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한국 교회와 교단 - 남 영환
483p-508p
8. 승동측과의 합동
1959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4회 총회에서 소위 “연동측”과 “승동 ”이 분열되자 신학과 신앙노선이 같은 승동측과 고신측은 합동을 추진하기위해 활발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1960년 9월 20일부터 23일까지 부산 남교회당에서 모인 제10회 총회는 승동측과의 합동을 추진키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합동추친 위원9명을 선정하였고 이들로 하여금 합동추진을 위한연구와 승 동측과의 교섭을 일임하였고 총회를 정회하였다. 승동측 또한 고신측과의 합동을 만장일치로 가결하였고 합동추진위원 10인을 선정하였다. 1960년 10월 25일부터 26일에 대전 중앙교회에서 승동측 합동추진위원회 양 화석위원장 외9인과고신 측 합동추진위원회 황철도 위원장 외 8인이 회합을 가져 다음의 합동 안을 결의하였다.
(1)합동원칙
①신조: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신앙고백에 의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헌법이명시한12신조
②신학: 칼 빈주의 신학에 의하여 합동함을 원칙으로 한다.
(2)합동방안
①헌법수정: 수정위원을양측각5인씩 선출하여 헌법수정위원회를 구성하고합동에 필요한 최소한헌법시정과 규칙을 작성하여 총회에 제안토록 한다.
②교리, 정치, 생활은 헌법과 예배모범과 권징조례를 엄수한다.
③신학교일원화: 신학교는 총회직영의 단일신학교로하고, 동수의 이사를선출하여 경영케 한다.
④사업은 양측현상대로 수락함.
⑤외국선교사는 양측현상대로 수락한다.
(3)합동방식
금년내로합동총회로 모이고전총회에 헌법수정위원회가제안한 헌법수정안을 통과시켜 공포함으로 그 효력을 발생하도록 한다. 여기서 또한 가지알고 넘어가야할 것은 고신측은 이 문제를 각 노회에 수의하여 노회의 동의를 얻어하자고 제안했으나 승 동측은 난색을 표하면서 총회가 먼저합동을 한 후에 노회는 설득과 함께 밀어붙이자는 것이었다. 고신측도 이에 동의하여주고 고신측만은 노회의 수의를 거쳐 시행한 것이 후일에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알 수 있음은,환원당시에 합동에 대한불만을 말하면서도 합동자체를 반대한 노회는 없었기에 그래도 수습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4)합동시일
합동총회절차위원으로는양측총회장서기.합동위원장서기로하기로결정하였다.그리고합동기념사업으로찬송가를 새로 편찬하기로 하였다.1960년12월13일 서울홍천교회에서목사64명, 장로55명이참석한가운데고신 측 제10회2차 속회를 열어 승 동측과의 합동문제에 대해 각 노회에 수의하였다. 앞에서 말한 대로 새 찬송가는 수년전부터 고신 측이 다 만들어 이미 출판 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합동과 동시에 찬송가를 출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6노회 총 투표수188표 중가 표178표, 부표8표, 기권2표로써 제2차 속회에서 승 동 측과의 합동을 정식 가결하였다. 위표의 결과를 보아도 거의 반대가 없었던 것이다. 드디어 역사적인 합동총회가 1960년12월13일 오후5시30분에 서울 승 동 교회에서 개최되었다. 양측 총대와 방청객으로 초만원을 이룬 가운데 고신 측 총회장 송 상석 목사의 사회로 개회예배가 시작되어 찬송가“사랑하는 주님 앞에 형제자매 한자리에”를 합창한 후 황철도 목사가 성경을 봉독하였고 이어서 승동교회 찬양대의 찬양이 있은 후 박형룡 박사가 엡4:1. 15을 본문으로“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였다. 이어서 송 상석목사의 축도로1부 예배를 폐하였다. 오후6시45분 예장 승 동측 총회장 고 성모목사의 사회로 회무가 진행되었다. 고신 측 총대131명, 승 동측 총대233명, 총364명의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합동총회가 개최되었다. 이어서 합동위원회에 의해 합의된 합동원칙이 합동위원회 서기정 규 오목사의보고 후 만장일치로 채택되고 취지와선서문은 고신 측 전성도목사의낭독이 있은 다음약간의 수정을 가한 후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5)취지 및 선서문
진리는 영원히 살아있어 필요가 있을 때마다 생명의 새 역사를 창조하시다. 이와 같은 창조의 역사는 근원되시는 여호와하나님의 예정의 테두리 안에 들어있는 한토막한토막변혁을 위한성령의 역사를 점 처 놓은 事實(사실)을 말할 것이다. 하나님의 創世 史(창세 사)와 예수그리스도(기독)의 復活 史(부활 사)를 비롯한 성령의 역사는 역대의기독교회사가 이를 밝히 증명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금일총회합동도이 歷史(역사)의한토막인것만은사실이다.백년이채못되는 한국기독교 특히 장로교회역사페이지는 기독교본연적인순백으로 수록된면이없는바아니다.그러나혹은검게혹은붉게물들인 秘藏(비장)된 事實(사실)도 적지 않다. 더려 펴놓은 교회사페이지를 그 누구의 힘으로나 현대 과학적 기술로는 시처 낼 자가없고 다만 기도의 제단 밑에 성스럽게 엎디어 느껴 우는 성도들의 心靈骨髓(심령골수)에서녹아내리는 통회의 눈물만이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울어보았는가? 에스라는 수염을 뜯어가며 울었고 에 레 미야 는 눈물로 밥을 삼았건만 우리는 얼마나 울었는가? 요엘은 옷을 찢으라고 하였으나 우리는 마음을 찢고 통회해야할 것이다. 진리가 모독을 당할 때 불신앙의무리가교회를 退俗 化(퇴속 화)시킬 때 불법의 무리에게 교회질서가 교란을 당할 때 교권주의자들에게 순진한 양떼들의 당한유린은 너무도 참혹하였다. 사이비한 진리의 간판을 내걸고 회색적인 복음주의자 혹은 자칭 保守(보수)라는 미명하에 위선자가 횡행하고 있는 亂世(난세)에 처한 성도들의 심령은 여지없이 더럽혀졌고 어두 어 져서 심령의 마비상태는 아무리 매를 맞아도 아픈 줄도 모를 만큼 되었다. 너나할 것 없이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지말자. 이 심정을 여실히 나타낸 것이 오늘우리의 교회합동이다. 그러나 웃음으로 합쳤다가 울음으로 헤어지는 것보다 감격의 눈물로 합하여 웃음의 열매를 맺어야할 것이다. 좁고 험한 골막이 길에서 고독에서 헤 메운 그서 름 도 적지 않았다. 우리는 과거를 회상한다. 배 골아 창자를 움켜쥐고도 물질의 유혹을 받지 아니하였고 헐벗고 떨면서도 고맙게 주는 미국형제의입성을 탐내지 아니한 것이 우리의 실정이었다. 때가되어 친구는 찾아오다. 신앙의 동지보수사상의뜻 깊은 일꾼들 우리는 큰 힘을 얻었고 큰 기쁨과 큰 위로의 선물을 담뿍 받게 되었다. 質(질)이 같으면 서로 합하고 性(성)이 같으면 서로 응하는 것이 물리학의원리라면 신앙의신학체계가 같은 교리를 주장하는 똑같은 두 총회가함께 뭉치지 못할 하등의 이유는 없다. 보수주의수호자가 진리투쟁에 불타는 동지들의 규합으로 보수보루와 진리전선의진지가강화된 것이다. 자유주의대보수주의의대전이다. 이제는 전진이 있을 뿐이고 후퇴는 없을 것이다. 이 싸움을 위한희생의 댓 가를 더 많이 지불해야할 것을 우리는 각오를 한바있어 제삼자의구구한억제비난도 공격도 다 불문에 부치고 우리는 비장한 결심을 하였다. 여 릅 바알이라는 기드온의병기와전법을생각하였다.항아리는깨어졌다할지라도승리의횃불은높이달고그아래로모였다.이일은하나님의최종적인우주통일원칙하에사는그리스도(기독)인의단체생활의 참답고 향기로운 전형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겨레 앞에서도 솔선 시범코자 주안에서진리로 하나 되는 두 총회합동운동을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世間與論(세간여론)에 구애를 받지 않고萬難(만난)을 배제하고 통일총회의막을 올리고 巨步(거보)를내려드디며앞날의목적을달성하기위하여다음조항의선서를 中外(중외)에 선포한다.
1.전통계승
1.대한예수교장로회제45회 총회는1912년9월1일 평양에서 제1회총회로창립한총회로부터일본교단과신사참배를제외한동일성을유지하고전통을계승한유일한대한예수교장로회법통총회임을 선언한다.
2.고신 측 총회의10회총회기간사는 대한예수교장로회의 二元的(이원적)인 史實(사실)로 수록한다.
3.고신 측 총회는1949년이래 경건생활에 치중하여 정통신학교교육에 힘쓴 것과 예장 측 총회가 세속주의를 배격하기위하여W. C. C.를 탈퇴하고 W. C. C.노선의 에큐 매니 칼 운동을 반대한 결의를 인정한다.
4.1951년5월25일제36회 총회에서경남법통노회 제51회 노회에 대한결의와 총회장의布告 文(포고문)은 이를 취소한다.
5.단일총회의헌법은1934년 개정판인 대한예수교장로회헌법을 총회합동에 구애되는 점만을 수정하여 잠정적으로 사용한다.
2.지도원리
1.교리
칼 빈 선생이 가르친 장로회의교리를 그대로 고수할 것이며 비성경적인 단일교회운동을 반대한다.
2.정치
성경에 기준한 대한예수교장로회헌법(신조정치권징조례예배모범)과 규칙에 의하여 교회를 처리하며 총회와 노회의 기구는 간소화함을 원칙으로 한다.
3.권징
성경과헌법과예배모범과 권징조례를 엄수하며 목사로서 교리와 정치와 생활면에 非違(비위)는 물론이요 개별적으로 순복음주의 교회와기독자의생활행동원리에 위반되는 행위와 사상은 엄중처리한다.
3.생활원리
성경과 신도 계 요서에 준하여
1.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활
2.교회를 봉사하는 생활
3.사회생활에 모본을 보임으로써 그리스도(기독)인된 본분을 다하도록 한다.
4.우리의 진로
1.신앙노선
자유주의적이며 용공 적이며 비성경적인 W. C. C.노선의 에큐 메니 칼 운동을 반대하며 그러한 사상적인단체와의제휴를 하지 않는다.
2.경제자립
성경원리에 의하여 교회 경제적 자립체제를 확립하기위하여 십일조를 권장한다.
3.복음전파
복음전파는 교인의 의무이므로 개인전도와국내전도에 힘쓰며 외국선교 사업을 계속한다.
5.대외관계
1.국내교파와의관계
신앙사상이 같은 보수주의의국내교단과의 친선을 도모하며 성도의 교제와 협조를 아끼지 않는다.
2.선교사와의관계
과거 복음을 전해준 초대선교사들의 수고와 노력을 높이칭송하고 감사하며 지금도 우리와 신앙노선이 같은 선교회들이나 선교사들이 우리대한예수교장로회에 사랑과봉사의협조를 제시공여 할 때에 우리의 주권과신앙의침해가 없는 한 이를 가납한다.
6.우리의 결의와 권고
1.우리는 대한예수교장로회제45회 총회에서 선포하는 선서문제에 의하여 교회의화평과발전을 도모하며70여년의 보수신앙을 순교정신으로 고수할 것을 굳게 결의한다.
2.우리는 복음진리에 배치되며70여년의전통적질서를 문란케 하면서본 총회에서이탈 혹은 중립상태에 있는 교회 및 노회에 대하여 조속히 본 총회에 귀의할 것을 권고한다.
3.우리총회관하에서 봉직하는 교직자들은 혼미 중에 있는 교회와 교우들을 사랑과 성실로 권면하며 지 교회와 노회총회의단결을 공고히 함에 힘써 기도하며우리초대교회와 같이 성경공부와 복음전파에 전력을 기울이며 경건생활에 힘씀으로 민족과 세계교회에 영원한 구원에 기여함이 있기를 바란다.
주후1960년12월 일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예장 측)
총회장 고 성모 총 회원일동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고신 측)
총회장송 상석 총 회원일동
(2)합동총회
이어14일 오전9시 속개된 합동총회는 합동총회 임원을 선거하였다. 총회장에는 고신측의 한상동목사가 당선되었고 부회장에는 김윤찬목사가 당선되었다. 서기, 회록서기, 회계는 고신측 이명재목사의 동의로 元(원)은 전 예장승동측 임원이, 부(副(부)는 전 고신측 임원을 추대키로 하였다. 그래서 서기:박찬목, 부서기:전성도, 회록서기:정규오, 회록부서기:서완선, 회계:곽현보, 부회계:주영문 제씨가 선출되었다. 이어서 총회장 한상동목사가 취임사를 하였다. “나는 총회장됨을 사양하고저하였다. 그러나 맡게 되니 짐이 무거운 것뿐이다. 내가 교회와 사랑하는 형제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우리가 지난10년 동안 서로 섭섭하게들 지내다가 다시 만나 하나가 되니 지난 때 일에 대하여 마음에 미안한 점이 느껴지는 것은 일반적인 감상이다. 한국 교우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은 보수신앙이다. 그러므로 아무 때라도 하나이 될 것이니 서로 부드러운 마음과 태도로 지내야할 것이다. ”이어서 증경총회장 이 대영, 이 인식, 한상동 목사의 간곡한 기도가 있은 후 14일 오후2시에는 환영회가 있었고 14일 하오3시 속회에서는 미국정통장로교 선교부를 대표하여 한 부선목사가, 미국성경장로교 세계선교부를 대표하여 현요한선교사(Rev. Malsbery)가 각각축사를 하였다. 한부선 선교사나 마두원선교사들을 매첸파로몰아 이단시하던 그들 앞에 두 선교사가 인사를 했다는 것은 10년 전의 일이 새삼스럽다. 이렇게 되어 1960년을 마무리하면서 고신측과 승동측은 하나의 총회로 합동되었으나 적지 않은 문제들이 잠재 해있었다는 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들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고신 측과 승 동측이 합동하게된 것은 어떤 면에서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서로다소의공통점이 있었으니, 곧 웨스트민스터표준문서를 따르는동일한신앙고백적인배경,장로교회가가진유사한교회정치,신학과성경해석상의문제에대한개혁주의적인입장.W. C. C.와같은에큐메니칼운동에가담하지않은것등이바로그것이다.그러나양교단의합동은앞에서말한대로너무성급하게추진되었다.합동의필요성과일체감이전교회적으로확인되지않은채지도적인사들에의해정치적으로이루어져갔고 합동을 지속할만한 확고한 토대를 갖지 못했다. 또 고신으로서는 합동으로 야기될 수 있는 여러 측면에 대한주의 깊은 배려가 결여되었다. 다시 말하면 합동은 바람직했다고 할 수 있으나 그 기반이 약했다. 한 상동목사가승동측과의 합동을 성급하게 추진한 것은 박 윤선교장의 고려신학교사임이후 야기된 문제들에 대한 일종의 처방이었으나 그것이 지나치게 성급한 조치였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을 때는 이미 엎 지러진 물이었던 것이다.1960년9월 현재 고신교단에 속한교회 수590개 교회에 달하여 거의600여 교회를 지닌대 교단으로 성장했고 목사 수는126명, 장로213명, 그리고 전체교인은66,784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당시로 보아서는 영남에 치우쳐있다는 것이 흠이기는 하나 결코 적은교단이 아니었다. 다시 말하면1960년12월 고신측이 승 동측과 합동할 당시교세는600여 교회와6만7천여명의교인을 가진 교단이었던 것이다.
