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 이 분들은 최근 어느 법무부 장관처럼 남의 잘못은 한껏 조사해서 토씨 하나까지 비틀어 이단을 만들지만 정작 그 기준으로 자신을 살피면 자신들도 다 이단이 될 상황입니다. 일단 교계의 중요 흐름이니 봐 두시는 것은 좋으나 들여다 보는 것보다 이런 류가 있다는 정도만 알아 두셨으면 합니다.
제71회 고신총회, 2021.9.28. "신학위원회" 6번째 안건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능동순종과 회심준비론에 대한 총회의 신학적 입장에 대한 요청-신학위원회와 고려신학대학원교수회에 맡겨 1년간 연구하여 차기 총회에 보고"하기로 보고가 되었다.
교계가 기독론과 구원론에 걸친 이 건을 뜨겁게 논쟁하자 고신도 합동에 이어 검토를 하고 있다는 뜻이다. 정치가 결부 된 신학은 바른 결론을 내지 못한다. 내지도 않는다. 중생과 성화의 관계를 정립하지 못한 상태의 신학 연구란 혼선만 낳는다.
교계의 이단 논쟁에 가장 우스운 모습 중 하나는 "감리교"와 "장로교"가 함께 한다거나, "기장"과 "합동/고신"이 함께 하는 경우다. 불교와 기독교가 합해서 어느 종파를 이단이라고 한다면 이는 종교가 아니라 정치다. 말 뜻을 알기나 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고신과 합동이 교회 일치를 말할 때는 강도가 도적 퇴치 운동을 하는 정도다.
내용:
아버지가 돈만 벌어다 주는 아버지라면, 머슴도 돈을 벌어 줄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낳아만 주는 아버지라면 체세포 복제하는 사람이 아버지 됩니다. 닮기만 하면 아버지라면 복사기도 아버지가 됩니다.
아버지란
1. 낳아 주는데
2. 아버지와 같은 요소로
3. 아버지를 닮으며
4. 길러 주고
5. 책임을 지는
이런 면을 다 가졌을 때 아버지다운 아버지입니다. 그렇지만 낳아 놓고 버린 아버지도 굳이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그 면으로는 맞고, 또 줏어다 길러 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우리가 부를 때 그 때 아버지는 낳아 줬기 때문이 아닌데도 그렇게 부릅니다.
예수님의 대속을
지옥에 가지 않게 해 주는 수고만을 말한다면 죄값을 대신 하는 것으로 충분하고
아버지의 요구를 다 순종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라시는데 대신 해 주신 수고까지를 대속이라고 한다면 우리 대신 율법을 다 준행하신 수고도 대속에 포함합니다.
모두가 "대속"도 "사랑"도 "구원"도 자기 식대로 하나씩 정의를 내려놓고 그 정의에 맞지 않으면 사랑이 없다, 대속을 부인했다, 구원론이 틀렸다고 소리를 내는데 모두가 좀 문제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전체적인 면, 아버지의 어느 한 특별한 면... 우리는 친구 엄마를 "어머니"라고 부를 때, 심지어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어머님"이라고 부를 때 낳아 준 면이 없는 줄 알면서 여러 다른 기준에 따라 그렇게 부릅니다.
구원도
마9:21, 22에서는 "육체의 질병"에서 치료하는 것을 구원이라 했고
마14:30에서는 "교통 사고"에서 살아 나오는 것을 구원이라 했으며
마19:16, 25에서는 "영생"을 구원이라고도 했습니다.
성경 전체를 면밀히 살펴 보면
죄의 값은 사망이며, 그 사망은 장례식으로 끝나지 않고 영원한 지옥 형벌입니다.
그런데 율법이 금지한 것만 죄가 아니라 아각을 죽이라는 명령을 이행하지 않은 것도 죄가 됩니다. 율법이 금지한 것, 율법이 시킨 것, 율법 시대인 구약에도 율법을 지킨 그 내면의 충성도를 가지고 신6:5에서는 "마음을 다하고"라고 했습니다. 이렇게까지 나간다면 말씀에 대한 순종도 차원이 여러 가지입니다.
