불명예를 이 교단의 존속을 통해 상쇄하려는 굴절된 의도가 없지 않았고", 해방된 조국에서도 자숙은 고사하고 여전히 교권과 정치적 야욕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 주도적 인사들이 장로교의 경우 김관식(金觀植).김영주(金英珠).송창근(宋昌根) 목사 등이었다. 이곳에서의 교회재건이란 기구적 재조직에 지나지 않았으며, 친일인사들의 신속한 변신의 길을 열어주었을 뿐이다.
부산.경남지방에서의 교회쇄신운동 역시 김길창 등 친일인사들에 의해 방해받았고, 친일파 인사들은 해방 후 한국교회 분열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하였다. "일본기독교 조선교단" 경남교구장 출신인 김길창 목사는 1945년 해방된 지 꼭 17일 후인 9월 2일 최재화.권남선.심문태 목사 등을 끌어들여 "신앙부흥운동 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일제하에서의 범죄를 회개.청산하고 정통신앙에 매진할 것을 선언하는 "선언"을 발표했는데 이것은 새로운 환경에서도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신속한 변신의 계략이었던 것은 이미 언급한 바이다. 이때는 출옥성도들이 남하하기 전이었고 그들에 의해 교회 재건운동이 시작되기 이전이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친일인사들은 신속한 변신을 통해 경남노회의 주도권을 장악하였으나 평신도들의 거센 항거에 굴복하여 일시 후퇴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계속 수세에 몰리자 1949년 3월 8일 권남선 등 그 추종자들을 규합하여 별도의 경남노회를 조직하였다. 또 당시 남부총회는 김길창 등이 조직한 노회의 총대권을 인정해 줌으로써 한국장로교 분열이 시작되었다. 결국 한국교회는 신사참배에 응할 뿐 아니라 일제의 식민통치에 적극 협력한 친일세력을 제거하지 못하고 교권의 핵심 속에 남겨두었던 것이다. 이것이 한국교회 분열의 원인이었다. 한국교회(장로교)분열은 친일적 기독교 지도자들의 자기 변신을 위한 자구책에 불과하였다. 한국감리교회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다. 1950년대 이후에도 친일 기독교 지도자들은 득세하였고 교단의 총회장 혹은 신학교육의 책임자로 활동하였으며 이승만정부 하에서는 이승만정권의 권력연장을 지지.후원하는 등 호신과 변신의 길을 걸어갔다. 이들은 생리적으로 권력지향적이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결국 해방 후 우리나라의 정치지배층이 기능적 친일 지식인으로 충원된 결과 민족적 가치보다 현실안주적인 기존제도유지에 관심을 쏟았고, 이러한 정치지배층의 비민주성이 한국정치의 민주적 발전에 부정적인 역활을 한 것이 분명하다. 즉 우리 민족이 친일파를 제거하지 못한 것이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전반에 국민적 정의감의 상실, 기회주의적 보신주의 행태를 양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와 같은 논리지만 한국교회가 친일파를 제거하지 못한 것은 신앙정기의 상실, 곧 자기보위를 위한 교회분열, 반신앙적 교권주의, 권력지향적 신앙양태 등 광범위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3. 한국교회와 민주화운동
1) 분단, 이승만정권하에서의 한국교회
1950년대를 대표하는 단어는 분단, 이승만정권, 반공 이데올로기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한국의 현실에 대한 상징적 용어들이 함의하는 인식의 틀은 상호 인과관계(因果關係)를 지니고 있고 이 시대의 성격을 주형해 갔다고 할 수 있다. 해방 이후 분단상황은 우리 민족과 교회 양자에 분열과 대립 등 적대적 관계를 가져온 우리 민족의 화(禍)와 한(恨)의 실체였다. 해방 이후 체제를 달리하는 북한 공산주의 정권의 실재와 그 이데올로기는 우리 사회 전반에 하나의 전제가 되어 왔다. 그 전제는 6.25동란을 거치면서 보다 구체화되었고 남북한은 서로를 용서못할 대적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체제수호와 안보논리는 설득력을 지니게 되었고 반공은 정권안보, 곧 정권수호와 정권연장의 도구로 이용되기도 했다. 이렇게 볼 때 반공(反共) 논리는 자연스런 이 시대의 산물이었다. 그것은 민족생존의 문제로 강조되었고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시대적 요청으로 정치.경제.문화.종교활동을 제약.통제하는 이데올로기였다. 이 반공논리를 강화시켜준 것이 6.25전쟁과 월남인사들이었다. 반공 그 자체가 문제였다고 보지는 않는다. 문제는 도구화된 반공이데올로기였다.
이 시대의 교회는 민족문제에 대한 의식이나 민주화에 대한 관심이 희박했다. 도리어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을 맹목적으로 지지함으로써 분단의 문제나 민주화 등의 문제에 대한 관심을 배제하였다. 그 근본적 이유는 이승만정부의 기독교적 성격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이는 자유당 정권을 "기독교(적)정권"이라고까지 말하지만 기독교정권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비기독교적이었다. 어떤 정당을 기독교정당이라고 말할 때 그 정당의 정치이념, 정강정책 등에서 기독교적 정치노선이 있어야 하지만 이런 류의 것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자유당정권에는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참여하고 있었고 기독교적 의식이 공공연히 시위되기도 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기독교회는 이승만정권을 마음으로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교회는 이승만대통령을 이 민족에 보낸 모세로 받들고 그가 이끄는 정권에 무조건의 갈채를 보내는 오류를 범했다. 교계인사들이 그의 독재정권을 지원하고 후원할 뿐만 아니라 1952년과 1956년, 그리고 1960년의 정.부통령 선거시 그를 지지하는 선거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특히 1956년 집권연장을 위한 헌법개정안이 부결되자 사사오입의 원칙을 적용하여 개헌안 통과를 선언하는 등 도덕성을 상실했으나 교회는 여전히 그를 지지하는 우를 범하였다. 또 이승만정권의 권력의 축을 형성했던 다수의 기독교지도자들은 1960년의 선거에서 부정선거에 앞장서기도 했다. 연일 선거의 부정을 규탄하는 국민적 항거가 있었지만 일부 교회에서는 이승만이 하나님의 섭리로 4선 대통령이 된 것을 감사하는 예배를 드리기까지 하였다.
결국 이승만정권은 4.19 혁명에 의해 붕괴되었지만 이 시대의 교회는 권력에로의 경도 때문에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에 대한 긴장을 해소함으로써 양자간의 균형을 상실하는 뼈아픈 교훈을 남겨 주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정부수립 후 1950년대 말까지 한국교회는 정치 현실을 객관화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대응하는 데 있어서는 상당한 인식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정리해서 말하면 여기에는 세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첫째는 이 시기에도 여전히 친일적 기독교인사들이 지도적 위치에 좌정하고 있었고 이들은 항상 체제순응적 성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대표적인 친일파 목사였던 전필순 등이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거교회적 운동을 주도했던 사실에서도 분명하다. 그는 후일(1959) 장로교 통합교단 총회장을 지내는 등 그 이후에도 교권의 중심에 있었다.
둘째는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이승만이 기독교인이라는 단순한 사실때문에 그를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윤리적 단순성 때문이었다. 또 월남인사들의 다수가 기독교 신자들이었기 때문에 그의 반공노선을 지지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1960년 4월 19일 학생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교회는 맹목적으로 이승만정권을 지원하였다.