이 당시 각 노회별 교세현황은 아래와 같다.노회교회당회목사강도사목사후보생전도사장로 세례교인학습교인원입교인유년주교경남161372343531594700230015409900경기2301110996281786991051부산100341122910485000150020058260진주1553218111260543960136927166460전라30490218 55543044671967경북12128264147738266182516565884계 5901351263292205203175036476908333722
9.승 동측으로부터의 환원
(1)합동후의 문제
1960년12월13일승동교회당에서모인 합동총회는 신학교 단일화 안을 비롯한 합동원칙을 비롯한 합동원칙을 만장일치로 가결하였음은 이미 언급한바다. 이러한 신학교단일화계획에 따라1961년12월 28일 고려신학교는 서울장로회총회신학교와 병합되어 장로회총회신학교부산분교로남게되었다.그러나 이 문제는 단순치 않았다. 안 용준목사는 합동 후 다음호[파수군]지 권두언에서총회합동에 대해서 언급하면서“1960년에 합해진 것이1961년에는同(동)이 되도록 하자”고했으나 동(同(동))이 되는 것은 아득하기만 하고 오히려 고신 측과 승 동측사이에 갈등이생기기 시작했다. 그 문제의 震源 地(진원지)는 고려신학교문제였다.1961년9월21일부산남교회당에서 모인 제46회 합동총회는 한 상동목사를 총회장으로 다시 선출하였으나 당시 이 문제는 합동 측과 고신 측과의 갈등을 야기 시키기에 충분했다. 당시이사회는 고려신학교의점차적인 폐쇄를 가결하였기 때문이다. 문제는 승 동측과 고신 측의 합동당시“신학교는 총회직영으로 일원화하며. . .”에 대한해석상의문제였다. 고신측은 이 원칙을 승 동측의 총회신학교와 고려신학교양자의행정적인 連繫 性(연계성)을 가진 일원화된 신학교체제로 이해하였으나(in the sense of linking the two institutions under one board of trustees, one head),승 동측은 흡수통합의의미로서의 일원화(in the sense of merger)로 이해하여고려신학교의 폐쇄를 전제로 했던 것이다.1961년12월28일신학교이사회는 신학교를 단일 화 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고려신학교와 총신신학교는 서울에서연합 교수회를 가져 교장 제를 교수회장 윤번제로하기로 하였다. 서울의 총회신학교를 본교로, 부산의 고려신학교를 분교로 하여 부산분교는 신입생을 모집하지 않도록 하여 고려신학교의 연차적인 폐쇄 방침을 취하였다. 이뿐만이 아니라 승 동측은 수적우세를 바탕으로 교권을 행사하였고 합동원칙을 준수하지 않았다. 이렇게 합동 후 여러 가지문제가제기 되자1961년11월 경남(법통)노회는 이에 대하여“합동총회에 대한호소. . .경남(법통)노회결의와 해명을 공개함”이라는 장문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成案(성안)위원장 李 成 玉(이 성옥)목사와 서기 김 희도(金 熙 道(김 희도)위원, 송 상석(宋 相 錫(송 상석))목사, 金 顯 中(김현 중)목사, 지득용 장로 명의로 된 이성명서에서합동 후
①헌법과 헌법적 규정을 떠난 다수의 횡포
②총회합동원칙과선서문이 파기된 실례
③신앙경건과신학보수와 기독자의 행동원리에 대한 비위 점 논증에 대해 논급하였다. 특히 이성명서에서는 총회합동원칙과선서문을 파기한 실례로 다음 세 가지를 지적하였다. 즉
1.신학교는 총회직영의 일원적인신학교로하고 이사는 양측동수로 할 것을 결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신학교를 불법적으로 단일화 결의를 하고 고신을 폐합하고 고신 측이 사수는1/3이되 었 는 가?
2.구역 및 명칭에 있어서 경상남도는 고신 측 노회구역과 명칭에 의하여 합동하기로 결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고신 측 부산노회와 예장 측 경남노회가 합동함에 있어서 왜 고신 측 부산노회명칭과 지역대로 합하지 않고 예장 측 경남노회명칭과 그 지역대로 하 였 는 가? . .
3.신학교운영방침에 있어서 일원적인신학교를 재확인하고 양보다 질에 중점을 두고 신학교 이사는 양측동수로 할 것을 결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신학교를 단일화시켜 고신을 폐합코자 하며. . .고신 측이 사수가1/3에 불과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당시홍반식박사와 오 병세박사는 귀국하여(1961)서울의 총회신학교의교수로 일하고 있었다. 경남진해출신인 홍 반식 교수는1951년 고려신학교를 졸업한 후(제5회)1954년1월도미하여 칼 빈신학교에서석사학위를 받고 드 랍 시대학교에서“히브리 성경(구약)에 나타난 저주형식과 고대셈족문서”란 제목으로 철학박사(Ph. D.)학위를 취득한 후1961년 귀국하였고 바로교수로 취임하였다. 오 병세교수는 경북봉화태생으로 역시1951년 고려신학교를 졸업한 후(제5회)1954년10월5일도미하여 컨 콜 디아 신학교에서신학석사학위(Th. M.)를 받고 동신학교에서“구약에 있어서 보편적구주의 주제로서의 여호와의 왕권(The kingship of Yahweh as a motif for the universal saviour in the old Testament)"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신학박사(Th. D.)학위를 취득하고 1961년 귀국하여 교수로 취임하였다. 그러나1962년에 화란유학을 마치고귀국한이 근 삼 박사는 총회신학교교수로 임용됨이 마땅했으나 조직신학교수가 많다는 이유로 거절되었다. 이 근 삼 박사는 前記(전기)홍 반식, 오 병세박사와 더불어 고려신학교제5회 졸업생으로서 1953년도미하여 고든대학(Gordon College)과 카버 난 트 신학교(Westminster the o. s em.)를 거쳐 화란자유대학교(Free University)에서“기독교와 신도국가주의와의대결(The Christian Confrontation With Shinto Nationalism)"이라는 제목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1962년 귀국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총회신학교의교수로 채용되지 않아 부산의 칼 빈 학원의원장으로 취임하였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상황들은 고신 측의 환원의 실제적동기가 되었다. 이보다 근본문제는다수의 횡포가 고신을 더 이상 머물 수 없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2)고려신학교의 복교선언
사립 고려신학교는 서울장로회총회신학교와 단일 화 하라는 신학교이사회의지시를 따라1961년12월28일 서울에서연합교수회의를 가져 교장 제를 교수회장의윤번제로채택하고 서울에 본교를 부산에 분교를 두어 부산분교는 신입생모집을 하지 말며 졸업반은 서울에서공부 하여 점차적으로 교수들이다 서울로 옮기도록 방침을 취하였다. 윤번제를 따라 박 형 룡 박사가1년 간 교수회장을 맡고 부산분교장에는 박 손혁 교수가 취임하였으며 안 용준, 오 병세교수는 신년도부터 서울본교에서교수하고 한 상동목사는 서울과 부산을 왕래하며 교대로 교수키로 하였으며 이 상근교수와 홍 반식교수는 부산에서 교수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신학교가 폐쇄될 위기에 처해있을 때인1962년10월17일한상동목사는 총회신학교부산분교(즉 고려신학교)경 건회를 마친 직후“고려신학교복교선언”을 하였다. 이것은 고려신학교의복교인 동시에 승 동측으로부터 고신 측의 환원을 의미하는 첫 신호였다. 이때고려신학교의복교를 막아보려는 많은 모임이 있었고 이와 관련하여 많은 문서가 나왔다. 고려신학교학우회는 이해10월31일 성명서를 발표하고 한 상동목사의 복교선언은신학교의합동원칙에 준한 귀정으로 알고 적극 지지한다고 선언하고5개항의결의문을 채택하였다. 즉,
1.합동을 재강조하기위하여 양신학교를 동등한 입장에 두고 당초약속대로 양측의 동수이사로 구성하여 일원화의 철저를 기할 것.
2.구고신이사회는 고신 廢合措置(폐합조치)에 선봉이 되어 오늘의결과를 초래한데대한 책임을 지고본교(고신)를 완전히 복구시켜놓고 새로운 이사를 구성, 일체를 인계하시고 은퇴하실 것.
3.새로운 이사회에서는 학원의 항구적 자유를 절대 보장할 것.
4,박 윤선목사님을 다시교수로 채용할 것,
5.학원의 정상화를 위하여 제정된 입학자격의 교역 연한 제를 합동당시의 상태로 부활시키고 신입생의 신앙사상과 생활면의 검토를 철저히 할 것 등이 그것이다. 이 성명서는 고려신학교재학생65명중복교를 찬성하는 학생은53명, 반대는6명, 중립적 입장6명임을(이중54명은 후에 복교를 지지하였다)밝히고 있다. 1962년12월17일에는 박 손혁, 오 병세, 이근삼등세교수가 고려신학교교수로정식 취임하였고 다음날인18일에는 교단합동으로 서울총회신학교에서수업을 받게 되었고 이들이 고려신학교제17회 졸업생이 되었다. 환원복교한학생의명단은 남 영희, 이 지영, 진학일, 최 만술, 최 진교 등이다. 홍 반식, 이 근 삼, 오 병세 등3박사는 고려신학교를 위해同事(동사)하기로 하고1963년2월25일 아래와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성명서
1.우리 세 사람은일찌기고려신학교에서 양성을 받은 동지로 뜻한바있어서 신학을 좀 더 연수하여 한국교계에 미력으로나마 이바지하자는 약속을 하여 왔 읍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권고로 유학을 마치고 미숙한자들로자인하면서도 귀국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교계정세를 보니 저들의생각과는 달리 정착할 수 없었고 환경의 강력한지배가 우리들의 입장을 좌우하게 되며 우리들도 모르는 사이에서로 떠나있게 되 었 읍니다. 그 결과는 교계에 유익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불안감을 주는 형편이었으므로 적지 않은 괴로움을 가져 왔 읍니다. 하나가 둘이서 있는 자리로 가느냐? 둘이하나가 서있는 자리로 가느냐? 가 우리의 당면한 문제였지만 동지규합은 所 志(소지)貫徹(관철)의 비결임으로 결국3인이 약속하여 행동하기로 하 였 읍니다.
2.우리는 고려신학교복구의방법은가하지 않았다고 하겠으나 그 동기는 순수하고 그 정신이 한국교회를 사랑하는데 있는 것을 인정합니다.
3.우리는 신학교를 운영하는 이사회와 학교의교육과 행정을 담당하는 교수회의 책임한계를 엄격히 할 것을 확보하고 재단을 구성하여구태를 벗어난 새로운 운영방침을 수립할 것을 확인하고 고려신학교에서세 사람이 同 役(동역)하기로 하 였 읍니다. 언간교회에 불안을 끼친 우리들의 부족한 점을 관용해주시고 앞날의지도와편달을 바라오며 이로서 우리의 소신을 외람되게 교계에 성명하는 바입니다.
1963년2월25일
우 홍 반식
이근 삼
오 병세
위 성명서에 나타난 대로 세교수중한사람은 오랜 동안환원을 주저하였으니 복교선언이돌 발 적이요 비합법적이란 점에서였다. 하다못해 구고신이사회라도 소집을 해서시행 했어야하지 않았느냐는 지적이다. 그러나 그 당시까지만 해도복음병원을 위시하여 교단재산이법인체로 미등기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이때신학교복교와 동시에 모든 재산이구이사명의로 법원에 등기를 접수시키고 나서 승 동측이사 백 남조장로가 법원등기서류를 갖추어 같은 재산을 등기하려 들어오다가 마주친 것을 보면 불과30분을 앞당기지 못하였다면 고신측재산은 모조리 승 동측으로 넘어갈 찰라 였 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양교가 행동을 개시하면서 고려신학교운영기금이승동측 총회신학교회계로 넘어갔고 고려신학교는 총회신학교로부터 타다가 써야했던 것이다. 교수들은 고려신학교로 부임했으나2월부터 교수들의 생활비지급이 아득했다. 돌발적인복교는 교회나 독지가로부터의 후원을 얻기가 어려웠다. 급박한 현실에 당면한 한 상동목사는 전남여수에 있는 남 영환목사에게 시외전화를 걸어왔다. 월말은 다가오고 교수와 기타인건비지급대책이 전혀 없다는 호소였다. 한 상동목사를 아는 사람은한목사가 이처럼 다급하고 초조해하는 것을 본 기억이 없을 것이다. 남 영환목사는 당회와 의논해서결과를 곧 알려 드리겠다고 했다. 그 당시한사람교수생활비는50만환이었다. 남 영환목사는 전화를 끊고 곧 양 진환장로를 만났는데 양 진환장로 또한 환원을 갈망하던 장로였고 당시에 사업도 잘되던 때였다. 당시여수 충무동교회는 교인이약100여명 선이었으나 재정은 그런대로 여유가 있었다. 이 사실을 의논하면서한교수를2년 간 은 맡아야하겠다고 말하자 제직회에 내어놓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가지문제는, 본 교회목사는25만환밖에 지급하지 않는데 교수생활비로그배가 되는50만환을 지급한다는 것도 문제이고 그렇다고 연초에 책정한 목사 생활비를 한 달 만에 배로 올리자고 한다면 이도문제가 발생할 것은 뻔 한일이었다. 이점에서는 남영환목사가양장 로를 설득하여 본 교회목사는 어려우면그때마다장로나 집사가 사적으로도 울 수 있지만 신학교교수는 그렇지 못한 게 아니냐고 하자목사만 그렇게 양해한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자고 결정했고, 주일임시제직회를 열어 당회의합의사실과신학교의 급박한 사정을 이해시켜 무사히 통과시켰다. 한 상동목사는 결과를 얼마나 초조히 기다렸든지 밤늦게 전화보고를 받고 너무도 감격해했다. 이 사실을 밤중에 서울중앙교회에서 시무하는 윤 봉기목사에게 알려 도움을 청했고 윤 봉기목사도한사람책임 지겠다는 중앙교회의 결정을 알려왔다. 다음은한명동목사가 시무하는 남 교회에 이어 박손 혁 목사가 시무하던 영도교회 끝으로 한 상동목사가 시무하던 삼일교회에서도움을 약속하여 교수5명의생활비가 확보되므로 어려운문제가해결 되었고, 한 상동목사는 하나님의도우심을 이때처럼 실감한 적이 없었다고 술회했다. 이 같은 형편에서1963년6월 합동총회고시부에서는 고려신학교제17회 졸업생들인 남 영희, 이 지영, 진학일, 최 만술, 최 진교 등5명에게 강도사고시자격을 허락 치 않음으로 문제는 심각하게 되었다. 사실이점이고 신 측의 환원운동에결정적인동기가 되었으니 물론일부에서는 환원을 반대하여 끝까지 승 동측에 남아있는사람들도 상당수였고 환원을 따라오면서도 당시에는 억지로 따라온 사람도 많았으나 거의대다수가 환원을 열망하던 때였던 만큼 총회도모이기 전에 고려신학교졸업생에게 강도사고시자격을 안주겠다는 것은10여 년 전에 총회가 고려신학교를 단절하던 것과 꼭 같은 양상이었다. 그러나 그때보다는 현 고신상태가상당한 틀이 잡혔으니 두려울 것이 없었고, 또 한 가지는 박윤선 목사의 떠남으로 실의에 처했던 때와는 달리세박사가 학교에서교수를 맡게 되었으니 그런대로 안정을 찾은 편이었으며, 비겁하게총회에서 싸움판을 벌이기보다는 조용히 환원하자는 쪽이 오히려 우세하여 먼저 각 노회로부터 환원하는 절차를 밟은 것이다.
(3)각 노회의 환원과 환원총회조직
이렇게 되자 부산노회내의 고신 측 출신교역자들은1963년7월29일 환원발기회를 조직하고 고신 측 환원을시도하였다. 즉 이들은 다음과 같은 노회환원취지문을 발표하였다. “. . .대한예수교장로회 승 동측교회가. . .과거에 고신 측에 대한자신들의 잘못된 결의를 취소함으로써 양 교단은 정통보수와교회정화의 숭고한 이념아래1960년12월13일에 합동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합동 측 총회는 여지없이 합동서약을 위반하여 합동정신과이념을 무참하게 짓밟고 있으며, 만일 이대로 지속한다면 우리의 장래는 심히 암담하고 비참할 것은 명약관화의사실입니다. 이제 와서는 우리의 합동이념달성은 절망적이요, 해방 후 우리들이 가져오던 신앙노선은 여지없이 유린당하고 있으니 우리교회를 이 암흑으로부터 구출해내고 한국교회의 정통신학교육과경건생활의 재건설을 위해서합동전으로 돌아가서 진용을재정비하고 진정한칼빈주의 교회건설을 위하여 추진 코 저하는 바입니다.”동취지문은“신학교일원화를1년이 못가서 단일화시켰음, 이사회구성에있어서 양방동일수제를 폐지함. . .합동원칙을어기고노회명칭과회수를수로서결정함.”등을 합동서약의 위반으로 내세웠고“우리는합동전노회와총회로돌아간다.합동시의고신측회장에게호나원총회소집과환원선언과재조직을요청한다”고하였으며1963년 8월8일(목)하오2시 부산 남 교회에서부산노회환원노회를 갖는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부산노회 내구고신측교역자들인김장원,이상근,박유생,황보연준목사등29명은1963년8월5일 부산노회 환원을 반대하고 다음과 같은“노회환원취지문에 대한해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성명서에서는“환원노회발기회장박상순명의로 부산노회소집통지서를 발송하고 동시에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부산노회 환원발기회란 이름아래전국의구고신 측 교회에 노회환원취지문이라는 것을 발표하여 드디어 합동이라는 거보를 내딛기는 하였으나3년도 채 안된 상태에서 환원이란 발걸음을 돌이켜야했다. . .회고하여 보건대고 신 측 장로교회가 승 동측장로교회와1960년12월13일에 역사적인합동을 성취할 때에 우리들은 고신측지도자인 한상동목사와기타목사들의‘합동은 하나님의뜻’이라는 지도를 받아 감격과 감사를 가지고 순종하였던 것이. . .”라고 하여“합동서약위반”이란조항에 대해서도 해명하였다. 또8월29일에는 강 유중, 안 용준, 이 인재, 박 유생, 황보 연준 목사 등 구 고신목사49명(=세칭합동 측)(경북지구18명, 경기지구5명, 전라지구4명, 부산지구22명)은 고신 측의 환원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1963년8월8일(목)하오2시부산남교회에서부산노회내의 구 고신 측 목사23명과장로21명 등44명이회집한가운데고신 측 부산노회환원을 결의하였고 김 영진(金 榮進(김 영진)목사를 노 회장으로 선출하였다. 계속해서전라노회가 환원하였고9월3일 경북노회가9월3일 경북노회가9월4일에 경기노회가 환원하였으며9월10일에 경남노회가 환원하게 되었다. 이어서 진주노회, 경동노회(새로 조직)가 각각 환원하였다. 그리하여1963년9월17일에서20일까지 부산남교회당에서목사36명, 장로36명 합계72명이 참석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제13회 환원총회를 조직하였다. 승 동측과 합동하여 세칭“합동 파”로 불린지34개월만의 일이었다. 이날총회에서는 송 상석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하였고 승 동측과의 합동추진 위원이었던 한 상동, 황 철도, 송 상석목사는 총회 앞에서 합동하게된 것이 하나님 앞과 교회 앞에서 잘못된 것임을 사과하였고, 합동에 대해 잘못되게 지도한 일을 심각하게 느껴 주 앞에서 깊이 회개하는 마음으로 목사와 장로는1963년9월29일까지 자숙하기로 가결하였으며한 상동목사는 전국교회를 소란 시킨 책임을 절감하고 앞으로 사죄하는 의미에서은퇴의사를 표명하였다. 이 당시 환원한 교회는445개 교회였고 교인 수는 다음과 같다.
