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해] 창세기 1장 2절을 중심으로
창세기 1장 연구 - 2절을 중심으로
2013.2.8
연구 방향
2절에 중심을 두고 1장 전체는 전개 되는 기본만 살펴 보았습니다.
1절이나 ‘이차창조’처럼 이 글보다 길어 지는 내용은 생략했습니다.
창조 6일 각론 중 3절만 약간 언급하여 이후를 참고하게 했습니다.
소제목과 줄거리만 적었습니다. 훗날 정리를 위한 참고일 뿐입니다.
▶목차
제1편 창조 총론
1. 창조의 의미
1) 영원 함축 ⑴ 과거 ⑵ 미래
2) 일차 창조 ⑴ 에덴 ⑵ 영생
2. 창조의 특성
1) 질서 원칙 ⑴ 순서적 질서 ⑵ 기관적 질서
2) 조화 원칙 ⑴ 대칭적 평형 ⑵ 협력적 조화
3) 말씀 원칙 ⑴ 말씀이 시공 ⑵ 진리의 시공
제2편 창조 각론
1. 창1:2, 무에서 시작
1) 재료 창조 2) 재료 창조의 근거
3) 2절과 오늘 4) 참고
2. 창1:3, 빛과 어두움
1) 빛의 창조 2) 어두움의 창조
3) 빛과 어두움
▶ 제1편 창조 총론
1. 창조의 의미
1) 영원 함축
⑴ 과거 ① 자존 ② 목적 ③ 예정
⑵ 미래 ① 생명 ② 영생 ③ 소망
2) 일차 창조
⑴ 에덴 ① 완전 ② 지상 ③ 예표
⑵ 영생 ① 무죄 ② 유한 ③ 영원
2. 창조의 특성
1. 창조의 의미
1) 영원 함축
⑴ 과거
① 자존
아무 것도 없을 때 하나님만 계셨으니 하나님은 원래 독존의 하나님이셨습니다. 만물은 하나님이 만들어서 생겼으니 피조물이나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시니 ‘자존’입니다. 자존하신 하나님이 독존의 상태에서 만물을 만드셨습니다. 그 만든 만물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했습니다. 그 방법은 바로 만들어 진 만물, 그 자체가 하나님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창조라는 것은 하나님의 자존을 알게 된 첫 행위이니 창조는 세상을 만들기 전의 하나님을 알게 합니다. 창조를 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그렇게 알려 지게 된 것이 아니라 알리시기 위해 창조를 하신 것입니다.
만일 만물을 만들지 않으셨더라면 알려고 하는 존재도, 아는 존재도, 알 수 있는 존재도 없었습니다.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 만물을 만들되 만물을 만듦으로서 만물에게 알려 지신 하나님, 만물이 스스로는 알 수가 없으나 만들어 진 만물은 만든 주인을 드러 내고 있습니다. 그 만물 안에는 만물의 목적이 되는 우리가 있습니다. 창조는 창조 이전의 모든 것을 다 보여 주고 있으되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알리고 있습니다. 무한의 알 수 없는 하나님이 그의 ‘창조’에 그를 다 담으셨으니 창조는 창조 이전의 하나님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담을 수 있는 대로, 그 담은 것으로 우리가 필요한 만큼, 그래서 우리가 그 지어신 만물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유한한 피조물이 무한의 하나님을 다 담을 수는 없으나 그 담은 분량과 종류는 그 것들을 가지고 출발하면 무한의 하나님께 나아 갈 수 있도록 그 창조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능력 그 외 모든 것을 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훗날 알려 졌지만 피조물처럼 그런 존재 형태를 가진 것이 아니니 그 분은 무한이시므로 어떤 형체에 제한 되지 않습니다. 모습을 가지지 않는 존재, 그 대신 오늘 우리 기준으로 굳이 알려고 한다면 그 분의 속성을 통해 우리는 그 분을 알 수 있습니다. 창조 된 만물의 모습이 완전이며, 불변이며, 단일이며, 그 속에서는 우리는 자존의 존재를 알 수가 있습니다. 지식 지혜 선 사랑 의 거룩 진실 주권이 읽힙니다. 자존자를 접하며 알게 하는 단어들입니다. 창조를 통해 알 수가 있게 되었고, 이런 것이 다 함축 된 것이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② 목적
창조에 담긴 것은 하나님 자체뿐 아니라 왜 하나님께서 영계와 우주의 만물을 만드셨는지 그 목적을 알 수가 있습니다. 무기를 보면 전쟁이라는 목적이 보이고, 그릇을 보면 무엇을 담아야 할 목적이 보이는 것처럼 만물을 보면 성경이 없어도 조물주의 뜻이 금방 쉽게 읽혀 지기 시작합니다. 어려운 듯하나 너무 쉽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창조는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목적이 함축 되어 있습니다. 하늘을 볼 때 그 분의 목적은 푸르며 끝이 없으며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낮을 주신 것으로 보아 그 목적 달성에는 할 일이 많을 것 같습니다. 밤을 볼 때 그 목적은 단순하거나 일방이 아니라 전혀 다른 면에서도 함께 이루어 져 나갈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를 알면 하나 도움이 되고, 열을 알면 상대를 아는 데 열만큼 도움이 됩니다. 천을 알고 만을 알면 더 알게 되어 집니다. 만물 전부는 하나님의 목적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굉장한 문제고, 엄청난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측량할 수 없는 이 세계가 영원히 계속 이어 질 것입니다.
창조의 첫 모습에서 우리는 단번에 모든 만물의 향방은 아담이 주인이며 하나님 노릇을 대신 하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목적, 그 목적 대상은 바로 인간입니다. 어떤 인간인가? 만들어 놓은 창조를 보면 알고, 그 첫 창조만 가지고 잘 모르면 그 후 전개를 보면 바로 알 수가 있습니다. 창조 처음에 만들어 놓은 선악과를 보며 우리는 그 목적의 세계를 구체적으로 다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에베소서 1장 6절에서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영광은 은혜를 받은 존재가 감사해서 감탄과 찬송하는 모습입니다. 완전자만 줄 수 있고, 완전자가 완전을 주시기로 작정한 목적의 대상이 우리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활의 대속을 통해 영생을 주시고 그 내용은 이 목적의 성취이며 그 과정에서 우리와 만물은 영원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너무 많은 내용을 담고 있어 따로 살펴야 합니다.
③ 예정
예정은 목적을 이루어 나가는 순서입니다. 창조란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한 순간에 모든 것을 다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6 일이라는 순서와 과정을 통해 전개 되어 갑니다. 첫 창조의 이 순간을 가지고 살필 때 하나님의 목적은 일정이 있고, 그 일정은 세밀하고 철저하며 완전합니다. 생겨 지기도 전에 우리가 그를 알 수 없습니다. 생겨 진 것을 가지고 우리는 비로소 알기 시작합니다. 일이 시작 되기 전에 우리는 그 분의 예정 계획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분이 일을 하나씩 순서를 밟고 펼치는 것을 보면서 비로소 그 분의 과거 예정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러므로 창조란 창조 이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목적을 정하시고 그 목적을 따라 계획하신 그 예정까지 알 수 있도록 되어 있으니 우리는 창조를 통해 창조 이전의 과거를 알 수 있되 창조 이전에 계셨던 하나님과 그 목적과 그 예정까지 창조에 함축 되어 있어 모든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세상 말에 문일지십이 있습니다. 알고 보니 세상 그들의 통찰력 때문에 그런 실력을 가진 이들도 있게 된 것이 아니라, 창조 때부터 하나님께서 만드신 만물과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하고 그 목적과 그 예정까지 모두 만물의 창조 안에 다 포함을 시켜 놓았으니 이 모든 것을 봐야 정상이고 보지 못하면 비정상입니다.
⑵ 미래
① 생명
하나님의 창조는 우리와 만물을 하나님과 연결 시켜 놓았기 때문에 모두가 다 참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창조 그 당시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는 만들어 진 만물의 창조를 통해 앞 날이 함축 되어 있으니 우선 여러 과정을 거쳐 훗날 우리에게 주어 질 생명이 함축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에는 타락 전 벌써 선악과의 ‘악’이 있고, 정녕 ‘죽으리라’ 하신 맹세가 있었습니다. 완전의 세계, 사랑의 세계, 절대의 세계를 가진 하나님의 동산에 악과 죽음이 있다면 이는 우리를 길러 가는 과정이지 그 것이 최종은 아닐 것입니다. 창조 된 만물을 통해 그 첫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목적 대상인 우리의 미래를 벌써 함축해 놓고 보여 주고 계셨습니다.
창조 6 일에 받은 생명은 현재 임시 생명입니다. 이 생명이 악과 죽음을 통과한 다음 다시는 죽을 수 없는 절대성의 생명을 받는 미래가 있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일단 하나님과 연결인 생명을 주셨으나 이 창조는 미래에 절대성의 생명을 미리 함축합니다.
② 영생
생명이라는 표현이 정적이면 영생이라는 표현은 동적입니다. 생명은 단적의 한 순간 상황을 말하고, 영생은 그 생명이 이어 지는 모습을 말합니다. ‘악’과 ‘죽음’을 겪고 나서 다시 하나님과 끊어 질 수 없는 절대성의 생명을 가지게 된 우리는 그 생명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 갈 것인가?
창조는 시간과 공간을 가지고 우리를 출발 시켰으나 그 시공은 우리를 만들기 위해 1차적으로 필요한 것이며 임시 과정일 뿐입니다. 우리가 참 생명, 절대성의 생명을 갖게 되는 날, 우리에게는 그 순간은 시작이고 그 출발을 가지고 영원히 이어 지는 영생이 있습니다. 그 영생의 모습을 창조에 함축 시켜 놓았습니다. 가장 쉽게 관찰할 때 흔히 에덴동산이라고 합니다. 이 에덴동산이 비록 죄가 없어 완전해 보이지만 죄를 지을 가능성조차도 없는 수준의 완전한 곳은 아닙니다. 우리의 미래 영생은 죄를 짓고 싶어도 지을 수 없는 그런 절대성의 미래입니다. 그 영생을 함축 시켜 놓은 것입니다.
보통 우리의 영생은 죽지 않고 단순히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단순히 살아 남는 생존이 아닙니다. 늘 기쁘고 즐겁고 찬송한다고 합니다. 찬송할 이유가 무엇일까? 찬송은 곡조와 가사가 있어야만 부를 수 있는가? 하나님의 모든 은혜, 그 수고에 대한 감사, 감탄, 감격으로 우리가 맡을 영원한 나라의 신령한 만물을 대상으로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가 살아 움직여야 하되 마치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하듯 그런 관계가 우리의 영생입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에는 벌써 이런 영생의 우리 모습이 함축 되어 있습니다. 벅찰 뿐입니다.
③ 소망
참 생명이 영생으로 영원히 살아 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자꾸 자라 가고 끝 없이 하나님을 닮아 갈 것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무한히 가다 보면 우리가 어느 정도 닮을 것인가? 그 어떤 훗날에도 100 %를 다 닮지는 않을 것인가? 성경에 명확하게 말하지 않은 것은 과제로 남겨 두되 우리는 그 목표를 향해 끝없이 자라 갈 것입니다.
