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패전했다면 - 86.8.4.월밤
예수님이 사단에게 졌다면 - 아담과 예수님의 시험의 배경과 성격
형식: 교리 논문 (기독론/사단과 전투)
연구: 1986.8.4.13 설교 초반에서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 예수님의 전투에 관련 된 대속
주제: 하나님의 목적 과정에 나타 난 인간의 범죄와 예수님의 대속 및 사단의 전투
단초:
택자는 하나님의 목적 대상이며 그 내용은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자유성을 가져야 했고, 사단은 영계 하늘 나라에서 하나님 자리를 노리다가 쫓겨 났고, 우주의 주인공인 아담을 점령하여 그 주인이 되었다가 이를 구하러 오신 예수님과 생사 결투를 벌였다가 패전하여 그 종이 됨.
문제:
- 아담의 자유성이 필요한가
- 천사장의 타락이 필요한 이유와 이어 진 다른 타락은 없는가
- 선악과를 만들고 사단의 시험이 필요했는가
- 아담과 사단의 시험은 공의로웠는가, 어떤 상황으로 시작 되고 진행 되고 종결 되었는가
-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 예수님의 도전을 사단이 받아 들인 이유와 승산은
- 예수님이 패전을 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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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의 목적
- 배경
하나님은 자존자 완전자이니 우리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서 우리를 만든 것이 아니라, 자존의 기쁨으로 우리를 사랑함으로 우리를 만들기로 목적을 정하셨습니다.
- 내용
하나님은 완전자며 사랑이시니 우리를 만들 때 최상의 완전자로 만들기로 했으며, 그 모습은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에서 살필 수 있습니다. "아들"로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의 내용입니다. 아들이란 아버지가 만들고 아버지를 닮았으며 아버지와 같은 본질이고 자라 가면서 아버지를 이어 받는 존재입니다. 신성 하나님과 피조물 우리는 다른 존재지만 이 사실 하나를 빼 놓으며 마치 부모와 자녀가 같듯이 우리는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만들어 졌습니다.
- 자유성
하나님은 아니나 만물에게는 꼭 하나님과 같은 존재를 목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습니다. 하나님이 가진 속성을 빼다 박은 존재가 우리들입니다. 많은 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성입니다. 하나님은 자존자 완전자인 동시에 그 분은 자유성을 가졌습니다. 뭐든지 하나님 마음대로입니다. 우리를 만들 때 아버지와 아들 사이로 만들었다면 우리에게도 자유성이 주어 져야 합니다.
만일 자유성이 없는 존재로 만들어 진다면 마치 소처럼 경운기처럼 또는 종업원처럼 될 것입니다. 순종하고 일하는 능률로 말하면 경운기지만 이 것은 기계여서 불편할 때가 있고, 소는 경운기만은 못해도 생물체여서 뭔가 나은 점이 있습니다. 종업원은 아무리 훌륭하고 똑똑해도 자기 것을 다 넘겨 주고 자기 자리에 앉히는 일은 없습니다. 그냥 부려 먹는데 기계나 짐승과 달리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있어 아주 편리하고 효율적이라는 점이 특별합니다.
우리를 만들기로 목적을 정하신 하나님은 완전자 사랑의 하나님이시므로 우리를 최상의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니나 하나님처럼,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며 행동하는 자유성의 존재를 핵심에 두었습니다. 자유성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상대로 스스로 감사하고 찬송하며 의논하고 은혜를 구하며 심부름하고 하나님의 원하는 모든 일을 하는 것이 우리를 만든 목적이며 향방입니다.
이렇게 만든 우리에게 하나님은 영계와 우주를 무대로 주셔서 만물에게 영원히 하나님 노릇을 하되 실력으로 인격으로 실제로 그렇게 하게 하고 이로 인해 만존재가 영원토록 우리를 인해 기쁘하고 즐거워 하며 감사하면서 이 모든 은혜를 하나님께 돌리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모습을 보며 영원토록 흐뭇해 하시고 싶은 분이 하나님입니다.
- 만물
만물을 우리에게 주시며 우리의 훈련 과정이면서 우리의 기초 세계가 될 물질로 된 우주와 그 모든 것을 우선 주셨고, 그리고 우리의 본 활동 무대가 될 신령한 세계는 영물로 만들고 영적 존재로만 가득 채웠으니 영계의 천국과 그 곳에 있는 만물입니다. 우주와 물질계 만물들, 그리고 영계와 신령한 영물들을 우리의 통치 대상으로 우리의 활동 무대로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우리의 활용물로 주셨습니다.
이 우주와 영계를 만들면서 하나님은 조직과 체계 및 법과 운영을 세웠습니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라 질서와 순서와 깨끗과 원칙과 집행을 가진 분입니다. 당신의 속성이 그러하고 그 속성으로 만든 만물이 그러합니다. 우주에는 고등 동물을 비롯한 각종 동물이 위치에 따라 지역과 역할과 사명을 따라 완벽하게 포진해 있고 또 식물 역시 동물 다음 위치에서 종류 별로 사명을 따라 다양하게 완벽하게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무생물들이 돌로부터 태양 바다 우주의 여러 별들에 이르기까지 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세밀히 살핀다면 어느 돌 하나와 동식물의 세포가 어느 한 곳에라도 비거나 문제가 없습니다. 그리고 천국에는 천군 천사와 영물들이 마치 이 세상의 구성처럼 되어 있으되 그 대신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광대하며 초월해 있습니다. 물질계로 된 세상은 영계에 비하면 하나의 그림자 정도입니다. 영계는 그 종류도 차원도 역할도 모든 면에서 무한하다 할 만큼 많고 넘칩니다. 시공을 초월한 세상의 광대한 그 끝은 오늘 우리로서 따로 살필 정도는 아닙니다.
- 공의성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공의로운 분입니다. 편파가 없고 모순이 없으며 불법이 없으신 분입니다. 세상의 임금처럼 실력은 없으나 제 자식이라 해서 무조건 임금 자리에 올려 놓았다가 자타가 망하거나 불행 지게 하는 일은 하지도 않으시고 할 수도 없습니다. 만들기는 하나님의 목적 대상으로 만들었으니 우리의 자리는 하나님 다음 가는 위치며, 아들의 지위며, 우주 영계의 영원한 통치자의 직분이나 그 자리에 앉히고 그 자리에서 실제 그 일을 수행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자유성"을 주신 존재이니 우리에게 자유성으로 그 자리를 감당할 수 있도록 기회는 주시되 그 실력은 스스로 챙겨서 가지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정당하며 당연한 과정을 위해 하나님은 천사장의 타락을 기획했습니다. 우주가 아니라 영계, 영계 중에서도 일반 영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최고의 비서직에 있는 천사, 천사들 중에서도 최고의 지도자 위치에 있는 천사장에게 그의 자유성으로 그가 원하는 것을 다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아직 우리는 어렸고 그가 상대하여 차지하고 싶었던 것은 하나님 자리였습니다.