구분/노회 부산경남경북진주경기경동전라 계
교회 수 69 163 8585 11 27 20 445
목사 수 32 35 1717 77 5 116
장로 수 40 57 3838 16 66 192
세례교인 수2,900 3,000 1,100 1,100 623623 500 10,246
부산노회의 경우131개교회중에69개교회가, 경북노회는183개교회중70개교회가 환원했으나 경남노회는175개교회중163개교회가 환원하여90%이상 환원했다. 위에서 본대로 경북노회가183개 처 교회 중70개 교회만이 환원하였으나 경동지방20개 처가노회로 분리 조직되었으므로163개 처에서70개교회가 환원한 것이다.1/2에 못 미치는 것이 큰 상처를 입은 듯이 보이지만본래합동당시100개 처 교회에서69개교회가 환원했으니70개 처교회가 떨어져나갔는데 그중에도 진주시내교회가 다 떨어졌던 것이다. 경기노회도23개 처에서11교회가 환원했으니 절반에도 못 미쳤다. 수적으로 엄청난 손실을 가져왔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이렇게 두 교단이 합동했다가 재 분리함으로써 한국교계에 미친 충격도 컸지만, 고신측은 합동하였다가 다시 환원함을 이전교세의1/3을 잃고 마는 막대한 손실을 가져왔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돌이켜볼 때에 이 손실이 오늘을 위해 필요한 한 과정으로 받아들여져 기도한다. 그 이유는 만일그대로 환원하지 않고 있었다면 한국의 개혁주의는 어떻게 되었을까하는 우려와, 작금의 현실을 볼 때에는 놀랍기만 하다. 한편 합동측은1963년9월19일 목사97명, 장로95명, 선교사3명, 합195명이참석한가운데 제48회 총회를 열고이수 현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함으로써 고신 측과 승 동측은 완전히 분리되고 말았다.
제26장
敎團(교단)再 整備(재정비)
1.고려신학교의 새로운 출발
총회신학교부산분교로화하여2,3년내에폐쇄될뻔했던고려신학교도고신측의승동측으로부터의 환원으로말미암아새로운발전을 위한정비시대로 들어가게 되었다.l963년2월25일 홍 반식, 이근 삼, 오 병세등세박사가 고려신학교에서 함께 봉사하기로 한 同事(동사); ;
124페이지부터 170페이지 - 허순 길의 고신대50년사
2)주일성수 견해 차이와 교장직해임
(1)복합적인 그의 환경
1957년9월 박 윤선교장이 고려신학교에 복귀했다. 그러나 그의 복귀와 함께 자신이제기 했던 문제들이 만족하게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교회법정투쟁문제는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었고, 다른 문제들도 시원스럽게 해결되지는 않았다. 그의 사임을 전후하여 일어난 일로 그와 이사중진들과의 인간관계가 크게 손상이 되었다. 그의 복귀와 함께 그동안 손상된 관계가 완전히 치유된 것으로 생각하기도 어려웠다. 이런 미봉적인인간관계는 영속되기 어려운 것이다. 다시 다른 시험이 오게 될 때 관계가 더 악화될 소지를 안고 있었다. 실상 박 교장은 지난날의 불만에 대한근본적인 해결이 없이 본질적으로 지난날의 문제를그대로안고 복귀한 것이다. 먼저, 교회법정소송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여전히 그의 마음에 아픔을 갖게 했다. 그동안 교회재산문제에 관하여“교회교인들의 총유”라는 재판판결은 났으나. 교인비례에 따른 재산분할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법정투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특별히 그와 뜻을 같이해오던 경기노회는1957년 9월 총회가 소송을 비성경적으로 규정하지 않은데 대한 불만을 품고, 총회직후10월 임시노회를 소집하여 노회 적으로 총회와의행정보류를 결정하고 총회 밖으로 나가 버렸다.1958년9월 제8회 총회가 남교회당에서 개최되었다. 총회는 지방 위원들이 제7회 총회후경기노회가불법으로 행정을 보류했기 때문에 총회의뜻을 쫓는 교회들로 하여금 경기노회를 계승하도록 주선한 사실을 보고하여 이를 받게 되었다. 나아가 총회는 경기노회의 행정보류가 불법임을 지적하고, 보류 측 형제들을 위한권면위원5인을 선정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박 윤선목사는 이에 항의하고 항의서를 제출했다. 이런 교회환경 속에서 박 윤선목사는 이에 항의하고 항의서를 제출했다. 이런 교회환경 속에서 박 윤선교장은 수시로 교회소송문제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고 비판을 계속했다. 그러니 소송문제를 둘러싼 긴장관계는 풀려지지 않았다. 당시한 상동목사는 소송을 반대하는 자신의입장이분명하면서도 박 윤선교장의 입장을 적극옹호하고 나서지는 않았다. 박 교장은 자신을 정신적으로 지원해오던 경기노회가 행정을 보류함으로 사실상 총회로부터 이탈을 해버렸으니 총회 안에서 고독한자리에 서게 되었다. 다음으로, 그가 고려신학교에 복귀했으나, 학교의운영, 체제문제도 본질적으로 변화되지 않고 있었다. 학교의재정문제가 여전히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교수들은 목회를 하면서 학교에 나와 돕는 교수강사들의 입장과비교할 때 경제적형편이 퍽 어려웠었다고 보아야한다. 그러니 자연히 다시학교체제에 대한 불만스런 생각도 더하기마련이었다. 이사회가학교의경제에 대한책임을 제대로지지 않는데 불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총회가 자리를 잡고교회생활이 정착된 단계에 이르렀지만 신학교는 여전히 특정인에 의해 통제 운영되고 있음으로 경제형편이 열악한 것으로 느끼게 되고 내적인불만이 더해가게 되었다. 이때경남노회는1958년제8회 총회에 고려신학교를 총회직영으로 하여달라는 헌의를 하고, 총회는 이를 위해교섭위원을 내었다. 소송문제로박교장과 소원된 관계에 있는 송 상석 목사는 이런 방법으로 그의 뜻을 대변해줌으로 관계를 좁혀보려 했는지도 모른다. 한 해 동안 아무런 진전이 없자, 제9회 총회 시에는 교섭위원을 보강하게 되었다. 다시결과가 없기 때문에, 제10회총회시에는 경남노회와 진주노회 두 노회가 총회직영건의를 하게 되었다.이 총회직영헌의는 송 상석목사가 회장인 경남노회로부터 발의되어3년 동안계속총회에 올라오게 되었다.1948년 박 형 룡 박사가 고려신학교를 이탈했을 때의 중요한 이유 중의하나가신학교의 총회직영학교문제였다. 이때 한 상동목사는 원칙에 찬동하면서 적기를 문제 삼았다. 이제그때의상황과는 달리총회가 구성되고교회생활이 정착되었는데도 학교는 여전히 사립으로 운영되고 있었고, 거듭된 총회직영헌의에도 진전이 없었으니 주변으로부터 오는 오해도 있기 마련이었다. 특별히 한 상동목사에게는 자녀가 없었지만 그의 가까운 친인척가운데구미에 유학하여 신학을 연구하고 있는 분이당시 셋이나 있었기 때문에 고려신학교를 가족적 기업으로 의아하게 보는 오해도 있게 되었다. 결과적으로1950년대 후반신학교와 교회 안 밖에는50년대 전반까지와는 매우 다른 이상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나아가, 이런 불만스러운 환경 속에서 봉사해오던 박 윤선목사는 이제자신의문제로마음에 상처를 입고시험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1960년 화란유학의 좌절 때문이었다. 박 윤선목사는1957년9월에 고려신학교에 복귀하여2년을 지난 후 지난날화란자유대학에서 시작했던 박사과정을 마치기를바라고 화란에 가기를 원했다. 그는1953년에 그곳에가 유학하던 중 이듬해4월 한국에 있던 부인이자동차사고로 별세한 비보를 받고 즉시귀국하게 되어 유학의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후 다시 연구를 계속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지내오다, 이제 돌아가 마치기를 원했다. 그는1959년12월11일신학교에서 개최한 환송예배석상에서“. . .먼저 귀국할 때에 기회를 보아서 다시 와서 이일(학위 얻는 일)을 마치겠다고 말을 했는데 이것을 이루지 않고 만다면 민족적으로나 국제적으로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실언이 될 것이니 이일을 이루고저 합니다. 학위를 얻고 못 얻는 것은 앞으로의 일이니장담할 수 없으나 나로서 해야 할 노력을 해야 할 줄 압니다. . .”라고 했다.12월26일에 화란을 목적하고 떠나, 먼저미국웨스트민스터신학교로 갔다. 그는 거기서도서관을 이용하여 논문을 보충하고 화란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뜻대로 진행되지 못했다.5개월 후1960년5월29일 미국으로부터 바로귀국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상당한 충격을 받고 돌아온 듯 보였다. 귀국하여 첫 경건 회 시간에 귀국인사를 하고 경건 회를 인도하면서“나는 앞으로 학위에 연연하지 않고, 무 디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만을 연구하는 사람이 되려고 합 니 다”라고 했다. 그리고 그가 두 번이나 유학한 학교였고, 이번에도몇 달 동안 머물렀던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대한비판도 곁들였다. 그는 그 신학교의 강당에 어떤 때는 담배연기가 자욱하다고 말하기도한 것이다. 그로부터의 이런 비판적 발언은 이전의 박 윤선목사에 걸맞지 않게 들려졌다. 누구나인간은 자신의연약성을 극복하기란 어려운사실임을 생각하게 했다. 누구도그에게 학위문제를 그렇게 큰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는 이미 어디에서나 인정받는 신학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신학박사학위과정을 자유대학에서 시작했으니 마치고자한 그의 뜻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1954년 자유대학을 갑자기 떠나게 되었을 때 지도교수와 논문제목에 대한합의를 보고 왔던 것이다. 그는 교수하고 주석을 쓰는 틈을 내어 논문을 준비했고, 떠나기 전 몇 달 동안은 논문준비에온 노력을 기울였다. 그가 받은 논문 제목은“신약과 이교(New Testament and Paganism)"이었다. 그는 이 제목을 비교종교학적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동양종교철학에 깊은 지식을 가지고 한국의천도교, 유교, 불교의 경전들을 살펴 비교종교학적 입장에서 신약이보여주는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the God of covenant)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려했다. 이런 그의 연구의 재료는 그 후의 그의 저서에서 많이 인용되었다. 그런데 단순한 성격을 가진 그는 화란의대학원에서논문 쓰는 과정을 살피지 않은 것이다. 논문을 쓰는 과정은 지도교수(Dr. R. Sc hi pp e r s)와 끊임없이 내용에 관하여 논의하고 자문을 받게 되어 있었다. 그는 이렇게 하지 않은 결과로지도교수가 기대한 바와는 다른 방향으로 논문을 쓴 것이다. 지도교수는 신약의 복음의 내용이 異敎(이교)의 영향을 받았는가에 관한내용을 요구한 것이었다. 지도교수 미국에서 보낸 그의 논문의 개요를 받았을 때에 이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에 박윤선 교장은 크게 실망을 하고, 논문에 대한 새 작업을시작하여 시간을 드리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주석을 저술하는 일과교수에 전념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화란에 가는 것을 포기하고 즉시 귀국하고 말았다. 이것이 비록 자신의 실수로 생긴 문제였으나. 내적으로 상당한 상처를 받게 되고, 얼마동안 그의 정서생활에도 상당한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언급한대로 귀국 후 첫 경건 회 때의 입장표명이매우 정서적 성격을 띄었 던 것으로 미루어 이를 잘 짐작하게 된다. 이런 가운데 있을 때에 그에게는 다른 하나의 큰 시험이 오게 되었다.
(2)주일 성수문제
주일에 생긴 일:
박 윤선교장은 미국에서 돌아온 지두 달 만에 다른 시험을 맞게 되었다. 그것은안식일 聖 守(성수)에 관련된 것이었다. 그는1960년7월 어느 주일날 갑자기 선교사가탄배가 떠나게 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택시를 타고나가 선교사를 전송한 후 시간이 늦어서 그만예배시간을 놓치게 되어 주일 낮 예배에 참석을 못했다. 박윤선 교장은 그 경위를 이렇게 밝혔다: “나는 지난여름(1960)에 주일아침 돌연히 스 푸 너(Rev. A. B. Spooner)선교사가방금배타고 귀국한다는 보도를 들었다. 그리하여나는 생각하기를, 택시를 타고 부두에 들려 그 선교사에게 전송인사를 빨리한 후에 그 近 所 禮拜堂(근 소 예배당)에서예배를 보려고 계획을 세웠다. 이렇게 하려니, 송도서 택시를 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택시를 타고부두에 가니, 군인들이 나를 부두 안으로 금방 들여 주지 않다가 나중에야 들여보내주니 시간이 많이 지났다. 할 수없이 배에 올라가서 그 선교사부부를 모시고간단한전송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왔다”라고 했다. 그가 주일 낮 예배에 참석하지 않은 일이주변에 알려져 문제가 되었다.
이사회와의의견대립:
이일이 있은 지 약한달 되던 때에(8월경)이사회가 어떤 일로 모이게 되었다. 이때에이사회는 박 교장에게 이일이 일반교계에 문제가 되어있음을 알리었다. 이사회는“이 문제를 교회에도 덕이 되도록, 교장에게도 큰상처가 없도록 해결할 수 있는 방도를 강구하자”는 뜻에서 알렸다고 한다. 이때박 교장은 이문제가이사회공석에서 제기된데 대해마음에 큰 충격을 받고, 즉시구두로 교장 직을 사면하고 그 자리를떠나게 되었다. 이때에 당황한 이사회는 장시간논의한 후에 위원세분을 내어(황 철도, 이 인재, 윤 봉기)교장사면 취소를 하도록 권면하게하고 문제해결을 위해 힘쓰게 했다. 이 위원들은“주일날 그와 같이 된 일은 고의적으로 한일은 아닌 줄 아나 한국교회주일성수문제에 미치는 영향은 큰 것이니, 앞으로 관계노회에 이 사실을 진상그대로경위를 밝히고 자진하여 어떠한 線(선)을 그어 책임표시를 하면문제는 일단락될 것 같으니 소극적으로 교장 직을 사면하고 물러서는 것보다. 적극적으로 우리교섭위원들의방안을 채택하여 이행해주시면 감사 하겠다”고했다고 한다. 그동안부산시찰 회에서도 사람을 박 교장에게 보내어 본인이이사실을 친히 노회에 나가밝힐 것을 권고했다. 그래서 그는9월 노회에 나가 그때에 되어 진 형편을 부득이한일로 설명했다. 그는“주일에 사세 부득이한일이나 자비를 베푸는 일 혹은 선한일은 할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의 교훈(마12:11,12,7,특별히12절하반절)”이라고 보았다. 당시부산노회에서는 상당한 토론이 있은 후 이를 광고보고로 받고 지나가면서, “주일성수문제와예배모범15장5항의“주일날 부득한 일에 대하여 할 수 있다는 일은 어느 한계에 속하는지”를 총회에 문의하기로 결정을 하였다. 그런데 당시 노회에서 논란된 이문제가지난15년 동안한분은 학교의설립자요 이사장으로, 다른 분은 교장과 교수로 고려신학교의 신앙과 신학 면에 쌍벽을 이루어온한상동목사와 박 윤선목사양자간의 알력과 충돌로 비추어진 것은 큰 불행이었다. 얼마후제10회총회가1960년9월20일에 부산 남 교회에서 개최되었다. 이 총회에서 정치부는 부산노회의 이문의건에 대하여“주일성수에 있어서 부득이한경우”에 관한한계를 밝혀달라는 것은 실례를 들어 말하기 전에는 답하기 어려운사실임을 언급하고, “본인이 자기양심에 거리낌이 없다고 하여도 남에게 부덕이 되어 건덕상문제화 될 때는 도의적 책임을 져야한다”고답을 하게 되었다.이제10회총회가폐회한직후인9월23일 밤, 이사회가모여 박 교장을 불러 교섭위원들의요청을 받아들이도록 권고했다. 이는 곧 자진해서 어떤 선線(선)을 정해 도의적 책임을 지라는 것이었다. 이때 박 교장은“주일에<부득이>하여, 또는<자비>혹은<선>을 위하여 잠깐선교사를 전송하고 예배당에 가려고택시를 탔고, 또 거기 가서<예배 본 것>뿐인즉, 내게 잘못이 없으니 도의적 책임을 질수 없 읍 니 다. 라고 답을 하게 되었다.