이 것이 우리의 소망이며 이 소망을 함축해 놓은 것이 창세기 1장의 창조입니다. 이 부분은 영안이 너무 어두운 우리의 현재로는 설명하거나 단정에 이르지 않고 현 상태로 그냥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2) 일차 창조
⑴ 에덴
① 완전
만들어 주신 1차 창조의 세상은 ‘에덴’이었습니다. 부족함이 없고 죽음이 없고 불행이 없고 갈등이 없는 곳입니다. 흠도 없고 점도 없는 곳입니다. 위로 하나님은 주인으로 계시고 아래로 만물은 아담의 통치 하에 모두가 다 제 자리를 지키며 자기 할 일에 충실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고 아담은 그 은혜를 받아 만물을 다스리며 그 은혜를 전달했습니다. 만물은 아담을 하나님으로 모시고 순종했고 아담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 아담의 옆에는 아담을 아담 되게 하는 하와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아담, 아담과 하와, 아담과 만물의 신인 인인 대물 관계 전부가 완전이었습니다. 찬송만 있는 곳, 감사만 있는 곳, 은혜만 있는 곳, 창조의 첫 순간은 이러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상황은 순서에 있어서 1차 창조였습니다.
② 지상
이런 곳은 또 하나가 더 있었으니 영계입니다. 영계는 처음 만들어 질 때부터 지금까지 또한 앞으로도 영원토록 동일하겠지만 이 곳 지상에 주신 에덴동산은 일단 창조 첫 상태만 완전의 상태였습니다. 일단 창조 첫 상황에서 에덴동산은 천국과 비교할 때 장소만 지상이었을 뿐이고 시공에 제한을 받는 것만 불편할 정도지 불법적이며 부정적이며 나쁜 것이 없다는 점에서는 천국이었습니다. 이름하여 지상 낙원 또는 지상 천국이었습니다.
물질계 세상에 있다는 점, 시공에 제한을 받는다는 점에서는 천국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이만하면 천국이라 하기에 넉넉했습니다.
③ 예표
지상 낙원인 에덴동산 그 자체가 영계의 천국과 수평 비교할 수 있었을까? 이 낙원에는 선악과가 있었습니다. 그 먹는 것이 자유였습니다. 먹으면 죽게 됩니다. 이 지상 낙원은 예표였습니다. 이 것이 우리에게 주실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신앙 생활을 처음 하면서 은혜를 받게 되고 모든 것이 믿어 지게 되면 가장 원통한 것이 아담의 타락입니다. 아담만 그러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이 세상을 이렇게 힘들게 살지 않았을 것이고 우리의 신앙 생활도 이렇게 어렵고 투쟁적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잘못 알았습니다. 에덴동산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지상 낙원으로 주셨으나 그 상황은 최소한으로 주셨으니 장차 주실 참 세계에 대한 하나의 예표일 뿐입니다. 더 나은 것, 진동치 않을 것을 주시기 위해 반드시 한 번 거쳐야 할 과도기 천국이었습니다. 그 에덴동산은 우리의 목표가 아니었고 우리가 가야 할 더 큰 목표를 가리키고 나타 내고 있는 표시판이었습니다.
⑵ 영생
① 무죄
창세기 1장의 창조는 일단 죄 없는 상태로 만들어 졌고 그렇게 유지가 되었습니다. 죄 없는 아담과 하와였고, 그들의 모든 환경도 만물의 주격 위치에 있는 아담이 무죄이므로 처음 지었을 때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신 상태가 잘 유지 되고 있었습니다. 만일 이 상태에서 죄 없이 그대로 이어 진다면 아무 부족한 것은 없습니다. 그대로 영원히 살 수 있는 영생의 존재였습니다. 다만 2차 창조 된 오늘 우리와 비교한다면 오늘 우리는 죄를 짓고 싶어도 우리의 영은 죄를 지을 수 없고 우리는 중생으로 얻은 구원을 잃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으나 아담과 하와는 언제든지 그들의 의를 버리려면 버리게 되는 상태였습니다.
② 유약
1차 창조의 무죄와 완전 상태는 당시로서는 무죄와 완전이나 만일 외부에서 죄를 짓게 만든다면 얼마든지 죄를 짓고 멸망 받을 수 있는 심히 유약한 상태였습니다. 훗날 예수님의 대속으로 만들어 지는 2차 창조와 비교하면 순서상 단순히 1차 창조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완전한 데 나아 가는 전 단계로서의 1차 창조였습니다.
1차 창조 된 아담은 언제든지 죄를 짓는다면 지을 수 있는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모든 것이 제한적이고 유약하고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훗날 예수님의 대속으로 만들어 주신 2차 창조의 우리 중생 우리 구원 우리의 영생은 아예 변치도 않고 죄를 짓고 싶어도 지을 수 없는 절대성의 완전 세계이나 1차 창조의 완전은 죄가 없어 무죄로서 완전하다는 것일 뿐입니다. 2차 창조를 통해 영원히 진동치 않을 완전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밟아 가야 할 단계였습니다. 진동할 수 있고 타락할 수 있고 모든 것이 어리고 유약한 제한적 상태로 만든 것이 1차 창조였습니다.
③ 영원
제한적이며 유약했음에도 불구하고 1차 창조로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물 전체는 그냥 그대로 있었다면 모두가 영생의 존재로 영원히 지속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 것이 죄로 파괴 되되 단 한 조각도 남은 것이 없도록 전적 부패하여 멸망 받고 사망의 것이 되었습니다. 1차 창조 그 자체만 가지고 보면 분명히 창세기 1장의 창조는 영원의 존재로 만들어 졌습니다.
3) 창세기 1장
⑴ 창세기 1장
① 전체의 단면
세상의 창조 일반은 1장에 집약 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읽으면 자세한 현장 기록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어느 성경의 어느 부분이라도 그러하듯이 1장의 말씀 깊이도 한이 없습니다. 첫째는 당시 기록이며 둘째는 역사의 모든 교회를 향해 하나님께서 끊임 없이 만들어 주실 그들의 세계를 확실하게 다 파악하게 한 것입니다.
② 의심을 배격
창세기 1장의 창조 기록은 그 기록의 정확성 문제에 모두 시선을 집중하고 있는데 이는 교회가 세상에게 벌써 삼킨 행동입니다. 성경의 정확성을 따지는 이들은 교회 안에 있거나 밖에 있거나 그들의 신앙은 불신자이니 불신자는 전도의 대상이지 대화의 대상이 아닙니다. 말씀은 말씀이 말씀하지 말씀 외에 모든 존재는 말씀에게 지음을 받았으니 듣고 순종하는 것으로 전부를 삼고 혹시 모르는 부분은 여쭙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거의 모든 현재 신학은 불신자가 불신자의 방법으로 불신을 연구하고 있다 할 것입니다.
⑵ 창조와 현실
① 오늘에 필요
우리는 창세기 1장의 창조 기록 전체를 통해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 보여 주신 몇 가지 원칙들을 쉽게 살필 수 있습니다. 세상 역사의 첫 순간을 연구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영원 불변의 단일성의 하나님이시니 첫 창조의 그 원칙으로 세상 역사의 마지막까지 늘 세상을 그렇게 역사할 것이며, 세상은 천국의 그림자이므로 우리의 영생도 미리 그려 볼 수 있고 그 소망을 통해 오늘을 바로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② 창조의 반복
보통 천지의 창조는 한 번으로만 생각하는데 없는 데서 처음 존재를 만들어 낸 창조는 창세기 1장의 창조 한 번이지만, 창세기 1장의 그 창조는 주님 오실 때까지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믿는 모든 우리에게 각자의 매 현실마다 늘 새롭게 반복 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매 순간은 그 순간을 마치 없는 가운데서 새로 만드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고 계십니다. 겉보기는 한 번의 창조가 보존 섭리를 통해 운영 된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보면 우리의 매 현실은 한 분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위해 우리 각자에게 필요한 세상을 각각 다르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가장 무난한 표현으로는 ‘자기 현실’이라고 하지만 이런 자기 현실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이 이미 만들어 진 것을 가지고 마치 새 것을 만들어 주시듯 늘 따로 만들어 주고 계십니다.
⑶ 오늘의 창세기 1장
① 중요한 1장
성경의 첫 장이 창세기 1장인데 이 1장은 과거 교인들에게는 신앙의 역사의 첫 페이지로만 읽혀 졌고, 관심 있는 교인들에게는 신앙의 상식으로 읽혀 지고, 과학이 급격히 발달한 최근의 교인들은 자기 신앙의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의혹의 대상으로 1장을 검토하는 분위기입니다.
② 역사 모든 현실
창세기 1장은 과거 기록이면서 역사 세계의 신앙 이치를 담았고 오늘 우리는 우리를 둘러 싼 우리의 매 현실의 구성과 그 속성을 창세기 1장에서 얼마든지 배울 수 있습니다. 66 권의 모든 성경 말씀과 그 비중과 교훈과 생명성과 구원의 이치 됨에 있어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습니다.
▶제1편 창조 총론
1. 창조의 의미
2. 창조의 특성
1) 질서 원칙 ⑴ 순서적 질서 ⑵ 기관적 질서
2) 조화 원칙 ⑴ 대칭적 평형 ⑵ 협력적 조화
3) 말씀 원칙 ⑴ 말씀이 시공 ⑵ 진리의 시공
2. 창조 행위의 특성
1) 질서 원칙
하나님의 창조 과정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이 질서입니다. 존재적으로 행위적으로 모든 것은 순서를 따라 갑니다. 세상의 질서는 그 질서의 기준과 주체가 불완전하여 질서도 그 범위 내에서만 좋은 것이나,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는 하나님이 주체시고 진리가 기준이기 때문에 어느 한계 내가 아니라 완전과 절대의 세계를 기준으로 볼 때도 영원 무궁토록 그 어느 하나도 서로가 충돌이 없고, 모순이 없고, 부자연이 없습니다. 이 것이 자연스럽게 창조 전 과정에서 드러 나고 있습니다. 가장 쉽고 보편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질서’, ‘완벽한 질서’, ‘하나님 앞에 진리의 질서’입니다.
⑴ 순서적 질서
① 근원을 명시
순서가 명확해 지면 최초나 근원이 쉽게 표시 됩니다. 하나님 한 분이 없는 가운데서 만든 것이 만물인데 그 만물이 끝 없이 헤아릴 수 없는 존재로 천하를 뒤덮고 있으나 그 만존재의 시작이며 근원은 명확하게 한 분 하나님입니다. 만물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한 분 하나님으로 시작 됨을 분명히 표시하기 위해 하나님의 창조는 모든 것이 질서 정연하게 되어 있습니다. 만들 때는 순서대로 만드셨고, 만들어 진 존재도 질서가 명확하므로 순서가 쉽게 드러 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2절에서 무로부터 유의 첫 창조를 말씀하시고 3절 이하에서 끝까지 이어 지면서 모든 것이 순차적으로 이루어 집니다. 순서적으로 질서 있게 만들어 진 이 창조는 이후 운영 과정에서 아무리 복잡해도 늘 지켜 져야 할 순서이며 또 비록 엉컬어 져 있다 해도 바로 순서를 잡고 그 모든 존재의 시작이며 근원이신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했습니다. 타락 전에는 이 것이 늘 명확했고 타락 후에도 사도행전 17장 27절에서 더듬어 알도록 하셨다고 했습니다.
만물의 주인이 누구인가? 피조물의 왕이 누구인가? 어디서 왔는가? 누구 마음대로인가? 창조 된 만물의 질서, 그 질서 속에 보이는 순서, 그 순서를 더듬다 보면 만물은 하나님 한 분의 자존을 가리키는 도로의 안내표시 화살표와 같습니다. 창조의 질서 속에 순서를 살폈다면 하나님을 모른다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도록 일부로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롬1:19에서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본성과 지혜와 그 능력이 그대로 펼쳐 지고 있는 것입니다.
② 근원을 중심
하나님의 창조 과정은 단순히 순서뿐 아니라 존재적으로 활동적으로 그 모든 연결과 방향을 살펴도 하나님 한 분을 중심에 두고 모든 존재가 하나님을 향하도록 만들어 져 있습니다. 모든 식물이 태양을 향하듯이, 모든 새끼들이 어미를 향하듯이, 모든 전기 기기들이 발전소를 향하듯이, 모든 만물이 하나님만을 바라 보도록 해 놓았습니다.
