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남 목사님의 허위 - 아버지와 아들을 바꿔치면서까지
고신역사연구소 발간 "장로교회와 역사-2008 제1호"의 남영환 글에서 남목사님은
백목사님이 동일교회에서 성직자 신분이 박탈 되자 서부교회를 개척했다고 거짓말을 하는데
교계에서 서부교회의 이름에 압도 된 남목사님으로서 서부교회의 출발을 사이비로 꾸며서라도
평생 백목사님을 비판한 자기의 불쌍한 처지를 백목사님 사후에 회복하려 시도하고 있습니다.
1.사실관계
남영환목사님은
-일제 때 신사참배 강요를 피해 만주와 몽고까지 도피했다가 해방 후 고신에 합류했고
-1946년 고려신학교 전신인 진해 강좌에 이인재목사님과 함께 참여한 고신 1세대이며
-1946년 고신이 정통성과 영향력 확보 때문에 박형룡박사를 모실 때 청빙 심부름을 했고
-1947년부터는 주남선목사님의 부교역자로, 51년부터 주목사님 사후 그 지위를 이어받았고
-고신 총회장을 비롯 주요 직책과 고신 전체 역사에 거의 간여했다고 스스로 밝힌 분이며
-그는 거창시절부터 백영희 노선 제거에 앞섰고 평생 이 노선을 반대한 증거가 참 많으며
-그가 1986년 은퇴하고 1988년 고신역사를 출간했고 그 내용에서도 백영희를 언급했던 바
-이번 글까지 그의 평생은 이 노선을 반대하는 고신의 제일선 실무이자 최종이었습니다.
-특히 1989년 백목사님 임종 직전에 백목사님을 만나 화해를 했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볼 때
윗글 회고 중
-회고록에서 보통 실수할 수 있는 것이나 지엽적인 사소한 문제점은 처음부터 배제하고
-알 수 밖에 없고 모른다 할 수 없는 것을 악한 마음으로 누락 왜곡 거짓 등으로 꾸민 부분
-그 결과가 복음을 위해서나 자신이 스스로 지킨 신앙을 뒤집는 중대한 해악인 부분
이런 부분이 너무 많았습니다.
윗글의 거짓 허위 등
-책의 초두에서 각 저자의 글이 발간측과 입장이 다를 수 있다고 미리 설명하고 있지만
-이제 반론하려는 내용 대부분은 그런 양해나 일반 상식으로 해명이 될 수 없는 내용이니
-세상 양심조차 없이 감정과 악의로 백영희를 허위 거짓으로 비판하여 이 노선을 매도했고
-글의 1차 목표는 이 노선 비판이지만 결국 기독교 전체에 대한 자해이기도 하기 때문에
-당시 고신의 심각한 탈선을 제대로 설명하고 윗글의 거짓을 해명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도서가 이미 반포 되어 교파를 막론하고 아무에게나 전해지고 있는 점도 고려했습니다.
2.남목사님의 악의, 허위, 왜곡
1)성직 부정을 통해 "백영희"를 죄인으로 만드는 악의적 매도
- 강도사 해임 공표와 함께 성직 호칭을 부정한 의미
감리교나 침례교와는 교리가 달라도 그 곳에서 선임한 성직자의 호칭을 우리 장로교에서는 그대로 인정하고 불러주고 있습니다. 고신이 수십 년 투쟁의 상대로 지목한 총회파 목사님을 부를 때도 그 성직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윗글에서 남목사님은 고신에서 나온 백목사님의 목사라는 성직 호칭 자체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남목사님의 짐작만 가지고 그렇게 이단이나 사회적 범법자로 정죄했고 위 책의 발간 주최측은 남목사님의 그런 글을 알면서도 그대로 실어 공인을 하고 있습니다.