박 윤선교장의 교장직해임과 교수중지 령
이튿날인1960년9월24일 그는 이사회로부터 통고문을 받게 되었다. 그 통고문에는 첫째, 교장 제를 폐하고, 교수회장제를 도입하되1년 윤번제로하며, 둘째로, 박 윤선교장은 교수회장제가 도입됨으로 교장 직은 자연 해임되고, 교수직은도의적책임을 지는 표시가 있을 때까지 중지한다는 것이었다. 주일성수 문제에 대한견해 차이로 교장이요교수인 그에게 무거운 징계가 내려진 셈이다. 이 통고문을 받은 그는 교수회와 학생들 앞에서 자기는 교장 직이 기구변경에 의해 해임되고 교수직은 중지된 것을 알리고 고려신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이로서15년 동안고려신학교의신학의 터를 놓고, 교육을 주도해온 박 윤선목사는1960년9월말고려신학교를 영영히 떠나게 된 것이다.
고신교회의 주일성수 생활:
오늘(1966)의 시각으로 그때의 주일성수생활을 이해하고사건을 판단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일찍부터 한국교회주일성수생활은 일반적으로 매우 엄격했다. 한국장로교회는 일찍부터 미국선교사들의 영향아래 청교도적 주일준수개념을 배워 내려왔다. 그중에도당시 고려 파 교회의 주일성수생활은 더욱 엄격했다. 이는 아마 일제하에서계명을 지키기 위해죽도록 충성하며 싸운 역사가 뒷받침되어 그러했으리라고 생각된다. 당시고려 파 교회의 주일성수생활은 외부로부터 율법주의라고 불려 졌을 만큼 엄격했다.6.25사변 시 거창지역의 배 추달집사는 주일에 인민군이비로 마당을 쓸라고 했을 때, 주일성수를 위해이것마저 거절하다가 순교한일이 있었다. 거창교회를 시무하던 남 영환목사는6. 25사변 후 부산에서구제품을 받아 트럭에 싣고 거창으로 오던 중화물차의 고장으로 주일새벽1시반에야 거창에 도착하게 되어, 그 새벽에 집사6명이 그 짐을 내리게 되었다. 그는 이것이 주일을 범한 것이라 판단하고 노회에 권징을 자원했다. 노회는 임시노회를 소집하여남 목사에게6개월 근신처분을 내리고, 집사6명도6개월 동안 근신케 함으로 엄한권징을시행한 일이 있었다. 당시“고려 파 교회”에 속한신자들은주일에 교회가 여간 멀어도 공중교통수단(버스)을 이용하지 않고, 걸어서 교회예배에 참석하였다.1955년4월 총 노회에 교회로부터“주일에 예배드리기 위하여 전차나, 버스를 타는 것이 가합한가지시하여 달라”는 문의가 들어오기도 했다.
遺憾(유감)을 남긴 역사:
당시 이러한 주일성수와 관련된 교회생활의 분위기로보아 안식일에 박 윤선교장에게 일어난 일이문제를 제기하면어느 정도문제는 될 수 있었다.그러나 이사회가 이 문제를 취급한방법이나. 이에 대한박 교장의 반응을 살펴볼 때, 상호관계에 있어서 자연스러움을 느끼지 않게 한다. 그리고 주일성수문제만이 연관되어있다고 보기 어렵게 만든다. 박 교장은1957년에 교회소송문제에 대한항의 적 행동으로 사면을 내고반년이상학교를 떠나 있다가 돌아왔다. 형식상으로는 옛 자리로 돌아와 정책했었으나, 이사들에게는 그의 처신에 대한불만이 내적으로 잠재해있을 수 있었다.그리고1957년에 파수군 을 통해 나타난 소송문제에 대한 송 상석목사와의지상논쟁에 있어서, 교회가거의 전적으로 그의 입장을 옳게 보았지만, 인간적인관계에 있어서는 잃은 것이 많았다고 보아야한다. 그리고 제8회 총회에서보류 측경기노회를 위해항의서를 제출한일 등은 중진이사들의마음에 거부감을 갖게 할 수도 있었다. 이런 정황가운데서는 모든 문제에있어서 조심스런 서로의 접근이 필요했다. 박 교장의 글을 잘 살펴보면 그는 먼저이사회가 주일성수 문제를제기한방법에 불만을 갖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이사회는 처음부터공석에서 이 문제를 다룬 것이다. 이사중진가운데에는 교수가 있어 언제나신학교에서서로 만나 개인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본인에게 개인적으로 문의하거나 논의한 일없이 이사회공식석상에서문제를 제기한데 그는 당황했다. 이러한 접근방법은 동역자간의 신뢰를 깨트리고 큰 오해를 낳게 되는 것이다. 그다음시찰회가 파송한분으로부터 노회공석에서이일에 관하여 말하라는 권고를 듣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의 환경을 바르게 관찰하고 분석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은 고려신학교의신학의 터를 놓고, 진리운동의 핵심이 되는 신학교육을15년 간 주도해온 교회지도자요신학자인 그에 대한취급방법에 문제가 없었다고 보기 어렵다. 이사회가문제의근본발단동기를 공적으로 발표할 때에“. . .이 사실을 목격한 어떤 타 교파교인들이보고<고려 파 신학교교장도 주일날돈 주고택시타고 돌아다니 드레라 고려파도 별수 없네>하여 이것이 말썽이 되어서 이문제가부산. 대구, 기타지방에 여론으로 떠돌게 되어본 신학교이사들도 이 사실을 알게 되어졌다”고했다. 이사회에서 이 문제를 다룬 동기에 대한설명이 너무도 빈약해석 연하게 들려지지 않는다. 다른 교파사람들의 비난이 문제제기의 동인이 될 수 없다. 이사회가 취급한 문제의 핵심은 주일에 택시를 탄 것보다 선교사전송문제로 주일오전예배를 참석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박 교장은 잠시전송을 하고 주일예배를 가까운 교회에 가서드리려고 계획하고나갔으나 면회수속이오래 걸려 부득이 예배시간을 놓쳤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안식일성수 문제화되었을 때에 박 교장이“주일에 사세부득이한 일이나 자비를 베푸는 일, 혹은 선한일은 할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의 교훈이고(마12:11, 12, 7),우리장로교교리이다(요리문답 제60)라고 성경적으로 교리적으로 해명하였다. 그리고 이사회로부터 자신이 책임표시를 해줄 것을 요구했을 때에 그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당시 박 교장의“주일 지키는 법에 대하여”란 논설과“답변서”,이사회 측의“주일 지키는 일에 대하여 란 박 윤선목사의 논문에 답변함”이란 글을 주의 깊게 살피게 될 때 정치적이고 인간적인감정이 저변에 짙게 깔려있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무엇보다 양측으로부터 감정이 첨예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보기 때문이다. 박 교장은 이사회가하는 일은“트집잡고본인을 전국적으로 매장하는”것이라 하고, “주일날에 부득이한일과자비를 행하는 것은 교리 화되리만큼 확실한 성경에 근거 있는 일”인데도“교계의 어떤 인사들이나의 그 행동을 비평할 뿐 아니라 복음의 명예를 가지고 다니는 나를 매장할 정도로 많이 비난하였고, 심지어 치리회 앞에까지 문제화시켰다”고했다. 이에 대하여이사회는“주일날목사가 공적예배시간을 선교사전송에이용한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가 문제이다”라고하면서“박 목사는<하나님께 공적예배 드리는 시간을 선교사전송에이용하고 공적예배시간에 불참했으니>주일성수에 대한가장 요긴한 부분을 소홀히 한 것이 되고 말았다”라고 응수했다. 이사회가 교장 직을 해임하고, 교수시무를 중지한 일에 관하여 박 교장은 노회만이목사를 치리할 수 있는데“하나의 私設團體(사설단체)로서 나의교수직을 중지시킨 것은 목사인 나에게 큰 치명상을 주었다”고 항의했다. 이에 대하여이사회는 이것은교회적인 治理(치리)가아니고,신학교교장직해임은교수회장직으로의기구변경시행의결과교장제도폐지의결과이고, 도의적 책임을 질수 없다고 함으로“전국교회에 미치게 될 주일성수문제에 좋지 못한 영향을 막기 위한정신에서신학교를 운영하는 본이사회의 책임상부득이한 행정적 조치로 교장 직 사면을 수리한 것뿐이다. 우리이사회는 치리기관도 아니요 또 누구를 치리할 권리도 없고, 또 누구를 치리한 것도 아니다. 그런고로 이사회의 사무 상 행정 처사를 치리로 오해하거나 혼돈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라고 답했다. 박 윤선목사는 그의 자서전에서“1960년, 聖 守 主日(성수주일)에 대한의견차이로 말미암아나는 그 당시 이사회의 요구를 응할 수 없으므로 그해가을에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고 이었다”고했다. 당시 박 교장은 분명히 고려신학교를 떠나도록 강요를 당한 셈이다. 이사회가 기구개편에 의해 교장 직이 자연히 해임되었다고 하지만, 주일에 생긴 문제로교장직에서 해임을 당한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수중지를 다. 남 영환목사는 그 당시의 상황을 밝히면서“남 영환목사에게는 부득이한사건으로 인정되나,(박 교장에게는)대예배를 중시하지 않았다는 것을 들었던 것이다”라고 했다. 당시 남 목사의경우가부득이한 일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기에이는 권징에 해당될 일이 아니었다. 본인이 자원하였고, 노회는 이에 따라 권징을 가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잠시교회의 건덕에 유익이 되었을 수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것이성경의원리를 따른 교회생활의 건설에 공헌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박 교장은신학자의 입장에서 그 사건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증을 하고, 주일을 범하지 않은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에비추어 정죄할 수 없고, 특수한당시의교회생활에 미칠 덕에 관계된 일이었다면 예배모범과 건덕을 들어 교수를 중단시킨“징계 적 조처”는 건설적이 되지는 못한 것이다. 여기서 박 교장이조건 없이 당시의 교회적인주일성수분위기를 고려하고, 건덕을 위해공적인“유감”을 표시하였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이사회의 문제처리방법은 이런 신뢰와 사랑의분위기를 마련해주지 못했다고 보여 진다.1960년12월5일합동총회를앞두고합동문제수의를위해부산노회임시노회가모였다. 이때에 부산노회상당수의 회원들은 이사회가 박 윤선목사를 해임한데대한유감을 갖게 되었다. 한 부선목사에게 행한 처사문제에대해서도 같은 유감을 갖게 되었다. 주일성수문제에있어서 박 윤선교장의 견해를 옹호한 이유로그도 박 교장과유사한조처를 당했기 때문이다. 부산노회는“한 부선목사와 박 윤선목사에 대하여신학교이사회가 처사한 것은 교섭위원을선정하여 이사회와 양인이백지로 돌아가도록 권면하기로 가결”하고 교섭위원5인을 투표로 선정했다. 그러나 박 윤선목사는 이미 학교를 떠났고, 모든 관심의 초점은교회의합동에 있었기 때문에 노회가기대하고결정한 것에 대한 어떤 결과도 나타나지 않았다. 박 윤선목사와 한 부선목사는 신학교설립초기부터15년 간 고려신학교의신학의 기반을 다지고 모든 시간과 정력과 사랑을 쏟은 분들이었다. 이들의 헌신적인봉사와 협력 없이 설립자들이 품어온 신앙의 이상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이 고려신학교와 깊이 맺어온 사랑의 관계를 단절해야했다. 박 윤선교장이 고려신학교를 영구히 떠나게 되었고, 한 부선목사도 고려신학교교수로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박 교장사건과 합동:
박 교장이 교수중지통고를 받은 것이 부산 남 교회에서 제10회 총회를 마친 다음날인1960년9월24일이었다. 이때는 이미 총회가 승 동측과의 합동을 위한합동추진위원을 내고“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합동을 전제로 하고 추진하기로”결정하고, 총회는 합동추진을 위해 정회한 때였다. 승 동측과의 합동은 이때에 거의기정사실처럼 되어있을 때였다. 승 동측과의 합동은 이때에 거의기정사실처럼 되어있을 때였다. 이 결정적인합동을 앞두고, 이 사회는 박 교장에 대한 단호한“징계처리”를 단행한 것이다. 합동을 적극추진한교회지도자들의 대부분이 당시고려신학교의 이사로봉사하고 있었다. 이교회지도자들이합동에 대한 적극적 자세를 갖게 된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으나, 그 가장 큰 이유 중의하나는 당면한신학교의 위기를 합동으로 극복하자는데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난국의 극복방법은 개혁주의신앙가들이가진 신중한 방법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합동의결과로신학교의 위기극복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여호와의 은혜로운 간섭이 아니었으나 더 면 고려신학교는 완전히 없어질 뻔 한 더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때우리교회지도자들은분명히거듭된과오를범하였다고보게된다.이과오와그결과는우리신학대학원과교회에역사적인큰교훈을남기고있다.
2.총신과의신학교합병으로온시련
1)난국에빠진예장의총회신학교
박형룡박사의3천만환사건:
고려신학교가50년대후반에이르러교회소송문제에대한견해의차이와, 갑자기생긴주일성수문제를둘러싼이사회와박윤선교장과의대립등으로진통을겪어오는동안, 총회파(승동측)계통의총회신학교도복잡한정치환경속에서분열을겪게되고갈피를잡지못하고있었다.50년대후반에이학교가 당면한시험은“총회파”(경남노회를축출한총회에속한교회를고려파계통의교회는이렇게부름)교회를분열의위기로몰아가게되었다. 박형룡박사가1948년5얼고려신학교를이탈했을때에, 그는 개방적인자세로전한국교회를배경하기를원했고, 모든외국선교회와협력을 도모하기를원했다. 이런그의개방적인태도는결과적으로고려신학측을독선주의자, 신성파로몰아총회로부터축출을 당하게하는데간접적인도움을주었다. 그간서울에서장로회신학교를세우고거기교장으로취임하고(1948년6월),총회직영허락(1949년4월)을받았으나, 그길이평탄하지만은않았다. 그의“장로회신학교”가1951년총회에서“조선신학교”와함께직영이취소되고“총회신학교”가신설됨으로교장자리를감부열선교사에게내어주게되었다. 몇 년후1953년9월에그가다시“총회신학교”교장으로취임하게되었다. 그러나1958년에이르러소위남산대지불하3,000만환유용사건으로치명상을 입고학교장직을사임해야만하게되었다. 이사들도그와함께도의적책임을지고전원사임하게되었다.