순차적이면서도 분화적 창조를 통해 창조의 모든 것은 그 지어 진 방향이 창조를 향하며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태양은 하늘에서 하나를 향하게 하면서 그 뒤에 하나님을 가리키고, 대양은 바다에서 그 넓은 품을 가지고 그 바다를 만든 하나님을 더듬어 알 수 있도록 했고, 풀 한 포기도 그 오묘하고 섬세한 세미함에서 하나님의 한 치 오차 없는 섭리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들되 피조물 전체가 순서를 가지고 순차적이 되게 했고 그 피조물 전체가 상위 존재를 중심하게 함으로 결국 하나님 한 분을 중심에 두게 했습니다. 오늘도 이런 원리로 자기 현실을 이해하고 자기 현실을 만들려 노력하고 그런 소망과 지식으로 상대하면 타락 전의 에덴동산을 가지게 됩니다.
③ 근원에 연결
하나님의 창조의 만 존재는 위로 상위 존재와 연결 되고 또한 옆으로 모든 존재와 모두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도 뺄 곳이 없고 빠져서 안 되며 어느 한 존재가 어느 만물과도 연결이 없는 수가 없습니다. 피조물 어느 것을 붙들고 시작해도 만물과 연결이 다 되고, 어느 피조물 하나를 붙들고 올라 가도 하나님을 찾아 연결이 됩니다. 교회도 가정도 사회의 어느 조직도 이 면을 기억하면 우리는 어느 한 존재도 공연히 만들어 진 것이 없고 우리를 대적하는 어떤 존재도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하나님의 사랑 아닌 것이 없습니다. 어느 현실이라도 감사하지 못할 것이 없고, 어느 사건에서라도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찬송하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타락 전에는 긍정적이며 빛으로서 좋은 것뿐이었고, 타락 후에는 부정적이며 흑암적인 것으로 뒤덮여 있으나 역시 그런 것 너머에는 하나님에게 연결 된 선을 볼 수 있습니다. 사탄도 그의 부리시는 종입니다.
어느 교회든지 어느 가정에서든지 어떤 환경 속에 있든지 우리에게 창세기 1장을 읽으며 ‘질서 정연’하게 만드신 이 결과를 놓고 연구하다 보면 우리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한 걸음씩 나아 가되 그 어떤 만물의 먼지 하나라도 버릴 것이 없고 그 모든 것은 전부 우리의 배경이며 통치의 대상이며 우리의 영원 영생의 일부로 이어 질 것입니다. 주신 현실에서 어느 직장도, 어느 지방도, 어느 인간도, 어떤 움직임 하나도, 어떤 악인의 악행 하나라도 우리에게는 모두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할 뿐입니다.
⑵ 기관적 질서
하나님의 창조에서 우리가 또 한 가지 확실히 보고 알 수 있는 것은 기관적 역사입니다. 순차적 창조의 원칙과 같은 말 같은데 실은 가르치는 각도와 차원은 다릅니다.
먼저 만든 것을 통해 그 다음을 만든다는 원칙입니다. 땅을 만드시고, 땅의 일부를 가지고 아담의 육을 만들고, 아담의 갈빗대로 하와를 만드는 방식입니다. 2절에서 물질 재료를 만든 다음, 그 만들어 놓은 것을 가지고 이용하여 그 다음 것을 만드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최소한으로 움직이고 만들어 놓은 존재를 통해 일을 하십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하나님은 자기 활동을 아끼는 경제적 운영이 되나, 하나님 편에서는 불완전한 피조물을 통해 일을 하는 것은 더욱 불편합니다. 경제적으로 보는 것은 피상적인 일부 현상일 뿐입니다.
① 유기적 관계
만들어놓은 땅에게 땅으로 이어질 모든 것을 명령했습니다. ‘땅은 과목을 내라’ 하셨습니다. 먼저 만들어 놓은 것을 무시하지 않고, 앞에 존재한 것을 통해 그 다음 순서를 이어 갔습니다. 순서적으로는 하나님의 전능은 먼저 생겨 진 것을 건너 뛰어도 되고 또 먼저 생겨 진 것을 가지고 그 다음 것을 만든다 해도 먼저 생겨 진 것을 무시할 수 있는데도 만물의 그 어느 것 하나라도 먼저 만든 것을 통해 그 다음 순서를 밟아 나갑니다. 오늘은 타락 후 어두워 졌으므로 우리 인간 기준에서 볼 때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만물, 만물과 만물의 관계가 다 단절이 되고 그 사이는 가로 지를 수 없는 흑암으로 가득차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것은 우리의 인지 범위에서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로는 하나님 앞에서 만물은 비록 타락 후지만 자기 위치를 대체로 지키고 있어 인간 이상으로 교통이 이루어 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과정에서도 애굽의 승인을 받고 나왔고 모압에게 양해를 구하고 정당한 대화를 통해 건너가도록 노력했습니다. 상대방을 힘으로 무조건 꺾고 나가는 역사를 하지 않습니다.
② 분화적 창조
먼저 만들어 놓은 것, 그 안에서 하나를 잡고 다음 단계로 넘어 갔습니다. 결과는 여럿이나 그 여럿의 시작은 하나입니다. 만물이 만물이지만 만물의 시작은 몇 가지로 대별할 수 있고, 그 대별 된 것은 원소 재료 하나로 모여 지고, 그 재료는 하나님이라는 주인에서 시작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우리를 비롯한 모든 것을 창조하셨지만, 그 다음부터는 피조물들 사이의 관계인데 먼저 만든 재료 창조를 통해 그 재료를 가지고 그 다음 빛과 궁창과 땅과 바다를 만들고 그 만들어 진 것으로 그 다음 것들을 만들어 가셨으니 앞에 만들어 진 것은 뒤에 만들어 진 것의 어미처럼 공장처럼 원인처럼 뿌리처럼 출처처럼 前形처럼 그런 선후 관계를 가집니다. 이는 만물이 그 지어 진 시기와 위치와 본질은 모두 천차만별이지만 하나님의 단일 세계의 단일 통치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③ 양육적 효율
하나님께서 직접 출애굽을 인도하시면 훨씬 효율적이지만 둔탁한 모세를 앞 세웠기 때문에 수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바로나 이스라엘 백성의 거부에 앞 서 모세가 먼저 거부를 하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세를 붙들고 역사를 하심으로 모세는 크게 자라는 기회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식물을 바로 만드는 것이 더 쉬운데 땅에게 식물을 내라 하시는 것은타락한 인간 세상의 우리 기준에서 보면 하나님을 게으른 통치자거나 최대한 남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자기 편이를 추구하는 경제인으로 보이겠지만, 하나님의 본성이 사랑이며 그 본체가 완전이며 그 본질이 거룩이니 먼저 만들어 놓은 것을 통해 그 다음 것을 만들어 가시는 것은 먼저 만든 것을 수고 시키는 것이 아니라 양육을 시키는 것입니다. 장성을 위해 가장 좋은 훈련 실습 방법은 실전입니다. 하나님의 위치에 서서 실제 일을 해 보면 가장 빠릅니다. 마치 땅이 식물의 원인자처럼 창조자처럼 주인처럼 식물을 만들었습니다. 이 원칙은 창세로부터 오늘까지 앞에 믿은 사람이 뒤에 믿는 사람을 전도하고 믿게 되면 그들을 마치 하나님이나 되는 것처럼 양육합니다. 속에는 하나님이 일하시고 겉에는 앞 서 믿는 이들이 뒤에 믿는 이들을 위해 양육의 수고를 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이 자라게 됩니다.
2) 조화 원칙
하나님은 단일성이며 생명의 근원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만들어 졌으나 모든 것은 하나님과 연결이 되고 그 내면은 하나입니다. 그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하나로 조화 됩니다.
⑴ 대칭적 평형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을 그 단면 또는 정적인 면으로 본 존재론입니다. 만물의 창조 과정은 질서였고 그 결과는 완벽한 조화입니다. 일점일획도 가감할 수 없는 완전자의 완전품입니다. 우리는 이 창조를 두고 따로 의견을 낼 것이 아니라 해석만 잘하면 됩니다. 그 뜻을 살피자는 것입니다. 이 것을 신앙이라고 합니다.
① 반대적 모습
낮과 밤, 하늘과 땅, 땅과 바다, 식물과 동물처럼 모든 만물은 만들어 질 때부터 반대적 모습이 기본입니다. 이 반대 모습은 오늘 우리의 눈에는 모순과 갈등의 원인 같이 생각합니다. 그러나 원래 만든 세상은 그렇지 않았고 타락 후에서도 그 반대 되는 모습은 우리가 잘못 본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은 어느 하나라도 버릴 것이 없습니다. 타락 전에도 타락 후에도 만물은 오늘 우리 눈에서 보면 반대적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모순과 분쟁과 충돌로 나타 난 것은 타락 후입니다. 타락 전에도 밤과 낮이 있었고 식물과 동물이 있었으나 그 때는 반대 모습이 역항적이고 분쟁적이며 이익침해적인 관계가 아니어서 반대가 아름다웠고 은혜로웠고 필수불가결적이었습니다. 반대 것이 좋지 않게 인식 되고 실제로도 그런 모습을 가진 것은 타락후입니다.
② 양면적 관계
모든 반대 모습은 하나를 형성하는 양 극단의 존재들입니다. 반대 위치에서 서로를 위하여 또 전체를 위하여 필요한 필수 위치와 모습을 갖고 있었습니다. 반대 모습을 가진 피조물들은 양면이었던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모든 면에서 반대적 모습을 가졌으나 그 반대 모습은 항상 양면이었습니다. 손의 등과 안처럼 그리고 치아의 위와 아래처럼 때로는 눈과 귀처럼 항상 상호 보완적이었습니다. 둘 중에 하나면 둘 중에 하나로 존재하지 못합니다. 반대의 두 가지고 동시에 양면을 구성해야만 두 면이 함께 존재할 수 있습니다. 하늘 없는 땅은 없고, 땅이 없는 하늘은 필요조차 없습니다. 만들 때부터 만들 이유도 없습니다.
③ 균형적 조화
반대적 모습이 양면을 가지고 더 큰 범위에서 하나가 되는데 그 결과를 보면 완벽한 균형입니다. 뺄 것도 없고 더할 것도 없는 모습입니다. 피조물이라 하면 보통 물질계의 모든 존재를 말합니다. 실제로는 영계와 영물 전체를 다 포함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물질계만 말하는 것처럼 설명하고 있는 것은 영계나 물질계를 하나님 한 분이 만들었으니 그 속성이 같고 또 영계는 우리가 눈이 어둡고 어려서 잘 볼 수가 없으며 장차 받아 가질 미래에 속한 소망이어서 주로 물질계 것만 기록해 주셨고 오늘 우리의 전부처럼 상대하고 있습니다.
이 땅 위에 나와 가장 극단적으로 반대에 있는 것까지 하나님은 필요해서 만들어 주셨고 나를 온전하게 만들고 나를 위한 환경으로 조성해 주셨으며 그 것들끼리 그리고 그런 것과 나와의 관계를 살펴보면 일점일획도 뺄 것이 없고 더할 것이 없는 균형적 조화입니다. 하나가 빠지면 그 반대편에 바로 그 빠진 만큼 불균형이 생깁니다.
⑵ 협력적(생명적) 조화
하나님이 만든 만물을 이 번에는 그 만물끼리의 관계, 즉 그 작용 또는 역할 면으로 살핀다면 협력적 조화라고 하겠습니다. 타락 후 오늘의 각 개체끼리 이해관계에 따라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체의 내부 구성 요소들이 서로 협력하는 차원이니 생명적 조화라 하겠습니다.
