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 해방 후 한국 보수 교계 신앙 격변기와 한종희 신앙생애
글 소개 - yilee
다음 원고는 "한종희 목사님의 친필 회고록"입니다. 이 홈의 yilee의 출간을 전제로 자서전 차원에서 직접 투고했습니다. 원래 2009년 3월 25일에 한 목사님 댁을 방문했고 면담을 정리한 후 외부 일반 공개를 위해 2009년 4월에 한 목사님께 기록의 정확성을 위해 직접 교정을 부탁했습니다. 사안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한 목사님은 신중과 최선을 다했으며 1 년 6 개월이 지난 이 번 2010년 11월 9일에 최종 원고를 보내 왔습니다.
일단 저자 본인의 회고록이므로 보내 온 내용 그대로 공개합니다. 이 내용의 인용과 출간을 위해서는 이 홈의 일반 내용과 달리 이 홈의 운영자께 사전 승인을 받도록 부탁합니다. 내용 자체에 사실 확인을 해야 할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이 홈으로서는 전체 내용 대부분이 사실과 부합하며 은혜롭다고 생각하나 일부 몇 곳은 저자이신 한종희 목사님의 착오가 있다고 판단하여 한 목사님께 이 홈의 이의나 반론 자료를 우송하여 최종 입장을 듣고자 합니다. 최종 확인이 끝나고 나면 이 홈의 다른 자료처럼 일반 공개로 돌리겠습니다.
서명 : 해방 후 한국 교회 보수 신앙 격변기와 한종희의 신앙 생애
성격 : 원고본
대담 : 2009.3.25. 한 종희 목사님 자택
(면담 정리 핵심)
- 역사적 의미를 강조할 때는 이름 석 자만 적되, 대화체 등에서 필요할 때는 모든 직명에 ‘님’을 붙인다.
- 방문 시 타이핑 자료를 1차 정리한 뒤, 한 목사님께 이메일 확인을 통해 개인적으로 의견과 교정을 받는다.
- 한 목사님이 즐겨 사용하거나 강조한 표현들은 약간 투박해도 일단 살리고, 출간 때는 순화 정리한다.
- 한 목사님의 생애는 해방 후 건전했던 시기부터 현재까지 그 생애 자체가 한국 보수교계사 자료이다.
- 백 영희, 이 인재, 박 윤선을 최측근에서 모시며 배운 유일한 사람으로서 그들의 세계를 본 근접 목격자다.
- 백 영희의 교리를 비판한 한종희의 근거와 배경에 대하여 사실 확인과 성경 근거를 중심으로 살펴 본다.
(한 종희 신앙 생애)
1. 전공 분야
- 평생 자유주의 신학자인 바르트를 연구 비판에 주력
2. 신앙 성향
- 평생 말씀을 계명으로 삼아 한 말씀을 지키려 사력
- 성경 하나 외에는 어떤 것도 믿지 않는 성경 중심
- 박 윤선을 통해 철저한 칼빈주의로 평생 외길 유지
3. 공회 관계를 둔 한종희의 입장
- 신앙 학습기에 백 영희 목사님의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 그러나 성경에 틀렸으면 성경을 따르는 원칙 때문에 박 윤선의 전천년설이나 백 영희의 성화 구원은 반대
- 공회 핵심에 있다가 로마서 7장을 중심으로 새사람과 옛사람의 성화 문제 등을 두고 교리 문제이므로 분리
- 백 영희 전기를 적으려면 장단점 양면을 함께 적어야 하며, 한 쪽 말만 듣거나 한 쪽만 쓴다면 속이는 것
- 백 영희를 연구하거나 전기를 적으려면 공인으로 공적 대외적으로 언행한 것은 전기에 다 적을 것
- 물론 현대 언론 현황에서 볼 때 사생활은 보호받아야 함
1. 약력과 가정
- 1931년, 전북 정읍 신태인 출생
- 1953년, 6년 과정의 부산사범학교 졸업
- 1954-1956 초등학교 교사
- 1956년 초등학교 교사사임, 전도에 전념
- 1956년 현재 처와 제천에서 결혼, 슬하에 2남 4녀, 손자손녀 16명, 징손녀 1.
- 1965 총회신학교 59회 졸업
- 1968년 합동파 장로교 경북노회에서 목사안수
- 1956-1998 전도 및 목회 사역, 은퇴 후 현재까지(2010) 현대신학 연구계속 및 책 집필
- 한준희. 동희, 종희 삼형제
- 아버지가 병중에서 3살 때에 돌아 가셨고, 어머니 식모살이 따라 다녔고, 큰 형은 14세에 가출하여 군산 여수를 거쳐 부산에 정착하였고 작은 형도 어려서 머슴살이 하였고, 경제가 어려워 가정이 풍비박산했다.
- 1941년, 10세에, 네 가족이 부산에 다 모였고, 처음으로 두 형님을 따라서 부산 부민동에 있는 항서교회에 출석하였으나 어머니는 주일도 여관에서 일하며 교회에 동행하지 않으셨다. 집은 보수동 1가와 부평동 4가 만나는 네 거리에 있었고, 일본 사람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사는 주택가였으나 한인들이 간혹 살았으며 한인 집에 셋방을 얻어서 정착하였다. 작은 형은 가구점에서 목수 일을 배우며 먹고 잤고 야간학교에 다녔고, 큰 형과 어머니 셋이 한 방에서 생활하였다. 큰 형은 일본 해군 군함 수리 창에서 페인트칠을 하였고, 군함 수리 창은 집에서 걸어 한 시간 정도 걸리는 영도 섬 후미진 동편에 있었다. 당시에 형은 35원의 월급을 받았고, 배급은 1, 2, 3 등급으로 주었는데, 우리 집은 3 등급이었고, 3 가족이 제대로 먹으면 10일간 정도의 양이었다. 당시 쌀 소두 한 되를 뒷거래로 5원을 주고 구입했으니 당시 식량사정이 얼마나 어려웠든지 짐작할 수가 있다.
집에서는 큰 형 아침 주고 도시락 싸주면 우리 먹을 것은 없었다. 어머니와 나는 아침은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한국인이 경영하는 여관이 바로 이웃에 있어서 어머니가 거기서 일하여 나와 어머니는 여관에서 허기를 채웠다. 당시 사정으로는 어머님이 종일 매일 일해도 그 품 싹은 전혀 없었고, 두 식구 밥 얻어먹는 것 만해도 감사 득지하였다. 마침 그 여관에는 일본으로 보국대로 끌려가는 한국인들이 한국 전국에서 부산 이 곳 저 곳 여관에 모여 있다가 배타고 일본으로 갔는데, 배 떠나는 날을 기다려 여관에서 며칠씩 머물렀으며 여관에서는 밥에다 밀 빵을 썩어서 주었기 때문에, 남은 빵이 있을 때에는 그것을 먹을 수 있었다. 여하튼 그 때는 하루하루 배를 채우는 일이 전부였고 가장 힘든 일이었다.
- 1945년, 14세에 해방 되면서 큰 형님이 사업(간판업)을 시작하여 안정을 얻었으며, 큰형님이 동생들을 기르고 공부 뒷바라지했는데, 나는 해방 때 초등학교 4학년이었지만, 해방되면서 한글을 미리 깨우쳤기 때문에 5학년으로 다녔다 1947년에 졸업하고, 부산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작은 형은 해방 전에는 야간 주산학교를 다녔는데, 해방되면서 일본 사람들이 떠나가면서 빈 학교들이 신입생을 모집했는데, 경남상업중학교(6년 과정)에 입학하여 중학생 모자를 썼으니 어려서부터 꿈꾸던 소원을 비로소 이룬 것이다. 시골 머슴사리와 부산 가구점 목수와 야간주산학교에서 벗어나 주간 중학교의 모자를 썼을 때에 그 기쁨과 감격은 말로는 다 표현할 길이 없었다. 8.15 해방이 우리 형제들에게 물려준 것은 천지가 개벽하는 일이었다.
- 한동희는 큰 형님의 경제 지원으로 연세대를 갈 수 있었으나 SFC 운동을 하다가 고신에 갔고, 한종희도 서울사범대에 지원했으나 안식일 구두시험 치러 가지 않음으로 큰 형이 크게 실망하고, 같은 해에 자신이 경남대학(야간)에 입학하여 졸업했으니, 일반대학 졸업자는 큰 형뿐이다.
- 큰 형님도 어려서부터 서당에 다니며 동네 교회(기도소)를 다녔는데 부산에서도 교회에 계속 다녔으나 해방 후에 개인 사업에 바빠지면서 출석하지 못했다. 큰 형은 일찍이 뜻을 품고 독학을 계속하였으며, 두 동생을 세상에서 성공시키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었으나 두 동생은 신학교에 갔다. 큰 형은 1950년대에 思想界를 구독하였고, 신문에도 가끔 글을 게재하였다. 큰 형은 간판업을 하면서 경남대학 야간부를 졸업한 것이다.
신앙생활
부산항서교회 시절
-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는 3 형제가 부산 부민동에 소재한 김길창 목사님이 담임하셨던 항서교회에 출석하였다. 미군 폭격으로 소개령이 내려, 1944년에 막내인 한종희는 어머니 따라 시골에 가 있다가 해방되면서 다시 부산으로 왔으며, 1945년에 일인이 물러간 후에 한국인이 문을 연 이웃 보수동 1가에 자리한 광복교회에 다녔고 한동희는 계속하여 항서교회에 다녔다.
서부 교회의 시작
- 48년도에 정부가 수립되면서 친일파를 처단할 때에 김길창 목사가 투옥되었다, 김길창 목사는 일제 때에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할 때에 부총회장을 지냈고, 신사참배에 앞장섰기 때문에 정부가 수립되면서 투옥되었다. 한동희는 항서교회 학생회장으로, 토요일 오후 학생회 집회에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감옥에서 5년 반을 지내다 출옥한 이인재 전도사를 모셔다 강단에 세운 것 등으로. 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김영준장로와, 한동희와, 항서교회 시무 여전도사 이명달과, 청년 조종석 등이 주동이 되어, 김길창 목사가 투옥된 상태에서 1948년에 항서교회를 떠나 김영준 장로 자택 2층을 세내어 서부교회를 개척하였다. 이것이 당시 투옥된 김길창 목사와 출옥한 이인재 전도사 사이에 표출된 갈등의 단면이었다. 서부교회의 창립과 경남노회가 고신파와 총신파로 갈라진 것은 동일한 원인에서 발생한 동일한 사건이었다.
광복 교회
- 광복교회는 일제 때 일본인들이 세운 교회로서 당시로서는 부산에서 중앙지대였고 해방 후, 한국교회가 접수하여 광복교회라 하였으며, 이수필 목사가 담임하였고, 설교는 하지 않아도 김동선 목사, 유명한 노동운동가 김00(정주) 목사, 윤인구 목사가 출석했고, 1946년에는 미군 고문관인 한영교 박사가 출석하였고 후에 연대총장을 지냈다. 한영교 박사 덕분에 부산에서 미국의 고급승용차를 처음으로 목격하였다.
- 한종희는 집에서 150M 거리에 있는 광복교회에 다녔고, 만 16세(1947)에 부산사범부속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동년에 부산사범학교 1학년에 입학하였다. 한부선 선교사의 주선으로 학생들이 미군과 함께 매월요일 밤마다 처음에는 YMCA에서 나중에는 중앙교회에서 예배드렸는데, 1948년에 정부가 수립되면서 미군이 귀국하고부터는 매월요일 밤집회 장소를 고려신학교 강단으로 옮겼고, 박윤선 교장을 강사로 계속하였고, 또 매달 첫주와 셋째 주일 오후 2시에 고려신학교 강단에서 박윤선 교장을 전임강사로 하여 학생연합집회를 계속했는데, 한종희는 1953년 부산을 떠날 때까지 두 집회에 빠지지 않고 출석하였다. 광복교회 학생들이 많이 동행하여 다녔다. 당시에는 여름과 겨울마다 방학이 되면 부산지구 중고대학생이 연합하여 수양회를 고신강단에서 가졌고, 서울 경주 대구 마산 진주 등지에서도 많은 학생들이 참석하여 전국적인 연합집회가 되었으며, 강사는 고신파에서 박윤선, 항상동, 주삼선, 이인재, 활철도, 박손혁, 오종덕 목사님들이 담당하셨다.
- 48년에 광복교회 주일학교 교사로 임명받았음, 중2 학생(사범 2학년)으로서 최연소 주교교사가 된 것은 파격적. 전체 주교 교사 중 학생은 2명. 나머지는 전부가 장년들이었음. 당시 광복교회는 장년층과 학생층뿐이었고, 청년층이 거의 없었다.
- 매일 새벽기도 참석, 새벽마다 예배 후 성경 10장을 채워 읽었고, 또 전도대에 합류하여 북치며 노방전도에 참여하였고, 당시 내 눈에는 하나님밖에 안 보였다. 3층까지 있는 큰 예배당에 사찰이 나가고 비었을 때에 혼자서 건물 전체를 청소한 적도 있었다. 집에서 150m거리이므로 평일에도 교회 찬양대 연습실에 있는 올갠으로 바이엘 교본으로 연습하여, 주일학생 찬양지도 하였고, 훗날 서부교회에서 밤예배반주도 하였다.
- 1948년에 고신에서 파숫군지를 발생하자, 매달 구입하여 정독하였고, 한 달에 6회이상 박윤선의 설교 및 강의를 월요일밤과 주일오후에 고신강단에서 들으면서, 철저한 칼빈주의 훈련을 받았다. 박윤선의 첫 주석으로 요한계시록을 1949년에 출판하자 즉시 구입해서 애독하였고, 1950년 6.25 전쟁 중에서는 계시록주석에 나오는 모든 설교를 습자지에 적어 호주머니에 넣고 다닌 이유는, 당시는 길에서 학생들을 잡아다가 입대시키는 때이므로, 나도 끌려가면 일선에서 믿음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교건물은 미군병원으로 징발되었기 때문에, 잠시 쉬다가 아미동 절간을 빌려 천막치고 개교하여 계속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내촌선생님의 로마서 주석도 빌려서 읽었다. 산다싱, 루터 등 신앙위인들의 전기도 여러 권 읽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사범학교에 다녔지만, 내 구원에 집적 관계가 깊은 로마서와 계시록은 본문 연구에 전념하면서 많이 읽었기 때문에 성경 중에서 두 권은 손때가 묻어 더러워져 있었다.
큰 형님이 1950년대에 장준하 선생이 발간했던 思想界를 창간호부터 구독했기 때문에, 경제, 현대신학, 현대철학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박윤선 교수의 강의와 파수군지를 통해서 신학에 일찍이 눈이 떴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지대한 관심으로 신학연구에 점차 몰입하게 되었다. “서당 개 3년이면 시를 읊는다.”는 옛말처럼 박윤선이라는 학자 곁에서 6년간을 지내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절박한 구원문제로 신학연구에 몰입하게 되었고, 박윤선 교장이 파수군 지에 자주 썼던 칼 바르트신학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손영준 선교사.
1972년에 미국 정통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파송 받아 귀국하여 고신과 총신과 관계하며 선교사 훈련원을 운영하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은퇴하고 미국 동북부에서 미국인 교회 강단을 지키면서 노년을 보내는 손영준 선교사는 한영교 박사가 작은 외할아버지시다. 1951년 경남노회가 고려파와 총회파로 갈라질 때에 광복교회에서 서부교회로 교회를 옮겨 지내다가 서울대학교 물리대학 종교학과에 입학하여 신사훈 박사에게서 배우다가 1954년경에 미국 칼빈신학교로 유학. 1972년에 정통장로교 파송 선교사로 한국에 다시 왔다. 손영준은 해방직후 한국 학생신앙운동(SFC)에 초석을 놓은 사람 중에 한 분이다. 가장 열정적이고 헌신적이었다. 불 같이 뜨거웠기에 경남중학 시절에는 한동희와 함께 학교 한 주간 결석하고, 서울 박재봉 목사의 집회에 다음에는 해운대제일 교회 박윤선 목사의 집회에 참석했었다. 그만큼 뜨거웠던 불길을 무엇에 비교하랴!
6.25 때에 부모님이 서울서 미쳐 피난오지 못하였다. 부산 보수 공원에 일제 때부터 있었던 애린원이란 고아원 원장이 외할아버지였다. 고아원은 사재를 드려 지은 3층 빌딩이었다. 경남중학 시절에는 외 할아버지 댁에 유숙하며 경남 중학을 다녔다. 바이올린 연주자로 학생들 세계에서 인기가 높았었다. 6.25 때에는 국군에 입대하여 인민군에게 포로가 되었으나 구사일생 도망쳐 부산에 왔을 때에 우리 집에서 불과 600m 정도의 거리에 있는 외할아버지 댁에 가지 않고 우리 집에서 15일 정도 휴양한 적이 있다. 우리 어머님이 한약을 지어 다려준 기억이 있다. 그만큼 한동희 형과 막중한 사이였고, 광복교회에서는 먼저 학생회 회장을 지냈고 다음에 한종희가 학생회 회장을 지냈다.
SFC 운동
- 1945년 해방되면서 중학교(당시는 중학교 6년 과정)마다 기독학생회(Student for Christ)가 태동했고, 각 중학교 회장들이 모여서 연합회를 구성할 때에 한동희 형이 부산지구 SFC 연합회 초대위원장이 되었다.,
- 당시 SFC 제1기 창립자들, 정보근, 한동희, 신도관, 도군삼(경남상업) 김우진, 이원홍, 한기범, 김병도(부산중학), 박영훈(동래중학교), 황창호(부산사범) 박성환 등이다. 이들이 1기며 한명동 목사님이 전임 지도자였고, 이들이 자신들의 모임을 처음에 “10인 신앙협조회”라고 칭하였고, 한 달에 한번씩 회원 자택을 돌면서 밤새워 기도하고 회의하였으며, 우리 집에서도 가끔 모였다.
- 영도제일교회에는 해방직후에 한명동 목사님이 담임이셨고. 김석산 정상호 한기태 김상철이 있었으며 한종희가 서부교회에 출석하면서 이들과 합세하여 5명이 매화요일 밤다가 “독수리회”라는 이름으로 박성환 선배 님 자택(영도)에서 모였고, 주로 이원홍 형이 독수리회를 지도하였고, 박성환 형은 일찍이 우리 곁을 떠나갔고, 한기태도 80년대에 먼저 떠나갔다. 박성환 형 집은 당시 영도에서 선박(배)을 갖고 있을 만큼 여유가 있었기에 박성환 형 댁에서 독수리회가 모일 수 있었다. 당시 김상철이가 평양에서 6.25전에 남하하여 고모댁인 박성환 형 댁에서 사범학교에 다녔고, 김상철의 친 형도 같이 지내면서 부산사범학교에 다녔다. 6.25떼에는 김상철이가 평양에 가서 김상복 동생과 여동생을 데려와 중학교에 다니게 하였고, 김상복은 서울대학교 문리대 영문과를 졸업시켜 미국 유학하게 하고, 결국 서울 할렐루야 교회에서 금년 12월에 은퇴한다. 김상복목사의 부모님과 다른 형제들은 평양에 머물렀다.
