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창2:7, 사람의 창조 - 백영희 삼분론 (완성)
1. 사람과 짐승의 비교
창2:7에서 사람을 "흙으로" 지으셨고 2:19에서 짐승도 "흙으로" 지으셨으니 사람과 짐승에게 같은 것은 물질로 되었고 짐승에게 없는 부분이 영이라고 쉽게 도출할 수 있습니다. 전3:21에서 짐승에게 혼이 있다 하셨고 짐승에게 희로애락의 감정과 욕심뿐 아니라 기억과 계산과 계획처럼 지성과 이성적인 요소가 있음을 볼 때 이 모든 마음의 작용들은 물질입니다.
2. 창2:7의 생기
- 성령의 생명 역사
이분설과 삼분설을 막론하고 모두 창2:7에서 하나님이 불어 넣은 생기를 영으로 보는데 요20:22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과 창1장과 2장에서 천지 창조의 첫 순간을 기록할 때 영계와 영물에 대한 기록을 뺀 것을 참고한다면 이 창2:7의 생기는 성령의 생명 역사를 말하는 것이지 "영"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 영계와 영의 생략
창세기 1 - 2장에는 물질계의 창조만 기록했고, 영계와 영물들에 대한 기록은 마25:34에 나타 납니다. 없는 가운데서 실존들을 만들 때는 크게 영계와 물질계인 우주의 창조가 있었는데 이 창조는 동시 창조였으나 창세기는 물질계 우주의 창조만 기록했습니다. 창세기에 영계 창조를 기록하지 않았음은 영계와 영물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의 기록 목적에 따라 창세기에 기록할 필요가 없었을 뿐입니다. 교회를 길러 가는 순서 때문에 마태복음에 기록하는 것이 필요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영계는 실상이고 세상은 그림자이므로 둘을 동시에 창조했을 것이나 만일 창1장처럼 우리에게 가르칠 필요가 있어 일부로 순차를 두셨다면 6일의 창조가 이치를 따라 분화 창조 된 것처럼 천국과 세상을 순간이라도 사이를 띄웠다면 실상인 천국을 먼저 창조하고 그림자가 되는 세상이 그 뒤를 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전자이시므로 필요한 것을 실력이 모자라 하지 못함이 없고 창조와 섭리와 구원 운동까지 모든 것을 이치를 따라 처리하시는 진리의 하나님이시므로 영과 육의 동시 창조가 마25장을 봐도 맞고 만일 약간의 시차를 두시려 했다면 실상이며 주격이 되는 영의 창조가 조금이라도 앞서지 영의 창조가 뒤를 이을 리는 없습니다.
따라서 창2:7에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 하신 말씀에는 짐승처럼 몸과 마음을 물질로 만드셨다고 기록하신 것이고 그 내용 안에는 아담의 영의 창조는 생략 또는 함축으로 포함 된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고 필연 역시 그렇습니다. 창2:22에 하와 창조의 기록에도 보면 아담의 뼈와 살이라는 물질들만 기록 되어 있습니다. 하와의 영은 함축 또는 생략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셨다 했는데 사람이 사람 되려면 영이 없는 상태로는 불가능합니다.
흔히 인간 전인설을 가지고 이 노선 삼분설과 중생 교리를 비판하는 신학자들이 적지 않은데 공통적인 문제점은 이 노선의 주장을 제대로 읽지 않고 자신들의 선입견만 가지고 짐작한 뒤에 바로 정죄를 하는 실수가 이어 집니다.
