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설명 등 (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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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설명 등 (5) - //


귀신 쫓고 표적이 나타나는데도 이단인가?


최삼경 sam5566@amennews.com



Q: 성경에 보면 수많은 기적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 시대의 우리 주변에도 기적을 행한다는 유명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보면 귀신을 쫓아내고 표적이 나타나는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도 이단이 될 수 있습니까?

A: 이 문제는 넓게 보면 신비주의 문제입니다. 신비와 신앙은 중요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비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신비를 부정하면 이성주의에 빠지게 되고, 신비만 좋아하면 신비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신비주의는 이단의 온상이 된다는 점에서 문제가 심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하여 성경은 명확한 답을 주고 있기 때문에, 성경으로부터 그 답을 찾으면 됩니다.

유대인들은 표적과 기사를 좋아하는 민족이었습니다. 이들은 표적과 기사를 구하고, 그 표적과 기사만 나타나면 무조건 진리로 인정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마 12:38)라고 했고, 표적을 행하시는 것 때문에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요 12:18). 예수께서도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요 4:48)고 말씀하신 일도 있고, 바울도 헬라인은 지혜를 구하고 "유대인은 표적을 구한다"고(고전 1:22)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사람도 유대인처럼 신비주의성이 강한 민족입니다. 그 신비주의성이 지난 1세기 동안 한국교회를 부흥시킨 원인이기도 하였지만, 이제 사이비 이단이 발생하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그 증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즉 한국교회에 가장 미혹성이 큰 사이비 이단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신비주의 계열의 이단들입니다. 예컨대 재미 교포들의 경우, 미국 문화권 속에 살면서도 그 문화권에서 발생한 크리스챤 사이언스나 몰몬교 같은 이단들에게 빠지는 확률은 낮습니다. 타 문화권에 살면서도 오히려 한국에서 발생한 신비주의자들인 김기동, 이초석, 이명범, 이재록, 김계화, 박무수, 박철수 등의 이단에 빠지는 확률이 훨씬 더 높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민족에 신비주의성이 많은 것이 사이비 이단들이 발생하는 사상적 원인 중에 가장 대표적 원인입니다. 베뢰아 아카데미의 김기동 씨(성락교회 담임목사)의 경우 한국의 유수한 교단들로부터(예장 통합, 합동, 고신, 개혁합신, 기성, 기침, 기감) 이단으로 규정되었습니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가장 객관성 있게 내려진 규정인데도, 그를 추종하는 자들에게는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 주된 이유는 김기동 씨가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친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은 할렐루야 기도원의 김계화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표적과 기사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먼저 결론부터 내리자면,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친다는 것과 이단이 되는 것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반대로 병을 고치고 기적을 행한다고 하는 사람이나 집단은 오히려 의심해 보아야 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먼저, 표적을 가장 많이 행하신 주님께서는 표적 중심의 신앙인을 책망하시고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첫번째로 기적을 행하신 가나의 혼인 집 사건 후에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고 난 후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는데 그 이유는 저들을 아셨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요 2:23-24). 그리고 예수님은 표적을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극단적으로 비판하기를,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마 12:39, 마 16:4)고 하였습니다.

왜 늘 기적을 쫓고 구하는 사람들은 이 말씀이 보이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저들은 이 말씀 앞에서 깨달음이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 성도들 중에 기적만 좋아하고 기적을 구하는 사람들을 만나시면 같은 말씀을 하실 것입니다.

다음으로, 기적을 체험했다고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적을 보았다고 해서, 그리고 기적을 자신이 직접 체험했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믿음이 아니며 또 그것이 믿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실례를 각각 구약에서 하나 신약에서 하나를 들어보겠습니다.

구약에서 구속사적 측면에서 계속 언급되는 사건이 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바다를 건넌 기적일 것입니다. 430년의 한많은 종살이의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습니다. 거기에다 원수까지 자동적으로 갚는 순간입니다. 장정만 60만 명, 추산하여 200만 명의 아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바다가 갈라지는 것을 보았고 그래서 바다를 육지처럼 건넜습니다. 그런데도 믿지 못할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없었습니다. 그래도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이 있었다면 돌에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이렇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베푸신 큰 일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출 14:31). 분명히 믿었고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진짜 믿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15장의 사건에서도 알 수 있지만 시간이 명시되어 있지 않으니까 생략하고 16장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그렇게 큰 기적을 체험하고 출애굽한 지 고작 2개월 15일만에 이들은 인간적으로도 할 수 없는 불신앙적 원망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 16:2-3).