사범 학교
부산 사범학교 졸업하면 초등 정교사, 일반 고교와 다른 것은 초급대학의 과목인 심리학 논리학, 교육학, 서양교육사 등이 과목에 들어있었다. 당시 윤인구 목사가 부산사범학교를 설립하고 이어 부산대도 설립한 분인데 후에 연대총장역임.
- 전영창선생님이 6.25사변이 터지자, 즉시 당시 미국주재 한국 대사에게 청하여, 자원하여 한국에 들어왔고, 부산 영도에 자리를 잡고, 천막치고 복음병원을 시작하였으며, 학생운동에 불을 집혔다. 사범학교에서는 금요일마다 1년을 모셨고, 사범학교 기독학생회에는 국회 부의장이던 황성수, 고신 함일톤 교수, 한부선 선교사, 김찬인 전도사님 같은 분들을 강사로 모셨고, 한명동 목사님은 전임 지도자였다. 사범학교 기독학생회는 1947년 한종희가 1학년에 입학 후, 교실에서 성경을 읽고 있을 때에, 상급생이 각 반 청소검사를 하다가 성경을 읽고 있던 한종희를 보자, 기독학생회를 조직하자고 해서, 상급생을 도아 조직하여, 졸업할 때까지 6년간 교실마다 다니면서 흑판에 예베시간을 알리며, 회원들 출석을 독려하는 일을 계속하였고, 강사교섭도 계속하였고, 졸업반에서만 회장직을 맡았다. 신입생 환영식, 졸업생 송별식은 여학생들이 우리 집(두 형수-서부교회 출석)의 도움을 받아 음식을 준비하여 잔치를 하였다.
- 이말출 선샌님의 아들 이동화는 사범병설초등 동기동창이었고, 이말출 선생님은 사범학교 수예교사였으며, 사범학교에서 김경택 담임 선생님은 한종희를 목사라고 불렀다, 김경택 선생님은 서양교육사를 가르칠 때에 중세기는 천년동안 기독교가 지배했으니, 기독교를 빼놓으면 할 이야기가 없었다, 선생님이 불신자라 기독교를 모르니, “한종희 네가 기독교에 대하여 말라라”고 하셔서, 반마다 다니면서 강의하고 선생님은 뒤에 앉아서 들으신 적이 있었다. 사범학교 본과 1학년(1951년) 때에 상급생이 사범학교 기독학생회(SFC) 회장이었는데, 강사를 모시고 바다 가에 천막을 치고 수양회를 했을 때에, 남녀가 바다에서 옷 벗고 수양회 한다는 것은 불가한 일이라 생각되어 참석하지 아니하였다. 그 당시 나는 결혼 전 유혹을 피하기 위해서 남녀간의 사진을 찍지 않았고, 소설을 읽지 않았고, 학교에서 가는 극장에도 가지 않고 교실을 지켰으니 수양회에 가지 않는 것은 나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신앙 활동
- 1951년 말부터 경남노회가 고신파와 총회파로 갈라지면서 광복교회가 총회파에 속하였기 때문에, 이수필 목사님과 학생지도 담당 최종성 집사님이 참석하여 한종희의 학생회장 재당선을 막았음으로, 즉시 송별회를 받고, 떠나 서부교회로 갔다.
- 1945년 14세 이후로는 형님이 잘 버니까 경제 문제가 없었다. 그때에도 주변 어려운 사람을 도왔다. 성경에서 굶주린 사람이나 어려운 사람을 도우라는 강력한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순종하였고, 지극히 작은 자를 돌보는 것이 주님 섬기는 것이라는 말씀을 그대로 믿었기 때문에, 거지를 대하면서도 경건한 마음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다. 대구 교도소 앞길에서 추운 겨울에 여름 남방을 입고 출감하는 사람을 보자 속옷을 벗어주었고, 대구역에서 새벽에 등 내놓고 자는 아이에게 털 세타를 벗어 주었다. 때가 겨울인데 내게 외투가 없는 것을 보신 작은 형이 주신 것이지만 나 보다 더 어려운 자 앞에서는 벗어 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미국 생활에서도 겨울에 어려운 자를 만나면 20불, 멀쩡한 사람에게는 1, 2불, 젊은이라도 기막히면 도나스 하나에 커피 한 잔은 마셔야 하니까 5불을 준다. 영만 아니라 육신도 돌보라는 것이 주님의 명령이므로, 나보다 어려운 사람은 내게 도움 받을 권리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명하신 것은 다 법이고 진리이기 때문이다.
겨울에는 집이 추우니까, 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미국 공보원 도서관으로 가서 공부했고, 공보관에는 책도 많았고 난방이 좋아서 편리하였다. 그 때에 청교도들의 미국이민 역사를 읽은 기억이 있다. 집은 간판업을 했는데 경상남도 도청에 관계된 간판, 현수막 등을 독점하였고, 훗날에는 도로 표시판, 신호등까지 제작하였으니, 생활에 여유가 있었다.
- 1951년 12월 말에 서부교회로 옮겼고, 얼마 후에 손의원 목사님이 떠나자 즉시 김창인 전도사님이 부임하였으나, 김용학 집사님 중심으로 한 남한파와 북한파의 갈등으로 김창인 전도사님을 옹립한 북한 교인들이 서부교회를 떠나 이웃에 동일교회를 세웠고, 새로 부임하신 백영희 조사님에게 배웠지만 김창인 목사님 사모님 별세 시 서울 충현교회 사택을 방문하여 하룻밤을 자고 돌아올 정도로 김창인 목사님을 따랐다. 성장 과정에서 배운 것은 평생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심리학에서 말하는 진리다, 나는 철이 들면서 손양원 한상동 주남선 이인재 김찬인 전영창 이학인 백영희의 설교를 들었는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송 상석 목사님은 부산 시내 항도교회에 시무하시면서 서부교회 당회장으로 계실 때에, 백 조사님을 서부교회에 부임케 하셨다. 백 조사님은 오시자마자 항상 예배당의 강단 밑에 쪼그리고 앉아 철야기도 하셨고, 늘 주변에는 보통10여명 이상의 여성도들이 철야기도 하였고, 기도 후에는 조사님 주변에 둘러 앉아 상담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가 있었다.
부산에서 해방 후에 감옥에서 나온 분들께 직접 설교를 들었기 때문에 설교를 원색적으로 들었다, 이인재 전도사님은 서부 교회에 자주 오셨고 평생 모셨고, 박윤선 목사님도 평생 돌아가실 때까지 가까이 모셨다.
내가 신앙으로 철이 들면서 자라기 시작할 때 백영희 조사님 밑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심부름을 종종 시키셨으나, 신학문제로 직접 대화했거나 토론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 교훈이 성경과 다르면 받지 않았다. 예를 들면 곤경에 처한 자는 하나님이 연단케 하시는 것이니, 돕지 말라고 하셨지만, 성서는 도우라는 교훈에 조건이 없었기 때문에, 돕지 말라는 교훈은 받지 않았다. 또한 전 천년설을 가르치셨지만 성서의 교훈은 무 천년설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받지 않았다.
1949년에 박윤선 목사님의 요한계시록 주석이 출판되자 즉시 구입하여 읽었고, 내촌 선생님의 로마서 주석을 빌려 읽었다. 당시에 요한계시록과 로마서는 내 구원에 직접 관계된 말씀이라 많이 읽어서 검정 때가 묻어 있었다. 성경 중에서도 로마서는 믿음의 본질에 대한 해설서이고, 요한계시록은 구원받은 성도가 세상을 걸어갈 흔적을 앞당겨 말씀해주신 것이므로, 이 예언서에는 나의 삶이 들어있으니,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에 로마서와 계시록을 열심히 읽고 공부하였기 때문에, 검정 때가 묻어 있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고 하셨고, 또 말씀하시기를 나를 사랑하여 네 목숨까지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저야, 주님을 따를 수 있고 순종할 수 있고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다. 주님이 가는 대로 가고, 주님이 좋아 하는 대로 좋아하고, 주님이 싫어하는 대로 싫어하는 것이 순종이고 동행이고 성화를 입는 것이다. 은혜로 주시는 영생은 값없이 받지만, 순종과 동행과 성화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저야 이루어진다. 야고보 사도는 말하기를(약2장) 순종은 참 믿음의 열매라고 하였고, 순종이 없는 믿음은 구원받지 못할 거짓 믿음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구원 받은 후에 하나님의 요청과 명령과 율법과 계명에 떨리는 마음으로 순종하는데 전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백 목사님은 자기가 깨달은 진리가 옳다는 확신이 강한 나머지, 자기와 교훈이 다른 사람은 용납하지 않고 교제를 끊고, 추방하였다. 만일 나를 가르치실 때에 자신이 깨달은 진리가 그렇게도 옳고 확실했다면, 내가 자주 방에 들어가 질문했을 때에, 마땅히 답을 주셔야 했다. 그러나 내게 답을 주지 못하였고, 나중에 말씀이 나타나기를 기다려 보자고만 하셨으며, 거창에 보내놓고는, 내가 유일하게 김현봉 목사님의 집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고 있으니, 한종희도 가보라고 하셨고, 1959년에서 1961년까지 1년에 2회씩 김현봉 목사님이 인도하시던 관악산과, 삼각산 집회에도 참석했었다.
1961년 제천 금성에서 “거듭난 영혼은 죄 범하지 않는다”는 교훈이 이단임을 감지하고, 즉시 서부교회를 방문하여, “거듭난 후에도 거듭한 영혼이 범죄하고, 거듭난 영혼이 회개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거듭난 영혼은 죄 범하지 아니한다는 교리는 이단일 위험이 있다고 말씀드렸으나, 그 후 바로 청량리 집회에서 한종희는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이단과 동일한 이단이라 선언하셨고, 교제하지 말고 인사하지 말라고 선언하셨다. 처에게 이혼할 것을 종용하셨으나 다행히 이혼하지 아니하였고, 한동희 형도 이인재 목사님의 주선으로 1963년 봄에 제천서 대구 남성교회로 옮겼다가 가을께 마산으로 옮겨가면서 백 목사님과의 관계를 끊었다.
한종희와 소설.
학생들이 공부 시간에도 소설을 보고 했는데, 3학년(중3) 때까지 전도만 하고 성경만 봤는데, 책을 읽지 않으면 너무나 무식해질 것이 걱정되어 소설을 봐야겠다고 생각했고, 지도를 받기로 결심하고, 당시 김계원 교감선생님이 신자이고 국어 담임이었으므로, 신앙생활에 도움이 될 좋은 소설을 소개해 달라고 말씀드렸더니, 자기 서재에서 이광수 작 ‘사랑’의 상하권을 가져다 주셨다, 그것을 다 읽었는데, 읽으면서, 몸에 불이 일어나는 장명을 접하고는 이것이 경건하게 사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겠다는 것을 깨닫고, 성인이 되고 결혼하기까지는 다시는 소설을 보지 않기로 결심하였고, 실제로 결혼할 때까지 보지 않았다.
한종희와 영화.
또 미군들이 학교를 병원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산에 절간을 빌려서 천막을 치고 공부했는데 동아극장 부산극장이 가까우니까 학교가 자주 교육영화를 보여주었으나, 신앙생활에 해가 됨으로 교실을 지키고 가지 않았다. 남녀 공학이어서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사진을 보면 유혹을 받기 때문에. 찍은 것도 태워 버렸고. 내가 성인이 되어 정상 생활을 할 때까지는 사진을 찍지 않았다. 여하튼 요셉처럼 깨끗이 살기 위해서는 방해되는 것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1963년에 서울 대한극장에서 10계명 영화가 개봉되어 고응진 장로 이능전 집사 부부가 먼저 관람을 하고 표를 사서 주시면서 이 영화는 보아야 한다고 해서 보았는데, 보지 않기로 작정하고는 처음 보았다. 당시는 1956년에 결혼하여 1963년에는 아이들이 셋이었다. 훗날 한 선배가 다른 선배에게 나를 악평한 사실을 알고서야 두 선배가 나를 정신 나간 사람 취급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를 같은 교회에서 지켜본 두 선배들은 나를 정상으로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두 분은 유명하여 말하면 세상이 다 알만한 선배들이다.
한종희와 사진 찍기.
한번은 남녀가 함께 찍은 단체사진을 보면서 마음에 드는 여자 앞에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전에는 다른 여자가 마음에 들었는데, 새 인물을 보니 더 좋은 여자가 마음에 들었다. 생각이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사범학교 6년 동안 남녀가 섞인 혼합반이었다. 또 SFC 모임에서도 매주간 남녀가 모임을 가졌다. 연합집회에 가면 부산 시내 모든 학교의 여학생들이 다 모였다. 이런저런 모임으로 남녀가 함께 사진 찍는 기회가 1년이면 몇 번은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새 인물이 나타날 때마다 좋아하는 얼굴이 바뀌는 것을 경험하면서 이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는 결론을 얻었다. 내가 혼기가 차서 결혼하기 전에 이 여자 저 여자를 마음에 바꾸어 좋아하는 짓은 다시 아니하리라고 결심하고 있는 사진을 다 태워버렸다. 다시는 남녀가 함께 찍는 사진은 찍지 않았다.
이화여고 학생이 있었다. 피난 와서 잠시 사범학교에 편입했다가 자기 학교가 문을 열자 자기 학교로 돌아갔다. 미인이고 단정하고 말수가 적었다. 성탄절에 은으로 만든 십자가 달린 목걸이를 나에게 주었지만 한 번도 그 여학생과 사담을 나눈 적이 없었다. 이 여학생이 사범학교 SFC 모임에 참여하였고, 같은 서부교회에 다녔고, 고신에서 모이는 연합집회에 같이 참여하였고, 평일에 학교에 갈 때에는 우리 집 앞을 지나서 갔다. 우리 집이 당시 이 대통령 임시 관사가 있던 부민동에서 이화여고가 있는 영도에 가려면 우리 집 앞으로 나 있는 전차길이 첩경이었다. 집 앞에서 자주 얼굴이 마주쳤지만 수인사뿐이었고 한 번도 말을 주고받지 않았다. 우리가 분명히 아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좋아한 것은 분명했지만 그 학생이 이화여대 입학 후 떠난 이후로는 다시는 보지도 못했다. 지금도 영화를 보듯이 생생한 한 편의 드라마였다.
1953년 2월에 서부교회 우태숙 강사 집회가 있었다. 당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문과에 입학시험이 바로 앞에 있을 때였으나 부흥기간에는 시험준비를 접고 집회에만 전념하였다. 강사님이 공중 앞에서 자복하여 회개하라고 외치셨기 때문에, 그대로 순종했고, 당시 주일예배 시 앞에 나가서 예배찬양을 인도하였는데, 죄를 자복한 탓으로 부끄럽고 교인들 보기 민망해서 더 이상 공중 앞에 설 수가 없어서 백 조사님 방에 들어가 예배찬양 인도할 수 없다고 하였으나, 백 조사님은 막 무가내고 계속 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죄를 사하셨고 의인이 되었으니 서라고 하셨다. 몇 번이나 권하셨어도 듣지 않으니 나중에는 윽박지르시면서 “죄를 정하실 하나님이 죄 없다 하면 죄가 없는 것인데, 왜 서지 못하느냐!”고 소리 질러 말씀하셨을 때에, 갑자기 천둥 치는 소리 같이 내 가슴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천둥치는 소리는 다음과 같은 소리였다.
“너는 죄 사함 받았다.”
“이제 너는 죄가 없다.”
“하나님이 너를 의롭다 칭하신다.”
“이제 너는 의인이다.”
그 순간에 천하만물이 다 변해버렸다. 온 통 우주는 기쁨과 평강으로 가득 찼다. 서부교회 문을 열고 나오자 사범학교 울타리 위로 하늘을 찌르는 은행나무 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그렇게도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교회에서 집까지 가는 20분 동안 가로수들이 다 천국으로 변해 있었다. 나무를 보아도 기쁘고, 산을 보아도 기쁘고, 온통 기쁜 것들뿐이었다. 나는 가슴이 터지도록 벅찼고, 기뻐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 때 내가 변해버렸다. 새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다. 온 세상이 다 변해 있었다. 옛 사람이 아주 죽어버렸다. 그 변화는 너무나 크고 엄청난 것이어서, 지금까지 나의 삶을 이끌어왔고 지배해왔다. 성경에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태어났다는 말씀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이러한 체험이 있고 한 달 후 쯤 서울대학교 사대 영문과에 입학시험 치렀지만, 주일 구두시험장에 나가지 않았다. 그 때에 서부교회에서 서울대학교 문리대 독문과(장렬), 불문과(정총해), 화학과(박성관)에 한 사람씩, 그리고 연대 영문과에(이동화) 시험에 응했고, 다 입학했다. 나는 그 때 실력으로 1956년 산중 전도 시에 세 사람(Robert Jamieson, A. R. Fausset and David Brown)이 쓴 단권 주석을 읽었으니, 그 때에 구두시험에 응했으면 나도 입학했을 것이다.
이 우주를 다 주어도 바꿀 수 없는 영생의 구원을 보장받았으니, 이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 마음은 온통 이 생각뿐이었다. 옳지 드릴 것은 내 생명이로다. 이제부터 다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를 위해서는 살지 아니하리라. 교회 종치는 일이라도 하나님을 위한 일이면, 그것을 평생하리라.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은 힘들고 고생이 따랐지만 당연한 일이 되었다. 처음에는 순종하면 죽는 것 같이 힘들었다. 그런데 순종하고 죽지는 않았다. 때로는 기적이 순종 뒤를 따랐다. 기적은 나의 순종이 옳았음을 입증해주었다. 기적을 경험하고부터는 순종으로 겪는 고난도 당연한 일이 되었다.
인간의 존재 목적이나 삶의 목적이 오직 하나님을 위한 것임을 알고부터는,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 당연하고, 옳고, 거룩한 일이었기 때문에, 기뻐하면서 하게 되었다. 그 후로는 무슨 일을 만나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먼저 물었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즉시 나의 욕구를 버렸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따랐다.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여 하나님의 우선순위를 지켜드렸다.
가정뿐만 아니라, 교회나, 노회나 총회를 섬길 때에도 이 원칙은 변함이 없었다. 내게 주어진 사례금도 마음대로 써보지 못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는 것이
① 하나님만을 위해서 사는 것이고,
②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것이고,
③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고,
④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고,
⑤ 온전히 성화를 입는 길이고,
⑥ 인생을 가장 훌륭하게 참되게 사는 것이고,
⑦ 영원히 하늘곡간에 채우는 삶이다.
고신 분쟁
백영희는 고려파 안에서 원칙주의자로 반고소파니까 밀려났다, 반고소는 박윤선 백영희 이인재 세 사람이 주동이었다. 당시 백영희 전도사님은 신학생으로 있으며 부흥회를 많이 다녔는데, 성도간의 법정소송은 죄라고 외쳤기 때문에, 법정소송을 계속하는 분들과 이 분들을 지원하는 분들이 싫어하였다. 송상석 목사님은 서부교회 당회장으로 계실 때에 백 조사님을 서부교회에 부임하게 하셨지만, 백 조사님은 예배당 소송문제에서는 송 목사님을 따르지 않았다. 박윤선 목사님은 파숫군지에 예배당 소송은 반성경적임을 지적하였다.
