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남선 전기 - 이 노선 초기 역사의 일부 (*자료가 많아서 다운에 시간 소요)
(죽지 못한 순교자 주남선 목사생애) 해와 같이 빛나리, p116~118.
(심군식, 교회교육연구회, 1990년 11월 15일 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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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남선 목사님이 신사참배 문제로 옥에 갇혔을 때 ? 관)
백영희 전도사가 종종 찾아왔다. 그는 상복을 입고 삿갓을 쓰고 다니며 지방 교회 성도들의 헌금을 얻어 식량을 구입하여 가져오곤 하였다.
백 전도사는 주 목사를 존경하는후배로서 주 목사의 가족을 가지 가족처럼 보살펴 주었다.
백영희 전도사는 1910년 7월 29일, 거창군 주상면 도평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였고 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신식학문을 배웠다.
16세에 일본에 들어가 공부를 하다가 4년 후 귀국하여 거창군 고전면 개명리에서 양조장을 시작했다. 양조장을 하면서 진한 누룩냄새를 맡으며 인생을 고민하였다.
마침 윤봉기 전도사가 길가는 것을 보고 집에 들어오게 하여 복음을 들었다. 윤봉기 전도사는 친절하게 기독교 교리를 가르쳐 주었다.
백영희는 입신하던 날부터 열심이었다. 믿게된 지 삼일이 되던 날, 양조장을 처리하였다. 그리고 십 칠일 후에 누룩 장사도 그만 두었다.
그는 모든 재산을 정리하여 구호기관과 복음기관에 기증하였고, 논 얼마만 남겨 두어 농사를 하여 생활하기로 하였다. 일년 후 세례를 받고 전도일에 나섰다. 무보수 전도사였다.
봉산 교회와 봉개교회와 개명교회를 맡아 복음을 전하였다. 그가 무보수 전도인이 되기까지 그의 신앙의 길잡이는 주 목사였다. 주목사의 신앙인격에 많은 감화를 받았고 특별 지도를 받았다.
백 전도사는 주 목사댁을 자기집 드나 들듯이 쫓아 다녔고 지극히 작은 일 하나까지 주 목사의 지시를 받았다. 신사참배 문제가 일어나자 주 목사는 지방 각 교회를 심방하여 신사참배 못하도록 가르쳤는데, 백 전도사에게도 여러 번 이 문제에 대하여 당부하였다.
“신사참배는 제 2계명과 제 1계명까지 범하는 것이니 결코 해서는 안됩니다.”
어느 날, 주 목사는 백 전도사를 만나 조용히 강변으로 나갔다. 간가에 앉은 주 목사는 백 전도사에게 신사참배 문제와 일제의 탄압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이날 받았던 주 목사의 교훈을 백 전도사는 가슴에 잘 새겼고, 그가 신사참배하지 않게 된 좋은 계기가 되었다. 주 목사 투옥 후, 백 전도사에게도 일본 고등계 형사들이 번질나게 찾아왔다. 그러나 끝까지 백 전도사는 반대하였다. 그가 끝까지 신사참배를 반대할 수 있었던 것은 주 목사의 교훈 때문이었다고 훗날에 말했다.
그는 약 5년 가까운 세월을 한결같이 주 목사 가족을 돌봐주었다. 자기 가족의 생계도 막연한 시대에 이웃을 위하여 사랑을 베푼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곤 할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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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와같이 빛나리
저자 서문
한상동 목사님의 권유로 주남선 목사님의 전기작업을 착수한 것이 1971년 9월의 일이었다. 일생을 산 순교자로, 순교 일념으로 사신 주 목사님의 생애를 정리하여 후대 사람들에게 기록으로 남겨 둔다는 것은 보람된 일이므로 기쁨으로 이 일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막상 시작하다 보니 대단한 작업이었다. 우선 연고자들을 찾아 만나는 일이 큰 부담이 되었다. 목회를 하는 사람으로 많은 시간을 내어 쏘다닌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뛰어 보았다. 자료 수집에 4년이 걸렸다. 그리고 이야기 배열에는 많은 참고 서적이 필요했다.
지역의 정확한 기록을 위하여 거창을 네 번이나 갔다. 그리고 합천, 함양의 여러 교회들을 다 순방하였다. 평양 형무소를 제외한 모든 곳을 다 둘러 보았다.
집필에 들어가면서 특별 기도 주간을 정하고 기도하였다. 할 수 있는 대로 주 목사님 외의 것을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일념으로 집필을 시작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꿈마다 주 목사님이 나타나시는 것이었다. 생전에 나는 주 목사님을 만난 적이 없다. 그런데 꿈마다 나타나시는 주 목사님은 나에게 그의 독특한 장점들을 다 보여 주셨다. 그의 옷을 입으신 모습이며, 걸음걸이, 사람을 대하는 부드러운 얼굴 모습, 그리고 그의 말 음색까지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심지어 그의 붓글 솜씨까지 다 보여 주셨다.
평양 형무소 일들을 집필할 때 였다. 나는 밤마다 평양 형무소에서 살았다. 형무소의 모든 광경을 선명하게 구경한 것이다. 하도 신기해서 나는 한상동 목사님을 찾아가 평양 형무소에 대하여 대화하였다. 한 목사님은 형무소의 구조를 잊고 있었다. 내가 꿈에 본 것을 이야기 할 때 기억이 살아나 세밀한 도움을 주었다.
집필이 중간 쯤 진행 되었을 때부터 한상동 목사님은 몹시도 초조감을 보이면서 출간을 기다리셨다. 그런데 결국 목사님 별세 후에야 완성이 되어 출간하니 마음이 무거워진다.
이 작업을 위해 주 목사님 자녀분들이 성심으로 뒷받침을 해 주셨다.
자녀들은 자신들의 가정 이야기가 공개되는 것을 계면쩍게 생각하였지만 주 목사님은 한 가정의 아버지이기 전에 한국 교계에 큰 비중을 지닌 분이시며, 그를 통하여 나타나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일은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기꺼이 출판이 되어졌다.
이제 책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이 어떻게 신앙으로 살았으며, 어떻게 살아 계신 하나님을 보여 주었는가를 잘 깨달아 그 신앙 산맥을 이어가기에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1979, 9.20
저자 심군식
머리말
고려 신학대학장 오병세 박사
외국 격언에 “담배와 사람의 좋고 나쁜 것은 연기가 피고난 다음에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사람이 죽으면 화장하는 나라에서 쓰는 격언인데, 담배가 타서 재가 되고 사람이 죽어 화장하여 재가 되고난 다음에 그 담배와 사람의 참된 가치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주남선 목사님이 별세한지 25년, 이제 기다리던 주 목사님의 전기가 나오게 됨을 늦게나마 다행으로 생각한다. 주 목사님은 “오직 믿음”(Sola fide)의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그에게서 믿음을 빼 놓으면 흠모할 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일관한 어른이었다.
필자가 주 목사님을 알게 된 것은 1946년 9월 고려신학교의 개교 때 부터이다. 주 목사님은 늘 한복을 입고 다니시는 것이 그 특색이었다. 검은 가운을 입으실 때도 양복을 입지 않으시고 한복 위에 가운을 입으셨다. 주 목사님은 부태가 나는 분은 아니고, 여윈 어른이었지만 악수하실 때 젊은 사람의 손이 아프도록 꼭 잡으셨다.
그 어른의 설교에는 많은 사투리가 섞여 나오고 웅변은 아니었으며, 부흥사도 아니었으나 그에게는 한 가지 특색이 있고, 강한 무기가 있었으니 곧 진실이었다. 그에게는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 등은 찾아 볼 수 없는 것 같았다. 그 어른에게 시원스럽다든지, 훤하다는 것은 없어도 그에게서 참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이 어른은 평화스럽고, 말씀은 조용히 하였으나 어려움이 올 때에는 강철같은 신앙의 소유자였다. 참 외유내강의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주 목사님은 자신을 나타낸다거나 이름이 드러나기를 바라는 선전효과와는 거리가 먼 분이었다. 너무나 자기 선전에 급급하는 이 시대에 주 목사님 같은 분이 사모가 된다. 그는 실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분이었다.
고려신학대학의 전신인 고려신학교의 두 분 설립자 중에 남은 한 분인 한상동 목사님이 별세하신 해에 주목사님의 전기가 나오게 된 것도 뜻이 있는 일이다. 그동안 고려신학대학 안에는 주남선 목사 기념관이 건립이 되어, 그의 신앙의 유산을 기념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 목회자요, 문인인 심군식 목사님의 역작을 통해서 주 목사님의 생애와 그 신앙의 열매를 자세히 알 기회를 갖게 되어 독자 여러분과 함께 기뻐한다.
이 책을 읽고 독자 여러분도 다같이 주남선 목사님의 신앙의 대열에 가담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드리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한다.
제1장
손가락 자르는 소년
1. 신안 주씨의 역사
주남선 목사.
그의 젊은 날의 이름은 주남고였다.
주남고는 1888년 9월 14일, 거창군 읍내면 동동 28번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신안 주씨 한학자 주희현씨와 최두경 여사와의 사이에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거창에는 주씨가 많지 못했다. 많은 성은 유, 신, 장씨이며, 김, 박, 이씨 성도 꽤 많았다.
그러나 주씨는 별로 없어서 씨족을 많이 찾는 지방에서 주씨는 외로운 처지였다.
주씨는 본관이 많지만 신안에서 갈라진 것으로 신안 주씨를 가장 정통으로 본다.
신안 주씨의 시조는 주 잠이었다. 그는 본래 중국 송나라 신안현 사람으로 위대한 성리학자 주 자의 증손이었다.
송나라가 외적의 침범을 받고 있는데도 권력자들은 당쟁만 일삼고 있으므로 울화가 치밀어 아들 여경을 데리고 고려로 망명하여 와서 나주 땅에서 살았다. 아들 여경은 고종 때, 은사지 벼슬에 올랐고, 여경의 아들 주 열은 문과에 급제하여 원종 때, 충청, 경상, 전라도의 안찰사로 나가 크게 공을 세웠다.
주 열은 문장이 좋고, 글씨가 뛰어났다. 그는 검소한 생활을 하므로써 왕의 신임을 받았으며 충렬 왕 때에는 1품 벼슬인 지도 검의 부사를 지냈다.
그가 죽고 그의 세 아들로 인하여 주씨가 웅천과 전주파로 갈라졌다가 구한말에 와서 주석면씨의 노력으로 본래의 신안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나주 주씨는 그 시조를 다르게 여기고 있으며 주 잠의 후예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2. 서북 경남의 중심지 거창
주목사가 태어난 거창은 경치좋고, 유서가 깊은 곳이었다.
소백산맥이 남서로 뻗은 능선을 타고 가야산, 덕곡산, 지리산 등의 이름있는 높은 산들이 거창을 둘러싸고 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거창은 삼국시대에는 거열이라 불렀다. 신라, 백제, 가야 삼국은 종종 이곳에서 충돌을 일으켰다.
신라 문무왕은 663년에 백제를 격파하고 이 주변에 거타주를 두어 다스리기도 하였으며, 경덕왕 16년에는 전국에 아홉 주를 두고 군과 현의 명칭을 고쳐 부르게 되었는데 그 때 이곳은 거창군이 되었다.
이조 태종 때에는 거제와 가소를 합하여 제창이라 부르다가 세종조에 거제는 고도로 돌아가고 거창현이 되었다.
그러다가 1914년 3월, 지방행정 구역을 변경함에 다라 안의 일부와 삼가 일부가 합하여져서 거창군이 되었다.
지금 이 곳은 농사가 잘되어 곡창을 이루고, 산지에는 사과과수원이 많고, 특수재배로서는 인삼, 송이버섯 등 특산물이 나와 주민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여주고 있다.
그러나 1888년대에는 밭 농사와 천수답에 생계를 맡기는 정도였기에 가뭄만 계속되면 흉년을 면하지 못하였다.
3. 민란과 흉년의 1888년
주남고 소년이 태어나던 1888년은 불안한 시대였다.
그 해 삼남지방에는 대 흉년이 들었고 관서 지방의 의주 일대는 큰 수해로 많은 인명을 잃었고 전국은 식량 부족으로 난관에 빠져 있었다.
흉년이 들자 곳곳에 화적떼들이 일어나 그 횡포가 심하였다. 국고는 바닥이 났고 흉년으로 화적떼가 횡행하여 도처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고종 황제는 8월 19일에 좌의정 김병시에게 유지를 내려 이 난국을 지혜롭게 타개해 주기를 바랬다.
서북 경남 거창에도 이 시대적인 격랑은 예외 일 수 없었다. 흉년에 먹을 것이란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농가에서 어린 남고는 엄마의 치맛자락에 감싸여 배가 고파 보채었다.
그런 가운데도 세월은 흘러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다. 식량이 없는 농가에서는 가을철에 주워 놓은 아주까리 잎사귀와 도토리 등으로 연명을 하여갔다.
겨울이 가고 봄이 왔으나 봄은 사람들을 더욱 허기지게 한다. 동네 아낙네들은 날이면 날마다 들과 산에서 살았다. 쑥을 캐고, 산나물을 뜯었다.
남고 어린이는 엄마의 저고리 등에 매달려 들로 산으로 다녔다. 철없는 어린 것은 배고픈 것도 잊은 듯 엄마의 등이 좋아 방긋방긋 웃음만 날리는 것이었다.
아가는 걸음마를 배우면서 송피죽과 도토리 묵으로 배를 채웠고, 파리한 모습으로나마 무럭무럭 잘 자랐다.
진달래, 철쭉이 피고지는 봄이 여러차례 지나갔다.
4. 아버지의 운명 앞에서
주남고 소년의 형제는 삼 형제였다. 위로 형이 있었고 아래로 동생이 있었다.
그런데 형 주남재는 이미 어린 나이에 백부 댁으로 입양되어 양자로 갔고 집에는 그와 동생 남수만이 부모님 슬하에 있는 셈이었다.
남고는 설상 장자의 위치에 있었다. 어린 남고 소년은 남달리 총명하였고 말 수가 적고 조용하였다. 희생 정신이 강한 그는 매사에 남이 하기 꺼려하는 일에 잘 나서곤 하였다. 자기가 해를 볼찌라도 남에게 해를 주지 않으려는 착한 마음은 그의 생활에 뚜렷이 나타났었다.
남달릴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고 형제간엔 우애가 깊은 소년이었다. 남고 소년은 여섯 살 때 서당에 들어 갔다. 아버지가 한학자였기에 교육열이 대단하였던 것이다.
무슨 일에나 열중하기를 잘하는 소년 남고는 공부에도 그러하였다. 종일 벽을 바라보고 글을 암송하는 날이 많았다.
아들의 글 읽는 모습을 바라보고 아버지는 혼자 말로,
“남고는 앞으로 반드시 한 자리 할꺼야.”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성공을 보지도 못한 채,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남고 소년이 15세 되던 해 였다. 아버지는 모진 병에 걸려 약 한첩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숨을 모우는 것이었다. 남고는 차마 아버지의 마지막 고통의 그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밖으로 뛰어나간 그는 부엌으로 달려가 식칼을 잡아 쥐었다. 아버지의 운명을 지켜보던 남고는 불현 듯 언젠가 이웃 어른들이 주고 받던 이야기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숨이 넘어가는 운명의 순간에 사람의 피를 마시면 다시 얼마간은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소년 남고는 그 말을 믿고 싶었다.
자식은 부모의 피를 받아 이 세상에 태어난다. 자식에게 피를 주어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그 부모가 숨을 모운다. 이 절박한 순간에 자식이 부모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부모를 위하는 일이라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여서라도 도우고 싶었다. 아버지를 살려야 한다고 생각한 남고는 칼을 쥐고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어머니가 놀란 눈으로 남고를 본 순간 만류할 사이도 없이 남고는 칼로 왼쪽 무명지 손가락을 싹둑 잘랐다.
붉은 피가 치솟는다. 그 피를 아버지의 입에 떨어뜨렸다.
진한 피가 한 입 고인다.
“아버지!”
남고는 목메인 소리로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는 의식을 잃은 채 한 입 고인 피를 꿀꺽 삼킨다. 계속 피는 입으로 흘러 들어간다. 아버지는 피를 계속하여 마셨다.
“아버지!”
부르는 남고를 아버지는 빤히 바라보며 무엇인가를 말을 할려고 하였다. 그러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계속 입을 우물거리드니 얼마 후 숨을 거두었다.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터졌다. 남고 소년은 아버지의 시체 위에 얼굴을 묻고 소리 내어 우는 것이었다.
“아버지! 우리를 두고 어디로 가십니까? 우리는 어떻게 살라고 버리고 가십니까?”
참았던 슬픔이 강물처럼 넘쳐 흘렀다. 울고 또 울었다.
남고 소년의 이 효성어린 아름다운 이야기는 거창 온 마을에 널리 널리 퍼졌다.
훗날 남고 소년이 거창 군수에게서 효자상을 받게 된다.
5. 어머니를 위하여
남고 소년은 편모 슬하에서 네 살 아래인 동생 남수와 그렇게 자랐다. 부지런하고 착실한 남고는 어머니를 도우며 집안 일을 잘 돌보았다.
어느 해 겨울, 어머니는 몹시 중한 병에 걸려 기침을 심하게 하며 자리에 몸져 누워 일어나지를 못했다. 그러나 가난한 살림이라 끼니조차 이어가기 어려운 처지였기에 약 한 첩 제대로 쓰지 못하였다.
어머니의 병은 점점 악화되어 갔다. 목에는 담이 끓고, 신열이 많이 나면서 기침이 나는 것이다. 남고는 밤마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어머니 머리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어머니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느끼며 밤을 지새웠다.
날이 발자 남고는 이웃 노인을 찾아갔다.
“할아버지! 담이 끓는 데는 무슨 약이 좋심껴?”
노인은 측은한 생각으로 남고를 바라보고는,
“모친이 많이 편찮으시다면서.... 그래 기침을 많이하냐?”
“예, 신열이 나면서 담이 끓고 기침을 많이 합니더, 너무 심합니더”
“담이 끓고 기침하는데는 엄나무가 제일인데....”
“엄나무가 예?”
“그래, 엄나무 껍질을 벗겨 다려먹으면 나을 거야.”
“감사합니더.”
남고는 집으로 돌아와 망태기에 낫을 챙겨 넣어 어깨에 메었다.
산을 향하여 걸음을 재촉하는 것이다. 엄나무 껍질을 벗기려가는 것이다. 엄나무란 오갈피 나무과에 딸린 낙엽고목으로 전나무 소나무처럼 줄기가 굳고 굵으며, 높이 자라는 나무이다. 재목은 집안 살림에 쓰는 모든 가구를 만드는데 쓰이고, 껍질은 한약 재료에 많이 쓰이는 것이다.
남고는 이 엄나무를 구하기 위하여 덕유산 깊은 골짜기로 들어갔다.
계곡을 가로질러 능선에 올라서다가 나무를 발견하였다.
망태기를 내려 놓고 낫을 들어 껍질을 벗겼다. 어머니의 병을 고친다는 일념에서 열심히 껍질을 벗겼다.
가을 햇살이 따갑게 쏟아진다. 이마에 구슬땀이 솟는다. 눈앞이 어지러워지면서 팔에 기운이 빠진다. 찬밥 한 덩이 제대로 먹지 못하는 몸이기에, 일이 지나치면 이렇게 현기증이 나는 것이다.
남고는 눈을 감고 얼마를 멍하게 앉아 있었다. 다시 맑은 정신이 돌아오기까지는 긴 시간이 흘렀다.
계곡 쪽에서 산 꿩이 운다.
남고는 다시 손에 힘을 주어 낫을 움직였다. 오후 늦게야 한 망태 캐어 산을 내려왔다. 종일을 굶었지만 배고픈 줄을 몰랐다.
어둠이 짙게 깔린 길을 밟고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왔다. 부엌에 들어가 솥을 씻고 엄나무 껍질을 부었다. 물을 붓고 아궁이에 불을 댕겼다.
밤을 지새우며 약을 다리는 것이다.
잠시도 부엌을 떠나지 않고 불을 지폈다. 닭이 홰를 치며 울 때에야 약을 떠내어 방으로 들어갔다.
약 사발을 어머니 머리곁에 놓고 무릎을 꿇고 앉으면서 남고는,
“어머니, 약 드이소!”
나직이 말을 한다.
남고 소년의 두 눈엔 눈물이 빙그르르 돈다. 가물거리는 호롱불 밑에 뼈만 앙상한 어머니가 주검처럼 묵묵히 누워 있었다.
“어머니! 약을 다려 왔심더!”
힘주어 말하는 남고 소년의 두 번째 목소리에 어머니가 멍히 눈을 뜬다.
“일으켜 드릴까예?”
남고 소년은 몸을 굽혀 어머니를 부축하려 한다.
“약이 어디서?”
“제가 산에가서 캐와서 고운 것 아닙니껴, 엄나무 껍질입니더. 가래 기침에는 제일 좋은 약이라 캅니더!”
어머니는 남고 소년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일어나 꿀꺽꿀꺽 약을 마셨다.
“빨리 일어나셔야지예.”
“그럼예, 오래 오래 사셔야지예.”
남고 소년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 방울이 방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엄나무 약을 먹은 이후 어머니의 병세는 차도가 있었다. 밖에 나와 움직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완전히 건강한 몸으로 회복되지는 못하였다.
낮에는 밖에 나가 일을 하시며, 별로 아픈 표를 내지 않았지만 밤만되면 고통을 심하게 당하는 형편이었다. 남고 소년은 계속 엄나무 껍질을 벗겨와서 삶은 물로 단술을 만들어 어머니께 드리기도 하였다. 어머니의 병은 점차로 나아 건강이 회복되었다.
제2장
장터에서 얻은 복음
1. 복음을 받고
거창은 군수가 정사를 다스리고 있었지만 그 무렵 군수는 부사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부사는 종 삼품관으로 지방행정 전체를 도맡아 사법 행정까지 손을 댔다.
이 부사 제도는 1895년까지 있다가 없어졌지만 그 후 얼마동안 군수가 부사의 세력으로 행정을 시행하고 있었다.
주남고는 한학자의 집안에서 자랐고 어려서부터 한학에 능하였기 때문에 19세에 벌써 등용되어 군수 밑에서 일을 보게 되었다.
거창 군수가 나들이를 할 때 주남고는 군수를 모시고 다니며 안내역을 하였고, 관청 안에서는 특별 비서역할을 하였다.
주남고 청년은 진실하고 얌전하며 성실하였기 때문에 군수의 총애를 받았다.
관청 안에서 주남고는 부러움의 댓아임 되었고, 거창 사람들은 주남고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주남고에게 특별히 친한 사람 두 분이 있었다. 그들은 오 형선과 조재룡이었다. 그들은 연령적으로는 차가 있었지만 우연히 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 우연이란 것이 묘한 우연으로 복음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온 것은 1866년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로부터 44년 후인 1908년에 거창에도 복음의 씨앗이 떨어진 것이었다.
어느 거창 장날의 일이었다.
지방을 다니며 전도하는 분이 있어 장날 사람들이 많이 모인 것을 기회로 전도강연을 하였다. 전도인은 사과궤짝을 엎어 놓고 그 위에 서서 무성영화 변사식을 전도강연을 하는 것이었다.
이 전도강연을 유독 흥미있게 듣는 분이 셋 있었는데 바로 주남고, 오형선, 조재룡 등이었다.
오 형선은 황해도 사람으로 한학을 많이 하였지만 서울에서 신학문도 익힌 사람으로 서울서 기독청년 회관에 출입을 하면서 기독교를 조금은 알고 있었다.
그는 금광을 하기 위하여 거창에 내려왔고 거창군 남하면 양향리에 금광을 개업하였다.
또한 조재룡은 지방의 장터를 찾아다니며 담뱃대를 파는 사람이었다. 그는 안의에 가서 조정섭씨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에 대하여 알고 있었다.
거창 장날이 되면 꼭꼭 찾아와 전도강연을 하는 전도인에게 세 사람은 모두 호감을 가졌다.
어느 장날, 주남고가 오형선과 조재룡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우리 저 전도인을 한 번 만나서 좀 물어 봅시다.”
그랬더니 두 사람 모두 좋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셋은 조용한 장소에서 그 전도인을 만났다
주남고가 말했다.
“선생님 예수를 믿으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를 믿으면 죄 없이함이 되고,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죽으면 천당가게 되지요?”
조재룡이 입을 열었다.
“예수를 잘 믿을려고 하면 어떻게 하여 됩니까?”
“담배도 끊고, 술도 끊고 찬송을 배워야 합니다.”
이 때, 조재룡의 얼굴에 어둠이 지나갔다.
그는 담뱃대 장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담배를 안 끊고는 안됩니까?”
조재룡이 다시 입을 열었다.
“처음은 힘이 들겠지만 점차적으로 끊어야 되지요.”
“찬송을 좀 가르쳐 주시오.”
주남고는 전도인에게 매달렸다.
찬송가를 몇 개 배우게 되었다. 오형선과 조재룡은 제법 잘 불렀는데 주남고는 찬송가가 잘 되지 않았다.
주남고는 예수를 잘 믿어보고 싶었다. 시간만 나면 오형선과 조재룡을 찾아 갔다.
오형선은 금광 직원들에게 복음은 전하였는데 직원 중 박창호가 받게 되었다.
1909년 5월.
금광 사무실에서 주남고, 오형선, 조재룡, 박창호 등이 모여 찬송을 불렀다.
찬송을 부르다가 조재룡이
“담배 한 대 피우고 부르자.”
하고 말했다.
모두들 담뱃대를 허리춤에서 뽑아내어 담배를 쟀다.
불을 붙이고 담뱃대를 빨면서 서로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오형선은 술이 보통이 아니었다. 한 말을 지고는 못가지만 마시고는 끄덕없이 다니는 위인이었다.
“목이 컬컬한데 한 잔 마시자.”
그들은 찬송을 부르다가 술을 마셨다.
그런식으로 얼마를 지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래도 예수를 잘 믿으려고 하면 이런 식으로 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였다.
주남고가 먼저 제의를 하였다.
“예수를 믿을려고 하면 잘 믿어야지, 이런식으로 해서 되겠습니까? 담배와 술을 끊도록 합시다. 그리고 우리가 돈을 모아 집을 하나 사서 주일마다 모이도록 합시다.”
모두 그게 좋겠다고 응하였다. 그리하여 우선 금광 사무실에서 주일마다 보여 예배하고 뒤에 돈이 마련되면 집을 사서 별도로 모이도록 의견을 모았다.
어느 주일의 일이었다. 웅양교회 안덕보란 분이 금광 사무소로 찾아왔다. 그는 웅양교회의 집사였다.
거창 금광 사무실에서 주일마다 예배를 본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것이다. 안 덕보는 오형선과 전부터 안면이 있는 처지였다. 안덕보 집사는 예배를 인도하고 생각이 나서 건축연보를 하자고 제의하였다. 모두 찬성하고 연보하는 일에 힘을 합하였더니 25원의 연보가 거두어졌다.
2. 거창읍 교회의 시작
25원의 돈으로 죽전에 있는 초가삼간을 한 채 살 수 있었다.
이 집에서 주일이면 모여 예배를 드리게 도니 것인데 이것이 거창읍 교회의 모체가 된 것이다.
그 후 호주 선교사 맹호은, 길아각 목사 등이 거창에 와서 교회를 지도하며 전도를 하였다.
안개속처럼 흐릿했던 신앙의 세계가 서서히 선명하게 되어졌다. 주남고는 선명한 신앙세계가 보여지자 열심을 내었고 드디어 가창 군수의 비서관직을 그만 두었다. 그는 자유업으로 신앙생활에 주력하고 싶었던 것이다. 낮에는 잠업 실습소에 나갔고 밤이면 교회당에서 기도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가정을 도우는 일도 중요하고 농촌을 부강하게 하는 일도 소중하지만 교회를 부흥케 하는 일은 더욱 중요했던 것이다.
주남고 청년의 가슴에는 복음에 대한 불씨가 솟고 있었다.
새로 개척된 거창교회를 더욱 발전시키고 큰 교회로 확장시키고 싶은 마음이 주남고 청년의 가슴을 눌렀다.
주일이면 거리에 나가 아이들이고 어른들이고 가림없이 교회당으로 인도하였다.
열심히 찬송을 가르치고 성경을 가르쳤다.
그러나 찬송만은 여전히 잘 되지 않고 힘이 들었다. 하도 힘들게 찬송을 가르치며 땀을 흘리고 있기에 뒤에서 이 모습을 본 어떤 노인이,
“그만하고 와서 담배나 한 대 피우고 하게!”
측은한 듯 말을 던졌다.
장내가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때는 이미 주남고 청년은 담배도 술도 깨끗이 끊은 다음이었던 것이었다.
거창읍 교회는 이렇게 발전되어 갔고 믿는 사람의 수가 날로 더하여 갔다.
3. 첫 기도 응답의 체험
1911년 9월. 주남고는 잠업 실습소를 수료하게 되었다. 수료식 날, 주 남고는 전 학생 중 모범생으로 상을 받게 되었다. 매사에 적극성을 지닌 그는 변함없는 열심히 교회를 섬겼다.
그해 12월에는 맹호은 선교사에게서 학습을 받았고, 다음 해인 1912년 6월에 세례를 받았다.
그는 세례를 받고 진주로 내려가 잡업 강습소에 들려 다시 잠업 강습을 받았다.
가난한 농촌과 교회를 부강하게 하는 길이 이 특수기술 노동으로만 가능한 줄 안 까닭에 이 일에 힘쓴 것이다.
그 해 9월, 만 3개월의 강습을 받고 거창으로 돌아온 주남고는 본격적인 양잠을 시작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누에를 기르면서 동민들에게도 사육법을 가르쳤다. 그리하여 그는 어엿한 누에사육의 지도자가 된 것이다.
누에의 품종은 그 수가 많았으나 그 특성은 비슷하였다. 누에는 습기에 약하며, 사람의 손을 많이 필요로 했다.
남고 청년은 많은 누에를 사육하였다. 누에가 뽕잎을 먹고 토실토실 살이 올라 한 방 가득히 자라고 있었다. 앉을 자리마저 빼앗긴 그는 그래도 누에가 자라고 있는 것에만 마음이 흥겨웠고 대견스러웠다.
비가 내리는 것이었다. 가을 비가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종일을 비가 내렸다.
비는 며칠을 계속 내리기 때문에 마른 뽕잎을 줄 수 없게 되었다. 누에는 배가 고파 야단이었다. 뽕잎 줄기까지 누에는 파먹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축축한 뽕잎을 줄 수 밖에 없었다. 물뽕잎을 먹은 우에는 머리를 축 내리며 그만 시들어갔다. 푸른 똥을 싸며 맥을 잃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전멸 될 수 밖에 없다.
친구들이 와서 보고는 조롱의 말을 던지고 갔다.
“기술자도 별 수 없군.”
그는 가슴이 답답하였다. 일손을 멈추고 멍이 시들어진 누에들의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눈 앞이 캄캄해지며 어지러웠다.
그는 다른 방으로 갔다.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향하여 외쳤다.
“사랑하는 주님, 이 일을 어쩌면 좋습니까? 살려 주옵소서!.....”
그의 기도는 애절하였다.
구슬땀이 이마에 송알송알 맺혔다. 땀방울이 주르르 볼을 타고 흐른다. 뜨거운 물도 땀방울과 함께 어울려 흘러 내리는 것이었다.
그는 주 예수를 믿은 이후 처음으로 간절한 기도를 올린 것이다. 몇 시간이고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 부르짖었다.
그가 누에 때문에 골방에 앉아 기도한다는 소문은 마을에 번졌고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비웃고 있었다.
“어리석은 일이야, 누에가 다 죽어가는데 기도를 하다니......”
“글세 말이야, 기도를 하면 죽은 누에가 살아날까? 참 내.....”
그러나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믿음의 기도를 올리는 것이다.
“주께서는 구하여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주의 이름으로 구하면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습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의 가슴이 밝아 오는 듯 하여싸.
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평안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불안하고 답답하던 마음이 후련해 지면서 기쁨이 찾아왔다. 그는 기도를 마치고 누에게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그렇게 머리를 떨어뜨리고만 있던 누에들이 머리를 힘있게 들고 열심으로 뽕잎을 먹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기적이었다. 그는 주 예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 주신 것을 확실히 믿었다.
누에가 다시 생기를 얻어 살아났다는 그 자체보다 자신의 미미한 존재를 하나님께서 알아주시고 자신의 존재성을 인정해 주셨다는 그 사실 앞에 감격의 눈물을 쏟은 것이다.
누에가 좋은 성적으로 결실을 얻었다. 계속된 비 때문에 모든 누에가 다 전멸되었으나 유독 남고 청년만이 좋은 결실을 얻었으므로 그 성적은 상부에까지 보고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 해 총독의 상장까지 받게 된 것이었다.
이 사건 이후, 그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특별 기도를 올렸고 응답을 받아온 것이었다. 이 누에 사육은 훗날 그의 목회 생활에도 산 체험을 준 사건이 되어졌다.
4. 신앙의 오름 길에서
1914년 주 남고는 집사가 되었다.
거창읍 교회에서 집사 임명은 이해에 처음으로 했다.
이때 같이 집사 임명을 받은 사람은 황보기, 최봉성, 이평군 등이었다.
그 해 4월 16일, 죽전 맹호은 선교사 댁에서 제1회 제직회를 모이게 되었다.
교회가 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고 교인들도 많아졌다. 주남고 집사는 가사를 돌보면서 밤이면 성경 읽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고 교회 봉사에 더욱 열을 내었다.
그해 5월 10일. 주남고 집사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
신부는 합천 가야사람, 남병현씨의 둘째 딸 남술남 규수였다. 남병현씨는 일찍이 복음을 받아 예수님을 잘 믿고 있었다. 그러기에는 딸을 믿는 총각외엔 결코 결혼시키지 않겠다는 주장을 해 왔다. 그런 중 거창읍 교회에 좋은 총각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중매를 넣은 것이다.
총각의 나이가 열 살이나 위였다. 허나 예수 잘 믿는 총각이란 이유에서 남병현씨는 주저하지 않고 딸을 주기로 약속하였다.
당시 남병현씨는 한학자였고 살림도 넉넉하였다. 결혼식은 시골에서 보기드물게 신식으로 교회당에서 거행하였다. 흰빛 사과 꽃이 활짝 핀 고갯마루를 꽃가마가 넘어올 때 온 거창읍 교회 성도들과 마을 사람들은 신랑 신부에게 축복을 빌었다.
신혼 생활이 계속되면서도 주 집사의 신앙은 변함이 없었다.
그해 3월. 주 집사는 진주로 갔다. 성경을 체계적으로 배우기 위하여 경남 성경학원을 찾아간 것이다. 그의 가슴에 주 예수님으로 열이 올라 있었다.
29세 청년의 가슴은 복음을 전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불타고 있었다.
성경은 배우면 배울수록 확신을 주었다. 먼저 자신이 은혜를 받아야 남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
주남고 집사는 열심으로 성경을 공부하였다. 드디어 1919년 경남 성경학원을 졸업하게 되었다.
그해 2월 28일. 본 교회에서 장로장립을 받았다. 장립을 받은 주 장로는 더욱 부지런히 교회 일에 전념하였다.
제3장
선동자 삼형제
1. 독립운동의 배경
1910년 8월 29일. 한·일 합병 조약문이 공포됨으로써 대한 제국은 조선으로 개칭되었으며, 일본 통감부는 총독부로 바뀌면서 조선통치의 기본 방침을 무단 정치로 나타내게 되었다.
총독부는 공무원들의 복장을 통일시켰다. 경찰관과 모든 공무원들에게 금테두른 모자를 쓰게하고 군복 비슷한 복장을 하므로써 조선 사람들을 억압하게 되었다.
헌병 사령관이 경찰을 총지휘하게 되니 이는 헌병경찰이었다. 그들은 무례한 자들로 구성되었고, 조선 사람을 짓누르는 것을 의무로 생각하고 있었다.
일본의 이 악랄한 정치에 반대하여 곳곳에서 애국지사들이 힘을 모우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 일에 앞장서는 사람들이 기독교 신자들이었다.
일본인들은 기독신자들을 두려워하였다. 그 이유는 기독신자들 뒤에는 미국과 영국인들 선교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한 음모를 생각해 냈는데 이것이 데라우지 총독 암살음모 사건이었다.
1911년 12월 28일. 서울과 의주 사이를 연결하는 경의선 철로 개통식이 있을 예정이었다.
이날 총독이 참석하게 되는데 신민학회와 배일 사상의 중요 인물들이 총독을 암살하기로 음모한 것이 사전에 발각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터무니 없는 거짓이었다. 신민회의 창설자는 도산 안창호 선생으로 애국사상이 투철한 사람을 엄밀히 택하여 조직하였다.
그들의 목적은 장차 독립운동의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교육기관을 세우고 정치, 문화, 경제 등 각 방면의 진흥운동을 전개하는 일이었다.
민족운동은 제 2세들의 손에 의하여 추진되어야 한다고 먼 미래를 바라보는 그들이 무모한 짓을 할 리가 없었다. 총독암살 음모사건은 순전히 일본인이 꾸며낸 허위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허위 음모를 한국인들에게 덮어 씌운 신민회 간부들과 기독교 중요 지도자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이 해 9월, 전국에서 지식층과 기독교 지도자 600여명을 검거 투옥시켰다. 그들은 죄없는 이들 한국 지도층의 사람들을 혹독한 고문으로 괴롭히며 치사자까지 내었다.
1912년 6월에 그들 중 105인을 경성지방 법원의 공판에 넘겼으며 9월에는 전원 유죄판결을 내려 5년 내지 10년의 징역형을 내린 것이다.
평화로운 한국에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모진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을 무렵, 한국의 평화를 도와 주어야 할 구라파에서는 전쟁이 터지고 있었던 것이다.
1914년 7월 28일. 새벽 세계 제1차대전이 발칸 반도에서 터졌다.
전쟁은 비참한 것이었다. 미국 대통령(T.W. Wilson)은 1918년 1월, 세계 열강에 14개 조항의 원칙을 제시하였다.
특히 세계 약소민족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이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이었다. 세계 1차 전쟁은 그 해 11월에 월슨 대통령의 알선으로 휴전 조약을 체결하므로써 끝이 났다.
이 세계적인움직임에 돛을 올리고 자주독립을 찾기 위해 1919년 3월 1일, 역사적인 독립만세가 이 땅에 메아리치게 되었다.
독립 만세는 교회가 먼저 부르게 되었다. 3·1운동을 처음 계획하였던 민족대표 중 대부분이 기독교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은 거의 지방 출신이었기 때문에 지방 교회가 앞설 수밖에 없었다.
평양 남산현 교회와 장대현 교회에서는 서울보다 한 시간 앞선, 1919년 3월 1일 오후 한 시에 독립 선언식을 거행하고, 만세를 부름으로써 이 나라 제일 첫 번째 독립 만세 사건이 되었다.
서울은 오후 두시에, 이리하여 독립 만세의 함성은 삼천리 방방곡곡에 메아리쳤다.
2. 거창 지방의 독립운동
독립만세운동은 각 지방 도, 군, 읍, 면, 리, 동으로 파급되었다.
도별에 따라서 날짜가 달랐다. 남부 지방의 전라도와 경상도는 3일 이후에 시작되었다.
경상남도는 3월 3일에서 4월 29일까지 계속되었는데 이것은 전국에서 가장 오랜 시일동안 운동이 계속된 것이다.
3월 3일은 부산과 마산에서 독립선언서를 배부하는 정도였고, 11일에 부산진 광장에서 만세시위가 시행되었다.
12일부터 각 지방으로 만세운동은 번져 갔는데, 합천이 18일, 거창과 산천은 20일에 거사가 시작되었다.
거창군 가조면 양기리 시장에서 독립만세 사건이 터져 4명이 순국하고 나머지 분들이 투옥되었다. 거창읍에서도 독립운동 사건은 교회가 주동이 되었으며, 주남고 장로 형제분들이 선동이 되었다.
남고 장로의 백씨 남재씨는 민족주의자로서 성경이 강직하고 정치에 밝았다.
그의 제씨 남수씨도 투철한 애국청년으로 뒤에 거창 의용군으로 뽑혀 만주에 가서 독립운동하다가 순국하였다.