무엇을 말해 줍니까? 기적이 바로 참 믿음이 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인간적으로 조금의 의리라도 있다면 2개월 15일만에 이렇게 불신앙적인 원망을 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이제 신약에서 실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 주님이 공생에 중에 행하신 기적 중에 그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 가장 많았던 것은 오병이어의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정만 5천 명, 모두 2만여 명으로 추산되는 사람들이 보리떡과 물고기를 먹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의미가 크기 때문에 이 기적에 대하여 4복음서 모두 기록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갈릴리에서 그 기적의 떡을 먹고 그냥 집으로 돌아갈 수 없어서 예수님을 찾아나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다음날 가버나움에 계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기적의 빵을 먹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하시며(요 6:27-34),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에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기적의 빵을 먹고 찾아온 그들인데 기적의 빵이신 주님 자신을 먹으라고 하니까 아무도 먹지 않겠다고 가버렸다는 사실입니다. 그 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요 6:67)는 쓸쓸한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기적을 체험한 것과 믿음은 이렇게 다른 것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기적 때문에 자신을 쫓는 사람을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말세에 적그리스도가 많은 기적을 행하여 택한 자까지 미혹한다는 주님의 예언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질문을 해 보면 좀 쉬워질 것입니다. "성경에 "말세에 누가 적그리스도인지 아닌지 알려면, 그가 기적과 표적을 행하는지 행하지 못하는지 살펴보고, 기적을 행하지 못하면 적그리스도요 이단이며 기적을 행하면 내 제자니라"고 주님이 말씀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런 곳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말씀하셨습니다. "말세에 적그리스도가 이적을 행하지 못한다"고 한 것이 아니라 "이적과 기사를 행할 것이고 그래서 택한 자들도 미혹하리라"고 했습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 24:24)고 했습니다. 여기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는 말씀을 볼 때, 큰 표적과 기사를 행할 때 그 미혹성이 크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타종교에도 얼마든지 기적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사이비 이단에게도 얼마든지 기적과 표적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적과 기사를 본질적으로 부정하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부정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성주의자가 되어 이단에 빠질 위험성이 더 커집니다.

결론적으로 믿음과 기적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마태복음 7장에서 말세의 심판대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주님에게 심판을 받을 사람들이 한 말과 주님의 대답이 이렇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여기에서 생각하게 하는 것은 이들이 정말로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였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들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까지 쫓아내고도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될 수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실제로 귀신을 쫓아내고도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대표적 사람이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오늘날 신비주의 계열의 이단들은 항상 자신들만이 기적을 행하고 병을 고치는 것처럼 선전하고 그것으로 이단이 아닌 것처럼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성경을 수단적으로 이용은 하고 있지만 성경이 말하는 말씀을 듣지 않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기적과 표적을 부정하지도 않고, 기적과 표적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지도 않는 믿음이 주님이 원하시는 믿음입니다.



2005년 06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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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에 속한 자는 모두 지옥에 가는가?


최삼경 sam5566@amennews.com



어떤 사람, 어떤 단체를 사이비 이단이라고 할 때 우선 기본적으로 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거나 단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도 "이단에 속하기만 하면 모두 구원받을 수 없을까" 하는 생각도 들게 됩니다. 과연 이단에 속한 자는 모두 구원을 받을 수 없는가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선 이 문제에 대하여 바른 답을 얻으려면 두 가지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구원의 문제요, 다음은 이단이 무엇이냐의 문제입니다. 구원은 누가 누구에게 주는 것이냐는 것이며, 다음은 이단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선 구원의 문제부터 생각해 보겠습니다. 구원은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먼저는 연역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의 측면에서 보는 것이요, 다음은 귀납적으로 인간의 믿음의 측면에서 보는 것입니다.

먼저 구원이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속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라고 말입니다. 심지어 같은 진흙을 가지고 귀한 그릇도 만들고 천한 그릇도 만드는 토기장이 비유까지 들어서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주권 앞에 인간의 믿음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의무를 약화시키고, 반대로 인간의 의무는 하나님의 주권을 약화시키는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즉 구원 얻도록 예정된 자는 믿지 않아도 구원받을 것이요, 또 구원 얻지 못하도록 예정된 자는 믿어도 구원 얻지 못할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말한다고 해서 인간의 의무인 믿음이나 전도를 무시하지 않는다는 점이요, 역시 인간의 의무인 믿음과 전도를 강조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의무를 강조하면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면서도 또한 인간의 의무를 강조하여 이 두 가지가 조화 있게 나타납니다. 즉 인간에게 믿음과 전도를 촉구하면서도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부정하지 않으며, 또한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고 인정하면서도 인간의 의무인 믿음과 전도를 촉구하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구원에 대하여 말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인간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믿어야 구원을 받지만 그 믿음도 구원받을 믿음인지 아닌지 판단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 다음에 오는 문제는, 이단 문제는 구원의 문제라는 점입니다. 오늘날 많은 이단들이 가정을 파괴하고 금품을 갈취하며 부녀자를 폭행하는 등의 부도덕한 일을 자행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이단 문제의 본질이 아니란 것입니다. 이단 문제의 본질은 윤리적 문제가 아니라 교리적 문제입니다. 즉 이단이란 성경이 말하고, 사도들의 전승 위에서 2천 년 동안 교회가 믿어오고 주장하던 구원론을 부정하고 침해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이서 1장 9절에서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교훈의 종교", 그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렇다면 이단자가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은 자연스런 결론입니다. 그런데 이것과 하나님의 주권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느냐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믿음을 확인하고 그에게 구원을 확신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가 아닌 것처럼, 이단에게도 구원이 있는지 없는지 밝히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 아님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단들은 본질적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단에 속하기만 하면 무조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하는 생각은 위험한 생각이 됩니다. 우리는 둘로 나누어 보아야 한다고 봅니다. 본질적으로 구원받을 가능성이 거의 없는 이단과, 그러나 개인적으로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는 이단을 나누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통일교나 JMS나 최근의 천부교나 영생교 등은 개인적으로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교리적 체계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을 가능성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구원받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는 이단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성락교회 김기동 씨 같은 경우 이단사상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어쩌면 한국에 활동하는 이단 중에 이단 사상이 가장 넓게 퍼져 있는 사람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신론에도, 기독론에도, 인간론에도, 계시론에도, 창조론에도, 천사론에도, 성령론 등에서도 이단사상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속한 사람들은 전혀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그 속에 있어도 김기동 씨의 사상과 상관없이 바른 죄관과 구속관과 영접관을 가질 수도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이단자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을 비난할지도 모르는 일이며, 또한 이단에 속한 자도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로 이단에 빠진 사람들이 위로를 받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무조건 이단에 속한 사람은 다 구원받지 못한다고 단정해 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침해요, 또한 이단자도 구원받는다고 하여 이단에 속한 교회를 나가도 되는 것처럼 한다는 것은 죽은 바다에서 고기를 잡겠다고 낚시질을 하는 일과 같을 것입니다.



