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장로교회와 역사 pp.59-63, 2009년 제2호, 고신역사연구소...
* 의미 : 남 영환은 "한국교회와 교단"이라는 책과 창간호인 제1호 글에서 백 영희에 대한 개인적 비판을 극단으로 하는데 그 내용은 순전히 거짓말입니다. 그런데 남 영환의 절도 수준의 행위를 구체적으로 비판한 고신역사연구소(소장 이 상규 교수)가 그런 남 영환의 절도 수준의 행위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으면서도 남 영환의 글을 연구소 창간호에 실어 백 영희를 비판한 내용을 무료로 고신역사기념관을 방문하는 이들에게 무차별 배부하는 것은 강도가 도적을 이용한 범법 행위로 비교한다면 너무 심한 표현일까? 다음 자료들을 조금만 면밀하게 살펴 본다면 이런 표현에 대한 시비곡직을 각자 판단할 것으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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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동과 박윤선의 만남
1940년 7월 3일 일제검거로 투옥되었다가 해방과 함께 출옥(1945. 8. 17)한 한상동은 신학교육에 대한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미 감옥에 있을 때 한국교회 쇄신을 위한 새로운 신학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한다. 한상동은 다음과 같이 기록을 남겨두고 있다.
지금 나의 사업은 한국교회의 재건 운동을 하고 있는데, 재건 운동이란 과거 일본 정치하의 잘못을 회개하고 기도생활과 동시에 선지자적으로 외치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신학교를 설립하여 한국교회를 위한 희생의 제물이 되어줄 수 있는 목사를 기르는 사업이다. 그리고 각처에 전도인을 파송하려는 것이 나의 몇 가지 사업이며 이 사업을 위하여 나의 일생을 바치려 함은 오늘 우리 대한 민족은 아무리 하여도 주님의 복음이 아니면 살 길이 없는 까닭이다.
그는 신학교육기관의 설립과 함께 3가지 한국교회 재건 방안을 구상했는데, 새로운 신학교육 기관의 설립, 전도인 양성, 그리고 수양원 설립을 통한 교직자들의 수양이 그것이었다. 이 3가지는 신학교육을 통한 교회 재건으로 정리될 수 있다. 그는 바른 신학교육 없이는 한국교회를 재건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한상동은 자신이 신학교육을 감당할 학문적 준비가 부족했고 이 점을 본인 스스로도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누구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가 안중에 두었던 대표적인 두 인물이 박형룡과 박윤선이었다. 한상동은 1945년 9월 19일 만주에서 일시 귀국했던 박형룡을 평양에서 만나 평양에 새로운 신학교의 설립을 의논했다고 하지만 이 점을 확인할 길이 없다. 무엇보다도 한상동이 평양에 신학교를 설립할 의사가 있었던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다.
평양에서 출옥한 한상동은 고 주기철 목사가 시무하던 산정현교회의 청빙을 받고 처음에는 주저하였으나 이를 수락한 것을 보면 월남할 의사가 없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 점은 마산 문창교회가 1945년 8월 26일 임시 제직회를 열고 한상동 목사를 청빙키로 가결했으나, 평양에 머물고자 했던 점에서 드러난다. 한상동은 평양에 체재할 수 있었으나 월남을 결심했다. 그가 왜 월남을 결심했는가도 분명치 않다. 일반적으로 그는 평양에 체재하려고 했으나, 모친 배봉애 여사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불가피하게 월남하였고 그 후 38선의 고정화로 월북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필자도 남영환의 진술에 근거하여 이렇게 기록한 바 있으나.1) 한상동의 남하는 모친의 별세와 무관했다. 모친 배봉애의 별세는 1945년 9월이었고, 한상동의 남하는 1946년 3월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한상동은 출옥 후 곧장 신학교 설립을 의도한 것 같지는 않다. 심군식은 그가 평양에서 박형룡을 만나 신학교 설립을 의논했다고 하지만, 한상동이 산정현교회 청빙을 수락하고 평양정주를 생각한 것은 일단 목회자로 활동을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북한에서의 공산정권의 발호로 신앙운동이나 교회 운동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월남을 선택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월남한 이후 한상동은 남한 교회 현실을 파악하고 신학교 설립의 긴박성을 자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박윤선을 생각하게 되었고, 그는 귀향소식, 특히 그가 서울에 체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가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박윤선과 한상동의 역사적인 만남이었다. 그러나 이때가 언제였는가에 대해서는 상반된 견해가 있다. 박윤선은 한상동이 월남하여 부산으로 내려가던 도중에 자신을 찾아온 것으로 기억했고 그 때가 4월 경이라고 쓰고 있다.