- "생기"는 성령의 생명 역사
요20:22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활 대속이 완료 된 시점입니다. 죄값을 다 치렀고 우리의 소망인 부활까지 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 하셨습니다. 여기 "숨"은 탄소를 내쉬는 인간의 생화학적 성분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존에 필요한 생명을 뜻합니다. 육체로만 사는 사람에게 숨 쉬는 것이 생명이듯이 성도에게는 성령이 생명인데 예수님의 십자가 완성으로 이제 영이 죽은 우리의 영을 살리는 성령의 생명 역사, 즉 성령이 감화 감동을 통해 죽은 영을 살리고 우리를 성화 시켜 나가는 그 첫 역사인 중생을 받으라 하는 말씀입니다.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 하신 이 표현을 오해하여 성령 하나님을 마치 휴대품처럼 생각하는 오순절 계통의 실수가 많으나 예수님의 대속 완성으로 성령인 3위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 되어 우리에게 착소 되었고 그 첫 역사는 죽은 영을 살리는 생명 역사임을 알리기 위해 "숨"으로 표시 된 성령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창2:7에 생기를 코에 불어 넣었다는 것은 이미 제조 된 아담, 즉 물질로 된 몸과 마음에 영물인 영까지 다 갖추어 인간이 될 모든 요소를 갖춘 상태의 아담임을 표시한 다음, 그 아담이 아담인 것은 영 때문이 아니요 물질로 된 심신 때문도 아니며 영육이 하나로 엮인 사람이기 때문인 것처럼 오해하기 쉬우나 그 자체조차 그 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아니라, 아담이 아담인 것은 하나님과 하나 되어 움직이는 존재이기 때문에 아담임을 설명하기 위해 아담을 만든 것과 아담이 아담 노릇을 하는 순간을 명확하게 기록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연결 되어 하나님으로 움직이는 것으로 살고 활동하는 아담, 그가 만물의 주인공인 성도이며, 이 짧은 기록 하나를 통해 하나님의 자존이 우리를 목적물로 생각하여 예정하고 창조하며 세상을 주시고 영계를 주시는 모든 광대한 뜻을 알립니다.
3. 아담의 첫 활동
창2:7에서 아담을 만드시고 8절에서 아담에게 에덴을 주시고 그리고 아담에게 첫 활동을 맡겼으니 19절에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모든 짐승의 이름을 짓게 했습니다. 짐승의 이름이란 하나님께서 이 짐승을 왜 지으셨고 무엇에 사용할 것이며 이 짐승은 앞으로 살아 갈 범위와 역할과 위치를 정하는 일입니다. 이름은 다른 친구들과 구별하기 위해 붙이는 것인데 그 이름 때문에 각 이름들은 자기만의 정체성이며 자기의 활동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만드셨고 제일 뒤에 아담을 만드시고 그 아담은 영육으로 된 존재가 되어 위로 하나님과 연결 되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 아래로 모든 만물을 지휘하며 지도하며 책임 지는 만물의 주인공입니다. 움직이는 짐승만 표시한 것은 가장 중요한 핵심을 중심으로 표시한 것입니다. 짐승에게 위치와 활동이 할당 되면 그 짐승은 움직이지 못하는 만물의 관계까지 지정 된다는 뜻입니다.
4. 증거, 반증, 변론
- 오늘 중생의 단면
하나님의 섭리 역사는 이치를 따라 필연적 모습을 갖으므로 어제를 보아 오늘을 알고, 오늘을 가지고 어제를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아담 창조의 첫 순간을 알 수 있는 증거 중에 하나는 오늘 불신자로 살던 우리가 중생 되고 성도가 되는 과정에서 무엇이 죽어 불신자이며 무엇이 다시 살아 났기 때문에 우리가 중생자인지를 구별하면 이해에 도움이 됩니다.
