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신의 지도부와 백영희 - 남영환, 1999.1.1.
(소개)
* 다음 소개하는 글과 첨부자료는 /초기화면/총공회/남단1/335번-08.8.20./글과 그 이하에서 평가와 기타 발언을 하겠습니다.
* 고려신학대학원이 2006년 "고신역사기념관"을 설립하고 "고신역사연구소"를 발족한 후 그 연구 출간물의 첫 발간서(250페이지, 6개의 글)에서 백영희의 고신 내 행적을 비판한 글을 올렸습니다. 형식은 남영환이 "한상동과 박윤선"을 회고했지만 내용에서는 백영희에 대한 비판 일색입니다. 대명사로 사용되는 등 간접적인 부분을 빼고 "백영희"라는 본명이 그대로 사용된 부분만 30곳이 넘습니다. 글에 대한 평가나 비평은 별도로 하겠으나 일단 그 비판 내용은 글쓴이의 의도와 달리 백목사님에 대한 극찬이 되고 있습니다. 여기는 "/일반자료실/"이므로 해당 글 그대로 소개합니다. - yi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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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장로교회와 역사(The Presbyterian Church And History)"
연번호: 2008 제1호(발간호)
글쓴이: 고신역사기념관/고신역사연구소
발행소: 고려신학대학원
발행일: 2008년 6월 25일
"박 윤선과 한 상동" - 남 영환/전 고신총회장
박 윤선은 화려한 학력을 가진 분이다. 숭실전문학교에서 이미 우수한 인재로 교수들의 인정과 동문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졸업과 동시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또 졸업 후에 많은 사람들의 환송을 받으면서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로 유학하게 되었다. 샛별과 같은 존재로 이미 떠오른 박윤선은 졸업과 동시에 모교에 돌아 왔다. 그러나 금의환향이라기보다는 태풍전야와 같은 상황에 무원고도(無援孤島)에 상륙한 기분이었는지도 모른다. 같은 평양신학교 출신인 한 상동은 어학에는 전혀 소질이 없었다. 한 상동은 북한 김일성의 외삼촌뻘인 강량옥(康良玉) 서기장과 동기생으로, 강량옥은 한 상동이 영문학 시험 시간만 되면 거의 백지 답안지를 제출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답안지를 다 쓴 후에 하나를 더 작성하여 책상 밑으로 한 상동에게 건네 준 일이 있었다. 그러자 한상동은 그 자리에 이를 쭉쭉 찢어서 주머니에 넣고 백지 답안지를 그대로 제출하였고, 이를 본 강량옥은 한 상동을 무척 존경하였다고 한다.
박 윤선은 평야신학교 조교로 부임하자 바로 욥기 주석을 집필할 정도로 그는 학문과 교수에 전념하였다. 한 상동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주기철 목사 후임으로 초량교회에 부임하였으며, 주기철 목사가 평양 산정현교회로 옮기자 다시 그 후임으로 마산 문창교회로 옮겨 목회하는 등 언뜻 보면 화려한 목회 생활을 시작한 듯하였다. 그러나 일제 총독 정치의 신사 참배강요는 평양신학교의 문을 닫게 하였고, 신학교가 문을 닫으니 박 윤선 목사는 망명길에 오르게 되지만, 한 상동 목사는 평양 감옥으로 가야 하는 죄 없는 죄수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 때 만주 봉천(현재 심양)에서 만주 각처에 흩어져 있던 조선인 교회들이 조선에 있던 총회에서 독립하여 만주 조선인 장로회를 조직하게 되었고, 이어서 신학교를 설립하여 박형룡(朴亨龍) 목사와 박 윤선 목사를 교수로 초빙하였다. 