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총공회 시각의 - 은퇴제도
은퇴제도
1.은퇴제도란
교회 안에서 임명된 성직은 70세가 되면 은퇴를 하도록 교회 헌법에서 제도로 정해 놓고 있다. 세상도 합리적인 문화국이 되어갈수록 거의 모든 직책이 은퇴제로 되어 있는 것이 기본이다. 은퇴제도가 필요한 주된 이유는 ①심신의 노쇠 ②여생의 휴식 ③후배 양성 ④인사 교류 등을 들 수 있다. 물론 은퇴의 연령은 약간씩 다르다. 육체 노동적인 직책은 약간 빠르며, 정신 노동적인 경우는 10년 정도 늦어진다. 교회의 성직은 70세 정도이다. 중요한 것은 은퇴제도가 있다는 것이며, 이 은퇴제도는 너무도 당연한 교회제도가 되어 있고 이를 반대하는 교회는 없는 정도가 되어 있다.
2.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1)육체적 노쇠에 따라 중단해야 되는 직무의 경우
성직 은퇴제도를 주장하는 이들이 주로 민수기 8:24-25 말씀에서 "레위인은 이같이 할찌니 곧 이십 오세 이상으로는 회막에 들어와서 봉사하여 일할 것이요 오십세부터는 그 일을 쉬어 봉사하지 아니할 것"이라는 기록을 근거로 육체의 노쇠에 따른 직분의 은퇴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바로 뒤에 나오는 26절에서 "그 형제와 함께 회막에서 모시는 직무를 지킬 것이요 일하지 아니할 것이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육체적 노쇠에 따라 육체적으로 "일하는" 직무 대신 "모시는" 직무가 이어지고 있음을 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구약시대의 제사는 주로 짐승을 잡아야 했고 이렇게 성전의 일도 육체적 이스라엘에게는 육체적 활동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육체적 노쇠 때문에 55세가 되면 중단해야 되는 일이 있었고 육체적 건강에 상관이 없는 다른 형태의 직무가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 구약이었다.
2)육체적 노쇠와 상관이 없었던 경우
구약의 성직은 크게 제사장, 선지자, 왕이었다. 사사시대의 사사도 있었고 기타 여러 형태의 직책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은퇴가 없었다. 죽을 때까지 하나님을 섬겼고, 신약에서도 하나님을 섬기다 죽음으로 땅 위에서 사역은 끝이 났었다. 성전 안에서 레위인들이 육체의 활동으로 봉사해야 했던 일과 같이 특별히 육체적 노동이 필요한 경우는 오히려 예외적인 경우이다.
신약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죽는 순간, 마지막까지 주님의 손에 들린 면류관을 향해 달렸을 뿐이다. 큰 수고를 했으니 이제 여생은 편히 쉰다는 개념이 없었다. 주님이 죽음으로 주신 구원을 받아 살게 된 자기가 무슨 수고와 얼마정도의 양을 채웠길래 쉴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을까? 복음의 초보적인 이해조차가 잘못되었던 것이다. 하루종일 밭을 갈고 양을 쳤던 종이, 돌아와서는 주인의 식사를 전부 준비하고 다 잡숫기를 기다렸다가 마지막에 자기가 먹는 것도 내일 또 주인을 위해 할 일이 있어 먹었지 먹을 만큼 일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주인에게는 늘 "무익한 종"으로만 자신을 보는 것이 바른 자세일 것이다.
3)나이와 직분의 바로 된 관계는
대형 건물을 짓는 수고는 육체 노동자들이 다 담당한다. 그러나 더 큰 일은 가냘픈 기술자가 움직이는 대형 크레인이 해버린다. 실은 사무실 안에서 종이 위에 연필을 움직이는 낙서가 그 대형 건물을 다 짓고 있는 것이다. 그 건축사무소의 건축설계가의 머리 속에 착상 하나가 이 모든 활동의 제일 핵심에 있다. 세상일도 망치를 휘두르는 건장한 팔이 일을 한다고만 아는 시대가 아니다.
하물며 신앙세계란 육체 속에 있는 마음이 자기 마음 안에서 활동하는 성령과 악령 중 어느쪽으로 손을 잡느냐에 따라 죄의 건설과 의의 건설은 대세가 결정이 되어 버린다. 남은 것은 성령에 붙들린 마음이 자기 몸을 통해 시행하는 것만 남아 있으며 이것은 그 사람의 육체의 노쇠와는 거의 상관이 없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무릇 지킬 만한 것 중 네 마음을 지키라 만물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하신 것이다.