장신파의내분과 분열:
이때를 계기로 장신파속에 잠재하고 있던 內分(내분)이 밖으로 크게 들어나게 되었다.1953년6월조선신학교 측과의 분열이후내적으로 세계기독교협의회(The World Council of Churches)의회원교회로 남아있기를 원하는 분들(에큐 메니 칼 측이라 부름)과 보수적 입장을 취하여 이를 반대하는 복음주의자들(NAE)사이에 있어오던 암투가 교회정치현장에 뚜렷하게 들어나게 된 것이다. 전자의중심인물은한 경직목사였고, 후자의정신적지주는 박 형 룡 박사였다. 소위3,000만환사건으로 복음주의측은 매우 큰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박 형 룡 의 몰락은 복음주의자들의 몰락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래서 양편은 신학교이사의 다수를 차지할 뿐 아니라.1959년 총회총대의 다수를 얻음으로 대세를 잡아 승리하기위해 모든 정치적 역량을 동원하였다.1959년1월각노회가 이사를 선출하여 파송했다. 그 결과는 예 큐 메니 칼 측과 복음주의자들 측의 비율이40대17로 나타나 에큐 메니 칼 측에 절대 유리하게 되었으며, 이분들이 실행위원을 선정한 결과12명중8명이 에큐 메니 칼 측이요, 복음주의자들(NAE)측에는4명에 불과하여 완패를 당한 셈이 되었다. 그 후1959년9월24일제44회총회가대전 중앙교회당에서 모였었는데. 이때에도 복음주의자들 측(NAE)이 우세하지 못했다. 경기노회가두 편으로 나뉘어 양쪽으로부터 총대명단이 올라와 어느 편을 받을 것인지 투표에 부친결과 이것도124대119(기권5)로 에큐 메니 칼 측의 승리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복음주의자들 측으로부터 반발이 일어나 회의진행이 어렵게 되고, 이들 측에서 총회를11월24일까지 정회하자는 동의를 하여 노진현회장이 이를 강행통과시킴으로 총회의분열은결정적이 되어버렸다. 복음주의자들 측은정회하고 흩어졌으나, 에큐 메니 칼 측은선교사들과 함께 그 밤에 상경하여 연동교회에서 속회함으로“연동 측 장로교회총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복음주의자들 측은정한날짜대로11월24일에 서울 승 동 교회에서모여소위“승 동측장로교회총회”가되었다. 이 총회는 세계기독교협의회(W CC)를 영구히 탈퇴하기로 하고, “복음주의자연합회"(NAE)도 총회와는 관계없으나 분쟁의 요인이 된다는 평을 듣고 있음을 이유로 교직자들이탈퇴하기로 가결했다. 이 총회파의대전 총회의혼란과 분열은 한국장로교사에서다시한번 진리를 위한선한싸움이라기보다는, 인간적인 계 락 으로 교권 장악을 위한 싸움을 했다는 짙은 인상을 남겼다.
총회신학교의 분열:
총회가 둘로 분열됨에 따라 신학교도 양분되었다. 총회신학교에는1958년3월 박 형 룡 박사가3,000만환사건에 책임을 지고사임한 후 당시총회장이었던 노진현목사가교장대리로 일을 맡아보고 있었다. 노진현목사는언제나중립노선을걸어온분이요,1956년에프린스톤신학교에수학한일도있었기때문에에큐메니칼측에가까운인물로이해되고,당시총회장이기도했기때문에학교장대리에적임자로여겨졌다.교장문제는제44총회까지도 해결되지 않았다. 제44회총회전이사회는 후임교장을 위해 투표했으나 복음주의자들 측에서는 명 신 홍 박사를 에큐 메니 칼 측에서는 계 일승박사를 교장으로 추대하기를 원하여, 양측이 팽 팽이맞섬으로2차 투표에도 어느 편이과반수를 얻지 못하게 되어, 교장문제를해결하지 못한 채 제44회 총회를 맞게 되었다. 곧 총회가 분열되고 신학교가 분열되자 양측은해임, 임명 등으로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다. 에큐 메니 칼 계인연동측은 노 진현교장대리를 해임하고 계 일승박사를 교장으로 선임하였다. 승 동측은계일승, 김 윤 국, 박 창 환을 교수직에서 해임키로 하고 박 형 룡, 김치선, 김 홍전 제씨를 신학교수에 임명하기로 가결했다. 승 동측의 총회신학교는 남산에서그대로 계속했는데,500여명의 재학생 가운데 약300명이연동 측 학교로 떠나버리고,200여명만 이 남았다. 그런데 총회신학교는 정부에서그곳에 국회의사당을 세우겠다는 계획으로 철수를 요구해와1961년3월에 그 자리를 비어주고, 야간학교인대한신학교의 교실을 낮에 빌려 강의를 하다가8월에 용산구한강로2가에 있는4층 빌딩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 건물은 국제기독교연합회(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의 맥 킨 타이어(Carl Mac In tire)총재로부터10만 불을 얻어 구입한 건물이었다. 승 동측총회신학교는 이 건물에 학교간판을 걸고 이후5년간 의 신학교살림을 살게 되었다.
승동측의 딜레마:
분열이후 승 동측총회와 총회신학교는 큰 난관에 부딪치게 되었다. 아무리 복음주의를 외치고, 연 동측의 W CC적 에큐 메니 칼 운동의 결점을 들어 비난해도 박 형 룡 박사가 범한 실수 때문에 일반기독교계에는 이것이정치적싸움으로 강하게 비치게 되었다. 오랫동안 친구가 되어 지원해오던 선교사들로부터도 완전히 외면을 당하게 됨으로 국제적으로도 고립되었다. 특별히 이것은박박사에게 큰 충격일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일찍부터 이선교회들의 배후교회들이다 세계기독교협의회(W CC)의주도적회원교회임을 알면서도 이드로 가의 협력을 원했던 것이다. 그들로부터 돈을 받아 학교부지도사고, 학교건축도 하려고 했다. 그가 사기당한 돈 가운데상당한부분이 선교부에서준 것이었다. 실로 그는 내적인 큰 모순을 알고일해 온 것이다. 그는 당시총회가선임한에큐 메니 칼 연구위원회위원 중 한분이었다.1957년제42회 총회는 이 에큐 메니 칼 연구위원회가보고한“친선과 협조를 위한에큐 메니 칼 운동은 과거나 현재에도참가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계속참가하기”로 한다는 보고를 받아 결정하기까지 했다. 그러니 박 박사는 에큐 메니 칼 운동에 대하여교회안에서책임 있는 비판자가 되지못했다. 당시신학교이사회의 이사들 중에 선교사들이 있고 선교사가 이사장이었으니 그는 이모든 것을 침묵함으로 수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제이들 선교사들의 도움이일시에 사라져버린 것이다. 승 동측은대내적으로 복음진리수호를 위해분열을 불사했다고 큰소리를 칠 수 없었고, 대외적으로도 모든 선교회와 절연됨으로 고립이 되어버렸다. 그 결과국제기독교협의회(IC CC)의 맥 킨 타이어에게 까지 손을 내어밀게 된 것이다.지난날에메 첸(J. G. Mac hen)을 분열주의자로 혹평했던 분들이, 정말분열에 앞장서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는 맥 킨 타이어에게 손을 벌린 것은 너무도 역설적이었다.
위기극복을 위한 길의 탐색: 고신파와의 합동
이런 시점에 승 동측은모든 난관을 지혜롭게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 결과가 고려파와의 합동이었다. 고려 파는 그동안 부산경남지역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적은교회집단이었다. 그러나 고려 파 교회는 한국의전기독교계에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철저한 개혁주의 칼 빈 신학의 노선을파수하는 교회인 것이 인정되어왔다. 그러므로 고려파와의 합동은 자신들이보수라는사실을 웅변적으로 한국교계에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었다. 나아가 총신측은 처음부터한부선선교사를 위시한 고려신학교에 협력하는 선교 자들을 메 첸 파라고 비난하고 비하시켜왔다. 그러나 이제 이들이 정신적인협력을 구할 수 있는 외국선교회란 이들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려파와의 합동은 이선교부와 자연히 관계를 갖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고로 고려 파 교회와의합동은대외적으로도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승 동측교회들의“1960년 봄 노회는10년 전 헤어져나간 고신형제들을 영입해야한다는 여론이비등한 가운데 열렸다.”
2)고려 측과 예장의 전격적인합동
단번에 이루어진 밀월의 약속:
장신 측 총회가 분열된 후 대내대외 적으로 면목을 새롭게 하고, 교회생활의 안정을찾기위해서는고려파와의합동이최선책이라고생각한승동측지도자들은고려측지도자들과대화를나누기원했다. 그래서1960년8월 서울에서양측지도자들의 모임이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당시고려측지도자들도 교회소송문제를 둘러싸고 겪은 내분, 경기노회의 행정보류, 박 윤선교장과의 불편한 관계 등으로 탈진상태에 이른 위기상항에서 이를 극복하기위한환경의 변화와탈출구를 내심 찾고 있었다. 이때에 승 동측에서 애원하듯 합동을 제의해오게 될 때, 고려파지도자들은 기다린 듯 그 제의를 수용하게 되었다. 이모임에 참여하고 돌아온8명 가운데한사람도그들의 제의를 수용하는데 이의를 갖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지도자들은 이들의 순간적인 哀訴(애소)에 역사가증언해주는 이들의 정략적인성향을 평가해볼 생각의 여유도 갖지 않았다. 지난날의 어두운역사의그림자도 순간적으로 잊어버리기로 한 것이다. 진실한 사랑을 확인하지도 않은 채 蜜月(밀월)의 약속을 하게 된 셈이다. 순간우리지도자들은 이들을 도와주고 생색을 내면서 본인들이 안고 있는 위기를 극복하려했는지 모른다. 이웃의 애소에 순간적으로 겸손을 잃고 우쭐했는지도 모른다. 고려 파 교회가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하여는 별 관심을 갖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하나님은 교만한자를낮추시는 분이시다.
과속으로 치달은 합동:
8월의 비공식적인만남으로 양측은 전격적인합동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양측은1960년9월 총회에서합동문제를구체적으로 취급하게 되었다. 고려측은9월20일부터23일까지 부산 남 교회에서모인 제10회 총회에서진주노회가제출한 승 동측과의 합동헌의 건을 받아 승 동측과의 합동을 추진하기로 결의하고, 합동추진위원9명을 선정했다. 이들은 합동연구위원이아니라“합동추진위원”이었다. 승 동측은9월 총회에서 더 적극적으로“신앙노선이 같은 고려파의합동에 관한 건은 합동하기로 가결하고, 합동위원9인을 임원회에 맡겨 선임보고 하도록”가결했다. 합동위원9인을 임원회에 맡겨 선임보고 하도록”가결했다. 합동은 이미 고려측지도자들의 마음속에 필연적인사실이 되어있었고, 승 동측지도자들에게는 기정사실처럼 되어있었다. 이는 양총회가“합동을 전제로”하고 추진위원을 냈으며, 또 이 총회를 파회가 아닌 정회를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단지지금은 필요한 형식적절차를 밟고 있는 것뿐이었다. 여기서 교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의 신중함과 인내의 결핍이 나타났다. 개혁주의세계에서 교회직분 자들의 위치가중요하나, 직분 자들(목사와 장로)이교회를 형성하지는 않는 것이다. 교회의 기본권은 교회회중에게 있다. 직분 자들은 교회회중의뜻을 귀중하게 취급해야한다. 지도자들의 독주는 교회를 그릇되게 이끌어갈 위험이 있다. 교회가일반적으로 승 동측과의 합동에 대해생각해보지도 않은 때에. 지도자들의 마음이 이미 정해진 것은 개혁주의교회생활과는 거리가 멀다.
11월22일제10회 총회속회가부산남교회당에서 모였다. 이 총회는 승 동측과의 합동추진위원들의보고를 듣는 것이 중요한 안건이었다. 합동위원들은 승 동측위원들과만나합동에 대한구체적인합의를 보고, 연내에 합동총회로 모이기로 하여 그 날짜를1960년12월13일로정해 보고하였다. 총회는 이보고를이의 없이 받아들이고, 다음속회를1960년12월13일 오후에 서울홍천교회에서모이기로하고 다시 정회했다. 합동의과정이쏜살처럼 진행되어갔다. 고신총회는 그동안합동문제를 각 노회에 수의하기로 가결함으로, 법적인형식이라도 밟아 나아갔다. 그러나 승 동측은 이런 과정도 무시했다. 고신 측 합동추진위원들이 합동추진논의과정에서 노회수의를 제안했으나 승 동측위원들은“난색을 표하면서 총회가 먼저합동을 한 후에 노회는 설득과 함께 밀어 부 치자”고했다는 것이다. 이때에고신지도자들은 지난날에이들의 敎權專橫(교권전횡)으로 당한과거의 피해를 상기하고 경계했어야한다. 그러나 “고신측도 이에 동의하여줌”으로 그들의 관습에 젖은 교권남용을 눈감아주면서 합동에 임했다. 그 결과오래지 않아 우리지도자들은 다수와 교권의 횡포가 어떠한 것임을 늦게나마 다시 깨닫고, 개혁주의정통신앙과 생활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불합리한 방법으로 복교, 환원하는 부끄러운 역사를 남기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교회원리를 외면하는 편의주의 적 교회정치가 결코 교회에 유익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이때에 경남(법통)노회와 그 노회에 속한 송 상석목사는 합동에 대한 신중한 접근을 함으로 주목을 끌게 되었다. 특별히 송 상석목사는 전격적으로 합동을 추진해 가는데 불만을 품었다. 그래서 총회가 첫 번째 속회로 모였을 때(11월22일)에그는 당시총회장이었으나 합동절차에 대한보고를 받기 전“사임서와 그이유서를 제출하고 퇴장”을 하여 부회장인 박손 혁 목사가 사회를 하며 그 보고를 받게 되었다. 송 상석목사가교회의 영적지도자로서 큰 은사를 받은 분이라고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교회정치면에서 그는 다른 사람들이 갖지 못한 탁월한 감각과 통찰력을 가졌다. 그는 교회정치가로서신중성을 결여한 전격적인합동에 문제가 있음을 내다보았던 것이다.1960년12월13일 오후3시30분 서울 흥 천 교회에서 두 번째로 모인총회속회개회예배에서 총회장으로서 그는 왕 하6:1-7을 읽고“고려파의 葬送曲(장송곡)이 되지 말고 승리의개선가가 되기를 원한 다”라는 요지의 설교를 했다. 합동의 결과에 대한 위기의식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속회는“합동취지 및 선서문”을 낭독하여 마지막점검을 하게 되었다. 바로 그날 저녁6시30분에 서울인사동에 있는 승 동교회당에서 합동총회(고신 제10회 속회, 장신 제45회 총회속회)가열렸다. 한 상동목사(고신 측)를 회장, 김 윤찬 목사(승 동측)를 부회장으로 선출하고, 합동총회가 고려, 예장양측합동의원들의 보고를 채택함으로 합동이 성취되었다.