만주의 조선인 장로회총회가 신사 참배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두 분의 박 목사에 한해서 신사 참배를 하지 않아도 문제 삼지 않겠으며 대신 교장 이하 모든 직원들과 학생은 신사참배를 하는 것으로 만국 경찰청의 양해를 받아 학교 인가를 받은 것이었다. 따라서 두 분 박 목사의 심적 고통은 대단하였다. 한 상동 목사는 옥중에서 6년간 사투하며 끝내 많은 신앙의 동지들을 하나님 앞으로 먼저 보내고 불과 21명이 해방과 함께 출옥을 하게 되었다. 박 윤선 목사도 해방이 되자 고국에 돌아오기는 하였지만 그를 반갑게 맞아 주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주 남선, 한 상동, 주기철 목사 등은 옥중에 있으면서 일본이 패전하고 그들이 돌아가게 되면 교회 재건과 함께 평양신학교와 같은 개혁주의 신학교를 세울 것을 구상하였다. 그러나 주기철 목사는 이미 하나님 앞으로 가셨고, 출옥 후 평양에 있을 때 만주에서 잠시 돌아 온 박형룡 목사와 교회 재건과 신학교 설립에 대한 의논이 있기는 하였으나 월곡교회에서 홍택기 일파의 반발로 모욕을 당한 박형룡 목사는 만주로 돌아가고 말았다. 한 상동 목사는 1946년 봄에 모친상을 당하여 급보를 받고 월남하였으며, 그해 4월 한 상동 목사는 주남선 목사와 신학교 설립에 합의하고 서울에 와 있던 박 윤선 목사를 만나서 신학교 설립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고 협조를 약속 받게 되었다.
박 윤선 목사는 마침내 한 상동 목사의 의견에 동의하고 그해 5월에 진해로 내려와 주 남선 목사, 한 상동 목사, 손양원전도사 등 여러 사람과 신학교 설립에 대하여 합의를 보고 5월 20일에 신학교 설립을 위한 기성회를 조직하였다. 진해가 고신 출발 기지가 되었던 것은 고인이 된 강주선 목사의 협조와 특히 홍반식 목사의 장인인 주상수 장로의 열렬한 협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상수 장로는 일제 통치기 진해의 거부로 진해읍에 저택이 있었고, 그 저택은 초기 고려신학교의 산실이 되었다. 그 집에서 먹고 자면서 의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주선 목사는 자유주의자이었다.
이처럼 박 윤선 목사는 한 상동 목사와 주남선 목사의 개혁주의 신학교 설립 설계도에 참여하여 신학 강좌를 맡고 또 박형룡 박사를 모셔 오기로 하는 등 기초를 닦았다. 1946년 9월 20일을 신학교 출발의 기점으로 하면 1938년 봄 평양신학교가 폐쇄된 지 약 8년여 만에 개혁주의 신학교를 재건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보따리 신학교는 교수 한사람 생활 대책도 없는데 그야말로 설립자나 박 윤선 교장이 완전 일심동체가 되어 일신여학교 교실에서 태어나 초량교회 유치원으로, 광복동으로, 송도로 천신만고 끝에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 상동 목사와 박 윤선 목사는 한 상동, 주남선 목사의 신앙과 박 윤선 목사의 신학과 회개운동으로 연합하여 박형룡 박사를 거치며 폐허와 같은 신학교를 끝까지 키워 왔다.
1. 사단의 시험
어려운 중에서도 신학교는 건강한 모습으로 1951년 6월 27일에 설립 후 처음으로 25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는데, 한국 신학교육 역사상 처음으로 예과 2년과 본과 3년, 곧 5년의 교육과정을 거쳐 졸업시켰으니 획기적인 시작이었다. 당시 초등학교는, 조선인 학교는 4년, 심상소학교(尋常小學校)는 주로 일본인 중심으로 6년 과정이었고, 중학교가 4년이었으며, 전문학교는 3년이었다. 대학은 경성제대(현, 서울대학교 전신)가 4년 과정이었다. 그래서 평양신학교는 중학교 졸업생과 동등 자격자 그리고 전문학교 졸업생을 받았었다. 고려신학교는 본과는 전문학교 졸업생을 받는 것과 같게 예과를 설치하여 2년은 주로 학문의 전반적인 교양 학과를 이수케 하였고 이는 현재 고신대학의 전신의 칼빈대학으로 이어졌다.
