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남 연환 인물 연구 - 함양중앙교회와 민영석 전도사
부경교회사연구
제13호(2008. 3)
108-127P
함양중앙교회 및 병곡교회 개척초기(1952-54)회고,2
민상식(부산 새순교회 은퇴장로)
6.共匪(공비)의 교회 및 교역자 사택 침입
1953년 거창시찰회는 우리나라가 통일이 될 때까지 금요일 밤에는 철야 기도회를 열기로 결정하고 함양중앙교회에서는 금요일 밤 마다 구역 예배 후 철야 기도회를 가졌다. 당시 거창시찰장은 남영환목사였다. 그 당시에는 불원간 남. 북 통일이 될 줄로 생각하였다. 당시 철야기도회는 요즈음의 심야기도회와 같은 것이었다. 자정가까이에 기도회를 마치면 통행금지 시간이 됨으로 귀가가 불가능하여 연장하여 기도회를 가지기도 하고 새벽기도회 시간까지 자유로이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 그런데1953년 어느 금요일밤 교회당에서 기도회를 마치고 여 성도는 예배실에서 쉬고 있었고, 남자 교인 중 교회에서 거리가 가까운 이들은 귀가하고 허순길, 노운한 그리고 민형식학생들은 사택 학생방에서 쉬고 있었다. 이날 저녁때 안영숙 집사는 당회장 박태수 목사에게 용무가 있어 개평교회에 가게 되었는데 나의 어머니가 나더러 안 집사를 따라가서 개평교회 도모집사 집의 고구마를 가져오라 하여 나도 같이 개평교회에 갔었다. 그래서 나는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이날 공비가 교회에 침입한 사건이 있었다. 나는 다음날 아침 함양으로 돌아와 간밤에 공비가 함양 시가지를 기습하여 헌병 분견대가 불타고 헌병 한명이 사망하는 불상사가 발생 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함양중앙교회가 하동 새장터 서쪽 끝 길 옆에 자리하고 있으므로 이날 밤 공비들이 시가지로 진입하면서 교회당 앞으로 지나다가 남포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안으로 침입하였다. 예배실에는 여자 교인들만 있다가 군복을 입은 육, 칠명의 군인들이 갑자기 교회당 안으로 들어오니 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여기는 교회인데 어떻게 들어 왔느냐”고 묻고,“조사님 여기 군인들이 들어 왔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군인들이 사택으로 들어왔다.“무슨 일로 들어왔느냐”고 하면서 성경을 보여주니 공비도 어처구니가 없었든지 웃으면서“우리는 빨치산이야”라고 하였다. 아버지 민영석 전도사는 자리에서 엎드려 기도를 하다가 요란한 소리를 듣고 자리에 앉아 있는데 학생들 있는 방문이 열리고 공비가 총을 가슴에 겨누고는 일어나라고 하였다. 사태를 파악한 민 전도사는“여러분들 추운데 고생이 많소. 그러나 하나님을 알고 그 나라를 위해 일 해야 합니다.”라고 하니“무슨 개소리야”하고는 계속 일어서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필자의 어머니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지켜보고 있다가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든지 총을 겨누고 있는 공비를 향하여“여보세요, 이분은 왜정 때도 나라를 위해서 일본 경찰과 일본 헌병대에 잡혀가서 고문을 당하고 고생을 한 사람인데 지금 우리 같은 민족한테 이런 수모를 왜 당해야 합니까?”라고 항의했다. 