영속성을 결여한 합동
양총회의합동은 깊은 성찰과 연구 없이 이루어낸 불안한 것이었다. 이 급조된 합동으로 고려 측지도자들은 어 쨌던 당면한 교회와 신학교의위기를 극복하기위한 방안이 나타나기만을 바랐다는 인상을 남겼다. 영속적인교회의유익보다 순간적인문제해결에 더 관심을 가졌다고 보여 졌다. 이성적 성찰보다 옅은 감정에 더 지배를 받았다고도 보여 진 것이다. 합동위원중의 한분이었던 남 영환목사는 그의 책에서 두 번이나 박 형 룡 박사와 승 동측지도자들이 과거를 회상하며 눈물로 개혁주의신학을 위해함께 새 출발을 하자고 간곡히 제의해온 것을 거절할 수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교회일은 정서와 감정에 지배를 받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합동의“취지 및 선서문”속에도 합리성보다는 정서가 너무 짙게 깔려있다. 짧은글 속에 너무 자주“울음” “눈물”, “감격의 눈물” “웃음”등의 표현이 사용되고 있음을 본다. “질이 같으면 서로 합하고 성이 같으면 서로 응한 다”고하며“신앙이 같고 신학체계가 같은 교리를 주장하는 똑같은 두 총회가 함께 뭉치지 못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했다. 이는 너무도 피상적이고 정서적인 결론이었다. 신학과 교리가 같다는 것은 대체로 옳을 수 있다. 그러나 양측이 개혁주의 정통신학을 이해하고 사는 신앙생활의 실상이 너무도 달랐던 것은 지난날 피부로 체험해왔다. 이들이 개혁주의정통신학을 구호로 내세웠으나, 생활에서 이를 보여주지 않았다. 박 윤선목사의 소위“주일성수 문제”를 그렇게 심각하게 다루어온교회지도자들이“승 동측”교회의“생활”에 대해위기감을 조금도 느끼지 않고 합동에 뛰어든 것은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교회는 전반적으로 이것을 염려했다.質(질)과 性(성)이 같은 것을 서로 구체적으로 살펴 확인해보지 못했다. 더욱 교회의 일은 서로 아픔을 느끼면서도 역사적으로 밝힐 것은 밝히고 해결할 것은 해결해야했다. 제36총회가 경남(법통)노회 측에 행한 불법처사를 역사적인입장에서 공개적으로 밝혀 사과하고, 고려 파 교회가 이것을 받아들여야했다. 고려 파 전교회가 먼저이것을 확인해야했다. 고려 파전교회가 먼저이것을 확인해야했다. 고려 파 진리운동은 단지 몇몇 지도자들만의 운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합동총회의 취지 및 선서문에서단지“1951년5월25일제36회 총회에서경남법통노회에 대한결의와 총회장의포고문은 이를 취소하다”라고만 언급하고 지나갔다. 이는 너무도 형식적이고 뜻이 담겨 있지 않는 내용이다. 구체적으로 협의하고, 선명하게 문자화하였어야할 중대한 사항들에 대하여 해석을 달리할 수 있는 여유를 많이 남겨두었다. 이것은 뛰어난 정치적지략을가지고 교권 장악에 전문성을 가진 분들에게 좋은 기회와 많은 여유를 주게 된 것이다.무엇보다도 합동으로 오게 될 이로운 측면만을 보고, 합동으로 야기될 수 있는 어려운 측면에 대하여는 간과해버렸다. 어 쨌던 깊은 연구와 치밀한 계획, 깊은 사려가 결여된 합동이 좋은 결과를 낼 수 없었다. 교회는 사람이 아니고 주께서 세워 가신다(마18:19).위기가운데서도 주의말씀을 순종하면서인내하고 나아가면 주께서 그의 교회와 기관에 길을 여시고, 그가 함께 하심을 보게 해주실 것이다. 그러기에 확고한 언약의 말씀이교회에 주어져있다. 그런데 이때에 교회지도자들은 당면한교회의난관을 극복하기위한 너무도 빠르고 쉬운 길을 찾았다. 뚜렷한 이념과 역사를 가진 교회가 이렇게 쉽고 빠르게 다른 교회와합동한 예를 교회사에서 찾아볼 수 없다. 고신 측과 승 동측은8월에 비공식적 모임을 가진 후5개월 만에 합동을 하게 된 것이다. 합동에 관하여 공식적으로 논의한지는 단지2개월 반 만이었다. 약하고 흔들리는 터 위에 아름답고 견고한집을 세워보려는 꿈을 가졌다. 특별히 교회생활의 핵이라 할 수 있는 신학교의 정책에 대한 확실한 계획이나 방안이 전혀 서있지 않았다. 고려 파초기 교회가 고려신학교에 대하여가졌던 관심과 사랑을 생각할 때. 신학교에 대한 확실한 방안 없이 합동에 임한 것은 이상하리만큼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3)고려신학교의 폐합과 복교
선명성을 결여한 신학교정책
합동 시에 안 밖으로 선언한 합동원칙가운데 중요한 항목 중의하나가 신학교에 대한 것이었다. 고려측은신학교의 미래의 정책에 관하여 어느 정도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승 동측 는 처음부터 고려신학교의 총신에로의 흡수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별 관심을 갖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고려 측에서는 고려신학교가 비록 형식상으로는 사립학교였지만, 정신적으로는 교회의 직영신학교와 다름이 없었고, 교회는 이 학교를 사랑하고 밤낮으로 기도해왔기 때문에 교회합동을 앞두고 조금은 관심을 가진 것이다. 그러기에 합동총회직전 서울 흥 천 교회에서 속회가 마지막으로 모여(1960. 12. 13오후),합동추진위원회가제시한“취지 및 선서문”을 점검할 때에“신학교는 총회직영의 단일신학교로하고”라고 한 것을“신학교는 총회직영으로 일원화하고”로 수정하여 채용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때 제시된“합동취지 및 선서문”의 내용을 볼 때, 고신총회합동추진위원들은 합동총회 몇 시간전인이때까지“총회직영의 단일신학교”로 하는데 합의하고 왔었던 것이다. 이는 양측합동위원들이 고려신학교를 총회신학교에 폐합하는 일을 당연하게이해하고 왔다는 강한인상을 남긴다. 합동총회직전에 와서야 고려측만이“취지 및 선서문”에 신학교의“총회직영의 일원화”로 수정을 한 것이다. 이“일원화”란 정책은 송 상석목사의정치적기지에서 나왔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어휘를 삽입하고 정책을 세운 것이 너무 늦었다. 그러기에 당시 고려 측 총회회원들 중에도 이것이 무엇을 확실히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문의하는 분들이 상당수 있었다. 당일저녁(1960. 12. 13)합동총회는 고려측이 수정한 소위“신학교의 총회직영 일원화원칙”을 별 토론 없이 받아들였다. 총회가 받은 보고에, “합동원칙”으로 신학교문제에있어서는“신학교는 총회직영의 일원적인신학교로하고 양측동수의 이사를 선출하여 이사회를 구성하여 경영케 한다. 이사의 선출은 이사회에서 선임하여 총회의 인준을 얻는다. 이사의수는 양측12명으로 하며, 예장측은 현 실행 이사로 하고 고신측은 현 이사9명과 보선한3명의 이사로 한 다”고했다. 이총회가 받은“취지 및 선서문”에도“신학교는 총회직영의신학교로 일원화하고양보다 질에 중점을 두며 이사회의 이사선임제 청제를 폐기하지 않기로 한 다”라고 하였다. 여기“총회직영의 신학교일원화”라는 신학교정책에 대한개념은 쌍방의 충분한 토론과 이해 없이 도입된 것이었다. 그러나 승 동측에서는“일원화”를 통합의의미로이해하고 고려신학교의폐쇄를 전제했었던 것이다. 이렇게 신학교의 미래에 대한 확실한방안과 선명성을 결여한 정책은 처음부터 불행의 불씨를 안고 있었다.
고려신학교폐합의 결정
1961년9월21일제46회총회가부산남교회에서모였다. 합동한지10개월이지난후첫번째모이는 합동총회였다. 한상동목사가다시총회장으로당선되었다. 그러나임원진에는 전성도목사한분만이회록서기로당선되었다. 승동측의총대수가고려측총대수의배를능가하는상황에서고신계의한상동목사를총회장으로다시뽑아연임하게한것은매우예외적인일이었다. 여기에는혹정치적인 목적이배후에 있었는지도모른다. 총회에서는신학교단일화의문제가큰이슈로 등장을했다. 부산의고려신학교가건재해 있는것에불만한승동측의호남, 충청지역9개노회가신학교단일화문제를안건으로헌의해놓고 총회의결의를 촉구했다.9월25일 호남총대 대표 김교완을대표로하는52명은 총회석상에서 공동명의로 신학교단일화를위한“건의건과청원건”을내었다. 경남(법통)노회는이런분위기를감지하고, 고려신학교존속건의건을 총회에 올렸다. 이건의서에서 고려신학교의폐합은 합동총회가 중외에선서한 신학교일원화원칙에위반된다고지적했다. 그리고고려신학교에현재재적하고있는학생들은입학시에고려신학교에서수업한다는묵계약을하고들어온것임을언급했다. 그러나 총회는 이경남노회의건의서를 먼저취급하지 않고 총회석상에서 제출된 신학교 단일화를 위해호남총대들이 제출한 청원서를 먼저 취급하였다. 총회에서는 승 동측총대의 수가 절대다수였음으로 이신학교단일화의결정은 무난히 통과되었다. 총회는“신학교를 연내로 단일 화 하자는 것은 즉석에서 그대로 받기로 가결”하게 되었다. 이결정은당시 총회장이었던 고려신학교 설립 지 한 상동목사의 사회 하에 되어 진 것이었다. 그다음날인9월26일 경남(법통노회)노회는 긴급건의서에 총회행정회무추진의 불법성을 지적하고 이에 대한 납득할 수 있는 해명이 있기까지 퇴장을 단행할 것을 밝히고 퇴장했다. 지적한 불법가운데가장 중요한 것이 경남노회가 제출한 고려신학존속을 위한건의서를 내었으나 총회는 이에 대하여, 일고의가치도 인정하지 않고 고려신학교를 서울총회신학교에 폐합시키기로 가결했다는 것이었다. 총회는 고려신학교폐합을 결의한 후에야 정치부보고를 통해“경남(법통)노회장송상석 씨의 고려신학교를 그대로 존속시켜 달라는 건은 이미 총회에서 결정된 사실이오니, 그 결정대로 함이 가한 줄 아오며”라고 답변하였다. 고려측은 합동 후 첫 번째로 모인총회에서 다수를 통한교권의 횡포를 체험하게된 것이다.
공약을 파기한 다수의 횡포
합동 후 첫 번째 모인총회가한마음이 되어 한걸음도 제대로 내어 디디지 못한 채 크게 흔들렸다. 승 동측에 속했던 분들은 이제합동이 된 이상합동시의공약 같은 것은 중요하게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총대의 다수를 무기로 공약을 여지없이 파기하고 나아갔다. 합동공약을 파기하고 고려신학교를 총회신학교에 폐합시킨 것만 아니다. 합동 시 총회가 채택한 합동위원보고에“이사의 선출은 이사회에서선임하고 총회의인준을 받는다. 이사의수는 양측12명으로”한다고 했다. 그러나 총회의 한회기도 넘기기 전에 이공약도 폐기시켜버린 것이다. 총회에 보고된 이사회조직보고에 의하면 양측이사수의비율이3대1이 되어있었다. 이사16명중 승 동측이10명이고 고려측은6명에 불과했다.4년 조8명 가운데고려측은단지두 사람이 끼어있고,2년 조8명 가운데 반수인4명이고려 측이었다.2년 후에는16명이사중에 고려 측 이사는단지두분만이 남을 가능성도보였다. 노 진현목사(합동 측)가 이사장이 되고 한 상동목사(고려 측)가 부이사장이 되었다. “합동원칙”에 이사를 총회에서선임하지 않고, “이사회가 이사선임제 청제를 폐하지 않기로”했다. 이것은 양측의수의 균형을 맞추고 적임자를 이사로 세우는데 큰 목적이 있었다. 합동총회시의공약이 단한번의 총회를 넘기지 못하고 폐기되어 버린 것이다. 이것은 바로 말과 행실에 진실을 요구한제9계명을 공적으로 범한 것이다.
경남노회의 항쟁
수적인 우세를 이용하여 교회법도공약도유린하며 나가는 총회를 지켜본 경남노회가 퇴장으로 항의를 보인 것은 이해할만한일이었다. 경남노회는 제46회 총회폐회 후1961년10월10일임시노회로모여 합동총회행정비위 점을 지적하고, 시정을 촉구하는“대책결의안”을10월20일자로 발표했다. 그리고10월25일에는“경남노회결의문해명서”를 잇따라 발표했다. “결의안”에서7가지시정대책을제시하는 중, 특별히“고신폐합은 합동원칙에 위반되는“非違 事(비위 사)임을 지적하고“이것은 불법결의인즉 취소”할 것을 주장했다. 특별히 합동선서2의(4)항을 들고 이것이“제47회총회시까지 구현되지 아니할 때는 합동서약조인이 자동적으로 해소”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것은 바로 고려 측 교회의 환원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 항목은“신학교는 총회직영을 일원화하여 양보다 질에 중점을 두며 이사회가 이사선임제 청제를 폐지하지 않기로 한 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결의문해명서”에서는 지난 제45회 총회에서경남노회총대가 퇴장한 원인을 해명하고 있다. 경남노회의“긴급건의안이 不問曲直(불문곡직)하고(多數(다수)橫暴(횡포))에 의해서)무자비하게거부를 당하게 되고 보니 최종적으로 남은호소의 길은 행동으로 의사를 반영시키는 퇴장뿐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의안해명”을 하면서“총회합동원칙과선서문을 破棄(파기)한 것은 곧 합동총회를 破綻(파탄)한 것이다”라고 하여 합동총회가 채택한 양측합동위원회의보고가운데“신학교는 총회직영의 이원적인신학교로하고 이사는 양측동수로 하기로”했는데도 불구하고 신학교단일화를 결의하고 고려 측 이사수를3분의1로 한 것은“고신 측 정신을 말살 코 저”함에 있고 이사 동수에 합의함으로“地位(지위)를 선약한 것은 합동을 유치하기위한 기만정신이폭로된 細音(세음)이라고지적했다. 이문서에나타난강력한표현은합동총회를향한강력한시정과경고를목적한 것일지라도, 상대방의정치적저의를바로간파하고적나라하게들어낸 것이었다. 나아가합동에대한실망과실패를자인하고, 한몸으로서의교회공동체생활이불가능함을 선명하게밝힌 것이라볼수있다.
고려신학교의폐합
총회가고려신학교의폐합을결정한후이사회는양신학교의단일화지시를내렸다.1961년12월28일 고려신학교와총회신학교의교수들은서울에서연합교수회를갖고몇가지중대한결정을했다. 첫째, 학교의교장제를교수회장제로바꾸기로하고, 교수회장은윤번제로하기로하였다. 이에따라박형룡박사가1년간교수회장의자리를맡고부산분교장에는박손혁복사가임하게되었다. 둘째, 두학교를단일화하여서울총회신학교를본교로, 부산의고려신학교를분교로하기로하였다. 이에따라신년도부터안용준, 오병세교수는서울본교에와서교수하고, 한상동목사는서울과부산을왕래하며 교수하기로하고, 이상근, 홍반식교수는부산에서교수하기로하였다. 셋째, 부산의3학년학생들은1962년첫학기부터서울에서강의를받게하며, 넷째, 신입생은서울에서만모집하고, 부산분교에서는모집하지않기로하며, 다섯째, 부산에남은본별과1, 2학년은총회신학교부산분교에서수업을하기로한것이다. 이결정은고려신학교를총회신학교에폐합시킴으로고려신학교역사의마감을의미하였으며2년후에는부산분교마저없어짐으로부산에는고려신학교의흔적까지도사라지게 됨을의미했다.
고려신학교학생들의항의:
이때부산고려신학교에적을두고있던학생들은1962년첫학기부터고려신학교가총회신학교에폐합될것이라는소식을듣자, 교회지도자들의처사에실망하고, 고려신학교폐합방지를위해모든노력을다했다. 이들은학우회를열고, 학우회의총의로합동원칙에명시된공약대로일원화원칙에따라 고려신학교를존속시켜달라고진정을했다.1962년2월고려신학교가총회신학교분교가되었다는 소식이왔다. 이때이들은모교의이름이사라지고총회신학교에병합되는것에자존심이여지없이상했다. 그래서이들은병합된학교의교명이라도새로운것으로바꾸어달라고이사장인노진현목사엑요구해보았다. 그 후1962년3월14일새학기를맞아등교한이들은고려신학교의간판이제거되고“총회신학교부산분교”라는새간판이결려있는것을발견하고허탈감을느꼈다. 학우회를소집하고, 이사장노진현목사와분교장박손혁목사에게합동원칙을무시하고고려신학교를폐쇄한데대한부당성을역설했으나 이분들은이사회와 양교합동교수회가 결정한일이니 자기들로서는어떻게할수 없는일이라고만하였다. 학생들은이사회와교계지도자들의학교처사에대한불신과불만으로매우들뜬한학기를보내었다. 특별히고려신학교설립자요오랫동안이사장으로봉사해온한상동목사는 학생들의불만을크게샀을뿐아니라, 학생들과상당한대치관계에서게되었다. 그는1961년도제46회총회총회장으로서신학교일원화원칙을고수하지않고, 승동측의다수의횡포를간과하고, 신학교단일화결정을추진해나갔을뿐아니라, 학생들의간절한호소와반대에도불구하고고려신학교폐합을강하게추진하여갔었던때문이었다. 그의신학교폐합강행은학생들에게이해할수없는일이었다. 이해4월11일제17회학우회총회가열렸다. 학생회총회는교명이바뀌었으나그바뀐명칭을따라학생회명칭을바꾸지않고, 그들이진정하여온일들이해결될때까지그대로(고려신학교학우회)두기로결의하였다. 그리고1962년5월7일부터1주간박윤선 前(전)교장을강사로모시고부흥회를갖기로하여교수회의허락도받았다. 이로서학생들은1960년도에주일성수문제의견해차이로이사회가박윤선교장을해임하고, 교수중지를함으로신학교와교회에더큰어려움을초래케한처사에 대한간접적인항의를한셈이다.