① 하나와 전부
모든 피조물은 범위나 분량에 상관 없이 모두가 한 곳에서 한 면을 맡고 있으나 그 한 면을 통해 전부와 연결 되어 전부를 위한 하나가 되고 그 하나는 그 하나를 통해 전부를 가진 하나가 됩니다. 정상적인 상태라면 모든 피조물은 자기 하나 잘하므로 전부를 위하게 되고, 자기 외의 전부는 자기를 위하게 됩니다. 한 몸도 수 많은 지체와 수 없는 세포로 되어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창조한 피조물 전체는 전부가 개별체로 보이나 더 넓은 범위에서는 그 전부가 하나이니 주인이 하나요 운영의 이치가 하나요 우리의 구원에 사용 되는 목적조차 하나입니다. 그리고 만물 중 어느 하나도 딴 세계를 구성하고 외떨어 진 것이 없도록 만드셨습니다. 하나로 전부를, 전부가 하나를 위한 관계입니다.
② 생명적 조화
대칭적 모습으로 서로가 협력하는 만물은 그 내면에 모든 피조물이 연결 되어 있습니다. 그림의 조화에 그치지 않고, 효력적 협력에 그치지 않고, 그 속에는 생명의 역사적인 조화가 있습니다. 분량적 조화가 아니고 기계적 조화도 아닙니다. 한 생명체의 모든 부분이 조화를 통해 생존하고 성장하고 활동하는 것과 같습니다.
③ 희생적 조화
아담과 하와는 만물을 위해 수고하고, 하늘의 해는 땅을 비추며 수고하고, 땅은 식물의 성장을 밑받침이 되는 수고를 하며, 식물은 여러 산물로 아담과 하와를 섬깁니다. 이 모든 피조물의 희생적 상호 협력 뒤에는 소리 없는 창조주의 무한 공급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타락 뒤에는 인간으로부터 고급 피조물일수록 그 타락의 상황이 심각해 졌고 이로 인해 자기중심의 약육강식만 남았으나 여전히 모성애나 정의감이 곳곳에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비록 죽었으나 묘비처럼 사체처럼 남아 있어 그 원 모습을 짐작하는 데는 조금 도움이 됩니다. 타락 전에는 만물이 비록 우리의 무대요 소유물이며 통치의 대상이지만 그 본질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중심적이며 진리 순응적이며 질서와 조화에 잘 맞는 존재들이었고 그들은 서로를 위해 희생적 생태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3) 말씀 원칙
⑴ 말씀이 시공
① 하나님과 말씀
하나님은 전능자시니 만물을 만들 때 어떤 방법과 과정을 통해 만드실지 자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방법 중에 하나님은 ‘말씀’으로 창조하기로 정했으니 창세기 1장에서 당시를 자세히 기록했고 히11:3에서는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고 명확하게 해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하자면 창조의 주체시며 지시자시며 원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를 직접 맡은 시공자와 같습니다. 히4:12-13a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라고 했으니 말씀은 우리의 말과 차원이 다른 진리입니다. 창조의 시공자며 독자적인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며 말씀대로 되지 않은 것을 벧후3:7에서 세상 끝에 다 불사를 심판의 최종 정리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속성으로 파악 되는 인격의 원형인 신격이시고, 말씀은 시공을 맡은 진리며 그 결과가 바로 창세기와 오늘까지의 모든 창조와 섭리입니다.
하나님은 전능자시니 ‘말씀’이라는 단계를 거치지 않고 직접 만들거나 다른 방법을 통할 수도 있는데 왜 굳이 ‘말씀’을 앞 세워 모든 것을 하고 계시는가? 그 답은 오늘 우리가 말씀을 배우고 말씀의 능력을 힘 입어 살고 말씀 때문에 느끼고 아는 그 모든 상황, 바로 이 것이 그 설명입니다. 바로 이런 것 때문에 말씀을 앞 세운 것인데 이 면을 제대로 설명하려면 성경론 전체에 이어 질 사안이어서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여기서는 최소한으로 줄입니다.
② 말씀의 세계
하나님은 인격의 원형인 신격으로 이해하고 상대한다면 ‘말씀’은 우리가 떨고 고개를 숙이는 자세로 받아 모시고 또 이해 시켜 달라고 부탁해야 할 대상입니다. 하나님의 신성은 우리의 영원한 영생에서 끝 없는 우리의 목표이며 향방인데 우리에게 그 길을 걸어 갈 수 있게 하는 오늘의 하나님, 오늘의 하나님 세계, 오늘의 하나님의 은혜와 그 모든 것은 우리에게 말씀의 모습으로 주셨습니다. 이 말씀이 세상을 만들었고 히1:3에서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하신 대로 이 말씀이 세상을 운영합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배우고 닮아 가며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영생을 알며 이 말씀을 통해 오늘 해야 할 일을 다 알고 하게 됩니다. 연약하게 지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하나님 본체를 향해 나갈 수 있는 유일의 길을 주셨으니 그 길을 우리에게 창조로 또 세상의 운영에 있어 빠진 곳이 없도록 보내고 퍼지게 하고 닿게 하였으니 말씀은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유일의 방법입니다.
③ 말씀의 창조
우리를 만든 주체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부름으로 우리를 만든 시행자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이치들은 이 진리의 말씀이 없는 데서 만들어 놓은 피조물입니다. 말씀의 진리를 이 세상 흔한 피조 된 물질의 이치나 도덕의 이치처럼 상대하는 것은 참으로 큰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미신의 신들 중에 하나로 놓고 예수님을 세계 4대 성자 중 하나라 놓는 일이 망령 된 일인 것처럼 성경의 진리 이치와 세상 이치를입니다.
지금 세상의 발전으로 과학 이치 하나를 먼저 배우거나 발견하면 이로 인해 개인과 회사와 국가 전체가 요동을 치는 엄청 난 결과가 생깁니다. 과학과 사회가 극도로 발달한 상태에서 모든 경쟁과 보이지 않는 전쟁은 이치 하나를 파악하는 것인데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과학의 이치를 제일 가치 있게 봅니다. 그리고 인문 사회의 이치는 이런 과학 이치를 잘 사용해야 한다는 정도에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과정에서 천지를 만들고 과학과 인문 사회의 모든 이치를 없는 가운데 만든 창조의 위치에 있는 말씀의 이치가 과학만은 못하게 취급을 당하고 인문 사회의 이치들 중 도덕이나 철학 정도에 놓여 있습니다. 말씀 한 마디가 천지를 없는 가운데서 만들었음과 말씀 한 마디가 천지를 만들 때 모든 종류의 이치들을 없는 가운데서 만들었음을 모르는 우맹이며 강퍅입니다.
세상 이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배우거나 발견해서 인간이 필요하면 써먹고 또 필요가 없으면 내버리는 인간의 종이요 이용물일 뿐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이치는 인간과 천지를 없는 가운데서 만든 주격이요 어른이며 지배자입니다. 세상 이치는 세상 끝날까지만 세상에 놔 두셨습니다. 세상 끝이 되면 말씀의 이치가 세상 전체를 불사를 때 세상 모든 이치도 함께 소멸할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상대할 때는 세상 이치를 발견해서 활용하는 자세나 인식을 버리고, 창조와 주권 능력을 가진 높은 존재로 알아 모시고 떨며 그 앞에 머리를 숙이고 순종해야 하는 관계입니다.
⑵ 진리의 시공
① 만물의 성격
말씀이 천지를 만들고 세상 모든 이치까지 다 만들었는데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만드셨다 하신 이 표현은 단순한 역사 기록에 그치지 않고 만들어 진 만물의 성격을 알게 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 모든 종류의 이치들까지 ‘말씀’이 만들었다 하심은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의 이치가 ‘말씀’의 모습으로 나타 나서 창조의 일을 했다는 말입니다. 왜 ‘말씀’인가?
‘말’은 속에 있는 마음을 밖으로 드러 내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은 무형의 존재이므로 스스로 자신을 알리지 않으면 외부에서 알 수가 없습니다. 창조는 한 편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필요해서 만들어 진 수단이며 과정입니다. 동시에 창조는 그 자체가 하나님을 알리는 것이니 만들어 진 만물과 함께 우리는 우리 자신과 심지어 우리의 마음을 생각해도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창조 된 것은 훗날 타락 후 모세 이후 시기에 주시는 성경과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 주시는 성령과 함께 하나님을 알게 하는 3 가지 계시 중에 하나입니다.
② 만물의 운영
하나님의 천지창조는 창조로 그치지 않습니다. 자식을 낳아 놓고 성의껏 기르지만 그렇다고 만들 때처럼 그렇게 완벽하게 관리하고 기를 수는 없습니다. 자동차를 만드는 것은 생산 공장이 100 % 하는 일이지만 만들어 놓은 차량의 관리는 AS를 한다고 하나 그 것은 최소한에 그칩니다. 최대한의 지원을 하려 해도 인간은 그 것이 불가능합니다.
창조는 말씀이 맡아 없는 데서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만들어 놓은 세상의 이후 운영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잘 만들어 놓았으니 저절로 조화롭게 운영이 되는가? 아니면 진화론처럼 생존을 위해 발전을 위해 경제적으로 서로가 협력과 눈치와 경쟁을 통해 그렇게 굴러 가는 것일까? 하나님이 완전이시므로 하나님의 말씀도 완전입니다. 완전의 존재인 말씀이 만든 세상은 그 만들어 진 이후의 관리와 보존 섭리에 이르기까지 말씀의 보호와 지도와 인도와 운영에게서 단 한 순간도 어느 한 틈도 떠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것을 원인적으로 안다면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 갈 때 그 사자들을 만드신 창조자가 말씀이요 그 사자의 맹수성과 그 순간 우글거리며 입을 벌리고 바로 삼킬 듯한 상황도 말씀이 준비 시켜 놓은 것이니 던져 짐을 당한다면 그 것은 다리오의 결정과 힘으로 보이나 실은 말씀이 그를 붙들고 그렇게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것이 중요한 것은 그렇게 알게 된다면 던져 진 다음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 것은 자연의 통계에 따라 삼켜 질 수도 있으나 만일 말씀이 따로 지시하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하루 3 번 기도하게 한 것도 말씀이 다니엘을 붙들고 지도한 결과이며 다리오가 사자굴에 던지라 한 것도 창조와 관리 주권의 그 말씀이 시킨 결과입니다. 던져 졌을 때 사자가 입을 댈 수 없던 상황도 바로 그 말씀이 알아서 다니엘을 위해 결정하는 것이지 사자의 생각이나 다리오의 결정이나 역사와 자연의 통계나 이치대로 가지 않습니다. 믿는 사람의 진정한 평안과 담대와 순종과 능력은 이런 작아 보이는 것 하나에서 나옵니다.
만물을 만든 것도, 만물의 생명이 유지 되는 것도, 만물이 성장해 가는 것도 모두가 말씀에 달려 있습니다.
③ 진리 가르침
말씀이 만들고 말씀이 만물을 운영하고 있으니 이 상황은 절대 주권적입니다. 말씀이 사용하는 존재는 많으나 말씀이 모르고 말씀을 벗어 난 상황은 없습니다. 직접이든 간접이든 간간접이든 세상을 만들고 운영하는 것은 말씀입니다. 바로 이 면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말씀’의 내용이 진리임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씀은 그 속에 진리의 이치가 있으니 이 이치는 우리가 배우면 되고 배우고 따라 가면 훨씬 순종함에 발전과 능력이 폭발적입니다. 그 많은 수학의 셈들을 일일이 다 접하고 익히고 외워서 아는 것보다 구구단의 이치나 가감승제의 이치를 배워 버리면 간단히 몇 가지를 배운 다음에는 수 없는 셈들을 모두 척척 풀어 버리는 능력자가 됩니다.