이때 겨누고 있든 총을 거두고, 학생을 향하여 여기 신발 파는 가게로 안내하라 하였다. 총을 겨누고 있으니 셋 중 누라라도 한 사람은 따라가지 않 으면 안 되었다. 부득이 노운 한 학생이“내가 가지요”하니 노운한 학생을 데리고 나가면서 공비는 민전도사가 신학교 졸업 때 선물로 받은 벽에 걸린 회중시계를 벗겨 제 주머니에 넣고, 또 학생들 방에 깔려있는 모포를 탈취하여 갔다. 이때 남아 있던 두 학생은 공비가 나간 후 크게 두려워하였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안간힘을 써도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하였다. 끌려간 노운한 학생은 꼼짝 못하고 공비들을 따라갔다. 교회당에서 나간 공비들은교회 앞 술집으로 들어가 돈을 요구하기도 했고, 시가지 중심지역의 상점들을 탈취하기도 했다. 노운한 학생은 계속 공비에게 끌려다니다가 저들이 방심한 틈을 타 거리의 짚동 속으로 숨었다. 얼마 후 공비들은 학생이 없어진 것을 알고 욕을 하고는갈 길이 바쁘니 그냥 갔다. 이일로 민전도사를 위시하여 전교인이 걱정을 하였으나 무사히 돌아온 노운한 학생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날 오전 경찰서 형사들은 동리에 다니면서 지난밤 사태에 관해 조사하고 피해상황을 파악하고자 했다. 형사 한명이 교회에 찾아와서 어제 밤에 교회에 다니는 학생이 공비들과 같이 다녔다는데 그 학생이 누구냐며 따지듯 물었다. 민전도사는 공비들이 교회에 침입한 자초지종을 말하고 그 학생은 총을 겨누는 공비에게 끌려 나갔다가 도망처서 교회에 돌아온 이야기를 하고 학생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변호하였다. 당시는 경찰이라고 하면 다 무서워했으나 민전도사는 당당하게 형사에게 말했다. 그런데, 오후에 한 학생이 교회로 찾아와서“조사님, 오전에 형사가 학교에 와서 노운한 학생을 데려갔는데 여태 학교로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화가 난 민전도사는 공비에게 끌려갔던 무고한 학생을 잡아가다니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바로 경찰서로 찾아갔다. 수사과로 들어서니 노운한학생도 있고 그 외 여러 사람이 형사에게 붙들려 와서 수사과 사무실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오전에 교회에 찾아왔던 형사는 민전도사가 사무실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무례하게 대했고, 다리를 걸어 넘어 뜨릴려고 달려 들었다. 왜정 때 경찰이나 헌병대에도 체포되어 곤욕을 치른 일이 있는데 일본경찰이나 헌뱅대도 말을 듣지 않 거나 반항할 때 고문을 가하고 구타를 하는데 해방된 우리나라 경찰에게 이유도 없이 공격을 당하여 크게 황당하였다. 특히 교회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노운한 학생이 보는 앞에서 이게 무슨 망신인가? 민전도사는 말도 없이 무례한 행동을 하는 형사의 힘을 역이용 하였더니 형사가 넘어지면서 정강이를 책상에 심하게 부딛쳐 곤욕스러워했다. 경찰서에서 피의자에게 수모를 당한 일은 그 당시로서는 희귀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의 동료들이 이 사람은 보통사람이 아니라고 생각되었든지 모두 달려들어 민 전도사를 뒤에서 껴안고 넘어졌던 이는 일어나 민전도사와 노운한 학생의 소식이 없어 알아보니 심각한 사태였다. 