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찬양대 운영안
잘못 알기 쉬운
백영희 신앙노선- 그 1. 찬양대 운영
백영희목사님의 신앙노선에서 정통신앙을 보수하며 동시에 앞으로 걸어갈 신앙노선을 발견한 사람마다 백영희목사님 교훈의 몰랐던 부분, 또는 대수롭게 지나쳤던 부분 등에 대하여 다시 배우고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다급해지고 또한 신앙문제 하나하나에 대하여 대단한 집착력을 가지고 있다.
바로 배운 교훈 하나, 그 집착력으로 평생 굳은 신앙의 사람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크게 두려워하는 점은, 자기 주관의 오해로 잘못 알고 있는 지식 하나는 그 집착력으로 돌이키며 수정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없애버리고 또한 자기의 주관적 오해로 많은 다른 사람을 잘못 정죄하거나 비판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안타까움을 본다. 더하여 잘못 알고 있는 그 한 두가지 오류 때문에 그들이 붙들고 있는 수많은 옳은 신앙노선이 함께 묻히는 점을 주의하고 싶다.
찬양대가 없었던 1981년까지, 총공회 교인들은 찬양대를 두는 것은 죄가 된다는 정도의 인식이 있었다.
찬양대
1.원래의 찬양대
1950년대 말까지 서부교회는 찬양대를 유지하였다. 부산 연합 대회에서 1등을 여러번 했을 만큼 활발했었다. 그러나 1960년대 들어오면서 폐지를 시키게 된 것은 찬양대 연습을 마치고 밤늦게 귀가하는 여자를 뒤따라간 남자 성가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후 1983년에 다시 찬양대를 만들었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2.찬양대의 장점
찬양대 자체는 죄가 아니다. 찬양대는 구약성경에서도 볼 수 있듯이 예배에 빠질 수 없는 한 요소이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찬양대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따라서 찬양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주장도 반드시 없어야 한다는 주장도 무조건 할 일이 아니다. 있어 필요하면 있을 수 있고, 없는 것이 더 유익하면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①받은 은혜의 감사
하나님께 감사할 일은 한도 없다. 감사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우선 그 감사가 지식적으로 새겨지고 반복이 되면 감사 기도가 된다. 이런 감사를 다른 여러 사람 앞에서 하게 되면 간증이 된다. 그러나 일일이 헤아릴 수 없어 넓게 펼쳐 놓아야 할 감사를 한 두마디로 감탄하게 되면 시가 되는데 여기에 음이 가해지면 찬송이 된다. 이런 감사의 찬송이 여러 사람이 함께 어우러 내면 찬양이 된다. 이 찬양은 받은 은혜의 전체적 공통적 표현이라 볼 때 얼마나 귀한 것이다.
②감사를 알게 함
원래는 받은 은혜를 가진 사람이 위에 순서를 따라 가다가 하류의 강처럼 모여진 그 양이 많을 때 찬양대가 되는 것인데, 이 찬양대의 찬양은 이런 은혜의 과정을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말없는 또 과정을 밟지 않은 상태에서 그 찬양의 감동으로 그 은혜의 원줄기를 찾게 만들기도 한다. 따라서 설교 아닌 설교가 되고 전도 아닌 전도가 될 수 있으니 찬양의 은혜도 은혜 중에 특별한 은혜인 것이다. 신앙 어린 사람이 가장 쉽게 들을 수 있는 전도요 가장 쉽게 들을 수 있는 설교요 가장 쉽게 따라할 수 있는 감사가 바로 찬양이다.
3.찬양대가 특히 주의할 점들:
①가장 외식으로 흐리기 쉬운 것
찬양은 은혜를 감사하는 것이지만 제일 껍데기 모습만 가지고 말한다면 노래이다. 학교 다니는 학생들이 영어 수학이 더 중요한 과목인 줄 알지만 재미가 없으니까 소홀히 하고 그 대신 좋아하는 노래는 시도 때도 없이 부르고 다니며, 너무 지나쳐서 탈이 나는 경우를 우리는 볼 수 있다. 노래가 나쁜 것이 아니고 지나치게 되면 해야 될 다른 공부에 지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찬양은 해야하기 때문에 하는 것보다 그냥 좋아서 누구나 하게 된다. 들어도 좋고 내가 해도 좋은 것, 첫 신앙이던 오래된 신앙이던 아무에게나 항상 좋게 접해진다. 그러나 성경, 기도, 전도, 심방 등은 좋아서 하는 것보다 해야 하기 때문에 하게 되는 수가 휠씬 많다. 그러다 보니까 찬양이 "감사의 표현"으로서 찬양이 아니라 세상 음악 좋아하듯 그렇게 좋아하는 수준이 되기 쉽고, 세상 음악 좋아하듯 찬양을 하면서 찬송가를 부르는 것이니까 그것이 "감사의 표현"이라고 착각하기가 쉬운 것이다.