남목사님이 백목사님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개인 감정풀이로 그렇게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나, 역사를 통해 고신은 과거 백목사님을 제거한 것이 잘못이라고 인정하고 남목사님 식으로 백목사님을 상대한 행동을 분명하게 철회했는데 왜 2008년의 고신역사기념관 건립을 계기로 이렇게까지 행동하는지 도무지 그 배경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실수라고 하기에는 고의성이 너무 뚜렷하게 나타나있고 그렇다고 고의적이라고 한다면 고신이 비록 군소교단이라 해도 그래도 모양을 갖추고 이제 역사까지 제법 가지고 있는 교단인데 상대방의 반론 앞에 허무하게 무너질 행동을 하는 것일까? 최근 고신이 세상 정권에게 공중 분해의 위기를 겪으며 안팎으로 감당하지 못할 사건들이 계속 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교단의 정신적 공황 상태에서 나온 실수일까? 그래도 고신교단은 공회에 제일 가까운 형제 교단이므로 최근 고신이 처한 곤란한 처지가 그 배경이라고 이해하고 싶습니다.
- 성직을 부정한 사례
위 글에서 "박윤선목사님"이면 "한상동목사님"으로 적고 "박목사"라고 할 때는 "한목사"라고 표현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칼빈의 경우는 성직이나 별도 호칭 없이 칼빈이라고만 표현하는 수가 많은데 이런 경우에 만일 루터를 표현한다면 역시 루터라고 동급 차원에서 적게 됩니다.
한상동목사님과 송상석목사님 사이는 서로 상대방을 이단이라 한 적은 없으나 감정적으로는 상대방을 타 종교인이나 되는 것처럼 격렬하게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이때도 성직 호칭은 늘 동급으로 사용했습니다. 혹시 제가 모르는 표현에서 한목사님은 "한목사"라 하고 상대방은 "송씨"나 "송상석"이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경우는 그 호칭을 통해 감정을 나타내는 것이지 교리 판단을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순복음교회나 구원파나 다락방처럼 이단 규정이 애매하거나 혼선을 빚은 경우는 그들을 상대로 글을 적을 때 그들의 "목사" 호칭을 고신의 목사님들과 비교할 때 어떻게 처리했느냐에 따라 이단으로 규정하느냐 여부가 바로 드러나게 됩니다. "한상동목사"라고 적은 글에서 "조용기"라고 적으면 순복음을 아직도 이단으로 취급할 때 처리하는 방법입니다.
고신의 글에서 박태선과 문선명에게 목사나 장로를 붙인 경우는 수십 년 세월 속에서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단 여부로 논란이 된 사람들은 호칭으로 살피면 고신의 내부 판단이 늘 바로 드러났습니다. 이것은 모든 정통 기독교의 공통사항입니다.
남목사님은 윗글에서 백목사님의 강도사 해임을 거론했고 그 이후는 타 교단 목사인데도 "백영희"라는 호칭으로 일관하여 백목사님의 강도사 해임은 타 교단이 된 목사의 과거 사건이 아니라 "목사"라는 호칭 자체를 인정할 수 없는 사회 흉악범이나 교리적 이단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계속 주장하는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남한 정부가 "김일성 주석"이라고 부를 때는 북한을 한 국가로 인정한다는 뜻이고 "김일성"이라고만 부를 때는 괴뢰 도둑놈이란 뜻입니다.
- 윗글의 내용
윗글에서 남목사님은 1959년 4월에 있었던 백목사님 제명 건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제명 당시 전도사였으나 정확하게 말하면 "강도사" 자격을 취득해 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강도사 자격 자체를 취소"시키고 이후 "백영희씨"라고 공식 문건에서 적고 있습니다. 남목사님은 이 사실까지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제명 사유가 동일 문건에서 교권의 명령에 거부한 것이라고 되어 있고 당시 고신 지도부가 백목사님을 서울로 발령을 내자 이동이 부당하다며 거부하여 "상회명령불복종"이라고 명시까지 되어 있는데, 남목사님은 제명에 앞서 "스캔들"이라는 사건이 있었다고 설명한 뒤 그 스캔들이 제명의 사유이며 그래서 성직 호칭조차 붙일 수 없는 범죄인인 것처럼 고의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백목사님에게 씌워진 죄목을 남목사님은 "오비이락"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글에 능한 남목사님이므로 자신이나 고신 스스로 백목사님의 죄목은 오해 받을 행동이었을 뿐이며 사실 내용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세월이 지나고 이 문제는 명확하게 드러났으며 모함이었음을 관련자들이 다 인정한 사실인데도, 다시 일반인이 잘 모르는 옛 이야기를 고신의 원로가 알려준다는 형식을 빌어 그때 죄는 사실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남목사님이 꾸며 만들고 싶은 그 죄는 1959년에 고신이 백목사님을 제명하기 훨씬 전의 일로 그 문제는 백목사님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서로 입을 맞추어 꾸며낸 이야기였으므로 고발만 했지 막상 처벌을 하려 해도 고발인 측이 얼버무리고 말았던 일입니다. 그런데도 전혀 별 건을 교묘하게 연결시켜 또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조선군이 왜군을 공격해서 북한이 이를 몰아내려고 6.25를 일으켰다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상식이야 그렇게 표현하면 바로 드러나는데 남목사님 외에는 고신과 외부 교계가 거의 모르고 있는 내용끼리 연결이 되는 것처럼 설명해 놓으면 일반인에게 덪을 놓는 일입니다. 당시 사실의 전개를 아는 남목사님과 그 모함을 받고 있는 공회로서는 서로 아는 사실인데 남목사님 외에 오늘 고신 교단 전체에서 이 사실을 허무맹랑한 거짓말로 바로 알아차릴 사람은 없는 것이 오늘 우리 현황입니다.