토요일 밤도 지나고 주일 아침이 되었는데도 풀려나지 못해 주일예배는 학생회장인 허순길군이 인도하였다. 공비의 위협에 끌려 나갔던 학생은 피해자 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의심하고 이상한 방향으로 몰고 가는 것은 횡포였다. 또 교회의 교역자도 몰라보는 이 무지막지한 경찰관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실지 기도하였다. 주일날 점심때가 지난 후 함양지구 치안관이 수사과 사무실로 들어왔다. 당시 약식 재판은 치안관이 법원에서 파견되어 재판하였다. 함양 치안관은 부산 사상출신으로 필자의 초등학교 시절 담임선생이였고 해방 후에는 소식을 알지 못했는데, 함양에 와서 치안관으로 근무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필자는 어린나이에 치안관을 찾아 가는 일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토요일 날 치안관을 찾아갔더라면 민전도사와 노운한군이 그 밤을 경찰서에서 고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치안관이 수사과 사무실을 둘러보니 난데 없이 민영석 전도사가 있는 것을 보고“아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라고 물었다. 자초지종 얘기를 들은 그가 수사과 형사에게 민전도사와 노운한 학생에 대한 수사기록을 보니 노운한 학생은 평소 공비들과 내통하여 오던 중 기습하는 날 공비들의 길 안내를 하였고, 민 전도사는 공비와 내통한 노운한 학생을 두둔한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치안관은 형사에게 민영석 전도사의 왜정 때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하고,“기독교 교역자를 그렇게 대해서는 안 된다. 당신들 큰 실수하였으니 당장 집으로 보내라.”고 했다. 치안관은 내가 책임진다며 확인서를 써 주고 민전도사와 노운한군을 방면하였다. 그 뒤 형사는 교회에 찾아와 사과하였다. 이때의 또 한 가지 기억에 남는 일은 1953년 초에 교회에 출석했던 李義浩(이의호)라는 청년이다. 집이 부산인데 사업차 당분간 함양에 머물게 되어 함양교회로 나왔다. 함양지방의 산에서 채취되는 한약 재료의 열매를 수집하는 일이였다. 본인이 직접 산에 가서 열매를 따는 것이 아니고 중간에서 수집하는 사람을 통하여 대량으로 수집하기 때문에 열매가 나오는 철을 맞추어야 하므로 그 외의 시간은 자유로웠다. 그래서 그는 중앙교회의 교인처럼 다른 교회의 집회에도 같이 참석하고 하였다. 거창교회 부흥회 때 찍은 기념사진에 이의호 청년이 같이 있는 것을 본다. 1953년 말에 그가 부산으로 철수하면서 부산 오는 일이 있으면 꼭 연락하라고 하여 제8회SFC동기수양회 참석시 함양 회원들이 이의호 집사 댁에 초청되어 저녁식사 대접을 받기도 했다. 당시 이집사는 제대 군인이였다. 이분이 뒷날 초장교회의 장로가 되었으나 이미 작고하셨다.
7.함양중앙교회 교회 대지 매입