모세의 손이 위로 올라가야 하는데도 피곤하여 내려오게 되자 옆에 있던 사람이 붙들어 잡게 함으로 아말렉을 쳐서 이기게 했었다. 전쟁에 나간 병사들의 육체적 수고가 전쟁을 이긴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배후에 팔 하나를 들고 있고 또 보조하는 그 수고 하나가 전쟁을 이기게 한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한 사람, 그 사람의 기도 한 마디, 그 사람의 깨달음 하나가 많은 역사를 이룬다. 그러나 사람들이 어두워지게 되면 보이지 않는 신앙 역사는 파묻고 나타난 인간의 활동만을 전부로 알게 되기 때문에 육체의 노쇠와 신앙의 노쇠를 함께 보는 데까지 이르게 되고 그것이 성직의 은퇴제도로까지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육체의 노쇠와 성직의 관계는 어떻게 되어야 바른 것일까? 신앙은 그 시작을 중생이라고 표현하셨듯이 "생명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생명이란 시간이 흐르면 자라며 강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바른 신앙, 산 믿음을 가진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두고 갈 육체는 노쇠케 되어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가 되어야 한다. 그러니 백발이 오히려 영화의 면류관이라 그 아래는 고개를 숙여 그 지혜를 한 마디 더 배워 많은 세상을 복되게 살 수 많은 사람이 생겨지게 되는 것이다.
3.현실 교회의 은퇴제도
레위인이 육체적 활동으로 봉사할 일은 55세에서 벗어나도록 민8:25 말씀에서 오늘의 교회들은 은퇴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삼지만, 오히려 성경 전체에서 성직에 대한 연령은 없는 것이 옳다는 것은 쉽게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교회가 은퇴제를 채택하고 있는 것은 실은 현실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1)신앙이 육체와 함께 노쇠하는 경우가 너무 많으니
말씀이 가르치는 대로 첫 신앙의 어린 사람이 연령이 더해갈수록 점점 더 높은 신앙의 사람으로 자라가는 경우는 희귀하고, 반대로 육체의 노쇠에 따라 정신건강과 심지어 신앙까지 노화가 되어 목회자라는 이름은 살아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가 되어 교인들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도록 만드는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사울이 왕직은 가지고 신앙은 버렸으니 그가 죽을 때까지 이스라엘에게 끼친 피곤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성직자가 처음 믿을 때 자기가 가졌던 주관과 인간적인 모든 요소들을 평생 노력하여 고쳐 나왔으면 나이가 들수록 더 은혜로움을 교인들이 느끼게 되어 교인들이 먼저 붙들고 놓치 않으려고 할 터인데, 첫 성직은 두렵게 받아 시작을 했으나 세월 속에 안주하여 자기를 죽이는 노력은 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가꾸고 돋우는 일만 하다보니까 하나님 자리까지 인간이 차지해 버리게 되는 경우를 흔히 보게 된다. 이들이 은퇴도 없는 평생 직장으로 알고 있으니 이런 폐단을 막기 위해서는 성경에 없는 은퇴제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은퇴제도는 일차로 자기를 죽이고 자기 속에 하나님이 사시도록 힘쓰지 않았던 성직자들이 자초한 일이라고 해야겠다.
2)세상을 따라 교회가 닮아가다 보니
교회가 성경을 보고 성경이 가르친 높은 목표를 향해 노력을 해도 늘 부족할 터인데, 오히려 세상을 보고 세상의 여러 모습을 닮아보려고 애를 쓰고 있음은 그 예를 다 들 수도 없을 만큼 되어있다. 세상이 크다는 것, 세상이 좋다는 것, 세상이 유행시키는 것, 그 어느 하나라도 교회가 반대로 생각하는 것이 없을 정도이다. 그 중에 하나가 교회의 편제나 운영이 세상의 단체를 빼다 박아놓는 것이다. 관공서 조직표인지 아니면 교회의 조직표인지, 관공서 운영 원리인지 아니면 교회의 운영 원리인지 전부는 꼭 같아져 버렸다.
은퇴제도에 대한 사상이 민5:28을 근거로 먼저 나온 것인지, 세상의 은퇴제도를 보고 교회가 따라간 것인데 그 성구 근거를 합리화를 위해 찾아 낸 것인지 단정하는 것은 어렵지만, 현 교계의 거의 모든 움직임이 세상을 뒤쫓기에 바쁘지 세상을 거슬려서라도 말씀을 세워나간다는 면은 거의 없다고 할 것이고, 따라서 은퇴제도에 대한 모든 이론도 속화되는 교회의 한 단면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3)은퇴제도에 따라오는 폐단들은
은퇴제도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은퇴제를 지지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육체의 노화와 함께 신앙이 함께 노쇠되는 경우를 예로 든다. 이런 경우 은퇴 연령을 넘어서며 활동할 수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도 선별의 기준을 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결국 다수를 위해 함께 은퇴를 해야 하며, 이런 경우도 억울하다고 생각하기에 앞서 오히려 적극적인 자세로 후배를 위해 길을 터주고 또한 주기적인 인적 교체를 통해 교회에 새로운 분위기를 첨가시킬 수 있기 때문에 여생의 휴식이라는 면까지 고려한다면 은퇴제도는 필요악적인 면보다 적극적으로 도입할 수 있는 제도라고 한다.