남고 자올 삼형제는 이때 뜻을 합하였고 교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선동하였다.
거창교회 오형선 장로와 고운서씨를 거창, 합천 지방의 조직 책임자로 맡기고 교회 청년들을 선봉으로 주민들을 일깨워 독립정신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하여 3월 20일경 거창은 지역적으로 독립만세를 부르게 되었다.
3. 평양 신학교에 입학
주남고 장로는 복음 전도에 대한 열심이 가슴을 태웠다.
“신학교에 가자!”
그는 새벽기도를 마치고 돌아 올 때마다 더욱 간절하게 자신을 향하여 다짐하였고 기도 할 때마다 이 문제를 앞세웠다.
복음을 전하다가 죽고 싶었다. 그리하여 그는 신학교에 입학할 준비를 하였다. 먼저 전도사 시취를 받기로 하였다. 신학교에 입학 하려면 전도사 시취에 합격해야하기 때문이다.
1921년 3월. 마산 문창교회에서 모이는 경남노회에 참석하여 전도사 시취에 응시하였다. 그 날 함께 전도사 시취를 받은 사람 중에는 주기철 전도사도 있었다.
그 해 일곱 사람이 전도사 시취에 합격을 하였다.
주남고 전도사는 울렁이는 가슴을 안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평양으로 올라 갈 준비를 서두르는 것이다. 평양 신학교, 말만 듣던 평양 신학교에 가게 되는 것이다. 평양 신학교는 미국 북장로교의 선교사들이 교육을 담당한 보수주의 신학교였다. 한국에 이러한 신학교가 설립된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신학교 교장은 나부열 박사였다.
주남고 전도사는 평양으로 올라갔다.
시험은 힘들지 않았다.
그는 이미 대구 형무소에 있을 때, 신구약 성경을 암송해 두었기 때문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33세의 중 늙은 학생으로 입학이 되었다. 주기철 전도사도 함께 입학이 되었는데 그는 24세의 청년이었다.
둘은 전도사 시취때부터 알게 되었으므로 신학교에서는 친숙하였다. 같은 영남 사람이요, 성이 같다는 이유에서 더욱 친근하였는지 모른다.
신학 공부는 보람이 있었다. 히브리어와 헬라어의 색다른 어학 때문에 고충은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익숙되어 갔고, 재미가 있었다.
학기 시험을 치고나니 곧 방학이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무사히 한 학기를 마치게 된 것이다. 짐을 꾸리고 기숙사를 떠날려하니 아쉬움에 코가 찡하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열심으로 가사를 돌보며, 전도를 하며 교회를 봉사하였다.
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되었지만 등교하지 못하였다. 경제적 사정 때문이었다.
그 해 10월, 교역자로 시무하던 오형선 장로가 사임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교회 당회와 제직회에서는 주남고 전도사를 시무토록 하자고 결정하였다.
주남고 전도사는 모교회 전도사로 일보게 되었다.
4. 군정서 의용병 모집과 군자금 모금운동 사건
나라없는 민족은 서러웠고, 힘이 없는 백성은 슬펐다. 잃어버린 나라를 다시 찾으려는 간절한 소망은 2천만 민족의 염원이요, 주남고 장로의 애절한 소원이었다.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은 지하조직을 통하여 우리나라 각 지방에까지 연락이 미쳤다. 지리산은 서북 경남 독립운동의 중심이기도 하였다.
만주 군정서에서 독립군의 의용병 모집과 군자금 모금 운동이 비밀리에 시행되고 있었다. 만주 군정서는 상해 임시정부 소속기관이다.
한국에서 만주로 이주해 간 우리 민족들이 그 수가 많아짐에 따라 부민단이란 조직을 가졌다.
이것은 흉년으로 인하여 자금이 결핍되고 원주민들과도 알력이 있으므로 한 민족의 정신적 단결과 상호 협조를 위하여 조직된 단체이다.
1919년 3·1운동 이후, 부민단은 한족회로 발족되었다가 임시군정부가 되어 임시정부 소속 군정서가 된 것이다.
군정서에서는 비밀조직을 통하여 국내에 의용병과 군자금을 모집하게 되었다. 이 일은 성공리에 진행되어 거창 지방에까지 손이 닿게 되었다. 1922년 8월 이 일에 주남고 전도사가 책임을 맡아 거창지방 책임자로 비밀리에 모집운동을 시행하였다.
주남고 전도사 제씨 주남수씨는 독립군의 의용병에 지원하였다. 남고 전도사는 오형선 장로, 고운서 전도사, 김태연씨 등과 상의하여 모금운동에 나섰다.
나라를 위하여는 어떠한 고난도 달게 받겠다는 굳은 결의로 동지들은 먹는 것, 잠자는 것을 잊고 뛰었다.
그러나 이 일은 어느 정도 성사 될 무렵, 민활한 일본 고등계 형사진에 의하여 단서가 잡혔고, 주동자 전원이 검거된 것이다.
검거되어 대구 형무소까지 넘어간 애국 지사들은 다음과 같았다. 주남고, 이덕생, 김태연, 고운서, 이사술, 이성두, 백기주, 이태홍, 진도출, 주남수, 정장현, 이갑수, 오형선, 한성진 등 14명이었다.
그들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포승에 묶여 처참하게 경찰서로 끌려갔다.
거창 경찰서에서 조서가 꾸며지는 동안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경찰서 별실 시멘트 바닥은 이들 애국열사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몇 번이나 많은 물로 시멘트 바닥을 씻어 내어야 했다.
5. 옥고 2년
조서가 다 꾸며지자 가족들에게 연락도 하지 않은 채, 전원을 의성 경찰서로 압송하였다.
의성 경찰서에서의 고문은 더욱 혹독하였다. 손가락 사이에 나무토막을 넣고 누르고, 손등을 구둣발로 짓뭉갰다. 이 고문 이후, 주남고 전도사는 장지뼈가 부러져 휘청했고 출감 후에도 계속 글을 잘못썼다 한다.
주남고 전도사의 글씨는 명필이었다. 허나 고문 후 장지가 휘어져 글씨가 엉망이 되었고, 설교 원고를 쓸 때마다 한참씩 장지를 만지곤 했다 한다.
또한 일경은 머리에도 심한 타격을 주었다. 의성 경찰서에서의 고문은 다른 곳에서 받은 고문의 몇 갑절 더했다. 머리를 너무 많이 때렸기 때문에 정신이 얼얼하고 멍청하게 되었다. 그들이 머리를 혹독히 때린 이유는 정신 이상이 되라고 한 처사이다. 정신이상자가 되면 독립운동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때 받은 고문으로 출옥 후에도 주남고 전도사는 종종 머리가 띵하게 아파온다고 말씀하시며 한참씩 눈을 감고 멍하니 앉아 있곤 하였다.
의성 경찰서에서 미결수로 대구 형무소에 넘어갔다.
대구 형무소에서도 고문은 계속되었다. 대구 형무소에서 1년을 미결로 있는 동안 심한 고문을 당했다. 인간으로써 차마 견딜 수 없는 혹독한 나날을 보냈다.
고문의 형태는 차마 이루 다 글로 쓸 수 없지만 그 주 한 방법은 엄지 손가락 두 개를 질긴 노끈으로 한데 묶어 대들보에 매어다는 것이었다. 무거운 몸이 손가락 두 개의 힘으로 공중에 매달려 견디어 내기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손가락이 끊어지는 아픔과 고통은 표현하기 어렵다.
밤이면 물을 먹이고 싸늘한 시멘트 바닥에 앉혀 팔을 뒤로해서 다리에 얽어 묶어 놓고는 전신에 고통을 주기도 하였다. 이 극악한 형벌을 어찌 사람이 사람에게 줄 수 있단 말인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런 극악한 고문을 감행한 것인가?
사람으로 당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일본 경찰들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들은 한국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기 위하여 나타난 악마의 화신이었다.
주남고 전도사, 그는 이 고통의 세월 속에서도 기도와 성경 읽는 일에만 힘썼다. 대구 형무소 1년의 세월 속에 신구약 성경을 거의 암송하였다 한다.
1921년 3월 4일. 재판에서 징역 1년의 선고를 받았다.
그는 진주 형무소로 압송되었다. 포승에 묶여 진주 땅으로 들어설 때, 감개가 무량하였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성경학원을 찾아오던 6년전의 일이 생각났다.
가난하고 불쌍한 이 백성, 특히 조상 대대로 미신과 우상숭배에 사로잡혀 죽음처럼 살아가는 이 민족에게 참 삶의 길인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성경학원을 찾아 왔었다.
그러나 6년이 지난 지금, 아무런 죄가 없으면서도 몸은 포승에 묶여 감옥에서 감옥으로 압송되어 가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적셨다.
자동차에서 내려 형무소로 들어 갈 때. 핏기 없는 시민의 얼굴들이 연민의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피골이 앙상한 처참한 주남고 장로의 모습.
1년 동안 경찰서와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겪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잠도 못잤다.
햇빛을 보지 못한 파리한 그의 모습은 해골에 거죽만 씌운 것 같았다. 목숨만 붙은 송장같은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들마다 동정어린 눈길을 주었다.
진주 형무소의 실팍한 철문이 열리고 간수의 인도를 따라 주 남고 장로는 안으로 들어갔다. 어둡고 침울한 감방,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정해진 감방에 들어서자 둔한 금속성 소리를 내며 쇠문이 닫혔다. 형무소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주남고 전도사. 그는 원망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만 맡기고 사는 그에겐 원망이 없었다. 아무리 심한 고문을 하여도 입을 열 줄 모르는 무거운 사람이었다.
그의 신본주의의 철저한 신앙, 애국 애족의 강인한 사상은 어떤 고문이나 형벌로도 꺽을 수 없었다.
그 어둡고 침울한 감옥안에서도 그는 기도와 성경암송으로 하나님과 가까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뜨거운 여름의 열풍도 믿음으로 견디어 내었다.
가을이 오고, 가을이 갔다.
가을이 가고 추위를 몰고 겨울이 찾아온 것이다.
감옥의 겨울은 춥다. 난방 장치가 있을 리 없고, 따뜻한 침구가 있을 리 없다. 오돌오돌 떨면서 이 추위와 싸워야 하는 것이다.
허약한 그의 몸은 추위를 이겨내기엔 너무나 지쳐 있었다.
1921년 12월 28일. 가출옥이 허락되었다. 어쩐 일인가? 아직 3개월이 더 남아 있는데 웬 일인가? 아마 몸의 허약함과 그의 모범스러운 인감됨에 일인의 마음이 움직여졌던지 출옥이 허락된 것이었다.
주남고 전도사는 생각지도 않았던 출옥으로 그리운 고향의 땅을 다시 밟게 되었다.
2년 만에 돌아 온 집은 남의 집 같았다. 집을 떠날 때 3살 되었던 경중이 벌써 5살의 개구쟁이로 자라 있었다. 밖에서 놀다가 아버지가 왔다는 소리에 뛰어 들어오기는 하였지만 뼈만 앙상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는 눈만 깜박이고 있다.
포승에 묶여 거창 경찰서를 떠날 때, 전송나온 엄마등에 업혀 새근새근 잠자던 둘째 아들 경도가 말을 익히고 있었다.
벌써 3살이 되었구나, 주 장로가 경중이와 경도를 양팔에 와락 안으면서 그들의 볼을 비비니 하염없이 두 눈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얼마나 고생을 했나?”
자신이 당한 고난보다 어린 것들이 가여워 더욱 슬펐다.
보다 더 마음 쓰리고 아픈 것은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을 때다. 방에 누어 있다가 아들이 왔다는 소리에 겨우 일어나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시는 어머니!
주남고 전도사는 뛰어가 어머니 앞에 쓰러졌다.
어머니는 아들이 검속되어 가던 그날부터 얼마나 마음을 많이 상하셨던지 귀도 멀어지고 눈도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몸이 극도로 쇠약하여 보행도 잘 하지 못하는 형편에 이르렀다.
어머니 앞에 눈물을 쏟으며 주 장로는 얼마동안 쓰러져 울었다.
마당에 서 있는 아내를 보았다. 만사에 불평을 할 줄 모르는 착한 아내. 흙일 길쌈과 바느질, 어느 하나 꺼려하지 않고 묵묵히 일하며 신앙으로 현실을 견디어 나간 충실한 여성, 그녀는 한국의 훌륭한 여성이었다.
주 장로는 몸이 회복될 여유도 없이 다시 가정을 돌보며 교회 봉사하는 일에 열중했다. 특히 어머니를 모시고 새벽마다 교회에 나가 기도하였다.
자신의 건강보다 어머니의 병환을 위하여 애타게 부르짖었다.
기적적으로 어머니의 병환은 낫게 되었다. 귀도 밝아지고, 눈도 잘 보이게 되었다. 주남고 장로는 참으로 효성의 사람이었다.
제4장
10년 걸린 졸업
1. 권서 일을 보면서
개신교는 성경이 중심이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은 선교지에서 먼저 하는 일이 성경을 그 나라 말로 번역하여 보급하는 일이었다.
1882년 만주에서 선교하던 로스(John Ross)목사 등이 우리나라 학자들의 도움을 얻어 누가복음을 우리말로 번역하였다. 이것을 장사꾼들의 손을 통하여 반포하였더니 그 효과는 대단하였다. 선교사가 정식으로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 벌써 성경(누가복음)은 압록강을 건너 한국 사람들의 손에 들려졌다.
선교사들은 문서전도의 효과를 잘 알고 있었다.
언더우드와 아펜셀라 목사는 한국에 들어 온 2년 후, 성경번역위원회를 조직하고 번역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신약성경은 1900년에, 구약성경은 1911년에 완역 출판이 되었다.
한편 장로교와 감리교에서 합동작업으로 1908년에 찬송가를 번역 출판하였다.
선교사들은 그 외에도 교리문답, 주기도문, 십계명, 사도신경등 소책자도 인쇄하여 반포하였다. 이미 한국에는 1885년에 대영성서공회 한국지부가 서울에 생기고, 성경 반포사업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1923년 이른 봄, 주남고 전도사는 출옥 후, 신학교를 더 계속할 경제적 형편이 못되어 성경반포 사업에 나서게 되었다.
신학교 졸업까지를 그는 10년으로 잡았다. 너무나 어려운 가정 경제를 생각하고 권서일에 나선 것이다. 권서 일은 힘드는 일이었다. 성경 찬송과 기타 종교 서적을 등에 짊어지고 다니며 책을 팔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교역자가 없는 교회에서는 집회도 인도하였다. 교회가 없는 곳에는 전도하며, 교인들을 모우고 가정을 정하여 예배를 드리게 하고 교회가 서도록 협력을 했다.
권서의 길은 고달팠다. 이런 일이 있었다.
초 봄이었다. 그날도 주남고 전도사는 책짐을 짊어지고 신원면 소재 소야 교회를 찾아 산길을 가고 있었다. 잿빛 구름이 하늘을 꽉 덮고 있는 깊은 산길을 들어섰다.
계곡에 이르니 안개 구름이 낮게 깔리면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아침밥을 거르고 나왔는데다가 수십리 길을 걸었으니 허기져 더 이상 길을 갈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안개구름마저 끼어 길을 분별할 수 없게 되었으니 앞이 캄캄하였다.
그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그냥 주저앉았다. 머리가 띵 해오면서 전신이 나른하였다. 그는 짐을 벗고 앉아 기도를 하였다. 나무 포기를 꼭 붙잡고 몸을 흔들며 간절히 기도하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일어나 다시 짐을 질려고 하는데 안개구름이 걷히면서 계곡저쪽에서 무엇인가 빨간 알맹이들이 눈에 보였다.
날쌔게 일어나 계곡으로 들어서니 산딸기가 빨갛게 나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주여! 감사합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열심히 딸기를 따 먹었다. 얼마나 따먹었는지 배가 불렀다.
안개구름도 걷히고 길도 환히 보였다. 그는 다시 책짐을 짊어지고 능선을 올라서서 길을 따라 소야교회로 향하였다.
뒤에 안 일이지만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 때는 딸기가 익는 계절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깊은 산골짜기에 달기가 있었으니 참으로 부락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여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다시 한번 실감하면서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어느 추운 겨울날의 일이었다. 그날도 책짐을 짊어지고 길을 걷고 있었다. 합천 접경인 가조교회로 가는 길이었다.
검은 구름이 하늘 가득히 덮혀 있었다. 집을 출발 할 때는 날씨가 몹시 포근하더니 얼마가지 않아 눈이 내리는 것이었다.
주남고 전도사는 열심히 길을 걸었다. 집동재를 넘을 때엔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이 내렸다. 솜털같은 새하얀 눈이 펑펑 내리는 것이었다. 머리와 어깨위에 쌓인 눈송이를 털며 고갯길을 내려갔다.
가도 가도 인가는 없고 눈만 펑펑 쏟아질 뿐이었다.
짚신을 신고 있었던 그는 바닥에 눈이 묻고 묻어 얼마가지 않아 신이 높아져서 길을 걸을 수 없었다. 눈 위에 앉아 짚신 밑에 붙은 눈을 털어버리고 길을 걷곤 하였다.
종일을 눈과 싸우며 길을 걸었다. 인가가 있으면 들어갈 것인데 인가도 없고 배는 고프고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찬송을 불렀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험악하여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옥중에 있을 때를 생각하면 얼마나 자유로운가? 어디든 자유로이 갈 수 있고, 쉬고 싶으면 눈 위지만 앉아 쉴 수 있고, 목마르면 눈을 먹고........ 그는 감사가 넘쳤다.
해가 졌는지 어두움이 밀려왔다. 눈도 멎었다.
바람이 좀 차게 불기는 하지만 눈이 멎고 살 것 같았다. 부지런히 길을 재촉하였다.
한 골짝을 지나니 등불이 보였다. 인가가 있는가보다 생각하며 부지런히 걸어갔다. 등불이 여러개 보이고 사람들의 웅성 우성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보니 어느 넓은 집 마당에 사람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
사람들의 손에는 등불이 들려 있었다. 알고 보니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었다. 오늘 낮에 눈 때문에 길이 막혀 신랑이 오지 못하다가 늦게야 도착되어 밤에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었다.
그 날 밤은 푸짐한 대접을 받았다. 모여든 사람들에게 보음을 전하며 성경을 여러 권 팔기도 하였다.
주남고 전도사는 그 밤도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오렸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것이었다.
2. 10년만에 신학교 졸업
보통 3년만에 졸업하는 신학교를 주남고 전도사는 10년 만에 졸업을 하였다.
경제적 사정을 너무나 많은 시간을 보낸 것 같았다. 그러나 늦지만 졸업을 하게 되는 것만이 감사할 뿐이다.
1930년 3월 어느날. 졸업식을 마치고 나오는 주남고 전도사의 눈에는 감격의 눈물이 어렷다. 오늘이 있기까지에 얼마나 많은 고통과 어려움이 있었던가? 그러나 이제 그 모든 것을 기쁨과 감격을 바꾸기에는 충분하였다.
그 무렵 거창읍 교회는 어려움에 처하여 있었다.
지난 해 11월에 부임해 오신 이홍식 목사께서 건강이 좋지 못하여 사면을 한 것이었다. 이 목사는 젊은 부흥사로서 정열과 패기가 있는 목사였는데 너무 몸을 무리하게 사용하여 병을 얻었다.
교회에 부임한지 일 개월만에 병을 얻어 5개월간 고생을 하시다가 회복될 가망이 보이지 않자 사면을 하고 고향으로 떠났다. 이 목사의 고향은 함안군 군북이었다.
주남고 전도사가 졸업을 하고 거창으로 오니 교회는 쓸쓸하였다.
1930년 4월 2일 임시 당회장 이자익 목사 사회로 당회가 열려 생활비 55원으로 주남고 전도사를 교역자로 맞을 것으로 결정하였다. 주 남고 전도사는 다시 거창읍 교회 교역자가 된 것이다.
4월 5일. 슬픈 소식이 들려왔다. 군북에서 치료중이던 이홍식 목사가 별세하였다는 것이다.
다음 날, 주남고 전도사는 교회 대표로 장례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거창에서 군북까지의 길은 이백리가 넘는 먼 길이었으나 그는 걸어 나섰다.
젊은 목사의 죽음은 더욱 슬펐다. 젊은 미망인과 철모르는 두 아들 삼열과 진열. 미망인은 울음으로 해서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허나 어린 삼열과 진열은 아버지의 장례날이 무슨 잔치날이나 되는 듯 우쭐거리며 신바람을 낸다.
주 전도사는 남의 일 같잖게 코가 찡 느꼈다.
주 전도사는 미망인을 조용히 위로 하였다.
“이 목사님은 이 세상에 오시어 할 일을 다 하시고 가셨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사모님의 할 일입니다. 어린 저 두 아들을 신앙으로 잘 기르십시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주님을 위해 일하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전도사님........,”
미망인의 얼굴엔 굳은 결심이 익어가고 있었다.
과연 훗날, 이 목사의 두 아들은 어머니의 교훈과 피눈물의 기도와 수고로 목사가 되었다.
한 목사가 죽고 두 목사가 열매로 나타난 것이다.
제 5장
맹물 솥에 불때는 사택
1.거창읍 교회 위임목사
1930년 9월, 주남고 전도사는 경남노회에서 목사고사에 응하였다.
합격이 되어 장립을 받게 되었다.
인수 위원들이 머리에 손을 얹고 노회장이 눈물어린 간곡한 기도를 올렸다. 주 목사의 가슴은 뜨거움으로 열이 났다. 눈물이 하염없이 흐른다. 주님을 위해 일생을 온전히 바치려는 굳은 마음이 가슴을 설레게 한다.
악수례를 나누고 강단에서 내려오는 주 목사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1930년 12월 7일 오전 11시, 감격에 찬 성찬예식을 거행하였다. 목사가 되어 처음으로 집례한 성찬예식이었다. 감사와 감격의 눈물로 거룩하게 진행이 되었다.
온 교인이 은혜를 받았다.
이 날, 권임함 선교사 사회로 공동의회가 모였다. 주남고 목사를 위임목사로 청하는 투표를 시행한 것이다. 세례교인 81명이 참석하여 만장일치로 가결을 보았다.
1931년 2월 22일. 경남노회가 파송한 위임위원 이자익목사 외 5명의 주선으로 주남고 목사의 위임식이 성대히거행되었다. 많은 성도들과 외부인사들도 참석하였는데, 윤봉기 영수도 참석하였다. 윤봉기 영수는 함양군 서산면 상남리 상남교회 영수였다.
윤봉기 영수는 1907년 4월 10일, 충북 영동읍에서 태어났다. 칠세에 서당에 들어가 한무을 익혔고, 아홉 살에 강원도 홍천에 가서 모곡학교에 입학하였다.
모곡학교는 남궁억 선생이 가르치고 있었다. 남궁억 선생은 1898년 9월에 발간된 황성신문사의 사장을 지낸 바 있는 유명한 언론인이었다. 그는 모곡학교에 찾아오는 학생들에게 민족사상을 강하게 불어 넣어 주었다.
뒤에 이 일로 투옥되고 고초를 많이 받았지만 그는 투철한 민족사상을 젊은이들에게 고취시켰다.
윤봉기는 이 모곡학교에서 낭궁억 선생을 통하여 강한 배일사상과 애국애족의 교육을 받았다. 모곡학교를 졸업하고 경기도 양주로 가서 재동 영어학교를 다녔다. 양주에 있으면서 양잠에대하여 배우기도 하였다.
그는 전라도 잠수땅에 가서 삼촌 밑에 얼마 있다가 결혼을 하였다.
함양군 서상면 삼남리에 경치가 좋고 큰 절이 있다는 말을 듣고 윤봉기는 이 절에 놀러간 일이 있었다. 산에 나무가 많고 공기가 맑아 마음에 들었다.
절 주지는 동경약전을 나온 유식한 주지였다. 주지와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윤봉기가 뽕나무 접붙이는 기술을 갖고 있다는 말에 자기 절에 와서도 도와 달라고 주지가 조르는 것이었다.
“생활 염려는 하지 말고 오시면 됩니다.”
그리하여 윤봉기는 영각사에 가족을 데리고 이사를 하게 되었다.
어느 날, 오 형선 장로가 영각사에 찾아왔다. 민족사상이 강한 청년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것이다.
오 장로는 윤봉기 청년과 인사를 나누고 민족사상 이야기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 후, 오 장로는 종종 찾아와 윤 청년을 만났다.
하루는 오 장로가 윤봉기 청년에게
“내만 이 곳에 놀러 올 것이 아니라 윤 선생도 내 사는 곳에 한번 찾아 오시오.”
하고 당부 하였다.
“일요일에 한 번 찾아 가겠습니다.”
약속대로 윤봉기는 오 장로를 찾아갔고 예배에 참석을 하였다. 예배 장소에서 처음 주남고 목사를 만났다. 그 때, 주남ㄴ고 목사는 목사 인수를 받기 전, 전도사로 일보고 있었다.
처음 대하는 주남고 전도사의 모습은 윤봉기 청년의 눈에 성자로 보였다. 인자하고 겸손한 주 남고 전도사의 태도에 자기도 모르게 빨려 들어갔다. 초가삼간에서 남반과 여반을 방 두나에 가각 앉히고 마루에서 설교를 하였다.
윤 봉기는 주 전도사의 열띤 설교에서 많은 것을 마음에 담은 뜻하였다. 예배 후 민족주의에 대한 대화가 오가는 중, 윤보기는 주남고 전도사와 오형선 장로 등과 통하였다.
"주일마다 오겠습니다."
윤봉기는 이렇게 약속을 하고 거창을 떠났다. 윤봉기는 절로 돌아와서 계속 일을 보면서도 그 마음은 거창 교회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순간에 기독교 신자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주일마다 거창교회로 나가고 주남고 전도사와 오형선 장로를 만나는 것을 그이 낙으로 삼았다.
얼마 후, 윤봉기 청년은 절에서 짐을 꾸렸다. 아랫 마을로 이사를 한 것이다.
방을 얻어 살림을 정돈하고 일자리를 마련했는데 상남 사립국민학교에 교사일을 보게 된 것이다.
얼마 후 그는 따로 방을 얻어 교인들과 모았다. 그리하여 주일이면 교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일년이 지난후 이자익 목사가 찾아왔다.
이자익 목사는 연합당회장을 맡아 순회 전도를 하며 다녔다. 이 목사는 윤봉기에게 오전 예배시간에 학습을 세웠다. 그러더니 저녁 예배시간에 세례를 주는 것이다. 무엇이 어떻게 되는 것인지 모르고 어떨덜한 윤봉기 청년에게 이어 영수로 임명을 하는 것이었다.
윤봉기는 영수가 무엇인지를 몰랐다. 그래서 이자 익 목사에게 물었다.
“영수가 무엇입니까?”
“영수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에게 영수를 주었구나!”
이 목사는 피식 얼굴가에 웃음을 날리드니 대답했다.
“영수는 집사를 다스리고, 설교도 하고 교회를 살피는 직이지요?”
영수가 된 윤봉기는 열심으로 교회일을 도왔다.
2월 22일, 주남고 목사 위임식에 특별히 학교일을 두고 참석한 것이다. 특히 윤봉기 영수의 마음을 끄는 것은 위임식에 양복을 선물받은 일이었다.
윤봉기는 옆 교인에게,
“위임식 때는 어떤 목사라도 양복을 선물로 드립니까?”
하고 물었다.
“대개의 교회들은 양복을 해줍니다.”
윤봉기 영수는 주 목사의 양복 입은 모습을 그려보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 후 종종 주 목사를 만났지만 양복 입은 모습은 보지 못하였다.
하루는 주 목사를 만난 윤 영수는 조용히 물어보았다.
“목사님, 왜 양복을 입고 다니시지 않습니까? 전일 위임식때 받은 양복이 있지 않습니까? 양복을 입으시면 더 신사로 멋이 있어 뵐 것인데요·····.”
주 목사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이렇게 대답했다.
“나 농촌교회 목사입니다. 농촌지방 사람들에게 전도하기 위해서는 역시 한복이 어울려요. 그리고 내가 한복을 입고 다니는 데는 또 한기지 이유가 있지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윤 영수는 그것도 궁금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항시 흰 두루막을 걸치고 다니는 모습이 이상하였다.
주 목사는 눈을 잠시 감았다 뜨시더니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민족사상 때문이지요. 대구 형무소와 진주 형무소에서 동립운동 사건으로 투옥되었을 때의 일을 잊고 싶지 않아서요. 형무소에서, 나라 사랑의 마음을 굳히던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 한복을 입는 거요."
운봉기 영수의 머리가 또 한 번 수그러졌다.
2. 가정에서 좋은 아버지
주 목사는 독립운동과 권서 생활과 신학 공부 때문에 동한했던 가적을 돌아보았다.
착실한 남편으로써 좋은 아버지로 가정을 보살폈다. 목사가 가정에서의 할 일도 가족들의 신앙교육 문제였다.
주 목사는 유순한 그의 천성적 성격과 신앙의 힘으로 가정을 조용히 이끌어 갔다.
큰 아들 경중은 18세 소년으로 거창 농업학교를 졸업하고 마산으로 갔다.
다시 윤인구 목사가 경영하던 창신학교에 들어간 것이다.
둘째 아들 경도가 15세로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전주 신흥 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신흥학교는 기독학교였다.
고학을 하다시피 어려운 가운데 학교를 다녔다.
딸 경순이 11살. 거창에서 서오성 여선교사가 경영하던 명덕학교에서 공부하였다. 명덕 학교는 4년제 초등학교였는데 극빈한 아이들을 모아 공부를 시켰다. 일반 교과목은 국민학교와 꼭 같으면서 성경과목이 하나 더 있었다. 교사로는 남 직원 1명에 여 직원 3명이었다. 경순은 이곳에서 공부하였다.
서 째 아들 경효는 5세 엄마의 등의 치맛자락을 꼭 붙잡고 다녔다.
네 째 아들 경세는 2세. 엄마의 등에 매달려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주 목사는 이 자녀들의 장래를 위하여 하나님께 늘 기도하였다.
경중이 마산에서 방하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도시교회 목사들의 생활을 보고 부러운 생각이 났다.
하루는 아버지에게 조용히 졸랐다.
“아버지, 우리도 이 교회 사면하고 다른 교회로 가요.”
“왜 그런 소리를 하냐?”
“교인들도 매일 보는 사람이고, 별로 좋아하는 눈치도 아닌데 오래 붙어 있는 것은 좋지 안아요.”
“네가 무엇을 알아서 그런 소리를 하냐? 내가 여기서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었는데 좋다고 오래있고 싫다고 떠나고 할 수가 있겠니? 내가 이 교회 위임을 받을 때, 이 교회를 위해서 몸을 바칠 것을 약속 했느니라.”
조용히 꾸짖는다기 보다 아들을 이해시키는 주 목사였다.
“그런데 말입니다. 도시 교회는 참 굉장해요. 새로 부임하면 환영식을 하고 사면하고 떠나면 또 크게 송별식을 하고 그래서 목사들도 부자가 된다구요.”
경중은 몹시 그들을 부러워하는 뜻에서 말하였다.
“나는 이 교회를 사랑하고 있다. 내가 처음 복음을 받은 곳이고, 세례를 받고 집사가 되고, 장로 장립을 받고, 신학을 마치고 목사 안수까지 받고, 지금은 위임 목사가 아니냐? 환영을 받기 위해서 목사가 된 것이 아니고 주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목사가 된 거야.”
처음은 어머니도 아들 경중이 말에 찬동하였지만 그만 잠잠하였다.
주 목사는 자녀들에 대하여 과격하게 대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부드럽고 유순하게 자녀들을 대하였다.
교육의 효과는 즉서에 나타나는 법이 아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라야 참된 교육은 효과를 발하게 된다.
룻소(J.J. Rousseu)는 그의 교육론에 이런 말을 하였다.
“유년기의 교육은 그 결과가 즉시에 선명히 나타나지 않는다. 이상적인 교육을 받은 아이나 그렇지 못한 아이나 동일하다. 그러나 그 아이가 성년이 되었을 때 교육의 결과는 나타나는 것이다.”
주 목사의 자녀 교육이야 말로 이런 이상적이 교육이었다.
어느 날의 일이었다.
경순이 학교에서 늦게 돌아왔다. 이날 경순은 동무들과 학교 화단가에서 봉선화 꽃잎으로 손톱에 물을 들였다.
연분홍빛 꽃물이 손톱에 먹혀들어 여간 보기에 좋지 않았다. 열심으로 꽃잎을 따서 손톱에 문지르다보니 저녁 어둠이 내리고 있는 것이다.
급히 집으로 뛰어왔다. 주 목사는 딸의 당황하는 거동을 살피다가,
“왜 늦었냐?”
“·······”
“어디 갔다 오냐?”
“아닙니다.”
“학교에서 그만·····”
“어서 올라와 밥 먹어라. 배고프겠다.”
주 목사는 지극히 평온한 음성으로 말을 하였다. 경순이 마루로 올라오자 주 목사는 다시 엄한 말씀 한 마디 하였다.
“다음에 또 이렇게 늦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 알겠니? 학교에서 공부가 끝나면 집으로 빨리 와야지, 집에서 늦게까지 네가 오지 않으면 걱정을 하게 되지 않니.”
그 날은 벌을 면하였다. 그러나 며칠 후 또 늦었다. 그 날도 역시 봉선화 꽃잎 때문이었다.
늦게 들어오는 경순을 바라보신 주 목사는 나직히 속삭이듯 말했다.
“약속을 지켜야지. 너는 분명히 잘못하였다. 그러니 벌을 받아야 한다.”
경순은 떨리는 마음으로 시무룩히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매를 맞을래, 벽장 안에 들어가서 곰곰이 생각해 볼래?”
“·····”
“어느 것을 택하겠니? 네가 원하는 것을 하여주마.”
경순은 어린 마음에 매 맞는 것 보다는 벽장에 들어가 있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되었다.
“벽장에 들어가겠어예.”
이윽고 주 목사는 경순을 벽장에 넣고 문을 닫아 버렸다.
캄캄한 골방이었다. 어둡고 침울한 곳이었다. 숨이 답답하고 갑갑하여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말씀을 어긴 벌로 견디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눈을 감고 있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어렴풋이 잠이 들려는데 밖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오너라.”
벽장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 이후 다시는 아버지의 말씀을 어긴 일이 없었다.
3. 강인한 배일사상
중앙에서 일인 거물급 인사들이 거창에 내려왔다. 지방인심을 수습하고 일본에게 복종하는 강연을 하러 온 것이다.
거창 지방 유지들과 종교계 지도자들을 공회당에 불러 모았다. 총독 아래 있는 콧수염의 사나이가 점잖을 피우며 일본을 인식시켰다.
연설을 마치고 그는 군중을 향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오늘날 우리 대 일본 제국에 대하여 원하는 것이 무엇이지요? 또한 현재 바라는 것이 무엇이지요? 무엇이든지 좋으니 말을 해 보시오.”
단상 뒤에는 의자에 수십명의 금테두른 모자를 쓴 자들이 앉아 있었다. 몇 명의 경찰들이 주변에 서 있었고 공회당 밖에도 띄엄띄엄 경찰들이 지키고 있었다.
“말을 해 보시오! 무엇이든지 좋소. 이 자리에서는 자유롭게 이야기 할 수 있소. 여러분들을 위하는 일이면 무엇이나 가능한한 노력해 보겠오.”
군중들은 조용하였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였다.
군중들은 일인들의 당당한 그 위세에 억압을 당하고 있었다.
“아무도 할 말이 없오?”
이 때였다.
주 남고 목사가 군중 속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본인들은 물론 모든 군중들의 눈길이 주 목사에게로 모두 모여 들었다.
“제가 한마디 하겠습니다.”
“말해 보시오.”
“우리 한국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간절히 바라는 소원이지요.”
“그게 무엇이오!”
“우리나라에서 일본 사람들이 정치를 하지 말고 물러가 주는 일이오”
연설하던 자의 얼굴이 홍당무가 되면서 눈썹이 송충이 기어가듯 징그럽게 꿈틀거렸다.
둘러앉은 금테두른 일인들의 얼굴도 동시에 이그러졌다. 주 목사는 한층 소리를 높혀 외치듯이 말을 던졌다.
“이 사실은 나도 원하고 우리 2천만 동포가 다 같이 원하는 바요.”
군중들은 가슴에 뜨거움이 찾아왔다.
차마 말은 할 수 없었지만 주 목사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들도 하고 싶은 말이었다. 일인들은 당황하여 어쩔줄을 모르고 술렁이기만 하였다.
그들은 현장에서 주 목사를 끌고가지 못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주 목사 뒤에는 항시 형사가 감시를 하였다.
한 편, 거창 유지들을 비롯한 모든 읍민들이 주 목사를 두려워하는 가운데 존경하였다. 거창 읍민들은 모이면 주 목사의 이야기를 하였다.
“주 목사는 참 애국자야. 민족심이 가한 어른이라구.”
4. 고등계 강 형사
공회당 사건 이후, 주 목사 뒤에는 고등계 형사가 미행하고 있었다.
강 형사라는 자는 한국 사람이다. 주 목사의 강인한 배일사상과 독립정신을 아는 거창 경찰서에서는 주 목사를 감시하기 위해서 강 형사를 고정시켜 놓은 것이다.
강 형사는 밤낮을 주 목사 사택 앞에서 감시하였다. 식사 시간과 잠자는 시간 빼고는 언제나 사택 문 앞을 서성거리는 것이었다.
주 목사는 강 형사의 끈덕진 감시하에서도 조금도 다름없이 성경을 읽었고, 주석을 참고하며 설교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심방할 일이 있으면 성경찬송을 끼고 태연히 나가셨다.
강 형사는 심방길에도 미행하였다.
하루는 심방길에 따라오는 강 형사를 g야하여 주 목사가 입을 열었다.
“강 형사님, 나를 따라다니는 끈덕진 그 정성을 다른 데로 돌리고 싶지 않으십니까?”
강 형사는 계면쩍게 피식 웃으면서,
“다른 데라니요?”
하고 주 목사옆으로 다가서는 것이다.
“예수를 믿으시오. 그런 쓸데없는 짓하고 다니지 말고 예수를 믿고 영혼도 육신도 잘 되는 길을 찾으시오.”
“슬데 없는 짓이라니? 대 일본 제국을 위하여 충성하는 일이 쓸데없는 일이란 말이요?”
“강 형사! 당신의 나라는 대 일본 제국이 아니지 않소?”
“뭐라구!”
강 형사의 두 주먹이 불끈 쥐어지면서 부르르 전신을 떠는 것이었다.
지독한 친일파였다. 그러나 주 목사는 시종 사랑과 연민의 마음으로 그를 대했고 시간있는데로 전도를 하였다.
뒤에 이 강 형사가 주 목사를 잡아 들였고, 심한 고문까지 하였다. 해방 후 강 형사는 진주로 도망갔는데, 거창지방 좌익계 사람들이 뒤쫓아가서 돌로 쳐 죽였다.
5. 청빈한 가정 생활
일제가 한반도를 점령하여 정치하는 중, 가장 탐을 낸 것이 쌀이었다.
일제는 해마다 4백 64만석의 쌀을 외국에서 사들여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러한 그들에게 한반도의 쌀 생산은 참으로 탐나는 것이었다.
그들은 본국의 식량 문제를 한반도에서 해결하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이것이 1920년 11월 총독부가 발표한 산미증식계획 이었다.
일제는 제1차,2차로 산미증식 계획을 세워 시행하면서 공출이란 이름으로 쌀을 빼앗아 갔다. 한편으로는 군수공업 시설을 하여 식민지 착취를 강화하여 나갔다.
이러한 경제력과 노동력의 착취로 농민들이 생활은 궁핍하게만 되어져 갔다. 교인들이 생활이 궁핍하여가니 교역자의 생활인들 오죽하겠는가?
자녀들이 많은 주 목사 가정은 식사를 하는 날보다 끼니를 넘기는 날이 더욱 많아졌다.
철없는 어린 것은 배가 고파 울었다. 그러나 주 목사는 그 어려운 사정을 교인들이 알까봐 염려하였고, 끼니를 넘기는 날에도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솥에 물을 붇고 불을 넣었다. 물만 끓고 있는 빈 솥을 바라보는 사모님과 어린아이들의 눈에는 눈물이 아롱졌다.