이런 책 내용을 고신이 한국교계를 향해 순례지로 오라고 선전하는 고신역사기념관에 전시하거나 그 내용을 대외를 향해 발간하면, 고신 외부인이 그 내용을 읽을 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고신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으므로 그 책임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2)서부교회를 범죄 단체로 매도한 악의적 거짓말
-교묘한 역사 왜곡
남목사님은 거짓말을 통해, 백목사님이 동일교회에서 모든 나쁜 일을 저질렀고 고신이 그곳에서 제명시켜 성직조차 가지지 못하게 하자, 성직자도 아닌 상태에서 서부교회를 개척하였으니 서부교회의 명성과 오늘의 성공의 배경에는 세상적으로도 부도덕한 종교 범죄인과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이 있다는 점을 각인시키고 있습니다. 왜 서부교회를 파직 성직자가 확정 판결을 받은 뒤 도망을 가서 세운 것으로 그 출발 역사를 왜곡하여 서부교회 자체를 부도덕하고 사이비 수준 종교단체로 만드려고 이런 엄청난 거짓말을 했을까? 서부교회가 가진 한국교회 내의 위상이 너무 심대하므로 그 뿌리를 흔들겠다는 발상입니다.
-남목사님이 모를 리가 없는 서부교회와 동일교회의 관계
일단 사실 관계만 설명하면, 서부교회의 출발은 백목사님 부임 훨씬 이전입니다. 해방 후 고신이 출발할 당시 고신의 제일 공적인 김길창목사님 교회 안에 교인들이 고신이 옳다고 스스로 개척한 교회이니 그 출발이 고신에서 제일 깨끗한 교회 중 하나입니다. 또 그 첫 교역자로 손양원목사님의 동생 손이원목사님이 목회했고 그 다음 김창인목사님이 오셨으니 남목사님 은퇴 시기까지 김목사님은 서울의 충현교회를 통해 또 국내 최대 교파인 합동측 최고 지도자로 유명한 분입니다. 김목사님이 서부교회로 부임했다가 피난민과 본토 교인의 알력 싸움에 못 견디고 개척한 곳이 동일교회이며 이 동일교회에서 김목사님은 고신을 졸업했고 또 서울 충현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고신이 놓친 가장 아까운 목회자로 손꼽을 때 백영희 김창인 석원태 등을 꼽고 신학자로는 박형룡 박윤선 등을 꼽습니다. 남목사님이 혼동할 리가 없는 동일교회와 서부교회의 출발 연혁을 남목사님은 완전 반대로 뒤집어 놓았습니다.