민영석 전도사가 함양중앙에 부임했을 당시 교회 위치는 하동 새장터였고, 입지조건이 좋지 못했음은 이미 밝힌 바 있다. 민전도사가 부임하기 전에도 상동91-1번지의 토지 매입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고 한다. 몇 사람의 여성도는 새벽기도 후 연밭 머리에 와서 여호수아 여리고 작전처럼 주위를 맴돌며 이 땅이 교회부지가 되도록 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땅 주인은 팔 의사가 없었고, 교회는 구입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이 내용은 필자도 모르고 있었으나 2007년10월 함양중앙교회의 개척초기 교인이며 병곡교회의 개척초기 교인이었던 박정남 여전도사를 만나 이 사실을 듣게 되었다. 민 전도사 부임 후 교회 장소 이동건이 제기되었고, 적당한 토지를 물색하던 중 상동91-1번지의 토지가 매물로 나와 있음을 알고 땅 매입을 준비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 민전도사는 부산 사상에 있는 집을 하나님께 드리자고 어머니와 의논하였는데 어머니도 동의하였다. 그래서 사상에 있던 집을 팔고 그 값으로 강도사 시취를 위하여 칼빈기독교강요 한질을 구입하고, 나머지 전액을 교회에 헌납했다. 민 전도사는 함양 와서 책 한권 사 볼 형편이 되지 못했으나 교회를 위해 헌납한 일을 하나님은 아신다. 토지를 구입할 때 처음에는 민영석 전도사와 안영숙 집사가 같이 소유주를 만났고, 그 후에는 안영숙 집사가 토지구입 업무를 진행하였다. 민전도사가 바친 금액과 하동의 기존교회 건물 판매금으로 상동(현재운림리)91-1번지의 총220평의 대지를 구입할 수 있었다. 이때가1953년12월 전후였는데, 당시 모든 서류는 안영숙 집사가 관리하였다. 민영석전도사는 교회건축 관계를 면밀히 구상하였다. 다행히 하동새장터 교회 건물을 구입한 사람이 허순길 학생의 형님인데, 기존건물은 철거하고 새로 집을 건축할 계획이었다. 교회 측에서 기존 건물의 철거 작업을 할테니 거기서 나오는 폐자재는 지붕기와로부터 석가래 기둥 할 것 없이100%교회가 가져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민전도사는 집을 지어본 경험이 있었다. 고려신학교에 다니면서 목회를 할때 사상 집에서 통학을 하고 금요일 저녁 시무교회로 가기 때문에 월요일에서 목요일까지는 집에서 지냈다. 그가 양계장을 지었는데 기본 뼈대는 목수가 세웠지만 벽을 바르는 일이나 자질구레한 일들은 학교 갔다 와서 밤에 일을 하였다. 그때 장남인 필자도 어린나이에 조수역할 한다고 고초를 많이 겪었다. 이런 일로 보통12시가 넘어야 집으로 돌아왔으나 졸업할 때까지 결석 한번 하지 않 았다고 한다. 민전도사는 교회를 건축하면 최소한 경비를 드려 최대한 효과를 거두겠다는 생각으로 임했다. 그래서 하동 새장터 건물에서 사용 가능한 자재들을 일일이 첵크하고 기왓장도 활용하도록 가능한 자재들을 첵크하였다. 마침내 이사하는 날을 정하였다. 이사할 때는 유년주일학생에서부터 중. 고학생들이 주동해야 했으므로 학생들이 쉬는 날을 택하였다. 그 날이1954년3월1일(월요일)이었다. 이날 중. 고학생들은3. 1절 기념식을 마치고 교회로 집결하였다. 교회의 살림은 별없고 교역자 이사짐이 조금 있었고, 신경 써서 해야 할 일은 지붕위에 올라가서 기와장 벗겨 내는 일이였다. 사다리를 놓고 걸터앉아 위에서부터 전달하는 방법으로 기왓장을 수거하였다. 이때 이웃교회교인이 후생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중앙교회가 이사한다는 말을 듣고 트럭을 가지고 와서 교회의 이삿짐을 운반하여 주었다. 이후에도 교회가 필요로 할때는 트럭으로 도아 주었다고. 이 일이 인연이 되어 함양중앙교회 처녀와 그 군인이 혼인한 일도 있었다. 교역자 사택은 경찰병원장으로 있는 노성녀 권찰의 아들이 경찰병원 사택 한 칸을 빌려주어 그리로 짐을 옮기고 마치 피난민처럼 짐을 쌓아두고 지나다가6개월 후에 서상 대남교회로 이동되었다.