말씀이 창조하고 운영하는 이 세상, 우리는 항상 그 높고 귀하고 초월 된 말씀 존재 앞에 떨기만 하고 시키는 대로 맹종만 할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시간적으로 존재적으로는 말씀과 우리 사이는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니 우리에게는 자라 감이 있고 이 것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복인 바로 소망입니다. 진리의 말씀, 말씀의 진리, 이런 면으로 우리에게 창조의 시공자를 알려 주신 것은 우리가 배울 수 있다는 면을 말합니다. 단순 무한 반복 학습이 아니라 이치적으로 배워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를 익혀 열을 알고, 열을 배워 만을 알아 가는 이런 발전을 위해 하나님은 직접 만들고 운영할 수 있는 세상을 ‘말씀’의 이름을 세워 그렇게 했습니다. 크신 은혜, 크신 배려에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깊게 연구하는 이 자세로 연구하고 노력할 뿐입니다. 우리 마음을 열고 하늘의 빛을 주시기를 구하는 자세로.
제1편 창조 총론
1. 창조의 의미 1) 영원 함축 2) 일차 창조
2. 창조의 특성 1) 질서 원칙 2) 조화 원칙 3) 말씀 원칙
▶ 제2편 창조 각론
1. 창1:2, 무에서 시작
1) 재료 창조 2) 재료 창조의 근거
3) 2절과 오늘 4) 참고
2. 창1:3, 빛과 어두움
제2편 창조 각론
1. 창1:2, 무에서 유가 시작
2절을 중심으로 창세기 1장을 대별하면 시간과 공간이라는 무대와 그 안에 모든 존재의 재료가 되는 원소적 창조가 먼저 있었고, 이를 가지고 6 일 동안 분화적으로 만물을 만들어 갔음을 살필 수 있습니다. 즉,
1. 무대 ① 땅: 2절의 땅은 공간적 무대를 표시하는 것으로 9절 땅과 다릅니다.
② 흑암: 2절의 흑암은 시간의 재료로 표시했고 3절의 밤과 다릅니다.2. 만물 ③ 물: 2절 물은 장차 분화 될 만물의 물질 상태로 3절 물과 다릅니다.
없는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드신 창조는 그 만드신 만물의 개별 하나씩이 별도로 하나님의 목적인 우리 구원에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종류별로도 그러하고 한 종류를 형성하고 있는 개체들이 아무리 많다 해도 그 개체 하나씩이 개별적으로 다 없어서는 아니 될 존재들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큰 범위로 나누어 아주 간단히 기록했습니다. 최소화의 원칙으로 기록해 주셨으니 이 기록을 가지고 알 수 있는 데까지 나가는 것이 성경 연구입니다. 어디까지 나갈 수 있을까? 먼저 알게 된 것을 가지고 실행해 보면 자기의 변화를 겪게 되고, 변화 된 자기가 다시 연구하면 다음 실행에 필요한 만큼 더 깨닫게 해 주시며 더 깨달은 것을 다시 실행하게 되면 더 밝아 지고 더 깨달아 지면서 그에게 알아야 할 범위까지 자라 가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창조 총론은 차라리 적기가 쉬우나 창조 각론은 얼핏 쉬워 보임에도 불구하고 각론이 시작 되면 그 끝은 우리가 천국에서 영원토록 자라 가면서 알아 가야 할 분량으로 확대가 됩니다. 여기서 살피는 것은 출발의 가장 간단한 것 하나 정도에 그칩니다. 나머지는 책으로 담을 수 없고 남을 통해 설명을 들을 수 없는 무한의 세계일 것입니다. 고깃배의 사용법을 배우고 태평양으로 출항을 하게 되면 끝없는 고기잡이가 있을 것입니다.
1) 재료 창조
⑴ 무에서 유
① 첫 순간
하나님의 창조 첫 순간은 무에서 유였습니다. 그 유의 첫 모습은 장차 드러 날 모든 존재들의 재료 상태였고 그 재료의 무대가 되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무대였습니다. 가장 필수적인 최소한의 것을 먼저 만들고 그 것을 가지고 그 다음을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개별 존재를 바로 만들 수 있으나 재료를 먼저 만들고 그 재료를 가지고 그 다음 순서를 따라 개별 존재를 만들어 갔습니다.
②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3일에 만드는 땅은 오늘 우리가 사는 이 땅을 말하나 2절의 땅은 넓은 의미의 땅으로 하나님께서 만들 세상의 물질계 공간을 말합니다. ‘혼돈’은 어지럽다는 말이니 아직 이 우주와 우리가 살 땅에 만들어 져야 할 존재들이 재료 상태로는 준비가 되어 있으나 분화 되며 제 모습을 가지지 않았으니 분화 창조 이전의 재료 창조 상태는 모든 존재들이 개체 별로 제 모습을 따로 가지지 못한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공허’라는 것은 텅 빈 상태를 말합니다. 아무 것도 없는 무만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존재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역시 장차 개체적으로 존재하겠으나 현재 상태로는 아직 한 존재도 개체 존재로는 만들어 지지 않고 오로지 재료로 준비 되었으니 아직 각 존재가 개체적으로 나타 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장차 창조 될 존재들이 재료 상태이므로 모두가 섞여 있었고 아직 분화 된 개체가 없었기 때문에 혼동이며 공허라 했습니다.
③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2절에도 흑암이 나오나 3절에 빛을 만들면서 4절에 빛의 반대 상태인 흑암을 또 말씀합니다. 4절에 나오는 흑암은 5절에서 밤이라고 했으니 물질의 낮과 밤 중에서 어두운 밤을 말합니다. 2절의 흑암은 빛을 만들기 전에 빛과 어두움이 분화 되기 전의 상태이며 빛과 어두움이 분화 되면 낮과 밤이 되어 시간이 시작 되는 면으로 볼 때 이 어두움은 시간의 재료였습니다. 시간을 만들기 전에 시간을 만드는 데 필요한 물질 재료 상태라는 뜻입니다. 시간을 만들 재료인 이 어두움에서 빛을 분화하고 그 빛과 반대 되는 어둠을 분화 창조하게 되면 시간이 시작 되며, 현재 상태는 아직 시간이 시작 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④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2절의 물은 수분으로 된 물이 아니라 장차 분화 될 모든 존재가 재료 상태로 있음을 말합니다. 바다와 강을 이루는 물이 아니라 모든 존재로 분화 되기 전의 상태인 물질이 마치 빵을 만들기 전에 반죽처럼 또는 쇠로 각종 철기를 만들기 전에 녹아 있는 쇳물처럼 용해 된 준비 상태입니다.
창조 과정에서 오늘 우리가 아는 물과 같은 분화 된 상태의 물은 창조 2일인 6절에 처음 나타 납니다. 궁창을 만들면서 모든 존재의 재료 상태를 위와 아래로 나누었고 그 사이에 하늘이 들어 가게 했습니다. 그리고 하늘 아래 이 땅 위에 두신 물질 재료인 ‘6절의 물’을 가지고 9절에서는 육지 모습을 드러 내게 할 때 땅과 분화 되는, 바다와 강을 이루는 물이 나타 납니다. 어떤 존재는 만들 때 분명하게 표시하나 대부분은 생략이나 간략하게 설명하고 어떤 경우는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약하게 표시했는데 물도 그런 경우입니다.
⑤ 하나님의 신은 운행하시니라
창조의 역사는 일반적으로 성부 하나님의 단독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장에서 성자 하나님이 만들었다고 하셨고 여기 창세기 1장 1절에서는 하나님의 신이라는 표현으로 제3위 하나님의 역사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라 해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이 빠진 역사는 없습니다. 우리를 오늘 성화 시키는 역사는 성령의 전담이며 전면 역사입니다만 우리의 성화의 대상은 성부 하나님이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형상을 원형으로 삼아 우리의 인격을 만들어 가시는 분은 성령이신데, 이 성령의 감화와 감동의 역사가 우리를 성부 하나님과 같은 형상이 되도록 만들어 갈 때 성령만 일하시고 성부는 모델처럼 우두커니 서서 그림을 그리라고 자세만 잡고 계시겠는가? 성령이 전면에서 전담하지만 성부와 성자는 각각 그 위치에서 이 일을 돕고 있습니다. 성자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도 성부와 성령은 맡은 분야가 있었습니다.
창조의 역사에도 성령의 역사는 2절에 명시 되었습니다. 모든 창조의 과정, 그리고 모든 피조물과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피조물과 피조물의 관계도 모두가 감동적이며 감화적으로 조성 됨을 일일이 따로 설명하지 않고 성령의 운행이라는 표현으로 함축했습니다.
⑵ 다시 2절을 정리하면
물질계인 이 우주의 만물 창조는 물질계의 근본 무대가 되는 시간과 공간을 없는 데서 창조하고 그 안에 들어 설 모든 개체들을 일단 재료 상태로 먼저 만들어 놓았으니 여기까지가 무에서 유의 창조입니다. 3절 이하는 모두 먼저 만들어 진 것을 이용해서 분화 시켜 가는 과정입니다.
1. 물질계의 무대
① 땅: 공간 재료
② 흑암: 시간 재료
2. 만물 재료
③ 수면: 개체 재료
2) 재료 창조의 근거
- 영계와 우주의 동시 창조
마25:34에서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창세로부터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 했는데 이 나라는 오늘 이 세상이 아니라 영원한 영계를 말합니다. 이 성구에 의하여 영계와 우주는 일반적으로 동시 창조로 봅니다.
- 세상이 그림자라면
그런데 영계와 우주의 관계를 성경은 영계를 실상으로 세상은 그림자로 비교를 했습니다. 창조를 시간적으로 좀 넓게 보면 영계와 우주는 동시 창조지만 정밀하게 본다면 당연히 실체요 실상인 영계의 창조가 먼저고 그 그림자인 이 세상은 그 다음일 것입니다. 그 시차는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고려할 때 따로 계산할 것도 없는데 다만 우리에게 알리시고 싶은 면이 있어 이런 면들을 알리셨으니 시차가 있다고 하면 좋겠습니다.
- 하나님의 기관 역사
하나님의 역사를 살필 때 해당 존재와의 관계 면에서 보면 기관 역사면을 쉽게 살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직접 만드시나 이후는 먼저 만든 것으로 뒤를 만들며 역사합니다.