5회 졸업생 중 홍반식, 이근삼, 오병세 3인은 고려신학교의 꽃을 피웠고 오늘의 고신을 키우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이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고려신학 대학원과 고신대학은 많은 인재를 키우고 심어 왔다.
이런 고신의 출발을 질투한 사람은 우리 교단을 이미 정죄했던 이들이었다. 1951년 5월 24일 부산 중앙교회당(당시 노진현 목사 시무)에서 속회된 36회 총회에서 고려신학교를 정죄하고 고신측 경남노회를 총회 밖으로 추방하였는데 죄목은 ‘메-첸파이고 독선주의다’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그런 일과 동시에 조선신학교 계통이 먼저 탈퇴하였음에도 그들에게는 예배당 명도 문제를 거론하지 않으면서 김길창 일파의 경남노회를 통하여 고신 계통에는 예배당을 명도하라고 하였다. 같은 해 9월 8일(주일) 10시 40분에 예배당 접수위원 노진현, 이수필, 강주선 목사와 우덕준, 양성봉 장로 등 9명이 초량교회 강단을 점거하여 예배당을 소위 접수하려고 왔다. 당회실에 있던 한 상동 목사는 잠시 당황하였으나 강월남 집사(후에 장로)를 시켜 임종만 전도사(현 물금교회 은퇴목사)로 하여금 12시까지 찬송을 인도케 하고 주기도로 예배를 마쳤는데 통곡이 일어났다. 조용히 돌아가라고 해서 돌아가니 남은 사람은 20명 전후이었다. 이 광경을 지켜 본 접수위원들도 아연실색하고 당화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광경을 본 강주선 목사가 남긴 말은 “목사가 무슨 할 일이 없어서...” 하고 통회 기도를 드릴 정도였다. 한 상동 목사는 이 사람들을 보고 “예배당은 조용히 비워 줄 테니 교인들을 자극시키지 말라”하니 이 제의를 받아들여 그들은 다시 오지 않았다.
한 상동 목사의 마음에는 예배당을 가지고 싸우지 말자는 생각이 들어 비워 줄 것을 굳게 결심하였으나 실행에 옮기려 하니 제직들을 비롯하여 많은 교인들의 예배당에 대한 애착심을 돌려놓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는 중에 먼저 집회를 열기로 하고 강월남 집사(당시 청년회장) 제의로 남 영환 목사를 강사로 선정하였다. 시간은 촉박하나 미리 교섭이 안 된 상태였고 마침 그 주간에 초량교회에서 모임이 있었는데 목요일이었다. 한 상동 목사가 나를 보고 경위를 설명하더니 토요일 저녁부터 집회를 가지려고 하며 강사로 결정되었으나 사정상 미리 연락을 못하여 미안하다고 하시며 거의 강제로 집회를 맡기는 것이었다. 나는 금요일에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니 이미 거창교회에는 집회 관계로 못 간다고 전보를 쳤다는 것이다. 그리고 목사 서재와 거실을 비워 주시면서 설교를 준비해 달라고 하시며, 자신은 아예 예배당에서 지내시는 것이었다. 나는 갑자기 맡은 일이라 기도하는 중에 에베소서 6장 10절 이하의 말씀을 주제로 하여 낮 공부는 베드로전서, 새벽 기도회는 요한계시록 7교회를 가지고 인도하였다. 