최고의 존재가 있는 힘을 다하여 반대하고 막고 나설 때 이를 넘어 서고 이기고 이를 제압할 수 있어야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괜히 이름만 아들이거나 대리 통치자가 아니라 실제 하나님처럼 그 내용이 은혜적이며 실력적이며 실상적일 것이고 그리 되어야 완전한 나라의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영생이 펼쳐 질 것입니다.
2. 아담의 타락
(1) 천사장
- 위치
영계 하늘 나라에 하나님을 모시고 제2인자의 자리를 차지한 천사장의 권세는 이 세상이 다 끝나고 영생의 나라가 시작 될 때의 우리의 영원한 모습에 비교 될 정도였습니다. 천사 하나가 이 우주의 한 분야를 맡아 좌지우지 하는 정도인데 그런 천사들을 다 거느리고 영계에서 장차 오게 될 우리가 오기 전에 미리 우리를 위해 비워 둔 자리를 임시 맡고 있던 것이 천사장입니다. 천사장은 주인의 어린 아들이 자라서 아버지를 잇는 후계자가 되면 대를 이어 충성할 머슴이지만 아직 이 세상의 창조조차 끝나지 않은 시점, 이제 막 창조 된 세상에서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담과 우리들, 이들의 성장 과정에서는 천사장이 장차 차지할 우리 자리를 미리 대신 맡아 자기가 아들인지 일시 맡고 있는 머슴인지 착각할 상황입니다.
우주 전체를 뒤 흔들 수 있는 것이 천사 하나의 위력인데 이런 천사들을 모두 수하에 두고 천군들을 거느리고 영계에서 신령한 만물 전부를 지휘하며 하나님을 대신하던 천사장은 그 탁월하면서도 엄청 난 일을 처리하기 위해 또 훗날 우리를 보좌하는 데 필요하여 마치 우리가 가진 자유성과 같은 자유성을 받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자유성과 굳이 구별을 한다면 우리는 아들의 자유성이고 천사들은 종업원으로서의 자유성입니다. 같은 인간이지만 사장의 아들은 사장이 될 사람이고 그 회사의 현재 임원 종업원들은 월급을 받는 일꾼들이며 대를 이어 사장님을 모실 인재들이며 그 직책을 위해 선발 된 탁월한 사람들이지만 어디까지나 사장님의 가정을 중심으로 평가한다면 기계나 소나 종업원이나 역할과 위치와 실력만 다를 뿐이지 본질적으로는 동일합니다.
- 변질
우리를 위해 하나님은 제대로 된 상대를 하나 만들어 풀어 놓았습니다. 천사장은 우리의 영과 같은 영적 존재이니 존재적으로는 동등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라 가면 천사장을 능가할 것이나 창조 초기 아담은 걸음마를 하는 정도이고 천사장은 이미 우주와 영계에 하나님처럼 행세하는 아득히 높은 실력을 가졌습니다. 이 천사장이 타락을 하고 아담과 목숨을 건 실전을 벌이게 된다면 하나님의 목적은 봐 주기 시비에 휩싸이거나 아니면 만물이 순종은 하지만 우리의 실력이 형편 없어 엉망이 되는 그런 일이 없고 실제 실력 있는 우리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대등하면서도 우리의 실력을 제대로 기를 수 있는 가장 최상의 존재는 바로 천사장이었고 이 천사장 하나를 하나님께서 그가 가진 자유성으로 그에게 하나님을 맞서, 하나님의 목적에 도전하여, 하나님과 그 아들 우리를 대신 차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리까지 내어 주는 극단을 상정하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우리를 위해 천사장의 변심을 허락했습니다. 천사는 자유성이 있으므로 그의 기준에서 보면 그가 기회를 보고 변심을 했고, 하나님은 이미 예정해 두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장차 올 그 아들을 위해 하나님의 집에 청지기로 있어야 할 천사장이 아들은 어리고 그 아들을 위해 그 아들 때문에 하나님의 본질적 자유가 스스로 제한 되는 면을 보고 그 아들이 앉을 자리를 대신 꿰차고 들어 갈 마음을 먹습니다. 안목의 정욕이라는 죄가 있습니다. 보고 접하면 욕심이 생기는 법입니다. 하늘에서 천사장이 자기를 따르는 직할 천사들을 모아 청지기의 위치에서 이탈하였다가 하나님께 버림을 받습니다. 영계 하늘 나라에 있을 곳이 없어 내어 쫓기는데 바로 이 때에 세상에서는 천지가 창조 되고 아담이 만들어 지며 그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이제 막 첫 걸음을 하는 순간입니다. 영계에서는 쫓겨 났고 우주에는 아직 들어 갈 틈이 없는 이 때를 가르쳐 성경은 공중이라고 합니다. 하늘 나라에서 쫓겨 난 사단이 공중에 머물며 지상의 교회를 지켜 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뿐이었다면 한 번 변질 되어 맞서다 실패하면 무조건 영원한 흑암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목적 대상으로 삼고 길러 가는 과정에서 학교를 보낸 부모가 아무리 실력이 있다 해도 아들의 교육 때문에 아들의 성장 과정 때문에 아들에게 잘못 영향을 미칠까 싶어 만사를 조심하고 절제하며 쓸 수 있는 권리도 조절하는 법인데 하나님의 일반 능력과 처리를 두고 말하면 천사장의 타락은 그 즉시 처결할 수 있으나 아담을 길러 가야 하기 때문에 영계에서만 내 쫓았습니다. 그리고 천사장은 비록 영계에서는 쫓겨 났지만 이 세상에서 앞 날을 위해 첫 걸음을 시작한 아담과 인류 역사가 자기 앞에 놓여 있고 이들을 상대한다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므로 그가 자기 종업원으로서 받은 자유성을 가지고 아들의 자리를 노리고 한 번 모험을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천사장의 타락은 그 자신으로서도 마지 못해서 항거의 자리로 밀려 난 것이 아니라 그가 원하여 스스로 결정하고 나선 일입니다.