세번째로는 해방 이후 1959년 지금의 합동과 통합이 분열되기까지 한국교회의 혼란과 교회분열, 다시 말하면 기독교지도자들은 교회정치에 관심을 두고 교회분열과 이로 인한 수습, 교회재산의 확보 등 교회내적인 문제에 정력을 소모하고 있었으므로 사회현실에 대한 정당한 관심을 표명할 여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2) 박정권하에서의 성장지상주의(成長至上主義)와 민주화운동
그러다가 한국교회가 사회현실, 보다 구체적으로 정치현실에 대해서 새로운 인식을 하기 시작하게 되는 중요한 시기는 1960년 4. 19 혁명이었다. 이 학생혁명은 우리 사회의 민주의식 혹은 정치의식의 발전일 뿐만 아니라 교회의 사회 참여와 그 대응에 있어서 실로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분기점이 되었다.
이승만 재임 중에는 맹목적인 지지를 보냈으나 4.19 이후 기독교계와 교계신문은 비판자로 돌변하였다. 4월 23일 "한국기독교연합회"는 4.19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고 정부의 개혁을 촉구하고 국민의 기본권보장, 부패척결, 법치주의 확립 등을 요구하였다.〈기독공보〉는 이전과는 달리 이승만 통치 12년을 비판하고 나왔다. 이승만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그해 8월 2일에는 의원내각제의 제 2공화국이 수립되었으나 그로부터 불과 10개월이 안된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이때의 교계의 반응 또한 여전히 권력지향적 성격을 보여주고 있었다. 쿠데타가 일어난 지 10일 후 "한국교회협의회"는 박정희 장군을 비롯한 군사쿠데타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대강 다음과 같았다. 쿠데타는 부정과 부패뿐만 아니라 공산주의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건지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으며 한국민은 군사정부에 협조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장로교 통합교단의 기관지였던〈기독공보〉는 쿠데타 주역들에게 노골적으로 아부하고 있었고 군사반란의 부정적 측면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언급도 없었다. 도리어 "우리는 자유를 희생하더라도 방종한 무리들이 숙정되는 것을 보고 싶다"고 했고 "우리는 권위있는 정부밑에 있게 되어 행복하다"고 아첨을 떨었다. 쿠데타가 일어난지 35일만인 6월 21일에는 기독교 대표 한경직(韓景職).김활란(金活蘭) 등이 미국을 방문하고 군사정부를 지지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1960년대 이전까지는 친일적 교계인사들이 여전히 한국교회의 주도권을 잡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체제순응적.기회주의적 권력에의 순응은 반 민주적 군사반란을 지지하는 등 도덕적 분별력을 상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때까지는 보수나 진보의 구분선이 분명치 않았다. 어떤 점에서는 이승만정권에 유착했던 세력은 친일적 전력을 가진 진보적 성향의 인사들이 그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60년대 곧 박정권의 출현과 함께 한국교회는 하나의 큰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다음의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는 교단의 신학적 성향이 보다 선명히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둘째로는 두가지 각기 다른 신학적 견해, 곧 사회구조의 개혁및 변혁을 앞세우는 새로운 신학운동은 정치.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행동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반면에 개인의 구원문제를 앞세우는 경건주의와 복음주의의 영향을 받은 보수주의적 입장은 정교분리라는 바탕에서 사회현실에 대해 무관심하였다. 결국 1960년대를 거쳐가면서 보수측과 진보측간의 분명한 차이를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이와같은 교회와 신학의 양극화현상은 그 이후의 역사에서 더욱 분명해졌다.
사회참여 문제와 토착화 논쟁은 이 시기의 한국교회의 사회의식과 신학의식의 몸부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보수와 진보의 신학적 경계선이 보다 구체화되어 감에 따라 정치권력에 대한 대응방식도 뚜렷한 차이를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이 두 가지 신학적 성향은 그 이후의 한국교회를 이원화하는 구분선(dividing line)이 되었다.
우리가 이 시대의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는 이 시대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해 먼저 언급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정권은 경제성장을 국가 지표로 삼았다. 이것은 군사혁명의 당위성을 꾀하는 명분확보로 제시되었고,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기근과 굶주림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생존의지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경제성장, 성장지상주의(成長至上主義)는 국민적 소망과 정권적 의지, 그리고 현실적 힘을 가진 살아있는 가치체계로 탈바꿈하기 시작하였다. 경제개발계획은 새마을운동이라는 가시적 운동과 함께 국가적 지표로 강조되었고 소위 "잘 살아보세" 철학은 1960년대 이후 다른 가치체계로부터의 제약이나 충돌없이 제일의적(第一義的)과제로 추구되었다. 이와 같은 성장지상주의 이데올로기는 정신적 가치에 대한 정당한 관심을 배제한 채 물질적 풍요를 향한 최선의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결국 1960년대 이후 경제성장을 만능약으로 선전한 박정권의 이데올로기적 공세와 극빈상태에서 벗어나려는 국민적 갈망은 한국에 수많은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곧 물질적 소비를 극대화함으로써 행복해 지려는 인간을 양산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1960년대 이후, 특히 1970년대 한국사회는 경제성장, 물량주의 혹은 성장지상주의(成長至上主義) 이데올로기가 팽배하던 시기였다. 성장지상주의적 이데올로기는 수출주도형의 경제성장을 국가적 과제로 삼았으므로 도시화.산업화 현상이 가중된 시기였다. 따라서 이농(離農) 현상과 도시빈민 집단의 출현은 불가피했다.
이점은 본고의 논지와 관련하여 두 가지 의미를 주고 있다. 첫째로는 경제성장 이외의 가치들은 이차적 혹은 부수적 가치로 이해하였으므로 인권 탄압, 산업현장에서의 노동력 착취 등과 같은 반민주적 행태가 권력의 보호 아래 자행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인권운동과 민주화운동은 이 시기의 또 다른 형태의 교회적 과제로 인식되었다.