한 상동 목사와 교인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내 스스로도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으며 집회를 마칠 때에는 예배당을 내어 주고 빈손으로 나갈 것을 굳게 결의하는 환희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시무하던 거창교회도 예배당을 내어 주기로 했으나 이것은 잘되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인도 없이는 아무것도 안 된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초량교회를 접수한 통합 측은 기고만장하였다. 접수하려는 대상 중에는 중심 되는 다섯 곳을 최우선으로 목표하였는데, 이 교회들은 초량교회, 영도교회(현 영도제일교회), 마산문창교회, 진주교회, 그리고 거창교회였다. 초량교회를 접수한 그들은 두 번째로 착수한 곳이 영도교회였는데 영도교회는 청년들의 거센 반발로 한번은 예배당을 점거하였으나 두 번째부터는 그들의 동조가 한 사람도 없어 다시는 예배당 경내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세 번째로 진주교회를 목표하였으나 그곳도 쉽지 않았다. 거창교회는 양성봉 장로의 계약으로 이한수 목사(함경북도 법원 서기를 지낸 적 있음)를 파송하고 지검장으로 교회에 다니는 김천수 검사를 파송하여 놓고 문창교회까지 함께 처음부터 법원에 예배당 명도 소송을 내놓고 시작하였다. 뒷날에 이한수 목사, 김천수 검사 등은 부민교회에 출석한다고 내게 말하면서 두 사람 모두 예배당 쟁탈전에 말려들었다가 패가망신하였다고 고백하였다.
2. 문창교회, 송삭석과 박 윤선
송상석 목사는 거제 장승포교회에서 출발하여 가술교회를 거쳐 문창교회로 오기까지 대략 다음과 같은 일들이 있었다. 문창교회에 시무하던 이약신 목사는 진해교회로 옮기고 문창교회에 있던 황철도 전도사는 목사안수와 함께 진주교회에 부임하니 문창교회는 비어 있었다. 송상석 목사는 제주도에 피난하여 와 있던 만주신학을 졸업한 백이언(白理言) 목사와 중국 북경에서 돌아온 김경도(金慶道) 목사를 데리고 와서 우리와 같이 일하기로 각서까지 받고 백이언 목사는 문창교회에, 김경도 목사는 진해교회에 부임케 하였다. 진해교회에 시무하던 이약신(李約信) 목사는 쉬고 있으면서 가정 집회를 인도하다가 진해교회에서 갈려 나온 사람들과 함께 진해남부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런데 백이언 목사는 각서까지 썼음에도 불구하고 부임과 동시에 출옥성도를 공격하고 매도하니 문창교회는 주기철 목사와 한 상동 목사가 시무하였던 곳이라 백목사가 견디지 못하고 얼마를 못 가서 물러났으나 6·25때 피난 온 사람들이 백이언 목사를 따라 온 교인들이 상당히 있었다. 그리고 예배당 명도 문제가 있어서 가술교회에 있던 송상석 목사가 부임하였으니 여기서부터 고신 운동의 파란은 시작된다. 실제로 송상석 목사는 목회자는 아니었다. 거기에 백이언 목사가 심어 놓은 일파를 위해 통합 측은 김석찬(金錫燦) 목사를 파송했으니 김석찬 목사는 야무진 목회자였다. 이렇게 하여 문창교회 내에서 두 파의 싸움은 치열하였다. 그래도 처음에는 송목사 편이 훨씬 많았다. 