- 기회
천사장은 기계가 아니며 동물처럼 이성이 뒤로 가고 욕심의 본능이 앞 서 가는 수준 낮은 존재가 아닙니다. 이성이 앞 서 가면서 철저하게 계산하는 존재입니다. 하늘에서 쫓겨 난 다음 아직 우주에 발을 붙일 때가 아니어서 지켜 보고 있었습니다. 우주로 말하면 창조의 진행 중간에는 천사장 사단이 내려 와서 차지할 공간이 없습니다. 우주는 물질계입니다. 이 물질계 만물 중에서 영적 존재인 사단에게 손발이 되어 우주를 다스리도록 할 수 있는 존재는 인간의 마음뿐입니다. 물질계의 모든 존재는 각자 자기 위치가 있고 사명이 있으나 그 최상층으로 올라 가면 아담이 있습니다. 아담만이 영을 가진 존재이며 이 영이 하나님께 붙들려 아담의 마음과 몸을 통해 우주 모든 만물에게 왕 노릇을 합니다. 마치 눈과 귀가 없으면 사람은 자기 인체 밖의 것을 전혀 인지할 수 없고 또 입과 손발이 없으면 자기 하고 싶은 말과 행동을 전혀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영적 존재로만 된 천사장은 비록 그 실력이 아무리 만물 전체 중에서 으뜸이라 해도 일단 영계에서 최고의 실력자가 되어 영계는 다스릴 수 있고 또 물질계 우주에 들어 왔다면 물질계를 다스리도록 만들어 놓은 인간의 마음과 몸을 가지고 왕 노릇을 하지 인간의 마음과 몸을 통하지 않는다면 내용적으로 속속들이 왕노릇은 하지 못하고 그냥 외부로만 거쳐 갈 뿐입니다. 공격이 피부나 상하게 하는 정도지 속병을 들게 해서 확실하게 죽이는 일은 하지 못합니다. 아담의 범죄 전에 뱀을 입고 온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천지가 창조 되고 아담과 하와가 다 만들어 지고 이제 하나님께 에덴동산 통치권을 정식으로 받아 갖게 된 시점, 바로 이 시점부터가 사단은 아담과 싸워 아담을 점령함으로 이후 하나님의 위치를 노렸던 영계에서의 목적을 다시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입니다. 아담 없는 만물에게 사단이 왕노릇하는 것은 허공을 휘두를 뿐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만물 통치권을 맡기기 전에 아담을 붙들어 자기 것을 삼는 것은 마치 뱀을 자기 것으로 삼은 것처럼 아담의 몸을 일시 잡고 흔드는 것일 뿐입니다. 이런 일은 아담에게 이후 정식 싸움을 할 때 전투의 경험을 심는 것이니 사단이 그리 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로부터 지위와 권한을 넘겨 받지 못한 미성년자를 제 것으로 만들어 봐야 그 몸만 제 것이 되지 그 아버지가 넘여 줄 모든 것은 아직 부모 손에 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유성으로 아담에게 모든 것을 부여 하기 전에는 그 손에서 아담을 빼 낼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지켜 보다가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들고 에덴동산으로 이끄시고 만물 통치권을 주시면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 하신 말씀으로 이제 정말 자유성을 가지고 살 순간에 그 자유성으로 하나님께 스스로 붙들려 살면 영생이 있고 세상으로 내려 갈 사탄이 아담을 이길 수 없으나, 만일 자유성을 받았다 해서 그 자유성을 가지고 조금이라도 아담 마음대로 사용하면 하나님과 바로 끊어 지게 되고 그리 되면 끈 떨어 진 연과 같이 되는 법이니 선악의 기준은 하나님으로 삼고 그 것만은 아담의 것을 만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명령이 떨어 진 순간부터 사단은 언제든지 아담에게 빈 틈만 생기면 단 번의 기회로 삼키려고 노리고 있었습니다.
벧후2:29에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라 했습니다. 타락 후에 생긴 표현처럼 보이나 성경의 모든 성구는 아주 특별한 경우를 빼고는 항상 모든 상황에 함께 적용 됩니다. 사단의 생각에 확실하게 아담을 죄로 잡아 죽이고 종을 삼고 아담의 자리를 대신 차지할 수 있는 기회는 바로 여자인 하와 쪽으로 들어 가는 것이었습니다.
(2) 아담의 범죄
- 선악과
아담은 자유성을 가졌습니다. 이 것이 하나님의 목적의 핵심입니다. 이 자유성은 하나님을 배반해도 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겠다고 자원을 해도 되는 자유입니다. 이 자유성을 가지고 스스로 하나님께 붙들리고 종이 되면 하나님의 모든 것은 자기 것이 되고 자기의 자유는 참 된 완전 자유에 이르게 되나 그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을 떠나는 자유에 사용하면 그 순간은 죄악의 맛에 달겠지만 그 결과는 영원 지옥 형벌입니다. 아담이 비록 어리지만 이 자유성에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청하면 모든 것이 해결 되는 것이니 아담이 자기 자유성으로 하나님께만 붙들리면 모든 난제도 실력을 갖추는 것도 그리고 틈을 노리는 사단을 이기는 것조차 너무 쉽습니다. 따라서 공중에서 이 세상을 내려다 보며 틈을 찾고 있는 사단과의 싸움이 일대 일로 보면 실력 차이가 너무 커서 불공평하지만 이 싸움이 단순히 일대 일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을 마음대로 모시고 이기도록 주신 기회이므로 아담은 환영할 싸움입니다. 또한 이런 자유의 결정이라도 거쳐야 하나님의 공의와 완전 속성에서 아담을 원래 하나님께서 목표하신 자리에 올려 놓을 수 있습니다.
선악과는 선과 악을 말하고 먹는 문제는 아담이 선과 악을 자기 것으로 삼아 자기 좋은 대로 선악을 결정하겠다는 첫 출발이 됩니다. 만일 그리 된다면 아담은 아담의 하나님이 되고 하나님은 아담에게서 하나님 노릇하던 위치를 내 놓고 쫓겨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은 쉽고도 중요한 문제를 주면서 그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때 그 해결하는 실력을 붙들고 원래 목표를 향해 바로 나갈 수 있고, 사단은 바로 이 길목에서 아담을 잡아 챔으로 하늘에서 실패한 것을 만회하고 또 기회를 엿 볼 수가 있으니 선악과 문제는 아담과 사단과 하나님의 입장에서 각각 삼각접점의 전투장이었습니다.