김목사님이 서부교회에서 동일교회로 개척해 나가자 서부교회는 존폐의 위기에 빠졌고 서부교회의 중요성과 상징성 때문에 고신 지도부 전체가 간청하여 백목사님을 거창에서 이동시켰는데, 이 때 남목사님은 당시 백조사님이 시무한 위천교회 당회장이었고 시찰장이었으므로 남목사님이 반대하면 그 파장이 클 수 밖에 없었는데 부산으로 영전한다고 생각한 남목사님은 이를 질시하여 끝까지 반대를 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런 남목사님이기 때문에 서부교회의 출발은 고신의 핵심 교회로 그 의미가 보통이 아니며 백목사님의 이동 사실도 가장 잘 아는 분입니다. 더구나 서부교회에서 동일교회를 개척했다는 사실은 백목사님이 개척을 한 사실도 없을 뿐더러 서부교회에서 고신이 이동을 시키려 할 때 이동이 부당하다고 거부하여 제명 당한 것을 남목사님은 훤히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남목사님이 아주 명확하게 인용하고 있는 제명건의 내용에도 "서부교회"라는 표시가 명시되어 있습니다. 동일교회는 지금까지도 고신 핵심 교회이므로 전화 한 통이면 사실확인조차 바로 되는 교회인데.
-당시의 사실 조작 배경
주남선목사님 사후 거창지방의 행정 계통은 목사 안수를 먼저 받은 남목사님이 상급자였습니다. 그러나 주목사님은 생전에 백목사님을 가장 총애했고, 남목사님이 신사참배를 견디지 못하고 도피했을 때 백목사님은 신사참배를 승리하고 또 전쟁 점령치하의 활동과 거창지방 전체 교역자와 교인의 존경과 순종 등에서 남목사님이 비교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사유로 남목사님이 백목사님을 질시했으리라는 점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평소 두 분은 만사 신앙의 기본 방향이 달랐습니다. 신앙의 근본 색채가 백목사님은 신본이었고 남목사님은 교단 헌법과 행정 집행에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좁은 한 지방에서 활동하다 보면 매번 부딪힐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남목사님은 백목사님의 성경해석과 교훈 및 신앙노선에 이르기까지 15가지를 조목조목 적어 따졌던 분입니다.
그러나 백목사님의 위상은 고신 전체 범위에서와 대외 교계적으로 남목사님이 감히 올려다 볼 수 없는 위치로 급부상하고 있었으니 백목사님은 김창인목사님과 함께 고신 최고의 부흥사이며 고신의 전체 지도부가 총애하고 지원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이때부터 남목사님은 백목사님을 일거에 허물 흠을 찾았고 그런 중에 고신 내부가 진리운동이냐 아니면 교권 확보냐는 문제로 내부 충돌이 벌어지자 진리운동 측에서 가장 앞서 움직이든 백목사님을 상대로 남목사님은 늘 비판자가 되었고 백목사님의 영향력이 고신 전체의 판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겠다고 판단이 서자 반대측에서는 허위로 죄목을 만들어 행정 치리로 결판을 내려 했습니다. 이 일에 남목사님은 깊이 간여하였기 때문에 지금도 고신 내에서 거의 알지도 못하고 기억도 못하는 당시 내용을 아주 현장에 있었던 것처럼 적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조작한 죄로는 당시 고신의 양심이 일말 남아 있을 때였으므로 백목사님을 치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백목사님에게 교회 이동을 강제로 명령했고 상회 명령은 부당하다고 거부하자 "이동 거부를 이유로 성직까지 박탈하는 조처를 내렸습니다.
왜 고신에서 제명만 하면 되는데 이단이나 중범죄인에게 처해지는 성직 자체를 박탈했을까? 백목사님의 영향력은 그를 고신 울타리 밖으로 몰아낸다고 하여 끝날 정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제명에서 그쳤다가 만일 그를 따르는 교회와 교인들이 움직이면 고신의 대규모 내분과 존립 문제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이었으므로, 고신 내에서 백목사님을 반대한 분들이 백목사님을 제거하는 방법과 절차를 조절하여 일반 교인에게는 목사직에서 파직시켰다고 선전할 수 있도록 제명 내용을 성직 자체를 박탈한 것으로 명시하고, 그리고 고신의 전국 교회 일반 교역자와 교인들에게는 구두로 백목사님이 성직 박탈이 될 죄목은 과거 실패했던 바로 그 죄가 증명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뒷말을 퍼뜨려서 백목사님의 고신에 미치는 영향력을 차단하려 한 것입니다.