바로 지난 토요일 2010년 10월 16일에 Oakland, CA에서 가졌던 조용석 형님(1953년 SFC전국위원장역임) 장례식장에서 한종희가 고인의 처 되시는 박성금의 옳게(마산문창교회 출석하던 박성필씨의 처)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이다. 박성필씨와 한 집안인 한상동 목사가 고려신학교 세울 때에 박성필씨에게 헌금을 요청하여 당시의 화페로 20만환을 헌금했다고 하며, 박성필씨의 처가 당시 한상동 목사 부인에게 직접 들은 말로는 한상동 목사와 송상석 목사가 예배당 소송문제로 무척이나 다투셨다고 한다. 즉 초량교회를 총회파에게 내준 한상동 목사가 마산 문창교회를 차지하려고 소송을 제기한 송상석 목사와 무척이나 다투셨다고 한다. 결국 송 목사님의 주장대로 박윤선 목사님은 고신에서 밀려났고, 이인재목사님과 백영희목사님도 함께 밀려난 것이다.
성경대로 보면 반고소 문제는 반고소 측에 명분이 있었다. 한상동 목사는 예배당을 내 주고 나왔다. 처음에는 한상동 목사가 송상석 목사와 다투었으나, 결국 고신파는 송 목사의 주장대로 간 것이다. 박윤선은 성품이 온화하고 투쟁적인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끓어드리지 못하였다. 저울추의 기우림은 한상동 목사의 몫이었다. 한 목사가 송 목사를 도아 총회를 수습하게 되자, 박윤선 목사는 1957년에 밀려났으나 경인노회(이학인, 김창인, 홍근섭, 최 훈)가 박윤선 목사를 옹립하여 고신파에서 분립하여 나갈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기에 박윤선을 다시 영입했었는데, 총회를 수습하고 나서는 박윤선을 1960년에 다시 고신 교단에서 밀어낸 것이다. 그 때 마침 장로교가 합동파(승동)과 통합파(새문안)로 갈라서는 때였는데, 통합파 새문안교회에서 교인들이 고신파 내수동교회로 오려는 것을 내수동교회 담임목사인 홍근섭 목사가 막고, 동산교회를 설립하게 하여 박윤선 목사를 담임으로 앉혔다. 박윤선 목사는 새문안교회 강신명 목사가 평신 동창이었고 또 목회윤리상 고심되어 처음에는 동산교회 부임을 꺼렸으나 결국 부임하였고, 개혁신학교를 동산교회 안에서 개교하였고, 이때에 독립교회 목사들(김현봉, 백영희, 이병규)이 김진홍 교수의 생활비를 도와 개혁신학교 설립에 참여하였고, 개혁신학교 첫 학기에는 김현봉 목사가 야고보서 강의도 맡았었다.
세 사람(박윤선, 이인재, 백영희)은 고신파 안에서 반고소파로서 강경파가 되었다. 이인재 목사는 출옥성도에다 집회를 인도하였고, 박윤선 목사는 신학자로서 파수군 지에 소송을 반대하는 글을 썼고, 백영희 조사도 부흥회 다니면서 반고소를 외쳤기 때문에 소송을 주장하는 측에 손실이 컸다.
1953년일 것이다. 서부교회 전도사이고 고려신학교 학생인 한동희 젇도사가 주일 밤에 영도제일교회 청년헌신예배 강사로 설교하러 가서 강단에 앉아 있었는데, 뒤 늦게 예배당에 들어온 박손혁 담임 목사(고신 헬라어 교수)가 한동희 전도사를 발견하자 즉시 강단에서 내려오게 하여 설교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 사건은 당시 고신 측이 반고소 측을 얼마나 무섭게 경계 했던지를 말해주는 사건이다.
그 당시 한동희나 한종희에게는 반고소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 문제까지 마음이 갈만한 주제가 못 되었다. 그저 신앙 운동만 열심히 했다, 학생이니까 언권이 없었고, 제직회 회원도 아니었으니 관여할 처지가 아니었다. 다만 내가 누구 곁에 있으며, 누구를 가까이 하느냐에 따라 노선이 결정 되었다.
김해진영읍교회
1953년 2월 부흥회시에 자신을 다 드리기로 결심하였고, 같은 해 5월에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건강이 좋지 않아, 초등학교 교사발령을 미루고, 쉬고 있었는데, 김해와 창령의 양군청년연합집회 강사로 손영준과 함께 한동희 형이 김해 진영읍교회를 다녀온 후에 나를 김해진영읍교회 김희도 목사님에게 가서 수양하라고 하여 가서 찬양대를 지휘하고, 학생들과 유년주일학교를 지도하며 사택에서 목사님 가족과 함께 지냈다.
1953년 가을에 하루는 진영들을 거닐다가 논가에 앉자 쉬는데, 개구리와 메뚜기들이 뛰노는 것을 보면서, 저것들은 농사짓지 않고도 살아있는 동안은 굶어죽지 않거든 하물며 내가 앞으로 인생을 먹기 위해서 산다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고, 한평생 결코 돈 벌기 위해서 살지 않기로 결심하였고, 교회 종치는 사찰이 되든, 주일학교 선생이 되든 한 평생을 오직 하나님께 바치리라고 결심하게 되었다. 1953년 2월에 우태숙 선생님이 인도하던 서부교회 부흥회에서 구원의 확신을 처음으로 가지는 순간에 이미 그 때에 감사하여 나 자신을 드리기로 결심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개구리와 메뚜기 앞에서 다시금 다짐을 받으신 것이다.
1953년에 서부교회가 개척한 제천교회가 사람을 찾고 있으니, 한동희 형이 수양지를 제천으로 옮기라고 하셔서 1954년 봄에 수양지를 제천으로 옮겼다. 교회를 설립하신 최기주 집사 댁에서 먹고 자면서 교회를 도왔다. 학생들을 지도했고, 성가대를 지휘했고, 유년주일학교를 지도하였다. 1953년에 감리교 구역이던 제천에 처음으로 장로교회를 세웠는데, 최기주라는 분이 6.25때에 부산 하단에 피난 왔다가 백 조사님 부흥회에서 복음을 받고 예수를 믿고, 수복과 함께 돌아가서 감리교회에 출석하다가 장로교회를 세웠다. 제천은 옛적 선교사들이 전도구역을 나룰 때에 감리교 구역이라 장로교가 없었던 곳이었다. 최기주 씨가 1953년에 장로교회를 세울 때에, 백영희 조사에게 교역자를 구해주고, 교역자 1년간 생활비를 도아주면 1년 안에 예배당을 완공하고, 자립할 것이라고 하여 교역자를 파송하고 도와주었다.
형 한동희 전도사가 나에게 제천 개척교회에 보낼 교역자 물색을 부탁해서, 북한에서 6.25때에 피난 와서 방어진교회를 섬기면서 고신에 다니던 김성환 전도사를 소개하여 1953년에 제천에 갔기 때문에, 1954년에 나도 쉽게 제천에 갈 수 있었다. 내가 1954년에 제천에 갔을 때에는 예배당이 완공된 후였고, 교회는 자립하고 80여명이 회집하고 있었다. 김성환 전도사는 월요일이면 부산에 내려갔고 토요일에 와서 주일을 지켰다.
교회 설립자 최기주 집사는 백영희 조사에게 첫 은혜를 받았고, 그 남편이 평양에서 일제 때 성씨 개명하지 않고, 오산학교 교장을 지냈고 피난을 제천으로 왔고 제천중고등학교 교장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장로교회를 설립한 최기주 집사의 가정형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55년 정기수 교장 별세 시에, 민주당 최고 위원 한근조 씨가 서울에서 제천에 와 장례식을 주도하였다. 정기수 교장은 원래 일본고등사범 졸업하고 오산중학교 교장을 역임하였고, 평양 최 벽부 집(벽부는 평양부자의 별호) 사위가 되었는데, 일제 때 창씨개명하지 않은 애국자였으며, 흥사단 최고 지도자였다. 당시 사위는 서울법대 김증한 교수였고, 나중에 나의 장인이 되신 처숙부 노의중은 충북도의회 의장이고 자유당 제천군당 당수였는데, 정기수 교장 자택에 자주 오시는 것을 목격하였다.
나는 정기수 교장 자택에서 먹고 자고 교회를 도왔는데, 중고등부와 유년부를 지도하면서, 주일예배 찬양반주하며, 성가대를 지휘하였다. 당시 최기주 집사에게는 고등학교 다니는 두 딸과 어린 두 아들이 있었고 큰 딸은 서울법대 김증한 교수의 처였다. 늦둥이 두 아들이 잘 크라고 이름을 소똥이 말똥이로 불렀다.
한종희 아내가 된 노재임은 청주 태생인데 숙부가 제천에서 성공하자, 부모와 3남매가 제천으로 이사하였고, 중 3년 때에 부친 별세 후 할머님의 강권으로 4 가족이 숙부 댁에 합가하여, 숙부슬하에서 성장하였다.
한종희는 54년, 23세 때 제천에 갔을 때에 초등학교 교사를 하면서, 오후에는 제천중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쳤고, 영어시간에 선생이 비었을 때에는 영어시간강사도 되었다. 56년에 송종섭 군이 신구약 단권주석을 샀다가 내게 선물한 책이 Jamieson, Fausset, and Brown의 스코트랜드 주석. 이 주석은 한종희가 한부선선교사에게, 주석 한 권만 본다면, 어떤 것을 봐야 하느냐고 물어서 사게 한 것인데, 송종섭 군에게서 선물받아 지금까지 읽고 있다. 당시에 초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오후에는 중학교 음악교사가 된 것은, 당시 제천중고등학교 정기수 교장과 동명초등학교 교장이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오전에는 초등학교에서 2학년을 담임하였고, 오후에는 중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당시에 타임지(Time)가 매주 학교로 배달되어 읽었다.
서울 숭의 감리교회 이호문 목사가 당시 제천 동부감리교회 목사님 아들이었는데, 1985년 미국 코로라도에 내가 목회하고 있는 이웃교회 부흥회 강사로 왔을 때에, 식탁에서 옛날 1950년대의 제천 이야기가 나왔고, 이호문 목사가 묻기를, 내가 중학고 다니던 시절에 제천 남천교회에서 영어 잘한다고 소문났던 한 선생이 바로 당신이냐고 물었을 때에 그렇다고 했다.
결혼하다.
1955년에 서울을 방문해서 피난 시절에 부산서부교회에 출석하여 알게 된 고려대학 김성식 교수댁을 방문했을 때에, 자기 집에서 숙식하고 아들을 가르쳐 달라 하시며, 자기의 친구였던 서울중앙초등학교 교장에게 나를 데리고 가서 인사하게 하고, 교사로 채용하게 하셨다. 나는 서울로 거처를 옮기기로 결심하고, 이 뜻을 최기주 집사에게 말했더니, 최기주 집사가 결혼시켜 제천을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한 여자를 소개하였으나, 싫다고 하니, 딸을 권하였으나, 싫다고 하였다. 그러면 원하는 사람이 있느냐고 묻기에 지금 처가 된 노재임을 지목하였다. 그 집안과 나는 견줄 수가 없었지만, 나를 제천에 붙들어 매려고 최 집사님이 남편을 중매자로 세워 적극적으로 나섰고, 한전 지점장과 제천병원 의사를 내세워 강력히 추진하여 결국 어렵게 1956년 5월 24일에 결혼이 성사되었고, 나는 그 길로 제천사람이 되었으며, 결혼 후 4개 월 만에 교사직을 사직하고 제천을 떠나 산으로 전도하러 들어갔다, 학교 사직하고 전도자로 나서는 일이 결혼 후 불과 4개월 만에 갑작스럽게 발생한 일이라 처가댁과 부산에 있는 나의 본가에서는 많이 놀라워하였고, 그 때부터 나는 양 가에서 제대로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다.
나의 결혼은 5년간의 기도의 결실로 이루어진 것이다. 서부 교회 첫 목회자였던 손의원 목사님의 경우 사모님의 문제로 서부교회를 떠나셨다. 경주로 이사를 가셔서 과수원을 하고 계실 때에 인사차 가서 목사님과 사모님을 뵈었는데, 그 때에 사모님과 나눈 이야기로 충격을 받고 결혼에 대하여 다짐하게 되었다. 결혼 전에는 일체 연해를 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매일 새벽기도를 다녔는데, 기도제목이 구원받는데 도움을 줄 여자를 구하는 기도였다. 그래서 선을 볼 때 내가 말하기를 “나는 구원받는 일에 도움 되는 사람이면 된다.’고 했더니 자기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결혼하였다, 2006년에 결혼 50돌을 보냈지만, 목적이 동일하여 결혼생활 50년에 문제가 없었다.
1952년에 일어난 사건이 있었다. 서부교회 주일학교 활동비를 받고자 주일학교 회계를 보던 경남여고생 댁을 방문했는데, 그의 어머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학교에 가서 한 선생의 성적을 알아보았다고 하시며 장차 무엇을 지망하느냐 하시고 자기 따님과의 결혼을 내 비치셨으나 혼기가 찰 때까지는 일체 여자를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여자와는 사진도 찍지 않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말없이 지나갔다. 서부교회 전도사였던 한동희 형은 학생을 제수 삼고 싶어서 우리 둘을 보수공원에 데리고 가서 양쪽에 앉혀 놓고 권했지만, 거절하였다. 당시 그 가정은 서부교회에서는 생활이 상에 속했고, 후에 두 자매는 의사가 되었다.
여학생은 경남 여고 시절에 미인이었다. 그 집 이웃에 살고 있으면서 경중에 다니던 나의 친구 하나가 짝 사랑에 빠져 애탔던 일도 있었다. 동일교회 정금출 장로(고신 기독교보 사장)는 서부교회에서 그 여학생과 함께 자란 부속교 동기생이라, 말도 놓고 지내는 사이인데, 2003년도 부산 브니엘 신학교 강의차 내가 나갔을 때에, 신학교 이사장 박성기 목사와 내가 미군 식당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고, 정금출 장로가 동석했는데, 그 때에 사전 아무런 말도 없이, 정 장로가 짓 굳게 그 분을 데리고 와서 동석하여 옛 우정을 나눈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혼기가 찰 때까지 여자를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극장출입 소설읽기 사진찌기 등을 안 하기로 결심하고 지킨 것은 소설 같은 이야기들이지만, 나에게는 실제로 있었던 실화들(nonfictions)이다.
시험을 치르다.
- 1956년에 결혼하고 정신없이 보냈는데,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것이 마음을 심히 괴롭혔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죽이려 하셨다. 하나님께서 "네가 날 거역해!” 매일 나를 죽이신다고 하셨다. 하나님이 나를 죽이신다고 하시니 늘 두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4시쯤, 번개가 얼마나 심한지 창문이 불 킨 것처럼 밝았었다. “하나님이 나를 죽이려 하시는구나!” 번개가 내 머리 위에 금시 떨어지고 있었다, 내가 아내를 깨워놓고 “여보 나를 살려 주시오”라고 말했다. 우리 교회에는 처녀로 늙으시는 여전도사님이 계셨는데, 그 분이 의인이고, 그 분이 교회에 있으니, 교회는 벼락 치지 않겠지 하는 생각으로 새벽에 아내의 손을 잡고 허둥지둥 둘이 교회로 갔다. 예배당 문을 열고 예배당 안에 한 발을 내 디디었을 때에 벼락이 막 내 머리 위에 떨어지려는 것처럼 두려웠다. 그러나 예배당 안에 나머지 발을 드려 놓자마자 “아이고 이제 살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의인 다섯 사람 있는 곳에는 심판하지 않았듯이 하나님이 이곳을 지키신다고 믿어 마음이 평안해졌다. 학교에 가서 아이들을 가르쳐도 정신 나간 사람처럼 불안해서 멍청했고, 그래서 이틀 동안 학교를 나가지 못한 때도 있었다.
학교 사직서를 제출하다.
이렇게 두려워 떨며 지내던 중 제천에 백영희 조사님이 부흥회 오시게 되었다, 부흥회가 내가 살 기회다, 이번에 은혜를 입고 해결을 해야지. 조사님만 오시면 하나님께서 무슨 해결을 주시겠지, 말씀이 천금보다 내게는 귀했다, 내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셨다. 나는 내 마음에 평안을 줄 말씀을 받아야 하니까, 당시 나에게는 직장보다 집회가 더 귀했고 더 컸다. 당시 부산과 제천은 먼데다가 교통편이 좋지 않아 화요일 새벽부터 집회가 시작되었다.
첫날 새벽기도를 마쳤는데 내 마음에 분명히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다. “네가 낮 공부는 빠지고, 밤에만 참석하여 은혜를 받는다는 것이 말이 되냐? 네가 내 말을 가볍게 여기고도, 은혜를 받겠느냐?” 내 마음 속에 들려온 확실한 말씀이었다. 그런데 학교에는 학교대로 딱한 사정이 있었다. 내가 근무하는 제천동명학교가 문교부지정 연구학교인데 2주 후에 발표행사가 있었고, 문교부와 도 학무국에서 장학사들이 오고, 나는 음악 과목을 발표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 발표회에는 3개 군의 모든 초등학교가 문을 닫고 전 교사들이 참석하며, 충청북도의 모든 초등학교 교장 교감 연구주임이 참석하는 큰 대회였다. 그러므로 내가 한 주간 학교를 빠진다는 것은 전혀 불가하였다. 그래서 학교에 가느냐? 사표냐“ 둘 중에 하나로 씨름하는데, 담임 목사님도 학교에 가라하였고, 여전도사님도 학교에 가라하였고, 최 기주 집사님도 학교에 가라하는데, 백 조사님께 물었더니, ”성령의 감동에 순종 해야지! “ 하셨고, 끝으로 아침 밥상에서 처에게 그 동안의 상황을 설명하고 물었더니, 자기는 나의 의견을 좇을 것이니 알아서 결정하라고 하였다. 이 사건은 결혼하지 겨우 4 개월 된 신혼 가정에 닥친 큰 시험이었다. 하나님이냐 학교냐 하는 두 길이 내 앞에 있었다. 나는 은혜를 받지 않고서는 공포의 지옥에서 나올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은혜를 주실 하나님 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사표를 내고 집회에 참석하기로 하였다.
교장은 학교 사친회 이사장인 나의 장인(처숙부)에게 물으니, 교장이 알아서 하라고 하셨고, 교장은 너무나 다급하여 사표를 즉시 수리하고 다른 교사를 발령받아 빈자리를 채웠다.