2005년 06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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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시인하는데도 이단이 될 수가 있는가?


최삼경 sam5566@amennews.com


위의 질문이 형식적으로 문제가 없어 보이는 것은 진정으로 예수를 구주로 믿는다면 이단일 수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 뒤에는 다음과 같은 말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내가 예수를 주님으로 믿고 시인하는데, 왜 이단이라고 하느냐?" "이단이라고 지칭된 사람들도 예수를 믿고 있고, 오히려 더 뜨겁게 믿고 있는데 왜 이단이라고 하는가?"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이단자들이나 그들을 옹호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사용되고, 결국 순진한 성도들을 속이는 데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위의 질문에서 문제의 핵심은 한 가지라고 할 수 있고, 또 두 가지라 할 수도 있습니다. 그 하나는 "믿는다는 예수가 어떤 예수냐" 하는 점이며, 다음으로는 "믿는다는 주님은 어떤 주님이냐"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예수를 믿느냐"와 "어떤 주님이냐"의 문제는 상통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그 예수가 성경이 말하는 예수인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비록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그 예수가 성경이 말하는 예수가 아닐 때 결국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이단이 가장 많이 발생한 것은 기독론입니다. 즉 모두 예수님을 믿었지만 그 예수가 성경이 말하는 예수가 아니기 때문에 이단으로 규정된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은 온전하신 인간이요 온전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한 인격 속에 두 성품(인성과 신성)이 온전히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현설주의(도케티즘)자들은 "예수님이 신으로 오셨고 신으로 죽으셨다"고 주장하여 인성을 부정하는 이단이 되었고, 그리고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규정된 아리우스라는 사람은 "예수님의 신성이 하나님의 신성과 다르다"고 주장하여 신성을 제한하다가 이단이 되었고, 아볼로나리우스라는 사람은 "예수님의 인성이 우리와 다르다"고 주장하여 인성을 제한함으로 이단이 되었고, 에비온파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여 이단이 되었고, 그리고 유디키안은 예수님의 신성 안에 인성이 흡수되어 있거나 두 성품이 혼합되어 제3의 종류를 만들어 냈다고 하는 일성론을 주장하다가 이단이 되었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이들이 다 예수를 믿었지만 그러나 이단이 된 것은 그 예수가 성경이 말하는 예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실례를 한국교회에서 들어보겠습니다. 한국교회에 가장 많은 이단을 만들어 냈다고 볼 수 있는 베뢰아아카데미(성락교회)의 김기동 씨의 경우입니다. 그도 예수를 믿는다고 주장하고 또 그를 추종하는 성도들도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믿는 예수를 살펴보면 성경이 말하는 예수가 아닙니다. 즉 김기동 씨가 믿는 예수는 그 인성에서도 신성에서도 다 잘못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신성은 에비온파처럼 부정하고, 인성은 아볼로나리우스처럼 제한하고 있습니다.

김기동 씨가 보는 신성은 이렇습니다. "예수의 생애는 신의 생애가 아니고 사람의 생애입니다. 물 위를 걸은 것은 사람이신 예수가 걸은 것입니다. 사람이 걷는 것이니 보편적인 것입니다. 무덤이 열리기 전까지 그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어느 한 부분이 신이라고 하는 것은 적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의 보편성을 부인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베뢰아아카데미 9기생 테이프 19-2)라고 하고, "예수는 성령을 말씀하실 때마다 "내가 가면 그가 오시리니" "오실 때에" "오시면" "너희와 함께 계시면" 하여 존칭을 쓰셨습니다. 이처럼 주님도 성령에 대해 함부로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존칭을 쓰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자신보다 더 높이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기에, 곧 피조물과 함께 하시어 피조물이 수태되는 것같이 사람 몸에서 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땅에서 식물을 먹고 피곤하여 저녁에는 주무시며, 죽임을 당할 때에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 곧 인자로 계셨기에 그 동안은 성령을 자기와 같은 수준에서 말씀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일체되시지만 인자 예수가 받은 영광보다 성령은 더 크신 영광을 받아야 할 분입니다"(성령을 알자, p.13)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몸을 입고 있을 때 신이 아니란 말로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김기동 씨가 말하는 예수님의 인성도 성경이 말하는 인성이 아닙니다. 그가 믿는 예수님의 인성은 죄성만 제하고 우리와 성정이 같다는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으로 인성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그는 요한복음 1장 1절, 14절에 근거하여 주장하기를,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는데 이 말씀은 요한복음 6장 63절에 의해 곧 영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은 영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로서 영은 항구적 존재이니 예수님의 육체는 우리의 영과 같은 수준으로서 인격이 아닌 항구적 존재라는 것입니다"(베뢰아아카데미 9기생 테이프 9-2)라고 하고, 그래서 "예수님의 육체는 영입니다.