- 빈 틈
의외로 기회는 빨리 왔고 쉽게 왔습니다. 아담으로서는 너무 쉽게 좋고 안심하던 상태에서 마치 항우가 풀잎에 쓰러 진 듯하는 꼴이 되어 버렸습니다. 완벽한 에덴동산이었고 그 내막은 하와가 아담을 그리고 아담은 하나님을 바라 보는 것으로 전부였습니다. 하와 마음에는 아담뿐이었고 아담 마음에는 하나님뿐이면 그 것으로 사탄은 들어 올 기회도 업고 에덴동산은 지상낙원이면서 장차 갈 하늘나라의 실상 전부를 마련하는 자리였습니다.
너무 쉬웠기 때문에 방심했고 너무 큰 은혜로 넘쳤기 때문에 하나님을 가볍게 봤습니다. 아담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긴장이 느슨해 졌고 아담과 하와 사이에 빈 틈이 생겼습니다. 바로 그 틈이 생기자 사단은 먼저 하와를 찾았습니다. 하와는 아담에게 붙들려 살도록 만들어 졌기 때문에 하와의 눈과 생각과 판단과 투쟁력은 아담에게 맡겨 져 있습니다. 이런 하와가 혼자 있으니 사단은 너무 쉽고 간단하게 끝 낼 것 같은 문제로 하와를 삼켰습니다. "참으로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선악과 하나만 금지했는데 얼토당토 않게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더냐고 충격을 주고 쉬운 문제를 쉽게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와는 사단의 심리전에 말렸고 선악과를 만지지도 말라 했고 죽을까 하노라 하셨다는 말로 대답하여 하나님의 하나뿐인 명령에 헛점을 만들었습니다. 바로 그 부분을 붙들고 먹는 날에는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말로 하와를 확실하게 끝장 내버렸습니다. 사단이 하늘에서 실패했던 바로 그 목적을 하와에게 대입 시켜 하와를 제 것으로 만들어 버림으로서 이제 기회는 다시 잡게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한 몸이면서 아담에게는 외부를 상대하고 판단하는 면을 가졌다면 하와는 아담의 속에 들어 앉아 아담의 내용을 챙기고 채우고 담는 일을 하는데, 하와를 삼킨 사단이 아담에게 하와를 통해 들어 가니까 아담은 제 것인 줄 알고 덜렁 삼켜 버렸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인류의 대표입니다. 우리 전부는 바로 하나님의 계약과 공의 앞에 아담을 대표로 세워 이 한 번의 전투에서 이기면 우리는 실력으로 자력으로 하나님의 목적하신 그 자리에 앉게 되는데 너무 방심하고 너무 쉽게 패전함으로 이제는 사단의 것이 되어 져 버렸습니다.
(3) 논점들
- 자유성을 주신 이유
여기서 우리는 왜 아담이 죄를 짓고 영원히 끝장 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자유성을 주셨던가, 왜 타락하게 만들었던가 라는 근본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연장처럼 컴퓨터처럼 또는 소처럼 만들지 않고 또 천사와 같은 재능 있는 종업원으로도 만들지 않고 당신을 닮고 당신을 대신하고 당신과 부모 자녀가 되어 살아 가는 존재를 만들어야 하나님의 전지전능으로 만들 수 있는 극상품이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과 완전성이 들어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으니 그렇게 되려면 자유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자유성을 주셨습니다.
- 사단이 필요한 이유
또 천사장의 타락 문제도 함께 해결이 됩니다. 우리를 그냥 원래 목적한 자리에 올려 놓지 않고 우리에게 자유성을 주셨으니 그 자유성을 가지고 스스로 하나님께 요청을 하고 하나님께 붙들림으로 사단을 이기고 그 이긴 승리와 자기 실적으로 만물을 다스리는 자리에 올라 가야 하니 이 과정에서 피조물 전체를 통괄하는 가장 강하고 실력 있고 실제로 생사를 걸고 싸울 상대가 필요했기 때문에 천사장을 만들고 또한 반역하여 하나님을 대항하고 아담과 싸울 존재로 만든 것입니다.
- 사단이 억울하다 한다면
그렇다면 사단은 하나님과 그 아들을 위해 공연히 만들어 졌고 공연히 타락하고 비참하게 쓰임 받고 끝이 나는 신세만 가지게 되었으니 사단의 억울함이 호소가 된다면 하나님의 공의, 공의의 하나님에게는 흠과 점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두고도 우리는 이미 살펴 봤습니다. 사단은 자유성을 가지고 스스로 자기의 가능성과 성패의 예측을 했고 원하는 마음으로 머슴의 우두머리 자리에 머물지 않고 그 이상을 추구했습니다. 또 실제 이길 확률은 너무 높았습니다. 하나님만을 상대한다면 불가능하나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이제 막 만들고 이 아들에게 모든 것이 묶여 있기 때문에 아버지가 아들을 기르는 이 틈에서 기회를 찾는다면 사단은 해봄 직하여 서슴없이 나선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도전
(1) 인간 타락
- 사랑
우리를 목적 대상으로 만들고 자유성을 주신 것까지는 충분히 살펴 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설명은 목적의 외부만을 관찰한 것일 뿐입니다. 실제 우리에게 자유성을 주시고 타락하게 한 이유는 그 목적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만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타락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우리 사랑은 아주 간단한 사랑으로 끝 날 뻔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타락함으로 인해 하나님은 사람이 되어 와야 했고 십자가에서 죽어야 했고 우리가 당할 영원한 형벌 전부를 다 겪고 없애고 그리고 우리 대신 부활을 하여 영원히 인간의 몸을 입는 불편을 다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지능을 가진 로봇으로 우리를 만들었다면 제작과 운영비만 들면 되나 학교를 가서 사고를 치고 감옥에 간 아이를 위해서는 부모가 해야 할 일은 말할 수 없이 크고 많습니다. 그대신 로봇과 감옥 갔던 아이의 감사는 천지 차이일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하나님으로서 가장 많은 것을 쏟아 부을 수 있는 방법, 하나님으로서 말하자면 전부를 다 주실 수 있는 방법, 그 것이 바로 우리의 타락과 구원 과정에 필요한 하나님의 헌신이며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사람 되어 왔고 그 사람이 우리 위해 다 바쳐 졌으니 굳이 말하자면 하나님은 당신의 전부를 남김 없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조건 없이 주신 이 것을 사랑이라 합니다. 그는 우리를 사랑했습니다.