자칫 가장 외식으로 흐르기 쉬운 것이 신앙생활에서 바로 찬양대 활동이 되기 쉽다. 그렇게 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음악적 기교가 찬양대의 중심에 있지 은혜의 감사가 찬양대의 중심에 서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예배가 말씀이 아니라 찬양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한 교회의 교인의 신앙생활도 말씀과 예배보다 찬양과 찬양대 활동이 중심이 되어 버린 분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건전가요, 또는 고전음악을 들으면서 느껴지는 감동과 교회 찬양대의 멋진 찬양에서 느끼는 감동이 진정 다른 것이며 다르게 느끼고 있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교회 밖에서도 요즘 여러 형태의 합창 동우회 활동들이 많아지고 있다. 함께 모여서 즐겁게 기쁘게 불러대는 합창의 즐거움과 그 느낌, 찬양대로 모여 즐겁게 기쁘게 불러대는 찬양의 즐거움과 그 느낌, 과연 본질적으로 다른지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어쨌던 너무 찬양대 활동이 찬양 그 자체가 감사의 본질로 들어가는 대신 노래가 주는 기쁨, 즉 찬양의 껍데기로 나가고 있다는 것을 우려하는 것이다.
교인의 경제가 좋아지면 문화생활에 눈을 뜨게 되고, 그리되면 주님 말씀에 자기를 죽이고 주님 앞에 어려운 자신을 도와달라는 간구는 흐려진다. 그 대신 찬양으로 포장된 또 하나의 문화생활이 교회 내 신앙생활을 대체하는 데까지 이를 수 있다. 여기에 이르면 신앙은 없어도 성악전문인을 모셔다 교회의 찬양을 주도케 하는 참으로 걱정될 상황이 생긴다. 음대 교수, 어느 전문 악기 연주가가 목사의 설교보다 더 예배를 은혜롭게 만든다고 느끼는 지경에 이르면 이미 간판만 교회일 것이다.
②자칫 이성문제로 바로 넘어갈 수 있는 것
이왕이면 한 교회에서 이왕이면 같은 교인끼리 알고 지내고 또 결혼까지 된다면 좋은 것이 아닌가? 물론 정도가 심하거나 그 도를 넘어서는 경우는 곤란하지만.... 이라는 입장을 가진 교회라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마음으로 짓는 죄까지를 두려워하는 입장의 보수적 교회라면 찬양대는 이성문제에 관한 한 학생회 활동과 함께 가장 예배당을 연애당으로 만든 원인이 찬양대 활동이다.
음악이 좋고 노래 부르는 것이 마음에 맞는 사람끼리 같이 연습을 하다보면, 찬양의 본질인 은혜의 감사는 잊어져 가고 반대로 인간의 감성만 자꾸 길러지게 된다. 이 감성이란 연애로 이성문제로 바로 끌고 갈 수 있는 가장 탁월한 실력가이다.
연애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교회라면 찬양대가 교회의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이고, 연애가 큰 죄라고 벌벌 떠는 교회라면, 찬양대는 좋고 필요하지만 이성문제 때문에 늘 긴장을 풀지 않아야 정상일 것이다. 자동차와 교통사고는 함께 증감되는 것이니 교통사고 때문에 자동차를 지구상에서 무조건 없애자는 주장도 문제고, 죽던 말던 자동차는 내 마음대로 운전해야겠다는 것은 안될 주장이다.
물론 자동차를 없애면 불편 차원의 문제이고 운전을 마음대로 하게 되면 생사 차원의 문제이니까, 찬양대 운영이 은혜롭게 되지 못한다면 찬양대를 없앤다고 교회의 찬양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며 따라서 찬양대란 없앨 수도 또는 이성문제가 발생되지 않도록 여러 가지 운영의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③찬양을 은혜에 감사로 유지시킨다 해도 일정한 조절은 필요
찬양대가 은혜 중심으로 잘 유지가 된다해도 또 하나의 깊은 신앙세계에서 주의할 것이 있다. 감사 생활은 신앙의 본질이나 그 방편은 한 가지로 치우치게 되면 편식과 같을 수 있다는 점이다. 받은 은혜를 자꾸 말씀으로 새기고 기도로 되새기는 것, 그래서 표현 못할 감사가 마음에서 끓고 밖으로 분출이 되지 않는 것과 그 분출을 찬양으로 끄집어 내는 것은 다 은혜로운 일이지만 자꾸 밖으로 끄집어 내다 보면 깊은 속 표현 못할 자기 속의 무한으로 나아가는 일에 지장을 많이 줄 때가 있다.