①종다수가 아니라 옳고 그름에 기준을 가져야 하는 것이 신앙의 원리
세상은 다수를 위해서 소수가 희생할 수밖에 없는 모순이 있다. 교회는 한 사람을 위해 다수가 희생할 수 있으니 십자가의 이치가 있는 곳이다. 동시에 한 사람의 옳은 지도가 수 많은 사람을 살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다수든 소수든 한 사람이든 그 수의 많고 적음으로 가치를 평가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붙들고 쓰는 사람, 그런 사람이 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교회의 바른 정치이다. 옳은 주장이 앞서고 바로 선 종들이 교회를 지도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것이 교회 행정의 기본 방향이어야 한다.
따라서, 은퇴에 해당될 대부분의 사람들 중에 은퇴해서 안 될 종이 하나 섞여 나간다면, 세상은 어쩔 수 없다고 할 것이고, 교회는 그래서는 안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은퇴시킬 대부분의 무능한 교역자들로 인하여 발생되는 많은 교회들의 불편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은 은퇴제도로 교역자를 일괄 처리한다고 처리가 되어질 문제가 아니다. 세상은 법으로 정하고 시행시켜 버리면 되지만 교회는 강제성을 가질 수 없는 것이 법이며, 그 법을 피해가고 싶다면 얼마든지 더 큰 분란이나 모순을 내재시킨 채로 피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서 발생되는 대단한 분규와 갈등 중에 상당 부분은 그 원인 깊이 은퇴제도가 있고, 드러나는 표면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경우이다. 은퇴제도가 없다면 해결이 된다는 말이 아니다. 인간 제도는 어떤 식으로 조립을 해놓던 모순이 없을 수는 없다. 요는 인간의 제도란 될 사람은 막히고 안 될 사람은 안 막히게 되는 모순이 있음을 꼭 기억해야 한다. 은퇴제도에 막혀 사역을 중단하게 되는 아까운 종들은 그 은퇴제도를 염두에 두고 다른 수단을 동원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기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강단을 떠나게 된다. 그러나 그 은퇴제도에 막혀 마땅히 내려앉아야 될 사람들은 그 은퇴제도를 미리 예상하여 불충이나 축재 등의 여러 가지 인간적 방안들을 찾게 되는데 이 피해는 역시 교회가 피할 수 없는 그리고 보이지 않는 폐해들이다.
②은퇴제가 지향한다는 인재 양성은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다.
세상은 선배가 앞자리를 오래 차지하고 있으면 커 나오는 후배들의 출세에 지장이 있다고 은퇴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자연계시를 살펴보더라도 사실이다. 큰 나무에 가려서 많은 작은 나무들이 고사되고 있는데, 그 나무를 잘라 버리면 여러 나무들이 크게 성장하게 되며 또한 그 중에 어떤 나무는 베어버린 나무 이상으로 좋은 자질과 성장력으로 번성하게 되는 경우를 많이 보기 때문이다.
성직도 그러할까? 세상은 1등이 죽어야 2등이 1등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고 따라서 약육강식의 전투논리가 적용되기 때문에 그러하다. 이런 세상 속에서 신앙세계란 1등인 예수님이 계셔야 100등할 사람이 99등으로 진보하게 된다. 1등인 예수님이 우리를 아예 다 당신 같은 1등을 만드시려고 목표를 정해놓고 끌고 계신다. "예수님같이 되기 원하네"라는 찬송이 바로 세상이 모르는 세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울같이 잘못된 종은 없어져야 이스라엘에 복이 온다. 그러나 다윗같은 바른 종은 있어야 그 나라 전체가 살게 된다. 사울이 왕직에 있을 때에는 이스라엘의 모든 장수들이 패장이 되었고 이스라엘의 모든 병사들이 패잔병들로 살았다. 그러나 다윗이 왕이 되고 나니까 이스라엘의 모든 장수들은 용장 맹장들이 되었고, 그 휘하의 군병들은 늘 자랑스런 개선군들이 되었었다. 그 다윗이 은퇴를 하고 요압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올라가면 이스라엘은 또 사울 때와 같이 된다.
은퇴를 시켜야 할 절박한 사람들이 많을수록 은퇴를 시켜서 안될 종 하나를 찾아 그런 종으로 어두워진 교계를 밝혀야 할 것인데 함께 은퇴를 시켜 버린다는 것은 아무래도 계산을 잘 못한 것 같다. 은퇴를 시켜야 할 사람들 때문에 현직을 지켜야 할 한 사람의 희생은 단순히 산술을 적용할 일이 아니다.
따라서 한 사람의 바른 종 때문에 한 시대가 살고, 그 한 종이 죽음으로 그 다음에는 한 시대가 불행하게 되는 것은 사사시대와 왕정시대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신령한 이스라엘의 교회 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칼빈이 일찍 은퇴를 했더라면 칼빈의 제자들이 칼빈과 같이 훌륭한 반열에 섰을 것이라는 사람은 칼빈의 교계 지도자의 자리를 대신 앉은 후임만을 본 것이다. 칼빈이 죽을 때까지 교회를 붙들고 일을 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더욱 신앙으로 일어설 수 있었다는 사람은 세상이 모르는 복음을 알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세상은 자기 출세를 위해서 다른 사람이 하나 엎어져야 하는 것이고, 천국은 자기 하나 바로 믿도록 하기 위해 위에서 자기를 끌어 올려주는 은혜의 기관이 필요한 법이니, 인간 관계의 첫 계명을 시은과 사은의 관계를 대표한 부모를 공경하라 하신 것이다.