- 양면
우리를 타락 시킨 또 하나의 이유는 양면을 다 알게 함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그 은혜로만 사는 존재와 그 품을 떠난 세계를 구경한 존재는 하나님을 아는 차원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귀한지 지식적으로 실감적으로 비판 평가를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말이 아니라 진정 원하고 원하는 자세로 감사하게 됩니다. 이 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진정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게 하고 하나님으로 즐거워 하게 만드는 시작이 됩니다.
또한 우리가 맡아 다스릴 영원한 세계의 만물에게 우리가 일방의 사람이 되지 않고 양면을 다 알고 전면을 파악하여 원만한 인격인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됩니다. 이 면과 저 면과 모든 면으로 다 따져 봐도 우리에게 주시는 고난은 잠깐이요 우리의 실력과 영광은 영원하도록 하기 위해 전지 전능자가 전적 사랑 때문에 목적과 그 내용과 그 전개 과정을 이렇게 해 놓은 것입니다.
(2) 도성인신
- 신인양성일위
이미 아담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원하여 죄를 지었고 사단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인간 스스로는 다 범죄하고 죽어 있으니 재론과 재기의 기회는 없습니다. 길이 오직 하나 있으니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다면 외부는 아담의 죄를 대신할 사람이며 내부로는 하나님이 하나 되어 있으니 아담뿐 아니라 천하 모든 택자를 다 구해 낼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조건 때문에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과 완전한 하나님으로 구성 되어 있습니다. 두 분이 손을 잡고 오신 것이 아니요 일시 한 분으로 움직이다가 일이 끝 난 뒤에는 나뉠 사이가 아니라 완전히 한 분이 되었습니다. 그래야 우리를 대신하되 우리를 영원히 대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길이 열렸으나 하나님은 사람이 되어야 하고, 사단 앞에 죄인이 되고 소유물이 되어 난도질을 당해야 하고, 그런데도 어떤 죄도 짓지를 말아야 하는 극난의 고난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완전하고 영원한 단번의 하나 됨이 예수님으로 나타 났습니다. 예수님의 외부는 구원의 역사를 위해 오신 구세주요 그 내부 구성은 신인양성일위입니다. 그리고 그 오신 자격과 신분은 죄를 지은 우리를 구하려 오셨으니 예수님은 하나님의 법 앞에 죄 지은 아담 꼴이 되었고 사단 앞에는 사단의 죄 사슬에 묶여 자유 없는 종이 된 것입니다.
- 영원한 희생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 제2위 성자 하나님의 희생입니다만 삼위 하나님은 일체 하나님이시니 실제로는 한 분 하나님의 수고와 고난은 삼위 하나님께 어떤 형태로든지 동참의 문제가 생깁니다. 아들이 찬 얼음 위에서 벌을 쓰고 있다면 친 아버지라면 따뜻한 방 안에 앉아 있을지라도 그 고통이 차라리 얼음 위에 함께 앉는 고생보다 더한 일입니다. 일단 성자 하나님은 예수님의 인성과 한 몸이 되었으므로 마치 몸에 들어 오는 고통이 마음에 그대로 전달 되듯이, 마음의 번민은 위장과 육체의 독이 되어 그대로 영향을 미치듯이 예수님의 인성의 고난의 길에는 성자 하나님의 고통이 그냥 말로만이 아니라 한 분의 한 부분에 대한 고통으로 다른 모든 부분이 겪는 그 고통을 당하는 상태였습니다.
이런 고생과 고난의 길을 걸어 가신 예수님의 도성인신에는 과거 인성 없이 신성의 하나님으로 계시던 시기의 영광과 자유와 부요를 다 내어 놓아야 했고 현재는 고난을 당해야 했고 앞으로는 영원히 사람의 몸을 입고 살아야 하는 불편을 다 포함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도성인신의 순간은 이위 하나님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희생이 단번에 영원히 완전히 결정 된 순간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신인양성일위의 고난과 희생과 손해와 불편은 고스란히 우리의 해방과 자유와 부요와 행복으로 돌아 왔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법에 하나는 하나로 대신합니다. 열은 열로 대신해야 합니다. 우리의 범죄를 해결하려면 우리의 영원 고난을 다 감당해야 하듯이, 신인양성일위의 헌신으로 다시 생명의 기회를 받은 우리는 신인양성일위의 신성 하나님이 내어 놓은 모든 것이 그대로 다 우리에게 쏟아 진 상태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은 아니나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부음 받았으니 우리는 말하자면 하나님이 된 것입니다.
- 허락
제2위 성자 하나님께서 그 고난과 그 결과를 모두 알면서 스스로 아버지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려고 신인양성일위의 구원 운동에 나서겠다고 한다면 성부 하나님은 막고 나설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또 자원하여 나선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단이나 아버지의 자녀인 택자든 일단 성부 하나님의 절대의 법은 공의롭게 그리고 단일 진리의 세계로 적용합니다.
원하고 원함으로 나섰으니 예수님의 구원 사역의 출발은 허락이 되어 졌습니다. 그리고 신인양성일위의 내부나 양성일위의 결합이나 그 사역이나 그 평생의 모든 면을 세밀히 살펴 점도 흠도 없이 완전 무결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과 심판은 예수님이 구원 역사에 나서는 일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사단과 예수님의 전투를 두고 성부 하나님은 재판장이나 심판이나 법 집행의 중간 입장에서 공의롭게 깨끗하게 끝까지 지켜 봤습니다. 자유성의 존재의 전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3) 사단의 응전
- 결정의 자유
우리 택자를 대신하여 싸우겠다고 나선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악령은 왜 응전을 했을까? 이미 사단은 아담을 소유물로 잡았고 아담 때문에 아담에게 맡겨 진 우주 만물 천하가 다 자기 것이 되어 사단은 세상의 임금이며 공중의 권세 잡은 자로서 이 우주의 하나님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도전을 받아 줬다가 실패하면 사단은 종이 되어야 하는데 왜 응전을 했을까?