부흥회가 마치자 교회는 당황하였다. 직장을 잃었으니 당장 생활이 문제였다. 교회는 당시 4km 떨어진 곳에 2년 전에 고암교회를 개척하였고, 서부교회 목수 정재완 집사님이 1954년에 와서 15평 건평의 예배당을 짓고 사역하다가 1956년에 부산으로 떠나셨는데, 서울에서 조 전도사를 초청하기로 하고, 조 전도사가 부흥회에 참석하고 있었으며, 부흥회가 끝나면 즉시 고암교회에 부임하게 되어 있었으나, 나의 문제가 발생하자 교회가 즉시 조 전도사를 서울로 돌려보내고 나를 고암교회에 전도인으로 파송하였다. 제천 교회의 성가대지휘, 학생지도, 주일학교 지도 등 문제가 산적해 있었지만, 가진 어려움을 무릎 쓰고 중매하여 결혼을 성사시킨 정기수 교장, 최기주 집사, 목사님, 전도사님 모두가 절박한 상황타개가 급했었다. 당시 학교가 한 달에 1만원 월급과 식량 배급을 주었는데, 제천교회가 매달 1만원과 고암교회가 성미를 모아 주었다.
내가 처음에는 몰랐지만 후에 생각해 보니, 하나님께서는 1953년에 이미 두 번이나 나에게서 온전한 헌신을 다짐받으셨지만, 나서지 않기 때문에 강제로 전임사역자로 몰아넣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나에게서 온전한 헌신을 원하셨다. 하나님의 강권 앞에서 도저히 도망칠 수가 없었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서도 자기의 계획과 뜻이 중간에서 좌절되는 것을 좌시하지 않으시고 성취하시는 것을 목격하였다. 이 사건 이후로 내 생애에서 가장 귀하고 큰 것은 오직 하나님과 그 말씀이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 내 인생의 전부가 되었다. 무슨 일을 대하든 “하나님이 이것을 원하시느냐, 싫어하시느냐?”를 먼저 물었고 다음에 행동에 옮기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노회에서나 총회에서도 언제나 갈 길은 분명하였다. 성경은 순종을 명하셨고 동행을 명하셨으니, 구원받은 나에게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하나님의 뜻보다 더 크고 중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주남선 목사님은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님의 재림에 대비하여 잠자리에 들 때에도 버선 끈을 매고 주무셨다고 한다. 주남선 목사님은 거창읍교회에서 집사가 되었고, 장로가 되었고,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였고, 담임 목사가 되었고, 6.25 전란 때에도 피난 가지 않고 강단을 지켰고, 인민군이 거창을 떠나면서 찾았을 때에는 심방중이라 잡지 못하고 떠났으며 마지막 임종도 같은 교회에서 맞으셨다. 1951년으로 기억하는데 주남선 목사님의 장례식에 참석하셨던 이인재 목사님이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주남선 목사님 장례식장에 서광이 비쳤다고 하셨다.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계 14:13)
패러솔을 사용하지 않았다.
패러솔은 여름 햇볕을 막기 위해서 사용하는 우산(양산)이다. 처는 첫 아이를 낳아 등에 없었고 배 속에는 연년생 아이가 있어 배가 불러 있었는데, 여름에 같이 전도 다닐 때에 패러솔을 사용하지 않았다. 당시의 제천과 단양의 시골은 남자가 여자 혼자 있는 집을 함부로 방문할 수 없었다. 우리 두 내외가 길을 가다가 농부를 만나면 그 농부는 반드시 길 가에 서서 다른 쪽을 바라보며 우리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내 처를 정면에서 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 역시 혼자서는 여자 혼자 있는 집을 방문할 수가 없었기에 처와 동행하였다. 그 뜨거운 여름에도 농군들은 햇볕을 그대로 받으며 들에서 종일 일하고 있는데, 옷을 곱게 차려 입은 여자가 양산을 쓰고 그것도 남자와 나란히 길을 가며 한가히 전도하면 농군들에게는 신세타령을 하게 하거나 혹자들에게는 유혹거리가 되어질 것이므로 우리는 햇볕을 쪼이며 걷고 전도하였다. 물론 화장도 할 수 없었다.
복음 전하는 자는 복음 받는 자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므로 복음 전하는 자는 복음 받는 자를 걱정함이 마땅하다. 나는 60이 되기까지 생일을 해먹지 않았다. 물론 교인들이 생일잔치를 하면 즐겁게 동참하였다. 목사의 생일로 교인들이 번거로움이 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60이 되었을 때에 내 아이들이 성장했기 때문에 6남매 자녀들이 해주는 첫 생일을 해먹었다. 1991년 60회 생일감사예배에서는 홍반식 목사님이 설교하셨다. 설교에서 홍 목사님이, 요즘에는 멀쩡한 젊은이들이 회갑잔치를 한다고 해서 회중이 웃었다.
1980년대 이후로 브라질 상파울로에 8회 신학강의를 간적이 있었다. 교회는 작은데 교회를 위해서 일할 시간에 나가는 것이 교인들에게 미안해서 신학교에서 주는 사례금 전액을 다 교회에 헌금하여 교인들이 기뻐하게 하였다. 신학강의를 가는 동안에 처와 동행한 적이 없었고, 쌍 파울로에서 갈 수 있는 리오 데 자이레나 아순시온 폭포 등의 관광도 간 적이 없었다. 신학교를 돕는 장로님들이 많이 권하였으나 거절하였고, 강의준비와 매일시험과 채점으로 씨름하였다. 교인들은 일하고 있는데 목사가 일할 시간에 관광 다니는 것이 마음에 허락되지 않았다. 동시에 신학생들이나 교인들에게도 나의 사역이 기쁨이 되었다.
내가 이 글을 쓰다가 새벽에 잠자는 처를 깨워 아이를 등에 업고 배 안에 갖고 있으면서도 그 뙤약볕 여름에 패러솔을 사용하지 아니했던 일을 회고하다 나는 너무나 마음이 아파 울고야 말았다. 이것은 분명히 나의 착오였고 실수였다. 한 쪽을 너무 생각한 나머지 처에게 못할 짓을 한 것이지만 처는 당시에도 전혀 내색하지 않았고 불평하지 않았었다. 내의 결정에 따라주었다. 진정 부창부수는 우리 부부를 위해 있는 용어인가 보다, 처에게 감사하고 이러한 처를 만나게 해주신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며 살고 있다. 아버지가 집을 비웠을 때에 자녀들이 문제를 가져와도 아버지 오기를 기다려 주었다. 이것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명시하신 가장의 지도권을 우리 두 부부가 받아드렸기 때문이다. 이것도 하나님이 행하신 것이니 하나님의 은혜였다.
군 입대 문제로 금고형 1년
교사직을 사임하고, 제천읍 고암교회에 간 지 2년 후 1958년에 군 입대 영장이 나왔다. 군인으로서 사람을 죽이는 문제는 신학적인 문제였기 때문에 박윤선 목사님께 물었다. 군인으로 사람을 죽여도 죄가 됩니까? 묵묵 무답이셨다. 선생님이 모르시니 나도 알 길이 없어 군 입대를 하지 않기로 했다. 정한 날짜에 입대하지 않아서 제천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수감되었다가, 청주법원에서 재판을 받아 금고형 1년을 선고받고, 청주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하고, 감형 없이 1959년 9월에 출감하였다.
교도소에서 시기 죄를 이겨냈다.
1958년 감옥에 있을 때의 일이다. 박윤선의 공관복음 주석을 읽고 있었는데, 갑자기 시기 죄를 이기는 교훈이 내 마음에 떠올랐다. 나만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하는 일도 하나님의 일이고, 다른 교회가 잘 되는 것도 하나님이 잘 되는 것이니, 다른 사람과 다른 교회가 성공적으로 일했으면 하나님의 사업이 성공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과 다른 교회의 성공이 싫어지면 나를 위하여 하나님의 일이 망하기를 바라는 것이니, 내가 하나님의 일이 망하기를 바라면서 무슨 염치로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받을 것인가에 내 생각이 미쳤을 때에, 즉시 시기심에서 뛰쳐나오게 되었다. 시기심을 말끔히 씻고 벗어났다. 그 후로는 다른 사람과 다른 교회가 성공하기를 바랐고 잘하면 자랑하였고 간증하였다. 지금은 다른 사람이 잘하는 것을 보면 기뻐서 눈물이 나고 감사한다. 감옥에서 시기 죄를 이겨낸 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이었다. 만일 내가 집에서 평안히 지냈다면 아직까지도 시기 죄에 시달리며 지냈을 지도 모를 일이다. 특수한 신학교에서만 배울 수 있지 않았을까?
수감생활 중 예배참석 거부로 가중 처벌받다.
1958년 내가 청주교도에 수감 중에 있을 때에는 주일이면 전 수감자를 모아놓고 예배를 드렸다. 당시는 자유당이 집권할 때였고, 이승만 대통령이 집권할 때라 교도소에는 직속 목사님이 있었고, 당시만 해도 좌익사상을 품은 수감자들이 교도소에 있었기 때문에, 목사에게는 수감자의 사상과 교도에 절대적인 권한이 있었다. 그런데 교도소에서 드리는 예배에 문제가 있었다. 예배시작 전에 교도과장의 선창에 따라서 “우리의 맹세”를 외쳤다. “우리의 맹세”에는 “공산침략자를 쳐부수고”하는 구절이 있었는데, 하나님께 예배하러 모여서 “누구를 죽이고 쳐부수고 하자”고 외치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 예배가 되어질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내 양심으로는 같은 자리에서 한편으로는 예배하고 또 한편으로는 죽이고 쳐부수고 하자고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예배에 나가지 않기로 하였다. 그런데 지도원이 방마다 돌면서 철저히 예배당으로 몰아가는데 나를 보자 “너 352번은 왜 나가지 않아!” “이러이러해서 못 나가고 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교도과장에게 문초를 받았는데, “공산당 보다 더 무서운 놈이 여기 있구만!” 하며, 나를 독방에 가두는 처벌을 내렸다. 그 때에 주석들과 많은 책들을 집에서 부쳐오게 하여, 신학연구에 전념할 수가 있었고, 시기 죄를 물리치는 은총을 입었으니, 나는 그 때에 산 신학을 한 것이다.
출감 후에 겪었던 일
교도소에 수감되기 전에는 제천읍 고암교회를 시무할 때에 제천군 금성면과 삼곡면을 전도했고, 단양군 적선면 대가리 마을을 전도했다, 한번 나가면 3곳을 들려 하룻밤을 지나 귀가하였다, 제천 삼곡면과 단양 적선면 대가리 마을에 들렸다가 제천군 금성에서 자고 이튿날 귀가하곤 했다, 제천역에서 삼곡역까지 기차가 있고, 삼곡역에서 단양역까지 기차가 있었지만, 돈이 없어서 단 한 번도 기차를 타보지 못했다. 항상 산길로 걸어서 다녔다. 내가 1960년 12월 말에 거창에서 다시 제천금성에 돌아와서 1963년 11월까지 만 3년간 있는 동안에도 같은 코스를 돌면서 전도했지만 단 한 번도 기차를 타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처와 동행할 때에는 단양을 거치지 않았고, 삼곡 재를 넘어서 대가리와 중전에서 전도하고 금성에서 자고 이튿날 귀가하였다.
독자들은 “한 번도 기차를 타 보지 못했다.”는 보도가 사실인가 의심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한국인의 정서나 생활습관이 속임이나 과장 혹은 불리하면 축소나 가감이 보통으로 행해지기 때문에, 한 번도 없었다는 진술이 사실이라고 믿기 어려울 것이다. 필자는 이런 부분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혹시라도 대충 말하다가 과장하거나 가감하거나 거짓을 증언할까 깊이 생각하고 글을 쓴다. 초등학교 교사 때에는 반 담임이 정하는 급훈이「거짓 말 하지 말자」였기 때문에, 4학년 담임했을 때에 사친회비를 학교에 내지 않고 사용한 학생이 사실대로 말했기 때문에 교훈만으로 타이르고 지나갔지만 지각한 학생이 거짓으로 둘러댔다가 거짓이 들어나 혹독히 매를 맞은 학생이 있었다. 거짓은 확실히 하나님이 금하신 죄다.
내가 어려서 교회에 다니면서부터(1941-) 거짓은 죄라고 배웠기 때문에 사실대로 말하는 것은 습관이 되어왔다. 그러므로 자녀들 앞에서도 아버지의 잘못이 들어나면 즉시 자백하고 사과하였다. 이러한 생활 습관은 매사에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순종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도 돈을 사용할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가를 생각해보고 사용여부를 결정한다. 이것은 54년을 같이 살아온 처가 증인이다.
그 때에 산중 사람들은 6.25 전쟁을 거친 후라 옷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 두 내외는 가진 옷을 다 나누어 주었다. 먹는 것도 감자가 주식이었다. 간장 된장 김치는 없는 때가 많았다. 먹지 못해 치아가 여러 개 빠졌었다. 30대 후반에는 의치를 하기 시작하여 미국에 이민할 때가 47세였는데, 위아래 전체가 의치였다. 전도 다니다가 건빵을 사서 길가 웅덩샘에서 먹는 것이 자 잣다. 전도 다닐 때에 성경 한권이 너무나 무거워 누가 들어주었으면 했고, 길가에 거치는 돌덩이가 황금이었으면 했다.
교도소에 갔다 오니까 내가 있던 고암교회는 비어둔 채 교인들이 형님이 시무하는 제천 남천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고암리가 4km 정도의 거리이니, 합치는데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그러나 내 처와 아이에게는 생활대책이 없었다. 장모님도 두 남매를 데리고 시동생 집에서 분가하여 살고 계셨는데, 남매는 중고학생이고 장모님은 과수원에서 날품을 팔아 겨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처자는 의탁할 곳 없어 장모님 댁에 얹혀서 살고 있었다. 부산 큰 집에서 처에게 한 달에 7천 원 씩 보내주었으나, 결핵 치료 중이던 처에게 약값 정도였다. 내가 출감하니 부산 형님은 그나마 보조를 끊었고, 전혀 생활대책이 없었다. 내가 출감했어도 내가 시무하던 고암교회는 빈 채로 놓고 교인들은 계속 시내 남천교회로 다니게 하였다.
훗날 대구에서 교회를 시무할 때에 부산 복음병원 장기려 장로님의 진찰을 받았는데, 처는 심장 판막증 환자였고 결핵이 아닌 것이 판명되었으니, 제천병원의 오진으로 7년간 결핵환자가 되어 헛고생을 한 것이다.
형님이 시무하던 제천 남천교회는 나더러 부산 서부교회에 출석하여 배우라고만 하였기 때문에 처자는 장모님 댁에 둔 채, 나 혼자 부산에 가서 형님 댁에 머물며 서부교회에 출석했으나, 백 목사님은 나에게는 직분도 주지 않았고 어떤 일도 시키지 않았다. 제천 남천교회가 교인은 흡수하면서도 나의 처자는 전혀 돕지 않았으니, 한종희의 가정경제는 교리문제가 불거지기 전에도 사방으로 철저히 봉쇄된 상태였다. 그 누구의 결정으로 이렇게 된 것일까? 지금까지도 풀리지 아니한 숙제이다.
그런데 이상했던 것은, 백 목사님의 설교가 바뀌어 있었다. 백 목사님의 설교는 항상 노트에 적었고, 나만 적은 것이 아니라 집사들도 적었는데, 백 목사님 밑에서 10여 년 동안 키워온 신앙과 신학이 바꿔지는 것을 감지하였기 때문에, 설교를 듣고 는 백 목사님께 질문하는 경우가 자 잣다. 질문할 때마다 답할 수 없으니 기다려 보자고만 하셨다. 그 후 교리 문제로 헤어질 때까지 내가 질문했던 의문에 단 한 번도 답하신 적이 없었다. 제자로부터 자주 질문을 받았지만 답하지 못하는 스승으로서는 한종희가 골치 아픈 제자였을 것이다. 나는 당시 전도서를 많이 읽었고, 로마서와 계시록 연구에 깊이 빠져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구원문제가 최대사건이 되었으며, 백 목사님의 설교에서 신앙과 신학이 바뀌는 문제는 나에게는 심각한 문제였으니 어찌 질문하지 않았겠는가!
모르는 문제를 끝까지 추적하는 것은 내가 일찍이 시작했던 학문생활에 있어서 기본이고 습관이 되어 있었다. 사범학교에서도 특히 수학과 영어 시간에는 선생님에게 자주 질문했었다. 나는 모르면 덮어두고 지나가는 법이 없었다. 사범학교 본과 2학년 때 이양하 편집한 영어교재에서 시를 해석하기 못해서 졸업하고도 수년간 교재를 갖고 다니면서 연구한 적도 있었다. 그러기에 사전과 참고서를 사 모우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내가 60여 년간 현대철학과 현대신학을 하면서 바르트만을 놓고 46년간을 씨름했다면 누가 나를 믿어줄 것인가? 그러나 나에게는 사실이었다. 1956년에 바르트의 계시론을 규명키로 작심하였고 1998년에 분석이 완성되자, 즉시 목회에서 은퇴하고 만 3년간 걸려 분석한 내용을 책으로 엮어 출판하였다.
백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노트하다가 신학이 바꿔지는 것이 감지되었으니, 어찌 질문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답하지 못하시는 스승님은 스승님대로 얼마나 곤란하셨을까!
거창 중앙교회 설립에 보내심
제천에서 부산에 간지 3개월이 되던 1959년 12월께 나를 거창으로 보내셨다. 거창읍교회에서 교인 5 가정 정도가 나와서 이운길 집사님 댁 뒤뜰에 천막치고 개척 예배를 드리고 있었는데, 내가 인도자로 간 것이다. 거창 중앙교회에서 1년을 지냈고, 60년 12월 마지막 주간에 거창을 떠나 제천 금성으로 간 것이다.
사택은 이운길 집사님 자택 뒷방이었다. 그리고 자택 뒤 뜰 한 쪽 빈터에 천막을 치고 예배드리다가 내가 있는 동안에 흙벽돌을 찌어 15평 정도의 예배당 건물을 조성하였다. 교인이 그때 장년과 아이 합해서 많아야 30명 안 밖이었다. 이운길 집사님과 이순길 집사님 두 형제분들의 가족들이 중심이 되었고, 다른 세 가족들과 유년 주일학교 어린이들이었다. 나는 어린이 전도에 힘을 쏟았고, 이운길 집사님이 원장으로 있는 나환자 수용소를 가끔 돌보았다. 나환자의 장례식 인도도 나의 몫이었다.
내가 백 목사님 산상집회를 빠진 적이 없었고, 꼭 필기를 했는데, 감옥에서 나온 후로 서부교회에서 지내면서 설교를 들으니까 지축이 흔들렸다, 내가 지금까지 들어 온 모든 구원 체계가 바닥에서부터 흔들렸다, 말씀을 듣고 나면 꼭 방에 들어가 물었다. 백 목사님이 답변하시기를 “하나님 말씀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보자”고 하셨다. 자신도 모르겠다는 말씀이셨다, 나는 백 목사님을 믿고 따를 때니까, 전혀 딴 생각이 없었고 스승님이 답하시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서부교회에 3개월 남짓 머물러 있는 동안 백 목사님이 집회 인도 차 나나셨을 때에, 수요일에 단 한 번 강단에 세우셨는데, 백 목사님을 동방에 뜬 별이라고 말했으니, 나는 그만큼 스승님을 신뢰하고 존경했었다.