둘째로는 성장제일주의적 정신풍토하에서 한국교회는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외적 혹은 수적 성장을 제일의적 가치로 수용하여 개교회의 외형적 성장을 최우선 과제로 인식하여 갔다는 점이다. 그래서 1970년대 한국교회에는 (물질적) 축복지향적 신앙양태와 교회의 (양적) 성장추구의 교회운동이 뚜렷이 노정되었다. 또 부요를 향한 인간의 욕망을 신앙이란 이름으로 정당화시켜 주고, 부는 신앙적 삶으로부터 오는 축복의 결과로 강조함으로써 현실안주적 성향의 기독교로 변모되어 갔다는 점이다. 정리해서 말하면 이 시대를 이념적으로 주형한 모퉁이돌은 다름아닌 경제성장을 제일의적 과제로 수용하는 성장제일주의 이데올로기였기 때문에 한국교회 일각에는 이 시대적 조류와 영합(conform)하거나 이를 거부(transform)하려는 양면적 현상이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는 민정이양을 약속하고 1963년 2월 27일 민정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나 약 20일이 지난 3월 16일 군정 4년 연장안을 국민투표에 회부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내외의 반대에 부딪치자 4월 8일 이 제안을 철회하고, 그해 8월에 퇴역한 그는 민주공화당을 창당하고 대통령에 출마하였다. 근소한 차이로 당선된 그는 군정이 시작된지 2년만인 1963년 12월 17일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교회와 박정권과의 최초의 분명한 대립은 1965년의 한일국교정상화 문제였다. 박정권은 경제성장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았으므로 일본의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굴욕적인 한일국교정상화를 시도하였다. 그러므로 이 시도는 박정권의 경제정책과 무관하지 않았다. 아직 일본을 용서하기에는 여전히 때이른 시기였기 때문에 한일국교정상화 문제는 한국교회의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이 굴욕적 외교에 대해서 한국교회는 통일된 입장을 견지하였고 이 반대운동은 한국교회의 대 사회 참여의 중요한 변화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예외적 경우가 없지 않았으나 보수적인 교회도 이 반대에 동참하였고 한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보수교단이라고 볼 수 있는 합동교단은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사회문제에 대한 "상당히 전향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한일회담비준 반대로부터 시작된 한국기독교의 사회참여는 4.19 이후 서서히 대두된 기독교의 정치참여, 혹은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음은 정부의 대 기독교 대응책에서도 잘 나타난다. 정부는 한일회담비준 반대 이후 학생과 언론을 통제하기 위하여 "학원보호법"과 "언론윤리위원회법"의 개정을 시도하는 한편 사이비종파 제지를 빙자하여 종교단체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사회단체등록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위한 "종교심의회"를 구성했던 것이다. 어떠튼 한일회담비준 반대는 한국교회와 박정권과의 충돌의 시작이었고 또 이 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던 김재준 목사 개인에게 있어서는 새로운 변신의 시작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취임에서부터 1960년대 말 박정권의 3선 개헌시도 이전까지의 중요한 교회의 활동은 1967년 대통령과 국회의원선거를 전후한 일련의 활동이다. 선거전에는 공명선거를 위해 노력하였고 선거 후에는 부정.타락한 선거에 대한 기독자적 반성을 촉구하였다. 박형규(朴炯圭) 목사가 총무로 있던 한국기독학생회(KSCM)는 1967년 6월 15일 각 회원에게 공개서한을 발송하고 " ... 우리는 불의를 미워하면서도 질서의 파괴가 더 큰 불의의 온상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한국의 민주주의를 매장하는 금번의 부정선거는 물론 그 책임의 대부분을 집권당과 정부가 져야 하겠지만 전 유권 국민과 야당도 같이 반성하고 회개해야 할 것이다" 라고 하고 "책임 있는 참여 방식을 강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부정선거 규탄 데모보다는 죄를 자복하는 기도회, 부정 부패의 원인이 되는 정치구조에 대한 토론회, 또한 연구회가 기독학생으로 취할 최선의 방법이 될 것이라는 의견을 부연하였다. 한국기독교연합회는 6월 21일 긴급실행위원회를 소집하고 6.8 선거부정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하고 "기독자의 양심에 서서 이 위기에 대한 책임의식을 가지고 기도와 신앙적인 결단으로 ... 의로운 민주적 장래를 지키자"고 하였다. 김재준은 "불의에 대한 투쟁도 신앙이다"는 글을 〈사상계〉에 발표하였는데 이때의 주장은 매우 건실한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여.야 어느 편에도 정당적인 의식을 가지고 편드는 일을 하지 않는다. 정권이 어느 누구에게 넘어가든지 그것 자체에 대해서는 담담하다. 그러나 불의가 있을 경우에는 어느 편, 어느 누구의 소행이든 간에 우리는 이를 묵과하지 않는다. 이땅에 의를 세우는 일도 신앙 본질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적어도 이때까지의 교회의 사회참여방식 혹은 민주화운동은 자기성찰적 회개를 강조하는 온건한 것이었고 따라서 보수적 인사들에게 저항을 주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때까지는 보수나 진보의 구분이 분명치 않았다. 장로교 합동교단의 기관지였던〈기독신보〉는 위에서 언급한 단체나 개인의 의견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예컨대 1969년 4월 19일자 사설에서는 하나님의 통치가 "신령한" 것에만 국한되며 "세속적" 문제와는 무관하다는 "뿌리깊은 편견"을 비판하고 국가의 불의를 목도하고서 침묵하는 위선을 비판하기까지 하였다.
한국교회의 민주화운동이 보다 구체화되기 시작한 때와 사회참여와 민주화운동에서 보수와 진보의 경계선이 보다 분명히 나타나기 시작한 때는 박정권의 3선개헌 시도 때부터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9년 7월 25일 특별담화를 통해 3선개헌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이의 강행를 추진했는데 이때부터 권력의 반민주적 속성이 사회현실 전반에 분명히 나타나게 됨에 따라 사회정의 구현과 민주화운동은 이 시대의 과제로 인식되어 갔다. 이때부터 한국교회에는 권력에 대한 대응에 있어서 분명한 견해차가 나타났다.
김재준.박형규.함석헌 등 진보적 인사들은 1968년 8월 "3선개헌 저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조직하였고, 8월 15일 동 위원회는 반대 성명서를 주요 일간지에 발표하였다. 이것은 불의한 박정권과의 힘겨운 투쟁의 시작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해 9월 2일 김윤찬(金允璨).조용기(趙鏞基).김준곤(金俊坤).김장환(金章煥) 등 242명의 보수적 인사들은 "개헌문제와 양심자유선언을 위한 기독교 성직자일동" 이라는 명의로 "개헌문제와 양심자유선언"을 발표하고 김재준 등의 성명서가 "순진한 성도들의 양심의 혼란을 일으키는 선동적 행위"라고 비난하고 교회는 정치적 문제에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9월 5일 242명 중에 포함된 박형룡(朴亨龍).김준곤.김윤찬.김장환.조용기 등은 "대한기독교연합회"라는 이름의 단체 명의로 "개헌에 대한 우리의 소신"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3선개헌을 지지함으로서 자신들 또한 정치적임을 보여주었다. 급조된 "대한기독교연합회"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유사한 단체명이므로 국민들을 호도할 수 있다는 점과, 7월 25일자로 대통령의 삼선개헌의지가 발표된 후 수없이 많은 단체들의 개헌지지 성명이 신문에 발표된 것을 고려해 보면 보수적 인사들의 성명서 발표에는 어떤 정치적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을 주고 있다. 어떠튼 이와 같은 보수와 진보측 인사들의 견해차는 그 이후의 한국교회의 사회운동에 경계선이 되었고 진보와 보수, 양자는 상호 냉소적 입장을 취하는 시작이 되었다.
한국교회의 민주화운동이 보다 급진적인 방향으로 전개된 것은 소위 10월유신 이후라고 볼 수 있다. 불의한 권력이 보다 조직적인 힘을 행사하고 있었기에 이에 대한 대응도 보다 조직적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시기의 물질주의적 성장지상주의가 대다수 국민과 정부관료의 이데올로기였다고 한다면, 진보적 기독교계와 학생, 재야단체 등 비교적 젊은층에 편만한 이데올로기는 기존질서와 사회조직의 변혁을 의도하는 혁명적 사회사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같은 사상의 신학적 접근이 해방신학이며 이를 한국적 상황에 적용.변용한 것이 민중신학이다. 이 신학은 이 시기 민주화운동의 이념적 근거였다.
이미 3선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영구집권을 위한 의도로 1972년 10월 17일 정당한 이유없이 계엄령을 선포하여 헌정을 중단시키고 모든 정치활동을 중지시켰다. 국회가 해산된 상태에서 비상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소위 유신헌법이 공포되었고 형식적인 국민투표에 의해서 이 법은 확정되었다(1972. 11. 21). 대통령의 중임제한이 철폐된 이 헌법은 대통령에게 무소불위의 절대적 권한을 부여하고 있어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명백한 폭거였다. 박정희는 1972년 12월 23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대통령에 선출되어 절대권력을 행사했으나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에 의해 피살됨으로서 70년대의 암울한 역사를 마감하게 되었다. 이러한 불의한 권력에 대한 저항은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1973년 4월 22일의 남산부활절 예배사건, 개헌청원운동, 민청학련사건, 오글 선교사의 추방, 3.1 민주구국선언(1976), 도시산업선교 활동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 기독자교수 해직사건(1977), 성직자 구속 등일 것이다.