하나님의 공의의 법이 싸우라고 내 밀었을까? 그렇게 하려면 하나님은 불공평한 하나님이 됩니다. 천사장이 하나님만을 본 것이 아니라 그 아들 우리를 위해 마련한 자리 때문에 전지전능 완전자에게 허점이 보였고 그래서 스스로 좋아서 가능성을 두고 도전했고 또 하늘에서는 실패를 했으나 이 땅 위에서 시작한 아담을 유괴하고 대치하면 또 한 번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첫째 싸움은 좀 어려워도 둘째 싸움에는 확신이 있어 도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녀를 자녀답게 기르기 위해 사단의 도전을 환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재도전을 두고 왜 사단이 받아들였을까?
사단에게 불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불리하지 않은 정도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사단으로서는 마다 할 일이 아닐 조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단으로서 원하는 마음으로 자유성을 가지고 예수님의 도전을 기다렸고 마주 쳤습니다. 또 한 번의 전쟁이 벌어 진 것입니다.
- 전투의 성격
당시는 몰랐을지라도, 아담의 타락은 예수님의 고생으로 구원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사단은 하늘 나라에서 져서 쫓겨 났지만 에덴동산의 아담을 통해 다시 한 번 기회를 잡았습니다. 아담의 아버지 하나님께 하늘 나라에서 직접 대 들다가 실패한 것은 당연한 일이나 아버지 하나님이라 해도 그 아들 아담을 위해 전력하시는 이 상황에서는 하나님께 빈 틈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본질 본성에서 나타 나는 빈 틈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하나님은 낮아 지고 약해 지며 빈 틈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단은 지상으로 내려 와 에덴동산에 있던 아담을 유괴하여 납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아버지가 그냥 있을 리가 없습니다.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의 애 타는 마음을 알고 자원해서 사단을 찾아 오게 되고 사단은 신성 하나님과 직접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인성을 가진 예수님을 둘째 아담으로 상대합니다. 그렇다면 사단은 유리하며 이 전투에서 모든 주도권과 지배권은 사단의 손에 있습니다.
대신 이 전투에는 그만한 성공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만일 지게 된다면 한 쪽은 영원히 다시는 기회가 없는 실패로 끝 납니다. 첫째 아담의 실패는 둘째 아담으로 만회를 할 수 있으나 둘째 아담 예수님까지 범죄하고 사단의 종이 된다면 이제는 달리 나설 존재가 없습니다. 한 분 하나님까지 실패 했으니. 그리고 사단 역시 예수님과 싸움에서 지게 되면 이제는 더 이상 자기가 유괴해서 잡아 놓은 아들로 하나님과 싸우거나 할 대상이 없습니다. 하늘 나라에서 패전은 이 세상인 지상의 전투 기회가 있었으나 여기서 지면 영원한 지옥만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도 사단도 더 이상은 기회가 없는 영원히 고정 되는 승패를 두고 단 번의 전투에 임했습니다. 기간은 예수님의 생명 다할 때까지입니다. 예수님을 마리아 뱃속에서 죄를 짓게 하든, 어린 아이 예수님을 범죄하게 하든, 복음을 전하는 예수님이든 안 되면 십자가에 매 달아 놓고 죄를 짓게 하든 예수님이 죄만 지으면 사단은 승리합니다. 대신 죽어도 죄를 짓지 않으면 예수님의 승리가 됩니다. 예수님의 몸에 숨이 붙어 있는 기간 전체를 통해 그 최후 순간까지 사단은 이미 모든 택자를 손에 넣고 있기 때문에 모든 싸움의 주도권과 지배권은 사단이 쥐고,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를 구하러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죄인이 아니나 사단에게는 죄인 우리를 대신하여 섰으니 사단이 제 것을 제 마음대로 짓밟을 수 있고 휘두를 수 있는 신분으로 이 싸움에 임했습니다.
- 응전 이유
벧후2:29에서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입니다. 만물의 이치가 그렇고 진리의 이치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만든 세계가 그렇고 그 세계를 만들고 운영하시는 하나님의 공의가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법조문에 그렇게 적어 두지 않아도 실은 그렇게 되는 것이 필연입니다. 제대로 된 법은 그 법이 법조문으로 존재하지 않아도 실효를 가지고 필연으로 굴러 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택자를 구하러 온 것은 사단에 도전하는 외부 모습입니다. 지면 말고 이기면 데려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만일 데리러 왔다가 지면 우리를 두고 그냥 가는 세계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인성이 사단 때문에 죄를 지으면 예수님도 사단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납치 당한 아들을 구하러 왔다가 부모까지 납치 당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사단의 종이 되면 예수님과 하나 되어 오신 성자 하나님의 세계가 사단에게 무참하게 짓밟히는 망극한 일이 생깁니다. 사단이 하늘 나라에서는 하나님께 직접 맞섰다가 바로 쫓겨 났으나 이 번에는 납치한 아들을 구하기 위해 아버지는 성자 하나님을 사단의 손에 넘겼고 성자 하나님은 인성을 입고 사단의 소굴로 찾아 들어 갔습니다. 지면 모든 것을 다 내어 줘야 합니다. 사단은 하늘에서 노렸다가 실패한 일을 이제야 이 땅 위에서 이 번에는 자기가 마음대로 하는 조건에서 새로 도전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사단이 마다 할 이유가 없습니다. 죄를 지은 아들을 대신해서 왔으니 예수님은 죄가 없다 해도 일단 사단 앞에는 죄인 입장에서 서야 합니다. 예수님의 평생을 손에 쥐고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예수님으로 하여금 죄만 짓게 하면 됩니다.
- 승패의 기준
사단이 이 세상이 자기 나라이므로 어떤 무력과 수단도 다 동원할 수 있지만 예수님의 머리카락을 거머쥐고 강제로 머리를 숙이게 하여 우상에게 절을 하게 한다면 이는 예수님이 죄인인 우리 때문에 선 자리로 인해 그 머리가 숙여 진 것이지 스스로 숙인 것이 아니므로 죄가 되지 않습니다. 어른이 아이의 손을 잡고 그 손을 휘둘러서 남의 집 유리창을 깼다면 그 유리창을 깬 행위는 어른의 행위지 아이의 행위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단은 예수님을 꾀든지 속이든지 위협을 하여 예수님이 사단에게 피동 되고 그 결과 예수님 스스로 죄를 지어야 죄인이 됩니다.
