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헌 - 공회 찬송가 인물
[찬송] 유재헌 목사님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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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헌 목사님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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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02
유재헌 목사의 창작 복음성가
글 : 오소운 목사
해방의 감격과 함께 한국 교회는 각처에서 회개 운동과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이 때 부흥사로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이가 유재헌(劉載獻, 1905. 3. 21 ~ 1951 공산군에게 피납 순교) 목사이다.
그는 경기도 용인 김량장(金良場) 태생이다. 그의 부친 유흥렬(劉興烈) 장로는 필자의 선친 오연영(吳連泳) 장로와 호형호제(呼兄呼弟)하는 사이였고, 유 목사의 처가가 내 고향 아리실(牙利室)이다.
그는 일본 고베(神戶) 신학교를 마치고 고베에서 목회하며 부흥사로 활동했는데, 교포들에게 애국사상을 전한다는 죄목으로 잡혀 고베 유치장에 수감되어 있다가, 조선으로 추방된 지 얼마 안 되어 해방을 맞았다.
1944년 12월, 그는 내 고향 아리실교회에서 부흥회를 하였는데, 설교 도중 우렁찬 바리톤으로 자작 ?복음성가?를 부르는데, 어찌나 은혜스러운지 그 전율적인 감동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그의 복음성가에 매료된 나는, 장차 그분과 같은 찬송가 작가가 되리라 다짐해 오늘에 이르렀다.
등사판으로 긁어 인쇄한 그의 ?복음성가? 책에는 그가 찬송가 가락에 맞춰 지은 주옥같은 성가들이 114편이나 실려 있었다. 매 편마다 끝에 작사 연월과 장소를 적어 놓았는데, 맨 처음 작사는 1939년 봄 일본의「시오야?학사(鹽屋學舍)에서 작사한 것이다.「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곡조에 맞춘 이 찬송은,「내 신랑 예수여?란 제목의 5절 가사인데, 작사 동기가 애절하다.
일찍이 경신학교를 나온 인텔리 유재헌은 아버지의 권유에 못 이겨 결혼을 하였으나 불만이었다. 참다못해 일본으로 건너가서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었는데, 왜경의 핍박은 심해가고 몸까지 병들었는데 고향으로도 못 가고, 처절한 심정으로 이 노래를 작사하였다. 첫 마디가「나, 세상 발붙일 곳 없네?란 고백이다. 2절까지만 인용한다.
내 신랑 예수여
ㅡ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곡 ㅡ
<1절>
나 세상 발붙일 곳 없네. 내 나라는 위에 있다.
천국에 가기 원합니다. 내 임금 예수여.
내 비록 세상에 있으나 그 나라 그 의를 위하여
충절을 굳게 지키리다. 내 임금 예수여.
<2절>
약하고 병든 이 몸 보고 위로해줄 친구 없네.
주님만 의지하옵니다. 내 친구 예수여.
친구여, 지신 그 십자가 얼마나 무겁사오리까?
한 어깨 나도 메오리다. 내 친구 예수여.
3절은「내 주인 예수여?, 4절은「아버지 하나님?, 5절은「내 신랑 예수여?로 끝마치고 있다.
이 찬송을 시작으로 그는 주옥같은 신앙시를, 마치 누에가 명주실을 뽑아내듯, 줄줄 뽑아내었는데, 그의 대표작으로서 고베 유치장에서 작사한 찬송을 소개한다.
예수는 내 생명
ㅡ 예수 나를 위하여 곡 ㅡ
<1절>
목마른 사슴이가 물을 찾음 같이
갈급한 내 심령은 예수 찾았다네.
<후렴>
예수여 예수여 내 중심에 오소서.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옵니다.
<2절>
물을 떠난 고기가 혹시 산다 해도
예수 떠난 심령은 사는 법이 없네.
<3절>
예수 밖에 이 몸을 동정할 자 없고
예수 밖에 이 몸은 믿을 자도 없네.
<4절>
예수여 내 다리로 방문해 줍시고
예수여 내 입으로 말씀 전합소서.
<5절>
칠보단장한 처녀 때를 바람 같이
속죄 성결한 나도 일각여삼추(一刻如三秋)라.
<6절>
동남?아 불어라 서북풍도 불어라.
가시밭의 백합화 예수 향만 피네.
<7절>
예수 죽음 내 죽음 그 부활도 내 부활
예수 승천 내 숭천 그 천당도 내것.
-火壇 作. 1941年 3月 神戶 경찰서 유치장에서
유재헌 목사는 복음성가 매 장마다 그의 아호인, 엘리야의「불제단?인「火壇?을 써서「火壇 作?이라 쓰고, 작사 연월과 장소를 적어 놓았는데, 39장의「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에는「1941年 冬 馬山에서?라고 적어놓고,「火壇 꾸밈?이라고 표기하여 당신의 원작이 아님을 밝혀놓았다.