이런 와중에 송목사는 부산 동일교회를 개척한 김창인 목사가 서울로 가고 그 후임에 백 영희 전도사와 문창교회 부목사 장경제 목사를 데려왔다. 이 두 사람은 부임과 동시에 송목사를 공격하는데 예배당 쟁탈전은 개가 고기 뼈를 앞에 두고 싸우는 것과 같았고, 백전도사는 부산에서, 장목사는 문창교회에서 송목사가 앉은 면전에서 공격을 하는 것이었다. 장경제 목사는 박 윤선 목사의 처질(妻姪)이요, 백영희는 박 윤선 목사가 대구 성동교회에서 당하기 전까지는 박목사가 끔찍이 사랑하는 제자이었다. 얼마 후에 장경제 목사는 소송에 관심 없는 교인들과 함께 제2문창교회를 개척하여 나오니 고신 측은 쇠약하여지고 통합 측은 그런 대로 부흥하였다. 또 얼마 후에 동광교회까지 갈려 나오니 동광교회 문제는 총회까지 올라오게 되었다. 이때야말로 송상석 목사를 제거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이었다고들 한다. 이인재(李仁宰) 목사가 한 상동 목사와 틈이 생긴 것은 이때부터였다. 한 상동 목사의 말을 들어보면 박형룡 박사를 모시러 만주에까지 갔다 온 사람을 어찌 그렇게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 고비를 지나면서 송상석 목사의 발판은 그런 대로 굳어지고 안하무인격으로 날뛰던 백 영희 전도사에 대하여 동일교회에서 배척 운동이 일어날 때 당회장이었던 오종덕(吳宗德) 목사가 저녁예배 시 수습차로 가시기로 약속하고 예배 시간 전에 예배당에 들어가려는데 백 영희 전도사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지켜 서서 오종덕 목사를 밀어내고 말았다. 주동 인물이 주로 여신도들이었다. 이때에 백 영희 전도사의 스캔들 사건이 노회에 진정으로 올라왔으니 매우 복잡한 때였다. 거기다가 오비이락(烏飛梨落)이란 말과 같이 때마침 백 영희 전도사를 끔찍이 싸고돌던 대구의 여걸 박복달(朴福達) 여사 일행이 백전도사를 만나려고 동일교회를 찾으나 전성도(全聖道) 목사의 처형으로 수예점을 하며 교회를 섬기던 이집사 댁에 갔다는 것이었다. 이집사 역시 박복달 선생을 존경하는 처지였다. 박집사 일행이 수예점에 가니 백전도사가 이층에 와 있다고 하였다. 이집사에게 손님이 왔다고 연락하니 내려와서 인사를 하였고 백전도사를 만나러 왔다고 말하니 처음에는 없다고 하였다. 이를 의아하게 생각하고 호기심에 찬 이들이 무조건 이층으로 올라가니 백전도사가 혼자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서와 함께 문제가 되어 부산노회에 강도사 직과 전도사 직을 파면하니 이들이 동일교회를 떠나서 서부교회를 세웠다.
이에 박 윤선 목사는 백 영희를 동정하고 부산노회의 처사를 불만스럽게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서부교회는 날로 부흥하였고 이인재 목사 또한 절대적으로 백 영희를 지지하였다. 이 때에 부민교회에 시무하던 이학인(李學仁) 목사가 고신 운동에 열렬하였는데 그의 딸 문제로 교회가 소란하여지자 이학인 목사는 부산노회에 시무 사면서를 냈다. 노회가 모여 장로들을 불러 의견을 물으니 사면을 처리하여 달라는 요구였다. 이런 일들이 얽히고설키면서 송상석 목사에 대한 저항 세력이 형성되었고 예배당을 조용히 내어 준 한 상동 목사도 양면으로 공격 대상이 되었다.