고려신학교복교선언
학생들은1962학년도제2학기에도고려신학교를지키고자하는뜻을버리지않았다.제47회총회가끝난후1962년10월11일학생들은총회로모여지난총회의결과이제“고려신학교의존속이란(분교명아래서라도)불가능하게되었으므로...한번만더진정을해봐서반응이없을때최후수단을강구하자고 결정하고, 별위원을선출하여진정서를초안중에있었는데”,한상동목사가1962년10월17일총회 신학교부산분교경건회를마친직후돌발적으로“고려신학교복교선언”을 하게 되었다. 이 선언은 너무 갑작스러운 것이고, 누구와도 구체적인 협의가 없었던 것이었기에 참으로 하나의“폭탄선언”이었다. 이 선언은 신학교와 온 교계에 천파만파 큰 파장을 일으켜 나가게 되었다. 이때상당수의 사람들이 이를 고신 측의 환원을 위한 첫 신호로 이해를 했다. 실제 이는 마침내 고신 파 교회의 환원으로 귀결되었다. 그런데 한 상동목사는 고려신학교복교를 선언하면서 사전에 前(전)고려신학교이사들이나 교수들뿐 아니라. 고려 파 교회의 지도자들과 아무런 협의를 하지 않았으며, 교회가 납득할 수 있는 복교의 이유를 공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전 고려신학교가 사립이었지만 이미 교회의공기관으로서 인정되어 왔고, 이사회가 있어 개인의 소유기관이 아니었다. 더욱 신학교폐합과 관련하여서도 이미 경남 노회가 총회에 강하게 항의를 해온 상황에서 아무런 의론 없이 그렇게 독자적으로 복교를 선언하게된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특별히 고려신학교폐합이 합동공약과 선서문의파기임을 선명하게 밝히고, 이는 곧“합동총회를 파기한 것이다”라고까지 경남노회로 하여금 공언하게 만든 송 상석목사와도논의한번하지도 않고 전격적인 복교선언을 한 것은 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그에게는 밝히기 어려운 내적인 사정이 있을 수 있다. 전이사회나 고신계지도자들이모여 의논한다고 해도 복교에 대한 합의를 보기는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을 것으로 짐작도 해보게 된다. 송 상석목사를 만나 의논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었으나 자존심이 허락되지 안 았(0) 는 지 모른다. 송 목사는 합동에 신중했을 때에, 그는 적극성을 보였으며, 송 목사가 학교폐합에 대해 반대했을 때에 그는 이를 강행한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것이 추호라도 그의 독자적 행동에 동기로 작용되었다면, 이는 너무도 인간적이었을 것이다. 어느 쨌던 고려신학교는 본질적으로 교회의공기관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값있는 많은 봉사에도 불구하고 그의 독자적인거사만큼은 교회공동체 안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어떤 면에서 그의 신앙적 모험의생활을 고려하고 그의 독자적 행동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해보게 된다. 신학교폐합을 스스로 강행한지 일 년도 못되었다. 그러나 이기간 동안 그는 승 동측의 공약파기를 위시한 여러 부조리한 일들을 겪고 고려신학교의복교가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단해보는 것이다. 그러나 폐합을 강행한 그가 이제 와서 폐합에 대한 변명을 하고 복교에 대한 이유를 밝히는 것이 부담스러웠고, 침묵을 금으로 생각하기에 이르지 않았 는 가생각도해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독자적으로 행동하여 모든비난을 혼자짐으로 지난날에 교회와 학교를 잘못 이끌어온데 대한속죄를 하기 원했는지 모른다. 이런 그의 마음의 자세는 복교선언직후 학생대표들이 은퇴를요구했을때 이를확약하고, 환원 총회시에 합동에 앞선일에 대하여 사과했을 뿐아니라. 사죄하는 의미에서 은퇴의사를 표시한데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는 분명히 신학교의 폐합과 복교의 과정에서 유감스러운 흔적을 남겼다. 지난날 아무리 훌륭한 신앙인격을소유하고, 주의말씀을 죽기까지 순종하여 온 종이라도 부패한인간성을 완전히 극복할 수있는 聖人(성인)은아니다. 한상동목사도 지난날 주를위해 죽음을 택한 충성스런 종이었으나 이점에 있어서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의 생애에서 이따금 기억시켜 주고 있다. 고려신학교 복교선언에 대한 소식이 들렸을 때 상당수의 고신인들이 복교에 관해서만은 내심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미 경남노회는 합동총회에 고신폐합의 불법을주장하고제47회총회까지 합동시의 공약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는 합동서약 조인이 자동적으로 해소될 것이라는 강력한선언까지 했었기 때문이다(1961. 10. 25).그러나많은 고신교회 지도자들은 고려신학교의 복교에 관해서는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면서도, 교회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독자적“폭탄적선언”은 쉽게 수용할 수 없었다. 그의 내적동기가 순수하다 하더라도 이 방법만은 교회공동체 생활에서는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교회는 질서있게 살아야하는 주의 몸된 공동체이다(고전14:4).이런“폭탄적인선언”은 그 거사자체가“개혁”이라기보다는“혁명적”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한 목사자신이 이를 하나의 혁명이라고 했다는것이다. 주께서 교회의 왕 되심과 역사의 주되심을 믿는 개혁주의 세계에서는 혁명적인 거사를 신앙적인 행위로 보지 않는다. 복교가 선언되자 학교와 교회는 갈피를 잡지 못할 만큼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총회 신학교 이사회가 부산에 긴급소집 되었다. 한 상동목사가 대구에 출타 중이었으므로 이사회는 회의장소를 다시 대구로 옮겨 거기서 부산총회신학교 영구 분교설치를 결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결의로 복교선언이 취소되지 않았다.10월22일 구 고려신학교 이사들이 모였다. 이 모임에서 분명한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이어10월23일밤에 舊(구)고신이사 주최하에 부산 교역자들이 삼일 교회당에 소집되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복교를 지지하였으나, 수명이 반대를 했다. 이러는 중 고려 신학교 학우회는 10월31일에 한 상동 목사의 복교선언과 연관하여5개항의 결 의문이 담긴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속에서 학우회는 그동안 고려신학교의 폐교를 반대하고 학교의 존속을 위해 노력해 온 역사를 자세하게 밝히고, 이제 합동 원칙을 따라 양측 동수로 구성된 이사회를 통한 신학교 일 원화에 철저를 기해줄 것과, 고신폐합조치에 선봉이 되어 오늘의 결과를 초래케 한 구 고신 이사들에게 책임을 강하게 물으면서, 박윤선 목사를 다시 교수로 채용해 달라는 청원을 하였다. 이 성명서는 복교의 사실을 다행스럽게 받아 들이면서도 교회지도자에 대한 불신감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특별히 학생들이 박윤선 목사를 다시 모셔오도록 요청한 것은, 지난날 고신 이사회가 그를 떠나게 한데 대한 책임을 묻는 뜻이 다시 한번 강하게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한상동 목사는 복교선언을 하면서10월23일부터는 고려신학교 학생으로 등교하라고 했으나. 이런 환경가운데서 수업이 제대로 진행될 수 없었다. 학생들 세계에서는 복교를 지지하는 학생들과 반대하는 학생들 간에 마찰이 생겼다. 거의3주가지난후11월6일에야 한상동 목사 사회로 복교 예배를 갖게 되고,11월20일부터 수업을 한다고 공고하게 되었다. 그런데 복교를 반대하는 총신 분교 측이한 건물안에서 수업을 계속해 나가게 되어 학생들 간에 충돌이 일어났다. 건물 소유권 문제에 있어서도 논란이 일어났다. 총신측은 전 고려 신학교 교사는 고려 신학교가 총회신학교에 폐합된이상 총회 신학교에 속한 총회 신학교 분교의 건물이라고 소유권을 주장하게 되고, 복교 측은 고려신학교 복교가 되었으니 고려신학교의 소유라고 주장함으로 맞서게 되었다. 그러나 총신 측이 사회 측이 토지 소유등기를 하기 바로 전에 한상동 목사 명의로 등기가 완료되어 재산 소유권에 대한 큰 충돌은 피할 수 있게 되었다. 결과 총신 분교 측은11월22일부터 딴 곳으로 옮겨 수업을 하게 되고, 고신 측은 본 건물에서 수업에 임하게 되었다.
3.시련의극복:고려신학교의 새정비
1)소위 三 博士(삼 박사)의 성명과 합류
복교선언 후 일어난 큰 파장속에서 약 두달동안 교수들을 잃고 표류해 오던 고려신학교는1962년12월 17일에 박손혁, 오병세, 이근삼 세교수가 고려신학교 복교에 합류하여 교수로 취임하게되고, 다음 날에는 고신폐합 조처에 따라 서울 총신 본교에 가서 수업을 하던 졸업생5명이 부산에 내려와 수업에 참여함으로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합류를 기대해 온 홍반식 교수가 복교 방법에 불만을 느껴 합류를 주저하였다. 그러나3개월후1963년 새 학년도가 시작되기 직전 홍반식, 이근삼, 오병세 세 교수는 모교를 위해 함께 봉사할 것에 합의를 보고 성명서를 발표하게 되었다. 이로써 고려신학교는 교수진이 정비되어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어가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3항으로 된 성명서에서
첫째, “같은 고려신학교 출신으로 한국 교회 봉사라는 같은 목적을 위해 외국에서 신학을 연구하고 돌아와, 변화된 한국교회의 환경으로 인해 나눠져 있게 되었으나, 품었던 뜻을 관철하기 위해 함께 행동하기로 했다”는 것을 밝히고,
둘째, “고려 신학교의 복교 방법은 합당하지 않았으나, 그 동기가 순수하고, 그 정신이 한국 교회를 사랑하는데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고했으며,
셋째, 운영을 담당한 이사회와 교육을 담당한 교수회의 책임한계를 분명히 할 것을 확인하고, 고려신학교를 위해 동역할 것임을 천명했다. 홍반식 교수와 오병세 교수는 합동 후인1961년도에 미국유학을 마치고 귀국 후 바로 합동 후 조직된 이사회에 의해 교수로 임명이되어, 홍반식 교수는 부산 분교에서 오병세 교수는 서울 본교에서 봉사하여 왔다. 그리고 이근삼 교수는1962년에 화란에서 연구를 마치고9월에 귀국하여 잠시 칼빈 학원 의원장으로 취임하여 봉사하고 있었다. 이 세분은 고려신학교 초창기 제5회 동기생으로서 고려신학교 졸업생으로서는 처음으로 거의 같은 때(1954)에 미국 유학 길에 올랐기 때문에 고신 계의 모든 교회들은 이분들이 차 세대의 고신을 이끌어 갈 지도자들로 알고 위해 늘 기도했다. 그러니 이분들은 고려신학교와 고신교회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내적인 연관관계를 맺어온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고려신학교 초창기의 뜨거운 진리운동의 용광로 속에 주형된 분들로서 같은 목적을 가지고 유학하고 돌아온 분들이었기에 종종 개인적으로 서로 다른 환경의 지배를 받고 의견을 달리하는 경우가 있었지만은, 공동의 목적을 위해서는 이를 늘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고신 제2세대가 들어서 박윤선, 이상근, 한부선, 김진홍, 한상동 등 첫 세대가 터를 다져 놓은 곳에서 그 동안 폐교의 위기를 넘긴 학교를 새로 정비하고 건설하는 사역을 맡게된 것이다. 이들은 이로부터60년대를 거쳐80년대에 이르기까지 동역하여 왔고, 이따금 신학교 내외로부터 일어나는 시험과 시련이 있었으나 개혁주의 고신교회 건설이라는 하나의 목적을 위한 응집 력은 이 모든 것을 슬기롭게 극복해 갈 수 있게 했다. 교회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주님은 그의 교회의 필요를 아시고 일찍이 이들을 준비시켜 세우셔서 고신의 개혁주의 신학의 맥이 실종위기에 있을 때에 이 맥을 이어가게 하시고, 환원 후 고신교회 생활의 정착에 이바지하게 하셨다.
2)고려신학교의 재 정착과 교회의 환원
고려신학교의 재 정착
1963년3월 새학기부터 고려신학교는 학사를 재 정비하고 자리를 잡아갔다. 고려신학교 복교이후 부산경남 지역뿐 아니라 전국에 있는 고신교회가 큰 파장을 겪게 되었다. 어떤 분들은 고신 복교는 신학교 일원화의 합동 원칙을 어긴 결과이니, 지금이라도 일 원화의 원칙으로 돌아감으로 교회의 분열을 막아야 한다고 했다. 다른 어떤 분들은 영구한 분교를 세우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승 동 측에 있는 대부분의 목사들은 학교를 일단 폐합한 이상 일 원화도 영구 분교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복교 선언 후 송상석 목사는 아무런 협의없이 독자적으로 복교 선언을 한 한상동 목사에 대해 강한 불만을 나타내면서도, 그의 입장을 변명하고 옹호하는 너그러움과 정치적 기량을 보였다. 그는 실상 합동시 합동 연구 추진위원의 한사람으로 신학교의 폐합을 반대하고, “신학교일원화”원칙을 구상하고 포함시킨 장본인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당시 고려신학교 폐합을 추진해 간 한상동 목사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1961년 총회가 고려신학교 폐합을 결정한데 대한 강력한 항의를 경남노회 중심으로 이미 했다. 복교선언 후1963년2월5일 대전 중앙교회에서 전국 노회장, 증경 총회장 및 총회 임원석 연석 회의가 모였을 때에, 그는 한상동 목사의 독자적 행동방식에 관하여 강도 높은 비판을 하면서도, 합동원칙을 외면한 총회에 그 원인을 돌리고, 그의 정신을 변호하고 복교를 지지 했다. 그는“잘못은 한 목사에게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총회가 합동원칙을 무시하고 다수로서 고신 폐합을 단행한 일과 그 시정 건의를 도외시 한 처사는 과오라 아니할 수 없다” “고신복교가 무질서 한 불법적인 처사라고 할지라도 그는 말하기를 혁명이라고 한다. 노진현 목사 말이 혁명이 성공되지 못하면 역적이 된다고 하나 우리는 그를 역적으로 만들 마음은 없다.” “그래서 복교 방법이 잘못 되었다 할지라도 그 정신을 이해하는 것이 총회적으로 유익할 것 같다”. “이단적 이설이나 분열을 조장하지 않고 소위 정화운동, 보수사상 정통신학에 주력하 겠다는 것인즉 고신복교를 반대할 하등의 이유는 없다.”결론적으로 그는 고신 복교를 지지한다고 밝히고, 교회의“분열의 모면은 총회의 현명한 처사에 달려 있다”고 함으로 경고 했다. 이제 시간이 감에 따라 고려신학교는 안정되어 갔다. 구 고신 이사들이 차츰 의견을 통일하고, 일단 고려신학교가 복교된 이상 신학교 일원화 제의에 응하지 않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들은 늦게나마 고려신학교 정체 유지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제 고려신학교는 자기 정체를 다시 찾아 지난날 다져놓은 터전위에 자체의 전통과 역사를 주의 축복속에 재 창조해갈 결의를 한 것이다.
고신교회의 환원
그동안 옛 고신 측 교회 안에는 신학교의 복교는 지지하되 이로 인해서 합동된 교회가 분열 되어서는 안된다고 하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합동 후 승 동 측의 다수에 의한 교권 지배에 실증을 느끼고 고려파의 뿌리를 찾아 옛날로 돌아가야 한다는 분들이 있기도 했다. 그런데 차츰 복교를 반대하는 목사들의 지도아래 전도사로 봉사하는 고려신학교 학생들이 총신 부산 분교로 옮기도록 압력을 받게 되고, 자리를 옮겨야 하는 어려움을 당면하게 되었다.1963년6월 합동총회 고시 부는 서울에서 공부하던 중 고려신학교 복교선언 후 부산 고려신학교로 내려와 고려신학교 제17회로 졸업을 하게 된 남 영희, 이 지영, 진 학 일, 최 만 술, 최 진교5명에게 강도사 고시 자격을 허락하지 않았다. 고시부가 합동을 유지해 나갈 의지를 가졌었다면, 일단 강도사 응시를 받고, 다음 총회에 문의를 하여 결론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시부는 복교한 고려신학교 졸업생의 자격을 전혀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고시 부의 이 처사는 어떤 면에서 옛 고신 계 교회의 환원을 강요하게 된 셈이다. 이를 본 고신 계 지도자들은9월에 있을 제48회 총회에서도 이들에 대한 구제는 기대 할 수 없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다수의 무기를 가지고 專制(전제)해 온 승 동 측의 습성으로 보아 그 총회가“일원화원칙”으로 다시 돌아가 고려신학교를 인정하고, 고신 졸업생들에게 강도사 고시를 허락할 것으로 기대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前(전)고신 교회 지도자들은 고신 교회의 환원운동을 펴기 시작하게 되었다. 이 강도사 고시 불허 문제가 환원 운동의 결정적인 동기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 부산 시내의 고신 측 출신 교역자들은1963년7월29일에 환원 발기회를 조직하고 고신 교회 환원 운동의 시동을 걸었다. 이 환원 발기 위원회가 발표한 취지문에서 발기 위원들은 승 동 측이 합동 원칙에 명기된 공약을 파기함으로 합동으로부터의 환원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합동선서에 기록된“신학교 일원화를1년이 못 가서 단일화 시키고,” “이 사회 구성에 있어서 양방 동일 수 제를 폐지”하였으며, “노회 명칭과 회수를 수로써 결정함으로 합동정신과 이념을 무참하게 짓밟았다”고 했다. “만일 이대로 지속한다면 우리의 장래는 심히 암담하고 비참할 것은 명약관화의 사실”임으로“우리 교회를 이 암흑으로부터 구출해 내고 한국교회의 정통신학 교육과 경건생활의 재 건설을 위하여 합동 전으로 돌아가서 진용을 정비하고 진정한 칼빈주의 교회건설”을 하기 원한다고 하면서, “합동시의 고신 측 총 회장에게 환원 총회 소집과 환원 선언과 재 조직을 요청한다”고 했다. 당시 환원이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전 고신 측 진용 안에서도 상당히 강력한 반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취지문 발표가 있자 환원을 반대하는 목사들로부터 환원반대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그러나1963년8월8일 부산 남 교회에서 환원을 지지하는 분들이 모여 부산 노회의 환원을 결의하게 되었다. 이어 전국적으로 전라, 경북, 경기, 경남, 진주, 경동노회가 차례로 환원하게 되어1963년9월17일에는 부산 남 교회에서“대한 예수교 장로회 제13회 환원 총회”라는 이름으로 모여 합동한지34개월 만에 고신 총회는 환원하게 되었다. 고신 총회 교회는 승 동 측과의 합동으로 많은 것을 잃었다. 합동시590교회였던 교회의 수가 환원 시에 445교회로 줄어 들었다.150여 교회를 승 동 측에 잃게 된 것이다. 신중성을 갖지 못한 교회 지도자들의 과오가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인가를 여기서 보게 된다. 당시 우리들의 선진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과신하고 순진한 군졸들을 이끌고 적지에 뛰어 들어가 명분 없는 싸움에 심각한 상실과 무서운 상처만 입고 후퇴하게 된 어리석은 장성들과 같았다. 합동 시 총 회장이었던 송 상석 목사가 사과를 하고, 합동하는 일에 앞장 섰던 한 상동 목사가 사죄의 의미에서 은퇴 의사를 밝히고, 교회지도자들인 목사와 장로들은 일 주간 자숙하기로 했다. 사람은 실수하고 많은 것을 잃어도 교회의 주가 되신 주님은 잃는 일이 없다. 그는 이 교회와 신학교를 없애려는 어두운 세력을 다시 이기시고 찾으신 것이다. 고려신학교는 주의 은혜로 다시 한번 시련을 딛고 일어나 주께서 맡기신 개혁주의 한국 교회 건설을 위한 대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환원 된 고려파 교회의 사랑과 지원을 받으며 전진해가게 되었다.