③여생의 평안을 추구한다는 것은 십자가를 벗으라는 말이다.
복음은 무한의 주님이 날 위해 다 내놓으시고 날 살려놓은 이 은혜로 시작되는 생활이다. 그 주님의 명령이 주님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라는 것이다. 이것이 눈앞에 있는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우리에게는 십자가의 고통으로 보이며, 이것이 주님의 대속을 잊지 않고 있는 우리에게는 십자가의 영광으로 보이게 된다. 전자의 경우라면 은퇴제도란 성직에 오랫동안 수고를 했으니 여생을 쉬라는 좋은 말로 들리게 되고, 후자의 경우라면 은퇴제도란 주님처럼 살지 말라는 말이며 제 몫에 태인 십자가의 영광까지 버리라는 저주로 들리게 될 것이다.
육체의 활동을 줄이는 것, 남을 위한 생활이라는 것을 어떤 시각에서 보느냐는 것이 문제이다. 주님의 대속을 생각하고 주님 걸어가신 그 길을 걸어가야 하는 이유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차이일 뿐이다. 따라서 십자가를 영광 중에 영광으로 아는 사람에게는 전혀 여생의 평안을 위해 쉬시라는 은퇴제도는 가장 큰 저주일 것이다.
④주기적인 인사교류라는 것도 전혀 성직의 성질을 잘못 본 것이다.
세상은 각자의 가진 재주와 능력이 따로 있어 인사의 적절한 교류라는 것은 많은 장점을 모아볼 수 있는 방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성직은 한 인간을 붙들고 주님이 당신 하고 싶은 것을 해야 하는 것이다. 누구의 개성, 누구의 인간적 장점, 어느 누구의 특성은 다 뽑혀야 하고 주님만이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누가 와서 전해도 같은 복음이라야 하고 한 하나님이라야 하며 한 진리라야 한다. A라는 사람이 설교한 본문을 B라는 사람은 달리 해야 새로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세상 사람도 있고, A가 하던 B가 하던 누가 전하던 같은 진리 같은 말씀이 전해져야 바로 되는 것이다.
인간이라 각자가 다른 것이 훨씬 많다. 그러나 다른 것은 전부가 정리를 해야 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만 가지라 곧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만을 가질 일이다. 여기에 다른 것은 다 정리할 일이고 회개할 것이지 나타내고 드러낼 일이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한 말씀, 같은 말씀이라도 그 말씀으로 전하고 싶은 명령이 각자에게 따로 있다면, 따로 전하도록 따로 느껴지도록 역사 하실 이는 성령이지 인간이 자기 속에 하나님을 떼 놓아 버리고 자기의 인간 고안으로 이런 저런 개성들 또는 분위기를 연출할 일이 아니다. 즉, 하나님이 주동이고 능동이며, 우리는 수동이며 수종이라야 옳다고 보며 그렇다면 여러 큰 문제점을 가진 은퇴제도라는 것을 만들어서까지 인적교류를 인간이 주도적으로 할 일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4.백영희목사님이 지향했던 은퇴제도
많은 사람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백목사님은 은퇴제도에 대하여 극구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의 설교를 많이 접해본 이들이면 총공회 신앙은 은퇴제도가 없는 것이다고 단정을 하게 된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전제 조건 또는 동시 조건과 함께 은퇴반대를 주장하는 것이며 무작정 은퇴제도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총공회의 모든 성직은 연령 제한을 그렇게 엄하게 규정하지를 않고 있다. 집사직은 30세 이상으로 명문하고 있으나 이도 권고사항 정도의 의미이다. 은퇴에 대하여는 목회자나 평신도를 막론하고 어떤 성직이든 전혀 언급 자체가 없었다. 따라서 은퇴제도가 없는 것이 총공회의 은퇴제도라고 할 수 있겠다. 백영희목사님 자신부터 80세 순교하는 순간까지 일주일 11번의 예배와 전국 대집회를 5월과 8월에 한 주간씩 계속 맡았었다. 또 수도 없이 강조한 것이 성직은 은퇴란 잘못된 것이며 은퇴란 없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다음과 같은 전제조건 또는 동시조건을 이해하고 살펴야 한다.
1)은퇴제도가 없어야 된다는 말은 은퇴제도에 해당되는 교역자가 되지 말라는 말이다.
총공회는 교회법적으로 은퇴제도를 규정하지 않고 있다. 비단 은퇴제도뿐이 아니라 모든 제도를 두고 법적으로 강제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에 성문헌법이 없는 교회이다. 일괄적인 연령으로 은퇴를 강제하지 않는다는 입장은, 은퇴제도를 규정하고 있는 일반교단보다 성직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비교할 수 없이 크고 많다는 점을 내포하고 있다.