8.교회건축공사
이 당시 민영석 전도사는 교회당 건물에 집중하였고, 건축을 마칠 때까지는 어떤 난관도 극복하고 오로지 건축에마나 몰두하고, 건축을 완료 한 후에는 전도에 힘써서 예배당을 채우는 것을 목회 방침으로 정했다. 교회당 건축은1954년5월부터 상동91-1번지의 정지작업을 시작하면서 시작되었다. 교회의 면적은40평. 교역자 사택은 서쪽 담옆에 지었다. 건축당시의 민영석 전도사는 설교단에 서면 설교자이지만 건축 일을 할때는 일군들과 꼭 같았다. 교회당 건축공사 기간에 삼수대의 여덟 가정이 거의 같은 시기에 교회에 나오게 되어 교회로서는 큰 기쁨이었다. 이 당시 여덟 가정 중 한사람인 문도자 권사(거창교회 오덕환장로부인)가2007년9월 민영석 목사의 생존소식을 듣고 욕지에 사는함양중앙교회 출신 백귀혜 권사와 함께 민영석 목사집을 방문하였다. 53년만의 만남이었다. 어린소녀 시절에 헤어졌는데 할머니가 되어 민목사를 만나게 되니 그 동안의 세월이 얼마나 덧없이 흘렀으며 서로의 얼굴에는 우여 곡절이 점철되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감사할 뿐이다. 민목사는 우리 나이로 내년이면100세인데도, 아직도 중앙교회 개척초기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으며 문도자의 어릴 때 모습이 어떠했는가를 기억하고 있었다. 이날 문도자 권사는, “제가 중앙교회에 처음 나갔을 때(1954년3. 4월경)는 상동 연밭머리 부지에 천막을 치고 예배드릴 때였다. 교회에 나가면 그렇게 좋고 즐거웠다. 내가 교회에 나가게 된 것은 초등학교5학년 때 담임인 여선생님 덕분인데, 하루는 수업시간에 이 시간에는 여러분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겠다며 성경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시간에 큰 감동을 받고 교회에 나가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집안 일이 많으니 졸업하거든 교회에 나가라고 하였다. 그래서 졸업할 때까지 참고 기다렸다가 졸업 후에 바로 교회로 나가게 되었는데 함양중앙교회의 천막교회 시절이었다. 교회에 출석한지 얼마 되지 않아 교회건축 공사가 시작되어 전교인이 나와서 건축 일을 돕는데 힘드는 줄도 모르고 기쁨으로 봉사하였다. 이웃교회에서도 나와서 건축 일을 도왔다.”고 회고하였다. 또 그는,“민조사는 건축공사할 때 교역자라는 지위는 버리고 건축인부의 한 사람으로 일했다. 지게지고 재목 운반하고, 목수 일하는데 조수 노릇하고, 몸을 아끼지 않고 오로지 교회 건축공사에 온 힘을 쏟았다. 어른들이 교회에서 철야기도 하면 어린 나도 따라서 철야기도를 하곤 하는데, 정신없이 잠이 들었다가 새벽기도회의 찬송소리에 놀라 깨어 일어나곤 하였다. 새벽시간 단에 서서 설교하는 남포등불에 비친 민전도사의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다. 낮으로 힘들게 일하고 영양보충은 생각지도 못할 때 인지라 나이 어린 내가 보기에도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민목사의 그때 모습이다. 그러다가 교회 건축도 완료되지 않 았는데 갑자기 민전도사는 함양중앙교회를 떠나게 되었는데, 교회건축에 그토록 전심전력을 다하시다가 완공도 되지 않는 때에 왜 떠나는가 이상하게 생각되어 어느 어른에게 물어보아도 확실한 대답을 하지 않 았다”라고 회상했다. 민전도사는 예배당 건축에 전념하여1954년8월경에는 지붕과 건물의 벽이 완성되었고, 아쉬운 대로 교회건물의 외형이 이루어져 건물 안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당시 다른 교회에서도 교회당 건축 공사비를 헌금해 준 것으로 안다.