한종희는 1948년부터 53년까지 박윤선 교수님을 통해 칼빈주의적인 교훈을 한달에 6번씩 빠지지 않고 들었고(매월요일밤, 주일 오후 2시 매달 2회), 해마다 겨울 여름에 열린 전국학생수양회에 8회 동안 참석하였고, 파숫군지를 고려신학교가 1948년부터 매달 발행했는데, 창간호부터 읽었고, 칼빈주의의 기본 틀을 이해하고 있었다. 특히 칼빈주의에서 가장 기본인 성경무오 론이 내 마음을 완전히 지배하게 되었다. 성경 중에서도 전도서, 로만서, 계시록은 집중적으로 읽고 주석을 구해서 읽었고 성경에 검은 때가 묻도록 씨름하였다. 중요한 것은 백영희 목사님과 교리 문제가 발생하기 전까지는 나의 구원관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는 점이다.
한종희의 삭발과 추방
한종희가 거창에 있을 때에 백영희 목사님이 권하여 김현봉 목사님 집회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백 목사님 말씀이, 김현봉 목사가 인도하는 산상집회가 1년에 2번씩 관악산과 삼각산에서 있는데, 백 목사님이 유일하게 참석하는 집회라고 하시며, 나에게도 참석해 보라고 권유하셔서, 1959년 겨울부터 1961년 여름까지 4회 산상집회에 참석하였고 거창 창동교회(당시 중앙교회)에 있을 때에 김현봉 목사님을 따라 삭발까지 했으나 김 목사님을 거창 창동교회에 모신 적은 없었다. 이병규 목사님이나 백영희 목사님은 김현봉 목사님을 아주 가까이 따랐지만 삭발하지는 않았었다.
삭발한지 얼마 되지 않아 연세 많은 강 집사님이 나서서 한종희를 가로막고 자기가 예배인도와 설교를 하였다. 한종희는 즉시 창동교회를 떠나 제천 금성교회로 갔는데, 그 때가 1960년 12월 마지막 주간이었다. 강 집사님이 그렇게 하는 이유를 나에게 전혀 설명하지 않았고 이운길 집사님 내외나 다른 분들 역시 다 침묵하였으니, 나를 배척하는 이유와 원인을 들지 못한 채 거창을 떠났으며, 백 목사님이 나를 명하여 거창에 간 것이고 창동교회가 계속해서 백 목사님의 지도를 받았지만 백 목사님 역시 나에게 전혀 말하지 않았다.
거창 중앙교회 시절(1960)에 삭발했다가 대구 남성교회 시절(1964)에 장발하였다. 스승님을 너무나 존경한 나머지 모방하여 삭발했지만, 성경이 주장한 삭발도 아니었고 삶에 많은 불편을 주어 삭발을 거뒀다. 김현봉 목사님이 발설하신 교리(거듭난 영혼은 죄 범하지 아니함)가 이단의 위험이 있음을 알자 김현봉 목사님의 집회에 가지 않았으나, 1961년 겨울 집회에 오라는 통지를 받고 간 적이 있었다. 거듭한 후에도 거듭난 영혼이 죄 범한다는 주장을 고쳤느냐고 물으셨다. “고쳤으면 와서 말씀 드렸지요!” 그 후 백영희 목사님이 나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출교하자 경제적 지원을 받고자 한 번 더 방문한 적이 있었으나 거절하셨고, 그 후 소천하실 때까지 다시는 뵙지 못했다.
1960년 가을께 백 목사님의 교리가 이단의 위험이 있음을 한종희가 지적하자 백 목사님이 한종희를 출교하여 지옥 가는 이단자이니 교인들은 앞으로 인사도 나누지 말라 하셨기 때문에 제천교회가 주던 경제적 지원이 끊어졌기 때문에, 대구 남성교회로 1963년 11월에 옮기고 금성교회에는 신학교에서 사귄 친구 김웅규, 김현구 전도사를 차례로 보내고 생활비를 보내고 헌금을 보내 땅을 사서 새로 건물을 짓게 하였고, 금성교회에서 제자 윤창렬 김근식을 대구로 불러내 경북고등성경학교와 대구신학을 거쳐 목사가 되게 하였고, 금성교회에서 목사가 계속 배출되어 16명이 되었다.
교회이동과 순종문제
교인들이 싫어하면 조용히 떠나는 것을 지금까지 지켜왔다. 나는 박윤선 이인재 목사님을 따르면서 많은 감화를 받았다, 두 분은 절대로 분쟁하지 않았다, 진리는 주장하고 따랐지만, 신학교나 교회는 지키는 편이 아니고 내주거나 떠나는 편이었고 분쟁하지 않고 양보하였다, 겉옷을 달라 하면 속옷까지 주었고 빼앗기지 않으려고 분쟁하지 않았다. 박윤선과 이인재는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 아이와 같았고, 이웃은 그가 누구이든지 자신보다 귀하게 여겨 사랑하여 섬겼고 하나님에게는 복종하였다. 주께서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아니하면 내게 오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대로 믿고 행하셨다. 참되고 산 믿음을 보여주셨고 생활을 보여주셨다. 두 분을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사람 치고 나의 이 증언이 사실이 아니라고 증언할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이 두 분은 참 그리스도인의 모형이었고 참 성자의 모습이었다. 설교와 강단에서 자주 풍겨주셨던 주남선 목사님의 모습도 이런 것이었고, 영도 제3교회에서 보여주셨던 박상순 목사님의 모습도 동일한 것이었다. 이런 분들은 성자의 칭호를 들어 마땅하신 분들이었다.
내 생애 중 대구 성지교회와 대구 침산제일교회에서 교인들이 원할 때에 즉시 이동하였고, 미국에서도 두 번 교회의 형편에 따라서 떠났지만, 교회에 덕이 되기 위하여 떠났기 때문에 항상 갈등도 논쟁도 없었고 시간을 끈 적도 없었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를 떠난 후 떠난 교회와 더욱 가까이 지내며 화목한 것은 예외가 없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신 것은 “떠나 있든 같이 있든 사랑하고 화목하여 하나 되라”는 명령이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자리를 지키거나 떠나는 것은 문제 삼지 않지만, 화목하지 않고 분쟁하고 불화하는 것은 싫어하시고 문제 삼으신다. 그러므로 “떠나든 같이 있든 상대가 배교자가 아니고 이단이 아닌 이상 상대와 화목하고 하나 되는 것”이다. 이것이 두 분 스승님이 보여주신 참된 삶의 모형이었다.
물론 갑자기 교회를 사임하는 것은 경제적인 위기와 명예적인 손상을 안고 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위기를 십자가라 하시며, 자기를 부인하여 짊어지라고 하셨다. 만일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고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주님을 따르지 못한다. 자신을 부인하지 못하여 십자가를 지지 못하면 어떻게 되어지는가? 분쟁하고 싸우다가 밀어내든지 혹은 쫓겨나든지 하여 원수지고 미워한다. 이렇게 되면 천하를 다 얻어가져도 실패자이다. 그러므로 신자에게는 주님을 따르는 것이 성공보다 귀하고, 다른 신자를 사랑하고 화목하는 것이 성공보다 귀하다. 이렇게 하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길인데, 주님을 믿는다 하면서 주님을 따르지 않으면 그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야고보는 순종이 없는 믿음은 거짓이고 거짓 믿음으로는 주님 앞에 서지 못한다고 하였다(약2장). 하나님은 충성과 사랑과 화목이 없으면 문제 삼지만 성공여부는 문제 삼지 않으신다.
제천 금성교회로 이동
수년 전에 제천 금성출신 윤창렬 목사에게서 들은 이야기로는, 금성교회 교인들 중에서 지금까지 목사안수 받은 사람이 16명이라고 하였다. 금성교회는 제천 읍에서는 자동차로 12키로 거리에 있는 시골이다. 금성교회는 한종희가 1956년에 제천읍 고암교회에 시무할 때에 전도구역이었으며, 고암교회에서의 거리는 16Km 거리였고, 믿는 4 사람으로 시작한 기도처소였다, 1958년에 한종희가 군대입대문제로 청주 교도소에 수감되자 고암교회를 개척한 제천읍 남천교회는 고암교회 교인을 남천교회로 흡수하면서, 대신 금성에 교회를 개척키로 하고 정재완 전도사를 부산에서 다시 오게 하여 1958년에 금성교회를 개척하였고, 10평 정도의 창고를 개조하여 바닥에 가마니를 깐 예배실을 꾸며놓고 성인 4 사람과 아이들을 모아놓고 전도하다가, 정재완 전도사가 1960년 12월 말에 다시 부산으로 갔기 때문에, 한종희가 1960년 12월 말에 거창에서 금성으로 이동한 것이다. 제천읍 남천교회는 금성교회에 매월 만원씩 생활비를 지원했으나, 1961년 가을께 백영희 목사님과 교리 문제가 발생하자, 즉시 재정지원을 끊었고, 이후로 백 목사님과 연이 끊어져 금일에 이르렀고, 금성교회는 합동파 충동노회 소속으로 있다.
대구 남성교회로 이동
1963년 11월께 이인재 목사님의 주선으로 대구 남성교회 집회를 인도한 후 담임 교역자로 초청받고 부임하였는데, 60여명 모이는 교회였다. 김천 대신교회에서 목회하던 친구 김웅규 전도사를 금성으로 보내놓고 매월 교역자 사례금을 보냈고, 김웅규 전도사가 떠나자 다시 총신 동기생인 김현구 전도사를 보내고 헌금을 보내 땅을 새로 구입하여 금성교회를 지었다. 둘(윤창렬, 김근식)을 대구로 나오게 하여 경북고등성경학교와 대구신학교를 졸업하게 하여 목사가 되게 하였다.
금성에서 전도할 때에는 교회 청년들이 있었고, 남자 장년도 5명 정도 있었지만, 나무를 내가 지계로 해다 땠고, 여름에 교인들이 합동하여 교회 나무로 아까시 나무를 베어다 쌓을 때에도 나도 교인들과 같이 지계를 졌고, 읍에서 무거운 짐을 버스에 실코 왔을 때에는 집까지 500m 거리를 나를 때에도 교인들을 시키지 않고, 내가 지계를 빌려서 내 등으로 날랐다. 나는 농민으로 돌아가서 그들 속에서 같이 살았다.
백영희 목사와 한종희의 교리 갈등
백영희 목사님이 거듭난 영혼은 죄 범하지 않는다고 하기 때문에 한종희는 이 문제를 두고 오래 동안 고심하였다. 당시 형 한동희는 제천 남천교회 시무 전도사였다. 1961년 가을이었는데 한동희 형과 동생이 둘이서 제천 금성교회 근처 산 동굴 속에서 월요일에서 수요일까지 같이 지내곤 했는데, 하루는 한종희가 동굴 안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창3장)의 뜻을 깨달음과 동시에 거듭난 후에도 거듭난 영혼이 범죄한다는 교훈을 깨달았다. 이 교리에 대한 해설은 창세기3장과 로마서6,7장에 대한 한종희의 해설에 있다.
창3장의 교훈은 다음과 같다. 아담 내외가 하나님처럼 선악의 지식을 갖게 됨으로써, 인간이 하나님과 동등이 되어 쫓겨났다. 창3장에서 이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이 나무의 열매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니라, 영어로는 The tree of knowledge of good and evil", “이것을 먹으면 하나님처럼 아담도 선악의 지식을 갖는다.”는 뜻이었다. 하나님이 창3:22에서 같은 뜻으로 말씀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마귀도 창3:5에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하신 말씀과 동일한 사실을 말하였다.
“나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했다,
금하신 열매를 아담이 먹지 않는 것을 하나님이 좋아하셨고, 금하신 열매를 아담이 먹는 것을 하나님이 싫어하셨다. 그러므로 아담은 하나님을 따라서 무엇이든 좋아해야 하고, 하나님을 따라서 무엇이든 싫어해야만 했다. 만일 아담이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자기 뜻대로 무엇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면 반드시 죽는다.
성경 신구약을 보면 중생 전이나 후나 인간은 하나님을 따라서 좋아해야 하고 하나님을 따라서 싫어해야 한다. 그러므로 중생전이나 후나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을 좋아하면 선이 되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싫어하면 선이 되지만, 거꾸로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을 싫어하고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을 좋아하면 범죄가 되었다. 문제는 무엇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은 단일 인격체인 거듭난 영혼의 몫이었다. 거듭나기 전이나 후나 순종과 범죄도 거듭한 영혼의 몫이고 회개도 거듭난 영혼의 몫이다. 다만 중생전과 후가 다른 것은, 중생전은 거듭나기 전이라 순종이 불가능 하지만, 중생 후에는 성령의 내주로 순종하게 되어진다.(롬8:1-14)
모든 선과 악은 단일 인격체가 내린 결단이기 때문에, 중생 후의 사람을 둘(옛 사람, 새 사람)로 분리하여, 옛 사람은 죄 범하지만 새 사람(거듭난 영혼)은 죄 범하지 아니한다는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 순종이나 거역도 한 인격의 결단이고 회개도 한 인격의 결단이다. 물론 한 인격에도 강약은 있다. 믿음이 확실하고 강하여 순교를 각오하면 순종하지만, 믿음이 불확실하고 약하면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고 십자가를 질 수가 없기 때문에 순종하지 못한다. 이러한 원리는 불신자들이 애국하는 사건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애국이 확실하여 자신을 부인하면 나라 사랑에 빠져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다. 이조시대에 왕을 배척하면 머리 몸 손 팔 다리를 토막 내 죽이던 능지처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의를 부르짖다 죽은 사람들이 있었다.
바울이 중생 후에는 습관적으로는 죄를 범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였다. 롬6-7장에서 네 가지를 질문했는데, 그 네 가지가 다 은혜로 구원받은 자와 율법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었다.
첫째 질문-6:1,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둘째 질문-6:15,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오.
셋째 질문-7:7, 율법이 죄냐?
넷째 질문-7:13, 선한 율법과 계명이 나에게 사망이 되었느뇨?
질문의 요지는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구원 후에는 죄 범해도 좋은가?”였다. 답변은 분명하였다. 거듭나기 전에는 순종이 불가능했지만(롬7:14-25), 거듭난 후에는 성령이 내재하시므로 순종할 수 있게 되었으니, 육신을 따르지 말고 성령을 좇아 반드시 순종해야 한다고 하였다(롬8:1-14).
바울의 체험담 이야기
로마서 7:14-25은 바울의 체험담이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유대인으로서 율법을 지켜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하던 때의 모습이다(롬10:2-4). 유대인들은 예수를 모를 때에도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고 율법이 신령한 줄을 인정하였기 때문에, 율법을 지켜 의로워지려고 애를 썼다. 유대인들 중에서도 바울처럼 바리새인들은 더욱 그러했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무슬림을 보라.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도 하나님의 명령이라 하여 자살폭탄으로 자신을 던지지 않는가!
사람이 자신이 겪었던 지난날의 체험담을 현재에서 생생하게 재현코자 할 때에는 그 시제를 현재로 한다, 롬7:14-25은 바울 자신의 체험담이므로 시제를 현재로 한 것이다. 특히 7:14은 이 사실을 밝혀준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유대인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믿지 않고도 율법이 신령한 줄 알았기 때문에(롬7:14) 율법을 지켜보려고 애썼지만(롬10:2-4) 육신에 속하여(성령을 받지 못해) 죄 아래 팔린 죄의 종이었다. 율법을 지켜 율법의 의로 구원받으려 했던 바리새인들이면 일반적으로 경험했던 체험이다. 모든 유대인들은 다 율법이 신령한 줄 알았기 때문에 주어를 “우리”라 한 것이고, 바울이 자신의 체험담을 말했기 때문에 주어를 “나는”이라고 한 것이고, 시제도 현재로 한 것이다. 롬7:14-25의 뼈아픈 체험담은 바울이 예수를 만나기 전에 율법을 지켜 의로워지려고 아등바등 애쓸 때(롬10:2-4)의 바울 자신의 모습인 것이다.
순종과 동행(성령의 종) - 인간을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하는 고리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을 좋아하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싫어해야 한다. 구원받은 성도는 자기 스스로는 좋아하는 것도 없어야 하고 싫어하는 것도 없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만 선악의 지식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창3:22; 3:5). 아담이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선악의 지식을 가짐으로 하나님과 같이 되었고, 동시에 에덴에서 추방되었으나, 아담(창3:21)과 아벨(창4:4)과 노아(창8:20)가 피 흘리는 제사로 사죄 받아(레17:11)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며, 역시 아담과 아벨과 노아와 같은 방법으로 사죄함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진 노아(창6:9)와 에녹(창5:22,24)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말2:1-9; 2:6).
순종과 동행은 구원받은 성도의 생활방식이다. 신구약 성경은 신자의 삶에 대하여 더 요구하신 것이 없다. 죄인과 하나님을 연결해주는 고리는 그리스도의 피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을 연결해주는 고리는 순종과 동행이다. 군대에서는 한 계급만 차이가 나도 동행이 군인을 하나로 묶어주는 고리이다. 하물며 하나님과 인간을 하나로 묶어주는 고리는 더더욱 동행이다. 동행이 하나님의 요구이자 인간의 본분이다. 그러므로 교리를 믿고(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율법에 반드시 동행(복종)해야 한다.
인간이 하나님을 따라서 좋아하고 싫어하고 순종하고 동행하는 네 가지는 인간이 단독 자가 아니고 하나님 의존자이고 예속자임을 뜻한다. 즉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단독 자가 되면 하나님이 폐기하심으로 망한다. 결국 인간은 타락 전이나 거듭난 후나 정상적인 존립방식은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예속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성도는 반드시 처 자녀와 자기 목숨 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여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과 동행하여 하나님께 의존하고 예속해야 한다. 전기 + -가 결합해서만이 power를 생산하여 전기 제값을 나타내듯이, 인간이 하나님께 의존하고 예속할 때만이 인간이 제값을 발휘하여 영원히 존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상에서도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께 순종치 않고 동행치 않고 예속치 않고 단독자가 되어지면, 하나님은 반드시 징계하여 순종하게 하시고 동행하게 하시고 의존하게 하시고 예속하게 하신다. 김현봉 목사님은 이러한 하나님의 징계를 곰국이라고 표현하셨다. 곰국은 환자의 회복을 위한 특별 메뉴이다. 성도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곰국 메뉴에는 육체적 사망도 들어있다(고전11:30-32). 하나님께서는 육체의 사망을 통해서라도 구원하신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기어코 회개하게 하시고 순종하게 하시고 동행하게 하시고 의존하게 하신다. 이것이 성경의 교훈이고 참 성도들의 간증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순종치 않고 동행치 아니할 때마다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셨다. 그러나 회개하여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과 동행할 때에는 반드시 회복시켜 주셨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항상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과 동행하여 하나님께 붙어있어야만 이것이 정상적인 삶이다. 이러한 정상적인 삶은 하나님이 정하신 법칙이다. 성경 어디에서도 이 법칙 이외에 더 말씀하신 것이 없다.