오늘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의 같은 점은 몸과 마음입니다. 다른 점은 몸과 마음 외의 것입니다. 불신자들에게는 없고 우리에게는 있는 것, 그 것은 몸이 아니고 마음이 아닙니다. 무엇일까? 그 것을 영이라고 합니다. 영 자체가 있고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은 죽었기 때문에 불신자는 죽은 자들이고 우리는 영이 살아 있기 때문에 중생 된 자 곧 산 자들입니다. 그들 속에 있는 영은 존재적으로는 창조 때 아담에게 있었다가 범죄로 죽은 상태가 된 것처럼 그런 상태로 불신 시절 우리 속에 있습니다. 불신자의 영은 죄를 짓는 순간에 없어 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 져 죽은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사람이 될 때 우리가 중생 되는 것은 우리의 몸과 마음이 아니라 우리 심신 속에 있는 영이니 이 영에게 생명이 주어 지는 것을 중생이라 합니다. 그 영을 중생 순간에 새로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 중생의 순간과 아담이 영과 마음과 몸으로 된 완성품인 상태에서 하나님과 연결이 되어 사람 노릇을 하게 되는 것은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아담의 심신은 죄가 없던 상태고 우리의 중생 순간의 심신은 죄로 뭉쳐 있는 것만 다를 뿐입니다. 문제는 영이 하나님과 연결이 되는 순간 아담은 그 심신이 죄 없는 상태이므로 바로 전면적 에덴동산이 시작 되었고, 오늘 우리는 영이 중생 되어 하나님께 붙들리는 순간 우리의 신앙은 출발하나 우리의 마음과 몸은 여전히 영의 지배 행사에 저항하며 버팁니다. 악령과 악성과 악습 때문입니다.
지금 이 글에서 주로 살피는 것은 아담이 처음 만들어 질 때와 오늘 우리가 불신자로 살다가 중생 되는 순간은 범죄 이전과 이후라는 상황만 다르지 영에게 생명이 주어 지는 과정은 동일합니다. 존재적으로는 있지만 활동적으로 역할적으로 위치적으로는 죽은 듯이 없는 듯이 있다가 하나님께 붙들려 움직이기 시작을 했으니 이 순간이 영으로서는 영다운 영으로 활동을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서 우리 영을 살리고 우리 영을 붙들고 역사하는 이 면은 성령이 맡습니다.
- 영과 마음의 이중 인격
백영희 삼분론을 설명하다 보면 대개 이해하는 편이고 일부 신학의 전문 지식을 접한 분들은 이중 인격의 충돌 또는 모순을 지적합니다. 한 사람은 한 인격으로 만들어 졌고 한 인격은 하나의 사고와 판단과 하나의 의식 구조를 가져야 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입장에서 의문을 제기합니다.
"인간 안에 두 개의 실존적 인격체를 만드는 것이 아닌가?" "2중 인격체로 생각하는 서로 독립된 자아의식이 아닌가?" 이런 공개 질의를 한 분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성급하게 한 몸이 머리가 둘 달린 괴물론으로 설명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모두들 너무 성급하다고 생각 됩니다.
영은 우리의 주격 위치에 있고 마음은 영을 수종하는 입장입니다. 사람이 작은 일을 할 때는 괭이같은 도구나 소 같은 짐승처럼 자기 판단이 없고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면 됩니다. 그러나 큰 일을 하려면 그 집안의 주인 1 명의 뜻과 의사와 지시를 따라 회계 담당 머슴이 있고 수만 평 넓은 들에서 수백 명의 하인을 지휘하는 두목 머슴도 있고 부엌 일을 도맡는 오야 식=모도 있는 법입니다. 이 집에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지시하는 주체가 셋이 있고 열이 있다고 그 집의 주인을 셋이나 열이라 하지 않습니다. 주인 한 사람의 절대적 배타적 주권 행사가 제일 위에 있고 그 밑으로 주인처럼 행동하는 사람은 최고 주인 한 사람을 위해 그 주인의 지시를 받들어 움직이는 관계이니 일을 제대로 하려면 큰 집에 천 개 만 개의 연장과 소보다 마치 주인처럼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중간 두목들이 많으면 그 집은 작은 집이 아니라 큰 집 정도를 넘어 대재벌로 천하를 휩쓸 수 있는 것입니다.