이 기간 동안의 사회정의구현, 인권운동, 민주화운동이 침묵하는 다수의 공감을 얻고 묵시적 지원을 받았던 것은 우선 이 운동이 비교적 순수했고 도덕적 혹은 인도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이 운동은 정치적 성격이 없지 않았다. 그 일례 가 소위 운동권으로 지칭되는 반체제권과의 연계였다. 그래서 보수적인 교회와 인사들은 민주화운동을 정치적 활동으로 이해하여, 이는 교회 본연의 활동에서 이탈한 것으로 보았다. 민주화운동은 교회본연의 사명이 아니며 정교분리의 원칙을 위반하는 것이라는〈기독신보〉의 주장은 보수적인 교회의 입장을 대변하는 듯 했으나 사실은 이 신문의 논조 또한 지나치게 정치적이었다. 1972년의 "유신헌법의 필요성"이라는 지지 논설에서부터 1970년대의 이 신문이 지향해 온 논설은 당시 집권세력의 입장을 대변해 줌으로써 이들 또한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에 대한 균형을 상실하는 우를 범했다. 당시의 통제된 언론상황에서 사회문제에 대한 비판, 곧 아브라함 카이퍼가 말하는 "건축술적 비판"의 능력을 상실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 일부의 교회 지도자가 불의한 권력을 공개적으로 지지한 일은 면책받기 어려울 것이다.
문제는 이 시기의 한국교회의 민주화운동이 조직의 목적을 달리하는 재야나 야당, 특히 운동권이라고 지칭되는 과격집단과 쉬 연대함으로서 어느 한편을 지지하는 일방성과 당파성을 노출하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입장을 달리하는 상대집단으로부터는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이해되었고 입장을 달리하는 교회로부터 공감을 얻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소위 운동권이라는 집단의 실체가 수면 위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은 박정권의 10월 유신 이후라고 볼 수 있는데 이들의 사회변혁이념은 프랑크프르트학파의 사회비판이론, 맑스주의적 혁명사상, 해방.민중신학 등이 혼미하게 종합되어 있었다. 운동권 일각에는 기독교적 사회복음운동의 성격이 있었는가 하면 반 기독교적 사회주의적 성향이 보다 강했다. 사실 운동권에는 기독교계인물과 그외의 인물이 혼재하고 있었다. 단지 공통점이란 그 지향하는 바가 동일했다는 것뿐이었다. 그것은 반체제운동이었다. 이 동일한 목표 때문에 한국교회의 진보적 세력은 운동권 집단과 함께 했으나 기독자다운(Christian-like) 이념과 삶을 천착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국교회의 민주화운동은 소위 운동권의 이념 속에 매몰되어 갔다고 볼 수 있다. 이전 시기의 비교적 순수했던 기독교적 양심, 행동하는 신앙, 불의에 대한 항거는 급진적 사회변혁을 꿈꾸는 운동권과 결탁되면서 기독교적 이념은 급진적 혁명 이데올로기로 변하여 운동권의 목표를 뒷받침해주는 도구로 전락하였다. 다시 말하면 이때와 이후의 시기에서 민주화를 추구했던 한국교회와 그 인사들이 운동권 세력과 경계선을 갖지 못했던 것은 불행이었다. 이데올로기란 "도구화된 이념"인데 기독교 이념의 이데올로기화는 그 종교적 성격 때문에 절대화되기 쉽기 때문이다. 당시 진보적 인사들은 단지 민주화에의 열망 때문에 이들과 구별하는 분별력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3) 전두환정권하에서의 민주화운동
유신의 종말은 민주화의 봄을 기대했으나 이것은 낙관적 기대였음이 곧 드러났다. 사실 지도자나 정치체제의 변화가 곧 민주회복을 가져오리라는 기대는 옳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가능하지도 않다. 그러한 기대는 타락한 인간 본성을 고려하지 않는 순진한 낙관론일 뿐이다.
전두환.노태우 등 정치군인은 12.12 사건이라는 사실상의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함으로서 어떤 면에서는 이전보다 더 심각한 군부통치가 계속되었다. 전두환정권이 남겨준 이 시대의 가장 큰 비극은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물리적 탄압이었다. 흔히 광주학살로 불리우는 이 비극의 삯으로 수립된 정권은 합법성이나 정당성, 그리고 도덕성을 지니지 못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한국교회 일각에서는 권력의 그늘 아래서 안식을 구하는 자가 없지 않았다. 그들이 보수적 인사들이었다고 단정하는 것도 옳지 않다. 1980년 5월 30일 발표된 국보위는 전두환정권의 권력의 축을 제공한 입법기관이었다. 국보위 종교담당은 정진경(鄭晋慶) 목사였고, 조향록(趙香祿) 목사는 입법에 관여하였다. 1980년 8월 6일 서울 롯데호텔에서는 20여명의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이들이 참석한 가운데 전두환 상임위원장을 위한 조찬기도회가 열렸다. 비교적 진보적 인사들이라고 볼 수 있는 조향록.정진경.강신명(姜信明).김지길(金知吉) 목사 등이 순서를 담당하였고 한경직 목사는 설교를 하였다.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인사들에 의해 주도된 이 기도회는 거듭 거듭 방송되었고 전두환군부에 대한 한국기독교의 지지의 의미로 호도되었다. 사실 이와 같은 교회 지도자들의 처신은 비록 본의는 아니었다 할지라도 민주화운동의 의미를 무력화시키는 상당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어떤 면에서 진보적 교회는 권력에 대해 협력과 저항의 양면적 관계를 지니는 외교적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권력에 대해서 일관성 있게 일정한 거리를 두었던 침묵했던 이들이 보다 정직하고 덜 기만적이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은 우리 세대에 있어서 씻을 수 없는 아픔의 실체였으나 그 진상은 아직까지도 규명되지 않는 채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숙제로 남아 있다. 1980년 한해 동안 광주항쟁에 대한 공식적인 대응은 전무하였다. 이점은 신군부세력의 강권통치하에서의 상황을 대변해 주고 있다. 광주문제는 그로부터 2년 후 부산미문화원 사건을 통해 비로소 "문제화"되기 시작하였다. 1982년 3월 18일 김현장(金鉉奬)과 고신대학에 재학 중이던 문부식(文富軾).김은숙(金恩淑)등에 의해 일어난 부산문화원 방화사건은 미국에 대한 새로운 인식, 혹은 미국의 대한(對韓) 정책의 본질을 깨닫게 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은 한국에서의 반미(反美)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이점은 한국교회 사회선교협의회의 "부산미국문화원 방화사건에 대한 우리의 견해"(1982.4.15)에 잘 표명되어 있다.