통합 측은 고신을 압박하며, 한 상동 목사는 예배당을 내어 놓았는데 다른 사람은 왜 내어놓지 않느냐면서 공격을 하니 송상석 목사와 예배당을 안 내놓겠다는 교단 내부에서 한 상동 목사를 좋게 말하지 않는 편이었다. 송상석 목사가 한 상동 목사를 더욱 괴롭힌 것은 공석상에서 소송 문제만 나오면 노골적으로 “당신은 성자이고, 나는 싸움꾼으로 안팎으로 몰리니 이것은 한 상동 목사 너 때문이 아니냐”고 공격 했던 것이다. 예배당을 못 내어 주겠다는 측도 송목사를 존경한다기보다는 매우 동정적이었다. 이런 와중에 박 윤선 목사가 신학교나 교회에서 설교 부탁을 받으면 설교를 통해 소송 문제를 들고 공격을 하니 모양이 좋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본인도 원하여 신학교에서는 1953년 화란으로 유학을 떠나도록 하였다. 유학 기간 중에 소송 문제가 해결될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이듬해 4월에 박윤선 목사 부인이 교통사고로 갑자기 별세하게 되었고, 박목사는 유학을 중단하고 귀국하게 되었다. 당분간 소송 문제는 소강상태를 보이는 듯하여 잠잠 하였으나, 민사소송이란 기한이 정해지지 않았고 더구나 종교인간의 싸움이니 하자세월이었다. 통합측은 총회가 돈을 내어 소송을 진행하는데 반해 고신 측은 돈은 고사하고 소송 자체를 정죄하고 문창교회 교인들도 장로들 일부를 제외하고는 소송에는 무관심하였다. 드디어 이 문제가 총회에 상정되었다. 오랜 논란 끝에 총회는 ‘덕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개 교회의 형편에 따라 처리함이 옳다’라고 결의하여 행정상으로는 일단락된 것으로 되었다. 이후 통합 측은 적극적으로 김석찬 목사를 밀었고, 반면 한 상동 목사는 교회를 내 주는 것을 신앙으로 인식하는 터이라 불만스러우나 승복하기로 하였으나 박 윤선 목사는 더욱 화가 난 모양을 과격한 수단을 동원하여 싸움은 과열하여진다. 그래서 우선 급한 대로 물리적인 행동은 피해야 하였기에 법정 판결에 기대를 걸었다. 박 윤선 목사를 중심으로 이인재 목사, 이학인 목사, 백 영희 전도사 등 경기노회 상당수와 한 상동 목사를 비롯하여 고신 총회를 타협주의로 이끈다는 부산노회 일부가 가세하여 경기노회는 끝내 총회에 대하여 소송 문제를 포기할 때까지 행정을 보류한다는 극약 처방을 내리게 되었다.
이 사건이 확대된 것은 총회의 지시로 1957년 10월 15일 홍천교회당에서 임시노회로 모이기로 한 8일에 앞선 7일 10시에 충현교회에서 되어진 일이다. 당시 지방 위원은 한 상동, 황철도, 박손혁, 이인재, 한명동, 전성도, 윤봉기 목사 등 7인이었다. 당시에 약한 노회(특히 전라, 경기노회 등)에는 위 지방 위원들이 있어 회무를 처리하였다. 경기노회는 총회가 지시한대로 1957년 10월 15일에 모여 한상동 목사를 홍천교회에 청빙키로 하고, 중앙교회는 윤봉기 목사를 청빙키로 하고, 명신익 목사를 사면시킨 것을 부목사로 모시기로 하였으며 행정을 보류한 측은 잘 설득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박 윤선 목사가 이에 불복하고 항의를 한 것은 고려신학교 교장으로서는 좀 생각을 해 볼 문제이었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소송 건에 대한 불만의 표시였다. 1958년 9월 24일 총회에서 일어난 일들로 경기노회를 행정 보류의 길로 이끌어 간 사람들도 노회장 전칠홍 목사를 비롯하여 개고기를 먹는 사람은 정죄할 정도로 유별난 성격의 소유자 김현봉 목사와 이병규 목사 등이나 이들은 박윤선 목사와도 같이 일하지 못할 사람들이었다. 박 윤선 목사는 이런 와중에서도 신학교에서 봉직하다가 1959년 12월 화란을 목적하고 떠나서 먼저 미국 웨스터민스터 신학교로 갔다. 그곳에서 5개월 후 화란 행을 취소하고 1960년 5월 29일에 바로 귀국한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매우 실망하고 돌아왔으나 그가 소송 문제에 변화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3. 주일 성수 문제