당시 주 목사는 삼군 (거창, 합천, 함양) 지방 시찰장으로 여러교회를 혼자 시찰하며 돌보았다. 한 번 나갔다가 며칠이 걸려 시찰을 마치고 돌아오면 집에는 십여 명의 전도사들과 교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개 교회의 문제들을 상의하기 위해서 주 목사를 기다린 것이다.
주 목사는 그들 개인 개인, 개 교회마다의 문제를 정중히 해결지어 주었다. 그리고 찾아온 그들에게 식사를 대접해서 보내는 것이다.
자신은 굶으면서 찾아온 전도사들에게는 배불리 먹여 보냈다. 자녀들은 아버지의 이러한 처사가 못 마땅하였다.
“아버지, 아버지의 자식들은 굶어도 좋습니까? 배가 고파 우는 소리가 들리지도 않습니까?”
주 목사는 손을 내밀어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애 너희들의 배고픔을 내가 모르겠니? 그러나 저 분들은 다 주님의 종들이란다. 나를 찾아온 주님의 종들을 굶겨 보낸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너희들을 배불리 먹여 주실 것이다.”
아이들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참아야 해. 배고픈 사람이 우리들 뿐이니?”
아이들은 아버지의 처사에 불평이 대단하였다. 그러나 수 십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아이들은 자라 어른이 되었고, 그들은 아버지의 그 말씀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지금 주 목사의 자녀들은 한결같이 성공하였고, 배고픈 일이 다시는 없게 되었다.
6. 충성된 청지기
그해 여름 비가 많이 왔다. 장대비가 계속하여 여러날 퍼부었다.
둑이 터지고, 산골짝 도랑가의 집들이 떠내려 왔다. 그래도 비는 멎을 줄을 모르고 쏟아졌고 바람까지 불었다.
주 목사는 그 밤에 등불을 켜 들고 심방길에 나섰다. 월천 동네 교인집이 염려가 되어 찾아가는 길이었다. 비는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월천은 거창읍에서 오리길이 되었다. 그 먼 길을 어둠을 헤치고 걸어가는 것이었다. 두루막 자락을 걷어 올리고 찬송을 부르면서 내를 건너 교인의 집 앞에 이르렀다. 벌써 이 집은 마루까지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급히 교인을 불렀다. 그들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주 목사의 깨우는 소리에 놀라 눈을 뜬 교인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보니 물이 마루 위로 올라 방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짐을 챙길 여유도 없이 밖으로 나와 강둑에 올라셨다. 집을 돌아보니 어느 듯 물은 지붕 위를 기어오르는 것이었다.
그 때 주 목사의 방문이 없었으면 그들은 자다가 난을 당할뻔 하였다. 그들 가족들은 너무도 고마워,
“목사님 참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려고 목사님을 보내 주셨군요.”
하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주 목사는 계속 물 때문에 고생할 만한 성도들의 집을 그 밤에 찾아 심방을 하였다.
밤이 늦어 비 소리와 바람 소리만 들리는 어두운 길을 혼자 걸어다녔다. 교인들 집 앞에 가서 바로 인한 피해가 없고 불이 꺼져 있으면 자는 줄 알고 그냥 지나갔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러 찾아가는 길이 아니다.
그는 교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부모가 자녀를 돌보듯이 예정 어린 심방의 길을 다니는 것이다. 교인들의 불행이 목사의 불행이요, 교인들의 슬픈일이 곧 목사의 슬픔이기 때문이다.
그 밤에 그는 옷을 흠뻑 비에 적시며 심방을 하였다. 온 교인들의 집을 그 밤에 다 돌아보았다. 심방을 끝내고 돌아오니 새벽닭이 두 홰를 쳤다.
어느 날의 일이었다.
교회 출석을 잘하던 노파가 한 분 있었는데 병들어 가지리에 있는 친정으로 갔다. 그 노파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그리하여 병이 중하자 친정으로 간 것이다.
한데 그 노파는 회복되지 못하고 그 길로 세상을 떠났다.
부고가 교회로 왔다. 주 목사는 집사들에게 연락했지만 사택으로 찾아온 사람은 세 사람 뿐이었다.
주 목사는 세 집사와 길을 떠났다.
가지리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였다.
초상집은 쓸쓸하였다. 입관을 하고 마당에서 장례식 예배를 드렸다.
상여군이 적었다. 주 목사는 앞장서서 상여를 메었다.
이마에 구슬땀이 송알송알 맺혀 흘러내렸다. 능선을 지나 불어오는 바람이 황토구를 안고와 얼굴에 더부룩히 묻혀주고 지나간다.
주 목사의 입에서는 찬송만 흘러 나왔다.
“우리 구주님 계신 곳에 천사 함께 늘 찬송하고, 주께 영광을 돌림으로, 모든 슬퍼한 맘 플겠네.
며칠후, 며칠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며칠후, 며칠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도 교인들 집 앞을 그냥 지나지 않고 들어가 기도하였다. 함께 동행을 한 최영교 집사는 주 목사의 그 충성된 모습을 바라보면서
“참으로 하나님 밖에 모르시는 귀한 어른이시다.”
최 집사는 그날 주 목사와 동행하였다가 너무나 피곤하여 집에 들어오자 자리에 쓰러졌는데 3일간 몸살을 하였다고 했다.
이런일도 있었다.
그해 겨울은 눈이 몹시 많이 내렸다.
길이 눈에 묻혀 사람들의 왕래가 힘드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주 목사는 지방교회 순회에 나선 것이다. 삼십리가 넘는 가조면 마상리 교회로 간 것이다. 산길은 눈에 묻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항상 바지 저고리에 두루막을 걸친 몸가짐이다.
내리막길을 조심조심 한다는 것이 그만 한발을 헛딛어 눈속을 아무렇게나 마구 뒹굴어 내려 가는 것이었다. 얼마 후 정신을 차렸을 때 두루막 뒷자락이 찢어져 나풀거렸고 다리를 절기까지 하였다.
순회를 마치고 돌아온 후도 오랫동안 한 쪽 다리를 절었기 때문에 만나는 교인마다
“목사님 왜 다리를 져십니까?”
하고 묻는 것이었다. 그럴때면 목사님은 피식 웃으시며,
“눈에 미끄러져 조금 다쳤습니다. 내리막길에 그냥 주저 앉았드랬습니다. 곧 괜찮을 것입니다.”
하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하였다.
7. 아버지가 사 주신 책상
주경순은 거창 명덕학교 4년을 졸업하고 진주로 갔다.
선교사가 경영하는 시원 여학교 5학년에 편입을 한 것이다.
가난한 목사의 딸로 자라면서 그녀는 설움도 많았다.
국민학교 과정을 공부하는데도 이처럼 어려움이 많은 것이다. 그래서 학비와 식생활 문제로 선교사의 힘을 빌리기 위하여 진주로 왔다.
기숙사 생활이 시작되었다.
12세 어린 소녀는 집이 그리워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두 눈에 물이 고이는가 싶더니 자르르 양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린다.
“엄마!”
가만히 불러보는 경순.
해가 서녘 하늘로 기울고 어둠살이 몰려 올 땐 못견디게 집 생각이 났다.
생각을 말고 공부에만 전념해야 한다고 야무지게 마음을 고쳐먹어도 12세 어린 소녀의 마음은 굳세지를 못했다.
날이 가도 집 생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한 장씩 떼도록 되어 있는 큰 달력이 기숙사 방 벽에 걸려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경순은 달력이 걸려 있는 벽을 향한다.
다른 아이들은 다 자기 책상이 있어서 책들을 가지런히 정돈해 놓고 제법 화병을 구하여 꽃도 꽂아놓고 앉아 공부를 한다.
그러나 경순에게는 책상이 없었다.
책보에 책을 싸서 방 모퉁이에 밀쳐놓고 필요한 것만 챙겨 방바닥에 펴 놓고 공부를 하였다.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자기 집 형편으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처지라 묵묵히 참고 공부에만 전심을 기울였다.
이 무렵 진주에서 봄 노회가 시작되었다.
아버지 주 목사가 노회에 참석차 진주로 왔다. 주 목사는 딸이 있는 학교로 찾아왔다.
기숙사 방을 돌아보고 딸을 만났다.
경순은 아버지를 만나자 너무나 반가워 울음이 터졌다. 주 목사는 얼마의 돈을 내밀며 어린 딸을 위로해 주었다.
“아버지, 나는 책상이 없어요.”
철없는 딸은 아버지의 가난한 호주머니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
언제나 조용한 주 목사.
주 목사는 딸에게 그가 유속하고 있는 여관을 가르쳐 주었다. 경순은 수업이 끝나자 아버지 여관으로 갔다. 아버지 주 목사는 최상림(崔尙林) 목사와 한 방에 있었다. 다음 날도 경순은 여관으로 찾아갔으나 아버지가 계시지 않았다. 최상림 목사 혼자 방에 앉아 있었다.
“목사님! 우리 아버지 어디 가셨습니까?”
“오, 경순이 왔니? 잘 왔다. 아버지는 급한 일이 생겨 빨리 거창으로 가셨다. 아버지가 가시면서 네가 오거든 저걸 전해주라 하더군.”
최 목사는 책상을 경순에게 내 밀었다. 새 책상이었다. 그렇게 가지고 싶던 책상이었다.
책상을 보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아버지의 사랑이 담긴 아름다운 선물.
경순은 아버지가 사다 주고 가신 책상을 머리에 이고 기숙사로 왔다. 책상을 방 한 쪽에 자리잡아 놓고 그 앞에 앉자 눈물이 나왔다. 그 후 책상 머리에 앉을 때마다 아버지의 훈훈한 사랑을 피부로 느꼈다.
한 학기를 마치고 경순은 방학 2일 전에 선교사 자동차 편으로 거창으로 왔다.
8. 기도와 성적
경순이 방학이 되어 집에 온지 열흘이 지났다. 학교에서 경순이 앞으로 편지가 날라왔다.
뜯어보니 성적표였다. 성적이 형편없다. 중간 밖에 되지 않는다.
“기도를 좀 하고 공부를 해라. 세상 학과도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야 잘 할 수 있는 거야.”
“공부하고 기도하고 무슨 관계가 있어요?”
경순은 아버지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모르는 소리, 공부를 하는 것도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 아니냐? 그러니 하나님께 총명한 머리를 달라고 기도해야지.”
2학기가 시작되어 경순은 진주로 갔다. 경순은 밤이고 낮이고 기도하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아침저녁 특별히 시간내어 기도하였고 책상 앞에서 공부를 시작하기 전 먼저 잠시 기도하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공부에 요령이 생겨지는 것이다.
학기 말 성적은 놀라울 정도로 올랐다.
6학년 때엔 3등을 하였다.
학기말 성적표를 보신 아버지는 경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얼굴에 웃음을 지었다.
“봐라. 성적이 올라가지 않았니? 기도의 응답이야.”
“앞으론 더 기도 많이 하겠습니다.”
경순은 진주 시원 여학교를 졸업한 후 동래 일신 여학교에 응시하기 위하여 원서를 내었다. 그러나 공부에 너무 심혈을 기울였음인지 날짜 4일을 앞두고 경순은 병을 얻어 자리에 누웠다.
열이 40도를 오르내리면서 혼수상태에 빠졌다. 배돈 병원에 입원을 하여 치료를 받았다.
얼마만큼 전신이 돌아오자 경순은 기도하였다. 입원하여 3일이 지나자 열이 내리고 몸이 가벼워 지는 것이다. 퇴원하자 경순은 짐을 챙겼다.
동래로 가기 위하여 역으로 갔다.
김용국 목사 딸과 함께 기차를 탔다. 그녀는 지난 해 시원여학교를 졸업하고, 일신 여학교에 응시하였지만 시험에 떨어졌다. 그래서 한 해 더 재수하여 시험치러 가는 것이다.
동래에 도착하여 우선 동래 교회를 찾아갔다.
김만일 목사가 시무하고 있었는데 그는 사전 연락을 받고 두 목사의 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거기엔 김해읍 교회 이 목사 딸과 그의 전도사 딸도 와 있었다. 가난한 교역자의 딸들이 가난한 교역자의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된 것이다.
시험을 치루고 발표를 기다렸는데 결과는 가슴 아픈 것이었다. 경순이 혼자 합격하고 다른 3명은 모두 떨어진 것이다.
시험에 떨어진 그들은 몹시 우는 것이었다. 시험이 무엇이기에 사람을 이렇게 슬프게 만드는가? 경순도 그들 친구들의 슬픔에 함께 젖었다.
차라리 자신도 그들과 함께 떨어져졌으면 싶었다. 함께 공부하게 되어 좋았는데 시험이란 게 그들 사이를 갈라 놓았다.
경순은 시험에 떨어진 친구들을 위로도 해주지 못하였다. 자신이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의 마음을 더 상하게 하는 결과가 될 것 같아, 간단히 몇 마디 하곤 집으로 향하였다.
거창으로 돌아가면서 경순은 아버지의 말씀을 다시 생각하였다.
“세상 학과도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야 잘 할 수 있는 거야.”
사실이었다.
경순은 기도의 힘이 참으로 큰 것임을 마음에 굳게 확신하였다.
제 6 장
일본제 고문과 한국제 신앙의 대결
1. 신사참배(神社參拜)의 사상적 배경
신사참배는 1935년 9월부터 시작되었다.
제6대 총독 우가끼(우가끼) 말년에 학교를 중심으로 실시하게 된 것이다.
신사참배는 일본국신(日本國神)을 숭배하는 일종의 우상숭배이다. 일본 개국신 아마데라스 오미까미를 비롯하여, 역대 천황(天皇)이나 무사들, 공로자, 순국 군인의 영을 숭배하기 위하여 신사를 짓고 그 앞에 참배하는 것이다.
이 참배는 처음 일본 학생들에게만 국한되어 있었다. 그러한 것을 일제가 만주를 점령하고 북지를 침범하여 국제 연맹을 탈퇴함으로써 한국에도 시행하게 되었다.
일제는 한국에선 우선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함으로써 사로잡으려 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평양 숭실학교와 숭실 전문학교, 숭의 여학교 등이 반기를 들고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 당시 평안남도 지사 야스따께는 반대하는 세 학교에 대하여 60일의 여유를 주면서 회담을 바랬다.
1935년 11월, 세 학교에서는 신사참배 반대 성명을 발표하게된 것이다. 야스따께 지사는 노하여 숭실학교, 숭실 전문학교 교장 윤산은(G.S. Mcunne)선교사와 숭의 여고 교장 스누크(V.L. snook)여사를 면직시켰다.
1936년 8월, 미나미 지로(南次限)가 제7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면서 신사참배는 본격적으로 감행되었다.
미나미 총독은 간악하고 교활한 자이다. 그는 본래 우가끼 계열의 장성(將星)이었다. 뿐만 아니라 우가끼가 물러서면서 추천을 해 주어 총독이 되었고 우가끼 정책을 계승할 것을 약속한 처지였다.
그러나 우가끼 세력이 일본 국내에서 힘을 잃게 되자 미나미는 조선 총독된 지 6개월 만에 우가끼를 배신하고 신흥 전쟁군벌에 아부하면서 잔혹한 정사를 펼치게 된 것이다.
미나미는 철저한 황국신민화(黃菊臣民化)와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내부적으로는 전쟁물자 수탈정책(收奪政策)을 실시하였다.
창씨개명(創氏改名)과 일어(日語) 사용을 강요하였고, 신사참배를 실시하므로 종교생활을 탄압하였다.
형식상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허용한다고 하면서 천황(天皇)을 신성불가침(神聖不可侵)의 존재로 조작하여 절대 순종을 주장하므로써 실은 신앙의 자유를 박탈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는 잠잠할 수가 없었다. 목사들은 강단에서 설교를 통하여 우상주의를 배격하였고, 신자들의 마음 속에 배일 사상을 침투시키게 되었다.
그러나 어느 시대든 인본주의는 나타나기 마련이었다. 목사들 중에는 시세의 바람을 타고 날쌔게 일제에 아부하면서 탄압을 피하려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날이 갈수록 반대자의 세력이 확장되자 일제는 노골적으로 교회 탄압 운동을 꾀하게 되었다.
주 목사는 신사참배 문제가 나오자 직감적으로 이는 말세에 나타날 바벨론 우상예배란 걸 인식하였다.
“그럴 수는 없다. 우상이 교회로 들어올 수는 없다. 교회가 우상을 용납할 수 는 없다. 이미 세상은 다 되었구나 이 우상숭배 문제 때문에 피를 흘리게 되겠구나.”
주 목사는 혼자 중얼거리며 기도 생활에 더욱 힘썼다.
2. 해운대 교회에서 터진 불씨
1938년 3월 해운대 교회에서 봄노회가 시작되었다. 주 목사는 그날 늦게 노회장소에 들어섰다.
노회원들의 얼굴들이 굳어 있었다. 이 날 오후에 심상찮은 일이 있었다. 그 되어진 일을 이야기 듣고는 주 목사 자신도 같은 심정으로 동의하였다.
오후에 되어진 일은 이러하였다.
한상동(韓尙東) 목사가 노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해운대 교회에 들어선 것은 오후 5시 경이었다.
별관으로 가니 이약신(李約臣) 목사가 먼저 와 있었다.
“한 목사님, 이제 오십니까?”
인사를 하는 이 목사의 얼굴에 검은 구름이 꽉 끼어 있었다.
“예 일찍 오셨군요.”
한 목사는 자리에 앉으면서 인사를 하고는 묵상 기도를 하였다.
한 목사가 머리를 들어 이 목사를 바라보니 이 목하는 근심어린 모습을 감추지 못하면서 입을 열었다.
“한 목사님, 큰일났습니다.”
“큰일이라니요.”
“삼 김이 허락을 하고 왔습니다.”
삼 김(三金) 김 ?일, 김 ?창, 김 ?진 세 목사를 두고 하는 말이다. 언젠가 경상남도 도경찰부에서 노회에 요구해온 일이 있었다.
노회가 모일 땐 노회장이 일을 처리하고 권한이 있지만 노회가 폐하고 나면 아무도 상대하여 말 할 대상이 없으니 노회대표 세 사람을 뽑아 달라는 것이었다.
노회가 이 일을 위하여 뽑은 사람이 삼 김이다.
도경찰부에 노회 대표로 간 삼 김이 신사참배하기로 허락을 하고 왔다는 것이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약신 목사의 얼굴은 금방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슬픈 얼굴이었다.
“이번 노회 때 보고를 한답니다. 보고를 하면 반대할 자가 있겠습니까? 경찰에서 노회에 참석합니다. 사복 경찰이 둘러서 있다가 반대하는 자가 있으면 연행하여 갈 것입니다. 그러니 이 일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목사의 말을 듣고 있던 한 목사의 얼굴이 굳어졌다.
한 목사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큰 일은 큰 일이지만 별 수가 없지 않습니까? 내가 그 보고서 받지 않기로 동의를 할 터이니 이 목사가 재청을 하시오.”
“그러면 됐습니다. 내가 재청을 하겠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었다.
한 목사는 가슴이 뛰었다. <이제는 죽었구나. 만일 신사참배하겠다는 저 보고가 부결이 되고 나며, 동래 경찰서장 목이 날아갈 것이고, 또한 도경찰국장의 목까지 날라 갈 것이다. 그러한 형편에 일개 목사의 생명이 땅 위에 존속하겠는가? 끌려가 심한 고문을 받고 개처럼 처참하게 죽이고 말 것이 아니겠는가?> 한 목사는 사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죽든지 살든지 이제는 하나님께 모든 걸 맡길 것 뿐이었다.
밤 8시, 개회 예배가 진행되었다. 사복 형사들이 교회당 내에 짝 깔려 있었다.
첫날 회무가 끝났다. 형사들이 흩어지고 회원들도 한 사람 한 사람 숙소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 때 교회당 안에서 통곡 소리가 터졌다.
한상동 목사의 애절한 기도 소리였다.
회원들의 기도가 동시에 터졌다. 주 목사도 이미 각오하고 있는터라 올 것이 왔구나 싶어 이 밤을 밝히며 철야 기도에 들어갔다.
이날 밤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던지 참석한 모든 회원들이 은혜를 충만히 받았다.
날이 밝자 김 ?환 목사가 자리에 일어나더니,
“나도 재청 삼청 하겠습니다.”
하고 외쳤다.
김 ?환 목사는 친일파였다. 그런데 그 밤의 은혜 분위기 속에서 감화를 받아 용기있는 말을 하게 된 것이다.
김 목사는 다시 소리쳤다.
“우리는 다 같이 행동합시다! 같이 죽읍시다! 주님을 위하여 죽을 때가 왔습니다.”
회원들의 마음은 동일하였다. 이 소식이 벌써 경찰서에 들어갔다. 동래 경찰서장이 해운대에 나타났다.
서장은 여관에 자리 잡고 앉아서 목사들을 호출하였다.
목사들은 담대한 마음으로 여관에 들어갔다. 서장은 목사들의 얼굴을 보더니 반가워 하면서 부드럽게 말을 하였다.
“신사참배에 대하여 너무 심각하게 생각지 마십시오. 우리는 이번 당신들의 노회에서 꼭 지지를 결정해 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결코 신사참배 하라 말라 소리 안하겠으니 이번 노회에서 그 보고를 하지도 말고 결의도 말아 주시오. 거듭 부탁합니다. 결코 이번 노회에서 이 문제에 대하여 거론하지 마십시오.”
서장은 설설 비는 투로 말을 뱉았다.
“좋습니다.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목사들은 이렇게 대답하고 여관을 물러 나왔다. 이리하여 이날 오전 회무는 무사히 끝났다.
오후 회무가 진행될 때엔 형사들도 다 돌아가고 서넛만 남아 뒷자리에서 졸고 있었다.
이러한 시간에 김 ?창 목사가 무슨 생각으로서인지 발언대에 나가 그 보고를 하고 말았다.
“이 보고 어떻게 하겠습니까?”
보고가 나왔으니 회장이 물을 수 밖에 없었다.
한상동 목사가 일어나
“그 보고 받지 않기로 동의합니다.”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동의에 재청합니다.”
이약신 목사의 목소리였다.
결국 김 ?창 목사의 보고는 부결이 되었다.
졸다가 깨어난 형사들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보고가 나왔다고?”
한 형사가 일어나 앞 회원에게 물었다.
“보고가 나왔습니다.”
그 보고 어떻게 되었오?“
“부결되었지요.”
“뭐라구?”
뜻 밖에 큰 일이 생겼다고 형사들은 뛰고 굴리며 야단법석이었다.
3. 금식기도와 굳은 결심
경남 노회를 마치고 돌아온 주 목사는 더욱 앞날의 한국 교회를 위하여 기도에 힘썼다.
거창 경찰서에도 경남 노회의 소식은 전해졌다. 신사참배 반대 강경파가 노회안에 많다는 정보를 입수한 거창 경찰서에서는 주 목사를 거창 지방 요인물(要人物)로 지목하였다.
4얼 어느 날.
거창 경찰서에서 드디어 주 목사를 호출하는 것이었다. 주 목사는 가볍게 경찰서로 들어섰다. 서장은 반색을 하면서,
“지난번 해운대에는 잘 다녀 왔오?”
말을 던진다.
“예, 잘 다녀 왔습니다.”
“그 때 노회에서 신사참배 반대를 결의했다면서요?”
“당연한 일이지요.”
“뭐라고요?”
서장은 책상을 꽝 치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기독신자로서 하나님 외에 딴 신이 없다고 주장한 일이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주 목사의 목소리는 깊은 계곡에서 흘러 내리는 맑은 물처럼 줄줄 흘렀다.
“하하, 이거 큰일 나겠군.”
서장은 안절부절 어쩔줄을 모른다.
서장은 태도를 바꾸어 인식시켜 볼려고 온갖 말을 다 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오늘은 그냥 가시오.”
서장은 더 이상 어쩌지를 못하고 돌려 보내는 것이다.
조선 총독부가 형식상이지만 신교(新敎)의 자유를 허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사참배 반대 이유만으로서는 구속(拘束)할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주 목사는 계속 심방하며 기도하는 일에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6월 어느날 이었다. 아무래도 마음이 답답하고 초조해 오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주 목사는 가조리(加祚里) 교회로 건너갔다. 조용한 곳이라 그곳에서 특별 기도를 시작했다.
신사참배 문제를 주제로 하고 2일간 금식기도를 하였다. 낮에는 주로 요한계시록을 탐독하였고 밤에는 기도에 열중하였다.
계시록을 읽으며 연구하는 중, 신사참배는 틀림없는 말세의 바벨론 우상숭배였다.
“이 우상숭배는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것이므로 싸워야한다.”
주 목사는 마음에 굳은 결심을 하였다.
<어떤 일이 있어도 싸워 이겨야 해! 못이기면 죽는 거다. 영혼이 죽는 거다. 영혼이 죽는 것은 영원히 죽는 것이다.>
혼자 말하던 주 목사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무서운 일이기 때문이다.
영혼이 죽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인생으로 태어나서 태어난 목적을 상실하고 상실되는 것 아닌가? 무서운 일이다.
주 목사는 마음을 모두어 기도하였다.
“주님! 담대한 힘을 주옵소서. 나는 무능하고 나의 힘은 약합니다. 하나님께서 이김을 주시지 않으시면 별 수 없이 넘어집니다. 주님 힘을 주옵소서, 힘을‥‥ 하늘의 힘을 주옵소서‥‥.”
주 목사는 신사참배를 반대를 위하여 싸울 것을 굳게 다짐하면서 가조리 교회를 떠났다.
거창교회로 돌아온 주 목사는 줄곧 방에 앉아 전적 하나님께만 매달렸다.
‘사람은 세상에 났다가 한 번은 죽고 만다. 한 번은 죽고 말 인생, 그렇다면 한 번 뿐인 인생의 죽음을 어떻게 죽을 것인가? 보다 참되고 보람되게 죽어야 할 것이 아닌가? 참되고 보람된 죽음은 어떤 것인가? 나를 위해 죽어 주신 주 예수님을 위하여 죽는 길 밖에 더 참되고 가치있는 죽음이 있겠는가?’
죽자! 주님을 위하여 죽자. 주 목사는 눈을 감는다.
“주님, 나에게 순교의 큰 축복을 주옵소서.”
두 줄기 눈물이 양 볼을 타고 주르르 흘러 내린다.
이상한 일이었다. 기도 할때마다 힘이 솟았다. 전에 체험하지 못한 큰 힘이었다. 담대하여 지는 것이었다.
주 목사는 매일매일 신비한 은혜 세계에서 믿음의 힘을 기르고 있었다.
4. 치욕의 제27회 총회
9월이 되자 전국 교회는 술렁술렁하였다.
경찰의 손길은 교회에 미쳐 신사참배 반대 교직자들에게 압력을 가하였다.
총회 전체 각 노회에서는 노회가 모였다. 경남 노회는 밀양읍 교회에서 모였다. 주 목사는 참석하지 못하였다. 경찰에서 예비검속을 하였기 때문이다.
총대를 뽑는 노회이므로 신사참배 반대자가 총대가 되면 큰일이라고 미리 선수를 쓴 것이었다. 주 목사 뿐 아니었다. 부산에서는 한상동 목사를 비롯한 몇 목사들이 예비 검속되었다.
검속 이유는 신사참배 반대가 아니고 다른 이유에서였다.
총독부는 신앙의 자유를 허용한다고 법을 내 걸고 있기 때문에 신앙문제 정식 체포는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주남고 목사는 사상이 불건전하다 하여 검속하였으며, 한 상동목사는 싱성불가침(神聖不可侵)의 천황에 대한 불경 죄를 적용하여 검속하였다.
평양에서는 주기철(朱基撤) 목사와 송영길(宋永吉) 목사도 검속하였는데, 그들은 대구 유재기(劉載奇) 목사의 농촌 사업을 목적으로 하는 농우회(農友會)사건을 적용하였다.
채정민(蔡廷敏) 목사, 이기선(李基宣) 목사 등 허다한 목사들도 근사한 이유를 붙여 미리 예비 검속을 하였다.
총회 날자가 가까웠다. 지방 경찰서에서는, 선정된 총회 총대들을 불러 신사참배를 인식시켰다.
9월 9일.
조선 예수교 장로회 제27회 총회가 개회되는 날이다.
평양 시내에는 사복 형사들이 깔렸다.
총대들은 풀이 죽어 총회 장소로 모여 들었다. 그러나 기가나서 펄펄한 총대들도 많았다. 그들은 친일파 목사들이었다.
총회 장소는 성문밖 교회다.
하오 8시 정각. 총대 목사 86명, 장로 총대 85명, 선교사 22명 등 총회원 193명이 총회장소 지정좌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방청은 겨우 3명이었다. 97명의 경찰관들이 틈틈이 끼어 앉아 억압을 주었다.
총회장 이문주(李文主) 목사 사회로 조선 장로회 제27회 총회가 개회된 것이다.
예배가 끝나고 임원 서거에 들어갔다.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회장에 홍택기(洪澤麒), 부회장에 김길창(金吉昌), 서기에 곽진근(郭眞根), 회계 고한규(高漢糾) 제씨가 각각 피선되었다.
총회는 정회가 되었다.
다음 날, 역사적인 9월 10일.
오전 9시 45분에 정시보다 15분 늦게 총회가 속회되었다. 이유는 임원들이 밖에 게양된 일장기에 경배하는 일과, 평남 도지사와 경찰서장이 늦게 도착된 일로 인하여 15분 지연된 것이다.
10시 30분, 공천부장 함 ?영 목사의 보고가 시작되었다.
“‥‥평양, 평서 안주 3노회 연합대표 박응률 목사의 신사참배 결의 및 성명서 발표의 제안권은 그대로 받아드리는 것이 가한 줄 아오며‥‥”
하고 낭독되자 회장이 가결을 지울려고 하였다. 그 때 방위량 선교사가 회장을 불렀다. 옆자리의 형사가 제지를 하였다.
회장이 소리쳤다.
“선교사는 잠잠하시오!”
방위량 선교사는,
“항의합니다!”
하고 외치다가 앉았다. 권세열 선교사가,
“회장 발언권을 주시오!”
소리쳤지만 그 소리도 묵살되고 말았다.
회장은 그 어수선한 분위기를 이용하여 입을 열었다.
“가하면 예하시오.”
“예‥‥”
힘 없는 대답이 나왔다.
“가결 되었습니다.”
하고 강대상을 쳤다. 그 때였다.
“회장! 규칙 위반이오!”
외치며 일어난 사람은 한부선(韓富善) 선교사였다. 회장이 가만 묻고, 부를 묻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선 것이다.
“왜 가만 묻고 부는 묻지 않습니까? 이것은 불법이오.”
그러나 말을 계속하지 못하도록 옆에 앉았던 경찰관이 한 선교사를 끌어 내는 것이었다. 안간 힘을 쓰며 규칙을 들고 항의하였지만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제27회 총회는 신사참배하기로 결의를 보게 된 것이다.
총회는 폐회가 되었다. 김 ?창 부회장은 총회를 대표해서 각 노회 노회장들과 함께 평양신사를 찾아가서 참배를 하였다.
5. 금족령(禁足令)
주 목사는 총회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소식은 다 들었다. 총회 소식을 듣고 흥분하여 탄식하였다.
하루는 경찰에서 다시 주 목사를 불렀다. 점점 험악하여 지는 형편이었다. 서장은 주 목사를 보더니 비굴한 웃음을 얼굴가에 날리며 의자를 내어 놓았다.
“앉으시오.”
주 목사는 비소어린 서장의 얼굴에서 눈을 도려 창문가를 바라보며 자리에 앉았다.
“평양소식 들었겠지요?”
서장이 입을 열었다.
“들었습니다.”
“어떻소? 이제는 총회에서도 신사참배 하도록 결의가 되었고하니 거절 못하기겠지요?”
“총회 결의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총회 결의가 소용 없다니‥‥ 총회를 불복종 하겠다는게요?”
“총회가 불법으로 결의를 한 일이라면 순종할 수 없지요.”
“그래요.”
서장의 얼굴엔 다시 살얼음이 일기 시작하였다.
“어떤 일이 있어도 신사참배만은 할 수 없습니다.”
주 목사의 목소리는 조용하면서도 범할 수 없는 위엄이 풍겨 흘렀다.
서장은 버럭 성을 내면서,
“당신의 발을 오늘부터 묶어 두겠오! 집에서 한 발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거요. 나 거창 경찰서장의 명령이오!”
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주 목사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날 오후 일절 자유가 없었다.
고등계 형사들이 집을 교대로 지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경남 노회에서는 주 목사에 대하여 거창읍 교회 위임목사 해제통보가 왔다.
강제로 교회 사면이 되었다. 그리고 사택을 내어 놓아야 했다.
노회의 압력을 받은 교회측에서는 사택에서 옮겨 주기를 통보해 왔다.
참으로 비정한 일이었다.
주 목사는 말없이 죽전(竹田)에 있는 자택으로 짐을 옮겼다. 밤에 니고데모처럼 박병영 집사가 쌀 몇 되를 가지고 찾아왔다.
“목사님‥‥”
말을 계속하지 못하는 박 집사는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주 목사는 박 집사의 손을 꼭 쥐어 주면서,
“박 집사, 참 고맙소! 마음은 결코 불의한 자들에게 빼앗기지마시오. 하나님께서 은혜 주실 것입니다.”
뜨거운 말을 들려 주었다.
박 집사는 후에(1947년 11월 30일) 주 목사 주례로 장로 장립을 받았다. 주 목사 댁에는 교회 직분자들의 발까지 끊어졌다.
쓸쓸한 서재에 앉은 주 목사는 기도와 성경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금족령이 내려 바깥 출입이 금지되었다. 식량이 떨어져 어려움이 극심하였다.
이웃에 조재룡(曺在龍) 장로댁이 있었다. 조 장로는 평소에도 주 목사 편에서정신적으로 도와준 분이다. 그는 농사를 얼마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려운 시기지만 양식을 숨겨 놓고 굶지는 않았다.
그는 틈틈이 얼마의 양식을 주 목사 댁에 전해주곤 하였다. 문제가 있을 때 목사를 도우고 위해 주는 덕과 인정이 있는 장로였다.
그의 아들 조상덕(曺尙德)은 당시 15세의 소년이었는데 아버지가 목사를 위해 주는 모습을 보고 감동하였다 한다.
주 목사의 집문 밖에는 형사들이 항시 사나운 맹수들처럼 어르릉 거리고 있었다.
이런 때에 경남 노회에서 임원 중 몇이 거창에 왔다. 김 ?창 목사와 김?일 목사였다. 그들은 주 목사와 가까운 사이였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노회일을 염려하였고 의논하였다. 그러나 신사참배 문제가 나자 그들과 주 목사 사이에는 거리가 생겼다.
오늘 그들이 주 목사를 찾아 온 것은 도경(道警)의 부탁을 받고 파송되어 온 것으로 주 목사를 설득하기 위하여 왔다.
허나 주 목사는 조용히 거절하였다.
김 ?일 목사가
“주 목사님, 우리 강변에 나가서 좀 이야기 합시다.”
다시 제의를 하였다.
“그 일이라면 더 만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일로는 대화가 되겠지만 신사참배에 대하여는 두 말할 여지가 없습니다.”
아무래 도 되지 않을 것 같자, 두 목사는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했다.
주 목사도 따라 일어났다. 그때, 주 목사 부인 남술남 여사가 주 목사에게 눈치를 하였다.
주 목사가 부인쪽을 향하자,
“따라 나가지 마시오, 나가면 무슨 말로 유혹할런지 모릅니다.”
부인의 음성이 날카로웠다.
“안심하시오, 내가 그들의 말에 넘어갈상 싶소?”
“장담하지 마십시오, 베드로도 장담하다가 실패하였습니다.”
“인사만 하고 오겠오.”
주 목사는 일어나 회색 두루막을 입었다. 그러나 두루막 깃고 대가 붙어 있지를 않았다.
“여보, 이 두르막 동전 좀 달아 주시오.”
그러나 부인은 따라나가 시험을 받을까 염려하여 깃 고대를 달아주지 않았다.
주 목사는 더 부인에게 졸라 봤자 소용없음을 알고 털실로 짠 녹도리로 감싸 두르고 밖으로 나갔다. 문밖에서 전송을 하곤 곧장 들어왔다.
주 목사도 주 목사지만 부인의 애국심과 신앙심은 주 목사 못지않게 강하였다.“ 그러기에 어떤 어려움과 수난도 가정에서 다 참고 이겨 나간 것이고 주 목사에게 큰 힘이 되었던 것이다.
교회에서는 생활비가 나오지 않았다.
교역자 생활에 한 달만 생활비가 나오지 않아도 빚을 져야한다. 겨우 생활 할 수 있을 정도의 적은 생활비에다 그것마저 끊어졌으니 생활은 막연하게 되었다.
가을이었다. 들에는 추수가 한창이고 농가에서는 쌀가마가 오고 갔다.
여름동안 검게 타고 깡마른 농부들의 얼굴에 약간의 윤기가 돌고 살이 붙는 것도 이때이다. 허나 주 목사의 집에는 양식이 모자랐다.
큰 아들 경중이 마산 복음 전수학교를 졸업하고 지난 해 3월부터 거창 보성학원에 교원으로 나가긴 하지만 그 월급은 가정에 별로 보탬이 되지 못하였다.
간혹 할머니 교인들이 치마폭에 쌀 얼마씩을 숨겨 비밀리에 전해 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었다.
쌀을 가지고 다니다가 일본 형사들에게 붙잡히면 용서가 없는 때였다. 그들은 경제범으로 취급을 했다. 그러기에 여간한 용기와 간절함이 없이는 감히 쌀을 치마폭에 싸들고 나설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고등계 형사들이 주 목사의 집을 경계하고 있는 이런 살벌한 환경에서 쌀을 전해 준다는 것이 얼마나 힘드는 일이겠는가?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은 환란 때에 더욱 꽃피는 것이었다.
핍박은 갈수록 노골화 되고 극력했다. 경찰에서는 수시로 주 목사를 호출하였고 들어가면 매를 맞는 것이었다. 심한 고문으로 괴로움을 주기도 했다.
장작쪽으로 모질게 때렸다. 피가나고 시멘트 바닥이 피로 물들면 물을 부어 씻고 또 때리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기절이라도 하면 물통을 덮어 씌웠다.
이럴때 경중과 경효가 양유 넣은 주전자를 들고 경찰서에 찾아갔다.
아버지께 양유를 전달하기 위해서이다.
주 목사 집에는 젖짜는 양이 한 마리 있었다. 이 양이 주 목사댁의 식구들에게 영양을 공급해 주는 유일한 원천이였다. 경중이와 경효가 경찰서 뒷문으로 들어섰을 때, 장작쪽으로 사람을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린 경효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 했다. 살금살금 기어들어 창문 안으로 보니 다른 사람이 아닌 아버지 주 목사가 매를 맞고 있었다.
경효는 순간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 단번에 뛰어들어 장작을 뺏어 형사에게 휘둘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 뿐이었다. 힘이 없었다. 자신에게도 힘이 없었고, 나라를 잃은 백성이기에 더욱 힘이 없었다.
경효는 고사리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바드득 갈았다. 순사를 만나 주전자를 주면서 아버지께 좀 전하여 달라고 간청을 했다.
순사는 주전자를 받아 경호네가 보는 앞에서 그냥 땅에 부어 버리는 것이었다. 아버지께 드리기 위하여 온 식구가 아끼고 아낀 야유이다.
그러나 그 아까운 양유를 순사는 땅에 부어버리는 것이다. 치솟는 어린 가슴의 분노를 그대로 삼킨 채, 경효는 경중 형을 따라 집으로 돌아왔다.
경효의 눈에 눈물이 철철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피로 범벅된 모습이 어른거렸다.
고등계 형사들은 면회 온 두 아들이 돌아간 후에도 고문을 계속하였다. 때리고 또 때려실신 상태가 되면 그들은 비웃는 것이었다.
마치 예수님을 고문하던 로마 군인들 처럼,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
고 하듯이.
“지도자가 되어가지고 이게 무슨 꼴이람!”
하고 그들은 비웃었다.
찬물을 끼얹어 희미한 정신을 가다듬어 몸을 일으키면,
“잘 생각해봐!”
말을 뱉는다.