롬 7:5, 욕정(passion-patemata), 정확한 분석
성화교리에서 욕정은 반드시 짚어보고 넘어야 할 산이다. 어떤 목사 한 분은 욕정을 분명하게 정립하지 못한 채 욕정이 성화에 장애물이라 하여 고자 되는 수술을 받아 1950년대에 전 한국교회에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27세(1958) 나던 해에 나도 같은 문제로 원주기독병원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나의 상담에 응해준 의사가 말하기를 수술을 받아도 마음의 욕심은 변함없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수술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어 그냥 돌아왔었다. 이렇게 많은 고심 중에 지내고 있을 때에 김현봉 목사님이 발설하신 “거듭난 영혼은 죄 범하지 아니한다”는 교리를 들었으며, 아담이 죄 범한 사건(창3장)과 바울이 체험한 사건(롬7장)을 연구하게 되었고, 욕정과 욕심을 구별하는 분석과 연구를 진행하게 되었다.
「 우리가 ① 육신에 있을 때에는 ②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③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하여금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 (로마서 7:5)
이 글에서 두 용어가 문제다.
첫째는 “육신에 있을 때에는”에서 말하는 육신이다. "육신"은 구약에서는 “하나님”과 대조하여 말했고(창6:3), 신약에서는 “성령님”과 대조하여 말했다(롬7:5; 8:4-9). 두 곳 성경을 보면, 하나님 없는 인간과 성령님 없는 인간이 육신에 속한 인간이다. 구약과 신약 두 곳에서 말하는 “육신에 속했다”는 말은 하나님과 성령님의 지배를 받지 않고 육신의 지배만을 받는 인간을 말했다. 그러므로 육신에 속한 자는 육신의 종이 되어 죄만을 범하였다고 하였다. 이 타락은 에덴동산에서(창6:3) 발생하였고, 거듭나기 전에는 인간이 이와 같이 살았다(롬7;5; 8:4-9). 바울의 체험담(롬7:14-25)은 바울이 거듭나기 전에 유대인으로서 율법을 지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고 애쓸 때에(롬10:2-4) 육신에 속하여 육신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를 말한 것이다.
둘째는 “죄의 정욕”에서 말하는 정욕이다. “정욕”은 헬라어 원문은 patemata이고 그 뜻은 욕정(passion)이다. 식욕과 정욕이 욕정(passion)이다. 음식은 냄새만 맡아도 저절로 군침이 돌고, 여인이나 남자는 보기만 해도 순간적으로 지체(몸)에서 성욕이 발동한다. 식욕과 정욕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도 일어나는 본능적 반응이다. 생리학에서는 이 본능적 반응을 선(gland, 腺)의 작용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금하신 본능적 반응(식욕, 정욕)은 취하면 죄가 되지만(선악과), 하나님이 허락하신 본능적 반응(식욕, 정욕)은 취해도 선이 된다. 이것은 좐 칼빈(John Calvin)이 기독교강요에서 인용한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의 해설이다. 필자가 어거스틴의 해설을 옳은 해석으로 받아드렸다.
인간이 구약이나 신약에서 거듭나기 전에는 육신(창6:3; 롬7:5)에 있을 때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롬7:5을 다시 쓰면 다음과 같이 쓸 수가 있다.
“우리가 육신(sarks)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하나님이 금하신) 죄의 정욕(욕정-patemata)이, 우리 지체(몸 -soma)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하여금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죄의 종이 되었더니)”가 되어진다.
우리가 이 해설을 수용함에 있어서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욕정은 순간적인 동안에만 존재한다. 순간적인 욕정은 잠재우거나 억제하면 없어지지만, 내버려 두면 마음이 동참하는 욕심(desire)으로 변한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욕정은 마음이 취하면 선이 되지만, 하나님이 금하신 욕정은 마음이 취하면 죄가 되므로, 하나님이 금하신 욕정이 발동하면 신속히 잠재우든가 억제해야 한다. 하나님이 금하신 욕정을 내버려 두면 마음이 발동하여 욕심이 되어지고, 욕심이 발동하면 욕심을 채우려고 마음이 온 갓 계획을 다 세우고 온갖 짓을 다한다.
성화교리의 논쟁 : 롬7장
한종희는 롬7:14-25에서 바울이 죄 범하고 탄식하는 부분을 중생 전의 고백으로 보았다. 그러나 백영희는 중생 후의 고백으로 보았다. 한종희는 “사람이 구원을 받고 나면 성령을 쫓아 의의 종이 되어 의의 열매를 맺는다.”는 교훈을 로마서(8:1-14)에서 보았기 때문에, 바울의 체험담(롬7:14-25)은 바울이 바리새인으로 예수 없이 살 때라고 보았다(롬10:2-4). 바울의 체험(롬7:14-25)이 바울이 예수 없이 구원을 성취하려던 때였기에, 바울이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24절)라고 탄식하여,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하는도다.”(19절)라고 말함으로서 육신에 속하여 죄의 종으로 살았던 시절의 탄식으로 보았다.
박윤선이 주석을 통해 바울의 체험(롬7:14-25)을 중생 후로 보았다. 박윤선이 비록 바울의 체험을 중생 후로 보아, 거듭난 사람을 옛사람과 새 사람으로 주석했지만(1954, 1962년판), 1969년의 증보판에서는 거듭한 영혼이 죄 범한다고 하였으니, 거듭난 후의 인격체를 하나로 본 것이다. 물론 롬7장을 중생 후로 보는 학자들(Augustine, Jerome, Luther, Calvin, Melanchthon, Beza, Nygren, Grosheide, Delitzsch, Hodge, Barth 등)도 많고, 중생 전으로 보는 학자들(Origen, Chrisostom, Grotius, Meyer, De Wette, Olshusen, Godet, Bengel, Stuart, S & H, Denny 등)도 많지만, 거듭난 사람을 옛 사람과 중생한 영혼으로 가르지는 않았다. 이 부분(롬7:14-25)의 해설은 이상근의 로마서 주석(183쪽)이 상술해주고 있다.
그런데 백영희가 바울의 체험담(롬7:14-25)을 중생 후로 보고, 거듭난 후의 사람을 옛 사람과 거듭난 영혼(새 사람)으로 가른 것이다. 그리고 범죄는 옛 사람이 하고, 거듭한 영혼은 죄 범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여기서부터 문제가 커진 것이다. 한종희는 바울의 체험담(롬7:14-25)을 거듭나기 전으로 보았고, 거듭난 후에도 인격체는 여전히 하나뿐이며, 죄 범할 때에도 거듭한 영혼이 주체가 되어 결단함으로 죄 범한다고 보았다.
바울의 체험담(롬7:14-25)이 과거의 사건이지만, 현재동사를 사용한 것은 이유가 있다. 사람이 지나간 자신의 옛 일을 현재 보는 듯이 재현할 때에는 동사를 현재동사를 사용한다. 바울의 체험담(롬7:14-25)이 바로 여기에 속한다.
이 본문을 중생 후로 보는 사람들은, 중생 전의 불신자에게는 “롬7:14-25”의 체험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바울은 거듭나기 전의 유대인을 말한 것이지(롬6-7장; 10:2-4) 일반 불신자를 말한 것이 아니다. 바울이 로마서 6, 7장의 질문과 답변에서 항상 거듭나지 못한 유대인과 기독교인을 비교하여 말한 것이니, 로마서 7장 안에 있는 이 체험담도 당연히 거듭나지 못한 유대인의 체험담으로 보아야 한다.
만일 이 본문을 중생 후로 보면, 전후 사정에도 전혀 맞지 않고, 더욱이나 그 뜻을 제대로 풀어낼 수가 없기 때문에, 중생한 사람을 옛 사람과 새 사람으로 갈라서 옛 사람이 범죄하고 새 사람은 죄 범하지 않는다고 해석해왔는데, 백영희 시대에 와서 중생 후의 새 사람을 거듭난 영혼으로 해석해버린 것이다. 거듭한 후에는 새 사람(거듭난 영혼)은 죄 범하지 않고 옛 사람이 죄 범한다고 해석하니, 신자의 범죄 행위에 거듭난 영혼이 참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성립되어 이단임을 면할 수가 없이 된 것이다. 세 분(백영희 김현봉 이병규)이 거듭한 영혼이 죄 범하지 아니한다고 하니, 전혀 새로운 성화교리가 출현한 것이다. 한종희가 롬6-7장의 주석을 고신 조직신학 교수 이상근에게 1963년에 보냈더니 만나자고 회신이 와서 부산 고신을 방문하여 이상근 교수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문을 열고 닫지 않은 채 장성 같이 서서 굳은 표정으로 버럭 소리를 지르셨다.
“당신이 한종희 전도사요! 예 그렀습니다. 거듭난 영혼이 죄범하지 않고 무엇이 범죄 한답디까?”
이 답이 떨어지는 순간 “오 나는 살았구나! 이제 지옥 가는 이단을 면했구나!” 집에 돌아가서 몇 안 되는 교인이지만 이 기쁜 소식을 전하였고 함께 위로 받고 함께 기뻐했었다. 지금도 이상근 교수님은 99세로 생존해 계시고 작년(2,009)에 두 번 LA 병원으로 방문했었다.
박윤선 목사님이 비록 바울(롬:7:14-25)의 체험담을 중생 후로 보고, 중생 후의 사람을 옛 사람과 새 사람으로 분리했지만 새 사람을 거듭난 영혼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백영희 목사는 거듭난 사람을 옛 사람과 거듭난 영혼(새 사람)으로 분리하고 거듭난 영혼은 죄 범하지 아니한다 하였으니, 거듭난 영혼을 새사람의 인격적 주체를 본 것이므로, 죄를 범한 옛사람은 영혼 없이 죄를 범한 것이 되어진다, 영혼 없이 죄를 범한다는 것도 성립되지 않지만, 영혼이 죄를 범하지 아니한다고 하였으니 영혼에게는 죄 책도 없고 회개할 이유도 없어진다. 그러면 거듭난 후에 옛 사람이 범한 죄는 누가 책임지며 누가 회개할 것인가? 물론 거듭난 새 사람은 죄 범하지 아니한다고 주장하던 백영희 목사님이 이렇게 혹은 저렇게 회개를 말씀했지만 전혀 성립될 수 없는 않는 주장들이라, 필자가 여러 번 질문했었으나 전혀 답하시지 못하셨다. 그러시면서 김현봉 목사님에게 가 보라고 하신 것이다(1960년).
한종희는 가끔 백영희 목사님의 심부름을 하였다. 한번은 백 목사님이 가오리를 사주면서 박윤선 목사님 댁에 갖다 드리라고 했다, 한번은 한부선 선교사님께 가서 NAE를 물어 오라고 하셔서 NAE의 초대회장인 Harold J. Ockenga와 ICCC 회장인 McIntire 대하여 물어 온 적이 있었다,
한종희가 백영희 밑에 있을 때에는 심복 중에 심복이었다, 존경하니까 그랬다. 박윤선이 몇 번 서부 교회를 온 것을 기억하고 있다, 새사람 옛사람과 같은 성화교리 문제로 두 분 사이에 토론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박윤선의 주석에서 새사람 옛사람의 주장이 나온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바울의 체험(롬7:14-25)을 거듭난 후로 보면, 영영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는다. 바울은 3가지를 초월했다고 하였다. 이성을 초월하고 물질을 초월하고 생명을 초월했다고 하였다, 생명 초월은 빌1장에 있고 이성 초월은 고전7장에 있고, 가난과 부요에 처할 줄을 알아 물질도 초월했다고 하였다. 이렇게 3 가지를 초월했다고 주장하는 바울이 체험(롬7:14-25)에서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을 행치 않고 원치 않는 악만을 행하는도다.”라고 주장하였다면, 이것은 정신 나간 미친 사람이 분명하다. 그리고 바울이 중생 후의 사람에 대하여는 롬8장에서 말했는데, 중생 후의 사람은 성령에 속하여 의만을 행하는 의의 종이라 하였으니, 생명과 이성과 물질을 초월한 자의 생활인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체험담(롬7:14-25)은 거듭나기 전에 율법을 지켜 의로워지려던 유대인들(롬10:2-4)의 고백인 것이 분명하다.
박윤선의 훗날 입장
한편, 롬7장을 가지고 중생 전이냐 후냐에 대하여 박윤선 목사님이 소천할 때까지 입장을 계속했는지에 대하여 질문을 받자 그것은 스승님과 논란해 보지 않아서 모른다고 했다. 학자가 주석으로 답한 것은 읽어서 옳다 여겨지면 받고, 아니면 말없이 지나갈 뿐이다. 그러나 박윤선은 백영희 목사 교리 문제로 독립교회 소속 학생들의 등살에 못 이겨 신학생들 앞에서 두 번 말씀하였다. 첫 번째는 1962년에 서울 동산교회 개혁신학교 시절에 학생들 앞에 서서, 한종희가 이단이면 누구든지 나와서 말해보라고 소리 질러 외치신 경우이다. 왜냐하면 당시 개혁신학교 학생들 중 독립교회의 학생들(김병도 한동희 백영익, 백태영, 백영침)이 한종희 이단을 처단하라고 박윤선 교장에게 재촉하였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전에 박윤선 교장의 지시로 한종희가 총신 교수였던 명신홍 교수댁에서 화란어 주석을 빌려다 드렸고, 그 주석을 읽으시고 발표하였으니 많은 고심 끝에 한종희가 저술한 로마서 6-7장의 주석에서 거듭난 영혼이 범죄한다고 주장한 것을 지지하신 셈이다.
또 한번은 한종희를 이단으로 처단하라는 독립교회 학생들의 성화에 1965에 부산총신에서 박윤선은 거듭난 영혼은 죄 범하지 않는다는 교리는 이단일 수 있는 위험이 있다고 선언하셨다. 그 발표한 시간이 요한계시록 시험을 치른 자리였는데, 시험장에서 한종희를 불러 교리 선언문을 주시며, 다듬어 오라 하셔서 계시록 시험을 치루지 못하고 나가서 교리문장을 손질하여 드렸고, 시험 치른 후에 그대로 발표하셨다.
한종희의 깨달음 : 창3장, 롬7장
한종희는 산에서 형님에게 창3장을 깨닫고 죄의 시작으로부터 구원 받은 우리의 죄 문제까지 설명했다. 그리고 계속 로마서까지 연구하면서 결론을 냈다. 우리가 구원 받으면 롬8장으로 돌아가서 이제는 성령님에게 종살이 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거듭난 후에는 성령에게 종살이 했는데, 어렇게 오호라 곤고한 자로다. 그런 말을 하기까지 죄만 짓다 갔겠습니까? 로마서를 쓸 때는 바울의 생애 마지막인데 어떻게 바울에게서 그런 고백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생욕 정욕 물욕을 초월했다고 주장했는데 바울이 거듭난 후에 항상 죄만 범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까?
한종희가 형님에게 말하니까 동생 큰일 났다, 우선 우리가 공회 안에 있는데 백 조사님이 성화 교리를 가르치고 중생 후에 문제를 가지고 지금 막 열어 가고 있는데 동생 주장은 백 조사님을 틀렸다고 비평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동생이 주장하는 교리는 아직 칼빈주의에서도 처음 말하는 것이 된다. 그 소리는 동생이 맞아도 큰일이고 틀려도 큰일이다, 틀리면 동생은 큰 죄인이 될 것이고 맞으면 칼빈주의에서는 새 조직신학을 쓰는 것이다, 지금 로마서 6, 7장에서 옛사람과 새사람을 갈라만 놓았지, 거듭난 영혼이 죄 범하지 않는다고 말한 사람은 보지 못했고, 거듭난 영혼이 죄 범한다고 주장하는 주석도 보지 못했다,
형님인 한동희 조사는 놀랐고 또 한편으로 수긍이 되어 당장에 우리 교회 가서 집회를 하자고 했고 즉시 제천 남천교회에 가서 집회를 했다. 그리고 한종희는 자신의 집으로 가지 않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백 목사님이 스승이니 지적을 해도 찾아가서 해야 했다. 백 목사님께 “우리가 이렇게 나가면 이단이 됩니다.” 백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누구든 어느 성경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따져도, 다 입 닫고 갔는데 네가 뭘 안다고 그러나” 책망을 하면서 돌려보내셨다,
노선 분리 - 청량리 집회에서 출교선언
한종희가 부산 서부교회에 가서 백 목사님을 뵙고 귀가한 후 2, 3주간 후에 한동희 형이 제천 남천교회 교인 20여명을 인솔하여 청량리 집회에 다녀왔다. 청량리 집회 공석에서 백 목사님이 한종희 전도사는 지옥갈 이단자니까 인사도 하지 말라고 출교를 선언하셨다. 남천교회가 매월 만원씩 보내주던 생활비를 끊어 버렸고, 모든 대화도 끊겼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 한종희는 백영희 목사님에게 골칫거리였다, 백 목사님은 교리를 새로 주장하고 앞으로 나가는데 한종희는 받아드리지 않고 질문만 하다가, 느닷없이 찾아와 “이단이라”고 하며, 정 반대되는 교리를 주장하니 한종희를 출교하신 것이다. 금성교회 교인들이 제천읍에 장보러 가면 제천읍교회 교인들을 만날 것인데, 지옥 간다는 이단자 한종희를 계속 따를 리가 없었다. 그때 내 나이 만 30이었고, 성경학교나 신학교에 입학한 적이 없었으니, 믿어줄 사람이 없었다.
해방 후 줄곧 고신파에서 성장했고 사랑을 주셨던 어른들과 친구들이 다 고신파에 있었지만, 반고소 문제로 백영희 이인재 박윤선 목사님을 따라 고신파에서 나왔으니, 다시 고신파에 쉽게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이병규 목사님과 김현봉 목사님께 도움을 청했지만 거절하셨다. 이병규 백영희 김현봉 세 분은 같은 교리를 주장하였으니, 나에게 도움을 줄 리가 없었다. 하나님 말씀을 따라 가는 길이니 두려움은 없었으나 딸린 아이들이 셋이나 되는데 살아갈 길이 막막했다,
신학교도 다니지 아니한 자가 말하는 교리를 믿어줄 사람이 없을 것이라 생각이 들어 우선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입학하고 15일이 지나니 장모님에게 얻어간 돈이 다 동났다. 물론 그 때 신학교에 입학금이나 등록금을 전혀 낸 것이 없었다. 신학교라야 두 교수뿐이고 사무직원이 없었으니 돈 내라고 말하는 사람도 없었다. 귀가하기로 하고 박윤선 목사님께 말씀드렸다. “돈이 떨어져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이 “좀 기다려 보시오.”라고 하셨다. 이튿날 교회 마당 가로 데리고 가시더니 500원 지폐 3장을 주시면서 공부를 계속 하라고 하셨다. 그 때 시장 바닥에 주저앉아 먹는 밥이 100원했고, 서울역 뒤 빈 들판에서 동트는 아침에 파는 수제비 국이 50원 했는데, 새벽마다 부지런히 다니며 넝마주이들과 함께 수제비 국을 사 먹었다. 후에 동산교회 설립자인 이능전 집사를 따라서 서대문 식당에서 갈비를 먹었는데 1인당 500원이었다.