은퇴제도를 반대하는 것은 무능한 사람들의 신분을 보장하라는 말이 아니라 은퇴제도에 의하여 은퇴시키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되지 말고 오히려 은퇴를 시켜서 안되며 은퇴제도가 그 사람을 은퇴시킬 수 없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러나 이 시대를 사는 우리로서는 다시 한번 되돌아 봐야 할 말이다. 은퇴에 해당되지 않을 생명있는 성직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은 높은 이상이 아니고 마땅하고 당연한 일이라야 하는데, 실제로는 거의 전부가 은퇴를 시키지 않으면 안될 노쇠현상을 보이는 것이 현실이니 은퇴제도를 시행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주장이다.
집사에 임명하는 것은 집사될 실력이 있어 집사를 시키는 것이 아니라 집사될 실력이 없으니 집사되기를 노력하라고 집사를 시키는 것이다. 집사될 실력도 없는 사람이 집사가 되고 나면 자기가 집사될 실력과 신앙이 있는 사람으로 착각하여 집사의 권세를 써먹어려는 데에서 모든 일반 교인들의 모순이 나오는 것과 같다. 누가 감히 하나님의 종이라는 이름을 가질 만하여 가진 사람이 있겠는가? 천부당 만부당 할 일이다. 그러나 성직자로 임명해 놓는 것은 성직자가 되라는 말이지 성직자가 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이 면을 잊지 않고 있다면 진정한 성직자가 되어갈 것이고, 성직자로 임명받은 사람이 자신이 성직자가 될 만했고 또 성직자에 마땅하다고 생각하여 성직자 행세를 하게 되면 이미 실패한 사람이다.
세상 다른 일은 육체의 노쇠로 인하여 노쇠가 되지만 신앙은 육체가 노쇠함에 따라 노쇠하는 것이 아니라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져야 하는 것이니 바로만 나가면 은퇴가 해당되지 않는 사람, 은퇴제도가 필요없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성경이기 때문이다. 신앙은 육체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힘이 약해질수록 그 속에 영의 힘이 솟아나게 되는 것이다. 젊은 청년이 열심히 잘 믿는 것 같아도 연로한 교인이 그 육체의 모든 힘이 다 죽어지고 난 후에야 비로소 이전에 보지 못한 하나님을 더 뚜렷히 보는 경우와 같은 것이다.
젊어서는 일한다는 것이 알고 보면 인간이 일을 했고, 이제 나이가 들면서 철이 들고 비로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수종드는 것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데에는 많은 세월이 걸리게 된다.
2)은퇴제도 때문에 은퇴 연령 이전에는 임기가 보장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다.
은퇴제도가 있다면 70세에는 싫어도 은퇴를 해야한다는 것인데 이는 역으로 70세까지는 직분이 보장된다는 모순을 가지고 있다. 70세가 넘어면서 노망, 노욕이라고 해야 할 폐단이 있었기 때문에 은퇴라도 시켜 불편을 줄여보자는 뜻이다. 그러나 70세까지는 눌러 앉아도 된다는 임기 보장이 되었고 임기 보장이란 일반적인 인간 심리, 특히 우리나라 사람의 심리에서 잘 엿볼 수 있듯이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충성의 기회로 삼기보다는 보장된 임기동안의 안주해 버리는 경향이 심대하다.
백목사님이 은퇴제도를 반대하는 것은 은퇴 연령까지는 임기를 보장하고 은퇴 연령이 지나면 강제로 해임시키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지 성직자를 특별한 존재로 대우하여 교역자의 불충을 무기한으로 두고 보라는 것이 아니다. 연령에 상관없이 충성하면 성직이 유지되고 불충하면 성직에서 물러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명하게 된 주일학교 운영의 원리도 은퇴제도라는 면에서 살펴본다면, 은퇴제가 없는 주일학교 교사라는 것이 그 중심에 있다. 주교 교사뿐 아니라 모든 성직에 해당되는 원리였다.
주일학교 교사 자리 하나에서부터 목사직까지 어떤 성직도 주님 앞에 죽는 날까지의 충성이 "죽도록 충성하라"는 성경에 옳다는 것이다.
3)은퇴제도의 일괄 연령 적용을 반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은퇴를 당해야 할 사람이 절대 다수라는 말에는 이의가 없다. 또한 현실 고려 없는 이상적 논리로 은퇴 당하지 않을 사람이 되라는 구호만 붙들고 있으라는 것은 더욱이나 아니다. 은퇴를 당해야 할 절대 다수의 성직자들을 어떻게 처리를 해야 하느냐는 방법론을 두고 지적하는 말이다.