국가로 말하면 대통령과 장관과 경기도지사와 안산시장과 사동 동장의 관계를 두고 머리가 3 - 4 개라고 하지 않습니다. 대통령은 통치자의 위치에서 국가적 차원의 방향과 원칙을 제시하면 경기도지사는 16 개 시도 중에 경기도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경기도 내에 집행 되는 대통령의 통치 철학과 지침을 적용하고 수행하며 이하 시장과 동장도 그렇습니다. 중앙집권제에서는 마치 대통령만 존재하고 도지사 시장 동장은 기계나 소와 같았고 지금 지자체에서는 마치 생각하고 판단하고 집행하는 4 개 책임자들이 4 두 마차처럼 충돌할 때도 있지만 모두가 정상적으로 움직인다면 중앙집권제보다 지자체적 관계는 밑에 있는 책임자들이 위를 섬기면서도 마치 제 것처럼 열심히 하게 되어 훨씬 효율적이니 이 것이 우리에게 영과 마음을 각각 스스로 생각하는 존재로 주신 이유입니다. 만일 지자체 체제를 활용하여 여야가 전쟁을 벌이는 오늘 우리 사회의 상황을 본다면 소속 당에 따라 위에서 내려 오는 바른 지도를 밑에서 최대한 버티고 엉뚱한 짓을 해서 국난까지 만들게 되는데 이 것이 바로 영과 우리 마음의 현 모습입니다.
정부나 회사나 비법인 단체에 이르기까지 각종 법인적 사회 개념은 그 구성과 그 작동 개념에서 우리의 영과 마음의 관계가 너무나 잘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왜 이런 문제가 삼분설에서 제기 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우리의 몸만 가지고 따로 살펴 보아도 인체를 구성하고 있는 우리의 세포나 세포들이 모여 하나의 기관을 형성하고 움직이는 모습에서도 각 세포와 기관들은 자체의 판단에 따라 하나의 국가처럼 하나의 작은 우주처럼 움직이고 있는데 고대사회의 신학자도 아니고 현 시대의 신학자들로서 이중 인격문제를 거론한다는 것은 자질 문제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삼분설에 대해 생각을 전혀 해 보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한 사람이 밥을 먹는다고 생각을 하면 몸은 저절로 그 생각을 수행하기 위해 움직이는데 이 동작은 농부가 연장을 들고 휘두를 때와 달리 몸은 몇조의 세포들이 밥을 먹기 위해 각자 할 일을 일사분란하게 스스로 생각하며 판단하고 행동에 나섭니다. 가장 흔한 예는 인체의 면역체계인데 이 나라 60 만 대군보다 더 체계적이고 민첩하며 합리적이라고 알려 져 있습니다.
자연과 사회의 발달은 우리에게 주신 자연계시 차원에서 참고할 수 있어 예를 들었으나 이미 성경은 우리 안에 죄와 의를 두고 로마서 7장에서 두 자기의 전쟁과 고뇌와 생각과 판단을 다 기록했습니다. 반론을 살펴 볼 여지가 별로 없다고 보입니다.
- 전인적 회개
얼마 전에 고신의 언론인이 백영희 삼분론을 직접 예를 들며 "3분설론자들의 회개는 전인적(인격적)인 회개가 되겠느냐"라면서 고신 신학자들과 이 노선에게 공개 질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의도는 한 사람 안에 의식하는 두 주체가 있다면 이 두 주체가 함께 회개를 해야 전인 회개가 되고 회개는 전인 회개라야 회개지 일부는 회개하려 하나 일부가 회개를 버티게 되면 참 회개가 아닐 것이라는 뜻으로 의문을 표시한 듯합니다.