현재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문제로 교계가 뜨겁게 논쟁을 하고 각 교단의 총회들의 결정들이 갈피를 못 잡고 있는데 그 배경은 학자나 말쟁이들이나 정치가들이나 선동가들이 자기대로 뭔가 하나씩 의도를 가지고 말만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은 예수님이 우리 대신 당신을 다 바친 것을 말하는데, 우리를 위해 당신을 다 바침이 우리가 지은 죄만 해결일까? 우리가 행해야 할 의무에 대한 해결은 아닐까?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 되어야 하는 그 연결이라는 생명성 문제는 빼도 될까? 우리의 영생은 상관이 없을까?
주님이 모든 것을 다 바친 것 중에 마지막이면서 가장 큰 것은 "부활"이라는 고난인데, 이런 고난은 고난에 포함조차 시키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영원히 사람으로 계시는 고난은 신학에서 오히려 출세했다며 영광이라고 합니다. 성경이 영광이라 했으니 영광은 영광인데 어떤 면에서 영광일까? 너무 큰 희생이고 그 희생 때문에 우리가 얻는 수입이 너무 많아서 영광입니다. 주님께는 수고요 희생입니다. 그 것도 대속입니다.
롬6:5에서 주님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부활 때문에 주님과 연합한 자가 되었다면 이 것도 우리에게 큰 은혜이며 이 은혜에도 수고가 있었다면 그 것도 대속입니다.
뭐든지 넓게 생각하고 성경 전체를 다 살펴 보지 않고, 오로지 목적을 가지고 눈 앞에 당장의 논란에 집중하고 그런 사람일수록 책을 많이 읽고 남의 의견을 많이 탐색을 하다 보니 정작 성경 자체를 잘 알지 못하여 이런 현상이 생깁니다.
주님이 율법을 우리 위해 우리 대신 모두 실행한 것은 우리 구원, 우리 대속과 상관 없이 그냥 그렇게 해 본 것일까? 그렇지 않습니다.
현재 이런 문제로 논란하는 분들, 그들은 마치 중이 고기를 먹으면서 윤회설을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윤회설을 제대로 따지려면 일단 육식을 중단이라도 해야 맞습니다. 사랑도 그냥 사랑만 말하다 보니 기독교 박멸의 세력인 공산주의를 회개 시키지 않고 기독교를 없애려는 공산주의 목적을 그대로 가진 채 그들을 교회 안에 받아 들이자는 것을 더 큰 사랑으로까지 설명함으로 교회의 사랑이 교회를 죽이는 상황입니다.
사람도
태어 난 자연의 사람도 성경은 사람이라 하고
믿는 사람만 사람으로도 적고
죽음도 죽음과 함께 잔다고 말을 합니다.
또한 우리 안에 이런 인격과 저런 인격을 옛사람 새사람으로도 분명히 성경은 적고 있습니다. 차분히 성경 전체를 모두 살펴 가려면 나와 정 반대의 주장조차 그런 면이 있다고 생각하여 반영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최종 결론에 나아 갑니다. 자기 하나만 우뚝 서고 나머지는 발로 걷어 차서 낭떠러지에 떨쳐 버리는 그 마음 그 심보 그 자세 그 추세가 문제입니다. 이단의 주장조차 심지어 어느 한 면은 참고할 문제입니다. 문선명이 예수님의 실패로 자기가 제2의 예수로 왔다는데 문선명뿐 아니라 문선명식으로 보는 인류의 눈에는 예수님이 실패한 것이 맞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그렇게 봤었습니다. 그렇게 봤는데 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욱 주님의 십자가는 더 감사한 것입니다. 그리고 문선명처럼 드러 난 이단이 문제가 아니라 소리 없이 그렇게 볼 수 있는 우리 주변의 교인들 마음 속에 생길 수 있는 의심의 작은 것을 미리 막을 때 사용하면 그것도 유익합니다. 하물며 일반적으로 정통의 교회들에 속한 이들의 목소리는 그 어떤 근거를 조금이라도 가지고 떠드는 것이니 눌러서 진압을 하고 죄인으로 십자가에 못을 박고 나서 뒷처리를 하려 하지 말고, 그런 면도 있으니 그 면까지 포함한 최종적이며 하나뿐인 결론을 위해 살펴 봐야 합니다.
(능동적순종에 대한 박윤선 학회 입장)
"박윤선"이 설립한 합신측 강좌에서 박윤선의 손가락이 가르키고 있는 대상을 바라보는 강좌가 되자면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은 정통교리라고 뜻을 모았다.