“백 번 생각해 봐도 마찬가지요. 참 신은 하나님 뿐, 다른 신은 없는게요. 신사참배는 할 수 없어!”
다시 때린다.
주 목사는 실신상태 그대로 업혀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서 며칠을 치료를 받고 겨우 일어났다. 그는 조용히 생각하여 보았다.
<신사참배,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죄다. 그런데 일반 신자들은 이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몰라서 계명을 어긴다면 이 얼마나 수치스럽고 억울한 일인가? 알게 해야지, 가르쳐 주어야 한다.>
주 목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간다. 그의 옷은 언제나 무명 저고리 바지에 두루마기다.
철저한 한복주의자. 이 한복주의자는 그의 민족의식에서였다.
그만큼 그는 한국을 사랑했고, 한국의 것을 소중히 여겼다.
그의 한복차림 바람에 고생하는 이는 부인 남술남(南述藍)여사였다. 그녀는 불평 한 마디 없이 남편의 일을 도왔고 어린 자녀들을 보살펴 왔다.
남편에겐 열녀요, 자녀들에겐 너무나 훌륭한 어머니였다. 씻은듯 가난한 무임교역자의 가정 살림을 짜증없이 끌고 가는 그녀의 모습을 볼 때마다 주 목사는 그지없이 미안했다.
때 묻은 한복을 어느 사이에 씻고 말려 다듬이질을 하였는지 언제나 깨끗한 것을 내어 주었다.
그 후 경중은 징집(徵集) 문제로 집을 나가 행방을 감추게 되었다. 경도(璟道)는 전주 신흥 중학교를 다니다가 대구 개성 중학교에 편입하여 다녔다. 물론 고학을 하였다.
겨도는 개성 중학을 졸업하고 일본 경도에 있는 고종 형의 주선으로 도일하였다. 유학의 길을 떠난 것이다.
경순(璟順)은 동래 일신학교에 재학 중이다. 영양부족과 기관지염으로 쇠약하고 공부를 하는 것보다 병을 앓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약 한첩 제대로 쓰지 못하고 병과 싸우는 그녀는 하나님의 도우심만 바라볼 뿐이었다.
6. 신사참배 반대 운동
주 목사는 깨끗하게 다듬어진 한복을 입고 집을 나섰다. 거창시찰 구역내의 교회들을 순방(巡訪)하기 위해서이다.
주 목사는 거창, 합천, 함양지방 교회들을 순방하면서 교인들을 만났다. 그리곤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신사참배는 결코 해서는 안됩니다. 어떻게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우상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주 목사의 권면은 좋은 반응을 일으켰다. 모두들 그렇다고 굳은 마음의 결심을 보여 주었다.
1939년 12월 6일.
주 목사는 다시 거창 경찰서에 연행되었다.
담당 고등계 형사는 심문을 하였다.
“모든 목사들이 다 신사참배를 하고도 예수를 잘 믿고 있는데 당신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이냐?”
“나는 그럴 수 없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요.”
“이 거창은 조용하단 말이야! 당신 혼자 때문에 우리도 귀찮아!”
아무리 타이르며 욱박질러도 소용이 없었다. 형사들은 유치장으로 끌고가서 가두어 버렸다.
12월 초순 인데도 덕유산(德裕山) 봉우리엔 흰눈이 덮혀 있었다. 눈 위로 굴러 내려온 바람은 거창의 넓은 벌판을 지나 시가지로 휘몰아 치면서 다욱 싸늘하고 그리고 어둡고, 침울하였다.
이 음침한 유치장 안에 주 목사는 혼자 앉아 있었다.
밤 8시가 되자 고등계 형사 둘이 철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들은 주 목사에게 무릎을 꿇게 하였다.
심문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들은 기대하였던 대답이 나오지 않을 때마다 갖은 심한 고문을 가하였다.
참으로 지독한 고문이 계속되었다. 몽둥이를 가지고 패다가 그것이 부러지자 장작개비를 가지고 와서 때리는 것이다.
굶주린 육체는 추위를 더 많이 느낀다. 살갗이 얼어 여들여들한데 장작으로 때렷으니 그 아픔이 어떠하였을까?
피는 시멘트 바닥을 불게 물들였다. 형사들은 그 피를 물로 씻어내고 또 때렸지만 그러나 주 목사는 말이 없었다.
원래 주 목사는 조용한 사람이다. 말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기에 더 심한 고문을 당했는지 모른다.
주 목사는 고문을 당하다가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주 목사가 눈을 떳을 땐 사방은 조용하였다. 30촉짜리 전등 불이 환히 유치장안을 비추고 있었다. 출입문이 잠겨 있다.
아무도 없었다. 그는 시멘트 바닥에 그냥 쓰러져 있는 것이다. 정신을 가다듬은 주 목사는 그대로 업디어 주님께 기도를 하였다.
“사랑하는 주님! 감사합니다. 불의한 자들에게 굴복하지 않은 것을 감사합니다. 주께서 나의 곁을 떠나지 모옵소서.”
그의 마음은 한없이 평온하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히 물에 젖은 시멘트 바닥은 얼음덩이처럼 차가와야 했고, 그 다신의 몸은 오한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렇지를 않는 것이다. 그는 추위를 잊고 있는 것이다. 고문 때문에 긴장되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었다. 분명히 그는 훈훈한 온기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몸 전체가 훈훈하였다. 그 손을 내밀어 시멘트 바닥을 만져 보았다. 뜨끈뜨끈한 것이 마치 온돌방 같았다.
그는 전시이 폭신폭신한 털로 담요 속에 파묻혀 있는듯 한없이 편하였다.
사르르 눈이 감기며 잠이 왔다. 잠을 자게 되었다.
주 목사는 뒤에 이 일을 이야기 하면서,
“푹신푹신한 털은 실제 털이 아니라, 우리 주님 자신이었습니다. 나는 주님의 품 속에서 잠자며 편안히 쉬면서 지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한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주님은 고난당하는 자와 함께 하신다. 반대하다가 고난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신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들과는 불꽃 속에서 다니엘과는 사자굴 속에서 주님은 함께 하여 주셨다.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일이 우상숭배하는 일이다. 이 일을 하지 않기 위해 유치장에서 고문당하는 주님의 종을 주께서 외면하시겠는가?
주님은 주님의 이름 때문에 주님의 종을 얼마나 바라보시며 기뻐하셨을까? 주 목사는 구금된지 8일만에 석방이 되어 나왔다.
물론 장정의 등에 업혀 나온 것이다.
집에 누어 치료를 받았다.
전신이 바스라지듯 아팠다. 바로 누워서는 허리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다. 겨우 일어나 뒷간 정도만 다닐 수 있게 되었다.
1월 3일 오후.
두 분의 손님이 왔다.
밀양 마산에서 한상동 목사가 이인재 전도사와 함께 주 목사를 찾아 온 것이다. 참으로 반가운 손님들이었다.
주 목사는 두 분의 동지를 방으로 영접하였다.
“그 동안 어떻게 지냈습니까?”
주 목사의 말에 한 목사도 피차 마찬가지란 걸 말했다.
“나도 약 2주일 들어가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생명을 내놓은 마당에 그게 뭐 대단한 일입니까?”
한 목사는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조용히 계속한다.
“평양과 만주 지방에서 신사참배 반대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평양에서 이 일을 위해 이 전도사가 뛰어 내려왔지요.”
한 목사의 말을 받아 이인재 전도사가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그는 평양신학교 재학중인 신학생이었다.
지난 9월, 27회 총회에서 신학교 개학을 무기 연기시켰기 때문에 정식 강의를 받지 못하고 그는 선교사들에게 개인 교수를 받고 있었다.
그 때, 선교사들을 통하여 신사참배 반대 운동의 소식을 들었다. 북한 일대에 많은 동지들이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있다고 했다.
만주에서는 한부선 선교사가 신사참배 반대 이유를 인쇄해서 교회마다 나누어 주었다고 했다.
그 무렵 한 청년이 기숙사에 이 인재 전도사를 찾아온 것이다. 청년은 돈 400원을 내어 놓으면서 신사참배 반대 운동에 사용해 달라고 하였다.
이인재 전도사는 더 이상 한가하게 앉아 공부할 수 없었다. 그는 깊이 생각하였다.
<아, 지금은 공부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구나. 모두들 신사참배 반대 운동에 나서고 있는데, 나 혼자 한가하게 공부를 하고 있다니‥‥>
그리하여 이 전도사는 평양을 떠났다.
그 무렵 한 목사는 마산 문창교회에서 강제 사면을 당하고 부산 다대포 고향집에 내려가 있었다.
집에서 기도하던 중 아무래도 신사참배 반대에 조금 소극적인 태도로 있을 것이 아니라 적극적 반대를 하여야 하겠다고 생각되어 행동으로 나섰다.
그래서 교회를 찾아다니며 반대를 주장하였다.
그렇게 다니다가 1938년 10얼, 밀양 마산 교회에서 일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경찰의 손이 이곳에서 뻗쳤다. 수차 경방대원(警防隊員)들과 형사들에 의해 경찰서에 연행되어 고문을 당하였다.
1939년 12월 어느 날은 밀양 경찰서에서 2주일 동안의 지독한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수난 속에 있는 한 목사를 이인재 전도사가 찾아온 것이다. 반가웠다. 이 난국에 참 동지를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밤이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 하며, 두 주의 충성된 좋들은 시간을 보냈다. 다음 날, 두 사람은 같은 신앙의 동지들을 만나기 위하여 길을 떠났다.,
거창까지 온 것이다.
두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주 목사는 감격하였다.
“잘 오셨습니다. 소식이 궁금하였는데 이렇게 소식을 듣고나니 생가기 납니다.”
주 목사의 파리한 얼굴에 미소가 지나갔다.
“반대운동을 하여야지요. 우리가 소리치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칠것입니다.”
주 목사는 한 목사와 이 전도사의 손을 굳게 잡았다. 한 목사는 이 전도사와 세운 실행종목을 말하였다.
“우리는 신사참배 반대 운동의 적극적인 방법을 이렇게 세워보았습니다.”
① 신사참배하는 교회에는 출석하지 말 것.
② 신사참배한 목사에게서 성례 받지 말 것.
③ 신사참배한 교회에 십일조와 연보를 하지 말 것.
④ 신사참배하는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교인끼리 모여 예배하되 특별히 가정예배를 위주할 것.
이상입니다. 주 목사님은 이 안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 목사에게 한 마디 더 제의를 하였다.
“이 반대 운동은 결코 비밀리 할 필요가 없습니다. 공공연히 보란듯이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비밀리 반대운동을 해 놓으면 경찰에서 탄압할 때 물러설 사람들이 많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난 받을 것을 각오하고 정정당당하게 공개적으로 반대 운동을 하여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일제는 쉽사리 신사참배 강요를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들이 이 땅을 물러서기 전에는 더욱 심한 횡포로 나타날 것이니 이 운동은 장기전이지요.”
주 목사는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한 목사는 일어서면서 주 목사 손에 백원(百圓)을 쥐어 주었다.
“신사참배 반대 운동에 사용하십시오.”
세 동지는 굳게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1월 중순경, 주 목사는 함양 교회(咸陽敎會)를 방문하였다. 황보기(皇甫基) 장로를 만났다.
“신사참배는 계명에 위반되니 하나님 앞에 큰 죄인입니다.
절대로 신사참배하면 안됩니다.“
주 목사의 말을 들은 황보기 장로는,
“감사합니다. 계명을 어기는 일을 해서 되겠습니까?”
마음에 굳은 결심을 하는듯 하였다.
황보기 장로는 전부터 주 목사를 존경하고 따르던 분이었다. 이번 주 목사의 방문은 그에게 힘을 주었다.
3월 27일. 주 목사는 진주 봉래정에 있는 황성호(黃聖浩)씨 댁에 갔다. 마침 한상동 목사와 이인재 전도사가 와 있었다.
함께 기도회를 가지며 더욱 신사참배 반대 운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 후 계속 주 목사는 경남 여러 지방을 다니며 반대 운동을 열열히 하였다.
5월 하순경에는 김해 대저 교회에 가서 심문태씨를 만나고 그 밤에 대저 교회에서 집회를 가졌다.
주 목사는 개인을 만나 권면할 때나 집회를 통한 설교에서나 제목은 ‘하나님은 사랑이다’였다.
성경은 요한 1서 4장을 중심했다.
첫 대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독생자를 주셨다.
둘째 대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성령님을 주셨다.
셋째 대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계명을 주셨 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사랑해야 되지 않겠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고 계명을 어길 수가 없다.
밷후 3장에 말세적 신자는 성결한 행실을 가지고 경건한 신앙으로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마태복음 24장에 예수님께서 말세의 징조를 말씀하셨는데, 말세에는 환란이 심하고, 기근이 극심하고, 교회에 박해가 오며, 거짓 그리스도가 출현하고,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일어나며, 악한 사상들이 일어날 것을 말씀하셨다.
지금 이 땅에 이러한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아서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웠으니 천년왕국에 들어갈 신자들은 우상숭배인 신사참배를 절대 배격해야 한다. 결사적으로 신사참배를 반대해야 한다.
이상이 주 목사가 다니며 외친 설교의 요지였다.
주 목사는 해운대, 함양, 안의, 각목, 개평, 가천, 무능, 위천, 산청군 단계, 합천삼가, 장대 각 교회를 순회하며, 성도들에게 설교하였다.
그리고 개인개인에게 권면하였다. 약 6개월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었다.
드디어 1940년 7월 16일, 주 목사는 거창경찰서에 또 다시 구금이 되었다.
제 7장 평양으로 가는길
1. 거창 경찰서에서 진주로 압송
거창 경찰서에 구금된 다음날.
1940년 7월 17일이었다. 진주 경찰서 유치장으로 압송한다고 하였다. 거창 경찰서에서는 더 이상 다루지 않고 진주로 넘긴다는 것이었다.
상부의 명령인 것 같았다. 중죄로 다스릴 모양이었다. 주 목사는 모든 걸 체념하였다.
산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허지만 주 하나님을 계명대로 사랑하며 살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 땅 위에선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손에 무거운 수갑이 채워졌다. 자동차를 타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아내가 어느듯 알고 어린 딸 경은이를 업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보내는 사람과 떠나는 사람의 마음이 꼭같이 괴로웠다. 세 살난 경은이가 엄마의 등에서 아빠를 보고 안다고 손을 흔든다.
주 목사는 목이 메어 말을 하지 못했다. 눈에서 말간 물기가 빙그르르 감돌다가 땅에 떨어졌다.
아내가 주 목사 가까이 다가섰다.
“끝까지 참으세요.”
아내는 힘을 주어 말했다.
“굴하면 안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참고 견디세요. 끝까지 참아야 합니다.”
주 목사의 시선이 아내의 시선에 짧게 부딪쳤다.
“끝까지 참아야 합니다.”
다시 아내가 다짐을 했다. 주 목사는 입을 꼭 다문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내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주 목사가 수갑찬 손등으로 얼른 눈시울을 닦고 자동차에 올랐다. 아내에게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듯 했지만 삼켜버리는 것 같았다
자동차는 시내를 빠져 미루나무가 줄지어 선 신작로를 달리고 있었다. 이제 가면 살아서 이 길을 다시 돌아올 수 없을런지 모른다.
누가 살아 올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그의 가슴에는 순교, 순교의 아름다운 제물이 되어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정든 고향 거창이 뒤로 물러가고 있었다.
인정을 나누는 소박한 이곳에 태어나, 자라고, 교육을 받고, 한 땐 군수의 비서관으로 호강도 누리며 윤택하게 살기도 했다. 그러나 복음을 받고 인간적인 부귀공명을 버리고 복음과 함께 뜻있게 살기를 원하고 신앙생활에 열심을 냈다.
세례를 받고,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전도사가 되고, 그리하여 복음을 전했다.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고 사명감에 불타 목회를 하였다.
삼군(거창, 함양...등)시찰장으로 도보로 다니며 일을 보았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을 버려두고 거창을 떠난다.
누가 이런 슬픈 비극을 가져다 준 것인가? 정든 교회 교우들과의 뜨거운 관계를 끊게 하고 사랑하던 가족마저 버려둔 채 누가 저 손에 수갑을 채워 데려가는가? ‘역적!’누가 만든 이름인가? 누가 붙인 대명사인가?
그는 지금 비애국민이란 오명을 쓰고 아무의 동정도 받지 못한 채, 끌려가는 것이다. 가야산, 덕유산, 지리산은 변함이 없건만 인간만이 변한 것이다.
왜 인간은 변하는 것인가?
그 마음에 죄성이 있기 때문이다. 죄성을 가진 인간의 마음은 간사하다. 옳고 바른 것을 분별할 줄 모르는 것이다.
옳지 않은 것도 옳다고 교육을 시키면 그런 것인가 보다고 따라가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인간은 그가 접해 있는 환경에 따라 그 마음도 좌우되는 것이다.
주 목사는 사람을 원망하지 않았다. 거창읍 교회 교인들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었다. 마음은 원이지만 환경에 약한 신자들! 그들이 잘되기 만을 마음으로 빌면서 거창을 떠났다.
모든 것은 떠났다. 이제 다시 살아 올 수 있다는 것은 아예 기대밖이다.
주어진 환난을 잘 이기고 끝까지 참아 순교하는 길 밖에 그에겐 없다. 아내가 마지막으로 당부한 말,
“끝까지 참으세요.”
힘 주어 하던 말이 귓가에 살아 쟁쟁하다.
‘끝까지 참아 견뎌야지.’
자동차는 안의 함양을 지나 진주로 들어가고 있었다. 주 목사를 실은 자동차는 저녁 늦게야 진주 경찰서 앞에 정차하였다.
형사들의 지시를 따라 차에서 내려 유치장으로 들어섰다. 더위가 유치창 안에 도사리고 있었다.
바람 하나 통해지지 않는 유치장 안에 주 목사는 감금이 되었다.
다음 날, 주 목사는 고등계 김을도 형사에게 심문을 받았다.
그는 한국 사람이었다. 그러나 일본인 보다 더 지독한 편이었다. 김을도 형사는 주 목사에게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고 다니면서 설교한 설교 제목과 요지를 상세히 말하라고 하였다.
주 목사는 서슴없이 이야기 해 주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는 요지의 설교를 하자 다른 형사가 기록을 하였다. 설교가 끝나자 김 형사는 다시 입을 열었다.
“천황은 어떻게 생각하나?”
“천황은 일본의 임금이오.”
“그 이상은 생각지 않나?”
“생각지 않소!”
“청황이 높으냐? 하나님이 높으냐?”
“천황은 살아있는 신이야!”
“예수님의 재림시엔 그렇게 됩니다.”
“그 때 천황도 심판을 받아야 하는가?”
“그렇습니다. 인간은 똑같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기 때문에 천황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지요.”
“당신은 지금 불경죄를 범하고 있는거야.”
“나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오.”
“신성불가침의 천황에 대하여 신성모독죄를 범한거야, 용서할 수가 없어.”
여기서도 심한 고문은 계속되었다. 주 목사는 진주 유치장에 있는 동안 4차에 걸친 심문과 견딜 수 없는 고문을 당하였다. 이젠 고문 종류에 따라 그것이 얼마만큼 고통스럽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중에도 매일 성경을 암송하며 찬송을 부르면서 그 쓰라린 고통의 유치장 생활을 견디어 나갔다.
그는 때마다 영혼으로 찬송을 불렀다.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세상에 붙은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아련한 기쁨이 가슴에서 뜨겁게 피어 올랐다.
“온 세상 만물 가져도
주 은혜 못다 갚겠네
특별한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
주 목사의 심령엔 은은한 즐거움이 먼 하늘 끝에서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그는 감사와 기쁨 가운데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2. 옥중 동지들
주 목사는 이 곳 진주 유치장에서 최덕지 전도사를 만났다.
최 전도사도 일차 검거되어 이 곳에서 1년을 지내다가 병보석으로 지난 해 4월 중순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계속 각 지방으로 반대운동을 하고 다니다가 1940년 6월 23일 동영에서 검거되어 이 곳으로 옮겨진 것이다.
그녀를 만나서도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다. 취조가 있을 때 복도를 지나가는 모습을 철장 속에서 바라보는 정도였다.
7월 중순경, 방가운(?) 동지가 유치장에 들어왔다.
황철도 전도사였다. 그는 창녕군 남지신 영수 집에서 연행되어 창녕 경찰서로 넘어갔다가 진주 유치장으로 압송된 것이다.
주 목사는 황 전도사를 만나 마음으로 반가웠지만 체질 약한 것이 걱정이 되었다. 황철도 전도사는 이 곳 유치장에 온 지 3일이 지나 심문을 받게 되었다. 두 형사가 황철도 전도사를 데리고 경찰서 안에 있는 신사 앞에 세워놓고 소리쳤다.
“절을 해!”
굳굳하게 선 황 전도사는 단호하게 대답하였다.
“못합니다.”
“해!”
“못합니다.”
형사들은 그를 끌고 취조실로 갔다.
몽둥이를 들어 치는 것이었다.
형사들의 몸 속엔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잔인한 힘이 숨어 있는듯 하였다.
황 전도사는 많은 피를 흘리고 시멘트 바닥에 쓰러졌다. 물을 끼엊어 다시 정신이 나게하여 유치장으로 보냈다. 심문은 며칠 후에 또 계속되었다.
하루는 고문을 받던 황철도 전도사가 주 목사의 염려대로 견디지 못하여 기절해 버렸다. 강이라는 형사가 주 목사를 불러내었다.
황 전도사를 업고 가라는 것이었다. 주 목사는 황철도 전도사가 쓰려져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 도리깨로 사람을 친 것이었다. 피투성이가 된 황 전도사를 부축하여 등에 업었을 때, 눈물이 앞을 가려 걸음을 걸을 수가 없었다.
주 목사는 자신의 수난보다 동지의 수난을 보고 더욱 가슴아파 하였다.
1940년 9월 20일.
많은 동지들이 검속되어 유치장에 들어 왔다. 강문서 장로, 이봉은 권사, 강문서 장로의 장남 강찬주, 김여원, 박성근 목사, 김점룡 전도사등이다.
그들은 하동, 합천, 진주지방 신사참배 반대운동 책임자들로 활동하다가 검거된 것이다. 동지들이 많아지니 위로가 되었다.
서로 말은 할 수 없지만 심문을 받기 위하여 오고 가는 길에 얼굴을 대면할 수 있고 무언의 격려를 주고 받았다.
3. 기도의 제목
더운 열기가 유치장 안에 기어다니고 있었다.
취침 시간이 되어 자리에 누웠는데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전신이 뜨거운 쇠솥 안에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바람기라고는 그의 콧김 뿐이었다.
주 목사는 일어나 기도를 하였다. 기도하던 중 깜박 졸음이 밀려와 어렴풋이 잠이 들었다.
주 목사는 거리를 걷고 있었다. 진주 시내였다.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니었다.
어느 교회 앞에 발이 멎었다. 그 때는 진주에 교회가 두 개 밖에 없었다. 그 중 한 교회에서 풍악 소리가 울려 나오는 것이었다. 요란한 소리였다. 귀를 째는 씨그러운 소리였다. 주 목사는 교회 뜰로 들어섰다. 풍악 소리는 교회당 안에서 들려 오는 것이었다.
교회당 안에 들어서니 예배가 진행되고 있었다. 예배 시간에 농악대들이 풍악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주 목사는 강단에 서 있는 목사에게로 갔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예배시간에 풍악을 울리다니‥‥”
목사는 주 목사의 말에 계면쩍게 피식 얼굴에 웃음을 피우면서,
“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하라는데‥‥”
입을 열었다.
“뭐라구요?”
주 목사는 눈을 떴다.
꿈이었다.
그는 이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생각하여 보았다. 그리고 얻은 결론은 교회가 시국을 인식하고 신사참배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원통한 일이었다 살아계신 참 하나님께 예배하면서 풍악이 웬일인가? 오늘 한국 교회는 거룩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풍악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있는 것이고, 복음만을 전해야 하는 신성한 강단이 시국 인식을 위한 연설자의 연단이 되고, 불의한 자들이 마음대로 사용하는 유희장이 되다니‥‥”
한심한 일이었다. 주 목사는 이 밤에 세가지 내용으로 기도를 하였다.
“주님! 이 땅에 어서 속히 해방을 주옵소서! 불의한 자들, 침략자들, 우상숭배 자들이 다 물러가게 하옵소서.”
이것이 첫 번째 기도였다.
“주여! 이 땅에 신사가 하나도 없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시사를 다 불태워 비리소서, 신사는 이 땅에서 그림자도 보이지 않게 하옵소서.
이것이 두 번째 제목이었다.
“주님, 이 땅의 교회를 정화시켜 주옵소서! 우상숭배의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주님만을 뜨겁게 사랑하게 하시고, 이 땅에 수 많은 교회를 세워 주시고, 이 백성들이 주 예수님을 다 믿게하여 주옵소서.”
이것이 세 번째 기도의 제목이었다.
주 목사는 이날 이후, 세 가지 기도의 제목으로 밤이고 낮이고 기도하였다.
주 목사의 이 기도는 옥중 성도들 전체의 기도이기도 하였으리라. 이 기도는 6년 후에 그대로 이루어졌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14:4)
주님의 살아 있는 약속의 말씀에 근거하여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4. 공밥 한 덩이에도 감사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촌에는 햇곡식밥을 먹을 때다. 윤이 자르르 흐르는 햇쌀밥에 김치 깍두기 된장국을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유치장의 주 목사 앞에서 주먹밥 한 덩이와 깨진 사발에소금국 한 국자가 놓여있을 뿐이다.
주먹밥 이것은 사실 밥이 아니었다. 썩은 콩 부스러기와 좁쌀들, 그리고 밀과 보리가 섞여 있는 잡곡덩어리였다.
주 목사는 그것을 앞에 높고 감사 창송을 부른다.
“구주여 해변서 떡덩이를
떼시어 인민을 먹였으니
영생의 양식을 나에게도
그 같이 나누어 주옵소서“
이 찬송은 주 목사가 평소 식사전에 즐겨 부르던 찬송이다.
“내 주를 찾고자 갈급하여
영생의 말씀을 보나이다
해벼서 떼신떡 복됨 같이
성경도 복되게 하옵소서“
가정에서나 심방시에 부른 찬송은 입으로 부른 때가 많았지만 유치장에서 부르는 찬송은 영혼으로 불렀다. 감옥은 은혜 받는데 제일 좋은 곳이라고 출옥 후 주 목사는 늘 말씀하셨다.
“이 복을 주시면 종된 것과
날 매는 사슬을 곧 벗고서
내 맘에 평안함 늘 있으며
또 높은 구주를 만라리라.“
전일 가정에서 밥상을 받았을 때나, 교인들 집에 초청받아가서 식사를 하게 될 때 주 목사는 이 찬송을 1절만 불렀다.
그러나 유치장 안에서는 3절까지 즐겨 부른 것이다. 가축의 사료같은 콩밥 한덩이, 그러나 주 목사에겐 생명을 이어주는 귀주한 밥이기에 감사 찬송과 감사 기도가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왔다.
콩밥 한덩이에도 주님의 따뜻한 사랑을 체험하면서 맛있게 먹었다. 떨어진 좁쌀 한 톨까지 다 주워 먹었다.
주께서 당하신 고난을 생각하면서 감격의 나날을 보내었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다.
냉기가 바다처럼 감방 안에 깔린다. 식사시간이 되면 작은 문이 열리고 나무로 만든 쟁반같은 곳에 콩밥 한 덩이와 깨진 사발에 검은 국물 한 국자가 들어온다.
일부러 얼려서 갔다 주는 콩밥이다.
밥덩이는 꽁꽁 얼어 쟁반위에 용케도 공처럼 앉아 있다. 국은 시금치 삶은 물인지 시래지 삶은 물인지 건더기도 하나 없고 소금을 녹혀서 짜기만 하다.
먼저 국물을 마시고 밥을 씹는다.
그러나 참아야 했다.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웃으며 참았다. 찬송과 기도와 성경 암속으로 지루했던 겨울을 무사히 넘겼다.
1941년 3월.
봄이 온 것이다. 앵두꽃 피고지는 정원을 맴돌던 훈훈한 바람이 유치장 창살 안을 기어들어 왔다.
배는 여전히 고프지만 몸에 한기가 빠져 나가니 살 것만 같다. 그러나 이 유치장에 봄과 함께 찾아오는 반갑잖은 손님이 있었다.
경남 도경찰부 고등계 형사부사장이었다. 그는 주 목사를 불러내었다. 진주에서의 마지막 심문을 할 예정이었다.
주 목사는 형사부장 앞에 섰다. 그는 착잡한 심문을 시작하는 것이다.
심문은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꼬박 이틀 밤을 새우며 심문을 하는 것이었다.
이틀 동안의 지루한 심문과 혹독한 고문으로 시달린 주 목사는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주 목사가 눈을 떴을 땐 유치장 감방에 돌아와 있었다.
5. 부산으로 압송
아침 식사가 끝나자 감방 철문이 열렸다.
“주남고, 나와!”
앙칼진 형사의 목소리가 싸늘한 벽에 부딪히면서 쨍하게 귀를 때린다.
주 목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형사는 주 목사 손에 수갑을 채웠다.
주 목사는 형사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어두컴컴한 시멘트 복도를 지나 경찰서 안으로 들어섰다.
황철도 전도사와 김정룡 전도사, 최덕지 전도사. 모두 경찰서 안으로 들어온다.
“시국 인식을 못하는 최고 악질 너희들은 오늘 부산으로 간다.”
형사부장이 두꺼비 같은 눈을 껌벅이며 말을 뱉았다.
1941년 3월 13일.
주 목사 일행 네 분의 옥중 성도들은 부산행 열차를 타기 위하여 진주 역으로 나갔다.
세형사가 뒤를 따랐다.
기차가 진주역을 떠나 개양역에 도착되었을 때, 두분의 성도들이 수갑에손이 채인 채 기차에 올라오고 있었다.
그들은 최상림 목사와 이현속 장로였다.
형사 둘이 그들을 호송하는 것이었다.
형사들은 자기들끼리 반가웠지만, 성도들은 성도들끼리 반가웠다.
순교자들과 지옥의 사신들!
얼마나 대조적인 그들인가?
한 쪽은 주님을 위해서 열심이고 한쪽은 마귀를 위해서 열심이다. 주 목사는 최 목사와 이 장로를 만났을 때 목이 메었다.
입을 열어 말은 할 수 없지만 눈과 눈으로 그들은 말을 나눌 수가 있었다.
일행은 부산역에 도착하였다.
형사부장이 도경찰부에 연락을 하고 있었다.
“도경찰부는 만원이야! 그래서 남부경찰서로 가라는데‥‥”
형사부장의 거만한 말에,
“비 국민들이 이렇게 많아서야 어디 나라가 평안할 수 있겠나?”
형사 하나가 꽥 소리를 지른다.
그리하여 일행은 남부경찰서로 들어가게 되었다.
"잡아들이다 보니 십전짜리도 잡혀들었어!“
이는 잡아들일 가치도 없는 사람들을 잡아들였다는 말이다. 빈정거리는 말이기도 하였다.
시일이 갈수록 신자들의 수는 줄어들었다. 병보석으로 석방된 분들도 있었다.
박인순 전도사는 처음 도경찰부로 잡혀 올 때부터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는 모진 고문과 끈질긴 심문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사수하여 왔다.
어느 날의 일이었다. 심문을 받기 위해서 간수에게 이끌려 유치장 문을 나서시 걸어나오다가 시멘트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처녀였다. 원래 건강한 몸집은 아니었지만 별로 병으로 누워본 일이 없는 겅강한 체질이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고문과 심문으로 그는 쇠약해졌다. 이날 박전도사는 끌려나오면서 겨우 몸을 지탱하며 발을 옮겨 놓았는데, 갑자기 머리가 띵하면서 앞이 캄캄해 오더니 눈앞에 별이 나타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쓰러지고 말았다.
그녀의 얼굴엔 핏기가 없었다. 몸이 뻗뻗해지면서 굳어버리는 것이었다. 데리고 나가던 간수가 이 광경을 보고는 소리쳤다.
“박인순이 죽었다!”
이 말은 밖에까지 들렸다. 소식을 들은 성도들은 신사참배 반대로 인한 첫 순교자가 부산에서 나왔다고 감격하였다.
허나 얼마 후 그녀는 다시 깨어났다. 가족들에게 인계되어 그녀는 구금된 지 3개월 10일만에 병보석으로 석방이 되었다.
박 전도사는 병보석 석방이지만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을 못내 서운하게 생각하였다.
도경찰부에는 많은 성도들이 나가기도 했지만 역시 유치장은 만원이었다. 그리하여 부산 외의 지방에서 검속되어 온 사람들은 남부경찰서로 보내게 된 것이다.
주 목사 일행은 남부경찰서 유치장에 입감되었다. 황철도 전도사는 몸이 극도로 쇠약해 가고 있었다. 진주 유치장에서 너무 심한 고문을 당한 때문이다.
부산에 온 이후 계속 팔다리를 잘 움직이지 못하고 창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배가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유치장 안에서 늘 누워 지냈다. 공의가 진찰을 하고는 그냥 둘 수 없다고 하였다. 공의는 고등계 형사과장과 형사부장등과 의논을 하여 황철도 전도사를 내 보내기로 합의하였다. 며칠 안가서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황철도 전도사를 불러내었다.
“오늘부로 유치장 생활 그만 두고 나가! 자유다.”
황 전도사는 어리둥절 하다.
“왜 그러십니까?”
“왜 그러다니? 나가라면 나가는거지‥‥”
“나는 나가지 않습니다.”
“죽고 신나?”
“나는 죽지 않습니다.”
“의사가 그냥두면 죽는다는데도‥‥?”
“나는 안 죽습니다.”
“어째서 안 죽는단는 거지?”
“하나님께서 내 영혼을 불러가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다른 죄수들은 아프지 않는것도 아프다하며, 대수롭잖은 병도 중병으로 말하여 나갈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이 사람은 나가라고 하는데도 나가지 않겠다고 하니 이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상한 사람 다 보겠네!”
하부장이 말했다.
그러나 황철도 전도사는 1941년 6월 28일, 병보석으로 석방이 되었다.
한편 최덕지 전도사는 유치장에서 금식을 시작하였다. 일주일 넘게 금식을 하니 몸이 말이 아니었다.
경찰에서는 걱정이 되었다. 저러다 죽으면 뒤가 개운찮을 것 같아서 석방하기로 결정하였다. 최덕지 전도사를 불러내었다.
고등계 형사부장이,
“당신 그냥 나가시오, 병이 중한 것 같소!”
“우린 당신 같은 사람 시체 치우기도 귀찮으니 그냥 나가!”
“싫습니다.”
“명령이오!”
그리하여 억지로 병보석으로 석방이 되었다. 최덕지 전도사는 나가서도 여전히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였다.
주일이 되어 교회에 찾아갔더니 말이 아니었다. 교회당 강단 뒤에 신사를 차려 놓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최 덕지 전도사는 분개막심 하였다.
그는 탄식하며 외쳤다.
“현실교회는 완전히 마귀당이 되었구나!”
이리하여 최덕지 전도사는 신사참배 반대 뿐 아니라 동방요배 국기배례 반대까지 부르짖으며 다니게 되었다.
최덕지 전도사는 다시 검속되었다. 한상동 목사, 주남고 목사 일행이 평양 형무소에 입감 된 얼마 후에 그녀도 평양으로 압송되어 형무소에 입감되었다. 후에 최덕지 전도사를 중심으로 일어난 재건교회에서는 한상동 목사, 주남고 목사를 위시한 옥중성도들은 신사참배는 반대했지만 동방요배는 한 것처럼 인식하게 되었다.
이것은 대단히 잘못되 사상이요, 그릇된 사고이다. 주기철 목사나 한상동 목사나 주남고 목사가 검속되어 넘어 갈 때엔 동방요배 문제는 나오기 전이었다. 일차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투옥된 후 현실 교회는 점차적으로 총독부지시에 따라 시행되고 있었는데 뒤 늦게 동방요배 문제가 대두된 것이다.
최덕지 전도사가 남부 경찰서에서 병보석으로 석방되어 나가보니 동방요배가 시행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동방요배마저 반대하고 운동하다가 검속이 된 것이다.
그러니 동방요배 반대운동으로는 그녀가 경남지방에서는 제일 처음 사람이 된 셈이다. 그러나 이것이 다른 옥중 성도들보다 결코 위대한 일이라고 앞세울 문제는 못되는 것이다.
왜나하면 앞선 투옥된 분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고, 그녀는 늦게까지 남아서 신사참배를 반대하다보니 동방요배 문제가 생겨서 그것도 반대한 것 뿐이기 때문이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투옥된 성도들이 만일 그때도 동방요배 문제가 있었다면 그것을 반대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상식에 관한 문제다.
6. 평양으로 가는 길
주 목사가 남부 경찰서 유치장에 입감한지 4개월이 지났다. 평양 형무소로 압송된다는 말이 들렸다. 한편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그 곳에는 주 기철 목사를 비롯하여 많은 의로운 주의 종들이 구금되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있는 바다. 산 순교자들이 모여 있는 평양 형무소로 빨리 가고 싶었다.
1941년 7월 11일.
평양으로 압송되는 날이다. 주 목사는 최상림 목사, 이현속 장로 등과 같이 수갑을 찬 채 경찰서 밖으로 끌려 나왔다. 주 목사는 겨울 두루막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일년이 넘도록 갂지 못한 머리털은 길게 자라 귀를 덮고 어깨위까지 흘러내렸다. 수염은 아무렇게나 자라 꼭 산에서 내려온 사람들 같았다.
부산본역으로 나갔다. 본역 앞에는 도경찰부에 수감되었던 한상동 목사와 조수옥 전도사가 나와 있었다.
한 목사 부인 김차숙 여사와 시내교회 교인들인듯 신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도경찰부 고등계 형사부장 하부장과 다른 형사 한 사람도 서 있었다.
주 목사는 한상동 목사와 조수옥 전도사를 보니 너무도 반갑고 기뻐 눈물이 눈시울에 빙 돌았다.
7월의 햇살이 머리 위에 따갑게 내려 쪼인다. 너무 오랜 세월을 햇살을 보지 못하고 살았기에 따가운 햇살이 마냥 고맙고 꿈 같기만 하였다.
도경찰부에서 나온 한 목사와 조 전도사의 손에는 수갑이 채워지지 않았다. 이걸 본 남부서 한 형사가,
“우리만 채워 가지고 갈 필요가 어디 있나?”
하고 말하자. 다른 형사가,
“그렇지!”
피식 웃으며 수갑을 풀어 주었다. 자유로운 몸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자유가 허락된 것이다.
한상동 목사의 얼굴은 긴 머리털과 수염이 조화를 이루어 마치 그림에서 보는 예수님 같았다.
일행은 기차를 탔다. 한 사람 옆에 한 사람씩 형사가 끼어 앉았다. 그러나 차를 타는 승객들은 아무도 죄수와 형사로 보지 않았다.
승객들은 이상한 얼굴 모습들을 바라보며 수군수군 하였다.
“어디 사람인가?”
“글쎄 미국 사람은 아닌것 같고, 코 보니까 말이여!”
“불란서 사람인가베.”
“아니여, 몽고 사람이다.”
“코하고 눈은 꼭 조선사람 안 같나?”
“옷도 조선옷 양이가‥‥”
“참야, 별 희안한 사람도 다 있네.”
승객들은 아무도 이들이 수난당하는 주님의 귀한 종들인 줄 몰랐다. 시내교회 성도들이 역에서 전송을 하고 눈물을 닦으며 돌아갔다.
기차 안에는 김차숙 여사와 초량교회 양성봉 장로 부인이 함께 탔다.
양 장로 부인은 인삼을 준비하고 한 되들이 병에 커피를 한 병 끓여 넣어 쥐고 있었다. 기차가 떠나는 동안 양 장로 부인은 커피를 옥중 성도들과 형사들에게도 한 컵씩 주었다. 형사들은 머뭇거리며 받아 마셨다.
얼마나 오래간 만에 마시는 커피냐? 시래기 국물과 콩, 조, 밀, 보리, 잡곡만 먹던 창자 안에 커피가 들어가니 목구멍이 아릿해 오면서 창자가 거북하였다.