계7:1에서 땅 네 모퉁이에서 땅의 사방의 바람을 통제하는 천사를 통해 하나님의 기관 역사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세밀하고 광범위함을 알 수 있습니다. 마18:10에서 우리 모든 택자 한 사람씩을 따로 맡은 천사가 있음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만들기 전에 각 분야를 맡을 천사들을 먼저 만들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소돔을 직접 치는 것은 하나님이시나 그 심부름은 천사가 했고 그 천사가 그 시대 그 지역의 선지자인 아브라함에게 먼저 통고하고 아브라함의 의사를 먼저 들었습니다. 항상 기관을 통해 역사하는 면을 고려한다면 세상의 창조가 영계와 동시 창조지만 굳이 비교한다면 영계의 창조를 조금이라도 앞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 물질계 창조의 순서
영계와 물질계의 창조 관계를 볼 때, 일을 맡겨 하나씩 풀어 나가되 먼저 있던 존재를 통해 그 다음 단계로 나가는 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 물질계 만물도 가능한 가장 최소한의 것을 먼저 만들고 나서 그 다음 하나씩 분화 시켜 나갔을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창세기 1장의 2절과 3절 이후의 개별 존재가 만들어 지는 과정을 두고 볼 때 물질계의 무대인 시공을 먼저 만들고 그 안에 들어 설 만물의 재료 상태를 먼저 만든 다음에 그 재료를 가지고 그 주어 진 시공 안에서 하나씩 만들어 갔을 것으로 생각 됩니다. 3절 이하에 땅이 식물을, 하늘이 새를, 물이 물고기를 만들 때 전담 심부름을 하는 것을 통해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 오늘 현실을 볼 때
모든 성경은 우리의 구원 현실과 무관하게 적은 부분은 없습니다. 성경은 성경으로 일차 해석하지만 성경 안에서 해석할 수 없는 문제가 있을 때 의외로 우리는 우리의 일반적이며 일상적인 현실 상황으로 성경을 읽으면 성경에 미쳐 기록하지 않은 부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생기는 것은 성경 기록의 미진이 아니라 성경 기록의 최소화 원칙 때문입니다. 또 구원은 현실을 떠날 수 없도록 하심도 고려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은 계시지 않은 듯합니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서 다 하시면 우리의 실력과 우리의 성장은 없습니다. 반대로 하나님 없는 성장과 실력도 없습니다. 이 중간에 우리의 길이 있습니다. 외부로는 우리가 다 하는 것처럼 요구하십니다. 그 내면에서는 하나님께서 다 하십니다. 그래서 신앙의 사람은 전적 은혜라 하고, 불신의 사람은 사람이 다해 놓고 하나님의 이름을 갖다 대기만 한다고 볼 멘 소리를 합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자본은 주십니다. 나머지 만드는 것은 우리에게 맡기십니다. 씨앗이라는 종자는 주어 집니다. 그 씨를 심어 자라고 추수를 하는 것은 맡깁니다. 광야 40 년의 노정에서 물이라는 것은 절대로 구할 수 없는 상황을 주시되 심지어 마른 지팡이로 더 마른 상태의 반석을 때리게 하고 그 순종 끝에 물을 주십니다. 마른 지팡이와 더 마른 반석이라는 존재는 물을 얻는 데 조금도 연관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도 전혀 없는 것보다는 그마저라도 있다면 그 것을 먼저 들고 쓰십니다. 평소 이런 신앙 원칙을 말씀 순종으로 익힌 사람의 눈으로 보면 창1:2을 그후 말씀과 비교하면 재료 창조 또는 물질계의 기본 무대를 만든 것임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 만물의 마지막
타락한 세상은 처음 지어 진 상태의 역순으로 다 되돌려 집니다. 그리고 새로 만들게 됩니다. 하나님은 전능자시니 세상 마지막에 오늘 세상 상태를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만들어도 되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세상이 원래 만든 상태에서 탈선하여 더러워 졌으므로 이를 불 태워 처음으로 돌리고, 그 처음으로 돌아 간 상태를 가지고 새로 세상을 만들게 됩니다. 벧후3:10에서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 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고 했습니다.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 지는 상태가 오늘의 만물이 열기로 인해 그 형체가 녹아 내리는 용광로의 용해 모습으로 설명했으나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그 말씀 속에 창조의 첫 순간으로 가는 면입니다. 없는 무에서 유를 만든 재료 창조, 바로 거기까지 오늘의 만물을 끌고 가는 것입니다. 쇠가 고장이 났을 때 용광로에서 녹여 쇳물을 만들고 그 쇳물을 다시 부어 다른 기계를 만드는 것은 아직 쇠라는 본질은 해체 되지 않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주님 오실 때 세상 만물이 뜨거운 불에 풀어 지는 이 상황은 쇳물 상태로까지만 가는 것이 아니라 쇠가 쇠로 만들어 지기 이전의 원소 상태, 그 쇠가 만들어 져 나오기 전의 최초 단계까지로 갈 것입니다. 그렇다면 쇠가 녹는 1535도 이상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원소 이상의 최소 단위로 나뉘게 되면 오늘 우리가 아는 원자탄의 에너지 방출 문제가 생깁니다. 우주 물질계 전부의 완전 해체, 과학이 이미 밝혀 놓은 상식만 가지고 짐작을 해도 두려울 일입니다.
벧후3:13에서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라고 하신 이 말씀을 따라 이 말세 마지막에 광대한 이 우주 전체가 창조의 첫 순간으로 해체 과정을 밟아 최소 단위화 되고 그리고 그 것을 가지고 하나님은 다시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어 우리의 영원한 발등상이 될 새 세상을 주실 터인데, 이 과정의 역순을 통해 우리는 창세기 1장의 창조 첫 순간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3) 창1:2과 오늘 우리
어느 말씀이나 마찬 가지지만 창1:2의 창조 첫 순간 하나만 가지고 살펴도 우리는 평생 살아 가며 어떤 현실에서도 이 말씀으로 전부를 삼을 수 있습니다. 한 목회자의 평생 설교를 이 한 절에서 마칠 수 있고, 한 사람의 평생 신앙의 근거를 이 말씀으로 다 해결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몇 가지만 예를 들겠습니다.
- 하나님 유일주의, 주권주의
천지 만물의 종류와 숫자를 헤아릴 수 있을까요? 숫자는 적은 듯해도 인간만 가지고 봐도 그 종류가 많습니다. 그 인간의 생각 중에 하나를 가지고 수 많은 학문의 세계가 열리고 있습니다. 인간보다 많은 동물, 그보다 많은 곤충, 더 많은 식물, 더 많은 무생물 일반 우주 만물의 종류를 다 헤아리는 것은 끝이 없습니다.
사람의 언어를 공부하는 것 하나만 가지고도 몇백 가지의 중요 언어가 있고, 수천 가지의 언어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그 언어 중에 한글이라는 우리 언어 하나만 가지고 국어국문학과가 존재합니다. 국문학과 안에 세분하여 학문을 구분하려면 음운론, 어휘론, 맞춤법, 문장론, 국문학, 한국어, 화용론, 문학사, 문학, 시, 소설, 설화, 방언, 문법으로 잔 가지를 치고 나갑니다. 그 하나의 분야만 붙들고 역사 이후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 주님 오실 때까지 파고 들어 가도 끝이 없습니다.
만 존재와 만사가 없는 가운데 하나님 한 분이 창조하시고 운영하신다는 이 사실을 알면 이 세상 모든 것의 제일 머리 되고 핵심 되는 지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나머지는 저절로 술술 다 풀릴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이 한 가지를 모른다면 천하 학자 다 모아 놓아도 헛 일입니다. 창세기 1장은 우리에게 모든 지식의 첫째, 모든 지식의 전부, 모든 지식의 출발, 모든 지식들의 지식을 열고 있습니다.
나의 원수, 나의 싫어 하는 환경, 내가 극단적으로 피하고 싶은 상황이 닥칠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기 생존과 편익을 위해 반응을 합니다. 이 것이 안 믿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든 창조의 일부요, 그 창조는 날 위한 것이며, 하나님의 예정과 창조와 운영에서 일점일획도 어긋나거나 돌발이 있거나 잘못이 있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그 어떤 좋은 현실과 그 어떤 나쁜 현실을 다르게 보지 않고 같이 봅니다. 창세기 1장 2절의 무에서 유의 창조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 졌고 이후 분화 창조로 인해 복잡한 오늘의 세상이 되었으나 더듬어 올라 가면 창1:2의 물질 재료에 다 모아 집니다. 무에서 유의 기초를 만드시고 그 것에서 하나씩 분화 시켜 만물을 만드시고 그 만든 것을 매 순간 새롭게 조작하며 오늘까지 운영하시는 만유주 창조주 주권의 주님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뜻을 찾아 순종하는 우리의 행위를 두고 그 어떤 만물 존재라 해도 이 행위를 진정으로 반대하거나 손해를 보게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이 행위를 돕기 위해 만들어 졌습니다. 다만 앞에서 돕는가 뒤에서 돕는가 이 것이 다를 뿐입니다. 밀어 주면 돕는가 막아 섬으로 돕는가 이 문제만 다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짓지 않은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절대성의 창조다! 이 창조 지식을 확고히 붙든다면 오늘 창조 6천 년 뒤에 사는 우리의 인생 끝까지 우리는 담대할 것이고 평안할 것입니다. 왜 말씀을 어기고 사는가? 창조 세계에 대한 무지 때문입니다. 왜 양심을 어기고 사는가? 왜 세상을 향하며 세상에 물들며 세상에 흔들리는가? 이 하나가 바로 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 지극히 작은 것에서 모든 것을
하나님 없는 세상은 시작에 유리해야 중간에 유리합니다. 그래서 덩치를 키우려 하고 숫자를 많게 하려 하고 조금이라도 일찍 알아 내기 위해 필사의 몸부림을 칩니다. 출발에 불리하면 남에게 짓밟히고 나중에 착취를 당하고 결국 생존투쟁에서 밀리고 도태를 당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이상 물질계 세상은 물질의 실력에서 모든 것이 결판 나기 때문입니다. 더 높이, 더 빨리, 더 강하게! 올림픽의 구호가 그런 식일 것입니다. 한 부모 밑의 아이들의 경쟁으로부터 국가와 문명의 충돌에 이르기까지 다 해당 됩니다.
믿는 사람도 그러한가? 교회의 생존과 발전과 성공도 그러한가? 신앙의 세계도 세상과 본질적으로 같은가? 오늘 교회와 세상이 다르지 않고 믿는 사람과 불신자의 차이를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말세 마지막을 향해 치닫다 보니 역사의 모든 귀신, 천하의 모든 악령이 총동원 하여 우리를 세상에 묻어 버리려 노력합니다.
하나님은 없는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드셨습니다. 만드실 때 큰 것부터 만들거나 많은 것을 만들 수도 있지만 가장 간단한 것, 가장 쉬운 것, 가장 출발의 첫 순간을 먼저 시작했습니다. 우리처럼 기술 개발의 발전 과정이 필요해서 그러했을까? 인간처럼 단계를 밟지 않고는 바로 수직 상승을 할 수가 없어서 그러했을까? 하나님은 전능이어서 못하실 것이 없는데 창조의 순서를 일부로 만들고 그렇게 준수했습니다.
세상을 그렇게 운영하시겠다고 우리에게 창세기 1장을 적어 주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사는 세상을 운영하는 방법을 미리 적어 주셨으니 우리는 창세기 1장을 통해 세상의 존재 과정과 운영 원리를 미리 아는 사람입니다. 답을 알고 문제를 푼다면 우리에게는 난제가 없는 법입니다.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현실, 그 어느 자리에서도 거기서 할 수 있는 것, 거기서 제일 간단한 것, 거기서 가장 첫 출발에 해당 되는 자기 의무와 발걸음을 내디디면 됩니다. 세상에서는 늦으면 손해고 출발이 불리하면 불리하지만 하나님이 지켜 보시는 우리의 걸음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는 한 가지 기준뿐입니다. 맞으면 하나님의 도우심과 뒷감당이 계실 것이고, 그 뜻에 틀리면 아무리 잘 나가도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여 다 망칠 것입니다.
재료를 먼저 만드시고, 그 재료를 가지고 그 다음 단계로 나가고, 그 다음 단계를 가지고 그 다음 단계로 발전하며 분화하며 한 걸음씩 갈 수 있는 데까지 간 것입니다. 오늘 어떤 미천한 데서 무지한 데서 불리한 데서라도 창세기 1장의 2절을 붙들고 출발한다면 출발하지 못할 환경은 없습니다. 먼지 하나가 전부면 그 하나를 붙들고 시작만 하면 됩니다. 나머지 과정과 뒤는 하나님의 인도와 은혜가 모든 것을 다 결정합니다. 이 믿음 때문에 교회와 신앙과 믿는 사람의 걸음과 자세는 천하를 상대하며 천하를 상대로 여기지 않습니다.
모두가 처음부터 또는 언제라도 더 유리한 것을 갖기 위해 혈안이고 전쟁이 벌어 지는 세상에서, 만유주 창조주 주권의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우리는 온유하며 겸손하며 담대하며 천하가 어떻게 움직여도 우리 걸어 갈 신앙의 한 길만을 가게 되는데 그 자세를 주는 가장 첫 말씀이 성경의 첫 성구입니다.