제2장
총회직영 고려신학교 시대(1965-1970)
1.총회직영이 되기까지
신학교의 총회 직영 문제는 1947년 박 형 룡 박사가 고려신학교 초대 교장으로 취임했을 때부터 논의된 문제였다. 당시 이 문제에 있어서 고려신학교 설립자들과 박 박사는 원리적으로 의견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시기면에 있어서 의견을 달리했다. 설립자 한상동 목사 측에서는 당시 친일 배교자들과 자유주이자들이 총회의 교권을 장악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여, 적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고, 박 박사는 즉시 총회의 인준을 받고 총회를 배경하는 학교가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는 이 적기를 기다릴 수 없었다. 이것이 그가 고려신학교를 이탈하게 된 이유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고려신학교 설립자인 한상동 목사는 총회 직영에 대하여 원칙적인 동의는 했었으나, 총회 직영보다는 사립운영을 선호해 온 편이었다. 총회 직영이 될 때에, 이사 선출 문제에 있어서 정치적인 영향을 받기 쉽고, 이사로 선임된 분들이 이사의 직책을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용하게 될 가능성이 많다고 보아서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총회의 인정을 받으면서도, 이사들이 이사를 선출하여 학교 운영을 책임지는 사설 학교를 원한 것이다. 한상동 목사는 사설신학교에 대한 선호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박 형 룡 박사가 떠난 후1952년에 고신교회가 독립 된 교단이 되고, 총회를 지배하던 자유주의자들과 교권주의자들의 교권 영역을 벗어나 독립적인 교회생활이 정착 되었지만은, 신학교 직영 문제에 관심을 별로 보이지 않았다.1956년을 전후하여 신학교 교육을 담당한 박윤선 교장 측과 운영을 담당한 이사회 측 사이에 내적인 마찰이 일게 되었다. 이는 특별히 고신 계 총 노회가 총회로 개편되는 역사적 총회인1956년9월제6회 총회에서 밖으로 들어나게 되었다. 신학교 교장인 박윤선 목사가“우리 총회가 개혁운동10주년을 맞아 총회로 출발함에 있어서 과거10년을 회고하면서 잘못된 것은 시정하자”고 하면서 몇 가지를 제언 하는 가운데“교회질서에 대한 문제” “신학교에 대한 재정문제”를 제기했다. 신학교의 재정적 운영 문제가 총회에서 이렇게 공적으로 제기되기는 이것이 처음이었다. 신학교 교장이“교회질서”문제를 언급하면서, 학교의 재정문제를 제기한 것은 총회가 이 신학교를 경제적으로 책임지고 직영 해 달라는 간접적인 호소였다고 볼 수 있다. 사실상 사립 신학교는 법적으로 교회의 학교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법적으로 사립 신학교의 운영에 대하여 어떤 면으로도 감독 권을 행사할 수 없는 것이다. 교수의 봉급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도 이 사회에 책임을 물을 수 없고, 교육내용이 잘못 되어 있어도, 공적으로 불만을 나타낼 수 없다. 교회는 단지 그 학교를 외면하고, 학생을 추천하지 않는 소극적인 방법으로 밖에 달리 항의할 길이 없다. 그리고 사립학교는 교회에 운영에 대한 짐을 지울 수 없다. 단지 자원해서 보내주는 헌금을 기다릴 뿐이다. 사립 신학교의 가장 큰 결점은 학교의 이념과 전통을 오래 지켜갈 수 없다는데 있다. 설립자가 떠나게 되면, 맥이 끊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기에 언제나 독립 신학교, 혹은 사립 신학교의 전통는 오래 가지 못했다. 그러나 교회가 직영하는 신학교는 다르다. 교회가 신학교를 운영하고 감독한다. 교회란 한 세대만 존재하다. 없어져 버리는 일시적 기관이 아니고, 주께서 세우시고 통치해 가시는 영속성을 가진 기관이다. 주는 교회안에서 한 세대가 가면 다음 세대로 하여금 전통을 계승해 가게 하신다. 교회는 사도적 전통을 보존하고 이어가는 기관이 되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교는 원칙적으로 교회의 직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주께서는 비상한 시대에 교회의 개혁과 재건을 위해 충성된 종들로 하여금 고려신학교를 설립하게 하셨다. 비상한 때에 살던 경남 노회는 이것이 주께서 하시는 일인 것으로 믿고, 신학교 설립에 찬동하고 도움을 약속했다. 비상한 때는 언제나 계속되는 것이 아니다. 이때가 지나면 모든 것은 정상을 되찾아야 한다. 비상한 때가 지났을 때 고려신학교는 교회의 직영이 자연스럽게 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것이 지연됨으로 학교에 여러 가지 시험이 뒤 따르게 되었다. 경남노회가 고려신학교의 설립을 인정하고 도움을 약속했을 때에 양자 사이에 아무런 협약이 없었다. 노회는 단지 설립을 인정하고, 지원한다는 것 뿐이었다. 교회의 치리회인 노회가 학교의 운영에 직접 관련을 할 수 없었다. 교회의 치리회인 노회가 학교의 운영에 직접 관련을 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신 교단이 출발한 후에도 총 노회와 총회에서 입학 추천문제, 신학 입학 자격 문제 등에 관해서만 종종 언급이 되었을 뿐, 체제, 운영문제에 있어서는 전혀 언급이 되지 않았다. 학교 교수들은 교회에 의해 임용된 것이 아니고, 사립 이사회에 의해 임용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운영 문제에 어떤 불만이 있어도 교수회는 교회에 직접 호소할 수 없었다. 박 윤선 목사는1957년에“그때까지일해나온이사진에대하여유감스러운 것은이사겸교수로시무하시는분이태반이었읍니다. 이렇게하는것은교육상자연스럽지못한일들을가져옵니다”라고말함으로써교수회와이사회간의책임한계가선명하지않아운영이제대로되고있지않음에간접적인불만을토로했다. 이런상황을포착한경남노회는1958년9월제8회총회에“고려신학교를총회직영으로하여달라”는건의를하게되었다. 이때총회는신학교직영문제교섭위원으로 박손혁, 한부선, 송상석, 김주연, 이종기5명을선정하였다. 그러나일년동안교섭이잘진행되징 않았다. 그래서경남노회는다시1959년제9회총회에“고려신학교총회직영에대하여확대위원을조직하도록하여달라”는건의를하게되었다. 이총회는“각노회장과총회장과부회장과서기를위원으로하여신학교당국과의논하여다음총회에보고하도록”결의를했다.2년동안교섭위원을내어활동했으나총회직영문제는교섭이되지않았다.1960년제10회총회에는두노회로부터건의가올라오게되었다. 경남노회와진주노회가“고려신학교를총회가직영하도록하여달라”고건의를하게된것이다. 총회는“위원5명을선정하여신학교이사회와교섭하여금번회기중에보고하도록”하고송상석, 조수완, 한 대식, 추국원, 정성봉을택하였다. 그러나이런결정을한후같은총회는승동측과“합동을전제로하고”합동추진위원을내고 합동을위해 총회를 정회하기로 결정을 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사설 신학교를 총회직영으로 결정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되어 버렸다. 그래서 총회는“교섭위원장보고와 이사장 한상동목사를 보류하여 달라는 이유설명을듣고 보류하도록가결”하였다. 결과적으로신학교총회직영은합동전3년동안공식논의를해왔으나결실을보지못했다. 그이유는설립자가사립운영을 선호한데있었다. 특수한역사적상황에서 사립으로설립된 이신학교가그학교가지향한회개, 정화, 교회재건, 개혁주의보수신학의파수란 아름다운 목적때문에 교회의 전적인사랑과 지원을받아왔으나, 적기에제도적개혁을하지못하고 명실공히교회의학교로 승화되지못한까닭에 학교가적지않은 손해를입고 왔다고보아야한다.
2.고려신학교의 총회직영
1)총회의직영결정
어떤 면에서 합동전에 고려신학교가 총회직영이 되고, 총회의재산이 되지 않았던 것이 다행이었다고 보여 지기도 한다. 만일고신이총회의 직영이었고, 교회의합동과 함께 모든 재산이승동측과 합해짐으로 합동이사회가 재산에 대한 모든 소유권을 주장 했소 었 더 면, 복교를 했다 해도재산을 확보하기위해서는 법정에 호소하는 길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가정도 해보게 된다. 고려신학교가 일찍부터 총회직영이었다면, 고신 계 교회들이 결코 쉽게 고려신학교폐합에 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경남노회는 고려신학교가 비록사립이었을지라도, 폐합결정을 반대하고 二元化(이원화)를 주장하며 이를 결정한제46회 총회로부터 퇴장까지 했던 것이다. 사실당시폐합의결정은 고려신학교의 법적“주인”이라할 수 있는 한상동목사의무게가 크게 실려 있었던 것이다. 본인이 이일을 추진해가는 데에 다른 분들이 강한반대를 제기하기란 어려웠던 것이다. 고려신학교가 총회 직영 이 었 더 면, 고신교회 모든 지도자들이주인의식을 가지고 폐합을 절대적으로 반대하게 되었을 것으로 믿어지는 것이다. 물 른 이는 과거를 뒤돌아보면서 합리적인가정을 해보는 것뿐이다. 어 쨌던 주께서는 인간의 아집, 자만, 실수, 모든 것을 그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데 합력하여 유익되게 해 가시는데 합력하여 유익되게 해 가시는 주권자이시다. 여기서도 만유의주가 되시고 교회의왕이 되신 그는 그의 선한 뜻을 이루어 가셨음을 보게 된다.(롬8:28, 11:33-36)합동 시까지 사설신학교로 있다가 폐합되었으니, 설립자인한 상동목사는 주인의식을 가지고독자적으로 환원을 선언할 용기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어 쨌던 폐합되었던 신학교가 복교하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의 환원도 뒤따르게 되었다. “세 박사”라 일컫는 세 교수들이 복교한 고려신학교에 동역하기로 선언할 때에도 그 선언문 속에“우리는 신학교를 운영하는 이사회와 학교의교육과 행정을 당 담당하는 교수회의 책임한계를 엄격히 할 것을 확보하고 재단을 구성하여구태를 벗어난 새로운 운영방침수립을 확인하고”고려신학교에서 동역하기로 하였다고 선언한 것은 의미심장한일이었다. 이 내용 속에 신학교총회직영이 직접 언급되지 않았으나, 이 방향으로의 제도적 쇄신을 요구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는 지난날 박 윤선목사가 주장한교수회와이사회의 책임한계주장을 기억나게 한내용이었다. 이제구태를 벗어나야할 때를 당면한 것이다. 환원총회(1963.9)를 지나고, 그다음 제 14회총회가1964년9월22일부산삼일교회당에서 열렸다. 이때에 경기노회로부터“고려신학교를 총회직영으로 하고 신학교운영비를 각 노회로 할당하게 해 달라”는 건의와경남노회의“고려신학교를 본교단과 유기적 관계를 맺게 해 달라”는 건의가 들어오게 되었다. 동시에 당시고려학원이사장인 황 철도목사가“고려신학교와 고신대학 및 고려고등성경학교와 복음병원을 본 총회가 맡아 달라”는 건의안이 들어왔다. 이건의안의 핵심이 되는 신학교 건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대로1958년제8회 총회 때부터 해온 건의의 연장이었다. 이제 이 건의를 더 미룰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이제한상동목사도더 이상 총회직영을 반대하지 않았다. 총회는 이건의안을 다 받아들여 새로 선정되는 총회의이사회가 과거의 이사회의 정신을 이어가도록 했다. 그리고 한 상동목사는 신학교재산일체를 총회에 기부한다는 각서를 내게 되었다. 이어 이 총회는 역사상처음으로 신학교의운영비(비록인건비에 국한된 것이었으나)를 노회에 할당하기로 결정했다. 당시총회가활당한운영비는많지않았다. 그러나 총회가 신학교를 직영한다는 책임의식을 가지고 운영에대한 경제적의무감을 가지기를 시작했다는 것은 매우 뜻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각 노회가 파송하는 이사로서 이사회를 조직하기로 하고, 각 노회 총 대회에서 이사를 선택하여 보냄으로 총회직영 첫 이사회를 구성하게 되었다. 이로서 고려신학교는 설립 18년 만에 마침내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고신)의 직영신학교가 되었다.
2)교회의신학교직영과 개혁주의생활원리:
신학교는 성경적 원리에서교회의신학교가 되어야한다. 이는 개혁주의교회생활원리에 속한다. 신학교는 말씀을 전할전도자를 양성함으로 교회를 봉사하는 기관이다. 말씀증거의 사명이교회에 주어졌다. 주님은 그의 교회에 말씀을 주시고이말씀을 보존하고 가르치며전하게 하셨다. 주 예수님이이 세상에 계셨을 때에12제자는 주의교회를 대표한자들이었고, 교회의 핵을 이루었다. 이들에게 주님은“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아버지와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내가너희에게 분부한 것을 가르쳐지키게하라”고하셨다(마28:16-19,막16:15).그런고로 교회는 전도자양성을 위해 신학교를 세우고, 운영하고, 돕고, 감독할 의무가 있다. 물론신학교의 교회직영이 어느 환경에서나 절대원리라고는 할 수 없다. 주님은비상한환경에서 고려신학교를 사립으로 세우게 하셨다. 그러나 성경의 원리를 따라 교회생활을건설하고, 교회적인사명을 다하려하는 개혁주의교회들은 신학교의교회직영을교회생활의원리로 생각해왔다. 그래서 개혁주의(Reformed Church)는신학교직영의의무를교회의 정치조문에까지넣고있다. 화란의개혁교회는17세기초에개최된도르트총회(The General Synod of Dordrecht,1618-1619)에서이미교회의신학교직영의무조항을교회정치조항에넣었다. 그리고그후오늘날까지신학교는교회가세우고, 운영하고, 감독해야한다고가르치고또한시행하고있다. 신학교의교회직영은실제적인면을고려할때에도매우중요하다. 교회가학교의경제적인운영을책임질때에그마음이따라가게되며, 기도도따라가게된다(마6:21),교회의신학교는교회의감독을필요로한다. 교회는신학교를물질적으로지원할뿐아니라, 신학적으로교리적으로바르게교육을하도록살피고감독할책임이있다. 교회안에는언제나“흉악한이리”가침륜하거나“가만히 들어온사람”이있어기관과교회에큰피해를줄수있기때문이다(행20:29-30,유다4).교회는파송한 이사들을통해서신학교의교육을감독함으로신학교는교회건설을위한책임있는신학교육에임할수있다. 이렇게해서교회와신학교는유기적인관계를가지고일심동체가되는것이다.이럴때에교회의미래도신학교의미래도보장되어진다. 물론신학교가총회직영이라해서 절대안전한기관이되는것은아니다. 이세상에있는교회는아직부패성을가지고 오류를범할수있는인간으로구성된 공동체이기때문에신학교를직영해가는데예상밖의시험이나어려움에부딪칠수도있고, 이를초래할수도있다. 그러나교회는그리스도의승리의약속을믿는공동체이다(마16:18).그렇기때문에우리는그약속의말씀을믿고봉사할뿐이다. 약속의말씀대로살아가면마침내는주께서 그의약속하신말씀대로 교회의승리를보여주실것이다. 우리는이런역사적인증거를고려신학교가총회직영이된후의 역사에서부절히보게된다.
3.학교법인고려학원설립
1)칼빈학원의폐합
1955년에고려신학교예과2년제가4년제로개편되어교명을칼빈학원(칼빈대학)이라정하고신학교로부터독립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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