은퇴가 필요 없고 은퇴를 해서는 안될 사람이 되라는 취지를 따라 갈수록 실력있는 직임자가 되었다고 가정하여 은퇴제를 적용시키지 않을 사람이 나왔다면 성공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런 취지에조차 해당이 되지 않고 도저히 은퇴를 시키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70세까지로 기다려 주지 말라는 것이다. 70세를 넘어서라도 일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일하도록 지원을 하고, 반대로 70세 이전에라도 일을 시킬 수 없는 사람이라고 판정이 된다면 바로 해직을 시키자는 것이다.
따라서 총공회가 반대하는 은퇴제도는 70세가 넘어서도 죽을 때까지라도 일을 시켜야 한다는 것으로만 알고 있는 사람은 절반만 알고 있는 것이다. 70세가 아니라 30대의 청년이라도 은퇴를 시키지 않을 수 없는 현상을 가지고 있다면 결국 은퇴를 시키라는 것이다. 일괄적인 나이 정년에 매이지 말자는 말이다.
일괄적인 70세 은퇴에는 부수되는 큰 폐단이 또 하나가 있으니, 환갑에 철든다는 말처럼 세상 이치도 깨달아 무엇인가를 실제로 알만 한 때는 죽을 때가 이르러야 한다는 통계이다. 인간의 깊은 속을 통달해야 하고 더하여 보이지 않는 신령한 세계를 상대할 성직은 70세에 사실 첫 걸음을 배운다는 정도가 경험 있는 대 신앙가들의 고백이다. 은퇴할 나이까지 잘한다고 일한 것은 실은 시행착오였고 실험이었으니 이제 70세가 되면서 참으로 실 수 없는 대업을 수행해야 하는데 은퇴라는 제도가 그 간의 모든 투자했고 학습했던 모든 자원을 송두리째 뺏어버리는 결과가 되는 것을 우려한다.
물론 이런 경우에도 반론하는 쪽에서는 청년 때보다 더 노쇠되어 더 놔두면 더 큰 일을 낼 사람들이 대다수이지 않느냐고 할 것이다. 그러나 실은 그런 경우의 성직자들은 젊어서는 일을 잘했다고 하는 그 업적까지도 다시 분석을 해 본다면 사실과 다른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심은 대로 거두는 이치가 있어, 젊은 패기와 만용으로 일은 벌여 놓았고 심안이 어두운 일반 사람들이 볼 때는 큰 일을 했고 이제 나이 들어 쇠퇴했다고 하는데, 그들의 젊은 시절 행한 것이 실은 안 할 일을 더 많이 했고 잘못된 일이 더 많았는데 사람들이 오해를 하는 경우이다.
예를 들어, 한국의 교회들이 교단 분열, 교단 탈퇴, 교회 개척, 성전 건축 등등의 큰 역사를 할 때마다 주님의 뜻과 특수한 섭리로 되었다고 하지만, 그 후 1-20년 세월이 지나가고 보면 어느 젊은 혈기가 자기 주관으로 일을 저진 정도였고 다시 한번 더 기회를 주게 된다면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후회들을 얼마나 하고 있음을 우리는 보고 있다. 단적으로 장로교 통합운동이 거론될 때마다 과거 분열에 대한 비판은 그야말로 당시의 "주장했던 논리"를 무참하게 무시해 버리고 "인간적 고집 .... "등으로 결론지워 버리고 있다.
수치로 예를 든다면, 30대 청년 수십 수백명이 가질 수 없는 뼈 아픈 경험을 가진 70대의 한 명, 숫자로는 수십, 수백대 일이지만, 양측이 가진 경험의 가치는 오히려 몇십, 몇 백배로 한 경험이 더 소중할 수 있는 것이다. 일괄적인 연령의 은퇴제도는 이런 귀한 자산을 다 사장시키는 아쉬움이 있다.
여기서 총공회의 전진적 은퇴제도를 잠깐 소개한다. 은퇴 제도가 필요없도록 모든 배려를 다 했음에도 불구하고 은퇴제도가 꼭 필요하게되는 경우를 평소부터 미리 적용을 시키고 있다. 모든 사람에게 꼭 같은 연령으로 일괄 적용시킨다는 것은 각 개인의 형편을 너무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은퇴가 제도적으로 필요하다는 입장에서는 그 시행상 개별적 심사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개별 교회의 시무에 대한 신임투표로 대신 할 수 있을 것이다.
총공회의 모든 직책은 본인은 자리만 차지하고 수고는 다른 사람이 하면서 유지되는 일이 없도록 큰 원칙을 삼고 있다. 주교 교사는 은퇴가 없다. 그러나 학생을 교회가 소개하거나 붙여주지 않는다. 본인의 노력과 실력만으로 반을 유지해야 한다. 결국 유지하지 못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그 직을 포기하게 된다. 다른 사람의 전도로 만들어진 직책에 어떤 사람이 수고 없고 책임은 없이 권리 또는 권세만 행사하는 자리를 최대한 다 없애버리는 원칙인 것이다.
목사와 장로직부터 매 2년마다 전교인을 상대로 시무 신임 투표를 하게 된다. 바로 전진적인 은퇴제도의 개념이 전 연령, 전 성직, 전 생애를 걸쳐 계속 적용되는 것이다. 만 2년마다 시행하는 것은 목회 현장을 고려할 변동적인 것이지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다.