미국에서 돌아온 박윤선 목사는 신학교에 복귀해서 화란에서 학위 받는 문제를 단념하고 주석 저술하는 일과 교수에 전념하기로 결심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1960년 7월이었다. 스푸너(Rev. A. B Spooner) 선교사가 귀국하게 되었는데, 예정 날짜는 어느 금요일에 배가 출발하게 됨으로 그 전날 송별 예배가 있었다. 배 사정이 연기되어 주일날 떠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택시를 타고 가서 배에서 다시 만나 배웅을 한 뒤에 가까운 예배당에서 주일 예배를 드리기로 하였으나 사정이 생겨 예배를 드리지 못하였다. 배에서 시간이 지체되어 예배를 드리지 못한 사실이 전해졌고 송상석 목사도 알게 되었다. 다음 달 8월에 다른 일로 이사회가 모이게 되었다. 뜻밖에도 이 문제가 등장되어 갑론을박 하다가 교장에게 큰 상처가 없도록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박윤선 목사는 이 문제 자체가 이사회에서 제기된 점에 대하여 큰 충격을 받고 떠났다. 후에 이 문제를 담당할 위원 3인이 선출되었고 위원들은 부산노회에서 박윤선 목사가 이 사건의 경위를 해명하고 말썽을 일으켜서 미안하다는 뜻을 전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기로 하였다. 그런데 박윤선 목사를 둘러싼 사람들의 충동으로 박윤선 목사는 부산노회에서 자신의 입장이 정당하고 사과할 일이 없다고 주장하게 되어 다시 이 문제는 총회의 의제로 제기되었다.
이 사건이 그 당시에는 한상동 목사와 박윤선 목사의 갈등으로 비추어졌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 때 송상석 목사는 박윤선 목사와 직접 싸우기보다는 한목사에게 미루었고, 박윤선 목사를 둘러싼 사람들도 한상동 목사를 공격하는 편이었으며 특히 이인재 목사가 앞장을 섰다. 이로 인하여 결국 박윤선 목사는 고려신학교를 떠난 후 다시 돌아 올 기회가 두 차례가 있었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4. 잃어버린 기회
이때에 박윤선 목사가 봇짐을 싸서 간 곳은 서울이었다. 박윤선 목사를 충동질하여 한상동목사와 갈라놓은 이인재 목사를 중심한 그들도 박윤선 목사의 자리를 마련하지는 못하였다. 박윤선 목사는 서울 해방촌에 집을 얻어 살면서 총회신학교에 강의를 나가고 있는 듯 하였으나 매우 쓸쓸하게 살고 있었다. 당시 고려신학교도 박윤선 목사가 떠난 후 위기에 처한 상태이었다. 한상동 목사가 나를 보고 여비를 준비해 주면서 서울에 있는 박윤선 목사를 만나서 박목사가 고려신학교로 돌아오도록 해 달라고 부탁을 해서, 먼저 이인재 목사를 만나서 의논을 하였더니 그렇게 할 수만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곧 바로 서울로 가서 나는 박윤선 목사의 집을 몰랐기에 먼저 이재만 목사를 만났다. 이재만 목사도 박윤선 목사가 고려신학교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좋겠다면서 김진홍 목사와 이상근 목사와도 같이 가자고 하여 연락을 하니 좋다고들 하였다. 이재만 목사와 같이 박윤선 목사를 찾아가니 김진홍 목사와 이상근 목사는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박윤선 목사는 매우 좋지 못한 표정으로 나를 대해 주시지 않는가. 기도를 하고 자세를 고쳐 앉으니 박윤선 목사가 나를 보고 “ 남목사님, 나하고 무슨 원수 지은 일이 없는데 왜 나를 험담하고 다닙니까?”하고 아주 불쾌하게 말씀을 하셨다.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제가 목사님을 헐뜯고 다닌다니 그 무슨 말씀입니까?”하고 되물었다. 그때는 나도 집회를 인도하러 많이 다닐 때였다. 박윤선 목사가 “남목사님이 5백여 명 모인 집회 석상에서 나를 이단이라고 했다면서요”하여, 그 말을 듣고 내가 한참 있다가 웃으면서 “목사님, 5백여 명 모인 집회라면 최소한 다섯 명 증인을 찾기는 쉬울 것입니다. 그 집회 장소와 날짜를 기억하십니까?”하고 내가 다시 물었다. 그러자 김진홍 목사가 “그 말이 맞습니다. 누구한테서 그런 말을 들었습니까?”하고 물으니 “그렇다면 그 말은 그만 둡시다.”하여 다 같이 웃고 말았다. 박목사님은 누구나 다 아는 대로 듣지 않는 말을 하실 분은 아니다. 그 당시는 이렇듯 유언비어가 난무하던 때였다. 점심이 들어와서 식사를 마치고 내가 찾아 온 사실을 말하였더니 이미 듣고 있었던 것으로 “이상근 목사님도 같이 갈 수 있습니까?”하여 그것은 당연하다고 대답을 하였다. 박윤선 목사는 노회 때 내려오기로 하고 나는 바로 부산으로 돌아와서 한상동 목사를 만나 되어진 일들을 사실대로 보고하였더니 매우 기뻐하였다.