당시 백목사님은 처음부터 남목사님이 뒤에서 활동하던 백목사님의 반대파에 맞서 고신 내 교권을 원했다면 남목사님이 구구절절이 표현하고 있는 그런 친백영희 인사들을 통해 얼마든지 반대파를 제압할 수 있었으나 그것은 바로 교회를 세상으로 만드는 일이기 때문에 반대측은 세상 방법을 동원해도 백목사님은 평소 말씀 그대로만 그냥 걸어갔던 것입니다. 고신의 잘못 된 것은 잘못 되었다 하는 것으로만 그쳤습니다. 그렇지만 그를 반대하는 고신 내 교권측에서는 고신 내에서 백목사님을 따라 움직일 전체 세력에 두려움을 가졌고 그들을 백목사님으로부터 떼놓는 방법은 백목사님을 파직 성직자로 만들고 그 죄목을 입으로 설명하는 것인데 그렇게 해도 백목사님이 맞상대를 하지 않을 것이므로 그들의 단기 목표는 이루어진다고 본 것입니다.
-남목사님의 이번 발표 배경
남목사님은 백목사님을 고신에서 제거함으로 고신 내부에서는 다시 백목사님 때문에 피해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었습니다. 고신 내부만 단속하면 되었고 그 방법은 교인들에게 귀속말로 거짓말만 하면 간단했기 때문입니다. 고신이 백목사님을 밀어낼 때도 그렇게 했지만 이후 1959년부터 1979년까지 장장 20년을 걸쳐 고신이 총공회나 백영희라는 이름 때문에 불편을 겪게 될 때는 항상 1959년의 마무리 처리 방법을 반복했습니다. 상대방이 누구든, 교인이든 목회자든 그 당시에 교회를 다니지도 않았던 사람이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고신은 상대방에게 귀속말로 수군수군거려서 거짓말로 아주 간단하게 이 노선을 칠 수 있었습니다.
고신의 수준이 이러 했고 이것이 고신 내부에서 자정되지 않았으므로 고신의 오늘이 이런 상태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고신은 총공회와 주요 활동지역이 다 겹치고 있습니다.
특히 고신이 역사와 진리운동의 순결을 외쳐왔고 실제 그 면에서 제일 정통성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교단과의 투쟁에서는 역사를 들고 나오면 다 이길 수 있는데 유독 총공회 앞에서는 달리 할 말이 없었습니다. 한편 교세에서는 고신과 내부 갈등을 끝내고 별도 출발하게 된 공회 교회들이 1960년 이후 주일학생들을 중심으로 부흥이 되며 그 여파가 학생 청년 장년반으로 이어졌고 또 원래 전도 열심이 남달랐으므로 외견상 미미하게 시작했으나 일반 교회의 전도 방법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데도 무섭게 성장하게 되자 고신은 다시 위기를 느끼게 됩니다. 고신의 본부인 부산에서 부동의 제일 큰 교회로 유지되고 있었고 그 성장 속도와 지교회의 개척은 부산 전역과 타 지역으로 나가고 있었습니다. 공회 교회와 교인 문제나 활동 등에서 겹칠 때마다 고신의 현장 목회자들은 그들의 지도부에게 공회에 대하여 질문을 했고 그때마다 고신의 지도부는 과거 했던 귀속말로 거짓말을 가르쳐서 쉽게 효력을 보고 있었습니다.
공회가 고신의 안에서 또 밀려난 이후로는 고신의 외부에서 고신에게 큰 짐이 될 때, 그 같은 시기에 남목사님은 목회하던 자신의 교인들에게 설교가 은혜 없다고 여기 저기로 배척을 받고 있었습니다. 거창읍교회에서는 데리고 있던 교육전도사가 차라리 낫다 하는 여론이 있었지만, 주동 교인들이 주목사님의 유언을 생각해서 어지간하면 모시려 했으나 한계에 달하고 두 번이나 배척하게 됩니다. 나중에 원목으로까지 가야 하는 신세가 되었고 또 노년에 은퇴를 하게 되는 서울 개척까지 가야 했습니다. 이렇게 갈수록 위신이 떨어지게 되는 도중에도 백목사님은 70세 은퇴 나이가 오히려 한국교계가 절정기라고 부러워 하고 있었고, 80세 임종까지 그 절정기는 더욱 빛을 발하고 있었으니 남목사님으로서는 백목사님을 평생 비판한 자기 입장이 참 어려웠을 것입니다. 심지어 고신대학교에서 서부교회 반사를 초빙하여 고신 전체의 강습회 강사로 모시고 고신의 현장 교회들이 감탄을 하는 분위기로 돌아서자 남목사님은 자신에 대한 고신 내의 새로운 부류의 비판을 듣게 됩니다.