어느 정도의 기간을 정할 것인지는 단정할 수 없으나 몇 개월 단위라면 기간이 너무 짧은 것같고 또는 수년 이상이 된다면 너무 기간이 멀어지게 됨으로 만 2년 정도로 40여년 시행하고 있는 중이다. 만 2년이 꼭 필요하다거나 조절 불가능한 기간이라는 것은 없다. 대략의 기간이며 변동 가능한 일이다.
2년마다 한번씩 시무에 대한 신임투표로 각 교회가 자기 교역자에 대한 특별한 모든 형편을 고려 결정하게 된다면 은퇴제도가 꼭 필요한 사람에 대하여는 개별적으로 은퇴를 시킬 수가 있을 것이고, 또한 이 은퇴는 해당 교회에 그 때에만 해당되는 임시조처이므로 타교회가 모신다든지 또는 2년 후 다시 모시게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교역자들이 늘 깨어 있는 충성을 다 할 수 있게 하는 데에는 일괄 연령 은퇴제도보다는 장점이 많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경우 교인들로서는 절대 다수가 찬성할 것이고, 투표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극구 반대를 할 것이다. 그러나 맡은 직책이 주의 일을 맡아 봉사하는 것이고 수고하는 것이며 희생하는 것이라는 점을 안다면, 봉사와 수고와 희생을 쉬라는데 반대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이런 제도를 반대한다면 그는 말로는 봉사, 수고, 희생의 성직이라고 했으나, 실은 권세와 부와 육신의 안일에 유리한 직장으로 맡아 온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성직을 맡은 사람도 두려운 직책을 감히 부족한 자신이 떨면서 해야 하기 때문에 그 멍에를 벗어주면 오히려 더 나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쓰실 것이라고 믿고 바라야 옳고, 또 신임을 받지 못한 자신은 더욱 노력하여 다시 청함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고, 그러나 청함에는 자신이 어떤 단점과 약점이 있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부족한 지를 소상하게 또 실제로 아는 겸손으로 대해야 할 것이다.
4)은퇴제도의 일회적용을 반대하는 것이다.
사람은 어떤 죄인 악인이라도 하나님께 붙들리면 성자가 되고, 어떤 성자라도 하나님과 떨어지면 죄인 악인이 된다는 면을 성경이 가르치는 그대로 교회 정치를 하기 때문이다. 한번 죄인이었다고 평생 다시는 의인이 될 수 없다든지, 한번 성직을 가진 성자이기 때문에 그는 다시는 죄인의 길에 서지 않을 것이라는 논지를 반대하는 것이다. 극단적인 예로 천주교와 같이 한번 잡은 권세는 놓지 않고 싶은 것이 인간의 부패성이며 이를 위해서 구약적 성직을 주장하고 있지만, 구약의 성직도 하나님이 버리시면 버려졌지 성직이 성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본인의 충성이 성자를 만드는 것이다. 하물며 신약이겠는가?
영은 중생이 되어 불변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심신은 하루 70번씩 7번이라도 변동되는 것이고 이렇게 극심하게 변동되는 자신의 마음 속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죽는 날까지 충성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전력할 건설구원인 것이다. 섰다고 생각하면 넘어질까 조심하고 앞선 자가 뒤설 수가 있음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성직도 주어진 인간끼리의 직함 자체에 의의를 둘 것이 아니라 그 성직에 상관없이 그가 바로 충성하느냐 불충하느냐에 따라 의인과 죄인이 찰나에 교체되는 우리라는 것을 깨닫고 충성하도록 만들고, 불충을 피할 수 있는 길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은퇴제도를 반대하는 것은 70세 일괄적 은퇴를 반대하는 것이지 은퇴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며, 한번의 은퇴로 완전히 성직이 중단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지 반복적인 은퇴와 직분을 다시 맡는 것이 반복되어야 옳다는 것이다.
총공회의 2년 시무신임투표제를 예에서 보다시피, 70세가 아니라 목회 나간 처음부터 전진적 은퇴제도라 할 수 있는 시무신임여부를 전체 교인을 상대로 죽는 날까지 계속 받아야 한다. 첫 신임투표에서 교회가 거부하게 되면, 그러면 자기를 좋아서 찾을 수 있는 다른 교회, 아무래도 좀 형편이 어려운 교회로 내려가는 경우가 될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신임투표에서 거부된 사람이 다른 교회의 청빙을 받지 못하게 된다면, 그런 기간은 계속해서 은퇴한 상태와 동일하게 된다. 단, 다른 것이 이런 경우 또 다시 힘쓰고 노력해서 재 신임을 받거나 다른 교회에서 청빙을 받게 되면 다시 출발을 시키게 된다.