9.민영석 전도사의 사면
1954년9월, 거창시찰장으로부터 민영석전도사에게 통보가 왔다. 거창시찰의3군 면려청년회에서 1952년6월부터1954년9월까지27개월간 함양중앙교회를 지원하였고, 이제 교회건축도 완공단계에 이르렀으므로 더 이상 함양중앙교회를 지원 할 수 없으니 자립하라는 내용이었다. 말하자면 거창시찰회는 비록 간접적인 요구이지만 민전도사로부터 함양중앙교회를 떠나 달라는 통보였다. 민전도사는1952년10월30일 함양중앙교회에 부임한 이래 1954년9월30일 까지는 만23개월이 되는데, 이 기간 많은 일을 했다. 부임한지10개월이 안되어 병곡기도소를 설립하였고, 부임한지14개월여 되어 교회부지220평을 매입하고 부임한지23개 월 여만에 40평의 교회당을 건축 중이었다. 교회가 자립도 못하는 30여명의 교인으로 이런 일을 한 것이다. 물론 혼자서 한 것은 아니지만 엄청난 일이다. 교역자가 자기 사재를 바치고 건축 공사장의 인부가 되어 몸이 부서지도록 일했는데 위로는 못할망정 교회건축 완공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교회를 떠나라는 것이었다. 싸움하는 장수에게 물 가운데서 말을 바꾸어 타라는 격이었다. 앞의 글에서 언급했던 바처럼 남자 집사가 있었더라면 교회의 일을 신중히 처리하지 않 았을까하는 아쉬움이 있다. 뒤돌아보면, 함양중앙교회는 한 사람의 여성도를 통해 고신측 교회로 출발했고, 개척에 동참한5명 정도가 부녀자였다. 물론 경제적으로 아무런 능력이 없는 이들이었다. 민전도사가 부임할 당시 교인은 15, 6명인데, 거의가 부녀자이거나 남자학생들이었다. 이런 말을 하면 혹자는 믿음 없는 말이라고 할지 모르겠으나 함양 중앙교회가 처음 하동 새장터를 예배처소로 정한 것부터가 잘못한 일이었다. 교회 입지조건이 맞지 않 았기 때문이다.1952년도 성탄 때 정부에서 기독교인들에 한하여12월24일과25일 양일간 통행금지를 해제시켜 주었는데, 함양중앙교회도 24일 저녁에 교회에 모여 새벽송을 준비하였다. 그런데 경찰서에서 공비 때문에 위험하니 새벽송은 하지 말아 달라고 하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다른 교회는 시내를 다니면서 새벽송을 하고 있었다. 반듯한 교회당도 없는 교회라고 무시당한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민영석 전도사는 교회건물을 속히 완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어했다. 무엇보다도 민전도사는 함양 사회에서 왜정 때 순교를 각오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신앙노선을 따르는 교회를 세워 복음의 전초기지로 삼고자 했다. 그런데 거창시찰회는 함양중앙교회 건을 취급하면서 당사자인 민전도사의 의견은 들어보지 않고 일방적으로“자립하라”라는 말로 교회를 떠나도록 우회적으로 요구한 것이다. 민전도사가 직장에서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되었던 경력을 함양지방에서 공서겡서 밝히지 않 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알지 못했으나 민전도사와 같이 공부했던 신학교 동료들이나 거창지방의 교역자들은 알고 있었다. 당시 출옥성도라면 모두가 존경하였으나 민전도사는 자신에 관한 일은 내색하지 않 았다. 공비가 교회에 침입하였을때 끌려갔던 노운한 학생을 구하기 위해 경찰관의 횡포를 제압했던 담력을 가진 민전도사 이지만 교회의 권위로서 사임을 요구했을 때 속으로 눈물을 흘렸지만 변명한마듸 하지 않고 사표를 제출하였다. 당장 갈 곳도 없었지만. 생각해 보면 당시의 시찰장과 민전도사는 교회 행정과 관련하여 의견을 달리 했다. 민전도사가1952년도10월30일 함양에 도착하여 짐을 정리하고 있는데 몇 일 후 시찰장 남영환 목사가 방문하였다. 