그때 박윤선 목사님이 고신에서 나와 1961년 봄에 서울 동산교회 안에다 개혁신학교를 개교했을 때였다. 1961년 가을 학기에 입학하였다. 당시에 개혁신학교에는 나 말고도 김병도, 한동희, 백영익, 백태영, 백영침 이 독립교회 소속 학생이었는데 이 5 사람이 지옥 갈 이단자를 학생으로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므로 나는 한 학기 마친 후에 무기정학 통지를 받았다. 나는 그 길로 영어로 쓰인 헬라어문법(Gresham Machen)을 독학으로 공부하여, 로마서 6-7장의 주석을 원고지 450매에 써서 박윤선, 강진선, 이상근, 이근삼, 김의환 5 교수에게 읽혔는데, 5 교수가 다 찬성하였고, 이상근 교수님은 거듭한 후에도 거듭난 영혼이 범죄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1962년 가을 학기에 박윤선 교장이 등교통지를 보내주셔서 다시 공부하였고, 박윤선 목사님 가정교사로 다니엘을 지도하였고, 숙식을 함께 하면서, 목사님 개인 비서가 되어 박 목사님의 편지도 대신 읽고 대신 답변을 써 보내곤 하였다. “거듭난 영혼은 죄 범하지 아니한다”는 교리를 비평한 로마서 6-7장의 주석은 김의환 목사님이 1975년에 “이단의 정체”라는 책 안에 편집하여 출판하였다.
산골에서 원고지를 구하지 못하여, 동아출판사 편집부에서 일하던 친구 이동성을 찾아 원고지를 말했더니 1,000매를 주어서 해결하였다. 이동성은 목도사의 아들이었고 부산사범병설초등학교 동기생이고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화학과를 졸업한 친구였다. 1963년에는 이능전 집사의 남편이신 고응진 장로님의 강권에 따라 총신에 들어가 박형룡 교수님에게 한 학기 공부하고, 다시 박윤선 교수님을 따라 부산총신에서 졸업하였다.
박윤선과 방지일
박윤선이 1960년 반고소 문제로 고신을 떠나 동래 금정산 산자락 셋방에 찾아오는 사람 없이 외로이 머물러 있을 때였다. 유일한 친구 방지일 목사가 서울에서 금정산에 박윤선을 방문한 것이다. “윤선이 나 왔어.” 평신 시절에 함께 자그마한 잡지를 함께 만들어 나누어 읽었던 친구였다. 방지일은 “박윤선은 간사함이 없는 나다나엘이라”고 글을 썼다. 박윤선은 거짓과 가장이 없고 가감이 없는 순수성뿐임을 말한 것이다. 이 지적은 가장 적중한 표현이다. 요즈음 흔히 사용하는 표현으로 말한다면 “나다나엘”은 박윤선에게만 해당되는 브랜드라고 말해도 과장이 아닐 성싶다.
1983년 가을이었다. 미국 서부 나성에서 조천일 목사님이 코로라도 덴버 시골에 전화를 하셨다. 우리의 스승이신 박윤선 목사님의 친구 방지일 목사님을 강사로 모시고 산상집회를 하게 되었으니 한종희도 와야 하지 않느냐고 하셨다. 그래서 1,000km를 비행기로 날라서 부랴부랴 산상집회에 참석하여 방지일 목사님을 처음으로 뵈었다.
홍근섭 목사와 개혁신학교 개교
1960년도는 한국 장로교 총회가 합동과 통합으로 갈라지는 해였다. 홍근섭 목사님이 삼각산 산상집회에서 요한계시록 강해한 것에 은혜를 받은 새문안교회 교인들이 내수동 교회로 몰려오는 것을 막고, 박윤선 목사님을 담임으로 하고 동산 교회를 설립하도록 하셨다. 새문안교회 여전도회 회장 이능전 집사와 역시 새문안 교회 시무여전도사가 중심이 되어 따르는 교인들과 나와서 서대문과 구세군 본영 중간 지점에 건물을 빌려 동산교회를 세우고, 박윤선 목사님을 담임목사로 모셨다. 새문안교회 시무장로였던 이능전 집사의 남편 고응진 장로님은 동산교회 개척 후 1년이 지나고서야 동산교회로 이적하셨다. 홍근섭 목사님이 이렇게 하여 동산교회를 개척하게 하고, 박 목사님을 모시게 함으로서, 박 목사님은 동산교회 안에 개혁신학교를 세울 수가 있었다, 장지환 장로님이 동산교회 개척에 자기의 건물과 땅을 사용하게 하셨고, 교회봉사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박윤선 목사님 주석에도 헌금해 주셨다. 교회가 사용한 건물의 건평이 60평 남짓했고, 마당 터가 500평 정도는 되었고, 부속건물이 있어서 신학교 기숙사로 사용하였다. 그 이후 나는 홍근섭 목사님을 아버지처럼 따랐고, 1970년에는 대구 성지교회에서 한 달간 휴가를 얻어, 총신에서 개강한 헬라어 여름특강(박희천 교수)에 참석하고 내수동교회 사택에서 쉬면서 한 달간 내수동 교회 강단을 지켜드리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인재 목사님이 박윤선 목사님 바로 곁에 있었고, 또 김진홍 교수님의 생활비를 독립교회가 적극 지원하였으므로 신학교는 독립교회의 신학교처럼 보였다. 그 이전 1957년에 박윤선 목사님이 반고소 문제로 고신에서 나왔을 때에는, 이학인 홍근섭 김창인, 최훈 등의 경인노회 목사님들이 박윤선 목사님을 모시고 신학교를 세워 고신파에서 독립하려 한다는 소문이 파다하여 고신에서 박윤선 목사님을 재영입했었지만, 1960년에는 경인노회가 개혁신학교 설립에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네 분(이인재, 박윤선, 백영희, 이병규)의 관계
네 분이 고신파에서 밀려난 것은 반고소 입장을 지킨 것이 원인이기 때문에, 네 분은 고신파에 있을 때도 가까웠지만, 개혁 신학교를 세우면서 더욱 가까워졌다. 박윤선 목사님은 동산교회 담임목사로서 생활비가 나왔고, 김진홍 교수님은 독립교회들이 부담했던 것으로 안다. 김현봉 목사와 백영희 목사가 박윤선 목사와 가까이 지내게 묶어준 것은 전적으로 이인재 목사가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다. 개혁신학교 첫 학기에 김현봉 목사가 야고보서를 강의했다, 그 당시로서는 개혁신학교의 주변에 이 4분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종희가 공회에서 나뉠 때에는 박윤선 이인재와 하나였고, 두 분은 한종희가 주장한 교리를 인정하였다.
갈등표출
한종희가 제천에서 박윤선을 찾아 개혁 신학교에 갔을 때는 1961년 가을학기였다, 당시에는 예과 2년을 거치고 전수과 3년을 하는 때였는데, 한종희는 예과 하지 않고, 3년만 해도 된다고 하셨다. 산중전도 5년에 사범학교 나왔으니, 3년만 하라고 하셨다. 입학시에 백영희 목사님과의 교리문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내가 비록 한 교리를 확신하지만, 신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상태에서 교리를 주장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립교회가 이단으로 추방하였기 때문에, 논란의 대상에서 피해갈 수가 없어서 부득이 답변으로 로마서 6,7장의 주석을 써서 한 교리를 주장했던 것이다.
그런데 한종희를 신학교에서 쫓아낼 수밖에 없는 돌발사건이 발생하였다, 한종희가 개혁신학교에 처음 입학했을 때에는 한종희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머리는 박박 깎았고, 옷은 단추 5개 달린 검정색 작업복 차림이었고, 고무신 신고 다녔으니 시골 농군도 그럴 수는 없었다. 몸은 왜소하고, 산중전도 하느라 먹지 못해 말랐으니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당시 신학교 기숙사가 동산교회 건물 안에 있었는데 신학생들이 돌아가면서 동산교회 새벽기도회를 인도했지만, 한종희는 설교시키지 않았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보니, 교인이 헌 두루마기를 놓고 갔다. 한 번은 헌 두루마기 차림으로 종로 2가를 지나가는데, 한 사람이 어수룩한 시골 청년을 사기 치려고 접근하였으나, 그 사기꾼에게 당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한종희에게도 설교할 기회가 왔다, 새벽기도회가 아니고, 설교과목으로 신학생들 앞에서 하는 설교였다. 본문 출애굽기 20장 1절로 설교하였다. 그런데 두 교수 부인들과 동산교회의 여전도사와 동산교회 집사들이 한종희의 설교를 들어보려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날 설교에 대한 반응은 대단했다. 박윤선 교장에게 청하기를 앞으로는 다른 신학생은 일체 세우지 말고 한종희 전도사만 새벽기도회에 세워 달라고 하여 한 주간 새벽기도회를 혼자 인도하였다.
이단자가 교장 교회에서 유일한 설교자가 되어 설교한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독립교회의 신학생들 5명이 한종희를 신학교에서 내보내라고 항의하였다. 그래서 한종희는 무기정학을 당했었지만, 한종희는 무기정학을 당한 기간에 로마서 6-7장의 주석을 썼고 박윤선 교장은 한종희의 로마서 6-7장의 주석을 읽은 후에는 가정교사와 비석 격으로 자기 집에서 유숙하며 신학교에 다니게 하였다. 다시 독립교회 신학생들이 들고 일어나니까 전 학생들을 모아놓고 “한종희가 이단이면 누구든지 나와서 말해보라”고 하여 눌러버렸다. 한종희를 신학교에서 몰아내려던 독립교회의 신학생들과 목사님들의 입장이 도리어 더 난처하게 되었다.
대구 시절
이쯤 되니까 이인재 목사님과 한동희 형님은 더 이상 독립교회에 마음을 두지 않는 쪽으로 서서히 가닥이 잡혀갔다. 이인재 목사님이 자신이 당회장으로 있던 대구 고신파 남성교회로 한동희 전도사를 불러냈다. 남성교회의 유영덕 목사님이 서울 동산교회 박윤선 목사님의 부목사로 가시고 비어있었다. 이때가 1963년 봄이었다. 형님이 대구에서 갑자기 마산으로 이동하게 되었을 때에 이인재 목사님은 한종희를 불러 남성교회에 부흥회를 인도하게 하심으로 담임 교역자로 초청을 받았고 1963년 11월께 대구로 이동한 것이다.
그런데 한종희가 남성교회에 부임하고 불과 수개월 후에 남성교회가 한종희를 따라 합동파 경북노회로 이적하였다. 그런데 이인재 목사님은 백파라 하여 고려파 경북노회가 성남교회에서 추방했으나, 책벌하지는 않은 상태에서 이인재 목사는 동성로교회를 다시 지었고, 이인재 목사가 박윤선과 한종희와 한 길을 간다하여 이번에는 백 목사가 이 목사를 동성로교회에서 추방하여, 이인재 목사와의 관계를 끊었다(1964).
한종희가 대구로 나간 후로 이인재 목사님이 백영희 목사님의 교리를 따르지 않고 한종희와 같은 길을 걷게 되었다. 동성로교회가 비록 이인재 목사님이 설립하신 교회였지만, 이미 백영희 목사님을 따르는 교회였기 때문에, 동성로교회가 1964년에 이인재 목사님을 내보내려 하였다. 이때에 박윤선 목사님이 2개월 동안 부산에서 올라와서 매주일 동성로교회의 강단을 지켜 이인재 목사님 유임운동을 벌렸지만 소용없었다, 한종희의 SFC 선배인 신도관 의사가 백영희 목사님을 전적으로 따랐기 때문에 유임운동은 소용없게 되어 결국 사임하셨다.
이 동성로교회 사건 이후로 세 분 목사님들(김현봉, 백영희, 이병규)은 박윤선 목사님과 이인재 목사님과 완전히 단절되었다. 이 대구사건 이후로 백영희 목사님은 한국 교회 앞에서 박윤선 목사님과 이인재 목사님의 우산을 더 이상 쓰지 못하게 되었다.
한종희가 겪었던 위기
대구 남성교회에서 겪은 일이다. 나의 전임 교역자 유영덕 목사님이 북한에서 6.26 때에 피난 와서 고신을 졸업하신 목사님이셨는데, 독신이라 30평 남직한 예대당 모서리 한 구석에 판자벽으로 방을 만들어 다다미를 깔고 지내시다가 나에게 물려주셨다. 그런데 교회당 터가 경사진 땅의 언덕 밑이라, 30여 가구에서 사용한 물이 모여 내려오면서 교회 사택방벽을 통과하여 흐르고 있었다. 어린 아이들 때문에 다다미를 들어내고 온돌방을 만들고 연탄아궁이를 만들어 밥을 짓고 방을 데웠는데, 수년간 지내는 동안에 방벽이 송판이라 시멘트와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고, 두 아이를 더 낳은 후 1967년에는 연탄가스가 저녁마다 새 들었다. 이때에는 아이들이 모두 1살, 3살, 5살, 7살, 9살이었다. 두 아이가 며칠씩 학교에 가지 못하였고, 나도 설교 시에 말이 제대로 이어지지를 않아 애를 먹었다.
딸 하나 데리고 바느질품으로 살아가는 교인이 우리 집을 방문했다가 딱한 사정을 목격하였다. 내가 방 2칸을 전세로 살고 있는데, 방 한 칸 돈을 빼서 2만원을 드릴 터이니 빨리 방을 구해서 나가라고 하였다. 이때에는 화폐개혁을 단행한 후였기 때문에, 내가 받는 한 달 사례금이 3천원이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내가 시무하던 남성교회는 남한 사람들이 세운 교회였고, 남성교회에서 직경으로 150m 거리에 북한 피난민들이 세운 대성교회가 있었다. 이인한 목사님이 시무하시다가 부산 산정현 교회로 가시고 수년 후에 되어진 일인데, 땅 주인이 나가라고 해서 예배당을 헐어서 옮겨 지어야할 형편이었다. 대성교회 옆에 우리 교회 장성남 집사님이 살고 계셨는데 내가 심방을 마치고 나오다 대성교회 장 장로님이 장성남 집사님 댁 바로 옆에 있는 25평의 땅을 측량하고 있었다.
“장 장로님 왜 땅을 측량하십니까? 여기 25평에 예배당을 옮겨 지으려 합니다.” 자동차도 들어올 수 없는 골목길이었다. “여기서 조금만 나가면 자동차가 다니는 길가에 35평의 땅이 있지만 25,000원이 없어서, 이 땅에 지으려 합니다.” 땅 10평에 25,000원 하는 소리를 듣자 나는 즉시 20,000원 생각이 떠올랐다. 하나님의 교회가 먼저냐? 전도사 가족이 먼저냐? 나는 즉시 꼼짝 못하고 시험을 치렀다.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이셨고, 움직일 수 없는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나는 그 날 밤 즉시 집사회의를 소집하였다. 대성교회 상황을 설명하고, 이미 작정된 헌금 20,000원에 5,000원을 이자 빚을 내어 25,000원으로 땅 10평을 사주다고 제의하였다. 처음에는 아무도 말하지 않고 침묵만 흘렀다. 연세 많은 남자 집사 한 분이, 마음에는 없지만 억지로라도 순종하면 복은 받을 것이니 해보자고 하였다. 회계 장성남 집사가 이자 빚 5,000원을 구하여 25,000원으로 땅 10평을 사주었다.
그런데 남성교회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바로 그 즉시 박상화 집사가 100,000원 헌금을 작정하였다. 이 분은 집이 없어 장성남 집사의 울안에 있는 셋집에 살고 있었고 톱 장사를 했지만 가게 없이 행상을 했는데, 서울 부산으로 다니면서 팔았다. 왜 갑자기 거금의 헌금을 작정했는가? 초등학교 5학년 다니는 딸이 두 동생을 양 손에 잡고 내리막길을 가고 있었는데, 스리쿼터가 세 아이를 위로 덮치고 지나가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그라나 세 아이가 다친 곳이 없었고, 막내 인석이만 이마에 깁스를 하고 뛰어놀았다. 이 기적을 목격한 박 집사가 3 아이의 목숨 값으로 100,000원을 감가헌금으로 작정한 것이다. 당시 그 지역 땅 값으로 치면 40평이나 되는 거금이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는 하나님의 간청에 순종함을 하나님이 받으시고 기적을 행하신 것이다. 교회는 방을 다 헐고 자갈과 모래로 다지고 높여서 새로 방을 완전히 꾸몄고, 앞집에 김 검사 댁이 살았는데, 방 한 칸이 남아돌아 셋방을 얻어 갑자기 방이 두 개로 늘어났다. 그 때까지는 대구에 전화가 2국 하나뿐이다가 3국 전화가 처음으로 개설되었을 때인데 그 비싼 청색전화까지 설치하였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1-33).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시려고 기적을 행하여 곤경에 빠진 한종희의 가족을 구해내신 것이다. 그 누가 아니라고 부정하겠는가! 부어주시되 원금의 4배로 늘리어 주신 것이다.
이능전 집사님이 1963년 봄 학기를 마치자 나를 데리고 경기도 성환교회에 가서 집회를 인도하게 하고 자기 자신도 참석하였다. 평소에도 자기 구역에 자주 나를 데리고 다니며 심방설교를 하게 하신 분이셨고, 동산교회를 창립하신 주축이었고, 후에 전국 여전도회 회장을 지냈으며, 옛날 황해도에서 서울 이화전문을 졸업하신 분이셨다. 집회 후에 나 더러 그 교회에 부임할 것을 권하셨다. 통합에 속한 교회인데 합동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이능전 집사의 언니는 과수원을 하고 있었고, 여동생 남편은 병원을 개원하고 있었고, 오라버니는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으니 성환교회는 친정 식구들이 주축이 된 교회였다. 경기도 성환교회는 경부선의 노변에 있었고 서울이 가까워서 신학교 다니기에도 편리한 곳이었다.
그 때 나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여기는 네가 아니라도 올 목사들이 많다. 그러나 제천 금성은 네가 떠나면 올 사람이 없다. 그러니 네가 금성을 지켜라. 나의 명령자의 뜻이 분명하셨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생각에 “기도해 보겠습니다.” 하고 귀가했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가지 못했다. 그리고 같은 해 가을을 맞이하였다. 그런데 큰 일이 발생한 것이다. 제천 남천교회가 지원을 끊자 옷감을 가지고 집집마다 방문하여 장사하는 과부가 벌어서 헌금하여 나를 연명케 하였는데, 이 분이 서울 전칠홍 목사님이 교장으로 있는 고신파 성경학교에 공부하러 간다고 떠나버린 것이다. 나는 천혜고아처럼 갑자기 공중에 떠버렸다. 그 때는 장연순이라는 처녀가 같은 학교에 갔고 또 다른 처녀 하나가 박윤선 목사님 자택에 식모로 갔으니 세 교인이 줄어든 상태였다. 3 사람이 없는 심심산골 개척교회는 텅 빈 교회였다.