5.성직의 시무 신임 투표
1)총공회의 성직 신임제도
세상 사람이 비판을 한다면, 70세 은퇴가 시행되면 유리하게 되는 많은 젊은 사람들이 있어 70세 은퇴로 불리하게 되는 소수의 나이 많은 사람을 이기고 만든 법이라고 할 것이다. 진정 선의로 된 것이라면 다시 한번 되물어볼 제안이 있다. 직업적인 성직자들에게 매 2년 정도로 시무 신임투표를 실시하여 반대가 많으면 연령과 근무 연한에 상관없이 해직을 시킬 수가 있도록 하자고 제안을 한다면, 과연 그 뜻이 좋다고 찬성하겠는가? 반대로 이 제안을 교인들에게 제시한다면, 과연 반대할 사람들이 몇이나 있겠는가?
성직에 대한 총공회 기본 신앙노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전도하여 사람을 구원하는 일선직, 예를 들면 주일학교 교사나 구역장 등의 경우 원칙적으로 맨 손에서 시작하여 자신의 실력으로 전도 관리 유지토록 하고 있다. 일정 지역을 분할시켜 맡기는 형을 피하는 것이다. 따라서 실력이 없는 경우는 자연히 사람이 없음으로 특별한 조처 없이 그만 둘 수밖에 없다. 목회자의 경우나 장로직의 경우는 매 2년마다 시무의 신임투표를 실시한다. 이때 찬성의 기준은 75% 이상이어야 한다. 대단한 충성, 끊임없는 자기 개발이 없이는 계속 성직을 유지하기에는 대단히 어려운 기준이다.
또 한가지는 회계 등 살림을 맡는 일반 행정직에 준할 수 있는 직책인 경우는 매 1년을 임기로 하고 있다. 구원의 일선직이 아닌 경우는 세상 시각으로 "권세" 나 "권력"이 따르는 경우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집사와 같은 직은 안수집사로 평생 신분의 변화없는 직책을 주는 대신, 매년 신임을 확인할 수 있는 서리집사로 유지시킨다.
즉, 구원직은 본인의 충성에 따라 자연히 그 직이 유지 또는 중단되며 또한 그 결과에 따라 그 직의 권위가 자연스럽게 따르게 된다. 그러나 장로나 목사직은 원칙적으로 영구직이며 그 직책의 중요성이 전 교회에 미치기 때문에 매 2년 신임투표를 시행한다. 집사 등의 일반 살림 또는 행정직에 해당되는 경우는 매 1년 재신임을 확인하게 한다. 결국 충성하고 힘쓰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어려도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연령에 제한을 받지 않게 되고, 그 반대의 사람에게는 70세 은퇴가 되기 수십년 전에라도 은퇴와 같은 해직을 맞게 하는 것이다.
2)세부적인 몇가지 분석
①75%의 찬성으로 신임을 기준한다면
절반의 찬성으로 신임을 기준하는 것이 보통일 것이지만, 평범한 교인이라면 자기 목회자 또는 장로를 상대로 신임투표를 하게 되는 경우,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범한 심정에서는 공사로 냉정함을 유지하기 어렵다. 여러 형태의 친분관계, 또한 차마 반대를 표시로까지 하기 어려운 안면, 반대 표시를 하는 것을 옆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는 불안, 더구나 교회 내 반대표는 무의식적으로 죄책감을 느끼게 되어 막상 투표에서 반대를 표시하기는 쉽지 않다.
이런 여러 가지를 고려할 때, 표시된 25% 정도의 반대표가 있다면 이미 그 교회의 절반이상은 반대하고 있는 것이 실상이라고 계산하는 것이다. 즉 75% 찬성이 기준이라는 그 수치 자체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가장 현장적인 상태를 읽은 것이다.
②특히, 교역자에게는 너무 가혹하기 않은가
아무리 제한을 둔다해도 교역자의 강단 설교권은 남용 또는 오용이 되어 문제가 발생된다. 교역자의 위치는 스스로 아무리 겸손하게 내려앉아도 지나치게 그 높이는 높게 되어 있다. 더구나 주님을 따르겠다는 최소한의 출발의식이 존재한다면 전혀 문제가 될 성질이 아니라는 것이 총공회의 성직에 대한 기본 인식이다.
자녀 교육, 사택의 경제, 교역자 자신의 신분 등 어떤 면을 고려해도 "직장인" 이 아닌 "성직"이라면 어떤 제한 어떤 십자가도 달게 질 일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세상에서 가려놓고 모르던 것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환하게 들어날 것이고, 행한 대로 영원히 살아야 할 하늘나라를 생각한다면 오늘 잠깐의 세상에서 자신을 충성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는데 도움이 된다면 환영할 일이지 거부할 일이 아닐 것이다.
③장기적인 소신 목회에 문제가 있지 않은가
장기적인 소신 목회에 정말로 충실하다면 교인의 신임을 받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고, 장기적인 소신 목회를 앞세워 현실 안주를 원한다면 조기에 정리가 될 문제이다. 물론 개인적인 감정 등으로 성직을 반대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런 사람까지를 포함하여 교회가 사람을 고쳐 만드는 곳이라고 한다면 목회의 대상으로 그들을 상대할 일이니 거부할 일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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