민전도사는 부임 해 온 사람이 먼저 찾아가서 부임 인사를 해야 하는데 순서가 바뀌어서 대단히 죄송스런 일이 되었다고 사과하였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마산 문창교회의 분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당시 고신측과 총회측이 교회 건물 소유권 문제로 다투게 되었는데, 혹자는 어떤 이는 모든 것 다 내어 주고 나오는 것이 옳다고 보았고, 다른 이는 교인수에 비례하여 처리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시찰장은 다투지 말고 고신측에서 조용히 나오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민전도사는“그럴 수 없습니다. 교인수에 비례하여 처리해야지요”라고 하여 시찰장과의 첫 만남에서 의견을 달리했다. 그러자 시찰장은 단호하게“우리 거창지방에서는 결코 교회건물 문제로 다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교회에서 한 사람이라도 신앙노선이 달라서 주장을 한다면 저는 교회 다 비워 주고 나올 겁니다. 민전도사의 그런 생각은 우리 거창지방에서는 같이 할 수 없습니다.”라고 분명히 말했다. 어른들이 담화하는 것을 옆에서 듣고 있든 필자도 아버지의 주장이 옳은 것 같은데 이상하다 생각하고, 그 후에도 단호하게 언급하든 시찰장사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시찰장은 민전도사와는 의견이 다르다는 것이 잊혀지지 않 는데, 몇 년 후에 시찰장이 시무하는 교회에서 어떤 다툼이 있었는지는 잘 알지 못하나 몇 사람이 그 교회에서 나와서 교단을 달리하는 교회를 설립하였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때 필자는 그렇게 단호하게 말하던 목사의 교회에서도 그런 일은 일어나는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또 이런 일이 있었다. 민전도사가 하동 새장터에 있던 함양중앙교회에 부임한 후 어느 날 저녁예배에 시찰장 목사가 설교하기 위해왔다. 예배 시작 전인데 무슨 일이지 알 수 없으나 시찰장 목사는 화를 내면서 민전도사를 나무라고는 오늘저녁 설교를 할 수 없으니 민전도사가 알아서 하라고 하였다. 몇 명 되지 않는 교인이라 분위기가 심상치 않 음을 알 수 있었다. 민 전도사는 내색하지 않고 예배인도를 하면서 설교를 자신이 해야 하는데 갑자기 설교 준비도 하지 않 았으므로 자신이 유일한 남자 집사에게 성경본문을 낭독하게 한 후 설교한 일이 있었다. 필자가 보는 앞에서 두 차례 시찰장과 어색한 만남이 있었는데, 내가 모르는 많은 마찰이 있지 않 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떻튼 아버지 민전도사는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그 당시의 자세한 내막을 들려주지 않 았다. 어머니 생존 시 단편적으로 그 당시의 사정을 들었을 뿐이다. 필자가 이번에 이 글을 정리하면서 다시 아버지께 사정을 여쭈었더니 긴 말은 없으시고 한마듸로“그때 사람들이 너무 잔인했어”라는 말만 하셨다. 교회에 사표를 제출한 후에도 사택을 떠나는 바로 그 전날 까지 사택 미진한 곳을 손 보고 있었다. 어머니가 보시고는 내일 떠날 사람이 무얼하느냐고 핀잔을 주었다고 한다. 그래도 다음에 오는 이가 살도록 해 주어야지 하고는 하던 일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오랜 후에 어머니께 들은 이야기다. 당시 노성녀 권찰의 아들인 경찰병원장 정한수 경사는“당신들 민 전도사를 내어보내거든 자기 집 팔아 교회에 바친 돈은 돌려주어야 식구들이 살아갈 집이라도 구할 것 아니냐?”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민전도사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이미 하나님께 바친 것이고, 상황이 바뀌었다고 그것을 아까워하거나 후회할 사람이 아니었다.50년 전의 일이라 누구의 잘못을 지적하려는 의도는 없다. 단지 당시 상황을 정리하려는 것뿐이다. 거창시찰장 입장에서 볼때 민전도사와 중앙 교회를 보는 문제점은 대강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첫째, 함양중앙교회가 자립을 하지 못한다는 점, 둘째, 교역자의 설교가 은혜롭지 못하다. 셋째, 삼군 연합회가 지원할 자금이 없다. 