다른 가사들은 모두 찬송 몇 장 곡조로 부르라고 지정해 놓았지만, 여기는 그게 없다. 왜일까? 그 곡조는 너무도 유명하여 전국 성도들이 애창하는, 마산 출신 이일래(李一來, 1903-1979) 선생이 작곡한 곡조이기 때문이다.
순교자 주기철 목사가 시무하던 마산문창교회에 부흥강사로 간 유 목사는, 찬양대 지휘자 이일래가 작곡한 이 노래를 보고, 시편 23편 앞 부분만 있는 게 부족하다 싶어 나머지 시편도 운문화 하였던 것이다.
이 찬송의「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의 작곡자 이일래는 1930년 연희전문 수물학과를 졸업, 경남 창녕군 이방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고향인 마산에서 고아원을 운영하다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경상북도 초대 상공국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은퇴 후 서울과 양주군 등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79년 7월 10일에 작고하였다.
그는 1938년 자신의 동요곡을 엮은《朝鮮童謠作曲集》을 출판하였는데, 21곡이 실려 있는 이 작곡집에는 동요「산토끼?가 실려 있고, 맨 끝 곡으로「시편 23편?이 실려 있다. (아래 그림 참조).
「산토끼?는 이일래가 창녕의 이방국민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던 1928년, 학교 뒷산인 토장산에 갓난 딸을 안고 놀러 갔다가, 산토끼 한 마리가 뛰어 가는 것을 보고 작사, 작곡을 한 것이다.「산토끼?는 굶주리는 당시 조선 백성을 상징한 애국동요라는 평가다.
1978년 그의 제자들과 창녕군의 교사들이 작곡 50주년 기념으로 이방초등학교에 노래비를 세웠다. 출판 당시 그는 마산에 있었던 호주선교원의 어학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림에서 보는 대로 이일래는「여호와?란 신명을 안 쓰고 어린이에게 친밀한 ?하느님?을 썼다. 그런데 유 목사는 1절에서 ?하느님?을 ?여호와?로 이름만 바꾸고, 시편 나머지를 운문화했던 것이다. 그 가사를 보자. 1절 운에 맞춰 띄어쓰기를 한다.
이일래 선생이 작곡한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악보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로 하여금 푸른 풀밭에 눕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으로 인도하여주시네.
<2절>
나의영혼 을회복하 시고
자기 이름을위 하사공의의
길로 인도하 시도다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주여).
<3절>
해받음을 두려워안 함은
주께서나 와함 께계심이라.
주의 막대와 주의 지팽이 나를 참안위
하시나 이다주님 께서나를 위하여.
<4절>
원수 앞에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머 리에부시니
나의 이잔이 넘치나이다 진실로 선과
인자하 심이나의 사는날까 지나를.
<5절>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전에 영원토록 거하리로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사랑하시사
목숨을 버리시니 진정감사 합니다.
ㅡ 火壇 꾸밈. 1941년 冬 馬山에서
1절 리듬에 맞추느라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나 너무 어색하여 ?火壇 꾸밈?이라고 표기한 것 같다.
그런데 1953년에 나온《어린이 찬송가》 60장에는 석진영 작사로 된 다음과 같은 가사가 있다. 1절은 이일래 가사 그대로이고 2-3 절을 창작하였다.
<2절>
내 영혼을 구원하시오니
내게 감사함이 넘치나이다.
나로 하여금 모든 고난을 참게 하시며
하늘의 평안을 입게 하여 주시네.
<3절>
여호와는 함께 하시오니
내게 두려움이 없으리로다.
나로 하여금 땅에 살아도 진리 안에서
이기고 이기게 항상 능력 주시네.
유재헌 목사 가사보다는 곡조의 리듬과는 잘 맞지만, 시편 내용과는 동떨어져 버렸다.《어린이 찬송가, 1953》편찬자인 박재훈 목사는 그의 근저《내 마음 작은 갈릴리》(16쪽 이하)에서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이 책을 처음 기획할 당시(1951~1953, 부산) 내가 주로 이 일을 계획 추진했고, 울산에서 교편을 잡고 일하시던 석진영 선생님께서 이 책의 가사 쪽을 봐주셨다. 내가 1938년 처음으로 평양에 갔을 때, 평양 유일의 기독서점이었던 ?인덕서점?에서 그 해 첫 출판되었던 이일래(李一來) 선생님의《조선동요작곡집》을 산 적이 있다. 이일래 선생님은 연희전문 출신으로 마산에서 어느 교회 성가대 지휘를 하신 분이셨다. 모든 것은 다 잊었지만, 이 책에 들어 있던 한 곡조, ?시편 23편?의 멜로디와 가사는 내게 오랜 동안 남아 있었다. 그래서 이 찬미를 어린이 찬송가에 넣을 생각을 했고, 또 넣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본래 시편 23편은 우리말로는 산문이기 때문에, 본래의 이일래 선생님의 멜로디와 가사 붙임에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석 선생님께 부탁하여 1절은 대개 성구를 그대로 붙여봤지만, 2, 3절은 1절 리듬에 맞게 우리 감정에 맞도록 가사를 새로 다듬어 쓴 것이다. 여호와라는 신명(神名)도 어린이들에게는 하나님이라 부르게 만들었고, 이 노래 곡조는 내가 외우고 있던 멜로디대로 다 살렸지만, 반주는 내가 다시 붙여 넣게 된 것이다(하략).
