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에서는 사는 동네 주변을 잘 살펴 보면 여러 가지 가게들이 있습니다.
생활 필수품을 파는 상점도 있고
커피를 팔고 배달하는 다방도 있고
남자들에게 여자를 파는 술집도 있습니다.
남녀반을 예배당에서 뒤섞어 앉히고
청년 남녀들이 남녀 구분도 없이 섞여 돌아다니고
아예 사춘기라는 극도로 민감하고 위험한 시기의 청소년들이 아찔하게 짝을 짓게 하는데
예전에 고신이 건전하다고 자타가 평가할 초기에는 이런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학생 운동이나 찬양대나 기타 교회의 남녀 학생의 행사를 통해 연애를 하고
지금은 이런 남녀 이성 문제가 고신 교회에서는 완전히 무너져 내려 버렸습니다.
어느 정도인지는 고신 내부인, 특히 각 교회와 지역의 지도부가 더 잘 알 것입니다.
초기는 막아 보려고 발버둥이라도 쳤는데 이제는 무감각해 져서 상관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전도에 유리하다며 앞다투어 그런 위험한 운영법을 경쟁적으로 도입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경찰이 개입 할 정도의 사건이 되어야 비로소 무슨 문제로 생각하는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건전하다고 평가 받던 1950년대까지의 고신은 신앙 필수품을 파는 동네 상점이었습니다.
이후 고신은 남녀 이성 문제를 두고는 뭔가 수상한데 딱 증거를 잡기 어려운 다방이었고
지금은 남들이 다 알고 본인들이 다 알고 세상도 다 아는 술집 수준의 단체가 되었습니다.
여기 비해 총공회는
고신이 건전하다고 평가 받던 그 시절 고신에 있었고 그 때도 이성 면에 엄격했었고
고신이 곁 길을 향해 벗어 나가며 현저히 다방처럼 교회를 운영할 때도 공회는 여전했고
지금 고신이 완전 타락한 상태가 되었으나 공회는 고신의 초기 모습을 그대로 유지합니다.
물론, 이 기준은 남 목사님이 모략하고 비판한 백 영희 목사님의 생전 마지막까지입니다.
남 목사님은 백 목사님과 서부 교회를 비판하고 헐뜯으며 오직 남녀 문제만 붙들었습니다.
그 외에 돈 문제나 다른 문제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두 말 할 것 없이 거론했을 것입니다.
일단 서부 교회와 백 목사님은 이렇게 원수로 삼는 분이 봐도 깨끗하고 흠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남녀 이성 문제는?
남 목사님 스스로 위 글에서 어떤 증거도 어떤 죄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이성 관계를 물고 늘어지면 밑져야 본전이라는 세상 장사치 정치꾼들의 계산이 있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평생 백 목사님에 대하여 열등감 때문에 모험을 일삼은 남 목사님은
다른 문제는 아예 입에 올리지도 못할 정도니까 이성 문제를 집중 부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남 목사님이 물고 늘어지면 손해 볼 것은 없다고 생각한 그 이성 범죄라는 것은
이 노선의 문제가 아니라 남 목사님이 속한 고신의 고질병이며 치명적 질병이었습니다.
작은 씨가 심겨질 때는 종자 구별이 어려우나
움이 돋으면 제법 알게 되고 자라면 대개 알게 되고 열매가 맺히면 확정을 하게 됩니다.
1950 년대 서부 교회와 백 목사님이 이성 문제가 있었다면 60 년대 70 년대 80 년대를 거쳐
점점 그 죄의 씨는 자라 갔을 것이고 무성해 졌을 것이며 열매를 맺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남 목사님이 짐작한 모든 것은 서부 교회와 백 목사님의 문제가 아니라 고신의 문제였으니
어찌하여 서부 교회와 백 목사님에게서는 갈수록 깨끗한 움이 돋고 자라고 열매를 맺었으며
어찌하여 남 목사님이 속한 고신에게서는 갈수록 이성의 더러운 풍습에 찌들어 버렸는지요?
1950 년대 고신은 마치 동네 주민들에게 필요한 생필품만 고루 파는 좋은 상점 같았는데
1960 년대 고신은 마치 동네 안에 들어온 찻집 같고 다방 같아서 정체가 이상했었습니다.
1970 년대를 거쳐 1980 년대가 되어서는 고신은 펴놓고 장사하는 술집과 같았습니다.
대낮에 남녀가 허리를 끼고 취해서 들락날락 하고 있었으니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런 시기에 서부 교회와 총공회는 갈수록 더 구별했고 더 깨끗해 지고 있었습니다.