그의 흘리신 피는 영입니다"(베뢰아 사람 9권, 1989년 3월호 p.44)라고 하였습니다. 즉 아볼로나리우스의 주장과 같은 것으로서 예수님의 육체는 우리와 다르다는 말로 "영적 육체"(spiritual body)라는 말입니다. 이 말에 의하면 굳이 예수님께서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셔야 할 의미가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처럼 누구보다 예수를 사랑하고 예수를 뜨겁게 믿고 있다고 하는 김기동 씨이지만 그 예수가 다른 예수이기 때문에 이단이 된 것입니다.

다음으로, 비록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다고 해도 어떤 주님으로 믿는지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즉 노란 예수를 믿는다면 그 구원도 노란 구원일 것이고, 빨간 예수라면 그 구원도 빨간 구원일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가 다르면 그 구원의 성격도 달라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즉 병만 고쳐주는 주님이거나, 이 땅에서 영생하게 하는 주님, 특정 지역에서 특정한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는 주님이라면 그가 말하는 구원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고 하여도 역시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이서 1장 9절에서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고 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교훈의 종교입니다.



2005년 06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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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규정 기준, 교리인가 성경인가?

최삼경 sam5566@amennews.com


Q: 이단으로 규정된 집단이나 사람들이 자신들은 성경적으로는 이단이 아닌데 교리적으로 이단이 되었다고 주장하며 "성경을 기준으로 해서 이단을 규정해야지 교리를 기준으로 해서 이단을 규정하느냐"고 항변하는 것을 종종 봅니다. 이단을 규정하는 기준은 성경입니까, 교리입니까?

A: 이단 규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기준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의해 왼쪽도 오른쪽이 되기도 하고 반대로 오른쪽이 왼쪽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사람을 이단이라고 하기도 하고 이단이 아니라고 하기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만일 그 판단이 주관적으로 진실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기준의 차이에서 나타난 결과입니다.

기독교인에게 이단 규정은 최고의 형벌입니다. 만일 이단 규정을 감정적으로 또는 정치적으로 규정하였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극악한 죄라고 봅니다. 이단된 자보다 이단되게 한 자의 죄가 더 크다고 봅니다.

그런데 기준을 잘못 선정하여 이단으로 규정하는 것도 무서운 죄입니다. 누구를 이단이라고 한다는 것은 크리스천에게 영적으로 가장 무서운 형벌이기 때문입니다. 무조건 내 신앙과 다르면 이단이며, 내 교단의 교리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이단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단을 규정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동안 한국교회에서 우선 제일 많이 대두되는 문제는 "이단 규정의 기준이 성경이냐 교리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이 문제는 주로 이단으로 규정된 사람이나 단체들이 제기하는 문제입니다. 한국교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받은 안식교와 윗트니스 리(회복교회, 지방교회), 그리고 김기동측(성락교회)에서 주로 한 말이었는데 그들을 옹호하는 교계의 일부 신문들에 의하여 한국교회에 확산된 측면이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단 규정 기준은 교리라는 말과 성경이어야 한다는 말은 서로 다른 말이 아니라 같은 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씩 나누어서 답하겠습니다.

먼저, 이단 규정의 기준을 교리라고 하는 말의 의미는 "이단 문제의 본질은 교리적인 문제이지 윤리적 문제가 아니다"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즉 교리적이어야 한다는 말의 의미가 "이단 비판의 기준은 성경이 아니라 교리이다"라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단이냐 아니냐를 나누는 기준을 본질적으로 윤리적 문제에서 찾으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교리에 대하여는 너그럽고 윤리적인 문제에 대하여는 엄격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녀자 성폭행을 했다거나, 금품 갈취를 했다거나, 가정 파괴를 했다고 하면 이단으로 생각하고, 삼위일체관이 잘못되었다거나 기독론이 잘못되었다고 하면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이 잘못이라는 말입니다. 아닙니다. 윤리적 문제가 중요하지만 그러나 윤리적 문제가 이단 규정의 본질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된다는 말입니다.

둘째, 이단 규정의 기준이 교리라는 말과 이단 규정의 기준이 성경이어야 한다는 말은 좁은 의미에서는 다른 말이지만 넓은 의미에서 같은 말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다 자기가 성경적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성경적으로 옳다고 믿고 있는 그 기준이 바로 교리인 것입니다. 세상에 인생관 없이 사는 사람이 없듯이, 세상에 교리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정리된 인생관은 아니더라도 모두 내재된 인생관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정리된 교리는 아니더라도 내재된 교리는 최소한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을 기준으로 해서 이단을 규정해야 한다고 하고 교리가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 마치 자신은 교리는 없어도 성경적으로는 옳게 신앙생활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자신이 곧 진리요 성경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이 성경적이라고 믿고 있는 그것을 성경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교리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 번 성경적이라고 생각한 잘못된 생각을 영원히 고칠 길이 없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이 바로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어제 저것이 성경적이라고 생각하여 그렇게 믿고 주장하다가 오늘 이것이 성경적이라고 생각되면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경이 아니라 교리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수정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교리는 수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단 비판 기준이 교리가 되지 말고 성경이어야 한다는 말처럼 옳게 보이는 말이 없지만 그러나 그 말처럼 이단들에게 악용되는 말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005년 06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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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단이라고 해야 이단인가?