마치 하늘에서 쫓겨 난 후에 공중에서 이 세상을 지켜 보다가 가장 좋은 때를 골라서 내려 와서 아담을 죄 짓게 한 것처럼, 이 번에도 사단은 늘 예수님을 지켜 보며 노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지면 자기는 계속 밀리고 예수님은 계속해서 사단을 이기는 실력이 늘 것이므로 무조건 대 들지 않고 아무렇게나 휘두르지 않고 예수님의 평생을 지켜 보며 각 시점에 각 상황에 가장 결정적일 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싸움이 바로 마태복음 4장입니다. 사생애를 마치고 공생애를 시작하는 초기, 가장 힘 있게 일어 서는 바로 이 때에 사단은 아담과 하와를 간단히 잡아 챘던 것처럼 아주 교묘하게 예수님의 발을 걷어 차고 있었습니다. 이 싸움에서 실패한 후 사단은 다급해 져서 3 년 반을 몰아 쳤고 마지막 십자가에서는 사단의 모든 힘을 다 쏟았습니다. 이 번 글에서는 주로 마4장을 중심으로 살핍니다.
- 에덴동산 때처럼
하나님이 참으로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이 것이 사단이 하와에게 던진 첫 시험의 문제였습니다. 하와는 그 문제에 담긴 내용을 깊이 알지 못했고 그 배경을 읽지 못했습니다. 남자는 좀 깊게 멀리 보는 장점이 있고 여자는 가깝게 빠르게 보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와는 복선을 깔고 멀리를 보며 우선 던진 미끼를 덥석 물었습니다. 그리고 인류는 끝나 버렸습니다. 너무 쉽게 너무 명확하고 간단한 문제를 만났습니다.
선악과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죽을까 하노라, 하와는 너무 쉽게 생각했고 하나님의 한 마디뿐인 명령을 가감해 버렸습니다. 만지지 말라는 말씀은 없는데 없는 말씀까지 보태어 강하게 표현했고 그런 다음에는 곧 이어 말씀의 일부를 빼 버렸습니다. 죽을까 하노라, 이렇게 사단이 밀어 보자 하와가 앞으로 뒤로 밀리며 중심을 잃게 되자 사단은 하나님이 되라고 바로 들이 밀어 버리고 그 것으로 싸움을 끝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는 자유성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자기들 마음대로 선과 악을 규정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은 아니나 하나님처럼 자유자가 됩니다. 문제는 실력이 없는 존재가 하나님께 붙들려 매이고 또 그 주시는 은혜를 받아 살지 않고 만일 하나님처럼 제 멋대로 살면 그 순간부터 사망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노릇을 했고 그 순간 하나님과는 연결이 끊어 졌고 이 범죄는 사단의 시험 결과였으므로 그들은 사단의 것이 되었습니다. 수천 년 중국에 종질하고 살던 조선을 빼앗기 위해 일본이 고종에게 황제가 되어 중국과 대등하게 살도록 부추겼던 것과 같습니다. 일본이 쉽게 먹기 위해 중국으로부터 조선을 데려 나오는 중간 단계였습니다. 사단은 그런 방법 안에 죄를 넣어 두었습니다.
- 같은 방법으로
예수님에게 첫 시험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성자 하나님이 사람 되어 오셨습니다. 그 인성에게 이 사실은 가장 쉬운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쉬운 문제를 먼저 던지면서 사단은 그 속에 예수님의 신성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있는 인성이 가장 쉽게 죄를 지을 약점을 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속의 신성 하나님은 육체의 양식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신성이 전부가 아니라 인성이 있었습니다. 40 일을 금식한 상태입니다. 일단 먹어야 사는 법입니다. 생존이 있어야 그 다음에 두 번째 시험과 세번 째 시험에서 나오는 실력 문제나 영광 문제가 있습니다. 40 일을 굶은 예수님의 인성은 비록 죄는 없지만 우리와 같은 인간이므로 생존의 극단적인 상황이 되면 오로지 먹고 사는 본능이 가장 예민하게 첨예하게 발동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죄는 비록 없으시나 예수님의 인성이 십자가 상에서 마지막 고난을 받는 순간을 제외한다면 공생애의 시작에 40 일을 굶었던 순간에 이 말로 던진 것이 가장 큰 시험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비록 어렸을지라도 하나님께 여쭈 보고 대답했더라면, 그리고 그렇게 하기 전에 하나님과 동행을 했더라면 아담과 하와의 실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받고 입고 살았더라면 사단이 가까이 오지도 못했을 것이고 시험을 해도 쉽게 이길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인성 역시 아무리 예수님의 인성이라 해도 인성은 인성입니다. 인성이므로 40 일을 굶은 상태에서 사단이 던지는 이런 시험이면 바로 넘어 질 인성입니다. 우리와 같은 인성이기 때문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극단에 이르면 사람은 누구라도 먹는 문제에 휘둘리고 이런 상황에서 만일 돌로 떡을 만들 수만 있다면 바로 그렇게 먹고 해결합니다. 예수님의 인성도 우리와 같으므로 그렇게 쉽게 넘어 질 수 있었으나 예수님의 인성의 특징은 신성과 하나 되어 있어 매사를 신성 하나님께 여쭌다는 점입니다. 사탄의 이 쉽고 간단한 문제를 두고도 예수님은 내면에 계신 신성 하나님과 하나 되었고 시키는 대로 대답했습니다.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살 것이라" 예수님의 인성은 신성과 연결 되었고 신성과 인성에 빈 틈이 없었습니다. 신성 하나님 시키는 대로 순종하는 그 순종으로 사단의 유혹과 시험을 이겨 버렸습니다.
- 사단의 몸부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놓고도 사단은 끝까지 예수님을 흔들었습니다. 우리 같았으면 감정에 오기가 발동하도록까지. 죽는 바로 그 순간까지 예수님으로 죄를 짓게 했으나 예수님은 사단에게 휘둘리면서도 죄를 짓지 않고 죽어 버렸으니 사단은 더 이상 예수님을 시험할 수 없게 되었고 예수님은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짊어 지고 죽어 버렸으니 더 이상 사단은 우리를 잡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죄 값을 다 치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관계에서는 죄를 짓게 하느냐는 문제로 싸웠으며 사단은 졌기 때문에 예수님의 종이 되어 버렸습니다.