"신.구교 연합선교단체인 본 한국교회 사회선교협의회는 냉철한 자세로 이 사건의 발생원인과 배경을 통찰하고 이 사건이 시사하는 오늘의 현실에 대한 우리의 견해의 일단을 밝히고자 한다. 미국을 향해 가한 직접적인 적대행위로 나타난 이번 방화사건의 의의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한미관계의 현주소를 인식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해방 후 미국이 한반도의 운명에 관여하게 되면서 미국은 한국민의 가장 은혜로운 우방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1980년 5월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상처가 되어버린 광주사태를 미국이 용인함으로써 한국민의 대미인식에 결정적인 변화가 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후 레이건 정부하의 대한미국실무자들이 계속 가하고 있는 한국민에 대한 모욕적인 언사나 그들의 경제정책에 대해 유쾌하지 않은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전두환의 통치는 본질상 박정희의 3.4공화국과 차이가 없다. 정통성이나 도덕성을 지니지 못한 전두환정권에 대한 기독교계를 포함한 국민적 저항은 날로 고조되어 1987년 6월에는 극에 달했다. 6.29 선언은 국민적 저항과 민주화의 열화같은 요구에 대한 전두환정권의 항복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이것은 그동안 한국교회와 재야 혹은 야권의 민주화투쟁이 가져온 결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두환의 퇴진과 함께 거의 20년만에 대통령의 선출방식은 직선제로 바뀌게 되었으나 김대중씨가 야당을 갈라 또 하나의 정당을 조직하고 대통령에 출마함으로써 야당 후보가 단일화를 이루지 못했다. 한 개인과 그 추종자들로부터 짐지워진 권력에 대한 야욕은 결국 노태우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일등 공신의 역할을 감당하였다. 김대중씨와 그 주변인물의 민주화를 위한 노력은 결국 자신들의 정치적 야욕을 위한 것이었음을 인정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김대중씨의 분당과 대통령 출마는 노태우 후보에게 있어서는 "다행한 실수"(Felix culpa)였던 셈이다. 역시 군부출신인 노태우씨의 당선은 1960년대 이후 25년간 싸워 온 민주화운동의 성과를 미미하게 만드는 불행한 결과였다. 여기에는 민주화운동을 추진해 온 주체들간의 내분과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작용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한국교회의 민주화운동이 보다 순수하고, 덜 정치적이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노태우씨는 비록 직선에 의해 선출되었으나 그도 군부출신으로서 그 이전의 정권과 성격을 같이 했다.
한가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제는 구태의연한 통치방식이 먹혀들지 않을 만큼 국민의식이 성숙했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민주화운동도 이 시기에 와서는 변화된 일면을 보여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4) 반성과 평가
이제 한국교회의 민주화운동에 대해 정리할 때가 되었다. 우선 몇 가지 점에서 반성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첫째 교회와 국가, 혹은 교회와 정치질서와의 관계,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대응방식이 기독교적이었고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는지에 대한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한국의 역사현실 속에 깊이 뛰어든 것은 좋으나 기독교적 가치를 얼마나 잘 대변했는지에 대한 반성적 물음이다. 또 이와 같은 문제들에 대한 신학적 모색이 있어야 했다. 이점은 보수와 진보를 포함한 한국교회 전체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주로 1970년대 이후 생산된 관계문서에서 이상의 문제들에 대한 신학적 고민의 흔적을 별로 발견하지 못하였다. 한국사회 현실에 대한 방관자적 냉소주의와 적극적 참여와 사회변혁운동에 대한 한국교회적 고민과 반성이 있어야 했다.
둘째 민주화운동은 정치체제와의 싸움을 우선시한 결과 인간의 죄와 타락의 심각성을 간과하는 낙관주의적이라는 점이다. 낙관주의는 근본적으로 계몽주의적 인간관 위에 서 있는데, 이 낙관론은 인간의 죄, 타락 혹은 죄의 심각성을 고려하지 않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민주화운동은 주로 정치체제나 사회구조와의 싸움이었다. 그 결과 인간 내부의 죄의 심각성, 곧 사회 개혁의 종교적 측면을 정당하게 고양시키지 못했다. 이렇게 볼 때 민주화운동은 일종의 현대적 유토피아니즘으로 볼 수 있다. 사실 성경과 역사는 인간이 얼마나 악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데 어떤 사회의 근본문제는 사실 그 구조 자체에 있기보다는 그 구조를 만든 인간의 마음에 있다. 이런 점에서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는 "사회구조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구조를 만드는 사람의 마음에서 흘러 나온다"는 하웃즈바르트(B. Goudzwaard)의 말은 옳다. 칼 브라텐의 설명도 이와 유사하다. "죄는 너무도 심원한 파멸의 상태이기 때문에 빈곤이나 탄압, 질병, 인종차별, 남녀차별, 계급주의, 자본주의 등을 제거하는 것만으로는 인간의 죄악된 상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다." 결국 죄를 그 사회구조에서 찾으므로 죄의 근본적인 개념인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반역을 간과하고 있고, 구원을 정치 경제 사회적인 해방에서 찾고, 복음화를 사회정의의 실현, 인간화 운동으로 이해한다. 결과적으로 인간본성에 대한 낙관론은 "구원의 역사"(the history of salvation)와 "역사의 구원"(the salvation of history)의 경계선을 모호하게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셋째 민주화운동이 지나치게 정치지향적 성격을 띠게 되지 않았는가 생각해 볼 수 있다. 각기 다른 이념과 목적, 곧 정치적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정치집단과 쉬 연대함으로써 파당적 성격을 지니게 되고, 상대적으로 기독자의 고백적 의미가 희석되지 않았을까. 결국 이것은 보수교회의 불참여와 냉소주의를 초래하는 역기능의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
넷째, 기독교의 사회적 혹은 정치적 책임을 과대평가 하여 이 사명을 최고의 사명으로 간주함으로써 복음전도와 양육등 교회의 다른 중요한 사명을 소홀히하지 않았는가에 대해서도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또 정부의 권위와 저항권에 있어서도 정부의 권위를 절대적인 것으로 보는 보수주의적 입장도 성경적이지 않지만 정부의 권위를 너무 쉽게 거부하는 진보적 입장도 성경적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민주화운동은 다음의 몇 가지 점에서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첫째 한국교회의 진보적 인사와 그 교회가 중심이 된 민주화운동, 인권운동은 이웃과 사회, 인간과 인간의 삶의 현실(특히 정치적 현실)에 대한 교회적 관심과 책임을 일깨워 주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사회구조나 제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확립시켜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사회구조나 제도는 위계체계적인 존재의 사슬(Aristotle)로서 불변의 구조가 아니라 개변될 수 있는 것임을 일깨워 주었다. 또 사회란 다수의 개인들의 집합만이 아니라 조직 혹은 구조라는 성격이 더해져 있고, 구조나 조직에서 오는 불의나 모순 - 이를테면 정치조직.임금제도. 세금제도 등 - 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인식시켜 준 것은 사회발전에 긍정적 기여라고 할 수 있다. 셋째 한국교회의 민주화운동은 실로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인간의 삶과 공동체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한국의 정치현실을 변화시키고, 오늘과 같은 보다 민주적 사회로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이만큼의 인권.자유.민주의 열매는 그 동안의 민주화운동이 가져온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4. 미완의 과제- 한국교회와 통일운동
1980년대 전반기까지 한국교회의 관심사가 민주화였다면, 1980년대 후반에 와서 민족문제에 대한 교회의 가장 큰 관심사는 통일문제였다. 한국교회는 1980년대까지 통일문제에 대한 관심, 특히 오늘날 일반적으로 회자되는 평화통일에 대한 교회적 관심을 갖지 못했다. 그것은 이 발제 서두에서 전제한 바와 같이 한국교회가 식민지 청산에 실패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친일적 성향의 교계지도자는 이승만정권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였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통해 성립된 이승만정부는 그 정통성 문제에 있어서 북에 대해서는 부정적.적대적 관계이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점은 현재까지도 동일하다. 그래서 사실상 1945년 해방에서부터 분단의 고착화가 반공이데올로기와 정권적 차원에서 심화되어 갔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이승만정부의 입장을 한국 교회는 "사실상의 현실"(the reality of de facto)로 수납했던 것이다. 1950년의 한국전쟁을 경험하면서 북한에 대한 적대감과 불신은 깊어갔고, 1960년대 이후 박정희정권하에서부터는 분단체제와 안보이데올로기하에서(물론 약간의 예외는 있으나) 한국교회도 통일문제에 대한 보다 체계화된 관심을 배양하지 못했던 것이다.