막막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1963년 11월에 이인재 목사님이 대구 남성교회 집회를 인도하라는 소식을 보내주셨다. 60명 정도 회집하는 남성교회 부흥회를 마치고 나니 부임하라는 말씀이셨다. 남성교회는 유영덕 목사님이 서울 동산교회 박윤선 목사님의 부목사로 가신 후라, 한동희 형님이 제천에서 옮겨가 6개월 있다가 마산으로 가신 후였다. 남성교회에 가야만 금성교회 교역자 생활비를 마련할 수가 있기에 즉시 교회를 옮기고 제천 금성에는 친구 김웅규 전도사를 파송하고 매월 생활비를 보내다가 떠났으므로, 다시 친구 김현구 전도사를 파송하고 헌금을 보내 땅을 사서 새 예배당을 짓게 하였으므로 금성교회는 자리가 잡혀갔다. 이 무렵에 남성교회의 사택 문제가 발생하였고,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여 급하게 해결해 주신 것이다.
박윤선과 총신
1960년에 장로교가 합동파와 통합파로 갈라지면서, 합동파가 고신파가 합동하였다. 1963년에 고신파가 갑자기 환원을 선언하자 양편(총신파, 고신파)이 동시에 박윤선 교수의 영입운동에 나선 것이다. 박윤선 목사가 서울에서 1960년에 개혁신학교 문을 열 때에는 양쪽 다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어느 쪽이든 박윤선 목사를 영입하는 쪽이 더 많은 목사와 교회를 자기 쪽에 묶어 둘 수 있었기 때문에 양쪽이 박윤선 목사의 영입운동에 나선 것이다. 그래서 양 편이 박윤선 목사 댁을 방문하여 각기 자기 신학교로 올 것을 강권하였다. 그 때에는 한종희가 박 목사님 자택에서 숙식을 하고 있을 때이므로 양쪽의 출입을 다 목격하였다.
박윤선 목사님은 한종희에게 물으셨다. 내가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이 좋겠는가? 고신에서 두 번 내 보내셨으니, 이번에는 고신에 가시지 않아도 욕할 사람은 없습니다. 고신은 가시지 않아도 이미 목사님의 제자가 되어 있으니, 목사님의 주석을 읽습니다. 만일 금번에 총신에 가시면 총신이 목사님의 제자가 되어질 것이니 목사님은 더 많은 제자를 얻으십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망설이지 않고 총신을 택하셨다. 그리고 부산 총신 교장으로 가셨다. 고신 석원태 학우회 회장이 교장 영입운동 차 부산총신을 찾아 왔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박윤선 목사 때문에 부산 총신이 너무 강해지니까 서울 동시 강의를 하게했다가 아주 서울 총신 교장으로 앉게 하였다. 대구신학교에서는 분산총신 이상근 교장을 대구신학교 교장으로 영입하는 운동이 있었는데 이영수 목사님이 한종희를 시켜 대구로 모셔오라고 해서 부산을 방문하여 허락을 받았지만, 이 소식을 서울서 듣고 이상근 교수마저 즉시 총신으로 영입하여 대구 길을 막았다.
그러나 서울 총신이 볼 일을 다 본 후에는 박윤선 목사가 필요 없게 되었다. 서울 총신에는 이미 박형룡 교수, 명신홍 교수가 있었다. 1967년에 박윤선 교수에게 위기가 있었다. 당시에는 황해도 분들이 총회의 영향력을 갖고 있을 때였는데, 박윤선 목사님을 총신에서 내보내려 하였다. 이인재 목사님 자택을 방문하여 이 소식을 접하자 즉석에서 이인재 목사님을 모시고 서울 박윤선 목사님 자택을 방문하여 총신에 유임하실 것을 강권하였으나 이화주 사모님은 내 손목을 잡아당기며 가라고 소리 지르시며 상한 속맘을 내비치셨다. 총신 이사장이신 부산 노진현 목사님이 서울에 와서 박윤선 목사님이 총신에 유임하도록 권하게 하려고 그 자리에서 이인재 목사님이 부산에 내려가셨고, 나는 박 목사님 댁에서 하루 밤을 쉬고 그 이튿날 대구로 내려왔는데, 박윤선 목사님이 우송한 속달편지가 하루 후에 도착하였다. 뜯어보니 대구 손명복(출옥성도) 목사 교회 부흥회를 취소하였고, 서울 윤봉기 목사 교회 부흥회를 취소하였으니 잘 해 보라는 내용이었다. 그 후 박윤선 목사님은 총신에 유임하여 1980년대 초에 합신으로 분리하여 나오실 때까지 잘 계셨다. 물론 나는 1978년에 이인재 목사님의 주선으로 8 가족이 미국에 이민한 후였다.
한종희 목사와 미국목회
내가 1978년 3월에 6남매와 부부 8가족이 시카고 개혁교회에 갔다. 물론 형님 되시는 이인재 목사님의 권유에 따라 동생 되는 이명재 목사님이 한종희를 미국에 초청해준 것이라 개혁교회에 가족들이 머물렀다. 6개월이 지나서 1,600km 거리에 있는 코로라도 덴버교회가 나를 초청하여 가족들을 이끌고 덴버로 갔다. 교인은 25명 정도이고, 두 사람의 가족이 중심을 이룬 교회였다. 한 분은 한국에서 결찰서 서장을 지낸 군인 출신이고, 한 분은 농협 지점장을 지낸 분이었는데, 두 분이 다 한종희 보다 연세가 많았다. 두 분이 목사의 직무에 대하여 일일이 말씀하였다. 한국에서는 공직생활로 교회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으나 미국에서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였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목사가 주장을 하면 분쟁이 불가피할 것이므로 조용히 지내다가 2개월 후에 사임하였다. 만일 그 때에 내게 경험이 있었고 담력이 있었다면 한번쯤 타협점을 찾아 볼만도 했지만, 나는 이전에 전혀 경험한 바가 없고 담력이 없어 거기에 미치지 못했다.
만일 두 분에게 사직하는 이유를 설명하면 해결도 없이 상처만 안길 것이라 생각이 들어 설명할 수도 없었다. 속옷을 달라하면 겉옷까지 주라는 것은, 싸우지 말라는 주님의 명령이므로, 싸우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싸우면서는 목회해서도 안 되지만 싸우면서는 목회가 이루어질 수가 없었기 때문에 불가피한 처신이라고 생각하였다. 미국에 온지 불과 6개월이 지났고, 6남매는 다 학생이었고, 가정 꼴이 말이 아니었다. 미국 올 때에 개인에게 빌려 쓴 빚이 15,000불 있었을 뿐, 수중에 가진 돈이 전혀 없었다.
2 주간을 미국교회를 전전하면서 주일 낮, 밤, 수요일 예배에 참석하여 비로소 미국교회의 정서에 접할 수가 있었다. 어떤 교회는 찬양에만 30분 혹은 60분을 사용하는 교회도 보았다. 당시에 미국교회 중에는 이미 열린 예배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물론 정통장로교회는 예외였다. 덴버 시내에는 정통장로교(OPC)가 5 곳이 있었는데, 제일 큰 교회가 주일에 80명 정도 회집하였고, 나의 선배 손영준 선교사를 파송하는데 선교비를 담당한 교회였고, 목사가 일하는 교회도 있었다.
2 주간이 지났는데, 미국 군인 3명이 내 집을 방문해주었다. 이 3명이 내가 있던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는데, 다 미혼 청년이었고, 현역 군인으로서 군인 병원 의료기 취급과정(대학과정)을 이수하고 있었는데, 목사 가족이 보이지 않아 찾아왔다고 하면서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자고 하여 비로소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 1977년에 설립한 국제개혁신학교 교장이셨던 이상근 교수님이 학교 이사장이셨던 조천일 목사님에게 부탁하여 6년간 매달 생활비를 보태주셔서 사역하였다.
한 목사의 처지를 들으신 분들 중에서 선배 이근신 목사님이 산호세 개척을 권하였고, 김의환 목사님은 LA 오렌지카운티에 와서 박윤선 목사님 가족과 함께 교회를 개척하라고 하였다. 그 때에는 박윤선 목사님 가족이 그곳에 계셨다. 빌라델피아 이종윤 목사님이 서울 충현교회로 가게 되었을 때에, 이상근 목사님이 사위 지창욱 장로에게 시켜 한종희를 후임으로 앉히게 하려했지만 이종윤 목사 연세대 동창인 김만우 목사를 후임으로 청빙하였으므로, 이상근 목사님은 다시 조천일 목사에게 청하여 매달 생활비를 6년간이나 돕게 하셨던 것이라 덴버를 떠나지 못하고 덴버에 있었는데, 덴버는 미국의 중부도시라 사람들의 왕래가 전혀 없어서 외롭게 지내던 중 샌프란시스코 지역에서 초청이 있어 1984년에 교회를 옮겼다.
옮긴 새 교회는 30여명 모였으나 예배당으로 지어진 건물을 구입하여 개척한지 1년 남짓했다. 설립에 주동하신 김상권 목사님은 연세가 70이 넘으셨고, 운전을 못하니 심방도 못하므로 교회가 젊은 나를 초청한 것이다. 설립자 목사님은 뉴욕에서 류도일 목사님을 모시려했지만 두 분 장로님들이 한종희를 불러온 것이다. 부임한지 9개월 되었을 때에 출석교인이 50명이 넘어섰고 한참 교인들이 좋아할 때였는데, 나를 불러 떠나라고 하셨다. 나는 두 가지 이유로 즉시 떠나기로 결심했다. 첫째 아버지 같은 어른과 목장문제로 분쟁하는 것은 목사의 자질포기로 생각했다. 둘째 복음을 전파하는 강단은 절대로 분쟁의 대상이 되어질 수 없다. 이 두 가지는 평소에 내가 품고 있던 목회자의 윤리문제였기에 반드시 내가 지켜야 하므로 생각해볼 여지가 없었다. 즉시 답하기를 “다음 주일에 떠나겠습니다.”라고 답을 드렸더니, 지금 떠나면 교회가 시끄러우니 좀 기다려 달라고 하셨다.
그 후 3개월이 지난 1985년 3월 마지막 주간 월요일 아침 7시에 시무장로님의 전화로 떠나라는 통보를 받았다. 바로 그 수요일 당회에서 사의를 표하고 그 다음 주일에 마지막 설교하고 갈 곳 없이 교회를 사임하였다. 2개월이 지난 후에 친구 최영교 목사 부부와 함께 김상권 목사님을 내 집으로 초대하여 대접하고 나와 가까이 사시는 고로 노회 때에는 내가 내 차로 모시고 다녔다. 나는 이 사건 이후 나를 내보낸 장로님들과 교인들과도 화목하였다.
나는 갑자기 교회를 사임하게 되어, 나는 이제 망했구나 생각했지만, 도리어 이 사건 이후에 이 지역에서 많은 대접과 인정과 좋은 평판을 얻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하나님이 내리신 상급이었다. 이 지역에 사는 것이 편해졌다. 그 교회 장로는 3년 후에 내 둘째 아들 결혼식에 2,000불 부조했고, 7년 후에 장모님 별세 시에는 1,000불을 부조했으며, 초대때마다 봉투를 건넸고 성탄절이면 봉투에 수백불씩 현찰을 넣어 우송하셨다. 참 고마우신 분이었다. 사표내고 조용히 나가서 화목하는 모습을 보고 참 목자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한종희의 학술활동
한종희는 1950년대를 전후하여 칼빈주의의 본질을 이해하였고, 현대신학 중에서 칼 바르트신학의 정체를 정통신학이 이해하지 못한 점을 알고 1956년에 초등학교 교사직을 사임하고 전도에 전념하면서 하나님께 서원한 것은 칼 바르트신학의 정체를 반드시 밝혀 보겠다고 결심하고 착수한 것이었다. 그리고 목회와 가정에 수많은 사건들이 지나갔지만 칼 바르트신학의 정체를 밝혀보려는 서원은 변한 적이 없었다. 1957년에는 사상계(思想界)에 실린 서울대하교 법과대학 황산덕 교수의 법철학 논문을 읽다가 사상적인 위기를 느껴 많은 책을 불태웠고, 쉬다가 마음에 안정을 얻은 후에 다시 책을 읽었다. 이토록 사상이란 참으로 무섭고 강력한 폭군이었다. 성서를 불신하는 사상이 나를 삼키려 했던 것이다. 내가 성서를 의심하면 나는 그 순간에 지옥으로 내려 떨어지는 순간인 것이다. 그러나 현대철학을 반드시 해야만 현대신학을 이해할 수 있음을 알아차리고 현대철학도 40년 이상을 계속 연구하였다.
1978년에 미국에 오자 한국목회 보다는 신학연구에 시간을 더 얻을 수 있었고, 1998년에 비로소 칼 바르트신학의 핵심과제인 geschichte 분석이 이루어졌다. 같은 해에 즉시 목회를 은퇴하고 책 집필에 나서서 만 3년 걸려 원고를 정리하여, 합동 총회가 2002년에 「정통주의 신학에서 본 칼 바르트신학」이란 표제로 책을 출간하였다. 책 서문은 총회장(예종탁 목사)이 썼고, 이근삼, 김의환, 홍치모 세분이 책을 추천하였다. 책 출간 후에 김상복 김길성 두 교수도 서평을 쓰셨다. 이 분들의 서평이 없었으면 책이 빛 보기 어려웠다.
바르트신학 연구에서 부수적으로 얻은 소득은 현대철학을 40년간 연구하여 얻어낸 결실이다. 현대신학을 규명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상명령으로 받았기 때문에 전 생을 쏟을 수 있었지만, 왜 현대철학 연구에까지 40여 년간이나 바쳐야 했는가? 현대신학은 현대철학이 변형하여 출현한 것이므로 현대철학을 떠나서는 현대신학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정통신학을 하는 신학자들이 이러한 사실을 모르거나 무시하고 바로 현대신학으로 들어가는 것이 허점이고 약점이라 자기도 모르고 남도 이해할 수 없는 글을 쓰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고 핵심과 주제를 놓치고 주변을 맴도는 글들은 내용이 부실할 수밖에 없다. 또한 시대가 사람을 만들듯이 시대가 신학과 철학을 낳기 때문에 시대적 여건을 충분히 글에 반영해야 하는데 시대적인 배경을 가볍게 넘기고 지나치는 글들 역시 주변을 맴돌다가 만다. 현대신학 연구는 이 모두를 전제하고 들어서야 한다.
(1) 1985년에 신학지남에 칼 바르트의 성서론을 발표하면서, 곽선희 목사가 그리스도의 육체부활을 불신한다는 사실을 공개하였다.
(2) 1991년에는 한국 합동측 기독신문에 “한국의 肉體復活을 불신하는 神學者들”이라는 제목으로 신문지 2 페이지 분량의 글을 1회로 공개하였다. 육체부활을 불신하는 신학자들은 조향록 목사 문익환 목사 박봉랑 목사 김동수 목사 이화여대 허 혁 교수였다. 이 글을 게재하면서 신문사는 혹시나 고소를 당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지만, 도리어 그 쪽에서는 말하기를 1970년대의 글을 그때에 말할 것이지, 왜 20년이 지나고서야 말하느냐고 했다는 전언을 편집국장을 통해서 들었으니, 우리는 그만큼 현대신학의 흐름에 우둔하다.
(3) 2002년에는 “정통주의 신학에서 본 칼 바르트신학”이라는 책을 한국 합동측 총회가 출판하였다. 내용은 칼 바르트가 일체의 기적을 믿지 않는 신학자임을 여러 증거를 제시하여 입증하였으며, 한국 기장의 신앙고백(1972)과 장신대학 교수들이 1985년에 발표한 신학성명 역시 일체의 기적과 내세와 영생을 불신하는 신학임을 밝혔고, 미국 장로교(PCUSA)의 「1967년 신앙고백」과 1983년도의 「간추린 신앙고백」역시 일체의 기적과 내세를 믿지 않는 신앙고백임을 밝히 들어냈다. 필자가 칼 바르트연구에 전심한지 46년 만에 1956년에 책을 출간한 것이다. 칼 바르트신학은 나의 스승님들(박윤선, 박형룡, Van Til)이 평생하시다 못 다하고 물려준 숙제였다.
Van Til 교수가 Karl Barth에 대한 연구서로 마지막 발표한 것이 1962년에 발표했던 “기독교와 바르트주의”(Christianity and Barthianism)였으나, geschochte 분석을 못하고 붓을 놓았다. 이 사실은 밴 틸의 제가 John Frame 교수가 스승 “밴 틸의 사상분석”이란 책에서 주장한 내용이다. Van Til 교수가 1961년에 Christianity Today에 공개하여 geschichte의 뜻을 질문하여 세계에 알렸으나 Barth는 끝내 답해주지 않았다. 바르트의 서간문집에 밴 틸이 질문한 것은 있으나 답한 것이 없어서, 1985년에 한종희가 밴 틸을 필라델피아에서 만났을 때에 바르트가 전화로나 혹은 직접 답한 적이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없었다고 하였다.
(4) 2004년에는 한국 합동측 전국목사장로 기도회 강사로 화요일 밤 설교를 담당했었는데, “지금도 안식일은 계명이다”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였고, 당시에 발간한 회록 부록에 김세윤 교수가 그리스도의 신성과 내세를 불신한다는 사실을 “신복음주의 신학 비평”이란 제목으로 공개하였다.
(5) 바르트신학에 대한 책을 쓴 후에, 지금까지 8년간 영국과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이 다원주의 신학으로 변질해온 사실을 추적하는 글을 써왔는데, 현재 컴퓨터 용량으로 550 쪽이 준비되었다. 여기에는 Billy Graham이 들어가고, C. S. Lewis와 John Stott와 James I Packer가 들어가고, Harold J. Oackenga와 John Woodbridge가 들어가고, Edward Carnell, Carl Henry, 김세윤도 들어간다. 이들이 다 그리스도 신성을 믿지 않았으며, 내세를 믿지 않았고, 현세의 지상구원만을 주장하여, 기독교를 윤리종교로 변질시켰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면 다원주의 신학이 성립되는데, 다원주의를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나서는 형국이다.
(6) 1967년 9월에 강도사로 합격하자 대구신학교(대신대학교) 강사로 강의를 시작하였다. 샌프란시스코 기독대학교와 쌍 파울로 국제대학교(8회 출강)와 LA에 있는 국제개혁신학교(3회 출강)와 LA 소재 에벤젤리아 신학교와, 씨애틀 개혁신학교와, 부산 브니엘 신학교, 부산신학교, 광주신학교, 서울 칼빈신학교, 서울 고려신학교에서 강의하였다. 포항 한동대학교에서는 2005년도에 한 달 간 현대철학을 강의하였다
>> " 님이 쓰신 내용 <<
:
:
: ■ 한종희 사과서 -중생된 영은 범죄하지않는다에 대해( 연도? ) 총공회에 보낸서신 ----- 클릭
: ■ 한종희 사과각서 -"이단의 정체"라는 저서에서 총공회를 이단이라고한 것에 대해(1975.12.23) 총공회에 보낸서신 ----- 클릭
:
표시할 내용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