-교계는 물론 사회언론까지 동원 된 백영희와 서부교회 조사
1979년 부산 지방의 한 기질 강하기로 소문난 기자가 서부교회를 상대로 기독교계의 경제 부정을 조사하기 위해 잠복 취재를 벌인 일이 일어납니다. 일반 대형 교회들의 경제 비리와 달리 서부교회는 어린 아동들을 상대로 코 묻은 돈까지 착취하고 긁어 모은다는 의심을 받게 되었는데, 당시 이런 분위기는 통일교나 박태선의 인권 유린과 노동 착취가 사회적으로 지탄 대상인 상태에서 일반 교회들까지도 그런 비판을 받기 시작할 때였고 일반 교계에 서부교회를 물어보면 이단시하는 표현이 나오기 쉬우므로 먼지 하나만 잡히면 주변 교계의 평가를 인용하여 세상 언론이 이단으로 도배를 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취재 결과 서부교회는 숨겨진 굉장한 보배라며 기자가 격찬 기사를 올렸습니다. 그 기자는 현재 우리 사회 최고 기자로 알려져 있고 국내 최대 언론계 회장까지 맡았으며 특히 매 사안에 대하여 극단적 소신을 가지고 예리하면서도 타협 없이 자기 주장을 밝히는 소신파 기질로 지금도 유명합니다.
지방언론이 백목사님과 서부교회를 완전히 훑고 조사한 뒤 서부교회를 대대적으로 보도하게 되자, 교계 언론은 그 동안 이단시 했던 교회였으므로 뒤를 캐서 초기에 눌러놓아야 했습니다. 그들이 관련 있는 교단들이 서부교회를 이단으로 비판했기 때문입니다. 기자들이 취재를 핑계로 사방에서 뒷조사를 하고 흠과 점을 찿고 있었습니다. 이미 앞서 보도 된 내용이 사실이라면 이는 기독교 교회사적 차원에서 칭송해야 할 일인데 그렇게 된다면 그 동안 국내 주요 교단이 이단시 했던 사실이 전부 허위가 될 입장이었습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서부교회의 소식은 서부교회가 위치한 부산의 교계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고신이나 합동 교단에서부터 집중 견제를 받게 됩니다. 좋은 소식으로 반갑게 맞아진 것이 아니라 의심과 우려 그리고 질시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동시에 지방과 중앙의 언론에 연결을 가진 기자들을 통해 타 교단 인사들이 서부교회가 초대형교회이니 털어서 먼지 나지 않을 리가 없다고 현미경으로 조사하는 일이 뒤따랐습니다. 기자가 정치 문제가 아니라 이런 종교계의 뒷 조사를 하려면 인권이나 보안의식이 없었던 시절이어서 못 캐낼 것이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정치권이나 사회는 막론하고 종교계 내부조차 종교계 지도자를 매장하거나 뒷조사를 할 때는 예로부터 돈 문제 여자 문제를 가장 먼저 들고 나옵니다. 돈 문제는 영수증처럼 무엇인가 보이는 증거 유무를 가지고라도 대처를 할 수 있는데 여자 문제가 나온다면 아무리 깨끗해도 마지막에는 고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소문을 만들고 소문으로 뒤집어씌우면 되기 때문에 조금의 여지라도 있으면 이제 고신 내부에서나 기독교 안에서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 불신 사회에까지 매장을 당할 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지난 날 그렇게 왔듯이 백목사님은 이때에도 과거처럼 외부의 공격에 대하여 아무런 대처나 대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언론 뿐 아니라 심지어 나중에 수사기관의 종교계 정보과 관계자들이 스스로 밝힌 것처럼 사법체계에서조차 철저하게 검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자나 기관원들이나 그 누구도 이런 초대형교회의 열려 있는 상황을 검증하고도 어떤 의심도 개입될 수 없는 정결을 보고 모두 감탄을 하며 물러서게 되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자 이번에는 앞다투어 세상 언론과 교계 언론이 거침없이 서부교회를 있는 그대로 보도하게 되었고 그 내용들은 지금까지도 기독교회사에서 전무후무한 기적과 감탄 뿐인 내용으로 기록되고 남아 있습니다. 그야말로 기독교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이상적인 상황이 다 서부교회에서 구현되었고 그 중심이 백영희목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남목사님의 어려운 처지