해방 후 분단된 조국에서 일어난 남북관계론은 3가지로 정리될 수 있는데 그것은 단독정부수립론(이승만), 좌우합작론(김규식.여운형), 남북협상론(김구)이 그것이다. 김구는 남한만의 단독정부는 분단을 영구화한다는 점에서 남북협상론을 제시하였으나,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실시하였고 그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이 선포되었다. 또 북한의 경우 1945년 9월 9일 김일성을 우상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이러한 두 정부의 수립과 현존은 그 이후의 남북관계를 적대적 관계로 인도해 갔던 동력원(power station)이었다.
해방과 함께 분단된 조국에서 냉전논리의 민족사적 문제를 간파한 이는 김구였다. 그는 통일된 민족국가 건설만을 주장하고 미.소의 대결논리에 따른 남북한의 2중적 정부수립은 분단의 영구화와 동족상잔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점은 우리가 6.25와 같은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서야 알게 되었고 그 역사의 비극은 현존하고 있다.
당시 교회는 크게 두 가지 이유, 곧 앞서 언급한 바처럼 이승만의 단독정부의 불가피성을 현실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해방 후의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적대감 때문에 오늘 우리가 기대하는 정도의 통일에 대한 적극성을 가질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도리어 임박한 통일에의 기대를 역사의 후기로 인식하는 소위 "통일론의 중성화(?)"가 일반화되었다. 이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우가 장.감리교의 치리회 구성에 잘 나타나 있다. 장로교회의 경우 1945년 9월 9일 잠정적으로 "남부대회"를 조직하였고, 이듬해에는 이를 "남부총회"로 개칭하였으나 1947년 4월에 회집된 대구제일교회에서 모인 제 2회 남부총회에서는 1942년 일제에 의해 해산된 31회 총회를 계승하기로 결의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더 이상 남부총회로 있지 않겠다는 의지로서 남북통일에 대한 교회적 기대가 중성화되고 있다는 징표라고 볼 수 있다. 독일의 경우는 분단 이후에도 여전히 하나의 교회로 남아 있으려 했던 점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1950년의 한국전쟁을 경험한 이후, 그리고 그 전쟁을 전후한 시기에는 북진통일론(北進統一論)이 대두되었다. 이점은 전쟁을 전후한 남북간의 적대감이 깊어졌음을 보여주는 반면, 전쟁을 통한 공산주의의 실상에 대한 체험적 경험 때문에 평화적 통일론은 설 자리가 없었다. 사실 이점은 한경직.김재준에게도 동일했다. 전쟁을 경험한 후에 쓴 김재준의 글에서 그도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변해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전쟁 이후 공산주의와의 공존의 비현실성은 더욱 힘을 얻게 되었고 이점은 1954년 WCC 에반스톤회의에서부터 강하게 나타났으며, 급기야 1959년의 장로교분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통일을 한다면 북진통일은 유일한 대안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사실 이 시기 통일은 감상적 구호였지 현실성있는 방안으로 수용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북한에 대한 관계는 대화나 협상의 대상이 아닌 "처부수어야 할" 적대감의 표현이였을 뿐이다
그래서 이 당시 한국교회 통일론은 비록 그것이 감상적인 것이었다 할지라도 북한 주민의 해방이라는 자유십자군적(自由十字軍的) 의식이 강했다. 북한은 사탄이 지배하는 지역이며, 학정과 굶주림 속에 시달리는 북한 주민을 속히 구원해야 한다는 반공통일론(反共統一論)이 주류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1960년대 이후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통일에 관한 논구는 정부에 의해 주도되었고, 또 그 논의는 폐쇄적이었기 때문에 자유로운 통일논의가 불가능했다는 점을 그 이유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통일문제를 자유롭게 이야기할 기회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예컨대, 1945년 분단직후부터 단독정부가 수립된 1948년까지, 두번째로는 1960년 4월 혁명이후 1961년의 5.16까지, 세번째로는 1972년의 7.4 남북 공동성명이 나오고 남북대화가 진행되던 1-2년 동안의 기간을 들 수 있다. 첫번째 시기에는 김구 등의 남북협상론이 개진되었고, 두번째 시기에는 학생들에 의한 연방제 통일방안, 혹은 중립화통일론이 제기되었으나 곧 논의 자체가 억압을 받았고, 세번째 시기에는 7.4 남북 공동성명의 정신에 입각한 평화통일방안에 대한 논의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시기까지도 기독교회가 통일문제에 대해 체계화된 관심을 표명했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오히려 진보적 통일론에 대해 경계하는 태도를 보였고, 공산주의자들과의 대화는 항상 주의해야 하며 위험하다는 한국교계의 일반적 정서가 표현되곤 했다. 정부가, 비록 그것이 정권적 차원에서 추진되었다 할지라도, 북한과의 대화를 시도했을 때 가장 진보적인 장로교단인 기독교장로회는 "사상과 이념을 초월하는 민족적 대 단결"을 경계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할 정도였다. 급진적 운동권에서는 "선 통일 후 민주"를 말하기도 했으나 기독교계는 대체로 "선 민주 후 통일론"을 지지하였다. 이때까지는 통일문제에 대하여 보수와 진보적 교회간의 차이가 노정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70년대를 거쳐가면서 보수와 진보적 교회간의 견해 차이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7.4 공동성명 이후였다.
7.4 공동성명의 발표는 교회가 분단체제에 순응하여 통일문제를 보다 적극적으로 논구하지 못했다는 반성과 함께 통일문제에 대한 교회의 관심을 환기시켜 주는 역할을 했다. 이를테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7월 18일 실행이사회를 열고 "한국교회는 내일의 민족 역사에 있어 더욱 전진적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 통일에 대한 적극적 관심과 실천을 과감하게 추진해야 할 것"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그해 10월에는 "통일및 사회정의 기독교 협의회"가 조직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인식의 전환과 함께 통일문제는 두 가지 점에서 약간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었다. 첫째로는 진정한 민주화 없이는 평화적 통일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인식이었다. 다시 말하면 북한과의 평화적 대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민주화, 자유와 인권, 사회정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민주화운동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점을 환기시켜 주었다고 볼 수 있다. 두번째로는 지금까지의 관주도의 통일논의에서 탈피하여 통일논의의 다변화를 주장하고 그 통일논의 주체는 민중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 두 가지 점은 향후 보수와 진보적 교회 지도자간의 현격한 견해차이기도 했다. 대체로 보수적인 교회와 그 지도자들은 자유십자군적 의식으로 북한의 성도들과 북한 교회 재건을 위해 기도하고 북한 선교단체를 조직하는 등 보다 직접적으로 북한 복음화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1970년대 말에는 반공과 안보에 초점을 두고 현재적 상황하에서 북한 선교를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을 간구하는 보수계와 민주주의와 사회정의 구현을 통해 통일운동으로 발전시키려는 진보계의 상이한 경향이 있어 왔다.
한국교회의 통일논의가 새로운 단계로 발전한 것은 전술한 바와 같은 1980년대 이후라고 볼 수 있다. 남북한의 유엔 동시 가입과 탈냉전, 중국과 구 소련의 개방 등 세계정세의 변화와 소위 북방외교(北方外交)라는 이름의 대 공산권과의 적극적 외교노력 등 일련의 국내상황의 변화는 통일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국내외의 변화 속에서 한국교회는 민족통일을 교회적 과제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이보다 더 중요한 인식의 전환에 계기를 준 것은 통일 없는 민주화, 민주화 없는 통일은 사실은 의미가 없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한국의 진보적 인사와 그 교회들은 1970년대 이후 민주화와 사회정의를 교회의 최우선적 과제로 삼고 유신체제에 저항.투쟁해왔다. 그것이 비록 지나친 낙관주의적 기대이긴 했으나 유신체제만 무너지면 민주화가 실현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예기치 못했던 군부독재정권이 수립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민주화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근원적 이유가 국가안보의 위협을 구실로 한 권력구조에 있으며, 그 근원은 분단과 상호적대적 관계에 있기 때문에 분단의 극복, 곧 통일은 진정한 민주화의 길임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말하자면 민주화운동은 통일운동과 분리될 수 없으며, 통일운동은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70년대까지 민주화운동에 진력하던 교회가 80년대 이후 통일운동을 교회적 과제로 인식하였고, 그 동일한 이유때문에 진보적 인사와 그 교회들이 통일운동에도 적극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진보적 교회와 그 인사들은 1980년대 이후 민간차원의 통일논의에 있어서 그 선두에 서게 된 것이다.