최삼경 sam5566@amennews.com



Q: 최근 들어 많은 이단들이 한국교회에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단이라고 하면 저기서는 이단이 아니라고 하고, 이 사람은 이단이라고 주장하는데 저 사람은 이단이 아니라고 변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단논쟁이 감정 싸움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누가 이단이라고 해야 이단인 것입니까?

A: 기독교 역사는 어떤 점에서 이단과의 논쟁과 싸움의 역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이단자들이 나타나서 이단 사설을 주장해 왔고, 이에 대하여 정통교회는 반박하고 또한 그들을 이단으로 규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단자들과의 논쟁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는 교단이나 종교회의를 통해서 이루어진 경우요, 또 하나는 개인적으로 공방을 하는 경우입니다.

이 두 가지 형태의 이단 논쟁은 사실상 선명하게 구별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단체라도 사람 없는 단체란 존재할 수 없으며, 또한 개인의 입장과 신학이 집단을 통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아리우스(Arius)라는 자는 예수님의 신성이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Homoousios)하지 않고 유사(Homoiousios)하다고 주장하여 예수님의 신성을 제한하다가 이단이 되었습니다. 그는 니케아(Nicaea AD. 325)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규정은 비록 종교회의에서 결정된 것이지만 사실은 아다나시우스(Athanasius)라는 개인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에베소회의(AD. 431)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네스토리우스(Nestorius)도 씨릴(Cyril)이란 사람을 통해서 된 것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누가" 이단이라고 했느냐보다 "왜" 이단이라고 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이 이단 논쟁을 벌이는 것과, 단체가 이단 규정을 하는 것에는 각각 장단점이 있습니다. 이 점을 살펴봅시다.

먼저 개인이 이단 논쟁을 벌이는 경우입니다. 사명도 하나님의 역사도 개인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이단과 싸우는 일이란 참으로 격려할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명이란 그것이 어떤 것이든 본질적으로 거짓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어 있다는 점에서 고난이 수반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사이비 이단과의 싸움은 전투적 성격이 더 크기 때문에 많은 위험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개인 연구가들에게 많은 격려와 후원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은 다음과 같은 약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첫째, 편견의 문제입니다. 개인이란 아무리 객관성을 주장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자기 편견이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문제는 그것을 걸러줄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 세상 모든 일은 상대적이기 마련입니다. 높은 것도 더 낮은 곳에서 볼 때만 높은 것이요, 더 높은 곳에서 보면 역시 낮은 곳이 됩니다. 평지도 분지 속에서 보면 높은 산이 되는 것입니다. 검은 것도 더 검은 것보다는 흰 것이요, 흰 것도 더 흰 것보다는 검은 것이 되며, 왼쪽도 오른쪽에서 볼 때만 왼쪽이요, 더 왼쪽에서 보면 오른쪽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다른 사람은 선하다고 보는 경우가 있고, 내가 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다른 사람은 악하다고 보는 경우도 많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단 논쟁은 이런 상대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개인의 경우 편견이 문제입니다.

둘째, 개인은 단체보다 이단 논쟁을 감정적인 문제로 발전시킬 위험성이 더 크다는 점입니다. 개인이나 교단의 이해 때문에 상대방을 이단으로 몰아세우는 일이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감정이 개입되면 객관적 평가가 불가능하게 됩니다.

셋째, 가장 심각한 문제로서, 개인의 약점을 교회가 뒤집어쓸 위험성이 크다는 점입니다. 어떤 한 개인에게 이단문제를 전적으로 의지한다면 그 개인의 사상적, 윤리적 약점이 발생했을 때 그것이 이단자들의 공격 목표가 될 것이요, 그렇게 되면 결국 교회가 그 약점을 감당해야 하는 피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단 연구의 위험성과 난해성이 때로 이단 연구가를 영웅주의자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 또한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요, 지양되어야 할 문제입니다.

넷째, 개인 연구가를 희생시킬 수 있다는 점입니다. 상당수의 이단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기들을 이단이라고 하는 사람에게 복수하려고 합니다. 고소하고 협박하고 심지어 테러까지 합니다. 그렇게 될 때 그를 희생시킨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실제로 한 이단연구가를 죽음으로 넣고만 경험이 있습니다.