(4) 예수님이 패전했더라면
- 사단의 왕국은
죄를 지은 곳마다 그 미치는 곳은 전부 사단의 것이니 사단의 왕국의 범위는 죄가 미친 곳입니다. 예수님이 사단에게 평생 어느 한 순간이라 해도 단 한 번만 져서 죄를 짓게 된다면 예수님의 인성은 사단의 종이 되고 우리는 다시는 사단에게서 벗어 날 수 없습니다. 사단의 왕국은 다시는 도전 없는 영원 무궁한 세계가 될 것입니다.
그 무궁한 세계는 전부 하나님 없는 세계일 것이니 예수님의 인성도 그 곳에 붙들려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평생은 우리 때문에 외부로는 사단에게 붙들려 짓 밝히고 살았으나 그 내면은 하나님과 동행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죄를 지어 사단의 것이 되었다면 그 때는 예수님의 안과 밖이 예수님 생전에 고난의 세월처럼 되고 그 상태가 영원히 변치 않고 지속 됩니다.
- 예수님의 신성
왼 팔이 죄를 지으면 오른 팔도 함께 감옥에 가고 모든 죄의 값을 치르게 됩니다. 발이 출입금지 지역에 들어 가면 팔과 머리도 함께 죄인이 됩니다. 몸으로 죄를 지으면 마음도 죄인입니다. 심신이 선악과를 먹은 죄 때문에 영은 죄를 직접 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주격 책임을 지고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은 양성이 일위가 된다는 점에서는 동등이지만 어디까지나 내면적으로는 신성은 주격이고 인성은 소유격입니다. 인성의 범죄는 신성이 전적 책임을 져야 합니다. 영은 하나님과 연결이 사망이므로 심신의 범죄로 영이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 지는 것으로 끝났으나, 예수님의 인성의 범죄는 예수님의 신성에게 어떤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게 될까?
최소한 하나님의 자존이 만든 첫 세계인 하나님의 목적 세계로부터 예정과 창조와 섭리와 모든 구원 역사 전부는 무참하게 영원히 회복 불능으로 뭉개 지고, 하나님의 이런 사랑의 구원의 세계와 반대로 흑암의 세계가 영원 무궁토록 창궐 될 것입니다. 영계와 우주계와 그 안에 있는 모든 만물까지 전부가 다 붕괴 된 상태, 그 곳의 대장 사단은 왕 중의 왕이 되어 영원토록 군림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체가 어떻게 될지는 현재 이 글을 적으면서 처음 살펴 보는 내용들이 너무 많아서 이 자리에서 단정하지는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와 평소 배운 여러 진리와 정통 교리의 체계 속에서 하나씩 살펴 본다면 세밀히 설명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으로 생각합니다.
>> "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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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6.8.6.13 p.2-
: 하늘의 그 지위에서는 타락한 후에 하나님을 배반하는... 하늘나라보다 어두운 공중에 권세 잡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이 지구에는 사탄이 없었고 죄도 없었고 곧 우주 밖의 영계 밖의 그 위치에 자리 잡고 사탄이 있었는데 ... 본 영계와 우주의 창조 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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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영계와 우주의 창조 시점: 영계는 시공 초월의 단일성이므로 우주 기준에서는 일시 창조일 것이고 우주와 영계가 동시에 창조 되었다면 영계는 우주 창조 첫 순간이라 보고, 우주 창조의 진행 과정에서 영계에서는 사탄이 상황 파악이 되던 시점에 죄를 짓고 바로 쫓겨 났고 우주의 시간으로는 아담의 창조와 우주 통치권을 맡기기 전으로 볼 수 있으니, 우주에서 영적 존재인 사탄이 올 수 있고 활동할 수 있는 길은 영육의 존재이면서 우주 통치권을 받아 가진 인간의 육을 점령하여 그 인간을 통해 우주를 차지하는 길뿐이므로 아담의 창조와 통치권 이전에는 우주에 들어 올 수도 올 필요도 없을 것. 아담을 만들고 우주를 맡겼을 때 악령은 바로 그 틈을 타서 하와를 통해 아담을 점령했을 것.
: 2. 천사의 타락의 횟수: p.16, 사탄에게서 소유권을 가져 오기 위한 예수님의 전쟁은 무제한의 전투였고, 이로 인해 승리한 예수님의 승리는 무제한이니 아담은 둘째 아담으로 기회가 있었으나 사탄은 다른 천사의 또 다른 타락이 있어야 하고 그 천사로 인해 새로 성도를 차지할 전쟁을 해야 하는데 예수님의 대속이 무제한이어서 또 다른 천사는 없었고, 있다 해도 기회도 없고, 또한 우리를 기르는데 필수불가결한 것은 한 번의 천사 타락이므로 두 번의 기회는 주지 않았음.
: 3. 공심판과 사심판의 관계: 무제한의 전투에서 승리했으므로 예수님의 공심판 홰결은 무제한, 그 무제한의 권세를 가진 예수님이 우리에게는 사심판으로 평생 매 현실에서 우리의 심신에게 자유성과 기회를 주어 공심판 해결의 은혜와 그 연장선에서 각자 해결을 분급 받고 누리게 하고 평가하는 것.
: 4. 사심판의 내용과 성격: p.15, 은행에서 돈을 대출해 주면 당연히 채무회사의 경영을 지도하고 평가하며 간섭하고 필요하면 관리도 하는 것이니, 공심판으로 우리를 사신 주님은 우리에게 사심판의 기회를 주는 동시에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우리에게 주신 기회의 평가를 하심
: 5. 죄와 사망과 악령의 관계: p.11, 죄와 사망은 받은 권세로 압박만 하나 악령은 활동적 주도적 역사의 중심. 따라서 예수님의 전투의 핵심 대상은 사탄. 그렇다면 우리의 중생의 배경을 볼 때 우리의 성화의 내용도 살필 수 있을 것. 성령은 인격의 원형이신 신성 하나님으로서 활동적 중심적 지도적 역사를 하시고 진리는 시공의 제한 범위 내의 권세로 압박의 반대적 역할만 하는 것.
: 6. 구원 역사에 성령과 예수님: p. , 성령이 예수님을 광야로 데려 가서 시험을 받게 하심을 통해 성도를 현실 주시고 시험하는 일선 역할은 성령이고 그 성령의 뒤에서 지켜 보는 분은 주님이시니 주님이 공심판을 완성했고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시겠다 하심이며 또한 시험은 주님의 대속화 된 정도요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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