그동안 통일 논의는 정권적 차원에서 관 주도의 제한된 범위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은 이미 지적한 바이지만 관 주도의 통일논의에 대한 반발은 1972년 7.4 공동성명이 발표되고부터였다. 이때로부터 통일문제에 대해 논의가 일기 시작하였는데 1980년 3월 기독교장로회는 "통일은 교회의 선교적 과제"로 천명하고 이에 대한 교회적 관심을 표명하였다. 1983년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에 "통일문제 협의회"가 설치되었고 1985년 3월에 모인 NCC 제 34차 총회에서는 "한국교회 평화통일 선언"이 채택되었다. 이 선언에서는 통일운동의 주체를 민중으로, 통일운동의 방법을 평화적 통일로, 통일의 목표는 민주화와 정의사회 실현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이 문서에서는 분단의 고착화를 묵인했던 교회의 죄책을 고백하였다. 예장 통합측은 1986년에 모인 제 37회 총회에서 "대한 예수교 장로회 신앙고백서"를 채택했는데 이 고백서에서는 화해라는 관점에서 평화적 통일에 대한 사명을 언급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쳐 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NCC)는 1988년 2월 29일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 기독교 선언"을 채택했는데, 이것은 통일 문제에 대한 기독교계의 관심과 통일론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서였다. 이 선언은 민간 차원에서 발표된 최초의 통일정책 선언이었으며, 그 이후의 통일운동의 중요한 근거를 마련하였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진보적 기독교 인사들에 의해 주도된 이 선언서의 발표는 1970년대 인권운동과 마찬가지로 통일은 1980년대 기독교회가 감당해야 할 선교적 과제로 인식함으로써 기독교계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에 통일논의를 보다 구체화하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이 문서에는 통일문제에 대한 이전의 한국교회적 입장과는 크게 다른 몇 가지 발상의 전환이 포함되었다고 볼 수 있다. 첫째는 분단 그 자체를 악으로 보는 발산의 전환이다. 두번째로는 분단 심화의 책임이 바로 나에게 있다는 점, 셋째로는 분단체제보다는 통일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발상의 전환이다. 이 발상의 전환은 새로운 어떤 것이자 그 시대적 인식의 틀로 볼 때 "획기적"인 것이었다. 분단의 심화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발상의 전환은 기독자로서 죄책에 대한 "고백적" 의미가 있고 동양적 겸양지덕을 보여주고 있지만 사실 그러한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 분단 자체를 악이라고 단정한다면 통일은 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예멘의 분단 그리고 통일 그리고 재분단의 과정을 보면 과연 분단은 악이고 통일은 선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단순화된 감상적 통일우선주의가 가져올 수 있는 비극과 참상을 예멘의 경우에서 경계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 선언에 대해서는 한국교회에서 많은 논란을 야기하였는데, 특히 복음주의교회와 그 지도자들은 이 선언서의 급진적 성격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한국복음주의협의회가 3월 30일자로 발표한 "KNCC통일론에 대한 복음주의의 입장"은 보수적인 교회의 비판적 입장을 잘 대변하고 있다. 이 문서에서는 6가지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첫째, 평화운동을 정치적인 운동으로 인식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둘째, 북한교회의 실정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셋째, 한국교회의 선교적 전통과 활동을 민족해방운동의 일환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넷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한국교회 전체를 대표.대변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는 것은 옳지 않다. 다섯째, 미군철수 등은 결과적으로 국제여론을 북한에 유리하게 해준다. 여섯째, 민주주의.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동등하게 평가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지적하였다. 또 김명혁 교수는 1988년 3월 19일자〈크리스챤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7가지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KNCC의 선언문은 시종일관 양대 이데올로기로 갈라진 국제정세의 현실을 무시하고 소박한 민족주의적 낙관론에 입각한 평화통일을 표명했다. 둘째, 신학적으로는 사회구원과 민중, 또는 민족의 해방을 표방하는 WCC 에큐메니칼 신학의 평화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평화통일론을 전개하였다. 셋째, 자유세계의 이데올로기와 공산이데올로기를 동등하게 평가하는 듯 하다. 넷째, 남북분단의 책임을 일방적으로 남한 독재정권에만 돌리고 있다. 다섯째 북한 공산주의 세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고 볼 수 없다. 여섯째, 남한 그리스도인들이 북한동포에 대한 증오심을 키워왔다는 점은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다. 일곱째, 핵무기 철거 주장은 현실을 무시한 성급한 주장이다.
NCC 가맹교단에서조차도 거센 반발이 있었음을 고려해 볼 때 보수적인 교회의 반발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88년 4월 인천에서 모인 "세계 기독교 한반도 평화 협의회"에서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민족의 평화와 통일에 관한 한국 기독교 선언"에 동의하면서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위한 UN 차원에서의 노력을 요청하고 남북한간의 긴장완화를 위해 군사훈련의 중지와 핵무기의 제거 등을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시급한 과제로 천명하였다.