이 찬송은 최근 한국찬송가공회에서 발행된《21세기 찬송가》568장에도 석진영 작사로 실려 있다.
1972년, 한국찬송가위원회에서《찬송가(어린이용)》을 편집할 때, 나는 편집 전문위원으로 위촉되어 편집에 임하였다. 그런데《어린이 찬송가, 1953》의 곡조는 물론《어린이 찬송가》란 이름도 사용이 거부되어, 궁여지책으로《찬송가(어린이용), 1973》이라는 이름으로 내게 되었는데, 이일래 선생의《朝鮮童謠作曲集》을 가지고 있는 나는 거기 있는 대로 가사를 1절만으로 하여, 제152장에 넣어 대한기독교서회 발행으로 출판하였다.
뿐만 아니라 내가 애창하던 ?하나님이 세상을?이란 노래도 채보(採譜)하여 나운영 박사 편곡으로 54장에 넣었다. 그리고 이일래 선생에게 책을 보내 드렸더니 고맙다는 답장과 함께, ?하나님이 세상을?의 작곡자도 자신임을 알려왔다. 또 ?시편 23편?은 처음 발표 때에는 1절만 넣었었는데, 후에 자신이 2-3절을 추가한 게 있으니 참고하라며 가사를 보내왔다.
그리하여 1979년《어린이 찬송가》개정 때, ?하나님이 세상을?(183장)의 요3:16은 1절로, ?주 예수를 믿으라?의 행 16:31은 2절로 하여 이일래 작곡으로 실렸고, ?시편 23편?(179장)도 그의 2-3절 가사를 실렸는데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2절>
나의 영혼 다시 살리시고
바른 길로 나를 인도하시네
주의 지팡이 주의 막대기 나를 지키니
조금도 두렵잖네. 주님 함께 계시니
<3절>
주님께서 나의 원수 앞에
크신 상을 차려 내려주시며
내 머리 위에 기름 부어서 넘쳐 흐르니
내 평생 주의 집에 영원토록 살리라. 아멘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절대로 작품의 우열을 평가하려는 게 아니다. ?최선의 것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자!? 라는 필자의 신념일 뿐이다.
유재헌 목사의 이 복음 성가들은 해방 직후부터 교파를 초월하여 전국 각 교회에서 애창되었다. 그의 마지막 찬송은, 공산군이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가던 때인, 1950년 7월 11일에 작사한 ?순교자의 깃발?이란 찬송이다.
순교자의 깃발
(293장 ‘천국에서 만나보자’ 곡)
<1절>
나를 위해 우리 주님 피땀 눈물 다 바쳐
속죄하여 주셨으니 이 몸 주께 드리네.
<후렴>
동족 위해 달게 죽자. 불쌍한 죄인 구령 위하여
주님 위해 달게 죽자. 그 사랑 갚아 영광 돌리자.
<2절>
나의 재물 가져가라. 가난한 자 복 있다.
물욕으로 인연하여 범죄하지 않겠다.
<3절>
나의 건강 뺏어가라. 주님 치료 받아서
더욱 새론 몸이 되어 강철 같이 굳세리.
<4절>
나를 갖다 옥에 넣라. 고요한 중 엎드려
제단 쌓고 신비롭게 주와 교제하련다.
<5절>
나의 뼈를 꺾어 가라. 육의 뼈는 꺾어도
나의 신앙 뼈까지는 꺾지 못할 것이다.
<7절>
나의 목을 잘라가라. 순교자의 면류관
나까지도 쓰고 가니 할렐루야 승리다.
ㅡ火壇 作. 1950年 7月 11日
참으로 피를 끓게 하는 승리의 찬가 아닌가! 이 찬송은 그의 ?복음성가? 106장에 실려 있다. 그는 피난도 가지 않고 자기가 창설한 대한수도원을 지키며 기도하다가, 이 찬송 가사 그대로, 작사한지 35일 후인 1950년 8월 15일에 납북 당하여 만주에서 순교하였다.
한국 복음성가의 선구자는 이렇게 하여 영광스런 순교자의 반열에 참여하였다. 우리 후배들에게 자기 뒤를 이어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라!? 외치는 그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아래 사진은 유재헌 목사님이 납북되실 때 4살이던 막내 따님, 유정심 사모가 보내온 그의 가족사진이다. 엄마 품에 안긴 아기가 유정심 사모다.
맹꽁이 찬양 블러그 에서 발취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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