이제 공적인 단체가 이단을 연구하고 규정하는 경우입니다. 단체는 개인의 약점을 최소화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집단의 감정도 개인의 감정 수준을 못 벗어나는 것은 마찬가지요, 어떤 점에서 집단 이기심은 개인의 편견보다 오히려 더 무서운 것이 됩니다. 더욱이 힘이 항상 진리인 것은 아니라는 점과, 다수의 생각보다 선각적인 한 개인의 생각이 훨씬 옳았던 경우가 얼마든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분명히 한국교회가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집단적으로 이단 문제에 대처해야 함에는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이단 문제를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종교회의를 통해서 이단을 규정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종교회의도 후대로 갈수록 천주교라는 한 집단의 변호수단으로 사용됨으로써 객관성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이제 이단 문제를 취급해줄 범세계적 기구가 없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비록 세계교회협의회(WCC)라는 기구가 있지만, 이제 이 기구는 이단 문제까지 취급할 힘이나 기준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 기구 안에서조차 이단 못지 않은 사상이나 행위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단 논쟁이 생길 때마다 이단이라고 비판을 받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변증의 행태는 두 가지입니다. 개인 연구가들에 대하여는 "너 개인이 이단이라고 해서 이단이냐?", "누가 네게 이단을 정할 권리를 주었느냐?"는 것이며, 그러면서도 교단이나 단체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되면 "너희 단체가 한국교회의 종교경찰이냐?", "너희 교단이 한국교회의 대법원이냐?"는 등의 반론을 폅니다.

이제 이단을 규정할 세계적 기구를 기대하기는 불가능합니다. 가능성이 있다면 교단적으로 이단을 규정하고 대처하는 방법입니다. 우선, 일차적으로 이것이 제일 바람직하고 또한 가능한 일입니다. 물론 이미 한국교회의 여러 교단들이 그렇게 하고 있음은 참으로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교단이 이단을 규정할 때는 두 가지 제한된 의미의 활동이 된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그 교단의 교리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요, 둘째는 형식적으로 그 교단의 교인들을 보호하는 측면에서 행해지는 사역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교단과 교단의 교리적 차이점이 이단에 대한 반대입장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현재 한국교회의 실정을 볼 때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교단에서 이단으로 규정된 사람을 저 교단에서 면죄부를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단 문제에 대해서만은 범교단적인 기구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교회의 경우 현재 한기총이나 NCC같은 기구에서 이 일을 했으면 가장 바람직하다고 사료됩니다. 그리고 이단 문제는 찢어진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 운동을 크게 자극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봅니다.

결론적으로, 누가 이단이라고 해야 이단입니까? 개인이든 단체든 상관이 없습니다. 성경을 기준으로, 역사적 교회의 신학과 교리를 기준으로, 그리고 사도들이 물려준 그 전승을 기준으로 이단을 규정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2005년 06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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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을 비판하면 비성경적인가?

최삼경 sam5566@amennews.com


Q: 성경에 보면 비판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이단을 규정하고 비판하는 것은 비성경적인 일이 아닙니까?


A: 먼저 위의 말을 긍정적으로 들어야 합니다. 틀림없이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바는 비판은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 말하기를 "비판을 받지 아니 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7:1-2)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점에 있어서 더 분명했습니다. 자기 스스로는 자책할 것을 찾지 못했어도 의롭다고 할 수 없음은 하나님의 판단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 4:3-4).

그렇습니다. 비판이란 중요하기 때문에 그만큼 또한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법정에서 죄 없는 자에게 잘못된 판결을 내림으로 당사자에게 큰 손해를 끼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심지어 잘못된 사형이나 종신형을 내려 한 사람의 모든 가능성을 빼앗아 가버린 안타까운 경우도 있습니다. 이처럼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어간 자들이 많을 것이며, 이중에는 사후에조차 진실이 밝혀지지 못했던 경우가 더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잘못된 이단 규정은 이보다 훨씬 더 악한 일입니다. 비록 잘못된 이단 규정이 그의 영혼을 죽이지는 못하겠지만 이 땅에서 영적 가능성을 모두 빼앗아 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못된 동기와 목적으로 그리고 잘못된 기준으로 이단을 정한다면 이단으로 규정된 자보다 이단을 규정한 자가 훨씬 더 악한 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편가르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내 편은 악한 자라도 선하게 판단하고 네 편은 선한 자라도 악하게 판단하려고 합니다. 인간은 얼마든지 악한 자 속에 있는 작은 선이라도 확대하면 그를 선한 자로 만들 수 있고, 반대로 선한 자 속에 있는 작은 악이라도 확대하면 그를 악한 자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비판을 조심해야 하고 또한 어떤 점에서 비판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이단을 비판하지 말라는 말의 본 뜻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비판하지 말라"는 말이 어떤 비판이나 어떤 판단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비판의 기능 자체를 모두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이라도 아무도 아무 것도 판단하거나 비판하지 않는 자가 있을까요?

물론 톨스토이(L.Tolstoy) 같은 사람은 "비판하지 말라"는 말을 법정의 심판까지도 부정하는 뜻으로 해석하는 극단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오해하거나 고의적으로 성경의 주장을 왜곡시키려는 자들의 주장입니다.