이러한 통일논의는 결국 그해 7월 7일의 소위 "7.7 선언"이라는 정부의 통일 정책 공표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1988년 11월에는 세계교회협의회(WCC) 주선으로 남북 기독교 대표가 분단 40년만에 처음으로 11월 23일에서 25일까지 스위스 글리온에 모여 대좌하고 "글리온 선언"(Glion declaration on peace and the unification of Korea)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는데, 이것은 분단이후 최초의 남북 교회 인사들의 대화였다는 점에서는 의미있는 상봉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88년의 선언 이후 계속된 통일논의는 1990년을 경과하면서 남북 교회간의 교류를 가능하게 해주었는데 이것은 매우 중요한 발전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이와 같은 한국교회의 통일논의는 남북 교회간의 교류로 발전하였고 결국 민간차원의 통일운동을 주도하여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기에 이해할 수 없는 한가지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것은 문익환(文益煥) 목사의 느닷없는 방북(訪北)이었다. 그가 남북한간의 교류와 접촉의 물꼬를 연다는 점에서의 방북은 의미가 있을 수 있으나 그의 김일성 알현(?)과 그에게 보낸 경외심 어린 언행은 이해할 수 없다. 그가 김일성에게 존경 어린 언사를 보내며 가슴을 부둥켜 안고 그가 대좌한 것이 통일에 무슨 기여를 할 수 있다고 판단했는지는 이해할 수 없다. 문익환의 방북은 김일성에게 있어서는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정치적 이용물이 되었을 것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민주화운동, 아니 민중운동의 최선봉에 서서 불의하고 부도덕한 권력과 맞서 싸우던 그가 40년이 넘도록 북한 주민을 무자비하게 통치했던 가장 부도덕하고 반민주적이며, 반민중적인 그를 얼싸안고 시위했던 것은 그의 생의 여정을 이해하는 데 상당한 혼란을 주고 있다. 문익환의 방북과 김일성에 대한 언사는 그동안 그가 쌓아왔던 민주투사로서의 삶의 의미를 일거에 부정하는 역설적인 사건이었다. 그가 김일성이 아니라 정치범 수용소를 찾아갔더라면 그는 실로 민주화운동의 영웅이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자신이 통일선봉장이라는 자기 도취에 가까운 영웅주의가 가져온 결과가 아닐까? 사실 문익환의 방북은 통일운동의 국민적 연대감을 와해시키는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그의 경솔한 언행 때문에 보수적인 교회는 통일 노력을 더욱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계기를 주고 말았다. 통일을 말하는 오늘 우리시대에 장준하(張俊河)와 같은 진정한 민주.통일운동가가 없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의 아픔으로 남아 있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통일논의는 더욱 심화되었다. 이것은 독일통일이 가져온 자극의 결과였다. 2차 세계대전 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념적 대립으로 분단된 나라는 우리나라 외에도 베트남.독일.예멘 등인데 베트남은 약 20년간의 참혹한 전쟁을 치르고 1975년 4월 30일 월맹군과 베트콩이 수도 사이공을 점령함으로써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무력 통일되었다. 예멘과 독일은 1980년대 이후의 탈 냉전의 화해무드 속에서 예멘은 1990년 5월 22일, 독일은 1990년 10월 3일 각각 통일을 선포하였다. 이러한 현실 때문에 통일문제를 교계에서도 가장 시급한 민족적 현안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한국 기독교회의 통일논의는 주로 진보적 기독교 인사들, 곧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가맹 교단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한국교회의 통일논의는 복음주의적 교단들이 참여하는 보다 넓은 의미의 한국 교회적 합의에 의한 논의라기보다는 진보적 교계 인사들의 일방적 논의였다고 할 수 있다. 1988년의 보다 구체화된 통일논의의 시작은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남북한 교회간의 교류를 가능하게 했는데, 이 남북교회 교류 또한 일방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한국교회의 통일 논의를 시도하고 주도해 왔다는 점에서 한국 기독교교회협의회를 중심한 관계자들의 선구자적 역할은 인정하지만 동시에 복음주의적 교회가 배제된 통일논의나 남북 교회간 교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남북교회의 교류와 통일 운동에 장애가 될 수도 있다는 점도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동시에 한국의 복음주의 교회와 지도자들이 오늘의 한국의 분단된 현실에 대한 이해와 평화 통일에 대한 보다 구체화된 노력 없이 냉전이데올로기에 매몰되어 통일문제에 대한 방관자적 태도를 견지해 온 점에 대해서는 겸허한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제 지금까지 전개된 통일 논의와 남북교회 교류에 대하여 복음주의 교회가 제기한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해 둠으로 민족통일에 대한 1980년대 이후의 교회적 노력에 대하여 반성의 기회로 삼고자 한다.
첫째로 남한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가 북한의 "조선기독교연맹"을 북한교회를 대변하는 유일한 창구로 인정하고 이들과 대화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아무리 미화된 표현을 쓰더라도 "조선기독교연맹"은 1946년 11월 28일 "북조선기독교도연맹"이란 이름으로 조직되어 북한의 기독교세를 약화.제거하기 위한 어용적인 정치성향의 단체로 출발하였고, 1970년도에 재정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 N CC가 대화창구로 접촉하고 있는 북한의 "조선기독교연맹"이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 연맹인가, 그리고 그들이 진정한 기독교인인가에 대해서 보수적인 교회는 물론 통일문제와 북한관계 전문가들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간 발표된 글과 정보들을 종합해 볼 때 기독교 연맹을 대표했던 고기준 목사는 매우 정치적이며 정치적 성향을
노골적으로 표현하였다. 다시 말하면 김일성 우상화에 동조하는 정치적 발언은 조선 기독교연맹이 북한 기독교회의 조직체라는 주장에 상당한 불신감을 더해주고 있다. "조선기독교연맹"이 북한 기독교회를 대표하는 조직이 아니라 김일성 정권의 하부 조직에 지나지 않는다면 NCC가 단일 창구로 접촉하고 있는 조선기독교연맹과의 교류는 사실상 무의미하다. 이들과 통일문제를 논의한다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단 말인가? 그것은 남북교회의 교류는 물론 통일운동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북한에 어용 기독교단체와 무관한 지하교회가 존재하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결국 NCC의 조선기독교연맹과의 교류는 정치적으로 이용될 뿐이며, 동시에 진정한 기독교회인 지하교회에 대한 배신이 되고 말 것이다.
둘째로 그간의 통일론이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 급진적이었고 따라서 통일론의 분열을 자초하였다는 점이다. 이점에 대해서는 NCC 가맹교단까지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그간의 통일론은 한국교회 전체가 공감하고 수용할 수 있는 통일론을 제시하지 못하고 제한된 소수의 교회만이 용인할 수 있는 통일론을 주장함으로써 범교회적 공감을 얻지 못하였고, 결과적으로 통일논의의 분열을 초래했다고 볼 수 있다.
셋째 통일운동을 1970년대의 인권운동.민주화운동.반체제운동 선상에서 이해함으로써 남한 정부에 대해서는 공격적 입장으로 정부와 맞서야 하고 북한 정부에 대해서는 유화적 입장에서 교류와 대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고, 남한보다 더 독재적 정권이며 반인권적, 반민중적 정권인 북한정권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관용적이고 유화적이었다. 이점은 문익환의 방북과 김일성과의 대좌에서도 나타난다. 이것은 북한과의 대화 창구 유지에 급급한 나머지 김일성(김정일) 개인 우상화를 핵으로 한 주체사상에 기초한 북한정권을 어쩔 수 없는 실체로 수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점은 복음적인 교회의 공감을 얻지 못했던 중요한 원인이었다.
넷째 통일논의를 한국교회가 감당해야할 지상(至上)의 과제인 것처럼 주장하는 통일지상주의(統一至上主義)나 통일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으로 여기는 통일만능론(統一萬能論)은 보수적인 교회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민족 통일은 우리 민족의 최대의 과제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통일 문제를 선교적 과제로 인식하고 통일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최대의 교회적 과제로 이해하는 것에 비판적이었다. 진보적 인사들은 통일자체를 선교로 보고, 마치 정치.경제.사회.인권 등 모든 문제가 분단에서 기인하였으므로 통일만 되면 모든 문제가 자동적으로 해결될 것으로 주장하는데 사실 그러할까? 베트남이나 예멘의 통일이 인권의 문제를 해결했는가? 그리고 독일의 통일이 예기치 못했던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통일지상주의.통일만능론 등의 감상적 통일론, 이것은 인간 본성과 사회구조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낙관론적인 견해라고 할 수 있다. 복음주의 교회는 통일만 되면 모든 문제가 자동적으로 해결된다는 주장이나, 통일이 한국교회가 감당해야 할 지상의 과제인 것처럼 주장하는 통일지상주의, 양자는 다 경계해야 할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통일에 대한 교회적 관심을 인식시켜준 것은 상당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일련의 노력의 결과 한반도의 통일은 더욱 현실화될 조짐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제는 급진적인 통일론이 중요한 의미를 가졌던 과거와는 달리 국민적 합의에 기초한 통일운동이 필요한 시기가 되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 볼 때 한국교회의 통일논의는 재야나 급진적 정치집단의 통일론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한국교회의 보수와 진보, 양측으로부터 호응을 받을 수 있는 통일론의 대연합을 추구해야 한다. 우선 한국교회적 호응을 얻는 일이 보다 실제적인 통일운동이 될 것이다. 우리는 진정한 통일운동의 전개를 위해 우선 범교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고 그 바탕 위에서 통일론을 전개하는 보다 합리적 노력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이점은 통일 이후의 분열과 대립을 지양하고 하나의 교회를 지향하는 데도 유익한 건설적 기여가 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