- 정리와 정돈
원래 하나님의 본성과 역사는 만물이 그 존재에 따라 그 위치와 역할을 바로 갖게 하여 모든 것은 조화롭게 되는데 그 모습은 혼돈과 공허가 아니니, 2절의 혼돈과 공허는 정리와 정돈으로 가는 과정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사람이 타락하게 되면서 다시 모든 것은 혼돈과 공허로 갑니다. 이 때의 혼돈과 공허는 죄의 결과입니다.
정리 정돈의 하나님임을 기억합시다. 교회도 주변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항상 정리와 정돈이 되어야 합니다. 육안으로 보이는 청소나 환경 정리로부터 우리의 말도 생각도 행동도 우리의 인인관계도 우리의 인격까지도 모든 것을 다 바르게 만들고 바른 위치에 세우고 바르게 해야 합니다. 창조의 6 일의 모든 과정도 정리와 정돈의 과정이며 어느 하나에도 흐트러 짐이 없습니다.
4) 참고
- 창조의 하루
19세기에 과학이 급발전하면서 엉뚱하게 성경을 부인하되 창세기를 신화로 치부하여 성경 전체를 다 묻어 버리는 시도가 시작 되었습니다. 지금 거의 그렇게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 진화론을 받아 들이느냐가 문제지 삼키지 않은 신학이 없다 할 정도입니다. 성경을 부정할 목적으로 시작한 이 시도는 창세기 1장 1절부터 해체를 시작했습니다.
가장 간단하고 일반적인 시도는 하루의 24 시간 체계는 해와 달과 지구의 관계인데 제 4일에 해와 달이 만들어 졌으니 창조 첫 3 일은 오늘의 24 시간 체계가 아니라 수백 만 년이든 수억 년이든 그들이 원하는 세월이 바로 이 시기에 다 지나 갔다는 주장입니다. 없는 가운데 천지를 만드시는 창조의 능력은 수십 억 년에 걸릴 것을 한 순간에 만들 수도 있고, 3 일씩 나누어 첫 3 일은 수십 억 년이 걸리게 하고 후 3 일은 24 시간 체계가 되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능을 안다면 그리고 타락 후 출애굽 시기의 자연 일수만이 있던 시기에 출20:11에서 엿새 동안 모든 것을 다 만들었다고 한 것은 어떤 반론의 여지도 없게 합니다.
- 1절과 2절의 간격
한 편으로 창조 첫 날에 빛이 만들어 지고 어두움도 만들어 졌는데 빛과 어두움이 만들어 진 그 순간부터 창조의 첫 날 24 시간이 시작 되었다면 빛과 어두움을 가지고 24 시간의 하루를 만들기 직전의 틈새가 있었으니 이 시기가 수십 억 년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1절에서 천지를 창조한 다음에 천사장의 타락으로 세상이 붕괴 되는 ‘혼돈하고 공허’했다는 가설도 나오지만 아담에게는 만물이 주어 졌기 때문에 아담의 타락은 주격의 타락으로 그 소속한 만물에게도 악화의 영향을 미쳤으나 천사는 아무리 그 위치와 역할이 탁월하다 해도 어디까지나 하나님과 성도를 심부름하는 종의 위치이므로 아담의 타락에 만물이 영향을 받는 것처럼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일고의 가치도 없습니다. 진화론이 생긴 다음에 진화론을 합리화하기 위해 끼워 맞추는 논리일 뿐입니다.
- 창세 초기
창세 초기는 없던 데서 모든 것을 만드는 기간이므로, 만들어 놓은 자연 상태에서 시공을 변화 시켜 가는 창세 이후의 과정과 수평 비교하는 것 자체가 미혹을 받은 의견들입니다. 무에서 유의 창조는 전능하시며 유일이신 하나님의 특별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 알려 주신 만큼 알면 되는 것이고, 오늘의 자연 현상을 잣대로 삼아 창조 초기를 해석하면 잣대가 틀렸기 때문에 무슨 소리를 해도 다 틀린 주장만 나옵니다. 이 것은 창세 초기 현상에 광범위하게 다 적용 되는 원리이면서 동시에 창세 이후 오늘까지 내려 오는 자연 상황에서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직접 역사하는 순간들이 있는데 이런 경우는 예외 없이 모두 초자연 초역사 초인간적으로 진행합니다. 인간의 생각으로 이해 여부를 결정하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무조건 알려 주시는 대로 아는 것이 신앙입니다.
▶ 제2편 창조 각론
1. 창1:2, 무에서 시작
2. 창1:3, 빛과 어두움
1) 빛의 창조
2) 어두움의 창조
3) 빛과 어두움
2. 창1:3, 빛과 어두움
1) 빛의 창조
⑴ 시간의 시작
① 빛, 첫 분화
2절에서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해 준비가 있었습니다. 그 준비 가운데 제일 먼저 만들어 지고 그 모습을 드러 낸 것은 바로 빛입니다. 이 빛은 낮이 되고, 그 빛의 반대인 어두움은 밤이 됩니다. 이 낮과 밤이 만들어 지면서 세상에는 비로소 시간이 시작 됩니다.
② 제4일의 빛
4일에 만들어 지는 해와 달, 그리고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만들어 지는 것은 오늘 우리 지구의 천체물리학의 시작이 되는 것이고, 1일에 만들어 진 낮과 밤을 만든 빛과 어두움은 시간의 시작입니다. 24 시간의 오늘 하루가 12 개 월을 만들고 1 년을 만드는 것은 태양계가 제 자리를 잡은 뒤라야 한다는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 질문은 과학 상식을 먼저 절대 진리로 확정을 한 다음, 과학의 지식이 성경을 검사하는 자세입니다. 그런 질문에 답하는 것 자체가 신앙의 자세는 아니지만 어린 사람을 위해 가능성 하나를 말해 준다면, 창조 첫 날의 빛과 어두움이 창조 6 일의 기준이 되었고 태양계의 창조는 그 6 일 가운데 4일에 들었을 뿐입니다. 4일에 만들어 진 태양계가 하나님 창조의 세계의 시간을 정하고 그 시간이 오늘까지 내려 온 것이 아니라 창조 1일에 만든 빛과 어두움이 낮과 밤을 만들며 그 낮밤의 하루의 시간이 태양계의 창조가 되는 4일의 시간과 같아 지게 했으므로 창조 6 일은 오늘의 6 일과 같은 길이면서도 4일의 태양계 길이와도 맞아 진 것입니다.
③ 시간계의 출발
결론적으로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와 달이 다른 별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24 시간 체계의 오늘을 만든 것이 먼저 있고, 그리고 밤낮이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없는 가운데 시간계를 먼저 만드셨고 그 시간계는 2절의 어두움이 시간 창조의 재료로 먼저 만들어 져 있었으며, 분화 창조의 첫 날에 하나님께서 시간 창조를 제일 먼저 하시면서 빛을 분화 시켰고 시간 창조가 빛으로 나타 나면서 이미 오늘과 같은 시간은 창조의 첫 날이었습니다. 시간 창조를 창조 첫 날에 만들 때 태양계의 체계에 얽매여 그 부산물이나 파생물로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시간계는 하나님 창조의 출발입니다. 그리고 태양계는 그 시간계 범위 내에서 만들어 졌기 때문에 태양과 달의 낮과 밤의 길이와 역할은 이미 시간계가 만들어 지고 움직이고 있던 창조 첫 날의 체계에 맞추어 졌던 것입니다.
⑵ 모든 것을 알리는 것
① 알게 하는 역할
존재 중에 가장 먼저 그 완성 된 모습을 드러 낸 것은 빛입니다. 빛은 시간이라는 무대를 우리에게 제공하면서 이 무대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니 빛은 모든 것을 알게 합니다. 빛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습니다. 알아야 그다음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빛은 바른 지식과 지혜라 할 수도 있고, 모든 행동에 앞 서서 반드시 선결 되어야 할 문제입니다.
② 먼저 알리시는 역사
어떤 존재인지, 어떤 모습인지, 어떤 방향인지? 하나님인지 피조물인지, 큰 것인지 작은 것인지, 환영해야 할 것인지 피해야 할 것인지, 가야 할 길인지 포기할 길인지, 먹어야 할 것인지 먹지 말아야 할 것인지, 우리의 모든 것을 알게 하는 것이 바로 빛입니다. 그냥 세월이 가니까 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알고 가는 세월만 세월입니다. 시간의 개념은 바로 알고 바로 살고 바로 걸어 가는 것과 따로 떼놓을 수가 없습니다.
③ 계약의 하나님
그 어떤 것이라도 우리에게 주기 전에 가장 먼저 주시는 것이 바로 알리는 것입니다. 그 어떤 중요한 것이라도 그 어떤 시급한 것이라도, 일단 바로 알고 나서 그 모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리지 않고 행하는 것은 없으니 하나님의 이름이 계약의 하나님입니다. 우리를 자유성의 존재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이 구원을 목적으로 삼았으므로 창조의 순서에서도 또 빛으로 표시한 것도 모두가 자연스럽고 당연합니다.
⑶ 모든 생명의 근원
① 요한복음 1장과 비교
요한복음 1장은 창세기 1장의 창조의 배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은 실제 시공 세계의 직접 창조를 기록했으나 요한복음 1장은 창세기 1장에서 세상을 만들게 되는 창조에 앞 서 하나님의 의지 세계에서 이 모든 일을 시작하려 하던 그 순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 ‘태초’는 시공 세계를 실제 만들어서 우리의 손목시계가 돌아가기 시작한 시작을 말씀하고, 요1장의 ‘태초’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들기 전이니 하나님의 자존이 우리를 만들기로 목적을 정하신 영원 전 태초를 말합니다. 이 태초에 성자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으로 계셨고 하나님만 홀로 계시던 자존의 세계에서 하나님과 같은 존재를 만들기로 목적을 정하시고 그 목적이 바로 우리이며 우리를 만들어서 볼 수 없고 외부에서 접할 수 없는 하나님을 인간과 만물이 다 알도록 창조를 하고 그 피조물을 운영하기로 했습니다.
③ 제2위 하나님
이 하나님의 자존과 피조물인 만물의 창조 사이에 ‘연결’ 부분을 맡고 나선 분이 바로 2위 성자 하나님입니다. 2위 하나님의 이름은 요1장에서 ‘말씀’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마음 안에 있는 것을 남이 알도록 표현하는 것을 말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본체가 가진 내면의 세계를 하나님 스스로 외부에 표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세계는 피조물이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먼저 자신의 내면을 외부에 알리셨으니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 이 부분을 맡은 것이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2위 하나님입니다. 알리는 방법은 바로 창조였습니다. 만물을 만들어 그 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내면은 일일이 다 드러 났습니다. 드러 나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③ 성자와 빛
이 과정에서 만물은 2위 성자 하나님 때문에 모든 것을 알게 되었고 인간도 마찬 가지이며 특히 타락한 인간이 제대로 알게 되고 다시 하나님과 연결을 갖게 되는 것도 모두 2위 하나님의 직임입니다.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알 수가 없는 상태가 어두움이고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것이 어두움인데 이 모든 어두움을 2위 하나님이 창조로 밝히고 구속함으로 밝혔으니 2위 하나님이 맡은 직책은 빛입니다. 그리고 2위 하나님의 모든 역사는 모두가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연결하는 것이며 이 연결로 인하여 만물까지 하나님께 연결 되는 것이니 이 연결을 다른 말로 생명이라 합니다. 빛은 바로 생명의 외부 모습입니다.