양 장로 부인은 삼량진에 내렸다. 일행을 실은 기차는 북으로 북으로 달리고 있었다.
사지를 향하여 올라가는 산 순교자들, 한상동 목사, 주남고 목사, 최상림 목사, 이현속 장로, 조수옥 전도사, 그들은 한결 같이 다시 이 열차를 타고 아래로 내려 오리라는 기대를 가지지 않았다. 이 열차가 천국행 열차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한상동 목사. 그는 김해 명지에서 태어나 6세에 양자로 가서 외로운 생활을 하였으며 24세에 복음을 받아 주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 후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어 뜻있는 목회를 하려 하였으나 신사참배 문제가 일어나자 그는 모든 걸 버리고 분연히 반대운동의 선봉자가 된 것이다.
그 때부터 그는 생명을 주 앞에 바치고 있었다. 경찰은 그를 고문 할 때 혹독하게 다루었다. 그의 옷이 붉게 피로 물들어 가족들에게 넘겨졌을 때, 어머니 배옹애 여사가 아들의 옷을 안고 통곡하다 쓰러졌다.
최상림 목사는 동래군 기장 출신이었다.
일찍 복음을 받아 신앙생활을 하던 중 그의 신앙은 뜨거웠다.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 간절하여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여 1920년에 졸업하였다. 주남고 목사보다 신학교 4년 선배였다.
최 목사는 고성, 동래, 남해교회 등에서 hr회를 하였다. 최 목사는 남해에서 검속되어 남부경찰서로 넘어온 것이다.
이현속 장로는 함안군 산인면 부봉리 사람이다. 그는 6세 어린 시절에 복음을 받아 믿었고, 경남 성경학원을 거쳐 평양신학교 1학년까지 수업하였다. 그러나 신학교를 계속하지 못하고 전도사 일에만 힘을 썼다.
그는 창녕, 진양, 하동, 산청, 주로 변두리 농촌교회를 다니며 목회를 하였다. 그가 38세 때 진주에 있는 기독교병원인 배돈병원에서 서기 겸 전도사 일을 보게 되었다.
신사참배 문제가 일어나자 반대 뜻을 표명하고 복음을 전하였다. 수차 진주에서 주 목사와도 만나 반대운동에 대하여 의논하기도 하였다. 그는 명원에서 매주 수요일 정기 예배시에 직원들을 모아 놓고 예배를 인도하였는데, 그 때 배돈병원 직원은 약 40명 정도였다.
그는 이들 직원들 앞에서 담대히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며, 주의 재림에 대하여 설교하였다. 천년왕국이 임하며 일제는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강하게 전하였으므로 검속 된 것이다.
조수옥 전도사는 안이숙 선생이 평양 감옥에서 처음 본 인상으로 귀염성이 있고, 성스럽고, 총명하더라는 그대로였다. 그의 청춘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불태운 성스러운 여성이었다.
그녀의 고향은 경남 하동이었다.
그녀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가사를 돌보던 중 20세에 출가하였으나, 결혼에 실패하고 친정으로 돌아와 병원 보조 간호원을 하였다. 그러나 병원 간호원 생활을 그만두고 양재점 재봉교사로 지내다가 복음을 받아 가슴에 뜨거운 열이 있어 진주 성경학원으로 갔다.
경남 성경학원을 마치고 25세 때부터 전도사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삼천포 교회를 시무하다가 부산으로 내려왔다. 초량교회 전도사로서 선교부 주선으로 부산지방 선교사 전도부인으로 활약하다가 신사참배 반대로 구금된 것이다.
그녀는 처음부터 한상동 목사와 주남고 목사, 이 인재 전도사 등과 뜻이 같아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협조하여 왔다.
일행은 역을 빠져나와 광장에 나섰다. 광장에는 주 기철 목사 부인 오정모 여사와 안이숙 선생 어머니 등 몇 분의 성도들이 소식을 듣고 마중나와 있었다.
오정모 여사는 김차숙 여사를 보고 깜짝 놀라면서,
“어쩐일로 이까지 따라 왔노?”
말을 던졌다.
“염려 마십시오. 짐은 되지 않을터이니.”
김차숙 여사는 사느냐 죽느냐 하는 판국에 무슨 고생인들 못견디랴 하는 자신으로 올라온 것이다. 하(河)부장이 다른 형사에게,
“검찰청에 전화하고 올터이니 잠시 기다려!”
말하고는 역사무실로 들어갔다.
일행은 역광장에서 하부장을 기다리며 희미한 전등불빛 아래서 눈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얼마 후 하부장이 돌아왔다. 시간이 늦어 모두 퇴근하고 경비원들만 남아 있다고 말했다.
“식사나 하고 가시지요.”
김차숙 여사가 형사를 보고 입을 열었다.
“그럽시다.”
형사들도 평양까지 오면서 상당히 익혀진터라 싸늘하지 않았다. 오정모 여사의 안내로 식당에 들어갔다. 냉면을 한 그릇씩 시켰다. 식당 종업원들이 옥중 성도들을 보고 키득키득 웃으며 저희들까리 야단이었다.
“불란서 사람이다.”
“아니다, 호주 사람이다.”
그러다가 가족 중 한 분에게 묻는 것이었다.
“저 사람들이 불란서 사람들이 아닙니까?”
“불란서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이요. 말 못할 사정이 있어 저 모양이지요.”
이 말을 들은 종업원들은 얼굴이 굳어지면서 정중히 손님으로 대해 주었다. 참으로 오래간만이었다. 냉면을 먹으니 세상에 이런 음식도 있었는가 싶게 맛이 있었다.
가족들이 형사들에게도 대접을 했다. 식사가 끝나고 일행은 하부장의 인솔로 평양 종로경찰서 정문으로 들어섰다.
주남고 목사, 한상동 목사, 최상림 목사, 이현속 장로, 조수옥 전도사는 각각 헤어져 유치장 감방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여기 종로 경찰서 유치장 안에는 전국에서 신사차배 반대로 투쟁하던 성도들이 집결되어 있었다.
이것은 조선 총독부 경무국의 명령이었다. 그리하여 전국의 지조있는 성도들을 이 곳에 총 집결시킨 것이다.
주남고 목사는 이 곳에서 주기철 목사와 이인재 전도사, 장계성 장로, 안이숙 선생, 이광록 집사 등 여러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진주 경찰서에서 보다, 부산 경찰에서 보다, 평양 경찰서에서는 신앙의 동지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는 데에서 한없이 흐뭇함을 느꼈다.
7. 평양 종로경찰서유치장
한상동 목사는 그 밤에 주기철 목사와 같은 감방에 들어갔다.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두 종을 땅 위에서 만날 순간을 주신 것이다.
다음 날 아침, 한 목사와 조수옥 전도사는 대동 경찰서 유치장으로 옮겨 갔다. 경남 도경찰부에 있는 분, 두 분만 대동 경찰서로 가고 나머지 세 분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주남고 목사가 갇혀 있는 유치장 감방 맞은 편 감방에 최봉석 목사(최권능이라고함)가 있었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
최 목사의 우렁찬 목소리는 유치장 안의 모든 성도들의 심령에 힘을 주었다. 평양 유치장은 전주나 부산보다 훨씬 대우가 좋았다. 이발도 시켜 주었고, 옷도 갈아 입혀 주었다.
긴 머리털을 깍고 수염을 밀고나니 한결 마음도 산뜻하였다.
유치장 간수들의 대하는 것도 진주나 부산보다는 좀 부드러웠다.
이상한 일이었다. 무슨 일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처음 기독교인들이 연행되어 왔을 때엔 심한 고문을 가했다고 했다.
고문에 시달려 많은 성도들이 죽어가기도 하였다 한다. 고등계 형사들은 성도들을 짐승처럼 대하였고 장작개비로 패고 고춧가루 탄 물을 코로 마시게 하고 지독한 고문을 가했다고 했다.
그런데 그 해 겨울 만주 독감이 몰려와 모든 경찰들과 형사들을 잡아 눕혔다. 독감으로 인하여 죽은 자도 많이 생기고 지독하게 고생을 하였다.
경찰들은 이것이 기독신자들을 너무 심하게 고문한 죄벌이라고 깨닫게 되었단다. 그리하여 이제는 성도들을 두려워하는 형편이라 좀 부드러워 진 것이라고 하였다.
주남고 목사가 이곳 종로 경찰서에 압송되어 온지 한 달 보름이 되었다.
1941년 8월 25일.
더위는 아직 가시지 않고 기승을 부린다. 갑자기 고등계 형사들이 나타나더니 유치장 안에 있는 기독신자들을 다 불러 내었다.
경찰서 안은 기독신자들로 가득하였다. 가족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찾아와서 보자기를 풀고 먹을 것을 나눈다. 주남고 목사의 가족은 몰론 오지 않았다.
오늘 평양 형무소로 옮겨 간단다. 붉은 벽돌집으로 가는 것이다. 높은 담에 둘러싸인 형무소, 중죄를 지은 사람이 형을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의 지옥이다.
그런데 들어가면서 다시 나올 수 있을는지 모르는 벽돌집으로 들어간다 하건만 산 순교자들의 얼굴에는 긴장과 주님을 향한 뜨거운 희열이 안개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자동차가 왔다. 형사들은 성도들의 손에 수갑을 채워서는 차례로 자동차에 올라 태웠다.
성도들을 태운 자동차는 평양 시내를 빠져 형무소에 이르렸다. 형무소의 무거운 철문이 둔한 소리를 내며 열였다. 자동차는 형무소 뜰로 들어가서 멎었다. 일행은 서서히 수갑을 찬 채 차에서 내렸다.
그때였다.
최상림 목사가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었다.
“아, 주기철 목사님 얼굴에 광채가 납니다.!”
그때 모두들 주기철 목사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과연 주 목사의 얼굴에는 찬란한 빛이 발산되는 것이었다.
그 빛을 바라보는 성도들의 얼굴에도 광채가 나는 것이었다. 모두들 서로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마음에 기쁨이 충만하였다.
공회 앞에 선 스데반의 얼굴처럼 모두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 같았다. 이 사실은 주남고 목사가 직접 긔의 옥고기에서 밝혀 주었다.
일행은 사무실로 들어갔다. 유치장에서 입고 있었던 사복을 벗고 푸른 죄수복을 입을 때, 최봉석 목사가 소리쳤다.
“우리 주님은 홍포를 입으셨는데 우리는 청포를 입네!”
이 말을 들은 성도들의 눈엔 감격의 눈물이 빙그르르 돌았다. 주남고 목사는 최 목사의 말을 받아 응수하였다.
“지금은 청포를 입지만 앞으로는 홍포를 입게 될 것입니다.”
주남고 목사의 말에 모드들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눈물이 동반된 감격의 웃음이었다.
푸른 수인복을 바꾸어 입은 성도들은 이름 대신 번호표를 받아 달고 간수를 따라 감방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긴 시멘트의 어두컴컴한 복도를 지나 36호 방에 주남고 목사는 인도 되었다. 옆방인 37호에 주기철 목사가 갇혔다. 최봉석 목사는 좀 떨어진 33호에 지정이 되었다.
폴리갑처럼 80여세 노령의 몸으로 최 목사는 원수들에게 잡혀 왔지만 그의 기백은 물 밖에 갓 나온 생선처럼 펄떡펄떡 뛰었다.
주남고 목사는 주변에 많은 동지들이 숨쉬고 있는 것에 마음 든든하였다. 특히 옆방에 있는 주기철 목사와 연락할 수 있어 더욱 좋았다.
벽은 시멘트로 꽉 막혀 있어 답답했지만 앞으로 걸어 나오면 쇠창살이다.
쇠창살을 손등으로 두드려 본다. 저쪽으로 울림이 가고 다시 저쪽에서 같은 반응으로 울림이 왔다. 두 주 목사는 쇠창살 두드리는 것으로 아침 저녁 인사를 나누었다.
대동 경찰서로 연행되어 간 한상동 목사와 조수옥 전도사도 이 형무소로 압송되어 왔다. 자유로이 서로 만날 수 없지만 한 형무소 안에서 같은 콩밥을 먹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주남고 목사는 조용히 찬송을 불렸다. 그가 즐겨 부르는 찬송이었다.
“예수가 거느리시니 즐겁고 태평하구나
주야에 자고 깨는 것 예수가 거느리시네.
나를 항상 거느리시고 나를 친히 거느리시네,
나를 항상 거느리시고 나를 친히 거느리시네.”
비록 몸은 감옥에 갇혔지만 그의 마음은 천국에 이른 듯 즐거움이 솟았다.
제 8 장
목화이삭 줍는 사모님
1.지극히 작은 자에게
주 목사가 검속되어 거창을 떠난 후, 그의 가정은 말이 아니다. 생계는 막연하였다. 교회에서는 관계가 끊기고 교인들마저 당국의 눈이 무서워 찾아오지 않았다.
1939년 1월부터 거창읍 교회에는 이X형 목사가 부임하여 왔다. 그는 사국을 인식하는 목사로서 경찰의 감시를 받지 않고 시키는데로 자유로이 목사일을 하여 나갔다. 그는 전임 교역자의 가정에 대하여도 냊어하였다.
교인들에게도 일절 주 목사 가정과는 상종하지 못하도록 못을 박았다. 노회와 총회 위원들이 교인들의 시국인식을 위하여 종종 다녀갔다.
특히 김X창 목사와 김X일 목사는 세도가 당당하였다. 김X창 목사는 1923년에서 1926년 7월 까지 약 4개년 동안 거창읍 교회를 시무한 일이 있었다. 허기에 그는 거창읍 교회에 대하여는 유독 관심이 많았다.
교인들에게 주 목사의 가족을 돌보는 것은 비애국적인 일이니 결코 돌아봐서는 안된다고 엄포를 놓는 것이다. 주 목사의 가족들은 참으로 비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경순은 동래 일신 중학교 다니다가 오빠 경도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일본에서 간호학교에 들어가서 산파학을 겸하여 수업하였다.
일본에 들어가서도 그녀의 마음은 아버지 생각에 가득하였고, 고생하시는 어머니와 어린 동생을 생각에 마음은 항상 무거웠다. 거창에 남은 주 목사의 가족은 모두 넷이었다.
부인과 세 자녀들이었다. 경효가 열두 살, 경세가 여덟 살, 경은이가 겨우 세 살이었다. 모두 한참 먹고 싶어 할 때이고 자라나는 시기였다.
경은이는 젖도 제도로 먹지 목하고 자랐기에, 노리끼한 얼굴에 눈만 동그랗다. 경효와 경세는 아버지 주 목사가 수집해 둔 엽전을 가지고 나가서 엇하고 바꾸어 먹었다. 주 목사는 평소에 엽전에 수집에 취미가 있었다. 많은 엽전을 수집하여서는 쌀자루에 여러 자루 넣어 두었다. 엽전을 연대별로 가려 창호지로 묶어 두었다.
형호와 경세는 그 엽전 때문에 심심찮은 나날을 보내었다. 그러나 그 많은 엽전도 바닥이 났다. 몽땅 엇을 바꾸어 먹은 셈이다.
그래도 아이들은 배가 고팠다. 간혹 숨은 성도들의 얼마의 곡식을 몰래 갖다주어 끼니를 잇기도 하였다. 몇 차례 한상동 목사 부인 김 차숙 여사가 찾아와 돈을 전하고 갔다.
김차숙 여사는 천국을 순회하며 뜻있는 성도들의 현금을 받아 평양 형무소에서 복역중인 성도들에게 식사를 넣어 주기도 하고 그들의 가족들을 돌보기까지 하였다.
백영희 전도사가 종종 찾아왔다. 그는 상복을 입고 삿갓을 쓰고 다니며 지방 교회 성도들의 현금을 얻어 식량을 구입하여 가져오곤 하였다.
백 전도사는 주 목사를 존경하는 후배로서 주 목사의 가족을 자기 가족처럼 보살펴 주었다.
백영희 전도사는 1910년 7월 29일, 거창군 주상면 도평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였고 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신식학문을 배웠다.
16세시 일본에 들어가 공부를 하다가 4년 후 귀국하여 가창군 고전면 개명리에서 양조장을 시작했다. 양조장을 하면서 진한 누룩 냄새를 맡으며 인생을 고민하였다.
마침 운봉기 전도사가 길가는 것을 보고 집에 들어오게 하여 복음을 들었다. 윤봉기 전도사는 친절하게 기독교 교리를 가르쳐 주었다.
백영희는 입신하던 날부터 열심이었다. 믿게된 지 삼일이 되던 날, 양조장을 처리하였다. 그리고 십 칠일 후에 누룩 장사도 그만 두었다.
그는 모든 재산을 정리하여 구호기관과 복음기관에 기중하고, 논 얼마만 남겨두어 농사를 하여 생활하기로 하였다. 일년후 세례를 받고 전도일에 나섰다. 무보수 전도사였다.
봉산 교회와 봉개 교회와 개명교회를 맡아 복음을 전하였다. 그가 무보수 전도인이 되기까지 그의 신앙의 길잡이는 주 목사였다. 주 목사의 신앙인격에 많은 감화를 받았고 특별 지도를 바았다.
백 전도사는 주 목사댁을 자기 집 드나 들 듯이 쫒아 다녔고 지극히 작은 일 하나까지 주 목사의 지시를 받았다. 신사참배 문제가 일어나자 주 목사는 지방 각 교회를 심방하여 신사참배를 못하도록 가르쳤는데, 백 전도사에게도 여러번 이 문제에 대하여 당부하였다.
“신사참배는 제2계명과 제 1계명까지 번하는 것이니 결코 해서는 안됩니다.”
어느 날, 주 목사는 백 전도사를 만나 조용히 강변으로 나갔다. 강가에 앉은 주 목사는 백 전도사에게 신사참배 문제와 일제의 탄압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이날 받았던 주 목사의 교훈을 백 전도사는 가슴에 잘 새겼고, 그가 신사참배하지 않게 된 좋은 계기가 되었다. 주 목사 투옥 후, 백 전도사에게도 일본 고등계 형사들이 번질나게 찾아왔다. 그러나 끝까지 백 전도사는 반대하였다. 그가 끝까지 신사참배를 반대할 수 있었던 것은 주 목사의 교훈 대문이었다고 훗날에 말했다..
그는 약 5년 갂운 세월을 한결같이 주 목사 가족을 돌봐 주었다. 자기 가족의 생계도 막연한 시대에 이웃을 위하여 사랑을 베푼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곤 할 수 없는 일이다.
일찍이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심판 때에 되어질 일들을 말씀하신 일이었다. 주께서 재림하실 때 영광의 보좌에 앉아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었다.
그 때, 모든 민족을 두 종류로 구분지어 모으고 오른 편에 있는 자들에게,
“너희는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대에 너희는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말씀하실 것이다. 그 때 오른쪽 사람들은 우리가 언제 그런일을 하였느냐고 반문을 한다.
주님은 그들에게 대답하신다.
“네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31-46)
여기에서 지극히 작은 자가 누구인가? 그는 예수님 이름 때문에 주리고, 목 마르고, 나그네 되고, 감옥에 갇힌자가 아니겠는가?
지극히 작은 자의 가족이 굶주리고 있었다. 그러나 역적으로 몰아 외면해 버리는 저 사람들···
하지만 이들을 돌보아 주는 또 한 쪽의 사람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셨다.
2. 역적의 가족이라니
주 목사의 가족들은 결국 당국에 의하여 역적의 가족이란 죄명으로 동네에서 좇겨나고 말았다. 당국에서는 신사참배 문제 보다 전일 독립운동한 일도 있고 하여 사상범으로 주 목사를 취급하였다. 하기 때문에 그의 가족들에겐 더욱 많은 수난을 가하였다.
동네에서 쫓겨난 그들은 갈 곳이 없었다. 찬바람이 귀뿌린를 따가는 듯 세게 불어왔다. 몹시 추운 날이었다.
이 날, 주 목사의 가족들은 간단한 짐을 걸머메고 찬바람 부는 벌판으로 나와 동네에서 얼마간 떨이진 외진 곳에 발을 멈추었다. 그 곳에 한 채의 흉가가 있었다 이집은 전날, 박성희씨 (강주선 목사 부인)의 친정집이었다.
오랫동안 손을 보지 않은 집이어서 흙담이 헐고, 한 쪽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사람이 거처하기엔 꺼림직한 그런 집이었다. 그러나 쫓겨나 갈 곳 없는 주 a고사 가족 들에겐 밤 서리를 피할 수 있어 여간 다행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이 집을 쓸고 청소를 하였다. 짐을 옮겨 정리 하였다.
솥을 걸고 물을 끓였다.
굴뚝에 연기가 나니 아이들이 좋아서 환성을 질렀다. 그들은 집을 빌려 준 박성희씨 친정 부모들에게 마음으로 감사하였다.
박성희씨 친정 부모들은 그 집에 예속된 200평 남짓한 땅도 같이 부치라고 허락 하여 생계에 도움을 주었다.
일제 당국은 주 목사 식구들에게 우물도 주지 말라고 당부를 했고 어떤 어려움에 있어도 도우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러나 같은 민족이기에 마을 사람들은 불신자지만 진정한 마음으로 주 목사 가족들을 염려하였고 도우려 애썼다. 마을 사람들은 간혹 밤이면 집단 속에 수수, 조 같은 잡곡을 넣어 담 너머로 넘겨 주었다.
잡곡을 준 것은 자신들도 쌀은 공출로 내고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개국자 가족에 대한 대접을 이런식으로 표하였다.
당국에서 우물 물을 금하였기에 도랑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끓여 마시게 되었다.
밤이 되었다. 산에서 늑대랑 여우 등의 짐승들이 집 가까이 와서 울었다. 아이들은 어머니의 차마자락을 붙잡고 오들오들 떨었다.
어머니는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였다. 옥중에 계신 목사님과 일본에서 공부하는 아들 달을 위하여 밤이 깊도록 기도하였다. 그것은 눈물의 기도였다.
엷은 몇 개의 이불은 아이들 차지였다. 여사는 그 긴 추운 밤을 이불없이 밝혔다. 옥중에 계신 남편을 생각해서이다.
자다가 오줌이 마려워 일어나 경효가 이불없이 땅바닥에 그냥 누어 잠든 엄마를 보았다 자기가 덮던 이불을 엄마 몸에 덮어드리니 번쩍 눈을 뜨신 엄마가
“너나 덮고 자거라.”
쓸쓸한 표정을 짓는다.
“엄마 추운데 덮으셔야지요.”
“아빠는 옥중에서 이불 덮고 주무시겠니?”
“······”
“평양은 경상도 보다 더 추운 곳이라는데······”
여사의 눈에 맑은 액체가 고인다. 달빛이 봉창문을 밝게 비춘다.
여사의 얼굴이 선명하게 경효 어린이의 동공 속에 들어왔다.
“엄마 그래도, 이불 덮고 같이 자!”
“나는 괜찮다. 너희 아빠가 이불을 덮는 그날까지 나도 이불을 덮지 않기로 작정하고 있으니······ 내 염려는 하지 말고, 너나 덮고 자거라.”경효 어린이의 가슴 속에 이 일을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사건으로 깊이 아로새겨졌다.
날이 밝으면 여사는 행상으로 나간다. 비누 등속을 광주리에 담아 이고 낯선 마을로 들어서는 것이었다. 집집마다 들어가 비누를 권하였다. 비누를 주고 보리를 얻고 밀을 얻는다.
산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면서 심히 힘겨운 일이었다. 행상나간 어머니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노는 아이들은 배가 고팠다. 집이 공동묘지가 보이는 냇가에 있었다.
공동묘지로 가는 길이 이 집 옆으로 뻗어 있었다. 종종 시채를 지게에 짊어지고 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관에다 시체를 넣을 형편도 못되는 가난한 사람들이 가마니에다 시체를 싸가지고 지게에 지고 지나간다.
이렇게 가난한 장례식에는 아이들도 쓸쓸하다. 그러나 상여가 나가는 날이었다.
민가를 구성지게 뽑으며, 지나가는 장례 행렬에는 주 목사 아이들도 한 묷 끼이는 것이었다. 떡이 있기 때문이다.
마른 아주까리 잎사귀 국물만 먹던 멀건 뱃 속에 떡이 들어간다는 것은 여간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공동묘지 길 가의 아이들의 노래가 만가이다. 양지쪽에 모여 앉아 노래를 부른다.
“어흥 어흥 어라넘자 어흥
북망산천 어디메뇨, 눈감으면 그 곳이지.
어흥 어흥 어라넘자 어흥.”
주 목사의 아이들은 찬송가와 만가로서 어린꿈을 익혀갔다.
춥고 긴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얼었던 땅이 녹고 도랑가 언덕이 연두빛을 띠고 푸르러 왔다. 남술남 여사는 산나물을 뜯으러 산으로 갔다.
경효와 경세는 학교에 가고 경은이는 여사의 등에 매달렸다. 산에 올라가 산나물을 뜯고 나무도 한다. 낫으로 송피를 벗긴다.
소나무 껍질을 벗기고 나면 나무와 두꺼운 껍질 사이에 엷은 속껍질이 있다. 그것을 벗기는 것이다. 그것은 액체와 함께 말랑말랑 하다. 입에 넣으면 달고 텁업하다. 이것은 송피라고 한다.
이것을 말려 가루를 만들어 죽도 끓여 먹고 떡도 만들어 먹는다.
이것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최후의 양식이다.
여사는 종다리 소리를 들으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으로 송피를 벗기는 것이다.
따뜻한 봄날의 긴 햇살이 서산으로 사라지면 머리에 나무를 이고 겨드랑이에 송피와 산나물이 담긴 소쿠리를 끼고 비탈길을 내려오는 것이다. 집에 오면 학교에서 돌아와 먹을 것이 없어 울고 지내던 아이들이 어마를 기다리며 지쳐있다.
산나물을 삶고 국을 끓인다. 쑥에 보리겨를 묻혀 떡을 찐다.
이것이 저녁식사이다. 그들은 이것을 먹으며 얼굴에 미소를 날린다.
누가 이들에게 역적의 누명을 주었는가!
누가 이들을 이렇게 비참한 고아로 만들었으며 과부로 만들었는가?
하나님만이 이들을 돌보시며 지켜 주셨다. 어느 장로가 산간을 일구어 개간한 밭을 소작으로 이들에게 주어 그 밭을 경작하게 하였다.
장다리에 강씨 성을 가진 교인이 비밀리 200평 남짓되는 밭을 빌려 주어 농사할 수 있었다. 낮에는 밭에 나가 일을 하고 달이 밝은 밤이면 산에 올라가 나무를 했다. 입산 금지로 낫에는 산에 갈 수 없다.
밤 만이 나무할 수 있는 기회인데 너무 어두우면 나무를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달밤을 기다리는 것이다.
손 등은 소나무 잎사귀에 찔려 피가 나고, 손바닥은 괭이질로 물집이 생겼다. 물집은 터지고 다시 다져지고 하여 손바닥은 돌처럼 단단해 갔다.
여자의 손으로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거름을 내는 것은 힘에 겨운 일이었다. 여사의 검붉게 탄 이마엔 구슬땀이 맺고, 무명 저고리 등이 흠뻑 땀에 젖었다.
이런 고된 일을 계속하면서도 여사의 얼굴엔 짜증이나 불평의 표가 일렁이지 않았고 평화로운 미소 만이 꽃피고 있었다. 여사의 입에는 한숨 대신 찬송이 쏟아지는 것이었다.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기쁜 찬송이 울려나네
하늘곡조가 언제나 흘러나와 나의 영혼을 고이싸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이 찬송은 여사 자신을 위해 지어진 찬송처럼 자나깨나 애창하였다. 고달픈 육신의 일들이 무거움으로 깔고 눌러도 여사의 마음에는 신앙의 샘이 솟고, 하늘의 위로가 가슴에 가득했다.
“내 맘 속에 솟아난 이 평화는
깊이 묻히인 보배로다
나의 보화를 캐내어 가져갈 자
어디 있으랴 안심일세“
왕복 사십 리가 좋이 되는 먼 거리의 밭을 여자의 나약한 힘으로 경작 한다는 것이 여간 벅찬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신앙의 불길로 살아가는 여사의 나날은 감사와 찬송이 넘치는 생활일 뿐이다. 오줌 동이를 이고 그 먼길을 오가면서도 가슴에는 기쁨이 꽃방석을 깔았다. 경효는 열 한 살에 오줌 장군을 지고 어머니를 도왔다.
어머니의 고생이 어린 경효의 가슴을 쓰리게 하였다. 지게에 거름을 담아내고 오줌을 퍼 나를 때, 육체의 고통이 견딜 수 없었지만 어머니를 도운다는 의미에서 소년의 얼굴엔 미소가 풍겼다.
여름은 그렇게 가 버렸다.
가을이 되어 풋콩을 따고, 고구마를 파낼 때 마냥 즐겁기만 했다. 배추포기를 뽑고 호박을 따낼 때, 일의 보람을 느꼈다.
송피죽과 도톨이 묵만 먹다가 고구마를 먹게 되는 식구들은 마냥 기뻐 춤이라도 추듯이 환호성을 올렸다.
그러나 평양 형무소의 아버지 생각에 온 가족이 또 한 번 눈물을 삼켰다.
일제의 간악한 수탈정책에 백성들이 호응하기 위하여 산간이며 둑길에 아주까리를 심었다. 아주까리 기름을 상납하기 위해서다. 가난한 서민들은 부드러운 아주까리 잎을 따서 국을 끓여 먹는다.
경효와 경세도 학교에서 돌아오면 부지런히 아주까리 잎을 따 모았다. 이것을 볕에 말려 두었다가 겨울을 사는 것이다.
가을 비가 촉촉이 내린다. 이런 비온 후엔 여사와 아이들은 산으로 들어가 송이버섯을 딴다. 송이버섯은 좋은 영양식품이였다.
쌀 한톨 구하기 어려운 이들은 쑥과 아주까리 잎과 송피와 버섯으로 그 지루한 세월을 연명해 간 것이다.
3. 여사의 가정교육
여사는 밤이면 자녀들과 예배를 드린다.
예배가 끝나고 여사는 아이들에게 입을 연다.
“경효야, 경세야, 내 말을 똑똑히 들어라. 너희 아버지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역적이 아니다. 애국자야. 참 목사다. 그래서 감옥에 계시는 거야.”
경효는 그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엄마, 왜 착한 사람이고 애국자인데 감옥에 가두어 두는 거야?”
“우리는 나라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자기나라처럼 다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우리나라가 독립이 된단다. 독립이 되면 우리도 잘 살 수 있어.”
“독립이 언제 되는데?”
“알 수가 없지...”
“아버지 미워!”
경효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튀어 나왔다.
여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왜?”
“다른 사람들은 가지 않고 다 잘 있는데, 왜 하필 아버지만 감옥에 가는거야? 왜 아버지만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는 거야? 아버지가 바보지 뭐.”
“너는 잘 모른다. 내가 이야기를 해도 너는 잘 모를 거야. 지금은 어려서 잘 모를거야. 그러나 먼 훗날 너의 아버지가 참으로 훌륭한 분이란 걸 너는 알게 된다. 반드시 알게 된다.”
“신사참배가 그렇게 나쁘나?”
“그렇단다.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신사참배같은 우상숭배다. 이것을 하면 자기도 망하고 가정도 망하고 나라도 망한다.”
여사는 경효와 경세의 손을 거칠은 그의 손속에 꼭 쥐었다.
“학교에 가서 신사참배 하라면 절대하지 말아야 한다. 신사참배하러 줄을 지어 갈 때 어쨌든 빠져라.”
경효가 머리를 갸우뚱하면서
“어떻게 빠질 것고?”
“뒤가 마렵다고 하고 빠져라. 신사참배 하는 것은 죽는 것과 같은 일이다. 왜냐하면 신사참배는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이고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경효는 여사의 말을 마음 깊이 받아 들였다.
학교에 갔다.
신사참배 하러 가는 날은 어떤 일이 있어도 중도에서 빠져 버렸다. 신사참배가 아버지를 앗아 갔고, 신사참배가 그의 가족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니 신사를 당장 부수어 버리고 싶었다.
원수! 하나님의 원수요, 아버지의 원수요, 자기들의 원수였다.
그때는 신발이 귀했다. 고무신이나 운동화 등속은 구경하기가 어려웠다. 대개 농촌 사람들은 짚신을 삼아 신었다.
경효는 고사리 손으로 짚을 물에 적셔 새끼를 꼬고 짚신을 만들어 신었다. 그러나 맨발로 다니는 때도 많았다.
4. 형무소로 보낸 솜옷
가을이 되면 목화를 딴다. 그러나 여사의 밭에는 목화가 없다. 겨울이 오는데 옥중에 계신 주 목사에게 솜옷을 만들어 보내야 하겠는데 막연하였다.
여사는 아이들과 함께 목화 이삭을 줍기로 하였다. 경효와 경세는 여사를 따라 목화 이삭 줍기에 나섰다. 목화 단을 다 거두어 간 밭에는 뛰엄 뛰엄 목화 송이가 떨어져 있다.
다래도 떨어져 있다. 그것을 열심으로 줍는다.
밤이면 목화 꼬투리를 따고, 씨가 박힌 솜을 활로서 탄다. 활 줄에 목화송이를 접촉시켜 튀기면 씨는 씨대로 솜은 솜대로 갈라지는 것이다.
이리하여 솜을 장만한다. 다래는 볕에 말려 목화송이를 피게 하고 그것을 타서 솜을 만드는 것이다.
여사는 이 솜으로 남편의 솜옷을 만들었다. 정성과 사랑을 솜에 담아 옷을 누볐다. 그리고 솜을 담아 만든 회색 무명바지 저고리를 포장지에 싸서 평양 형무소로 우송하였다. 남들처럼 자주 면회를 갈 수 있는 형편도 못되었다.
사식을 넣어 드릴 수는 더욱 없었다.
추위가 오는데 싸늘한 바람이 바늘 끝처럼 살갗을 찌르는 평양 형무소에서 겨울을 지낼 남편을 위해 솜옷 한 벌 마련해 보내는 것이 얼마나 대견한 일인가?
생각지도 않았던 소포가 배달되었을 때 남편은 아내의 정성어린 선물에 얼마나 흐뭇해 하실까?
여사는 북쪽 하늘 아래 있는 평양 형무소 감방 속의 남편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마음으로 건강을 기도 드리는 것이었다.
여사는 날이면 날마다 아이들을 위하여 잠시도 일손을 멈추지 않았다.
여사는 그 후 몇 차례 평양 형무소에 면회를 갔다. 당시 여자들은 몬빼를 입어야 출입을 할 수 있었다.
허나 여사는 몬빼를 만들 형편이 못되어 큰 아들 경중씨의 바지를 손질하여 몬빼처럼 모양만 흉내내어 입고 갔다.
제9장
주여! 순교의 축복을.....
1. 옥중전도
형무소 감방의 첫 날, 해가 저물었다. 콩밥이 들어왔다. 콩과 좁쌀과 수수와 밀잡곡밥으로 덩어리가 잘 뭉쳐지지 않아 퍼석하다. 대로 만든 젓가락이 소반에 얹혀 있다. 국은 역시 희끄무레한 소금국으로 시금치나 시래기를 삶은 물같은 텁텁하고 짠 소금국이다.
주 목사는 여전히 앞에 놓고 찬송을 부른다.
“구주여 해변서 떡덩이를.......”
일절을 부르고 기도를 하였다. 감방 안에는 잡범들이 몇 있었다. 그들 중 한 청년은 전에 믿다가 낙심된 자이고 다른 이들은 모두 흉악범들이었다.
주 목사가 기도를 하고 나니, 밥덩이는 누가 주어 먹어 버리고 말았다. 국도 없다. 그러나 주 목사는 성내지 않고,
“오죽 배가 고팠으면 남의 밥을 먹었겠오. 괜찮아요, 나는 오늘 들어오면서 같은 동지들의 가족들로부터 사식을 얻어 먹어서 그렇게 배고프지 않아요.” 도리어 위로를 하는 것이었다. 주 목사는 이 감방에 같이 지내게 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나는 목사입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이곳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같은 감방에서 지내게 되는 일이 우연한 일이 아닌 줄로 압니다.”
주 목사의 밥을 집어 먹은 사람도 주 목사의 모든 언행에 감동이 되었다. 마침 믿다가 낙심된 청년이 성경전서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주 목사 앞에 성경을 내밀었다.
“목사님 사실 저는 전에 교회에 좀 나갔습니다. 그러다 중도에 그만 두고 나쁜 친구들하고 휩쓸려 돌아다니다가 이 모양이 되었습니다. 가족들은 다 믿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넣어 준 것이지요. 성경을 보아도 무슨 뜻인지 잘 모르고 해서 그냥 가지고만 있었는데 목사님께서 들어오셨으니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도우신 모야입니다. 잘 지도하여 주십시오.”
주 목사는ㄷ 성경을 가지고 있질 못했다. 거창에서부터 성경은 허용되지 않았다. 또한 갖고들의 면회가 없으니 성경이 전해질리도 없었다.
성경은 줄곧 옛날 대구 유치장 시절에 암송했던 것을 암송하면서 지냈는데 성경을 보니 너무나 반가웠다. 이 시간부터 주 목사는 성경공부를 시작하였다.
밤 열시가 되었다.
“취침, 취침!”
간수의 찢어질듯한 목쉰 소리가 들렸다. 감방 하나에 잠자리가 준비되었다. 그러나 그냥 자리에 누우면 된다.
취침 나팔소리가 처량하게 들려왔다. 긴 여음을 남기면서 흘러가는 나팔소리, 두고 온 가정을 생각나게 한다.
수인들은 꿈에나마 가족을 만나고 자유를 누리는 시간이다. 감옥의 하루가 취침 나팔소리와 함께 그 막을 내리는 것이다.
희미하게 방안을 비추던 전등이 가버리고 감방 안에 암흑이 깔린다. 바람기 하나 없는 더운 감방, 변기통에서 번져나는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주 목사는 어두운 감방 안에서 모두들 잠을 청하는 시간에 혼자 앉아 기도를 드린다. 모든 d수인들이 다 잠든 시간에 자리에 누워 피로한 육신을 쉬는 것이다.
잠이 어렴풋이 들려는 시간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 눈을 뜬다.
“샤-샤...... 툭, 툭.”
무엇인가 몸을 툭 쏜다. 전신이 바늘침을 맞는 것 같아 살갓을 만지는 순간 손에 느껴지는 것이었다. 진득진득한 액체였다.
사실 그것은 빈대였다. 감방 안의 벽은 시멘트로 되어 있지만 밑은 마루였다. 마루는 칸과 칸 사이가 딱 붙은 마루가 아니고, 구멍이 많이 난 엉성한 마루였다.
여름엔 이 마루 틈서리에 빈대가 나오고 겨울엔 찬 바람이 올라온다. 마루를 이렇게 엉성하게 하여 둔 것은 수인들을 괴롭히기 위해서이다. 빈대와 더위와 싸우면서 밤을 지냈다.
아침 7시. 기상 나팔 소리가 방정맞게 들린다.
간수의 목쉰 소리가 복도를 누빈다.
“기상! 기상!”
세면은 한 사람씩 세면장까지 뛰어서 하고 온다. 그리고 아침식사가 들어온다.
주 목사는 감방 안에서 시간만 나면 성경을 펴 놓고 함께 있는 수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처음엔 비웃기도 하고, 못마땅하게 생각하기도 했지만 주 목사의 경건생활과 영적 이상한 힘에 끌려 복음을 받아 들이게 되었다.
그들은 열심으로 성경공부를 하였다. 드디어 아침 저녁 감방 예배를 드리는데 모두 합심이 되었다.
어느 날, 새로운 죄수 한 사람이 들어왔다. 김형석이란 사람이었다.
그는 신의주가 고향이라 했다. 몹시 거칠고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성미였는데, 주 목사는 그에게도 복음을 전하였다.
김형석은 커다란 눈 속에 주 목사를 담으면서,
“나는 종교와는 관계가 없는 사람이외다. 착한 사람이 되고 싶은 생각두 없구, 되는대로 살아갈 것이오. 나를 상관 마시오.”
빈정거리는 투로 말하였다. 그러나 주 목사는 계속 복음을 전하였다. 김형석은 주 목사의 그 성자다운 태도와 생활 모습에서 점점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아무렇게나 살다가 가면 그만인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어렴품이 알아가는 듯 하였다.