이렇게 되자 이제까지 이런 서부교회와 백목사님을 완전히 매장했던 과거가 고신 안의 지도부에서부터 여기 저기서 터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신에 양심있는 분들은 줄줄이 서부교회를 찾았고 진심으로 회개했고 오히려 그들로서도 일말의 찝찝했던 면을 털 수 있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고신의 지도자급 중에 마지막 백목사님을 만나 회개하고 가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문제는 남목사님이었습니다. 원래 주관이 강한 분이고 모든 자질이 뛰어난 인재였으므로 스스로 지난 날을 취소하기에는 너무 했던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고신의 분위기에서 더 버틸 수가 없게 되자 고신 인물 중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백목사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 일은 이 글에 대하여 이견이나 반론이 나오면 그때 자세히 밝히겠습니다. 미리 내용을 설명하면 백목사님 사후에 또 글을 발표하여 자신의 지난 날을 덮으려는 남목사님께 너무 가혹한 내용이 될까 해서입니다.
-백목사님 사후 달라진 남목사님
백목사님 생존 마지막 시기에 분명하게 백목사님을 만났고 과거사를 인정해 놓았지만, 1989년 백목사님이 돌아가시자 남목사님에게는 마지막 시험이 또 닥치게 됩니다. 백목사님 사후 서부교회가 외형적으로 내분과 분열에 들어가게 되며 한편으로는 고신 내부에서 고신이 공회와 합해야 하지 않느냐는 의논이 일어나게 되자, 자기의 과거 행적을 합리화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게 됩니다.
1999년 1월 1일의 글에서 보듯이, 그리고 이렇게 공표된 내용에서 공적으로 확인할 수 있듯이, 남목사님은 갑자기 고신의 1950년대 이야기를 회고 형식으로 끄집어 들었습니다. 백목사님 본인조차 죽었고 백목사님 생존 마지막 시기에 고신 내에서 백목사님을 지지했던 고신 내 주요 인물들이 거의 다 없어졌고 몇 남은 이들은 기억이 흐리거나 예전과 같이 활동을 하기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과거 이야기를 완전히 다 뒤집어도 아무도 반론하지 못하겠다고 판단할 상황입니다. 또 자기의 명예를 회복할 마지막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느닷없이 서부교회를 사이비 이단이나 도덕으로 부패한 말종의 성직자가 상직을 박탈 당한 죄를 지은 상태에서 시작했다는 점을 강조해야 할 상황이 조성되고 있었습니다. 서부교회는 내분으로 외부 대처를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자세히 들을 수 있는 통로는 많았습니다. 내용을 뒤집어도 해당 내용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진 시기를 택하여 너무 악의적으로 사건의 전개와 사실 자체와 당시 상황을 조작해서 백목사님을 치고 이를 통해 자신을 보호하고 나선 것입니다.
-고신기념관과 고신역사연구회의 책임
고신기념관측이 발간한 서적 내용에 명백한 거짓말이 있고, 그 거짓말이 나오게 된 배경 또는 적어도 결과적으로 그 내용이 끼치는 의미가 이러한데도, 당시 내용과 오늘까지 이어지는 흐름을 아는 이들은 이 노선에서 몇 남아 있고 고신에서는 이제 아무도 없을 듯합니다. 다만 그 책이 고신역사기념관을 통해 신사참배와 고신의 역사를 감명깊게 접하는 이들에게, 고신의 이런 유서 깊은 역사의 끝자락 가장 최근까지 생존한 남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셨고, 그가 노년에 회고록을 통해 오늘 세대가 모르는 과거 고신 초창기 이야기를 들려 주는 식으로 남목사님의 회고록을 실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마치 저자가 과거 감정을 다 초월하여 한국교회사 뒷 이야기 한 편을 들려주는 식이고, 그 신빙성은 고신역사기념관 그 역사연구소가 발간 첫 호에 실을 정도라는 무언의 분위기 때문에 아주 사실로 읽혀질 상황입니다. "사실은, 서부교회가 태생적으로 기독교에서 벗어난 이상한 집단"이라는 것이 그 결론입니다.
