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섭 자료 모음, 인물과 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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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섭 자료 모음, 인물과 archive

송종섭 목사님은


총공회의 분열을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고 막으려 한 분이다. 또한 이영인 중심의 연구소를 가장 아끼고 기대했으며 극찬한 분이다. 동시에 이영인에 대한 비판이 필요하면 서슴치 않았다. 그래서 최소한 송 목사님의 자료 또는 관련 내용을 통해 우리는 '공회의 객관적 사실'을 살펴 볼 수 있다. 다음 기록은 주로 송 목사님이 직접 또는 간접으로 이 곳에 주신 자료다. 어떤 자료는 송 목사님 외에 3자로부터 받은 자료도 있으나 송 목사님과의 대화를 통해 그 정확성이나 전체 흐름을 살필 수 있는 경우에 '송종섭 자료'라는 이 곳에 싣는다. 따라서 송종섭 목사님이 직접 제공하지 않은 자료도 함께 있다는 점을 유의해 주면 좋겠다.


송종섭은,

백 목사님 생전에는 주로 2선에서, 그리고 사후는 분쟁의 한 중심 1선에서 가장 많은 기록과 현장을 맡은 분이다. 1993년 3월에 연구소의 이영인 연구부장을 당시 총공회 교수직에서 제명할 때 주도한 일 외에는 이영인 목사와 평생을 가장 가깝게 지낸 인물이다. 1988년 2월의 사직동교회 사건을 함께 해결하면서 급격하게 가까와 졌고 1989년 8월 27일의 백 목사님 장례 때부터는 이영인 목사의 방패막이 되면서 이영인 목사와 가장 긴밀하게 활동을 했던 3인 중 한 분이다. 이진헌 이재순 송종섭 목사님은 부공3의 가장 든든한 배경이었다. 송 목사님이 1992년 대구공회와 소송을 주도하면서 이영인과 이 건에 관해서는 가장 반대 입장을 가졌으나 그 일 외에는 송 목사님은 이영인 및 그 함께 하는 이 곳을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니 전력을 다해 지원한다는 입장이었다.


1993년 3월 이후로 공회 문제에 관하여 서로 딴 길을 걸었으나 송 목사님은 공회의 만사와 함께 백영희 목사님의 가족 문제를 늘 실시간으로 의논했다. 송 목사님은 이영인을 후원하다가 가장 많은 고초를 겪은 분이다. 이영인을 제명하는 과정을 주도하면서도 모든 공회 사안에 중심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 분의 기록은 공회사 연구에 도움이 되며, 최근 급변하고 있는 총공회 30년 분쟁사의 향후에 도움이 될 자료가 많아서 이 곳에 소개한다.


지금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있는 '백도영 목사님의 고소건, 즉 백영희 목사님의 설교는 자녀만의 사유재산'이라는 고소를 두고 송 목사님은 백도영 고소인 측의 회유를 끝까지 물리치며 향후 전개 될 고소를 대비하도록 사전에 모든 자료를 제공해 주셨고 모든 정보도 늘 실시간으로 주셨다. 또한 재판이 진행 되면 증인으로 나서겠다고 했는데 그 분이 증인에 나섰더라면 이 소송은 진작 끝이 났을 상황이다. 이런 점에서 아쉽기 한도 없지만 새벽예배를 인도하고 하나님 앞에 서신 그 분의 충성과 충정을 그 순간으로 종료한 하나님의 섭리가 따로 있을 것이어서 인간적으로 이 번 소송 건을 두고 또 향후 전개 되는 공회의 복잡한 사건을 두고 그 분이 가장 아쉽다.


(인물 소개)

송종섭(鍾涉), 1936년, 충북 제천 출신

1953년 12월 제천고등학교 2년 재학 중, 제천고등학교 교장 사모님이던 최기주집사님에게 전도되었고 처음에는 교회를 놀러 다니는 정도로 출석. 1954년 제천고 3학년, 1955년 연세대학 영문과 입학, 부모님과 송종관 형님이 제일 뒤에 교회를 출석.


백목사님을 알게 된 것은 1954년, 예수 믿고 난 다음해 1월 부산 남교회에서 동계 학생 수양회 SFC의 1주일을 참석하였고 전국교회 웅변대회에서 1등. 최기주집사님 인솔로 20여명 제천식구들 전부는 주일에 서부교회로 가서 첫 인사. 1957년 입대를 해야 했지만 당시 군입대가 주일에 맞추어져 있어 이를 거부하였고 군기피 상태로 지속되어 학교에서는 제적되고 취직은 금지. 1957년 결혼하고,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서 전도사는 아니었으나 개척교회 전도사 역할. 1961년 혁명 후 군기피자 단속이 강력하였기 때문에 장교시험을 쳐서 들어가게 되었는데, 3천명 응시생 중 1등으로 합격되어 군에 장기 근무.


육사 교수요원으로 연세대 3학년으로 복귀하였고 군인의 신분으로 3학년에 행정고시 합격, 국방부와 연세대와 육사로 진출하는 문제 때문에 부서간 차출 갈등이 있었다가, 결국 국방부와 연세대와 육사가 공동으로 인력을 관리하는 계획서가 작성 되어 서울로 전출.


1972년 대구 국군 간호학교 교수로 부임하여 장교 신분으로 대구 봉덕동에서 대구 덕수교회 개척, 매월 교역자회 부산 참석 때문에 군에서 제동이 있었으나 군생활 중 제일 어려웠던 것은 국기배례문제. 소령으로 일직사령을 맡을 때 주일과 수요 금요 예배 인도 때문에 외출하면서 집회까지 한번도 빠짐없이 참석. 덕수교회 조사로 인허 받음.


1974. 원동교회 신연범목사님 후임으로 부임한 후

1976. 6. 30. 군에서 제대하고 덕수교회를 담임

1979. 11. 창동교회 전성수목사님 후임으로 부임

1980.6. 포양교회 전재수목사님과 목회자 상호이동으로 부임

1982. 덕수교회로 다시 부임

1988. 사직동교회 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