과연 성경이 모든 판단을 금하고 있는지 먼저 살펴봅시다. 바울은 판단 자체를 모두 금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교회 문제를 가지고 세상법정에 송사한 것을 보고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고전 6:1-2). 바울은 성도가 심지어 천사까지 판단할 것이라고 했으며(고전6:3)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한다고 했습니다(고전2:15). 더욱이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고 한 그가(고전4:5) 음행하는 자들을 이미 판단하였다고 하였다는 것이(고전5:3) 무엇을 말해주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모든 판단, 모든 비판을 금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해야 할 판단을 피하고 바른 판단을 하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이단문제가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죄수가 없는 감옥이나 법정, 병자 없는 병원, 전쟁 없는 군인들만큼 무익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단이 없다면 이단 연구도, 이단 비판도 무익한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한국교회에는 이단 연구가가 필요 없을 만큼 이단이 적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세계 교회 역사에 한국교회만큼 이단 문제가 심각했던 교회는 없었을 것입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사이비 이단의 피해는 극대화되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교회는 많은 이단, 심각한 이단 문제에 적은 비판, 적은 연구로 대처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문제가 일 만이요 일천만이라면 그 대처는 십이요 일만 정도 밖에 되지 않고 있습니다.

문제는 얼마나 객관적이냐 하는 것입니다.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자료의 객관성과 비판 기준의 객관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료의 객관성이란 확실하고 정확한 증거를 가지고 비판해야 한다는 말이요, 비판 기준의 객관성이란 자기 기준이 아닌 역사적 교회의 입장에서 비판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비판 기준의 객관성입니다. 어차피 인간의 기준은 다원적이고 다변적인 것입니다. 이 편에서 보면 이것이 옳아 보이고, 저 편에서 보면 저 것이 옳아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단 비판은 성경말씀에 따라서, 그리고 사도들의 전승에 의해 비판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이단자들이나 그들을 옹호해 주는 자들의 말과 글을 보면 자료의 기준이나 비판의 기준을 구체적으로 문제 삼지 못하고 이단을 규정하는 것이 교회의 일치를 해친다거나, 오히려 이단을 양산한다는 식의 막연한 비판만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단을 경계하여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요한 2서 1:10-11)라고 하였는데 그렇게 하려면 먼저 이단자가 누구인지 판단해야 하는 것은 자명한 일일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쉽게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단자들을 판단하고 비판하라. 단, 진리를 따라, 바른 교리를 따라, 그리고 사랑으로"라고 말입니다.



2005년 06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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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을 영입하면 ‘이단옹호’ 단체다

[데스크칼럼] ‘한기협’의 김기동측 회원영입 발표 소식을 접하고


남광현 amen5502@amennews.com



한국기독교총협의회(한기협, 대표회장 성중경 목사)라는 교계 단체가 얼마 전 귀신파 이단 김기동 씨(서울성락교회)측의 모임체인 ‘기독교베뢰아교회연합’을 회원으로 받아들인 일이 요즘 논란이 되고 있다. 한기협은 지난해 군소 교단 등이 주축이 돼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대표회장 박종순 목사)와 유사한 이름으로 만들어진 단체이다.

이 소식을 접하며 우선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국교회에 그만그만한 군소 교단이 많아도 너무 많아 오늘날 이같이 어처구니없는 일을 다 보게 되는구나 하는 것이다. 어떤 군소 교단들은 소속 교회수를 기준으로 할 때 수십 개가 모여도 예장 합동측이나 통합측 같은 대표적 교단 하나보다 작다. 큰 것이 무조건 좋다는 게 아니라, 한국교회의 교단 난립상이 해도 해도 너무하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기협의 성중경 대표회장은 7월 22일 기자회견을 열고 자신들이 김기동 씨측을 받아들인 일의 전후 사정을 설명하고 그 일의 정당성을 강변했다고 한다. 보도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그는 심지어 본의 아니게 이단과 사이비로 몰려 억울함을 당한 교회와 교단을 구제하는 것이 사명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왜 지난해에 느닷없이 이 단체가 만들어졌는지 그 이유의 한 단면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준 말이다.

이날 성중경 목사는 김기동 씨측을 받아들인 이유를 설명하면서 김 씨의 문제점은 신학적인 것이 아니라 ‘말 실수’ 정도라고 했다는 것이다. 기가 찰 노릇이다.

김기동 씨는 성경이 지지하고 있지 않는 귀신론을 비롯 많은 부분에 있어 정통 교리(신학)적으로 일탈해 자신이 속했던 기독교한국침례회로부터 1988년 이단으로 규정된 이래 예장 합동측, 통합측, 고신측, 기독교대한성결교회, 기독교대한감리회 등 6개 교단측으로부터 이단으로 판명된 인물이다. 침례교, 장로교, 성결교, 감리교 등으로 그 교파가 각각 다름에도 김 씨를 공히 이단으로 분별했다는 점이 한국교회가 교파를 초월해서 그의 이단성을 얼마나 심각하게 보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구체적으로 보면, 김 씨의 친정인 기독교한국침례회는 1988년 8월 29일 “김기동 목사의 주장은 성서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자의적 해석에 의한 것이며, 자신의 주관적 체험에 바탕을 둔 편협된 착상일 뿐이라고 생각됩니다. 결론적으로 이 외에도 김기동 씨의 가르침 안에는 교리적 과오가 수없이 많으나 일일이 찾아서 바른 견해를 제시할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상식 이하의 신앙행위(거울을 보고 자신에게 들린 귀신을 내쫓는다든가, 귀신을 쫓기 위해서는 욕 잘하는 은사를 받아야 한다는 등등)는 그의 불건전한 신앙태도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 총회는 이와 같은 김기동 집단을 이단으로 규정한 바, 본 교단뿐 아니라 온 한국교회가 성서 위에 굳게 서서 그릇된 가르침에 현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라고 공표했다(김기동과 베뢰아아카데미의 정체).