(공회 입장)
박윤선이 설립한 곳이며 또한 그들의 표현을 우호적으로 이해한다면 별 문제는 없다. 그런데 평소 다른 곳을 정죄할 때는 성경만 기준이라야 한다는 곳에서 박윤선을 기준으로 삼은 것은 모순이다. 우리는 이해한다. 따라서 그들이 우리를 평가할 때도 백영희를 기준으로 한다는 무식하고 모략적인 정죄는 피하도록 부탁하고자 한다.
교계가 기독론과 구원론에 걸친 이 건을 뜨겁게 논쟁하자 고신도 합동에 이어 검토를 하고 있다는 뜻이다. 정치가 결부 된 신학은 바른 결론을 내지 못한다. 내지도 않는다. 중생과 성화의 관계를 정립하지 못한 상태의 신학 연구란 혼선만 낳는다.
교계의 이단 논쟁에 가장 우스운 모습 중 하나는 "감리교"와 "장로교"가 함께 한다거나, "기장"과 "합동/고신"이 함께 하는 경우다. 불교와 기독교가 합해서 어느 종파를 이단이라고 한다면 이는 종교가 아니라 정치다. 말 뜻을 알기나 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고신과 합동이 교회 일치를 말할 때는 강도가 도적 퇴치 운동을 하는 정도다.
내용:
아버지가 돈만 벌어다 주는 아버지라면, 머슴도 돈을 벌어 줄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낳아만 주는 아버지라면 체세포 복제하는 사람이 아버지 됩니다. 닮기만 하면 아버지라면 복사기도 아버지가 됩니다.
아버지란
1. 낳아 주는데
2. 아버지와 같은 요소로
3. 아버지를 닮으며
4. 길러 주고
5. 책임을 지는
이런 면을 다 가졌을 때 아버지다운 아버지입니다. 그렇지만 낳아 놓고 버린 아버지도 굳이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그 면으로는 맞고, 또 줏어다 길러 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우리가 부를 때 그 때 아버지는 낳아 줬기 때문이 아닌데도 그렇게 부릅니다.
예수님의 대속을
지옥에 가지 않게 해 주는 수고만을 말한다면 죄값을 대신 하는 것으로 충분하고
아버지의 요구를 다 순종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라시는데 대신 해 주신 수고까지를 대속이라고 한다면 우리 대신 율법을 다 준행하신 수고도 대속에 포함합니다.
모두가 "대속"도 "사랑"도 "구원"도 자기 식대로 하나씩 정의를 내려놓고 그 정의에 맞지 않으면 사랑이 없다, 대속을 부인했다, 구원론이 틀렸다고 소리를 내는데 모두가 좀 문제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전체적인 면, 아버지의 어느 한 특별한 면... 우리는 친구 엄마를 "어머니"라고 부를 때, 심지어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어머님"이라고 부를 때 낳아 준 면이 없는 줄 알면서 여러 다른 기준에 따라 그렇게 부릅니다.
구원도
마9:21, 22에서는 "육체의 질병"에서 치료하는 것을 구원이라 했고
마14:30에서는 "교통 사고"에서 살아 나오는 것을 구원이라 했으며
마19:16, 25에서는 "영생"을 구원이라고도 했습니다.
성경 전체를 면밀히 살펴 보면
죄의 값은 사망이며, 그 사망은 장례식으로 끝나지 않고 영원한 지옥 형벌입니다.
그런데 율법이 금지한 것만 죄가 아니라 아각을 죽이라는 명령을 이행하지 않은 것도 죄가 됩니다. 율법이 금지한 것, 율법이 시킨 것, 율법 시대인 구약에도 율법을 지킨 그 내면의 충성도를 가지고 신6:5에서는 "마음을 다하고"라고 했습니다. 이렇게까지 나간다면 말씀에 대한 순종도 차원이 여러 가지입니다.
현재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문제로 교계가 뜨겁게 논쟁을 하고 각 교단의 총회들의 결정들이 갈피를 못 잡고 있는데 그 배경은 학자나 말쟁이들이나 정치가들이나 선동가들이 자기대로 뭔가 하나씩 의도를 가지고 말만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은 예수님이 우리 대신 당신을 다 바친 것을 말하는데, 우리를 위해 당신을 다 바침이 우리가 지은 죄만 해결일까? 우리가 행해야 할 의무에 대한 해결은 아닐까?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 되어야 하는 그 연결이라는 생명성 문제는 빼도 될까? 우리의 영생은 상관이 없을까?