드디어 그는 굴복하고 말았다. 하루는 김 형석이.
“목사님, 나도 예수님을 믿기로 마음에 작정하였습니다. 나를 지도해 주십시오.” 그 오만하던 태도가 없어지고 얌전해지면서 자신의 마음을 내어 놓았다.
“참 반가운 일입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입니다.”
그리하여 36호실은 교회가 되었다. 아침 저녁 예배를 드리고 시간만 나면 성경공부였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평양의 가을은 짧았다. 아침 저녁 찬바람이 들락거린다 싶드니 추위가 다가왔다. 햇볕을 구경할 수 없는 감방 안은 더욱 음산하고 춥기만 하였다.
2. 검사출정 명령
11월 10일경부터 머리 뒤에 부스럼이 생기더니 점점 험해갔다. 부스럼은 목 뒤 급소에 생겨 목을 움직일 수 없는 통증을 가져왔다.
발치대종이다. 의사가 와서 치료를 하였다.
이것은 수술해서는 안되는 종기인데 칼로 짼 것이다. 그러니 더욱 악화되어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까지 되자 의사가 주 목사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안될 것 같소. 병보석으로 나가도록 하시오.”
그러나 주 목사는 거절하였다.
“나갈 수 없습니다. 나는 이미 죽기로 각오하고 들어온 몸입니다. 죽으면 영광이지요.”
주 목사는 정말 괴로워 한시도 견딜 수가 없었다. 의사는 병보석으로 나가도록 간곡히 권유했지만 주 목사는 반대하였다.
꿈에도 소원이요 바라는 순교다. 겁날 것은 없었다.
온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이제는 떠나가나 보다>
생각하니 주 목사의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주님! 나의 영혼을 거두소서. 이 땅에 미련은 없나이다.”
주 목사의 두 눈 언저리엔 뜨거운 눈물이 번진다.
앞에서 김형석이 입을 연다.
“목사님, 돌아가시면 제가 맏 상제가 되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 모두 상제노릇을 하겠습니다.”
그들은 진심으로 말을 하였다.
12월 2일, 몹시 추운 아침이었다. 간수가 오더니 철문을 열고 주 목사에게 검사 출정을 명령했다.
주 목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서 수인들이,
“목사님, 그래가지고 나가시겠습니까?”
염려를 한다.
“가다가 쓰러지더라도 어쩌겠습니까?”
주 목사는 일어나 간수를 따라나갔다.
머리에 용수를 씌운 다음 손에는 수갑을 채웠다. 차거운 수갑이 팔목에 매달리닌 전신이 저릿하면서 냉하여 온다.
고등계 형사실에 성도들이 모였다. 신사참배 반대자들만 이 날은 심문하는 것이었다. 용수를 씌워 놓았기 때문에 서로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일절 말도 못하게 하였다.
형사들과 간수들은 성도들을 다시 노끈으로 엮었다. 행동을 같이하게 하기 위해서다.
줄을 서서 고등계 형사실을 나와 마당을 걸었다. 법정까지 걸어가야 했다.
옥중성도들은 한 줄로 서서 길을 걸었다. 형무소를 나와 법정으로 가는 길이다. 형무소에서 법정까지는 약 오릿길이나 된다. 자동차가 귀한 전시라 걸어가야 했다.
주 목사는 목 뒤 종기로 인하여 몸에 열이 나고, 걸음을 조금 걸으니 허벅지에 몽우리가 생겨 발을 잘 옮길 수가 없다.
그는 그만 길에 주저앉고 만다. 간수가 회초리를 들어 주 목사를 후려 갈겼다.
“일어나!”
간수는 다시 발길로 찼다.
주남고 목사는 일어서면서
“아시가 이다이카라(다리가 아파서....)”
일본말을 하였다. 그가 얼른 쉽게 알아들으라고 일본말로 한 것이다. 그러나 알아들었는지 못알아들었는지 다시 발길로 걷어찰 뿐이었다. 간수의 지독한 횡포에 겨우 발을 디뎌 놓은 주 목사였다.
이 때 두 사람 뒤에 한상동 모가사가 가고 있었다. 한 목사는 그 목소리가 귀에 익은 듯하여 용수 틈서리에 눈을 주어 앞을 보니 주남고 목사였다.
주 목사는 괴로운 듯 한 쪽 다리를 질질 끌면서 억지로 가고 있는 것이었다. 법정에 이르니 대기실에 모든 성도를 세웠다.
용수를 벗기고 수갑을 끌러 주었다. 일절 말은 금지되어 있었다. 혼자만 들어가 설 수 있는 칸막이가 있었다. 그 곳에 한 사람씩 세우는 것이었다. 칸막이가 나무로 만들어졌고, 혼자 앉을 수도 있게 되어 있었다.
뜻밖에 주 목사는 한상동 목사 옆자리에 들게 되었다. 한 목사가 손을 내밀어 주 목사의 손을 꼭 쥐었다. 따뜻한 사랑이 손과 손을 통하여 피부에 느껴진다.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러나 말은 없었다. 말은 없지만 마음과 마음은 전류처럼 뜨겁게 흐르고 있었다.
<수고합니다.>
<참고 또 참읍시다. 순교의 그 순간까지....>
뜨거운 눈물이 두 목사의 동공에서 솟아나와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쉴새없이 눈물과 눈물이 흘러내렸다.
기약없는 사람들. 이것이 이 땅위에서 마지막 만남이 될는지 모른다. 말이 필요없었다. 두 목사는 손과 손을 맞잡고 울고 또 울었다.
주남고 목사는 간수에게 이끌려 검사 앞에 나갔다. 검사는 주 목사의 병색이 짙은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주 목사의 얼굴은 굶주림과 추위와 병으로 누리끼리 하게 살갗이 부어 있었다.
검사는 연미의 눈초리를 주 목사 얼굴에 보내면서,
“신사참배를 하겠는가? 하면 산다.”
말을 던졌다.
“못합니다.”
주 목사는 그 유순한 눈동자를 아래로 깔면서 싸늘하게 대답하였다.
“그러면 다시 묻겠다. 일본 역대 천황은 사람이면서 신인줄을 아느냐?”
“일본 역대 천황은 하나님께서 일본 국가를 통하라고 세운 통치자인 줄 압니다.”
“사람은 죽으면 그 영혼이 천국으로 가든, 지옥으로 가든, 가고 말지 신으로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죽은 사람의 신을 섬기는 것은 사신인 줄 압니다.”
검사의 얼굴에 노기가 등등하였다.
검사는 소리를 빽 질렀다.
“너는 불경죄를 지었으니 살아남지 못하리라.”
“.....”
“너는 당연히 처형되어야 해. 나가!”
주 목사는 검사실을 나왔다. 사십 여명의 옥중 성도들이 한결같이 심문을 받고 나왔다. 그들은 모두 비슷한 심문을 받았다.
아무도 검사의 심문에 항복한 분이 없는 듯 하였다. 그들은 다시 용수를 쓰고 수갑을 차고 노끈에 묶여 감방으로 돌아왔다.
3. 옥중 세례식
12월 8일.
일본 천황은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터진 것이다.
전투개시는 이날 새벽 날이 밝기 전, 해군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도 이소로꾸가 진주만을 기습하고, 200여대의 항공기가 호놀룰루를 폭격하므로써 성공적 전적을 거두었다.
조선총독은 각 국장들에게 진주만의 전과를 대대적으로 선전하였다. 그리하여 민족주의 정신과 자유주의 정신을 말살시키고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을 꺾으려 한 것이다.
친일파의 무리들은 어깨를 으쓱대며 민족주의자들과 기독교 신자들에게 앞장서서 박해를 가하였다. 전쟁의 냉혹한 바람은 평양 형무소에도 밀어 닥쳤다. 그 하찮은 콩밥이 달라진 것이다. 콩알맹이가 콩깻묵으로 바뀐 것이다.
콩알맹이 통째로 주어도 영양이 겨우 생명 유지에 불과한데 깻묵으로 변하였으니 견딜 수 없는 일이다.
12월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햇빛을 구경할 수 없는 음울한 감방 안. 모든 것을 대각대각 얼어붙게 하는 싸늘한 바람만이 구석 구석을 기어다니고 있었다.
마루 바닥에서 새어 나오는 바람은 유리조각에 살이 베어 피가 흐르는 것 같은 아픔을 안아다 주었다.
밤은 더욱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참아야 했다.
1942년 새해가 밝았다.
1월 첫 주일, 감방 안에서 첫 번째 세례식을 가지게 되었다. 김형석, 김종원 두 사람에게 세례 문답을 끝내고 세례를 주었다. 김종원은 밖에서 믿다가 낙심 되었던 청년이었으나 열심으로 성경을 배웠고, 새사람 될 것을 작정하고 세례를 받았다.
세례식을 집례하는 주 목사와 세례를 받는 두 성도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렸다. 이봉현이란 사람은 세례받기를 원했지만 주 목사가 원하는 수준까지 아직 미숙한 것 같아서 학습을 세웠다. 감방안이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세례를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주 목사는 세례를 주고 나니 마음에 무거움이 왔다.
‘세례를 받고 나가서 신사참배를 하면 어쩔까?’
하는 걱정이 생긴 것이다. 그 후론 세례를 주지 않기로 하였다. 몇 사람이 세례 받기를 원하였지만 주 목사는 그들에게 조용히 타일렀다.
“세례를 받고 신사참배를 하면 세례받지 않은 것 보다 못한 결과가 됩니다. 훗날 사회에 나가서 신사참배 하지 않을 자신이 생기면 그 때 세례를 받으십시오.”
4. 이름을 남선으로 개명
주 목사는 목 뒤에 생긴 대종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으로 갈 줄 알았다. 의사도 그렇게 말했다.
“병 보석으로 나가서 치료하도록 하시오. 생명이 위험한 종기이기 때문에 이 감옥 안에서는 가망이 없오.”
간수들도 주 목사에 대하여 수군거렸다.
“고집 때문에 저 사람은 죽는 거야.”
감방 안에 함께 있는 수인들도 안타까워 하였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난 것이었다. 그렇게 성이나 검붉게 부어오른 종기가 점차 사그라지면서 아픔이 점점 가시는 것이었다.
드디어 대종을 앓기 시작한 지 오십여일만에 낫게 되었다. 몸이 가벼워 지면서 밥맛이 돌아왔다. 짐승 사료 같은 그 콩깻묵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옆 사람들에게 주었는데 이제는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입맛이 돌아오니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다. 깻묵 밥 한 덩이를 다 먹고 소금국을 다 마시고 나니 목이 갈했다. 물을 찾았지만 물이 없었다.
물을 달라고 애원을 했지만 간수들은 빈정거리며 고함만 빽 질렀다.
“물이 어디 있어! 지금은 전시란 말야! 대 일본의 젊은이들은 전쟁터에서 물이 없어 목이 타 죽어가는 형편인데, 감옥 안에서 평안히 지내는 죄수 주제에 물이라니, 양심이 있어 없어?”
목 마름을 참기란 배고픈 것을 참는 것보다 더 하였다.
다음부터는 국을 마시지 않기로 하였다.
목에 종기가 낫고나니 잠도 평안히 잘 왔다.
어느 날 밤, 주 목사는 꿈 가운데서 윤산온 박사를 만났다.
윤산온 박사는 숭실 저눔ㄴ학교 교장으로 있었으나 신사 참배 반대자로 조선 총독부 당국으로부터 교장직 파면을 당하고 출국까지 당하였다. 그는 그의 젊음을 한국에 복음사업과 교육사업을 위해 바친 위대한 교육자였다.
미국 사람으론 키가 큰 편은 아니지만 얼굴이 미남형으로 잘 생기고 말이 능했다. 한 때 미국에서 영화배우가 되라는 권면을 받을 만큼 말쑥한 모습이었다.
그에게 특기가 하나 있었다. 한 번 만난 사람이면 반드시 그 사람의 이름을 기억해 두는 것이다.
두 번째 만났을 땐 이름을 부른다. 여기에서 그의 인기는 더욱 높았다. 이렇게 그는 대인 관계에 있어서 빈틈이 없었다.
윤산온 반사는 한국 사람들에게 많은 인격적 감화를 받았다.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몇 번 만나 회답을 얻기도 하였다. 그 정신적인 은사 윤산온 박사가 주 목사의 꿈에 나타난 것이다.
윤산온 박사는 생시와 꼭같은 모습으로 주 목사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주남고 목사!”
주 목사는 너무나 반갑고 기뻐서,
“윤산온 선교사님!”
하고 그의 손을 잡았다.
“주 목사의 이름이 좋지 않아요. 남고라고 하지 말고, 남선이라 하시오.”
“남선......”
“그렇소, 얼마나 부드러운 이름입니까?”
주 목사 스스로 남선을 중얼거리며 깨니 꿈이었다. 그로부터 남고라는 이름 대신 남선으로 부르게 되었다.
5. 나는 충성을 버릴 수 없다.
1942년 5월.
검사에게 불려 나갔더니 예심 판사에게 넘겨졌다.
주 목사는 예심 판사 앞에 섰다. 예심 판사는 준엄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왜 신사참배를 반대하는가?”
주 목사는 뼈만 남아 앙상하게 여윈 몸집이지만 바로 서서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신사참배는 성경에 하나님 외에 다른 신에게는 경배하지 말라고 하였기에 우상을 섬기는 일이 되므로 반대합니다.”
“조선의 모든 목사가 다 신사참배를 한다면 그 때는 어덯게 하겠는가?”
“조선의 목사가 모두 신사참배를 한다 해도 나는 할 수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인가?”
“성경대로 나는 믿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고쳐지기 전에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럼 성경을 고치도록 하지!”
“성경을 누가 고친단 말입니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절대로 사람이 고치지 못합니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성경을 고칠 수 없습니다.”
“지독하군! 당신이 버티면 얼마나 가겠나? 지금 대 일본 제국은 세계를 점령하게 된다.”
판사의 얼굴에는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었고 패기가 넘치고 있었다. 이 무렵 전세는 일본의 완전승리처럼 보였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일본에 동조하여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태평양 전쟁은 세계전쟁으로 번졌다. 일본, 독일 이탈리아 세 동맹국과 미국, 영국, 불란서 연합군으로 인류 사상 최대의 전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홍콩이 함락되고 말레이 반도가 일본의 발길에 짓밝히고, 싱가폴에 일본군이 상륙하였다. 일본 수상 도오죠오 히데끼는 연설을 하기 위하여 연단에 오를 때, 오르는 계단에 미국, 영국의 국기를 깔고 그 위를 밝고 오르기까지 하였다.
이런 전시인지라 예심 판사의 기백이 대단하였다. 그러나 당당한 예심판사 앞에 주 목사는 조금도 겁나는 빛을 띄지 않았다.
도리어 자신있는 음성으로,
“일본은 전쟁에 지고 맙니다. 일본은 망합니다. 천조대신을 섬기는 일본은 망합니다.”
놀라운 말이었다. 예심 판사의 얼굴에 노기가 서렸다. 예심판사는 주먹으로 탁자를 탁 치며 소리쳤다.
“코노야로, 사형감이다!”
주 목사의 얼굴엔 놀란 빛도 없었다. 태연히 주 목사는 말을 계속하는 것이다.
“판사님, 당신은 당신 나라에 충성하기 위하여 이렇게 판사의 의무를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내 나라를 위해서 싸우며, 나의 주인되신 예수님을 위해서 정조를 굽힐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는 나의 주 인 예수님께 충성하고 싶은 마음 그것 뿐입니다.”
“가정에서 당신의 처자들이 얼마나 기다리겠나? 집으로 돌아가서 처자들을 돌보아야 되지 않겠나?”
“나는 모든 것을 나의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가정도 처자도 심지어 나의 생명까지 다 맡겼습니다. 죽든지 살든지 나는 나의 것이 아닙니다.”
판사는 다시 조용히 말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여기 도장만 꾹 찍으면 무사히 나가게 된다. 자! 손 도장을 찍으라.”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어떻게 하면 나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본 일이 없습니다. 나는 나가지 않아도 좋습니다.”
심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주 목사의 얼굴에는 즐거움이 넘쳐 있었다. 심문을 받을 때마다 자신도 상상하지 못하였던 강한 힘이 솟아 오른 것이다.
그 힘은 성령님의 능력의 힘이었다.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더욱 성령님의 강한 역사를 체험하였다.
6. 딸의 면회
제8대 총독 미나미 지로는 이해 5월 어느 날, 이 땅을 떠났다.
그가 이 땅에 와서 가진 못된 짓을 다하며 일본 제국을 위해 충성을 하였지만 그는 군사참의관이란 별로 큰 벼슬도 아닌 직책에 임명되어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미나미 총독이 이 땅을 멍들게 한 죄악의 진상은 역사에 길이 남아 이 민족의 가슴에 분노를 일으킬 것이다. 미나미 총독은 우리 민족에게 참으로 몹쓸 짓을 많이 하였다. 그는 내선일체를 주장하였고, 한국의 지도자들에게 국민복을 입히고 머리를 깎았다.
1937년에는 애국금채회라는 것을 만들어 한국의 귀족과 고관분인들의 금비녀 금반지 등을 일본제국에 바치토록 하였다.
1938년 3월에는 국가총동원법을 만들어 한국인의 생활을 괴롭혔다. 이는 국민의 모든 생활을 정부가 마음대로 간섭하고 징발 또는 징용할 수 있도록 규정하게 된 것이다.
1939년 19월부터는 노무자까지 징용하여 규우슈우지방, 혹카이도 지방 탄광이나 군수 공장에 보내었다.
황국신민 서사란 것을 만들어 집집마다 제창하게 하였으며,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일본어 사용을 주장하면서 한국어 사용을 금하였다. 또한 창씨개명으로 우리의 성씨마저 앗아 버렸다.
1938년 2월 2일 칙령, 제95호를 공포하여 육군 특별 지원병제를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17세 이상의 남아들은 의무적으로 입대하여 사지로 끌려가게 된 것이다. 이같은 몹쓸 일을 감행한 미나미 총독은 일본국으로 소환되어 갔다.
1942년 5월 29일.
새 총독이 이 땅에 발을 디뎌 놓았다.
고이소 구니아끼, 그는 육군 대장이었다. 고이소 총독은 미나미 총독에 비하여 조금도 인간미를 더 가졌다고는 할 수 없는 고약한 사람이었다.
우선 그 생긴 모습부터가 험상스러워 마치 부르도크를 연상케 하였다. 그는 2년 전 이미 한국 땅에서 조선군 사령관의 직위에 있었다. 그러기에 한국의 모든 물정을 잘 알고 있었다.
고이소 총독은 미나미 총독의 쌓아 올린 그 지독한 제도 위에 더 악랄한 방법으로 자신의 위치를 구축하여 갔다.
평양 형무소의 대접은 말이 아니었다.
콩깻묵과 조, 밀껍질의 이 형편없는 밥덩이는 생명을 이어나갈 영양이 되지 못하였다. 형무소 안의 성도들은 부황증세를 나타내었다. 살가죽이 들떠서 붓고 누렇게 되어 남의 얼굴들 같았다.
물론 사식이 없었다. 가족들이 면회로 와서 사식을 넣을려고 하자, 간수의 폭언이 쏟아졌다.
“지금 대 일본 제국의 피끊는 젊은이들이 일선 지구에서 전쟁으로 죽어가는 판국에 감옥에 있는 것들이 사식을 얻어 먹어! 말도 아닌 소리! 대 일본 제국을 반대하는 비국민들은 굶어 죽어도 마땅하고 감옥에서 썩어 나가야 해!”
전쟁의 파문은 형무소 구석 구석까지 살얼음처럼 깔려 있었다.
더위가 한참인 8월 초순 어느날, 경순이 평양에 올라왔다. 일본에서 간호학교를 다니다가 방학이 되어 집에 돌아와 아버지를 면회하기 위하여 평양으로 온 것이다.
경순은 한상동 목사 부인 김차숙씨를 만났다.
“아버지를 면회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경순이 눈에는 눈물이 촉촉이 젖어 있었다. 김차숙 여사는 형무소에 살다시피 출입하므로 간수들이며 고등계 형사들이 다 낯이 익었었다. 경순은 김차숙 여사의 주선으로 아버지 주 목사를 면회할 수 있게 되었다.
면회실에 들어서서 간수가 경순에게 말을 던졌다.
“일본 말로 대화를 하여라.”
“아버지는 일본말 잘 못하실 터이니 조선말로 하겠습니다.”
“일본말 안하면 면회가 되지 않는다.”
“잘 좀 봐주세요.”
“면회는 간단히 하는거야.”
“네!”
“면회하러 온 길이니 아버지 납득을 시켜 생각을 돌릴 수 있도록 하여라. 여기서 고생이 말이 아니다.”
지극히 주 목사를 위해 주는 듯한 말투였다. 경순은 싸늘하게 한 마디 던졌다.
“나는 모르겠습니다. 나는 어리고 아버지는 어른이십니다. 내 생각보다는 아버지 생각이 바르지 않겠습니까?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에 대하여 나는 모릅니다.”
“그럼 안부만 하고 그쳐!”
경순은 의자에 앉아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경순의 마음은 형언할 수 없는 감회에 젖어 들었다.
얼마 만인가? 그렇게 인자하시고 다정하시던 아버지!
남을 해롭게 하신 일이 없고, 언제나 어려운 것은 자신이 하시고 쉬운 일은 남에게 돌리고, 자신을 위해서는 아까운 것 없이 다 주시던 고마우신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이런 형무소에서 고생을 하신다니 너무나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경순이 일본으로 건너 갈 때, 흰 두루막 입은 사람만 보면 혹시 아버지신가 하여 뒤돌아 보며 아버지를 그리워 하였다.
그렇게 보고 싶던 아버지! 아버지를 이 형무소에서 만나게 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저리듯 아파오며 가슴이 뛰었다.
얼마 후, 면회소의 창문이 열리고 아버지의 모습이 나타났다.
경순이 뛰어가 아버지 얼굴을 바라보며 외쳤다.
“아버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목이 꽉 메이고 눈물이 눈을 덮어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 줄을 몰랐다.
“경순이 왔구나!”
주 목사의 눈 언저리에 가느다란 액체가 촉촉이 젖어 있었다.
“공부는 잘 했나?”
“네!”
"경도 오빠도 잘 있고!“
“네!”
“집에 엄마랑 동생들 잘 있더냐?”
“네!”
경순은 차마 어머니와 동생들의 고생하는 모습을 이야기 할 수가 없었다.
주 목사의 모습은 말이 아니었다 뼈만 남은 앙상한 몰골에 부황증이 들어 본래의 모습은 차장 볼 수가 없었다. 목소리 만으로 그가 아버지심을 알 수 있었다.
예수님을 믿는 일이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저렇게까지 고통을 주는 것인가? 남의 것을 탐낸 일이 없고, 남을 때린 일이 없고, 몹쓸 일을 꾸민 일이 없는 저 손에 수갑이 웬 말인가?
경순은 아버지 앞에서 말을 못하고 울기만 하였다. 경순은 자꾸 자꾸 울기만 하였다.
주 목사는,
“울지 마라. 나는 괜찮다.”
굵은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건만 주 목사는 얼굴에 웃음을 띄우는 것이었다.
한없이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아버지! 제가 어쩌면 아버지를 도와 드릴 수 잇겠습니까?”
“너는 돌아가서 공부나 잘 해라, 그것이 아버지를 위하는 일이다.”
간수가 주 목사 곁에 나타났다.
“시간이 되었어!”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3분의 시간은 너무 짧다.
“우리 아버지 좀 더 말하게 두어 보세요.”
경순은 애원했지만 간수는 주 목사를 데리고 판자문으로 사라졌다.
경순은 울면서 밖으로 나왔다. 집으로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아버지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하며 아버지의 도움이 되고 싶었다.
경순은 김차숙 여사에게,
“나도 여기 있고 싶습니다. 사모님처럼 나도 남아서 우리 아버지를 도와드리고 싶어요.”
하고 부탁을 하였다. 김차숙 여사는 조용히 경순을 타일렀다.
“집으로 내려 가거라. 여기서는 아무 일도 할 것이 없다. 사상가의 자녀를 누가 쓰겠니!”
“식모라도 좋아요. 우리 아버지 도울 수 있는 일이면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나를 우리 아버지 옆에 있게 해 주세요.”
경수는 울면서 애원하였지만 어쩔 수는 없는 일이었다. 주기철 목사 부인 오정모 여사도 경순을 권면하였다.
“여기서 취직도 되지 않고 일할 것이 없어요. 신분이 분명해야 식모살이라도 할 수 있지, 사상가의 자녀는 역적의 자손이라고 써주지를 않아요. 일본으로 들어가 하던 공부나 열심히 해요. 그것이 아버지를 위하는 일이고 너를 위하는 일이지.”
경순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서 평양에 올라온 지 일 주일만에 다시 거창으로 내려갔다.
7. 옥중의 특별 기도제목
옥중 생활은 기도와 성경을 암송하는 생활이었다.
처음에는 옥중에서 성경을 허락하였지만 뒤에는 허락지 않았다. 성경읽는 것을 감시하였고, 성경이 발견되면 심한 고문을 당해야 했다.
간수들이 책을 읽으라고 넣어 주는 것이 불교 서적이고 아니면 정신교육을 위한 일본 전제주의 사상전접 등이었다. 읽을 수도 없고, 읽고 싶지도 않은 책들만 넣어 주었다.
주 목사는 전날에 암송해 둔 성경구절들을 눈을 감고 암송하며 찬송과 기도로 나날을 보내었다. 가정과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하였다. 그러면서 특별한 제목 여섯 개를 세워 기도하였다.
(1) 말세의 바벨론 우상제국이 파괴되도록
일본 제국주의는 바벨론 우상국가다. 이 우상국가는 망해야 한다.
(2) 신앙 자유를 이한 기도.
일제의 탄압으로 순수신앙이 말살되어 간다.
‘이 당에 참 신앙의 자유를 주옵소서.’
(3) 조선의 자주독립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였다.
이 나라 백성들이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자유국이 되도록 기도하였다.
(4) 일본 신사가 소멸되어야 한다.
‘이 땅에 세원진 모든 신사가 다 불타게 하옵소서.’
(5) 조선 교회 지도자 교양을 위하여 수도원을 설립하여 달라고 기도하였다. 평양신학교가 문을 닫고, 이 땅에 남아있는 교역자 대다수가 신사참배에 가담하였다.
이 땅에 일본 제국주의가 물러가고 신사가 불타 버릴 때 다시 회개의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그때 교회 지도자들은 새로운 마음의 무장을 하여야 하기 때문에 수도원이 필요하다. 또 이곳에서 신학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그리하여 새로운 교역자를 양성시켜야 한다.
(67) 거창에 성경학원을 하나 설립하도록 기도하였다. 지방교회 청년들을 위하여 신앙의 훈련과 성경공부를 시켜야 하므로 성경학원이 필요한 것이다.
주 목사는 이 여섯 가지를 특별기도 제목으로 정해 기도하였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란 주의 말씀대로 이 여섯 가지의 특별 기도제목은 그 후 이루어졌다. 믿음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은 것이다.
8. 주기철 목사 순교하던 날
1944년 4월 13일.
옆 방에 있던 주기철 목사가 신병 때문에 병감으로 옮겨가던 날이다. 이 날 주 남선 목사는 심히 마음이 허전하였다.
서로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보지는 못했어도 옆에 있을땐 위로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극도로 쇠약한 몸으로 병감으로 옮겨졌단다.
이 감옥 안에서 병들었다면 살아날 가망은 없다. 약도 없고 먹을 것도 없다. 무엇으로 치료를 받으며, 무엇을 먹고 살아날 수 있을 것인가?
벌써 여러 목사와 장로들이 옥중에서 세상을 떠났다. 주 기철 목사를 위하여 특별히 기도를 많이 하였다. 자리에 누워 어렴풋이 잠이 들려는데 비몽사몽간에 우렁찬 찬송소리가 들려왔다.
주남선 목사는 찬송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찬송은 윤산온 박사가 부르는 것이었다. 윤산온 박사는 곡조 찬송을 높이 들고 힘차게 찬송을 불렀다.
“십자가 군병되어서 예수를 좇을 때,
무서워 하는 맘으로 주 모른 체 할까
그리스도 내 구주여 나를 속량했으니
내 십자가를 벗은 후 저 면류관 쓰리.“
주남선 목사는 너무나 황홀한 중에 찬송을 듣다가 정신이 들었다.
꿈이었다. 환상이었는지 모른다. 정신이 말아 오면서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주기철 목사가 순교한 것이 아닐까?”
이제 막 그 찬송이 순교자를 위한 개선가로 생각이 되어졌다.
주남선 목사는 마음이 기뻐지며 감사의 기도가 나왔다.
“주님 감사합니다. 또 한 분의 순교자를 받으셨나이까? 나의 때는 언제이옵니까? 주님이 허락하여 주옵소서!......”
다음날 정오에 소제부가 들어 왔다.
“주기철 목사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주남선 목사는 소제부에서 속삭이듯 물었다.
소제부는 부르튼 얼굴로 시원찮게 말을 던졌다.
“어제 밤 아홉시 반 경에 세상 떠났오!”
이 땅에 찬란히 빛나던 또 하나의 별이 떨어진 것이다. 주남선 목사는 주기철 목사의 승리의 순교를 부러워 하며 종일 금식을 하였다. 들리는 말에는 예수 천당의 최봉석 목사도 별세하였다고 했다.
4월 19일. 주기철 목사보다 2일 앞서 가신 것이다.
평양 형무소는 갑자기 적막해 지는 듯 하였다. 언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지 알 수 없는 초조 속에 더욱 기도와 찬송과 성경암송으로 깨어 있는 나날을 보내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일본은 전쟁에 신통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듯 하였다. 간수들의 움직임에 별로 생기가 없었다.
함께 부산에서 올라온 이현속 장로도 별세하였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최상림 목사도 세상을 떠났단다. 모두들 영양실조로 굶어 죽은 것이다.
주남선 목사는 자신의 생명도 얼만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끝까지 믿음으로 승리하기 위하여 더욱 기도에 힘썼다.
7월 24일. 고이소 구니아끼 총독은 일본제국의 내각총리대신으로 소환되어 본국으로 갔다.
조선 제10대 총독으로 아베 노부유끼가 부임해 왔다. 아베 총독은 일본의 내각수반을 지낸 바 있는 정계의 거물이었다.
그는 육군대장 출신이다. 그는 부임하자 부임성명을 통하여,
“전쟁 완수의 근본은 사람에게 있다. 힘쓰면 불가능이 없는 것이다.”
하고 외쳤다. 그리하여 전쟁의 인적, 물적 자원의 80퍼센트 이상을 한국에서 얻으려는 계획을 세웠다. 남자들은 징병과 징용으로 뽑아 내었고, 여자들은 근로 정신대를 조직케하였다.
여자 근로 전신대는 만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배우자 없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1944년 8월 23일부터 동원하였다. 일본은 최후의 발악을 하는 것이었다. 형무소 안의 생활도 더욱 견디어내기가 힘겨워 갔다.
9. 일본은 망한다.
144년 12월. 예심정에 출정명령을 받았다. 주남선 목사는 비틀거리며 예심 판사 앞에 나가 섰다. 예심 판사는 되바라진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천조대신은 여호와와 같은 신인데, 왜 다른 신인줄 알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는가?”
주남선 목사는 머리를 들어 예심 판사를 응시하면서 또렷한 음성으로 대답하였다.
“여호와 하나니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참 신이며,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신이신데, 어찌 천조대신을 여호와와 같은 신이라 하십니까? 천조대신은 사람이 만든 사신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참 신이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외엔 참 신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가 재림하여 천년왕국이 이루어지면 일본의 천황에게도 통치권이 있는가?”
“없습니다. 천년왕국 시대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만이 통치권이 있습니다. 만일 천황이 회개하고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통치권이 있습니다.”
“일본은 신사참배를 하는데 천황 폐하가 예수를 믿을 것 같으냐? 예수는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지?”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통치권은 없습니다.”
“예수의 재림시엔 일본국가가 망하겠는가?”
“그렇습니다. 일본은 망합니다.”
예심 판사는 노기 띤 목소리로,
“요시!”
하더니 이빨에 힘을 주고 입을 다문다. 다시 입을 연 예심 판사는 고함을 쳤다.
“나가!”
발악적인 고함이었다.
주 목사는 밖으로 나왔다.
감방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10. 장질부사와 최후 심문
1944년 3울 초순.
조선 총독부 5층 비밀창고에서 아베 총독은 총독부 경무국 사무관 세이데와 비밀 회담을 하고 있었다.
아베 총독은 일본의 패전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옴을 느끼고 있었다. 미군이 한국에 상륙하는 날, 한국의 인물들을 살육하자는 것이었다.
그 수는 3만명이었다. 세이데 사무관은 아베 총독에게
“저들의 처형은 감쪽같이 해야 합니다.”
고 말했다. 아베 총독은 이때부터 더욱 많은 한국의 각계 인사들을 예비 검속하였다. 사학가들의 말에 의하면 서울 인사들만도 이천 여명이라 했다. 총독부의 학살 음모는 치밀하게 진해되었다.
학살 대상 3만명 중에는 옥중 성도들과 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 학자들, 그리고 이들의 가족들까지 포함이 되어 있었다. 이것이 소위 조선총독부 보호관찰령 제3호란 것이었다.
아베 총독은 이 찰령 시기를 계산하였다. 미군의 제주도 상륙을 8월 하순이나, 9월 초로 추정하였다.
그렇다면 학살 시행은 8월 중순에 단행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하고 비밀리 학살 준비를 단행하고 있었다.
4월 어느날, 평양 시내에 장질부사가 유행하였다. 이 유행성 병균은 시설이 불결하고 영양실조에 태양 빛을 보지 못하는 평양 형무소 내에도 찾아왔다.
수인들 가운데 환자가 늘어갔다. 건강인들도 견디기 어려운 형무소 생활에 괴질이 찾아 온 것은 수인들의 근심을 또 하나 첨가시킨 결과이다.
위생관리도 의료시설도 말이 아닌 형무소였다. 여기에서 이 무서운 열병에 걸리는 날엔 그만이다. 죽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수인들 중 몇이 이 무서운 괴질에 걸려 신음하였다. 약이 없었다. 결국 그들은 죽고 만 것이다.
주 목사도 예외없이 이 괴질에 걸렸다.
“이제 마지막이구나.”
생각하면서 주 목사는 눈을 감았다.
온 전신이 어슬 어슬 추워오면서 견딜 수 없는 열기가 얼굴로 발산되였다.
주 목사는 자리에 눕지 않았다. 앉아서 기도로 병을 대하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 이 병으로 저를 받으시렵니까? 소원입니다. 순교는 저의 평생 소원입니다. 어서 속히 저를 받으시옵소서!”
주 목사의 얼굴엔 괴로움의 빛도 두려움의 빛도 없었다. 덤덤한 표정으로 앉아서 그 무서운 괴질을 상대하고 있는 것이다.
옆에서 이 광경을 본 죄수 한 분이,
“목사님! 누워서 이불을 덮고 몸을 더웁게 하십시오. 그러시다가 큰일나겠습니다.”
하고 걱정을 한다.
“염려 마십시오. 죽든 살든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것입니다.”
열병은 오래 계속되었다. 매일처럼 열이 40도를 오르내려 그 고통이 극심했다. 옆에 수인들이,
“아무래도 이 열병으로 돌아 가시겠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이 있지 않습니까? 저희들이 상제노릇을 하지요.”
그들의 얼굴엔 슬픈 빛이 서려 있었다.
주 목사는 조금도 근심스러운 빛을 띠지 않고 의연하게 말했다.
“나의 생명은 하나님의 장중에 있습니다.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내가 살아서 필요하다면 이 열병에서 낫게 해 주실 것이고, 나를 데려 가실 때가 되었으면 나는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 목사는 열심히 기도하였다. 예수님의 겟세마네동산의 기도를 생각하면서 피땀나는 기도를 계속하였다.
훗날 주 목사는 이 때의 기도를 통하여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주님의 기도를 다소나마 체험할 수 있었다고 말하였다.
기적이 나타났다. 장질부사에 걸린지 20여일 만에 몸의 열기가 떠나가는 것이었다. 몸이 가벼워지며 입맛이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런 중에서도 예심 판사는 출정 명령을 내렸다. 병중이란 걸 통고하였더니 얼마 도안 말이 없었다. 주 목사가 일어나 음식을 먹으며 차차 생기를 찾게 되던 어느 날, 형무소 사무실로 예심판사가 찾아왔다.
그 때가 5월 초순이었다. 주 목사는 겨우 일어나 사무실로 나갔다. 주 목사의 모습을 바라본 예심판사는 측은한 생각이 들었든지 길게 심문하지 않았다.
“전 번 심문할 때와 지금과 마음의 변화가 조금도 없는가?”
판사는 조용히 물었다.
"아무런 변동이 없습니다. 나의 대답은 그 때 대답한 그대로입니다. 몇 십번 몇 백번 물어도 그 외의 답은 할 수가 없습니다.“
판사는 더 노하지 않고 역시 조용한 음성으로,
“그럼 이 관계서류를 지방법원 공판정으로 보낼 수밖에 없군.”
그리고는 돌아가라 했다. 주 목사는 다시 감방에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돌아왔다. 피곤하였다. 주황색 이마에 송알송알 땀방울이 맺혔다. 감방에 들어오자 쓰러졌다.
“주님, 주님은 빌라도의 법정 앞에서 얼마나 괴로우셨습니까? 저에게 힘을 주옵소서.........”
기도를 올리는 주 목사의 눈언저리에 두 줄기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렸다.
그 이후 주 목사는 불리어 나가지 않았으며, 조용한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형무소 안도 비교적 조용하였으며, 간수들도 전처럼 날뛰지 않았다.
전쟁은 이미 일본의 패전으로 기울고 있었다.
7월 24일. 독일, 이탈리아는 손을 들었고, 미국, 영국, 소련과 불란서, 중국은 포츠담 회담을 개최하여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떨어졌으며, 8월 9일에는 소련이 일본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였다.
무서운 원자탄은 나가사끼에도 떨어졌다. 원자탄은 무서운 위력으로 폐허를 만들었다.
일본 대본영 발표는 가공할 신형폭탄이 떨어졌다고 발표를 하였지만 이 신형폭탄인 원자탄의 위력을 그들도 가히 짐작을 하지 못하였다.
얼마나 무서운 위력의 폭탄인가? 조그마한 두 개의 폭탄이 히로시마와 나가사끼 두 지방 도시에 떨어졌는데 그 피해는 상상할 수 없이 막대하였다.
건물이 파손되고 모든 초목까지 말라 죽은 것은 물론, 인명의 피해는 사망자 35만명, 피폭환자 30여만명을 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후유병으로 두고 두고 오는 세대에 고통과 사회의 문제성을 만들어 낼 줄 누가 알았으랴?
이 원자탄 투하로 인하여 일본은 생각밖에 빨리 손을 들었고, 아베총독의 그 무서운 음모 보호관찰령 제3호는 미처 시행되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를 인간은 모른다. 하나님은 순교자들과 옥중 성도들의 눈물의 기도를 외면치 않으신 것이다.
원수들에게 승리를 주시지 않으시며, 불의한 자에게 기쁨을 주시지 않으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의인의 고통을 길게 주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이 땅에 생명잃은 교회를 그대로 방치해 두시지 않으시고 생명있는 산 교회로 부활시켜 주시기 위하여, 일본을 전쟁에서 패전케 하신 것이다.
제10장
위로하는 마음과 회개하는 마음
1. 형무소의 철문이 열리던 날
1945년 8월 15일 정오.
산 신이라고 자처하던 일본 천황 히로히또의 울음섞인 육성이 라디오를 통하여 들려왔다. 그 음성은 신의 음성도 영웅의 음성도 아니었다.
너무나 처량한 음성이 전파를 타고 흘러 나왔다.
“짐은 깊이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상에 대하여 비상한 조치로서 시국을 수습하고자 이에 충량한 너희 신민에게 이른다. 짐은 대 일본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영·중·소 4개 국가에 대하여 그 공동선언을 수락할 뜻을 통고케 하였다.” 히로히또 천황은 울고 있었다. 그렇게 서슬이 푸르던 일본인들이 이 방송을 듣는 순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반면 잠잠하던 조선 천지에는 노도같은 태풍이 일고 있었다.