2) 어두움의 창조
⑴ 대칭의 첫 창조
① 대칭의 역사
빛을 만드신 하나님은 그 빛의 반대인 어두움을 함께 만들어 밤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구체적 창조 과정은 양면으로 대칭을 이루어 균형을 맞추고 계십니다. 그 제일 처음 것이 바로 어두움입니다. 오늘 우리 기준으로 생각하면 빛과 어두움은 모순인데 왜 모순을 만드셨을까? 창조의 첫 날은 타락으로 인해 죄가 세상에 들어오지 않았고 흠 없이 점 없이 완전한 세계인데 왜 반대편을 만드셨을까? 왜 빛이 없는 세계가 빛을 필요로 하는 에덴동산에 필요했을까?
② 지옥까지도
이런 의문은 창조 마지막 날에 만든 아담과 하와를 통해 대칭의 양 쪽이 합하여 하나가 되는 면을 살피면 빛과 어두움의 조화도 같은 이치로 알 수가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참고할 것은 창조 후 타락 이전의 상태보다 더 온전하고 영원한 세계가 재림 이후인데 재림 이후에도 천국과 지옥이 영원한 영계를 함께 구성하고 있습니다. 왜 영생의 영원한 나라에서도 지옥은 저 쪽 한 편에 있어야 할까? 세상에 있는 동안 하나님을 대적한 것들을 처벌하는 그 자체만 지옥의 존재 목적일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세계와 그 하나님의 세계를 이어 받아 영원히 모순이 없고 원망이 없는 완전한 세계를 가져야 할 우리에게도 우리가 미치지 못할 곳은 늘 존재한다는 말인데, 이 것을 완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두움이 있으므로 빛이 더욱 빛이 되듯이 지옥이 있음으로 천국이 더욱 천국이 되고, 지옥의 고통이 있으므로 천국의 영생에 대한 감사가 더욱 감사가 되는 세계, 바로 이 세계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기 영원 전부터 목적을 정하시고 예정하신 그 설계에 들어 있었습니다. 목적과 예정에 없는 것이 돌발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따라서 귀납적으로 우리는 숨어 있는 본질과 연혁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타인의 고난을 댓가로 우리가 즐거움을 누린다면 죄악의 낙과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를 것인가? 지옥의 그 고난 속에는 우리 믿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죄로 산 기능, 잘못 산 자기의 요소, 우리의 옛사람도 함께 던져 고난을 받고 있으니 지옥의 고난은 남의 고난으로 내가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죄의 고난을 보며 나의 의의 수고의 값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반이 될 것인데?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대속의 부활을 위해 십자가 죽음을 먼저 당했습니다. 벧전5:10에서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영원 영생의 복락을 위해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없어서는 안 될 최소한의 고난을 대칭에 두신 것입니다.
이로 인해 지옥도 타락 전에 이미 만들어 져 있었고 재림 후에도 지옥은 늘 있을 것입니다. 그 지옥까지도 더 넓은 세계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어서 만든 것이지 필요 없는 것을 만들지는 않으셨습니다. 물론 타락 전의 어두움의 밤은 타락 후의 밤이나 지옥과 비교할 때 부정적인 면이나 처벌의 고통을 수반하는 그런 면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대칭의 원칙은 타락 전 모든 것을 깨끗하게 완전하게 만들 때 이미 주신 것이고 또 지옥조차 타락 전에 미리 준비하신 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全面을 알 수 있다 하겠습니다.
③ 목적을 위하여
우리를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길러 가시는 과정에는 항상 좌와 우, 앞과 뒤, 위와 아래, 안과 밖을 두루 다 갖추게 하십니다. 위로 하나님과 바로 되고, 옆으로 아담과 하와의 관계가 바로 되고, 아래로 아담과 만물의 관계가 다 바로 되어야 온전한 사람이 됩니다. 빛을 통해 주시는 은혜가 있고, 이 빛의 반대가 되는 어두움을 통해 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타락 후의 어두움이 아니라 창1:3의 첫 날에 만든 어두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이 되고 은혜가 되며 영생에 필요하여 주신 것입니다.
⑵ 타락 전의 어두움
① 완전을 만드는 역사
빛을 빛 되게 하고, 빛으로 주신 낮에 해야 할 것이 있듯이 일을 하고 나면 일이 없는 기간이 필요해서 주신 휴식입니다. 마치 6 일을 일하시고 제 7일에 쉬신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휴식이라는 것은 타락 후 우리에게는 죄의 노고 때문에 파생 된 휴식과 다릅니다. 하나님도 6 일은 일하시고 그 일하신 수고와 반대 되는 것처럼 보이는 제 7일에 안식하신 것과 같습니다. 일할 때가 있고 일을 그칠 때가 있다는 뜻입니다. 빛을 통해 모든 것을 알게 하시고 빛을 통해 모든 것을 하게 하실 때가 있고, 또 알고 행하던 모든 건설을 중지하고 설 때가 있고 쉴 때가 있고 생각할 때가 있고 건설하고 일하는 일의 반대 되는 일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일과 휴식, 구원에 유익한 일과 구원에 유익한 휴식으로 조화를 시켜 주신 것입니다. 타락함으로 세상이 어두워 졌을 때 주님이 구원의 빛으로 오신 것은 죄인을 구하기 위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창세기 1장의 어두움은 타락 이전입니다. 계22:5에서 ‘다시 밤이 없겠고’라고 하셨는데 이 밤은 없어야 하는 것이니 하나님이 없는 어둠을 말한 것이고 창세기 1장의 어두움은 하나님을 모신 우리에게 빛으로 역사하는 일의 대칭에 있는 또 다른 형태의 일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든 창조는 하나님께서 좋게 만드셨습니다. 따라서 첫 날에 만든 어두움도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신 말씀에만 시선을 고정 시키고 어두운 밤이 우리에게 좋은 면만 살피면 됩니다.
② 빛의 어두움
어두움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죄를 지어 하나님이 없는 저주의 세계가 그 하나고, 또 하나는 빛으로 일하기 위해 필요한 보충으로서의 밤입니다. 죄와 의도 대칭적으로 우리는 대해야 합니다. 죄는 피하고 의를 구해야 합니다. 빛으로 살고 어두움을 피해야 합니다. 요일1:7에서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이라 하신 말씀입니다. 또한 요일1:7의 빛 가운데 늘 행하는 그 생활 안에서도 우리는 일을 할 때 대칭적인 면을 늘 살펴야 합니다.
부모를 생각하다 보면 자녀 일을 멈춰야 할 때가 있고 자녀를 위해 돌보다 보면 부모 입장을 미뤄 둬야 할 때도 있습니다. 목회자를 기르기 위해 교인이 참고 기다리는 세월도 필요하고 교인을 위해 목자는 자기 모든 것을 아낌 없이 접어 둬야 할 때도 있습니다. 기도를 하기 위해 성경 읽기를 미룰 수도 있고, 성경 연구를 위해 기도 생활을 줄일 수도 있습니다.
3) 빛과 어두움
⑴ 양면의 조화
① 많은 묵상이 필요한 사안
죄가 아닌 의의 세계에서 빛과 어두움을 양면으로 조화한 것은 우리에게 어떤 면을 가르칠까? 하나씩 살펴 봅니다.
② 양면이 필요한 경우
우선 창조 6 일을 나누는 데 낮과 밤이 합하여 하루가 되고 그 하루가 6 회를 반복해서 만들어 졌음은 분명합니다. 의의 세계를 이루는 데 없어 서는 아니 되는 절반의 존재입니다. 의의 세계에서 의를 만드는데 대칭이면서도 반대 편에 있는 것, 그 것이 3절의 첫 날에 만든 어두움입니다. 목자의 부지런한 지도와 지시가 낮이면 그 목자를 따라 묵묵히 순종하는 양 때의 자세를 말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신인양성일위로 오신 주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고난 받는 절정의 순간, 성령은 그 때를 도우시고 동참하고 계시나 성부는 매물차게 외면합니다. 죄인을 대신하는 순간이며 이 한 순간만 주어진 유일의 기회입니다. 이 고난을 완전 승리로 통과해야 우리에게 구원이 주어지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이 순간 아담을 통해 인류를 일단 삼킨 악령은 죄인을 대신하신 주님을 마음대로 휘젓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1위 성부 하나님은 이 순간에 중립을 지켜야 합니다. 직접 개입하지 못합니다. 죄인을 대신 하러 나선 주님을 향해 1위 하나님은 엄하고 엄한 지공과 지성의 법으로 심판을 보고 있습니다. 악령과 싸움에서 예수님이 이기면 그 때서야 승리를 선포하지만 그 전까지는 개입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우리를 구원하는 낮의 수고라면 성부 하나님의 매정한 외면은 우리 구원을 위한 밤이었습니다.
③ 과제로 둘 부분
어느 한 쪽도 없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길러 가시는 면을 살피면 그 내면에 목적과 이유와 배경을 전부 살펴 낼 수가 있습니다.
⑵ 양면의 목적
① 온전성의 목적
우리를 양면으로 기르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목적 세계에서 찾아야 합니다. 하나
님과 같은 완전자를 만드는 데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피조물이나 창조주와 일반 피조물 사이에 중보입니다. 하나님의 세계도 알아야 하고 피조물의 세계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정도 알아야 하고 피조물의 낮은 세계와 고통과 그들의 필요와 그들의 간구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아닌데 하나님처럼 하나님의 위치에서 마치 우리가 전능자처럼 완전자 자존자처럼 주인처럼 피조물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지도를 하고 통치를 해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께 한량 없이 부족한 존재로 나약하고 어떤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오직 주실 것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오로지 순종만 할 뿐입니다.
② 창조의 모든 향방
시공 세계의 첫 존재로 드러 난 빛은 그 자체도 우리에게 주신 별도의 선물이면서 동시에 그 빛과 어두움이 만드는 낮과 밤으로 된 하루는 향후 하나님께서 만드실 모든 창조의 내용과 과정과 성격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단일성의 하나님이시니 어느 행동 하나를 가지고 연구해도 하나님을 연구할 수 있고, 하나님을 알면 하나님의 행동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창조하실 모든 것을 다 알 수가 있습니다. 첫 날의 빛과 어두움의 창조는 모든 창조의 방향을 알리고 있으니 하나님의 모든 행위는 늘 그 행위는 행위대로 우리에게 중요하고 한 편으로 모든 행위는 향후 이어 지는 하나님의 역사의 방향을 알리고 있다는 것도 동시에 알아야 하겠습니다.
사울 왕에 대해 하나님께서 상대하신 것은 사울 왕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이후 모든 왕들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역사 방향과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신약의 우리가 우리 현실에서 어떻게 왕으로 살아야 하며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우리와 어떤 관계를 가지게 되는가?
창조의 첫 날에 처음 만든 빛과 어두움을 통해 다른 날들의 창조를 아는 데도 많은 것을 알 수가 있고 또한 이 창조의 첫 6 일은 겉 모습은 이 때 한 번으로 창조가 끝이 나지만 이 창조가 끝이 나면 이후에 재창조의 모습으로 또는 섭리라는 이름으로 하나님께서 만물을 운영하며 오늘 우리에게도 그 창조물이 우리 환경이 되게 하셨는데, 우리가 오늘 접하는 환경은 겉 모습은 6천 년 전에 처음 만들어 졌던 그 것의 변형이거나 위치 변경 정도라고 생각하는 데 그치면 곤란합니다. 우리의 매 현실 그 자체는 역사에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모습과 내용입니다. 이런 점에서 모든 현실은 항상 창세기 1장을 읽고 1장에서 알려 주신 것을 가지고 샅샅이 뒤져야 하며, 그 중에서도 창조의 첫 순서인 빛과 어두움 그리고 그 것으로 만드신 낮과 밤은 우리가 평생 살면서 만나는 모든 현실의 단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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