박윤선 목사는 노회 때 약속한대로 참석을 하였다. 이 소식이 어떻게 되었는지 송상석 목사에게도 알려졌던 모양이었다. 송상석 목사가 노회에 나타나 발언권을 요청하였고, 당시 노회장이었던 한상동 목사가 이를 받아들여 발언을 허락하였다. 그런데 발언에 나선 송상석 목사의 발언 전부가 박윤선 목사에 대한 인신공격이었다. 박윤선 목사와 이상근 목사는 듣고 있다가 아무도 몰래 가만히 나가 버렸다. 이때 한상동 목사는 큰 실수를 했다고 생각이 된다. 마땅히 송상석 목사의 발언을 중지시키는 것이 상식이었고, 모든 노회원들도 마찬가지로 송상석 목사가 발언을 하는 동안에 아무도 전혀 말이 없었다. 노회가 정회되고 한목사가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나를 보고 박윤선 목사가 송도에 가있을 것 같으니 다녀 와 달라고 부탁을 하기에, 한목사에게 왜 이렇게 하시느냐고 했더니 자신이 큰 실수를 하였다며 꼭 다녀와 달라고 거듭 부탁을 한 것이었다. 당시 송도 복음병원 아래 쪽 해수욕장에서 떨어져 있는 언덕에 있던 이재만 목사 집에 찾아갔더니 백영희 목사가 와서 이번 사건은 송상석 목사와 한상동 목사가 짜고서 한 일이라고 박윤선 목사를 더욱 격앙하게 만들고 있었고, 이재만 목사도 나를 보고 이 일은 미리 계획된 일이라고 하였다. 내가 아무리 본 뜻이 그것이 아니었다고 해명을 하여도 돌이킬 수가 없었다. 내가 백영희 목사를 보고 “백목사님, 어째서 화해를 시킬 줄은 모르고 이간만 시키려고 합니까?”하고 박윤선 목사에게는 죄송하다고 사과를 드리고 돌아와, 한목사를 보고 찾아 가보라고 하였다. 다음날 이른 새벽에 한상동 목사가 찾아가서 사과까지 하였으나 박윤선 목사는 떠나고 말았다. 이 일이 있었던 것이 1955년이나, 1956년으로 이해된다. 학교 교무일지를 찾아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로 박윤선 목사가 고려신학교를 떠난 일이었다.
그 후에 다시 돌아와서 1957년 법정소송 건 논쟁과 다시 화란에 갈 목적으로 미국에 갔다 와서 허순길 목사가 지적한대로 박윤선 목사 자신의 실수로 화란으로 못 가고 바로 돌아와 학교에 전념할 듯 하였으나 주일 성수(스푸너선교사 사건) 문제로 떠난 것은 두 번째요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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