“해방이다!”
“대한 독립 만세!”
이 광풍은 평양 형무소 내에도 몰아쳐 왔다.
“전쟁이 끝났다!”
“일본이 패전했다!”
“해방이다. 자유다!”
주 목사의 얼굴에 감격의 눈물이 번졌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 쓸모없는 죄인을 어찌하여 살려 주십니까?”
누가 시작했는지 찬송이 흘러 나온다.
“시온의 영광이 빛나던 아침
어둡던 이 땅이 밝아 오네
슬픔과 애통이 기쁨이 되니
시온의 영광이 비쳐오네!”
찬송은 합창이 되어 온 감옥 안을 메운다.
주 목사도 일어나 창살을 두 손으로 움켜 잡았다. 소리 높여 찬송을 불렀다.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매였던 종들이 돌아오네
오래 전 선지자 꿈꾸던 복을
만민이 다 같이 누리겠네.“
이 감방에 들어온지 어언 6년.
함께 들어왔던 동지들 가운데 세상을 떠난 분이 있음이 기억났다. 주기철 목사, 최상림 목사, 이현속 장로, 박광순 장로, 최권능 목사, 쟁쟁한 신앙의 용사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주 목사의 안막을 스쳐 지나간다.
“보아라 광야에 화초가 피고
말랐던 시냇물 흘러오네
이 산과 저 산이 마주쳐 울려
주 예수 은총을 찬송하네.“
주 목사는 창살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순교자들의 못다한 이들을 나가서 힘껏 하고, 기회가 오면 자신도 순교 할 것을 굳게 마음 먹었다.
“땅들아 바다야 많은 섬들아
찬양을 주님께 드리어라
싸움과 죄악의 참혹한 땅을
찬송이 하늘에 사무치네.“
이제 푸른 하늘을 보게 된다.
태양이 작열하는 거리를 힘차게 걸어보고 싶다. 땀이 흘러도 좋다. 묶이지 아니한 자유로운 몸으로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거리를 활보하고 싶다.
“대한 독립 만세!”
이곳 저곳에서 만세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날 밤은 감방안에 쌀과 보리쌀로 만들어진 주먹밥이 고기국과 함께 배달되었다. 큰 주먹밥을 받아 쥔 수인들의 얼굴은 흥분되어 있었다. 다른 감방에서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빨리 내보내지 않고 뭐하는 거야!”
“감방 문을 열어라.”
풀이 죽은 간수들이 나와,
“조용히 하십시오. 상부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참아 주십시오.”
하고 변명하였다.
“뭐야! 해방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상부의 지시야?”
“질서를 지켜 주십시오.”간수들은 심히 떨고 있었다. 잘못하다가는 수인들이 몰려나와 보복을 할까봐 겁을 내는 것이었다.
세상이 바뀐 것이다. 그렇게 도도하던 간수들의 태도가 서리맞은 상치처럼 시들어져 있었다. 하루 순간에 세상이 이렇게 바뀌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이렇게 오묘하였다.
8월 16일, 조선건국 준비위원회 안재홍씨는 경성 중앙방송을 통하여 건국준비와 지방조직을 호소하였다.
전국 형무소의 정치법·사상범, 경제범을 일제히 석방시키도록 지시가 내렸으며, 곳곳의 옥문이 열렸다. 그러나 평양 형무소의 문은 열려지지 않았다.
8월 17일. 평남 건국 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으며 위원 약 20명 중 좌익계는 2명 뿐이었다.
위원장은 조만식 장로였다.
일본 당국은 조만식 장로에게 임시 행정권을 인수하였다. 그리하여 북한 각지에서는 건국 준비위원회가 조직되고 자치대, 치안유지위원회 등 각종 명칭의 자발적 조직이 발족되기 시작하였다.
조선공산당 평남지구 위원회가 조직되고, 따라서 북한지방 각지에 공산조직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날 밤 11시경. 평양 형무소의 감방문이 조용히 열렸다. 밤에 감방 문이 열려진 것은 형무소 담당자들의 공포심 때문이었다.
수인들이 형무소장이나 과장, 부장, 간수들에게 혹 행패를 부릴까봐 겁을 내어 이렇게 밤을 이용한 것이다.
밤11시는 조용하였다. 이미 형무소 책임 간부들은 다 귀가하고 간수 몇만 남아서 이 일을 시행하였다.
간수들 중에도 지독히 굴던 일본 간수나 한국인 간수들은 다 숨어버렸다. 좀 후하게 대하던 한국인 간수 몇 사람이 이 일을 맡았는데, 그들도 떨리는 손으로 감방문을 열었다.
“그동안 수고가 많았습니다. 자, 질서있게 따라 나오십시오. 형무소 철문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공손한 말투였다. 수인들은 어두침침한 복도를 걸어 나왔다.
자유의 몸이 된 것이다. 손에는 수갑이 없었다.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누가 감히 그들의 손에 수갑을 채운단 말인가?
수인들은 각각 자기의 손목을 한 번 더 어루만져 보는 것이었다. 뼈만 앙상한 손목, 까실 까실한 촉감이 전신을 짜릿하게 흐른다.
간수를 따라 밖으로 나오는 성도들의 발걸음은 비틀 비틀 하였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희미한 전등불에 비친 여위어 뼈만 앙상한 얼굴들이지만 그 얼굴들에는 승리자의 미소가 꽃구름처럼 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긴 것이었다. 믿음이 이긴 것이었다. 승리자의 가슴에는 기쁨이 치솟기 마련이다.
“목사님!”
“주 목사는 소리나는 쪽을 보았다. 이기선 목사였다.
“살아 계셨군요.”
손을 잡았다. 뜨거운 피가 손바닥에 모여 들었다.
그때, 걸어나오는 한상동 목사를 보았다.
“한 목사님!”
주 목사와 이기선 목사도 동시에 한 목사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안경이 얼굴 전체를 덮고 있는 듯 여윈 얼굴에 무거운 미소를 보이는 한 목사, 감격의 눈물이 이들의 앙상한 양볼을 주르르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참으로 반가웠다. 천국에서 만날 줄 알았는데, 천국이 아닌 지상에서 자유로운 몸으로 다시 만나 손과 손을 마주 잡다니 꿈만 같았다.
모두들 철문쪽으로 발을 옮겼다. 이곳 저곳에서 아는 얼굴들이 나타났다.
철문은 닫겨 있었다. 철문 밖에는 이미 소식을 들은 성도들이 옥중 성도들의 마중을 나와 있었다. 옥문 밖 성도들은 옥중 성도들의 모습이 나타나자,
“대한 독립 만세!”
하고 소리를 외쳤다. 옥문 밖 성도들이 애국가를 불렀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그들은 흥분되어 있었다. 애국가를 부르는 성도들의 얼굴은 환희에 차 있었다.
다시 찬송이 울려 퍼졌다.
“예수의 이름 권세요 엎디세 천사들,
금 면류관으로 드리고 만유의 주 삼세
금 면류관을 드리고 만유의 주 삼세.
찬송을 부르는 순간 옥문이 열렸다. 밖에는 여러 대의 인력거가 준비되어 있었다. 옥중 성도들은 인력거에 올라탔다.
시가행진이 계속되는 것이었다.
“주께서 당한 고생을 못잊을 죄인아
네 귀한 보배 바쳐서 만유의 주 삼세
네 귀한 보배 바쳐서 만유의 주 삼세.“
인력거 앞 뒤에 줄을 서서 걸어가는 성도들의 행렬.
개선장군을 앞세운 시민들의 행렬 같았다. 신아의 개선장군들을 환영하는 하늘 시민들의 거대한 행렬이다.
“이 지구상에 있는 이 온지파 족속들
장하신 위엄높이어 만유의 주삼세
장하신 위엄높이어 만유의 주삼세.“
어두운 창공으로 찬송소리는 울려 퍼졌다.
일행은 안이숙 선생댁으로 갔다. 안이숙 선생댁은 모친이 거처하는 집이었다. 그 집은 남의 집인데, 안 선생 모친이 세들어 있었다.
집 주인이 옥중 성도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 큰 집을 임시 사용하도록 문을 열어 주었다. 옥중 성도들은 이 집으로 들어간 것이다.
마루에 음식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옥중 성도들을 위하여 안이숙 선생 모친이 여러 성도들의 도움으로 이 상을 마려한 것이다.
처음, 감옥으로 들어간 성도들은 36명이었다. 그러나 7년 가까운 세월에 태반이 순교를 하고, 병보석으로 나간 분도 있고 하여 이 밤, 이곳에 온 옥중 성도는 모두 14명 뿐이었다.
식사를 하였다. 오랫동안 굶고, 영양가 없는 음식으로 창자를 괴롭혀 왔는데 갑자기 고기국과 쌀밥이 들어가니 창자가 견디지 못하는지 음식을 받아 들이지 않았다. 모두들 몇 술을 입에 떠 넣다가 그만 두는 것이었다.
이때 어떤 여인의 빠른 목소리가 있었다.
“수도에서 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모두들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물통에 물 들어가는 소리가 쏴쏴 들렸다.
평양시내 수돗물이 몇 달 동안 나오지 않아 먼 곳까지 물을 길러 다녔었다. 그렇게 귀한 물이 옥중 성도들의 출옥과 함께 이 밤에 물이 터진 것이다.
“기적이다!”
부인들의 떠드는 소리가 났다.
식사상이 물러나고 그 자리에서 예배가 시작되었다. 감격과 눈물의 기도가 흐르고 찬송을 부르는 성도들의 가슴이 뜨거움으로 은혜가 넘쳤다. 예배가 끝난 후에도 성도들은 헤어질 줄 모르고 옥중 성도들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옥중 성도들의 한 마디 한 마디의 말들은 옥문 밖의 성도들에게 은혜와 감격을 불러 일으켜 주었으며, 이런 흥분의 도가니 속에서 밤은 깊어갔다.
2. 평양 산정현 교회 집회
다음날, 옥중 성도들은 산정현 교회로 갔다. 교회당에는 이미 많은 성도들이 모여 있었다.
예배가 시작되었다. 이기선 목사가 인도하였고, 밤엔 한상동 목사가 섰다.
부흥회가 시작 된 것이다. 다음 날은 주 목사가 인도하였다. 곳곳에서 모여온 성도들이 교회당을 메웠으며 은혜가 넘쳤다. 인도하는 목사들은 한결같이 건강이 좋지 못했다. 굶주렸던 뱃속에 쌀밥과 고기국이 들어가 놓으니 위장이 말이 아니었다. 일주일을 그들은 변소길에 다니느라고 분주하였다.
그러나 속 사람은 살아 있기에, 설 때마다 은혜의 단비가 쏟아졌으며, 주 목사는 ‘신앙의 조상들’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는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신앙에 대하여 설교를 하였다.
아브라함의 순종과 이삭의 헌신과 야곱의 투쟁이었다. 경상도 사투리의 강한 액센트, 그의 음성은 철성이었다. 깐깐하게 흐른다.
사실 설교는 말만이 아니고 생활이 겹쳐서 조화를 이룬다.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말씀으로만 움직이는 주 목사의 설교는 그를 아는 사람일수록 더욱 은혜를 받는다.
같은 출옥성도인 손명복 목사는 당시의 주 목사 설교를 상기하면서,
“많은 은혜를 받았지요. 나는 그때 주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나대로의 설교를 하나 작성하였어요.”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주 목사는 그의 설교에서 가장 힘있게 강조한 것이 죄를 지으면 반드시 벌을 받고 착하게 주님의 뜻대로 살면 복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산정현 교회는 당시 한국의 대표적인 교회였다. 주기철 목사가 이 교회를 시무하다가 검속되어 형무소로 들어갔고, 해방 1년 4개월을 앞두고 주 목사는 순교하였다. 그동안 이 교회는 비어 있었다.
조국 해방과 함께 출옥 성도들이 이곳에 모여 집회를 계속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밤낮으로 집회는 계속되었다. 눈물의 바다요, 은혜의 강이 하늘로서 내렸다.
3. 거창읍 교회로의 이동
해방이 되자, 이X형 목사는 사면하고 밀양으로 시무 이동하였으며, 동사 목사로 일하던 전성도 목사만 남았다.
전성도 목사는 1942년 4월에 전도사로 거창읍 교회에 부임하였다. 전 목사는 1911년 1월 17일, 경북 안동군 서후면 명동 383번지에서 전기석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난 것이다.
목사의 가정에서 어려서부터 신앙으로 자랐다. 그는 1935년 3월.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법정대학 고등사범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각기병으로 계속 수학하지 못하고 귀국하였다. 병을 치료받으면서 차도가 있어 마산 창신학교 교원으로 들어가 학생들을 가르쳤다.
26세에 이덕선(22세) 여사와 결혼하여 신혼생활을 하던 중, 복음전파에 불타는 마음이 일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서 신호 중앙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예과 2년을 마치고 본과에서 공부하던 중, 전쟁으로 신학교가 폐교되고 말았다.
그는 한국으로 다시 나오게 되지 이X형 목사의 주선으로 거창읍 교회 전도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전성도 전도사는 교육 전도사로 교회 일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서울 조선 신학교에 편입하여 1년간 교회보조로 공부하게 되었다. 1943년 12월에 조선신학교를 졸업하고 다음 해, 11월에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거창읍 교회를 위해 일하여 왔다.
이제 이X형 목사가 사면하고 나가니 전 목사 혼자 남았다. 원 목사로 교회를 이끌어 나가기엔 자신이 너무나 부족함을 알고 있었다. 그때 교회는 다시 주남선 목사를 생각하고 있었다.
제직회를 모여 교역자 문제를 논의하였다.
“주 목사님을 모시도록 하십시다.”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전일에 주 목사의 가족들을 돌봐 주지 못한 미안함과 죄책감은 그들의 마음을 무겁게 하였다.
‘고의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지 않는가? 시대가 그랬고, 목회자가 바뀌었기에 그럴 수 밖에 없지 않았는가?’
간사한 것이 인간이다. 잘못을 저질러 놓고 그것을 후회하고 뉘우치고 회개하는 것이 또한 인간이다. 인간, 그것은 약한 것이다.
지난날들의 악몽을 씻고 새출발 하고 싶었다. 주 목사만 원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참으로 선한 청지기, 주 목사를 그들은 지도자로, 목자로 모시고 싶었다.
제직회에서는 만장일치로 주 목사를 모셔오기로 가결을 보았다. 주 목사를 모시는 데에는 공동의회를 모일 필요를 그들은 느끼지 않았다.
“시국이 그래서 우리 목사님 빼앗겼다가 다시 모시려고 하는데 다른 수속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냥 모시고 오면 됩니다.”
“목사님께서만 허락하시면 일은 간단합니다.”
모두 이런 말들을 했다. 그리하여 전성도 목사가 주 목사를 모시러 평양으로 가도록 결정을 보았다.
8월 17일 아침. 전 목사는 강진실 집사와 주 목사 큰 아들 주경중씨와 주경순과 함께 김천으로 나갔다. 김천에서 열차편으로 올라 갈 참으로 역에서 기차를 기다려 오후 늦게야 기차를 탔다. 복잡하였고 지저분한 기차였다. 때마침 김천소년원에 수감되었던 소년죄수들이 쏟아져 나왔다. 소년 죄수들이 기차에 꾸역꾸역 기어 올랐다.
파리하여 여윈 소년들이 눈알만 초롱 초롱하여 수선을 피웠다. 전 목사는 그의 앞에 앉은 소년 죄수에게 말을 걸었다.
“감옥살이 괴로웠지?”
“말도 마시라우!”
되바라진 목소리를 던진다.
“그래, 제일 괴로웠던 일이 무엇이냐?”
“그야 배고픈 일이지라우!”
“그렇겠지.....”
“나는 밖에 나돌아 다니며 잡일을 거들었는데유, 그냥 아무 것이나 마구 먹었지유. 푸성귀며 호박줄거리, 벌레도 잡아 먹었어유.”
그러나 옆에 앉아 있던 소년이 뾰족한 턱을 한번 추켜 올리더니 입을 연다.
“얘! 넌 밖으로 나돌아 다녔으니까 푸성귀며, 호박줄거리라도 먹었지만 감방 안에서만 줄창 눌어붙어 있는 우리 주제야 그런 것인들 구경이나 할 수 있었을라구, 우린 말이야, 똥을 누어서 먹었다구유. 자기 똥을 먹는 사람새끼가 어디 있겠어유? 개지! 난 개 같은 생활을 했어유!”
이 소년의 말을 처음 들을 때 전 목사는 거짓말로 들었다.
“설마, 제가 눈 똥을 먹었을라구?”
“믿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인 걸유!”
일제시대의 감옥은 그런 곳이었다. 이런 소년범들이 이렇게 배고파 고생하였다면 옥중 성도들이야 얼마나 고생이 심했을까? 전 목사의 가슴은 미안함과 괴로운 마음으로 찌릿하였다.
기차가 서울역에 도착되었다. 소년범들은 다 내리고 빈 자리에 일본 군인들이 들어와 앉았다. 남쪽으로 가지 않고 왜 북쪽으로 가는지 모를 일이었다. 한 군인이 장총을 옷걸이에 거꾸로 걸어 두었다. 그는 장교였다.
전 목사는 자기가 쓰고 있던 중절모자를 일본군인이 걸어둔 장총 개머리판에 걸었다.
그때였다. 앞에 앉아 있던 이 일본 군인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더니 일본말로 혼자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황송하게도 천황폐하에게서 받은 이 귀중한 총 개머리판에 모자를 걸다니, 무례한 녀석이군! 우리가 전쟁에 패전을 했지만 이런 무례한 대접을 받아서 되겠나......”
하면서 그 일본 장교는 옆구리에 찬 권총을 끄집어 내더니 소재하는 척 하면서 실탄을 재는 것이었다. 전 목사는 아찔하였다. 이 때는 무법시대이다. 총을 발사하면 끝난다. 결국 죽는 사람만 원통하지 별 수 없다.
전 목사는 일어나 모자를 머리에 쓰고 살짝 자리를 떴다. 조금 걸어 나와서는 뛰어 다른 칸으로 가 숨듯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가슴이 뛰었다. 가지고 가던 짐이 있었지만 그것은 그냥 두고 나왔다. 짐이 문제가 아니었다.
주경중씨와 강진실 집사는 전 목사가 변소에 간 줄만 알았다. 그러나 사태가 급해서 피신을 한 것이다. 일본은 패전했지만 그들의 사상에는 변함이 없었다. 기차가 평양에 도착되어서야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 짐을 찾아 내렸다.
일행은 곧장 산정현 교회로 주 목사를 찾아갔다. 전 목사는 주 목사를 만나 인사를 하고, 교회의 되어진 일들을 이야기 하였더니 대단히 반가워 하였다.
주 목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집회가 더 계속될 모양이니 먼저 내려가십시오. 저는 다른 동지들과 행동을 같이 하겠습니다.”
전 목사는 며칠 후에 다시 거창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 때, 한상동 목사 부인 김차숙 여사가,
“전 목사님, 좀 더 계시다가 함께 가시지요.”
하고 만류를 한다.
“빨리 내려가봐야 하겠습니다. 교회에 내려가 이 곳 형편과 주 목사님의 태도를 말씀해 드려야지요.”
다음 날 떠나려고 하니 가방과 모자가 없다. 김차숙 여사가 숨긴 것이다. 전 목사는 간신히 가방과 모자를 찾아서 평양을 떠났다.
전 목사가 평양을 떠난 그 날 오후, 소련군이 밀어닥쳐 삼엄한 경계가 시작된 것이다. 8월 22일의 일이었다. 이북은 8월 20일에 소련군 제25군 사령관 치쓰챠코프 대장이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소련군을 협력케 하고, 22일에 소련군 선발대를 평양에 도착케 한 것이다.
이 날, 소련군 소부대는 평양을 거쳐 김교까지 가게 되었다.
9월 2일, 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38선을 분계점으로 하여, 미·소 양군이 남북을 각각 분할 점령케 됨을 정식으로 공포하였다.
이것이 남북을 갈라 놓는 비극의 38선 경계가 될 줄 그 누가 알았으랴?
38선은 미·소 양군의 삼엄한 경비로 지켜지게 되었다.
이런 일은 꿈에도 모르고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는 은혜의 불길만 안고 있었다.
4. 거창에 돌아와서
산정현 교회 집회는 한 달 동안 계속되었다. 집회를 하는 동안 산정현 교회에서는 여러 차례 당회가 모여 후임 문제를 논의하였다. 산정현 교회 당회에서는 결국 한상동 목사를 주기철 목사 후임으로 결정하였다.
한 목사는 투옥 전, 담당 교회가 없었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산정현 교회 시무를 허락하였다.
9월 18일. 한 목사만 산정현 교회에 그대로 남고 다른 분들은 고향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남한으로 내려가는 일행은 함께 출발을 하였다. 평양역에 들어서니 소련군들이 요소 요소에 서서 검문을 하였다.
열차를 탔다. 열차 안에도 소련군은 있었다. 사리원까지는 무사히 왔으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몇 차례 소련군에게 제재를 당하였지만 남천까지는 가까스로 열차를 이용하였다.
남천에서 도보로 출발하였다. 주로 낮에는 숲에서 쉬고 밤을 이용하였다. 평양을 출발한 지 일주일 만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많은 고생들을 하였다. 여윈 얼굴들이 더욱 파리해 보였다.
주 목사는 거창을 돌아왔다. 7년만에 걸어보는 고향땅이었다. 감개가 무량하였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줄로 알았는데 지금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정든 길을 지금 걷고 있는 것이다. 역시 고향은 좋은 곳이었다. 아는 사람들의 얼굴들이 히뜩히뜩 지나간다.
주 목사는 죽전으로 들어섰다. 옛 교회 사택으로 들어간 것이다. 가족들이 교인들의 주선으로 다시 이사를 와 있었다.
주 목사를 맞는 가족들의 얼굴엔 기쁨과 슬픔이 엇갈려 있었다. 주 목사는 가족들을 위로하였다. 밥상을 받아 놓고 주 목사는 가족들과 함께 기도를 올렸다. 감사가 치솟는다.
세상에 수다한 사람들이 별짓 다하면서 살고 있지만, 정말 주님만을 위해서 살수 있게 하여 주신데 대한 감사가 뜨겁게 쏟아졌다.
소문을 듣고 교인들이 모여 왔다.
“목사님!”
목이 메이는 사람,
“얼마나 수고를 많이 하셨습니껴?”
말만의 인사가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는 인사가 오갔다. 뜨거운 태양열을 받고 여름을 익혀온 뜰에서는 훅훅 더운 기가 치솟는다. 교인들이 몇 차례 지나가고 가족만 남았다.
밤이 조용히 밀려 들고 있었다. 강물처럼 어두움이 더위를 덮고 흐르는 것이었다.
“얼마나 고생이 많았나?”
주 목사는 딸 경순을 쓰다듬어 주고 싶은 정다운 눈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 어머니와 동생들이 가여워요. 사람으로 살아온 것이 아닙니다. 죽지 못해 살아 온 생명들이어요.”
경순이의 눈에 물끼가 서린다.
“알아, 시대가 그런걸 누굴 탓하겠니?”
“교인들이 야속해요. 아버지가 목회를 하실 때와는 너무나 달랐어요.”
“그럴 수 밖에 더 있니? 새로운 목회자가 오면 그 목회자를 섬겨야 하니까 그렇지.”
“친일파 거짓 목자인 데두요?”
“그런 소리 하면 못써. 인간은 다 약한 거야.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별 수가 없지.....”
야위고 푸르죽죽한 주 목사의 얼굴은 납덩이처럼 굳어 있었다.
“아버지, 무엇 때문에 거창에 또 계실려구 그래요. 가요! 아버지를 기다리는 교회는 얼마든지 있다구요. 부산이고, 마산이고, 도시로 나가요.”
경중이도 아버지의 굳은 얼굴은 바라보면서 말을 건다.
“안된다.”
“왜 안됩니까?”
“목사는 환영을 받기 위해 목회를 하는 것이 아니야. 교회가 반대하여 쫓아내지 않는 한, 그곳에서 일을 해야 해 목사는 자기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거야.”
“그렇지만, 얼마나 설움을 받았는 줄 아십니까?”
“그건 시대가 그렇게 한 것이지 교인들이 그렇게 한 것은 아니야.”
주 목사는 자녀들의 불평을 신앙으로 조용히 밀어 내렸다.
“이제 해방이 되었으니 너희들은 공부에 전념해야 한다. 경순이도 학교를 계속해야지.”
주 목사는 딸 경순이 얼굴에 눈을 준다. 핏기없는 경순이의 얼굴에는 검은 눈동자만이 유독 빛을 풍겼다. 경순은 자신의 앞길보다 경효와 경세의 장래에 대하여 염려를 두었다.
두 남동생의 교육을 위해서 자신은 희생해도 좋다는 대담한 마음이 밀려온 것이다. 경순이의 영롱한 눈빛이 경효와 경세의 얼굴에 머물자, 찡하고 코허리가 시큰해 짐을 느끼는 것이었다.
5. 첫 주일 강단
주일이 왔다. 7년만에 처음으로 주 목사가 강단에 서는 날이다. 일제 탄압의 모진 혹한이 사라지고 자유의 나라, 자유의 예배 시간이 왔다.
얼마나 기다리며 바라던 날인가? 시간 전에 교인들은 교회당으로 모여 들었다. 교회당 마룻바닥에 엎드린 교인들은 흐느끼며 기도하였다.
신앙의 지조를 끝까지 못한 안타까움과 배반자의 쓰라린 가슴이 눈물을 부르는 것이다. 회개의 눈물이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제1계명을 범한 무서운 죄의식이 가슴을 친다. 죄를 범하면서 죄인줄 모르고 죄를 도리어 정당화하고 변명하여 온 지난날의 신앙이 아닌 신앙생활은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 부끄러운 일이었다.
주일이면 교회당에 모여 들어 맥빠진 찬송을 조울듯 부르고, 진실과는 거리가 먼 어색한 기도를 올리고, 지루한 시국강연의 설교를 들어왔다. 그들의 가슴속에는 이미 무거운 죄와 함께 하나님을 쫓아낸 것이다.
하나님을 잃은 그들의 가슴 속, 그러면서도 주일이면 교회당을 찾아와야 했던 서글픈 사실, 무거운 피곤이 그들의 심신을 누르고 있었다. 이 어둡고 답답했던 과거가 허물어지고 꿈같은 새날이 찾아온 것이다.
진실된 주의 종, 신앙을 목숨보다 귀하게 사수해 온 산 순교자 주남선 목사가 강단에 선다.
성도들의 가슴은 죄책과 새로운 흥분으로 야단이 나고 있었다. 교회당 안은 교인들로 가득찼고, 흐느끼는 울음과 자복기도의 여음이 탁류처럼 흐르고 있었다.
시간이 되어 종이 울렸다. 장내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하였다. 찬양대의 잔잔한 찬송과 함께 예배가 시작되는 것이다.
찬양이 끝나고 고요하게 목사님의 기원이 시작되었다.
교인들의 가슴은 처음으로 하나님께 상달되는 예배를 체험하고 있었다. 함께 찬송을 부르고, 목회자의 기도가 시작된 것이다.
“사랑하는 주님.....”
먼 곳에 계신 예수님을 소리높혀 외쳐 부름이 아니라, 옆에 계신 예수님을 사랑과 신뢰로 부르시는 것이다.
교인들의 귓전에,
“오냐!”
하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 듯, 역력하고 산 기도가 올려지고 있었다.
“주여!”
하고 흐느끼는 소리가 이곳 저곳에서 터져 나왔다.
“죄인을 죄대로 갚지 않으시고 사랑과 은혜로 대하시니 너무나 감사하옵고, 황송하옵나이다. 부족하고 죄 많은 이것, 옥중에서 불러 가시지 않으시고 살려 주셔서 출옥하게 하시어 성도들과 함께 감격스러운 예배를 드리게 됨을 진심으로 감사하옵나이다. 목자 잃은 양떼들이 갈 길을 못찾아 유리방황하였나이다. 연약하여 주의 뜻 어긴 것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 양떼들이 어긋난 길을 가고 주님의 계명을 범한 죄 용서하여 주옵소서. 미리 미리 올바르게 가르치지 못한 이 죄인의 죄가 많사옵나이다. 용서하여 주옵소서.”
사랑하는 주님! 이 양떼들, 마지못해 지은 죄, 깨닫지 못하고 지은 죄, 주님이 아십니다. 이들의 죄의 값을 이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목사의 기도는 주님의 사랑을 보여 주는 겸손한 기도였다. 교인들의 가슴은 뜨거워지고 이마엔 구슬땀이 흐르고 있었다. 머리에 숯불을 부은 듯 활활 타는 뜨거움을 느꼈다. 진리를 위해 피흘리기까지 싸우지 못한 죄책감이 가슴을 친다.
교인들은 울고 또 울고, 가슴을 치고 마루바닥을 쳤다. 기도가 끝나고 성경봉독이 있었고 찬양대의 찬양이 드려졌다.
설교시간. 교인들은 얼굴을 들지 못하였다. 주 목사의 얼굴을 차마 정면으로 바라 볼 수가 없었다. 뼈만 앙상한 그 모습을 쳐다보기가 황송하였다.
육체를 위해 살아온 그들 자신들의 기름이 낀 모습들과 비교할 수 없는 성스러움 앞에 자연 머리가 수그러졌다. 이제와서 목사님이 무슨 말씀을 하신들 받아 들이지 못할 말이 있겠는가?
책망, 또 책망, 소낙비처럼 책망을 퍼부어 주었으면 싶은 마음들이었다. 피골이 상접한 얼굴은 그의 몸을 감싼 곱게 다듬어진 모시두루막에 반사되어 진초록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마엔 깊이 새겨진 주름살은 지난 날의 모진 상흔을 역력히 말해 주고 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동안 얼마나 수고가 많았습니까? 나라 없는 슬픔이 그런 것입니다. 신앙의 길은 평탄하고 형통해지는 길만이 아닙니다. 모진 고난이 있고 어려움이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
한 마디의 책망없이 시작된 주 목사의 설교는 교인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였고 감동을 불러 일으켜 주었다.
교인들의 실수를 자신의 실수로 아는 목사님, 교인들의 부족을 자신의 부족으로 알고 책임을 느끼는 목사님, 교인들은 그 목사님 앞에 머리를 수였다. 거창읍 교회성도들은 한결같이,
“우리 목사님을 다시는 잃지 않으리라.”
하고 결심을 지었다.
주남선 목사의 목회생활은 다시 거창읍 교회에서 시작되었다. 거창읍 지방의 모든 사람들이 비록 그들은 교회에 출석하지 않지만 주 목사의 인간됨과 그의 애국심과 종교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 목사를 우러러 보고 있었다.
교회는 날로 부흥하여 갔다.
6. 철저한 신앙인
주 목사는 항상 한복을 입었다. 밤에 잠자리에 들면서도 발을 맨 댓님을 푸는 법이 없다. 두루막만 벗고 그냥 눈을 부치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어느 교역자,
“목사님, 어째서 옷을 입은 채 댓님을 맨 채 주무십니까?”
하고 질문을 했다.
목사님의 대답은 간단하였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운데 잠잘 때 오시면 급히 일어나야지!”단순한 신앙이었다. 이는 그의 마음을 보여 주었다. 그의 깨어있는 신앙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그는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면 아침 9시가 훨씬 넘어서야 사택으로 돌아간다. 성경찬송을 겨들랑이에 끼고 길을 갈 때면 보는 사람마다 감화를 받는다.
어느 주일 아침이었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일어서다가 모시두루막 고름을 밟았다. 툭 하고 고름이 떨어져 발 밑에 깔렸다. 고름을 손에 쥐고 집으로 왔다.
달 수가 없는 것이었다. 주일이기에 고름을 달아 달라고 사모님께 내밀 수가 없었다. 그는 남은 옷고름에 떨어진 고름을 잡아 매어 빙 둘러 묶었다.
그런 상태로 강단에 섰다. 교인들이 목사님의 모습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사모님이 몰라서 저렇게 두었는가 보다”
마음으로 교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였다. 예배 후, 여 집사 한 분이 목사님께 질문하였다.
“목사님, 두루막 옷고름을 왜 그렇게 하고 나왔습니까? 꼭 어린아이 갔네예... 호호.....”
그러나 주 목사는 근엄한 표정으로,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이렇게 한 것입니다.”
말을 하였다.
이렇게 계명에 대하여는 철두철미 엄수한 주 목사였다.
당회를 모이다가 혹 의견이 맞지 않는 때가 있었다. 그 때 주 목사는 우기지 않았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지요.”
눈물어린 기도가 시작된다. 줄줄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마루에 떨어진다.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기도였다. 장로들은 눈물어린 기도에 차마 자신의 어떤 고집을 주장하지 못했다.
문제는 해결이 되는 것이다.
“주님께 맡깁시다. 주님께서 해결해 주십니다.”
사심이 없고, 자신의 유익을 구치않는 주 목사의 신앙적 처사에 순종 못할 이유는 없었다.
주 목사는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주일 아침만은 냉수로 목욕을 했다. 고행이 아니라 그의 정신이었다. 맑은 정신 깨끗한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친다는 뜻에서 그렇게 하였다.
7. 약속은 틀림없이
그 무렵 이성옥 전도사는 한천읍 교회를 시무하고 있었다. 전도사로 시무하고 있으면서 장로 장립을 받게 된 것이었다. 이성옥 전도사는 사전에 주 목사를 만나 모든 순서에 대하여 의논하고 장립 날짜를 정하였다.
정립 날짜가 가까워 왔다. 헌데 주 목사는 급한 일로 서울에 상경하신 것이었다. 장립 날자는 내일로 박두하였는데 소식이 없다.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각 교회에 통지문을 내었으니 연기할 수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며칠째 눈이 내려 길이 막혔다.
거창이나 합천은 교통이 말이 아니었다. 김천에서 거창까지 백 오십 리 길은 오전밖에 버스가 없었다.
장립 날이 밝아왔다. 이성옥 전도사는 초조한 마음으로 주 목사를 기다렸다. 시간이 되자 어디서 어떻게 오셨는지 주 목사가 나타난 것이다. 반갑고 놀라워 이성옥 전도사는,
“목사님 어인 일입니까?”
하고 말을 던졌다.
“어인 일이긴 어인 일이라, 장립하러 왔지!”
주 목사의 이마에는 촉촉이 땀기운이 서려 있었다.
“차가 없어 못오실 줄 알았습니다.”
“김천에서 거창까지 걸어 올 생각으로 어제 오후 길을 나섰지! 그런데 우두렁 고개 미처 못와서 트럭이 한 대 오드만, 도락구가 말이야. 태워 달라고 손을 들었더니 태워주지 않겠나, 그래서 쉽게 거창으로 왔지요. 오늘 새벽 거창을 출발했는데 차가 있어야지, 걸어 나섰지 뭐!”
주 목사는 잠시 말을 끊고 숨을 길게 내 쉬었다.
“묘산까지 와서는 초조해 지더군. 시간 전에 못들어 가겠다 싶어서····· 그만 길가에 앉아 기도를 했지! 기도를 끝내고 일어나 걸을려고 하니 차소리가 나지 않겠어? 돌아보니 쓰리코다가 한 대 오더군요. 가까이 오는데 보니 경관들 차야, 염치불문하고 손을 들었지! 세워 주더군. 좀 태워달라 했더니 시원스럽게 타라고 하지 않겠나? 그래서 타고왔지.”
“하나님께서 도와 주셨군요.”
“이 조사 기도 많이 한 모양이지? 장립받는다고, 다 기도 덕이지·····”
이성옥 전도사의 눈에 감격의 눈물이 서렸다.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는 자신의 몸이나 형편을 돌보시지 않는 주 목사. 그는 삼군지방 교역자와 성도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8. 대구 서문로 교회의 청빙
해방과 함께 도시 큰 교회에서는 교역자 문제로 진통을 겪고 있었다. 대구 서문로 교회에서도 교역자가 비어 있었다.
당회가 모여 여러번 의논을 거듭하다가 결국 주 남선 목사를 청빙하기로 결의하였다. 허나 교섭하는 일이 문제였다. 김정오 장로가 윤봉기 전도사를 만났다. 김정오 장로(김주오 목사 형)는 당시 과수원도 갖고 있었고, 약국을 하고 있었다.
김정오 장로가 주 목사와 가까운 윤봉기 전도사를 찾아 경주까지 간 것은 무리한 일이 아니었다. 그만큼 서문로 교회는 주남선 목사를 사모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 장로는 윤 전도사에게,
“거창으로 가셔서 꼭 주 목사님의 허락을 받아 오시오. 지금 우리 서문로 교회에서는 거창읍 교회가 부담하는 삼 배를 부담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다짐을 주었다. 윤 전도사는 주 목사가 자기 가까이 오시게 되는데 마음이 움직였다. 윤 전도사는 남 궁억 선생에게서 민족 사상을 강하게 받았고, 주남선 목사를 통하여 산 신앙을 체험하였다.
그의 첫 목회지는 야로 교회였다. 1935년 9월, 성서공회 권서일을 보면서 교회를 이끌어 갔다. 권서일로 뛰면서 자주 주 목사를 만났고 신앙의 지도를 받았다. 경남노회에서 전도사 시취를 할 때, 주 목사에게서 문답을 받았다.
윤 전도사는 3년간 야로 교회를 시무하다가 군북 교회로 갔으나 신사참배 문제가 생기자 군북 교회를 사면하고 안의 교회로 왔다. 여러번 주 목사가 찾아와 윤봉기 전도사에게 신사참배 하지 말라고 권면하였다.
윤 전도사는 주 목사의 권면을 바로 받아들였다. 어떤 일이 있어도 신사참배는 할 수 없다는 것을 표명하였다. 주 목사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투옥되었고, 이X영 목사가 거창읍 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 윤 전도사는 주 목사의 투옥이 자신의 투옥처럼 마음 아파했고, 자신의 투옥도 멀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윤 전도사는 어느 주일 낮에 신사참배는 죄가 때문에 결코 해서 안된다고 설교하였다.
설교를 듣던 교인 중 한 분이 당회장 이X형 목사에게 보고를 해서 이 목사가 찾아왔다. 이 목사가 윤 전도사에게 말했다.
“윤 조사, 이 판에 신사참배 하고 안하는 것을 강단에서 말할 것이 무엇이 있소? 나는 윤 조사 신앙이 뜨거운 줄 잘 알고 있소. 허지만 강단에서 신사참배 문제를 내 놓지 마시오. 그냥 구원에 대한 설교만 하시오.”
윤 전도사는 음성을 높혀서,
“목사님, 계명에 관한 문제인데 말하지 말라 하시니, 나는 목회 못하겠습니다. 나는 그만 교회를 사면하겠습니다.”
하고 강하게 말했다.
“그럼 누가 안의 교회에 오겠오.”
“그건 나도 모릅니다. 나는 계명을 범하면서 까지 목회하고 싶은 마음 없습니다.”
윤봉기 전도사는 교회를 사면하였으며, 경주에 있는 최성환씨 주선으로 회사에 취직하였다. 최씨는 안경과 자봉침 도매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까지 경찰의 손이 뻗혔다. 경찰에 호출되어 갔다. 형사 주임이 물었다.
“당신이 윤봉기요?”
“예, 그렇습니다. 어떻게 저의 이름을 아십니까?”
“일본 경찰을 우습게 보지 마시오. 그래 한상동씨를 아시오?”
“예 알고 있습니다.”
“주남고씨를 아시오?”
“예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주남고 목사님의 사랑을 받고 있던 사람입니다.”
“묻는대로만 답하시오.”
형사 주임은 여러 가지를 물었다.
그러나 대답하지 않았다. 그 후부터 주인 최성환씨도 윤전도사를 외면하는 눈치였다. 마침 경주 경찰서에 읍민들을 소개하라 명령을 해서 윤 전도사는 충남 논산군 연산면 면소재지로 갔다.
그곳에서 신문 지국을 하며 지내다가 해방을 맞았다. 해방이 되자 경주읍 교회에 가서 목회르 시작한 것이다.
윤봉기 전도사는 김정오 장로의 부탁을 받고 거창으로 주목사를 찾아가면서 지난 날을 회상해 보았다. 믿음으로 바르게 살기란 참 힘드는 일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는가 보다.