넷째, 유능한 목사로 교체하면 교회가 급성장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 교회내에서 민전도사를 경원시하는 경향이 있다. 여섯째, 시찰장과 민전도사와의 불화 등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이런 점에 대해 필자의 소견을 피력해 본다면 교회가 자립을 못한다는 점은 개척초기라는 점을 고려해 볼때 이견의 여지가 있다. 민전돳는 교회 이동, 교회당 부지매입, 교회당 건축등에 매진하였고, 시무기간은 불과23개월인데 자립의 요구는 지나치다고 생각된다. 교역자의 설교가 은혜롭지 못하다고 하지만 교회건축에 매달려 일군들과 똑 같이 일하였으므로 설교준비가 부족했을 것이다. 삼군 연합회의 자금고갈은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전쟁 중인데도 삼군 면려청년회에서 많은 수고를 하였다. 특히 거창교회의 이영환집사(후에장로)는 회계 일을 맡아 많은 수고를 감내한 점을 잊지 못한다. 또 유능한 목사로 교체하면 교회가 급성장 할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민전도사 이동 후 유능한 목회자를 초빙하였으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리고 시찰장과 민전도사와의 관계는 의견의 차이를 지적한 일이 있었는데, 시찰장은 교회 문제를 담임교역자에게 묻지 않고 여집사를 상대로 처리한 점이 없지 않았다. 이상은 필자가 당시의 일을 듣고 또 목격한 것에 기초한 의견일 뿐이다. 아쉬운 것은 서로가 당시 상대방의 입장과 의견을 들어보는 여유만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제는 당시의 주역들은 다 물러나고 작고하였고, 생존하고 있더라도50여년 전의 일을 기억할지도 의문이다. 함양중앙교회가 현재 자리하고 있는 곳은50여년 전 사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교회를 함양 사회에 드러내고자 했던 이름 없는 주의 종의 눈물과 기도가 배어 있는 곳이다. 처음 토지를 구입할 때는 220평이었는데 현재는 등기부상에156평으로 되어 있다. 도로 확장에 교회 대지 일부가 편입 되었을 것이다.
10.함양중앙교회의 초기 교역자들
함야중앙교회의 초대 교역자는 박종흥 전도사(1952, 6-1952. 9)였다. 제2대교역자는 민영석 전도사(1952. 10. 30-1954. 10. 1)였고, 김춘항목사(1954. 11-),심재영전도사(1957),박춘식목사(1958),정재영 목사(1959),박성호 전도사(1960)로 이어졌고, 민영석목사는 제8대교역자로1963년4월5일 재부임하여 1965년8월1일까지 시무하였다. 그의 후임이 김동권 전도사(1965. 8. 22)였는데, 그가 9대 교역자로 시무하였다.
※중앙교회 및 병곡교회의 관련사진 모음
후기
처음에는 쉽게 생각했으나 막상 글을 쓰다보니 어려움이적지 않 았다. 아버지 민목사의 교회건축 중 함양중앙교회를 떠난 일에 대한 기록은 어떻게 보면 남을 탓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밝혀주고 역사시지의 심정으로 새겨본 것이다. 이글을 준비하면서 당시 함양중앙교회와 관계된 분들에게 전화로 문의도 하고 직접 만나기도 하면서 정확하게 기록하려고 노력 하였지만 미비한 점이 많을 것이다. 도움을 주신 김경규 선생(함양 SFC창립총회참석),김정태장로(부산,1952년 함양지역 전투경찰파견근무),문도자 권사(거창, 중앙교회 초기교인),백귀혜권사(욕지도, 중앙교회 초기 교인),민영완 목사 내외분(서울 강서교회원로목사, 총회장역임),박정남 전도사(마산거주, 중앙교회 및 병곡교회 개척초기 교인),오재선 전도사(김해거주,
중앙교회 및 병곡교회 개척초기 교인),오재선 전도사(김해거주, 병곡교회 초기 인도자),이애순 권사(함양중앙교회),황보욱장로(거창),허순길 목사(함양 SFC창립시 회장)에게 감사한다. <조선예수교 장로회사기>인명과 고유용어 색인집(상권,1928년)최병윤(향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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