성중경 목사가 속해 있는 기독교대한감리회 측은 91년 9월 1일 “김기동이 주장한 계시론, 신론, 창조론, 마귀론은 모두 이단사상이다”고 밝히며 교인들이 김 씨의 이단사상에 미혹되지 말 것을 당부했다(기독교세계 91년 9월호).

나머지 교단들도 김 씨의 사상이 창조론, 계시론 등 많은 부분에 있어 심각한 이단성이 있다고 밝혔다. 그런데도 성중경 목사는 이 같은 내용들을 모두 부인하듯, 한국교회의 주요 교단 측에서 이구동성으로 밝힌 바를 모두 잘못된 것으로 치부하듯 김 씨의 문제는 신학적인 것이 아니라 표현상의 ‘말 실수’라고 주장했다니 말문이 막힐 지경이다. 한기협이 지난해 공청회 등을 통해 김 씨의 사상을 검증한 끝에 결론 내린 게 고작 이런 것이었다면 무슨 목적으로 그런 공청회 같은 것을 했는지 묻지 않아도 알 만하다.

그런데 성중경 목사의 더 어처구니없는 말은 다음 말이다. 그는 “설령 김기동 목사가 과거에 이단적인 용어를 썼더라도 지금은 아니다”면서 “과거의 잘못을 회개하면 같이 갈 수 있는 게 교회다”고 말했다는 점이다. 마치 김 씨가 자신의 이단성을 시인하고 회개를 했고, 그래서 그들을 회원으로 받아들였다는 듯이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 씨가 한기협 측 앞에서는 그랬다는 게 아니라면, 그리고 정말 김 씨가 회개했다는 말이라고 한다면 이는 완전히 거짓말이다.

김 씨는 이단규정을 받은 이래로 지금까지 자신의 이단성에 대해 회개니 잘못 시인이니 하는 것을 했다는 점이 알려진바 전혀 없다. 성중경 목사의 주장대로 ‘말 실수였다’는 표현으로라도 자신의 잘못을 시인한 바가 없다. 오히려 김 씨측의 주간지 <주일신문>을 통해 수없이 정통교회를 비난했고, 이 신문은 요즘도 거의 매호 김 씨를 변호하며 그를 이단으로 판별한 측을 향해 맹비난을 퍼붓고 있다. 사실이 이 지경인데 성중경 목사는 무엇을 근거로 그 같은 말을 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교계에 이단비판이 나오면, 단지 말 실수였다고 변호해주는 것과 함께 등장하는 게 있는데 곧 ‘회개론’이다. 회개했으니 정통교회로 받아주자는 것이다. 주로 ‘영입’을 추진하는 자들과 일부 이단옹호 성향의 교계 신문들이 그런 말을 해왔다. 진정으로 회개했다면야 의당 그럴 일이지만(물론 충분한 기간에 걸쳐 그 진정성을 검증해야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당사자는 잘못 시인조차 한 사실이 없는데도 그저 회개했다고 해준 것이다. 이번의 경우도 그렇다면, 누구보다도 김기동 씨가 불쾌해서 펄쩍 뛸 일이다. 그는 잘못을 시인한 사실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자신은 옳고 이단 규정한 측이 틀렸다고 강변해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성중경 목사가 기자회견에서 "유대교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가톨릭 입장에서는 개신교를 이단으로 본다"며 "기독교베뢰아교회연합은 한국교회와 사회에 피해를 입힌 것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말했다고 보도된 바에 따르면, 사실 그에게 과연 아주 기초적인 진리의식이라도 있는지조차 의문스럽다.

1995년 통합측을 시작으로 하여 근자의 합동측과 한기총은 교계 신문들 중에서 이단옹호 성향이 짙은 신문을 ‘이단옹호언론’으로 규정해왔다. 물론 언론의 자유라는 것도 있기는 하지만, 일부 신문들의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정도의 이단옹호 행태와, 해당 이단들이 그 신문 기사들을 재판 및 선전에 활용하며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는 현실과, 진리문제의 절대성을 감안할 때 마땅한 일이라고 본다. 효과도 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이제는 그 정도에 머물러서는 안 될 일들이 잇따라 일어나고 있다. 일부 교계 신문뿐 아니라 이번의 ‘한기협’이나 저번의 ‘예장연’ 같은 교계 단체의 이단옹호도 동일한 잣대로 평가해야 한다고 본다. 어쩌면 교계 단체 이름으로 이단을 옹호해 주는 게 더 심각한 문제인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김기동 씨측이 정통교회를 비난하면서 한편으로는 교계의 인정을 받고자 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0여 년 세월 동안 여러 차례 그런 일이 있었고, 이 일에는 일부 교계신문이나 무슨 이단대책협의회니 하는 기관 등이 총대를 메고 나서주었다. 그러나 오리 한 마리가 닭 몇 마리의 조력을 받아 닭 무리의 한 구석에 섞여있다고 해서 결코 닭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차이가 더 드러나 주위의 시선만 끌 뿐이다.



2006년 07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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