이 반론은 수직적 이분법과 수평적 양분법을 혼돈한 것입니다. 수평적으로 하나여야 할 마음이 하나가 되지 않고 둘로 양분이 된 상태라면 참 회개가 아니라 회개를 위해 투쟁하는 과정에 그칠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하나가 되어 영에 붙들려 따라 가려고 결심하게 되면 이 때의 영과 마음은 수직적 이분 구조에서 수직 수평의 단일 상태이니 전인적 회개에 하등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이 수직적 이분의 상태는 그 이분의 상태만 가지고 무조건 양분이라 하지 않고 수직적 이분의 상태에 있는 마음이 그 위에 있는 영에게 순종의 자세인가 아니면 거역의 자세인가에 따라 순종적 자세라면 이는 영과 마음이 수직적 이분 상태로 하나가 된 전인 상태의 회개입니다. 이는 몸과 마음 사이에서도 일어 나는 일입니다. 마음이 담배를 끊기로 작정했는데 몸이 담배를 버리지 못하고 연기를 뿜어 대면 이 때 몸과 마음은 수직적 이분이 아니라 수직적 양분입니다. 몸이 마음의 결정을 따라 담배를 버리게 되면 이 때 몸과 마음은 수직적 이분임에도 불구하고 수직적 양분이 아닙니다.
이 의문적 반론은 이분설 삼분설을 떠나서 공통적인 문제이므로 반론 자체가 무용이라 보입니다. 안 믿던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신자가 되는 것을 보통 기본 회개라고 합니다. 질문자의 글로 이 부분을 설명하려면 정통 교리는 중생하는 순간 전인 회개가 되어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논리로 나가는 완전구원론이 됩니다. 이는 백영희 삼분론에 대해 비판하던 화살을 비판하던 분께로 되돌려 발사한 상황입니다. 우리가 안 믿다가 믿는 사람이 되어도 우리의 영만 완전 구원을 받는 것이고 우리의 몸과 마음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기 때문에 먼저 구원 받은 우리의 영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죄를 이기고 살도록 만들기 위해 평생 투쟁을 해야 합니다. 또한 이미 구원 받은 사람도 평생 늘 죄와 싸워야 하고 지기도 하고 이기기도 하면서 신앙이 자라 가는데 이런 상황을 두고 고신과 정통 교리는 "전인적 회개"라고 할까요?
- 정통 신학과의 관계
정통 신학도 중생 이후 우리에게 새생명이 생기는 것은 알고 말합니다. 그 것이 마음의 일부이거나 또는 마음 안에서 믿음으로 살려는 그런 경향이나 운동 등으로만 파악을 했습니다. 바로 이분설에 막혀서 그 실체를 규명해 내지를 못했으나 중생은 새생명이며 새생명의 씨가 우리에게 주어 졌다는 것은 이미 다 나온 내용입니다. 바로 이 잘 알지 못하여 애매하게 표현한 부분을 우리는 "영"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표현해도 되느냐, 왜 그렇게 표현을 해야 하느냐 이런 문제로 살피는 것은 당연하지만 과거 교리 입장에서 듣지 못한 말이 나왔다고 성급하게 정죄하는 것은 연구적 겸손적 자세는 전혀 없는 천주교 폐습입니다. 정통 교리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미개척 분야로 남겨 진 곳이 중생의 실체와 중생 이후의 성화와 관계 등에 집중 되는데 영을 중심으로 삼분론을 살피는 가운데 그런 모순들이 저절로 해결이 된다고 말하는 이 노선의 삼분론과 중생 교리는 연구와 검토의 대상이지 정죄의 대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려면 우선 이 노선의 주장을 면밀히 검토한 다음에 어떤 기준 때문에 정죄할지를 먼저 결정을 해야 합니다. 현재 어느 정통 교파라도 그 교리적 입장은 항상 변동이 있습니다. 보충이나 재설명이나 새로운 상황에 판단을 하는 등 세월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해야 할 일은 항상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변동해서 안 될 사안을 변동하는 일이 너무 많아 졌고 정말 교리적으로 명확하게 하는 면으로 그렇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할 정도여서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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