이성 문제를 두고는 1960 년대가 더욱 엄해졌고 70 년대 80 년대는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1950 년대 고신 안에서 남 목사님과 백 목사님은 나란히 동네 상점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남 목사님이 갑자기 백 목사님에게 뒤로 술을 팔고 다방식으로 운영한다고 떠든 것입니다.
남 목사님과 고신의 지도부가 손님이 오가는 대로에서 고래 고래 고함을 지르고 있었으나
백 목사님은 이 문제는 세월이 해결하지 해명해야 해명이 되지 않으므로 잠잠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10 년씩 몇 번이나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백 목사님의 서부 교회는 그 상점의 앞을 봐도 뒤를 봐도 물건을 봐도 늘 그대로였습니다.
그런데 남 목사님이 운영하는 상점과 고신의 가게들은 물건부터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동네 생필품 상점에는 들여놓을 필요가 없는 물품이 들어오고 오가는 손님들이 이상했으며
뒤에는 다방이 되었고 이후에는 술집이 되었습니다.
왜 남녀를 구별시켜 앉혔던 고신과 남 목사님 교회의 예배 좌석이 남녀 혼석이 되었습니까?
남 목사님과 고신은 이 문제를 해명할 수 있습니까?
처음에는 남녀반 중간 좌석 뒤 쪽에 가족석을 만들어서 가족 핑계를 대고 있었습니다.
고신의 1960 년대 도시 교회와 1970 년대의 시골 교회를 아는 분들은 알고 계시지요?
그리고 10여 년 지나면서 차례대로 남녀 혼석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남 목사님은 서부 교회를 남의 말을 들은 것으로, 그 말조차 믿을 수 없는 말로 모함했으나
저는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가며 설명할 수 있습니다만, 입이 더러워질까 담지 않겠습니다.
알고 보니
1950 년대라고 했던, 고신의 초기 건전했던 바로 그 시절부터
남 목사님과 고신의 일반 교회들은 벌써 앞 날에 남녀 이성 문제에 흐려질 분들이었습니다.
그런 잠재적 요소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백 목사님과 서부 교회에 그 죄를 덮어 씌웠는데
세월이 양 측의 내면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까
그 면에서 깨끗하지 못하고 아주 더러운 고신이었기 때문에 그 죄를 꺼내 들었던 것입니다.
하던 도둑질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가 제일 자신 있고 아는 죄를 내놓은 것입니다.
당시에 이런 말을 했다면 이 말 역시 하나의 짐작이요 공상이요 희망 사항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후 수십 년 세월이 흘러가면서 이 모든 것은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홈에서는 과거 이미 존재한 사실을 두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위의 남 목사님 글은 남 목사님이 손에서 적어서 안 될 글을 적었습니다.
그리고 그 글은 조금이라도 양식이 있거나 눈치가 있는 분이라면 실어서 안 되는 글입니다.
범인의 주장을 생방송에 그대로 발표를 해 주면 방송국에 책임이 있기 때문에 조심합니다.
남의 말의 인용도 그 인용의 회수나 앞뒤 정황을 보면 인용자의 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 막 가는 수준에서도
입증이 될 수 없는 문제를 한 사람은 발언하고 한 쪽에서는 발간한다면 문제가 심대합니다.
입증이 될 수 있는 문제라도 발표할 말이 있고 발표해서 안 될 내용이 있습니다.
하물며 술집 주인이 옆집의 생필품 파는 상점 주인을 과거에 술 판다고 거짓말을 했다면?
과거 함께 생필품 상점을 하다가 지금은 술집을 하는 사람의 행적이 그 과거를 말합니다.
이것이 오늘 고신과 남 목사님이 백 목사님과 서부 교회를 모함한 내용의 분석입니다.
복음에 어떤 면으로 유익하기 때문에 고신역사기념관의 첫 발간 책에 이 내용을 실었을까?
기념관이 들어섰으니 뭔가 하나를 발간해야 하고 역사관이니 과거 이야기를 해야 했을까?
책은 책의 두께가 있어야 하니 글을 모았고 내용이 이상하고 문제가 있어도 일단 채웠을까?
말하자면, 고신의 욕하는 소리를 듣고 이렇게 막으면 일단 막기는 할 것이고
그렇다면, 고신의 내부를 좀 들여다 봐야 하겠는가?
정화조 속을 꼭 들여다 봐야 알겠는가, 그 내용물을 손가락에 찍어 맛을 봐야 하겠는가?
복음의 유익을 고려하라고 배우지 않았더라면 고신의 내용물을 많이 들추어 봤을 터인데
백 목사님께 배우고 들은 것이 있어 고신과 남 목사님의 글이 어린 교인을 상하게 못하도록
최소한 수준에서 해명과 배경 설명을 몇 가지 드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