1946년 3월 1일에 나는 가족과 함께 38선을 넘어서 서울에 도착하였다. 우리 가족은 서울 이태원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해 4월경에 한상동 목사께서 찾아오셨다. 그는 일제 말엽에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인해 일본인의 박해를 받아 평양옥에 수감되었다가 1945년 8.15일 해방과 함께 석방되셨다. 한 목사님은 이때에 부산으로 가시던 도중이었다. 피차 반갑게 만난 중에 한 목사께서 신학교를 새로 세우자고 제안하셨다. 나는 그의 제안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그 시기와 장소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논의한 바 없다.
그러나 심군식은 부산에 있던 한상동이 서울의 박윤선을 찾아간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 무렵 박윤선 목사가 남하하여 서울에 계신다는 소문이 들렸다. 한 목사는 박 목사를 만나기 위하여 서울로 올라갔다. 박 목사는 만주에서 신학교를 하다가 1946년 3월 1일에 서울에 왔다. 한 목사는 수소문 끝에 박윤선 목사의 거처를 알았다. 찾아간 집은 적산 이층 다다미였다. 만나 뜨거운 악수를 나누었다. 한 목사는 박 목사에게 말했다. “목사님, 신학교를 세웁시다. 칼빈주의 신학교를 바로 가르치는 보수 신학교를 세웁시다.” 박 목사는 반가워했다. “예, 목사님께서 신학을 세우시겠다 하시니 반갑습니다. 힘껏 협력하겠습니다.” 한 목사는 박 목사에게서 확답을 받고 부산으로 내려왔다.
서영일의 지적처럼 한상동과 박윤선의 만남에 대한 심군식의 기록을 실제적 전기라기보다는 작가가 재구성한 인상을 준다. 실제로 한상동이 박윤선에게 “칼빈주의 신학을 바로 가르치는.... 신학교를 세웁시다”라고 말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실제로 한상동이 그 당시에 칼빈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했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기 때문이다.
한상동은 새로운 신학교 설립을 통해 한국교회를 개혁하려는 신학입교(神學入敎)의 의지는 강했으나 그 일을 이루어 갈 학문적 토대는 미약했다. 그는 새로운 개혁주의 신학 정립의 적임자로 박윤선을 생각하게 되었고, 그의 협조를 구하게 된 것이다. 이 자리에서 한상동과 박윤선은 정통신학을 가르치는 신학교를 경남노회 내에 설립하기로 합의했으나, 구체적인 장소는 합의하지 못했다. 박윤선은 경기노회의 지지를 받고 있는 조선신학교로 가느냐, 아니면 한상동 목사가 구상하는 신설학교로 갈 것인가를 고심하다가 한상동의 방문을 받고 그와 협력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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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1
『한국장로교회사(고신)』(대한예수교장로회역사편찬 위원회, 1987), 209, 고신교단 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오병세, 위원: 남영환, 심군식, 최해일, 이상규)가 이 책 편찬을 위해 윤독했던 이상규가 집필한 원고를 위원으로 가담했던 남영환이 그대로 가져가 자신의 견해를 첨가하거나 몇 장을 첨가하여 만든 책이 남영환의 『한국교회와 교단』(소망사, 1988)이다. 이 책은 엄밀하게 말해서 남영환의 저작으로 볼 수 없고, 이 책의 출판은 도덕적이라고 할 수 없다. 남영환의 책을 고신역사편찬위원회가 출판한 『한국장로교회사(고신)』과 비교해 보면 얼마나 많은 양을 표절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