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용조 저 "그리스도인의 확신" 성경강해집에서 발췌 소개합니다.
p.306-308
사망에 이르는 죄
16절에 보면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는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죄에 빠져 있는 형제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강력하게 권고하면서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망에 이르는 죄에 대한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사망에 이르는 죄가 정확하게 무엇인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요한이 사망에 이르는 죄가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고 있음을 보아서 당시의 독자들은 이 말의 뜻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참으로 그 뜻을 정확하게 알기가 어렵습니다. 성경 학자들의 해석도 구구하게 엇갈리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사망에 이르는 죄를 고의적인 살인과 같은 극악무도한 죄로 해석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사형에 해당되는 죄들이 여기에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이 해석은 수용하기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바울과 다윗을 생각할 때).
사망에 이르는 죄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가 후에 배교하는 죄를 가리킨다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박윤선, 그레다너스 등). 그러나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배교를 한다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모순되기 때문에 이 해석도 받아 들이기 어렵습니다 (베드로의 경우를 참고).
세 번째 견해는 성령훼방죄(마12:31, 32)로 보는 것입니다(존 스토트). 성령 훼방죄를 짓는 것은 믿기를 거부하는 죄인데, 우리는 불신자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해석도 적절치 않게 생각됩니다(사탄의 포로된 자들의 해방을 위해 기도해야 함).
앞서 말한 세가지 해석에 만족할 수 없는 사람들은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말할 때 "사망"을 영적인 죽음이 아닌 육신적인 죽음으로 봅니다. 그리스도인이 계속해서 고의적인 죄를 범할 때 하나님은 그의 육신을 죽이실 수 있다는 사실을 예증하고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행5:1-11), 그리고 고린도전서에 언급된 경우들을 예로 듭니다(5:5, 11:30). 하나님의 징계로 육신적 사망을 당할 수 있는 죄를 신자가 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계모로 더불어 불륜의 관계를 가진 죄, 고전5:3-5, 성찬을 더럽힌 죄, 고전11:30).
하나님께서 그의 목숨을 거두어 가시기로 결정하신 범죄자를 위해서는 기도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죄는 극히 예외적인 것임을 알려 주기 위해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17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망에 이르는 죄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에 죄에 빠져 있는 형제들을 볼 때 누구를 위해서든지 기도해야 합니다.
베드로도 저주와 맹세로 주님을 부인했지만 용서를 받았습니다. 죽임을 당하지 않고 사도로 활동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인가, 기도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를 알기 위해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죄에 빠져 있는 형제일찌라도 위해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사도요한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가 있을 수 있지만, 죄에 빠져 있는 형제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강력히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신이 눈을 멀게 하여 사탄의 포로된 자리에 있는 믿지 않는 자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도한 이 세상의 염려와 유혹과 육신의 정욕을 인해 죄 가운데 빠져 있는 형제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맺는 말
우리는 기도 응답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제사장이 되었으며, 기도의 특권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의 기도 생활로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 잘 이루어져서 하나님께는 영광이 돌아가고, 많은 사람들이 구원얻게 되도록 기도에 힘을 씁시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그를 위해 기도하지 말고 버려 두라고 하시는 어떤 확신을 주시는 경우를 제외하고는(렘7:16, 호4:17, 아브라함의 소돔과 고모라를 위한 중보기도 등 참조) 다른 사람들을 위한 중보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18절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않음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18절)."
중생된 자는 죄를 짓지 않는 줄 안다는 말씀은 거듭난 자는 전혀 범죄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중생된 그리스도인들도 범죄하는 일이 있습니다. 사도요한이 1장에서 누구든지 죄를 짓지 않았다거나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3:9과 5:18절에 보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5:18절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씀의 해석은 3:9절의 해석을 그대로 적용할 수 있겠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이 죄에 빠질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실제로 신자들도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비록 죄에 빠진다 해도 중생된 그리스도인은 죄 안에서 무한정 계속 지낼 수 없습니다. 여기서 "죄를 짓지 아니한다"는 동사는 3:9에서처럼 현재 시제입니다. 헬라어에서 현재시제는 습관적이며 계속적인 행위를 나타냅니다.
영적으로 거듭나기 전에는 죄를 깊이 증오하는 마음이 없으며, 죄를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죄 안에 계속 머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중생된 뒤에는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며, 새 생명과 새 본성이 심어졌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씨"가 더하고, 하나님께로서 났기 때문에 본성적으로 본능적으로 죄를 싫어하고 저항하게 되어 있습니다. 의롭게 살고자 하는 욕구가 생겼습니다.
19절 하반절에 보면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기 때문에 "악한 자", 곧 마귀가 "만지지도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만진다"는 말은 우리를 단단히 붙잡는 것을 의미합니다. 슬쩍 건드릴 수는 있지만 완전히 장악은 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마귀보다 강해서가 아니고 그리스도께세ㅓ 우리 안에 계시며, 또 우리를 지키시기 때문에 마귀의 왕권적 지배를 허용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우리를 슬쩍 건드리면 주님께서 "너 왜 내 몸에 손을 대느냐" 하십니다. 그러면 마귀가 겁이 나서 도망을 치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자신을 지켜 불의의 병기로 자신을 죄에 내어주지 않도록 주의하고 힘써야 합니다 죄를 대적하고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의 지능으로는 마귀와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마귀보다 강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친히 지켜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전능의 보호를 의지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지켜 주시는 은혜가 아니면 마귀는 우리를 사로잡으며, 넘어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귀가 우리를 완전히 장악하여 죄의 노예로 삼지 못하도록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거듭나지 아니한 자들도 범죄한 후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사악한 것을 싫어하기도 하고, 죄를 싫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죄악으로부터 벗어날 방도와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 가운데 안주해 버립니다. 합리화하고 변명하며, 전의 상실하고 패배를 인정하고 맙니다.
중생된 자들도 죄를 범하지만 결코 패배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죄에 빠진다 해도 거기 주저앉지 않고 다시 일어 서서 죄를 버리며 계속 의를 행함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자기 안의 새 생명과 새 본성을 따라 살기를 원합니다.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며, 거룩과 사랑과 의와 진실을 계속 추구합니다. 거듭난 자마다 죄 가운데 계속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죄 가운데 계속 머물러 있을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싫은 죄를 무엇 때문에 버리지 못하겠습니까? 범죄하지 아니한 자가 성자가 아니고, 계속 회개하면서 죄에 저항하고 의를 행하는 자가 성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