주님이 모든 것을 다 바친 것 중에 마지막이면서 가장 큰 것은 "부활"이라는 고난인데, 이런 고난은 고난에 포함조차 시키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영원히 사람으로 계시는 고난은 신학에서 오히려 출세했다며 영광이라고 합니다. 성경이 영광이라 했으니 영광은 영광인데 어떤 면에서 영광일까? 너무 큰 희생이고 그 희생 때문에 우리가 얻는 수입이 너무 많아서 영광입니다. 주님께는 수고요 희생입니다. 그 것도 대속입니다.
롬6:5에서 주님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부활 때문에 주님과 연합한 자가 되었다면 이 것도 우리에게 큰 은혜이며 이 은혜에도 수고가 있었다면 그 것도 대속입니다.
뭐든지 넓게 생각하고 성경 전체를 다 살펴 보지 않고, 오로지 목적을 가지고 눈 앞에 당장의 논란에 집중하고 그런 사람일수록 책을 많이 읽고 남의 의견을 많이 탐색을 하다 보니 정작 성경 자체를 잘 알지 못하여 이런 현상이 생깁니다.
주님이 율법을 우리 위해 우리 대신 모두 실행한 것은 우리 구원, 우리 대속과 상관 없이 그냥 그렇게 해 본 것일까? 그렇지 않습니다.
현재 이런 문제로 논란하는 분들, 그들은 마치 중이 고기를 먹으면서 윤회설을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윤회설을 제대로 따지려면 일단 육식을 중단이라도 해야 맞습니다. 사랑도 그냥 사랑만 말하다 보니 기독교 박멸의 세력인 공산주의를 회개 시키지 않고 기독교를 없애려는 공산주의 목적을 그대로 가진 채 그들을 교회 안에 받아 들이자는 것을 더 큰 사랑으로까지 설명함으로 교회의 사랑이 교회를 죽이는 상황입니다.
사람도
태어 난 자연의 사람도 성경은 사람이라 하고
믿는 사람만 사람으로도 적고
죽음도 죽음과 함께 잔다고 말을 합니다.
또한 우리 안에 이런 인격과 저런 인격을 옛사람 새사람으로도 분명히 성경은 적고 있습니다. 차분히 성경 전체를 모두 살펴 가려면 나와 정 반대의 주장조차 그런 면이 있다고 생각하여 반영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최종 결론에 나아 갑니다. 자기 하나만 우뚝 서고 나머지는 발로 걷어 차서 낭떠러지에 떨쳐 버리는 그 마음 그 심보 그 자세 그 추세가 문제입니다. 이단의 주장조차 심지어 어느 한 면은 참고할 문제입니다. 문선명이 예수님의 실패로 자기가 제2의 예수로 왔다는데 문선명뿐 아니라 문선명식으로 보는 인류의 눈에는 예수님이 실패한 것이 맞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그렇게 봤었습니다. 그렇게 봤는데 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욱 주님의 십자가는 더 감사한 것입니다. 그리고 문선명처럼 드러 난 이단이 문제가 아니라 소리 없이 그렇게 볼 수 있는 우리 주변의 교인들 마음 속에 생길 수 있는 의심의 작은 것을 미리 막을 때 사용하면 그것도 유익합니다. 하물며 일반적으로 정통의 교회들에 속한 이들의 목소리는 그 어떤 근거를 조금이라도 가지고 떠드는 것이니 눌러서 진압을 하고 죄인으로 십자가에 못을 박고 나서 뒷처리를 하려 하지 말고, 그런 면도 있으니 그 면까지 포함한 최종적이며 하나뿐인 결론을 위해 살펴 봐야 합니다.
"박윤선"이 설립한 합신측 강좌에서 박윤선의 손가락이 가르키고 있는 대상을 바라보는 강좌가 되자면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은 정통교리라고 뜻을 모았다.
(공회 입장)
박윤선이 설립한 곳이며 또한 그들의 표현을 우호적으로 이해한다면 별 문제는 없다. 그런데 평소 다른 곳을 정죄할 때는 성경만 기준이라야 한다는 곳에서 박윤선을 기준으로 삼은 것은 모순이다. 우리는 이해한다. 따라서 그들이 우리를 평가할 때도 백영희를 기준으로 한다는 무식하고 모략적인 정죄는 피하도록 부탁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