3.소결
고신은 역사 출발의 의미를 강조하는 곳입니다. 고신이 오늘까지 강조하는 것은 그 출발의 지도자들이 깨끗했다는 것이니 오늘 외형에 상관없이 자기들은 한국교회의 정통성을 가진 신앙집단이고 총회측은 그 출발이 잘못 되었으므로 아무리 대규모 교단이 되어도 늘 불순집단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 논리를 가지고 백목사님을 치기 위해 서부교회의 명성을 쳐야 하고 그런 목적을 달성하려면 서부교회의 출발은 사이비 수준의 집단과 비교할 정도라는 것이 남목사님의 글이 의도를 했던 아니했던 결과적으로 이 글에서 또 이 글을 실은 기념관측이 외부에 발표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남목사님은 개인적 연혁으로 볼 때 그 의도성이 악의적이라고 분명히 읽혀집니다.
서부교회의 이름은 한국교회사에서 달리 훼손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서부교회의 출발 역사는 남목사님이 조작하거나 사생아처럼 만들어 놓는다면 양 당사자를 제외한 한국교회 일반인에게는 먹혀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남목사님이 만들고자 한 서부교회의 잘못된 출발역사를 사실적으로 만들기 위해 고신 내부 문건을 선별 인용해서 사실성을 더한 다음, 사이 사이에 남목사님의 회고적 이야기를 적절하게 섞어 놓아, 일반인이 읽게 되면 누구나 서부교회란 백목사님이 파렴치한 죄를 짓다가 고신에서 제명을 당해 성직 이름조차 사용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자 서부교회를 만들고 나와서 오늘에 이르렀다고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선명의 경우도 그 출발은 파렴치한이지만 어쨌든 오늘 거대 단체를 만들어 주변을 압도하고 있는데 교회로서는 아무리 그 세력이 장대하다 해도 하나의 사탄의 하수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윗글에서 남목사님이 적은 글은 서부교회의 출발 역사만 기록해 두고 나머지 서부교회의 훗날 성공담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데, 이런 표현은 남목사님으로서는 참으로 악의에 찬 패역입니다.
백목사님에 대한 비판은 한국교회에서는 "서부교회"라는 이름 앞에서는 불 앞에 눈 녹듯이 사라져 버린다는 사실을 남목사님은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서부교회의 명성에 먹칠을 하지 않고는 백목사님에 대한 비판은 남목사님과 주변 몇 사람의 넋두리에 그치고 만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서부교회와 백목사님의 이름이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과거 고신에서 그를 매장하는 일에 가장 앞장 선 사람의 이름은 역사에 남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명확히 인식할 분입니다. 고신은 실제로 1979년 이후 서부교회와 백목사님을 다시 모셔야 한다는 운동이 끊이지 않고 나왔고 그런 발언은 고신이 감히 무시 못할 최고 지도부의 입에서까지 예사로 나왔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가장 위기를 느끼는 것은 남목사님입니다. 백목사님의 제거에 힘을 합했던 이들 중에 남은 이는 그리고 가장 중심에 섰던 이는 바로 자신이기 때문에 백목사님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진다는 말은 남목사님의 과거가 드러나고 확인되며 이는 자신의 사후에 이어질 고신 교회사에 남을 수치가 됩니다. 주기철목사님을 치리한 장로교 총회가 남목사님 생전까지도 주목사님에 대한 치리를 철회하지 못한 이유는 그 치리의 철회가 그를 치리한 이들과 그 추종자들에 대한 정죄와 매장과 역사적 판결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이해관계인들이 다 정리가 된 이후에야 치리 취소가 이루어졌습니다. 남목사님은 비록 목회에서는 실패를 했으나 이런 행정과 정치면에 대해서는 본능적으로 밝은 분입니다. 그분의 평생 걸음이 교단의 교권과 행정 문제를 두고 사건에 매달려 온 세월이었고 이는 그의 출간 서적에서 상세하게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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