마음 깊이 가진 감사를 때로는 찬양으로 표출도 시킬 수 있으나, 그러나 마음 속에 더 깊이 가진 감사의 진원지 그 뜨거움을 잘 간수하고 더 깊어지도록 노력하는 면은 말씀으로 기도로 새겨 나가는 것이 연료공급이 된다는 점을 기억할 것이다.
4.새롭게 만들어 본 찬양대
이런 여러 가지 찬양대에 대하여 생각할 점을 고려하여 1983년 백영희목사님은 20여년 없앴던 찬양대를 다시 만들었다. 간단한 방향은 다음과 같다.
①초등 또는 중학생 여학생만의 찬양대 운영:
남성 화음이라는 음악적 기교를 포기하는 대신 여학생 만의 찬양대 운영으로 이성 문제를 제거하였다.
②찬양대의 예배 보조 위치
찬양대를 위한 특별 좌석을 만들지 않고 예배를 위한 일반 교인들의 평범한 좌석 중 앞부분에 모여 앉도록 했다. 구약에서는 모든 것이 외형 중심이었으나 신약에서는 초대교회 때부터 말씀 중심 은혜 중심의 예배가 되었다. 말씀 증거를 하기에 편리하고 또 교인들이 주목하기에 편리한 정도의 강단, 찬양대의 찬양이 온 교인에게 들릴 수 있으면 되는 찬양석이면 된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에 비하면 기독교 선진국인 유럽은 음악에 있어 대단한 수준에 이르렀고 그들에게는 고도의 음악 수준을 고려하여 예배당 구조와 찬양대 좌석을 마련하고 있다. 실은 천주교로 타락하던 교회가 살아 움직이게 하는 말씀 은혜는 비어두고, 말씀이 없어 텅빈 심령을 화려하고 웅장한 예배당 외형 가꾸기와 찬양대의 음악 수준, 음이 주는 감동 등으로 대체하여 왔던 것이 그 역사이다.
오늘 우리 교회가 초기 개혁시대를 잊어버리고 천주교를 오히려 닮아 나가고 있다. 이런 면까지 고려하여 찬양대를 비롯, 예배당의 모습도 예배 보는 장소로서의 편리성 정도의 의미로 맞춘 것이고 그런 마음으로 찬양대를 보는 것이다.
③찬양대의 찬송 인도 위치
찬양대가 예배 중 특별 순서로 찬양대 단독만으로 찬양하고 일반 교인들은 경청하는 순서를 갖지 않는다. 찬양대가 찬양대 대원만의 특별한 활동으로 지나치게 나가면 예배의 말씀 중심이 흔들리는 데까지 나아간다. 찬양대는 예배 중 찬송이 필요한 경우 그 찬송을 선도하고 또 보조하는 역할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된다. 찬양대의 특별 발표 순서는 그야말로 특별한 경우가 되어야 하며 성탄절 등 특별한 경우면 좋겠고, 평상의 예배에서는 예배 시작과 마지막 묵상기도 때 묵도송을 따로 부르는 정도로 운영하고 있다.
④어린 신앙을 교회 중심으로 인도하는 방편
찬양대를 초등학교나 중등생들 중심으로 운영한 것은 아직 성경공부나 기도생활 등으로 많은 시간을 보낼 정도가 아니고 또 안 믿는 가정 등에서 나온 어린 신앙이 많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가장 쉽게 교회 중심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하여 신앙 중심의 생활을 가지도록 인도하기 위함이다.
지적으로 성장되며 성경, 기도 등 아는 가운데 자라가야 할 청년들에게 찬양대보다 여러 다른 신앙의 깊은 면으로 안내하고 이끌다 보면 찬양대 중심으로 보낼 시간이 실제 그렇게 많지 않아야 된다는 것이다. 이미 그들은 자기 맡은 세상 위치에서 자기 신앙을 위해 할애하는 시간들을 아껴 써야 하고 배워 가야할 면이 너무 많기 때문에 찬양의 주 연령을 어린 학생쪽으로 돌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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