거창 죽전에 들어간 윤 전도사는 주 목사를 마나 그가 찾아온 용건을 말했다. 윤 전도사는 계속해서 주 목사에게,
“목사님, 대구로 가십시다. 목사님께서 대구에 가시면 저도 자주 만나 뵙게 되어 좋을 것 같습니다.”
무게있게 말을 던졌다. 주 목사는 그의 특유한 웃음을 두텁게 얼굴에 깔면서,
“내가 거창을 떠날 것 같이 생각이 되었오.?”
하고 반문하는 것이었다.
“대구에 가시면 여러 가지로 유익하실 터인데·····”
윤 전도사가 말을 흐리자,
“어쨋던 잘 왔오. 윤 조사, 나하고 한 주간 심방을 합시다.”
“난 목사님을 모시러 왔는데요······”
“그런소리 하지말고 온 길이니 심방이나 합시다. 옥중에도 같이 동행할 처지인데 심방 좀 같이 못할까?”윤 전도사는 당황하였다. 허나 주 목사의 간청을 거절할 수가 없어 같이 심방에 나섰다. 7년만에 지방 순회를 하시는 심방이었다.
교회마다 찾아가 세례 학습 문답을 하셨다. 주 목사의 세례문답은 어려웠다. 대답을 잘못하면,
“내년에 받도록 하지.”
하고 미루었다. 밤에는 집회를 가지는데, 윤 전도사에게 설교를 시키는 것이다.
“목사님이 설교를 하셔야지요.”
윤 전도사가 사양을 했다.
“이럴 때 설교해야 나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나?”
“그렇지만 목사님이 설교를 하셔야 은혜를 받을 수 있지요.”
그러나 주 목사는 가는 곳마다 윤 전도사에게 설교를 맡겼다. 윤 봉기 전도사는 주 목사와 함께 심방을 하면서 은혜를 많이 받았다. 윤 전도사는 생각하였다.
“주 목사님 밑에서 교인 노릇을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윤 전도사는 목회지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그만 주 목사 밑에서 장로가 되어 주 목사를 받들며 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주 목사가 한 주간 더 있어달라는 걸 사정을 하여 대구로 떠났다. 주 목사 청빙을 위해 갔다가 주 목사 밑에 교인이 되고 싶은 마음만 안고 돌아오게 된 것이다.
제11장
살려 놓은 하나님의 뜻
1. 경남노회 노회장에 피선
경남노회는 1943년 5월 26일에 해산되어 있었다.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한 후 사실 조선 예수교 장로회는 해산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일본은 정치의 힘으로 교파를 해산시키고 교단을 통합하였다.
1943년 5월 5일,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는 해산이 되었다.
성결교, 안식교, 침례교가 폐지를 당하고 모든 교파는 “일본 기독교단”으로 통칭, 총리라는 직명을 주어 운영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일본 기독교단은 종교단체라기 보다 어용기관으로 일본인들의 요구대로 따라가는 단체가 된 것이다.
일본 기독교단 경남교구장이 된 김X창 목사는 경남교구회 소집 통지서를 다음과 같이 발송하였다.
“배계, 시하성전에 어건시를 경하부기 하나이다. 진자 조선 기독교 각파 합동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가가 자체가 과거의 불비한 조직을 해소하고 현 일본 기독교단 규칙을 기준해서 우리 반도계의 최 적당한 규칙을 작성하여 거 5월 5일에 조선 예수교 장로회의 발전식 해소를 하고 이에 일본기독교 조선 장로교단을 결하게 된 것입니다.
교단 총리로는 좌천 X근씨가 당선되었고, 불초 교제가 결성국장 겸, 경남 교구장으로 임명되고 금성 X준씨가 경남 부구장에 임명되었습니다. 그 후로 금후 더욱 불초 소생등을 위하여 선한 지도있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1회 경남 교구회를 시급히 개회코져 하와 여히 통지하나이다.“
그리하여 통지문대로 1943년 5월 25일에 부산 항서 교회당에서 모여 2일간 회의를 계속하고 26일에 경남 노회를 해산시켰다.
8·15해방과 함께 경남 노회 재건운동이 일어났다.
1945년 9월 2일. 부산시 교회 연합 예배를 모이고 최재화, 노진현, 심문태 목사 등 뜻있는 20여명의 교역자들이 ‘신앙부흥운동 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9월 18일에는 부산진 교회당에서 경남 재건 노회가 조직되었고, 현 교직자들의 자숙안을 내세웠다.
1. 목사·전도사·장로는 일제히 자숙에 들어가며 현재 시무하는 교회를 일단 사면할 것.
2. 자숙기간이 지나면 교회는 교직자에 대하여 시무투표를 시행하여 그 진퇴를 결정한다.
그러나 이 자숙안은 신사참배에 앞장 선 똑똑한 사람들의 궤변으로 인하여 잘 실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통회의 기색은 전혀 없고 도리어 교권으로 다시 교단을 장악하려 하였다.
이러한 어지러운 교계의 상황 속에서 제47회 경남노회가 모이게 되었다. 1945년 11월 3일. 부산진 교회당에서 제47회 노회가 개회되었다.
주남선 목사는 노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전날 거창을 출발하였다.
교통이 불편한 거창에서 도보로 진주를 향하였다.
가다가 요행히 트럭이 있어서 고마운 신세를 졌다.
노회에 참석한 주 목사는 어지러운 분위기를 느끼고 조용히 눈을 감고 주님만 바라보고 있었다.
재건노회 위원들이 주가 되어 노회 진행을 이끌어갔다.
예배가 끝나고 임원선거가 시작되었다.
앞자리 강대상 옆에 원로목사들이 앉았고, 재건노회 위원들도 한 자리를 마련하였다.
임원선거가 진행되려 할 때, 시끄러운 분위기였다. 신사참배 주동자들과 가담자들은 죽은 듯 앉아 있었다. 지금은 나설 때가 아님을 자신들이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참석조차 할 수 없는 처지였지만 원래 얼굴이 두꺼운 사람들이라 카랑카랑한 눈으로 앉아 있었다.
일본에서 나온 목사들, 농촌에 피신했던 분들의 얼굴도 있었다.
임원을 어떻게 뽑느냐고 의논이 분분하게 나돌고 주위가 수건수건 시끄러웠다.
이때, 박X애 목사가 밖으로 뛰어 나가더니 물통을 들고와서 앞자리에 앉아 수건수건 논쟁하는 목사들에게 끼얹었다. 물 벼락을 맞은 것이다.
“이 새끼 같은 놈들이 뭐 잘났다고 야단들이냐 말이냐! 내나 너희 놈들이나 다를게 뭐냐?”
박 목사는 고래 고래 소리쳤다.
실은 오줌통을 끼얹는다는 것이 물통을 들고 왔다.
박X애 목사는 항서 교회에서 김X창 목사와 함께 일을 보던 분이다. 그러나 그는 신사참배 문제 뿐 아니라 다른 불미스러운 일이 있어 근신당한 형편이었다.
갑작스레 쏟아진 물 벼락으로 장내는 더욱 어지러웠다.
잠시 후, 다시 정돈이 되었고 임원개선이 시작되었다. 회장에 주남선 목사가 추대되었다. 주 목사는 노회장 자리를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노회 복구의 빨리 길은 주 목사가 노회장직을 맡아주는 일이었다. 이 일에 반대하는 분은 별로 없었다.
사양의 뜻을 표했지만 어지러운 이 시점에서 회장 자리를 맡아야만 문제가 해결되겠다는 노회원들 전체 의사를 무시할 수 없어 끝까지 사양하지 못했다.
임원 선거가 끝나고 신임 임원들의 인사 차례였다. 주 목사는 회장으로 인사를 하기 위해 단 위에 올랐다.
장내가 조용하였다. 책망의 소리가 나온다 해서 불평할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주목사는 침착하면서도 무거운 음성으로 말을 시작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얼마나 수고가 많았습니까! 이 사람은 형무소 안에서 바깥 세상을 모르고 주님만 생각하고 살아 왔기 때문에 어떻게 세월이 지나가는 줄도 모르게 살아왔습니다만 여러분은 직접 일본 사람들의 통치를 받으면서 살아가자니 참으로 수고가 많았습니다.”
장내에서는 이곳저곳에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척석에서 울음이 터진 것이다.
“저 같이 말주변도 없고 정치도 모르는 사람에게 옥중 성도라는 것 하나 때문에 회장의 중대한 자리를 맡기시니 너무 가슴이 무겁습니다.”
주 목사의 겸손한 인사는 감동으로 회원들과 방청객들의 마음을 찌르고 있었다.
출옥 성도의 위치에서 신사참배 문제를 들고 나와 여지없이 책망할 줄 알았는데, 이외로 온유한 말이 나오자 회중에서 훌쩍훌쩍하는 소리까지 들렸다.
주 목사의 회장 추대를 극구 음성적으로 반대하고 나오던 신사참배 앞장 선 인사들도 의외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눈치였다.
인사가 끝나고 회무가 진행되었다. 회는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경건회 시간마다 부흥회였다. 자복하고 통회하는 소리가 교회당을 메웠다.
제47회 경남노회는 은혜가운데 그 막을 내렸다.
2. 고려 신학교 설립 초대 인사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바싹마른 고목에 순이 돋고, 겨우내 얼어붙은 대지위에 따뜻한 햇살이 퍼져온다.
1949년 4월 어느 날, 주 목사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평양 산정현 교회를 시무하고 계시던 한상동 목사가 모친 별세의 소식을 듣고 부인과 함께 남하하였다는 것이다. 뛰어가 만나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목사가 먼저 거창을 찾아왔다. 뜨거운 악수가 교환되고, 두 출옥 성도는 밤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의 꽃을 피웠다.
한 목사는 모친 산소를 둘러보고 월북 하려고, 하였지만 길이 막혀 월북이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남한의 교계 소식을 들으니 아무래도 이대로 있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불타는 마음이 그를 초조케 한다고 하였다.
“교회가 바로 될려고 하면 신학이 발라야 합니다. 평양 신학교가 문을 닫고 다시 그 문을 열지 못하는 한, 그 정신과 신학을 계승할 신하교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옥중에서 데려가시지 않으시고 내 보내주신 것은 이 일을 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한 목사의 말은 무겁게 깔렸다.
“옳은 말씀입니다. 신학이 발라야지요. 힘을 쏟겠습니다.”
주 목사는 한 목사의 제의에 찬동하였다.
“서울에서 박윤선 목사를 만났습니다. 만주 동북 신학교에서 교수일을 보다가 서울에 와 있습니다 .적산집 이층 다다미 방에서 몹시 고생을 하고 있더군요. 부산서 신학을 했으면 싶은데 와 줄 수 있겠느냐고 했더니 대단히 기뻐합디다.”
잘 되었습니다. 박윤선 목사라면 안심하고 손을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박형용 박사도 모시게 되면 참으로 좋은 신학을 할 수 있을 것인데.“
“앞으로 봉천에 사람을 보내어 모셔오도록 하십시다.”
“좋습니다.”
이리하여 두 옥중 성도는 보수 신학교를 할 일을 위하여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1946년 5월 20일. 경남에 신학교를 설립하기 위하여 기성회를 조직하였다. 위원으로는 주남선, 한상동 박윤선 목사였다.
6월 21일. 서울 승동 교회당에서 해방 후 처음으로 남부 총회가 모였고 이북에서는 1945년 12월에 평양 장대현 교회당에서 이북오도 연합노회가 회집되었다.
이남에서는 남북노회가 함께 모일 날을 기다렸으나, 정치적인 38선 장벽으로 불가능하게 되자, 이남만의 회집으로 남부총회가 모이게 된 것이다. 이 총회가 회수로 치면 제32회가 된다.
주 목사는 개인 자격으로 제32회 총회에 참석하였다.
회장에 배은희 목사가 당선되고 부회장에서 함태영 목사였다.
이 총회에서 중요한 것 몇 가지를 결의하였다.
1. 장로회 헌법은 남북이 통일될 때까지 개정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한다.
2. 제27회 총회가 범과한 신사참배 결의는 불법한 결의였으므로 이를 취소한다.
3. 조선 신학교를 남부총회 직영 신학교로 한다.
등이었다.
총회를 마치고 돌아온 주 목사는 경남에 시급히 신학교가 세워져야 한다고 마음을 다졌다. 주 목사는 부산에 내려가 한 목사를 만나서 경남에 세워질 신학교를 위하여 의논하였다. 우선 신학 강좌를 열기로 하였다.
1946년 6월 23일. 진해에서 박윤선 목사를 강사로 하기 신학강좌를 개최하기 위하여 준비하였다.
한편 주 목사는 경남노회 임원회를 소집하여 이 행사를 후원하는 일을 위하여 논의한 결과 후원하도록 결의가 되었다. 신학강좌가 은혜 중 개강되었다. 60여명의 수강생들이 등록을 하였고 많은 방청생들이 강의를 들었다.
신학교 설립의 싹이 보이므로 기성회가 다시 모여 신학교 개학을 논의하였다. 신학교 이름을 고려 신학교로 하고 9월 20일 개학하기로 결정하였다.
주 목사는 7월 9일, 경남 노회 임원회 결의에 따라 임시 노회를 소집하였다. 고려 신학교 설립을 노회가 허락하고 협조해주기를 바라는 뜻에서였다. 노회에서는 고려 신학교를 인정하고 협조할 것을 결의하였다.
1946년 9월 20일. 부산진 일신여학교에서 고려신학교 개교식이 거행되었으며,
김치선 박사가 설교를 하였다. 김 박사는 ‘신학과 신조’라는 제목으로 바른 신앙의 길을 외쳤다. 이리하여 감격속에서 고려신학교는 개학이 되었다.
주 목사는 고려 신학교 설립자임과 동시, 이사가 되었다. 가난한 신학교 이사는 이사회를 모일때마다 자부담으로 참석해야 했다.
거창에서 부산까지의 길은 험하였다. 정규적으로 운행되는 버스가 없었으므로 진주까지 걸어서 다니기가 일쑤였다.
주 목사가 부산에 오면 한상동 목사 사택이 숙소였다. 한 목사는 초량교회 목사로 1946년 7월에 부임하였다. 주 목사는 초량교회 사택을 찾아들면서 떨떠름한 음성으로 말을 뱉았다.
“사모님, 본전군 왔습니더!”
손님대접 잘하기로 소문난 김차숙 여사는 조금도 얼굴에 짜증기를 풍기지 않고 손님을 맞아 들였다.
“오시느라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무료 숙박인을 친절히 대해 주었다.
주 목사는 명예를 얻기 위해 신학교 이사직을 맡은 것이 아니었다. 경제적 혜택은 물론 없었고, 염려만이 무겁게 눌렀다. 그러나 기쁨으로 이 이사직을 맡아 힘을 쏟았다.
12월 3일. 진주에서 제48회 경남노회가 회집되었고, 회장에 김길창 씨가 당선되었다. 묘한 인간적인 정치운동의 결과였다. 신사참배를 합법적으로 주장하고 나선 인사가 어떻게 회장으로 당선이 된 것인가?
그리하여 나타난 결과는 비극이었다. 한 번 구부러지기 시작한 나무는 계속 구부러지기 마련이다. 헌 옷을 입은 자는 새옷 입은 자를 시기한다. 같이 헌옷되기를 바란다. 같은 헌옷 입은 사람은 헌옷 입은 사람과 짝이 되고 서로 동정한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심리다.
드디어 고려 신학교 인정 취소를 결정하였다. 노회가 신학생을 추천 해 주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이유는 얼마든 만들면 되는 것이다.
주 목사는 마음이 아팠다. 한상동 목사는 부패한 경남노회를 탈퇴한다고 선언을 하고 나섰다. 이때부터 교단 안에는 심각한 문제가 대두되었다.
고려 신학교는 고아 같은 외로움을 실감하며 곡해와 수모의 길을 걸어야 했다. 역사는 언제나 불의한 몇 사람이 들어 굴곡을 만들어 놓는 법이다.
3. 기억을 더듬어
1945년 12월 어느날이었다.
높은 지리산 봉우리엔 흰 눈이 쌓이고 계곡은 얼음으로 덮혔다.
주 목사는 당회 구역순회로 나섰다.
순회를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함양 사근 교회에 찾아들었다. 사택에 들어선 주 목사는 키가 작고 여자처럼 곱게 생긴 청년을 만나 입을 열었다.
“여기 민영완이란 분 어디 계신지 모르겠습니까?”
청년은 주 목사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면서,
“왜 그러십니까? 제가 민영완입니다.”
하고 말을 씹었다.
“아 그러세요. 내가 용케 찾아 왔군요.”
“목사님, 추우신데 방으로 들어가십시다.”
“나를 아시겠습니까?”
“그럼요. 이 함양지방에서 목사님을 모르는 사람이 몇이나 있습니까? 다 아는 걸요. 저는 목사님을 더욱 잘 알고 있습니다.”
주 목사는 민영완 전도사의 아내를 받아 방으로 들어갔다.
“교회일을 보시나요?”“예. 일본 관서 성서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가 집에 있었는데, 하도 이 사근교회에서 집회 인도를 요구하기에 응했더니 저를 붙잡고 놓아 주지 않는 것입니다.”
“잘 되었군요.”
“집회 중 경찰에 불려가 욕을 좀 보았습니다만 목사님 앞에서는 부끄러울 뿐입니다.”
민영완 전도사는 산청군 생초면 대포리에서 자랐다. 일본으로 들어가 신학을 마치고 귀국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교회일을 보지 않고 쉬고 있었는데, 사근교회에서 집회를 청하여 응하였다가 경찰에 입건되어 수모를 당한 것이다.
해방이 되자 다시 사근 교회 요청에 따라 목회를 하고 있는 터였다. 민 전도사는 동그란 눈을 섬뻑거리며 다시 주 목사의 오신 목적에 대하여 알고 싶어했다.
“이 추운 날, 원로에 어인 일이십니까?”
그 때 주 목사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내가 진주 경찰서 유치장 있을 때입니다. 같은 유치장 감방에 수감된 사람들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그 때 유독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 청년이 누구였는지 아시겠습니까?”민 전도사가 그 청년을 알 리가 없다. 그러나 주 목사는 싱긋 웃음을 얼굴가에 날리더니 말을 잇는 것이다.
“그 청년이 말입니다. 나에게 말하기를 목사님, 저는 이렇게 몹쓸 짓으로 유치장 신세를 지고 있지만 저에게도 자랑스러운 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 일본에서 신학을 하고 있지요. 하고 그 청년은 큰 눈에 찔끔 눈물을 짜지 않겠습니까?”
“아니 형님이 어떻게 유치장에 들어 갔습니까?”
“야미 쌀 장사를 하다가 걸린 모양입니다. 나가서는 다시 그런짓 안하고 선량하게 예수님을 믿고 살려 하더군요.”“아 그랬습니까?”
“그때부터 나는 그 청년과 그의 동생인 민영완을 위하여 기도하여 왔습니다.”
민 전도사의 얼굴이 불화로를 덮어쓴 듯 확 달아 올랐다. 두 눈에 뜨거운 액체가 고여들었다. 주르르 뜨거운 액체는 얼굴 밖으로 흘러 내리는 것이었다.
“목사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주 목사는 민 전도사를 위하여 기도를 하고 자리를 일어섰다.
밖으로 나온 주 목사는 민영완 전도사의 손을 꼭 쥐고 악수를 나눈 후,
“복음전파의 길은 고난의 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길이니, 용기를 잃지 마시고 힘껏 일하십시오. 부족하지만 전도사님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말을 맺고는 총총히 주 목사는 길을 떠났다.
4. 거절한 독립 유공자 상
1946년 3월 1일. 해방 후 처음으로 맞는 3·1절 기념행사였다.
갑격스런 3·1절이다. 일제의 몹쓸 욕심의 제물이 되기 싫어 목숨을 걸고 항거한 3·1운동!
그리고 36년. 모진 고난과 피흘린 보람이 있어 해방을 맞았다. 누구의 수고로 얻어진 해방인가? 나라에서는 일제와 항거한 독립투사들과 순국한 가족들에게 표창을 했다.
거창에서도 3·1절 기념행사는 거대히 준비되었다. 주 목사에게 3·1절기념행사 준비위원들이 찾아왔다.
“목사님, 공설 운동자에서 3·1절 기념식을 갔습니다. 꼭 참석하셔서 표창을 받으십시오.”
그러나 주 목사의 얼굴은 담담하였다.
“쓸데없는 일입니다. 제가 무엇을 하였다고 표창을 받는단 말입니까?”위원들은 깜짝 놀라면서,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주 목사님은 독립투사입니다. 독립유공자란 말입니다.”라고 힘주어 말 하였다.
“당치않는 말씀입니다. 그 나라 백성으로 태어나 나라를 위해서 일을 한 것이 무엇이 대단하다고 그러십니까?”
주 목사의 말은 억지 겸손이 아닌 진실을 통하는 말이었다.
“주 목사님은 3·1운동때도 독립군을 도우고 상해 임시정부의 한 예속부대인 군정서 의용병 모집과 자금 조달에 적극 협력하시다가 투옥되어 2년 동안이나 형무소에서 모진 고난을 당하셨지요. 뿐만 아니라 신사참배 반대로 투철한 배일사상을 보여 줌으로써 평양 형무소에 수감되어 6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옥살이 하시지 않았습니까? 목사님이야 말로 우리 거창의 보배요, 이 나라의 자랑스러운 어른이십니다.”
“너무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저는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저는 이 나라의 백성으로서 할 일을 했고, 예수님을 믿는 기독신자로서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목사님, 꼭 식장에 참석해 주십시오.”
“목사가 갈 곳이 못됩니다. 대단히 죄송하지만 그냥 돌아가 주십시오.”
준비위원들이 돌아가고 얼마 후 군수가 직접 찾아왔다. 그러나 주 목사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주 목사는 3·1절 기념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주 목사는 무슨 일에나 예수 중심으로만 움직였다.
5. 떠나는 자와 보내는 자
1947년 10월. 전성도 목사가 거창읍 교회 사임을 표명하였다.
주 목사는 마음으로 섭섭해 하면서 전 목사에게 말했다.
“계속 함께 일을 하십시다. 교인들도 많아지고 일은 더욱 벅차지는데 왜 가시려합니까? 함께 일하는 것이 저에게는 많은 힘이 됩니다.”
전 목사는 무엇이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주 목사와 함께 일한다는 것은 보람있는 일이라고 늘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헤어져야 하며, 또 전 목사 자신이 단독으로 목회를 하고 싶었다.
자신의 힘에 알맞은 교회가 나서면 떠나가 주 목사에게서 받는 감명과 그 목회 방법을 살려 힘껏 뛰고 싶었다. 그런데, 단독 교회가 나선 것이다. 김해읍 교회에서 청빙이 온 것이다.
전 목사는 주 목사께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목사님 곁을 떠나는 것은 참으로 섭섭합니다. 그러나 저도 앞 날을 위해서 단독 목회를 희망합니다. 계속 저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전 목사는 주 목사와의 아쉬운 작별을 고한 것이다.
1947년 10월 19일. 전 목사는 6년여의 거창읍 교회 사무를 종결짓고, 새 임지인 김해를 향하여 길을 떠났다.
주 목사의 일이 더 많아졌다. 주 목사는 기도와 독경과 심방으로 그의 부지런한 목회를 계속하였다.
11월 30일에 두 장로를 장립하였다. 이영조, 박병영 장로였다. 당회가 보강되니 더욱 교회 일을 활발하였다.
주일학교 유년부 학생들이 천 여명이 되었다. 관리가 힘들었다. 그래서 죽전 명덕학교를 확장 주일학교를 시작하였다. 어린이에 대한 교회교육은 교회 부흥의 중요한 요인이 된다. 주 목사는 이 일을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 교회교육은 어려서부터 철저히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 일에 주력하였다.
6. 제헌 국회의원 출마 거부
1948년,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국회의원 선거가 시작되었다. 그동안 일제의 탄압밑에 신음한 우리 민족에겐 자유도 나라도 없었다.
그러나 해방과 함께 새로운 세상이 된 것이다. 정치 체제가 달랐다. 미·소 공동위원회가 군정을 폈다.
군정이지만 일제와는 완전히 달랐다. 자유가 있고, 민주주의 물결이 넘실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북한에서는 소련군이 군정을 폈기 때문에 전제주의적 기풍이 깔려 있었지만, 남한에서는 달랐다. 미군이 다스렸기 때문에 자유가 보장되었다. 하지만 한국인에 의한 자주독립 체제의 정치를 백성들은 갈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1946년 1월 27일 한국에 대한 10개년 신탁통치안이 발표되었다. 그러자 곳곳에서 치열한 반탁운동이 일어났으며, 급기야는 피를 흘리는 사태까지 벌어진 것이다.
국내 뿐 아니라, 미국내에서까지 여론이 비등해졌다. 미 국무차관 애치슨씨는 이 여론의 비등을 수습하기 위하여 기자회견을 갖고 해명하기를,
“미국은 한국에 신탁통치가 필요하다가 생각될 때에 한해 5년간의 통치를 하며, 또 신탁의 연장이 필요하게 되면 다시 연장을 할 수 있으리라고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의견에 불과하고 계획안은 아니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반탁운동은 날이 갈수록 더욱 극렬해졌다. 국내 지도자들은 하루 빨리 남북 간의 총선거가 시행되도록 동분서주하였다.
김구 선생은 여러차례 이북을 왕래하며 남북 간의 총선거를 추진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 승만 박사는 남한 만의 총선거라도 신속히 하므로써 이북 문제도 해결될 것으로 보고 이 일을 위하여 뛰었다. 방미외교에 나선 것이다. 이승만 박사의 방미외교는 성공적이었다.
1947년 4월 21일. 이승만 박사는 성공적으로 방미외교를 마치고 돌아와 남한 단독 총선거의 가능성을 예고하였다.
4월 27일. 이승만 박사는 서울 운동장에서 열린 그의 환국환영 국민대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현재 미국 정책이 공산주의와 합작을 단념하였으므로 우리도 입법위원회에서 총선거 법안을 급속히 제정하여, 남북통일을 위한 남조선 과도정권을 수립하고 유엔에 참가하여 소련과 절충, 남북통일을 꾀해야 합니다.”
결국 이승만 박사의 주장대로 유엔 소총회에서는 남한 만의 총선거가 허락되었다.
1948년 5월 9일을 총선거날로 정하고 남한 전역에 공고하였다. 이에 따라 제헌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게 된 것이다. 곳곳마다 독립투사들을 앞세워 정당을 만들고 입후보를 내세웠다.
거창에서도 국회의원 후보자 물색에 정당인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거창에는 인민위원회(좌익계)와 공복위원회(우익계)가 동시에 인물을 찾았다. 양쪽에서 다 주 목사를 두고 이야기가 오갔다.
“아무래도 거창지구에서는 주남선 목사 밖에 나설 인물이 없습니다.”
“그렇지요, 3·1운동 때부터 일제와 투쟁한 애국지사 아닙니까? 거창 지방에서 주남선 외에 애국인물이 또 있습니까?”
“주 목사만 나서 주면 무투표 당선으로 결정이 되어집니다. 누가 맞설 상대가 있어야지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주 목사를 내세웠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3월 어느날 아침, 새벽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주 목사의 앞에 길을 막는 장정 둘이 있었다. 그들은 인민위원회 계열의 사람들이었다.
“목사님!”
납덩이처럼 무거운 음성이 주 목사의 귀를 때렸다.
“왜 그러십니까?”
의연하고 맑은 주 목사의 목소리였다.
“노상에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우리는 거창군의 국회의원 선거위원인데 이번 국회의원 거창지방 후보로서 주 목사님을 모셔야 한다는 전체의견 때문에 찾아 뵈옵게 된 것입니다.”
주 목사는 생각지도 않았던 말을 듣게 되어 잠시 대답할 말을 찾기 위해 눈을 감았다.
겸연쩍은 듯 말을 잇던 장정은 잠시 주 목사의 눈치를 살피다가 숨을 돌리고,
“우리 거창지방 유지들이 깊이 생각하고 결정한 일이오니 거절하지 말아 주십시오.”
다른 장정이 말을 뱉았다.
“선거운동이나 운동방법에 대하여는 일절 신경을 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 선거위원들이 성심껏 일할 것입니다. 목사님께서는 의사표시만 해 주시면 됩니다.”
주 목사는 이 딱한 장정들에게 무슨 말을 먼저해야 좋을지를 몰라 망설였다.
“주 목사님 말고 우리 거창에 참 애국자가 누가 있습니까? 목숨보다 나라를 사랑하시고···”
“잠깐.”
주 목사는 장황하게 연설조로 말을 끌고 가려는 장정의 말허리를 꺾었다.
“전 생각지도 않은 일입니다. 갑자기 이런 말을 듣고 보니 무슨 말로 답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지방민들의 고마운 성의에 대답할 말이 궁해집니다.”
주 목사는 신중히 말을 이었다.
“저는 교회 목사입니다. 목사는 하나님께 몸을 바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하나님을 위해 죽는 일밖에 다른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거위원회에서 달리 생각을 해 보십시오.”
한 청년이 바지를 추켜 올리며 재빨리 응수를 하였다.
“겸손하신 말씀입니다. 주 목사님의 겸손은 우리가 다 아는 바입니다. 분명히 사양하실 줄 알고 오늘은 우선 귓뜸만 해 드리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대로 일을 할 것이니 그리아시고 계십시오.”
그들은 말을 던지고 그냥 깍듯이 인사를 하곤 가버리는 것이었다.
딱한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들을 앞으로 어떻게 대하여야 할 것인가를 우두커니 서서 생각하였다.
다음 날이었다. 광복위원회 쪽에서 사람들이 왔다. 중아에서 온 선거위원 두 사람도 함께 왔다. 죽전 사택으로 찾아온 이 정당인들은 허락해 다랄고 늘어 붙는다.
“거창지방에서는 일본사상에 물들지 않고 무슨 일에나 신용할 만한 분이 주 목사님 뿐입니다.”
또 한 사람이 말을 잇는다.
“땅을 다 맡겨도 안심할 수 있는 탐심없는 사람이 주 목사님 외에 또 있겠습니까? 우리 거창 지방에 주 목사님 같으신 분이 계신다는 것은 참으로 영광이요, 자랑입니다. 출마만 허락하시면 만사는 해결됩니다.”
주 목사는 할 말이 없었다.
멍하니 그들의 동정만 바라보았다.
“출마하셔야 합니다. 국회의원으로 중앙에 올라가셔서 일을 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중앙에서 내려왔는데, 중앙에서도 주 목사님의 이야기는 있었습니다. 주 목사님 같으신 분이 일을 하셔야지 누가 일을 한단 말입니까? 나라를 위해서 출마를 허락하십시오.”
주 목사는 이 끈질긴 정당인들에게 말을 잘랐다.
“나는 주님의 종입니다. 목사입니다. 나는 주님의 양떼를 위해서 교회를 지켜야 하는 사람입니다.”
“목사님, 국회의원 되셔서 주님의 일하면 되지 않습니까? 더 크게 일할 수 있지요.”
“안됩니다. 나는 목사직이 나의 천직으로 알고 이 일에만 충성하겠습니다. 그러니 나를 더 이상 번거롭게 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그들은 떠나지 않았다. 연 4일간 계속 설득작전을 펴는 것이었다. 주 목사는 새벽마다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였다.
계속 정당인들이 늘어붙기 때문에 마음의 시험이 되었다. 기도로 이 시험을 물리쳐야 했다.
주 목사는 예수님의 시험을 생각하였다. 광야 40일의 금식 후 마귀에서 시험받으실 때, 마귀가 지극히 높은 산으로 예수님을 데리고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고 경배하라고 했다. 그러면 이 모든 영광을 주겠다고 했다.
이와 같은 명예의 시험이 주 목사에게 온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 명예를 얻기 싫어하는 자 어디 있겠는가? 부귀와 영화를 싫어할 자 어디 있겠는가?
모진 고생을 했다. 배고픈 설움이 제일 슬펐다. 자신의 배고픔보다 처자식들의 굶주림은 가장으로서, 부로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괴로움이었다.
국회의원이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선 자신은 주님의 종이었다. 주님의 종은 주님 밖에서는 자유가 없는 것이며, 주님의 일 외에는 마음을 돌릴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미 목사가 된 그는 목사로서의 사명만이 전부이다. 주 목사의 두 눈에 영롱한 물방울이 맺혔다.
“주님, 모든 시험을 물리쳐 주옵소서. 주님만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게 하옵소서!”
중아에서 왔다는 선거위원들은 4박 5일로 주 목사에게 접근하였다.
마지막으로 주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지 말고 주남선을 두 사람 만드시오. 그래서 목사 아닌 주남선을 데려가시고, 목사인 주남선은 교회 일만 보도록 놓아 두십시오.”
선거위원들은 더 이상 권해야 소용없는 줄 알고 주 목사 곁을 떠났다. 그들은 가면서 참 이상하다고 말했다.
“허락만 하면 저절로 당선 될 국회의원 자리인데, 어째서 한사코 거절하는 것일까? 명예와 부귀와 영광이 동시에 넝쿨채 굴러오는 것을 거절하다니····· 참 이상하다. 목사자리가 그렇게 좋은가?”불신자인 선거위원들이 주 목사의 심중을 알 까닭이 없다. 그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허나 주 목사의 가슴 속에는 예수 밖에 없었다.
다른 어떤 것도 주 목사의 가슴에 자리를 차지할 수 없었다.
그의 가슴 속엔 예수 만으로 꽉 차 있었다. 예수만 위해서 그는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었으며, 예수 만을 위해 살아야 할 사람이며, 예수만을 위해 죽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일편단심 예수만으로 주 목사의 가슴은 설레이고 있었다.
선거일이 다가왔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5월 9일은 주일이기에 기독교 교계가 연합전선으로 날짜 변경을 호소하였다.
날짜가 곧 변경되었다. 5월 10일, 월요일을 총선거의 날로 정한 것이다. 선거는 혼란과 잡음 속에서도 사고없이 진행되었다.
전국의 총 입후보자 902명 중 198명이 당선되었다. 이리하여 국회가 조직되고 헌법이 만들어졌다.
드디어 초대 대통령이 뽑혔다. 이승만 박사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이 된 것이다. 긜하여 8월 15일 대통령이 취임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것이다.
새 공화국 탄생을 백성들은 다 함께 기뻐하였다.
7. 하나님 제일주의
박봉기라는 소년이 있었다. 지금은 마산 애리원에서 일을 보는 착실한 장년이지만 당시는 마음 약한 소년이었다. 소년은 예수님을 믿고 너무 기뻐서 주 목사 심부름을 해 주고 나들이 나가실 땐 가방도 들어주곤 했다.
어느 토요일 밤이었다. 봉기 소년이 밖에서 서성거리자 주 목사가 불러 들였다.
“심부름 한 가지 할래"
주 목사는 교회당 열쇠 꾸러미를 내밀면서,
“당회실에 가서 당회록을 좀 찾아 오너라.”
하고 말씀하신다.
봉기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당회실에 무서워서 못들어 가겠심더.”
주 목사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을 던졌다.
“무섭긴 무엇이 무섭단 말이냐? 하나님께서 옆에 계시는데 무슨 일이 일어날까?”
“무서운데 예·····”
“참 딱하군. 나는 말이야, 신학교 다닐 때, 혼자 김천에서 걸어서 거창까지 오곤했다. 낮이 아니고 밤일 때가 많았다. 우두령 고개 알지? 그 무서운 고개를 혼자 걸어 넘었단 말이다.”
“목사님은 어른이시니까 그랬지요!”
“아니야, 어른은 뭐 무서운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든?”“어른은 아이들 하고야 다르지 않습니까?”
“그렇지! 아이들보다야 한결 무서운 생각이 덜 나지, 하지만 어른도 사람인 이상 무서운 거야.”
“그런데 어떻게 혼자서 우두령 고개를 넘었지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모든 걸 맡기고 다녔지!”
봉기는 주 목사를 신비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주 목사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어느 날의 일이었다고 한다. 김천에서 우두령 고개를 넘어가는데, 너무 피곤해서 큰 나무 밑에서 잠시 쉬었다. 달빛이 하얗게 쏟아져 산천에 깔렸다.
너무 조용한 시간이었기에 주 목사는 앉아서 한 참을 기도하였다. 눈을 떠 보니 옆 자리에 짐승이 한 마리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호랑이였다. 허나 별 무서운 생각이 일지 않았다. 주 목사는 일어나 길을 걸었다. 호랑이도 일어나 어슬렁어슬렁 주 목사를 앞서 가는 것이었다. 우두령 고개를 넘어 거창이 보이는 길목까지 가다가 자취를 감추었다. 이야기를 마친 후 주 목사는 소년에게 시선을 주며,
“봉기야, 그래도 무섭냐”
봉기 소년은 꿈을 꾸는 듯 신기함을 느꼈다.
“하나님께서 호랑이를 보내어 길을 인도해 주신 거야. 하나님은 신자들을 이렇게 끔직히 사랑하시고 보호하신단다.”
“목사님, 가겠습니다. 이제는 무섭지 않아요.”
봉기는 그길로 당회실로 들어갔다.
조용하고 어두운 당회실은 무서웠다.
그러나 주 목사님의 말씀을 하여 믿는 성도를 지키시는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 당대할 수 있었다. 그 후 봉기 소년은 확신을 가지고 살게 되었다.
8. 유급 교역의 원리
백영희 전도사는 계속 개명 교회를 시무하면서도 교회에서 생활비를 받지 않았다. 생활비를 받지 않고 목회하는 것이 훨씬 마음이 가벼웠다.
하루는 주 목사께서 백 전도사를 찾아와 신앙적인 격려를 해 주었다. 그 때 주 목사는 백 전도사에게,
“아직도 교회에서 생활비는 받지 않습니까?”
이렇게 물었다.
“예, 받지 않습니다. 저는 생활비를 준다해도 안 받을 것입니다. 생활비를 받으면 약점이 잡혀 일을 힘차게 못할 것 같아요.”
“백 조사, 그게 잘못된 생각이야. 성경에도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고전 9:9)고 하셨고, 예수님도 ‘일군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눅 10:7)고 하시지 않았오. 전도인이 생활비를 받는 것은 성경이 가르친 바 원리입니다.”
“그래도 생활비 안 받는 것이 속이 편합니다.”
“그것은 교만한 생각이오. 교인들에게 우월감을 가지고 자신의 주장대로 일하려는 잘못된 생각에서 온 처사입니다. 생활비를 받고 유급 전도사가 되시오. 그래서 신학도 하고 유능한 목회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백영희 전도사는 생활비 받는 일만은 마음에 허락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백 전도사의 둘째 딸 아이가 정미기에 들어가 중상을 입었다. 팔과 다리, 중요 부분의 뼈가 부러졌다. 다섯 군데나 뼈가 절단난 것이다.
백 전도사는 아찔함을 느꼈다. ‘하나님의 징계가 아닐까?’ 자신의 고집으로 온 결과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병원으로 아이를 데리고 가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교회당에 들어가 기도하였다.
“주 목사님의 권면을 외면하고 자신의 고집대로 그냥 밀고 나간 죄악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백 전도사는 자신의 잘못된 고집이 결국 어린 것에게 미친 줄 깨닫고 통회자복하였다. 그는 기도하기를,
“하나님, 만일 어린 딸 아이의 중상이 주 목사님의 권면을 거절하고 자신의 고집으로 나간 것 때문에 온 것이라면, 즉시 상처를 낫게하여 주옵소서. 상처가 의사님의 손을 빌리지 않은 어떤 약을 사용하지 않아도 낫는다면 이는 분명히 주 목사님의 권면을 듣지 않는 결과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게 아파서 못견디며 울부짖던 어린 것이 3일이 못되어 밥도 먹고 잠도 자고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며칠 되지 않아 지팡이를 짚고 밖에 나들이를 하는 것이었다.
백 전도사는 기쁜 마음으로 주목사에게 뛰어갔다.
“목사님의 권면을 받아 들이지 않았던 것을 용서하십시오. 이제는 생활비를 받고 일하겠습니다.”
그때부터 백영희 전도사는 유급 전도사가 되었다. 그리고 고려신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신학교 입학시험에서 떨어질 뻔 했다.
논문 시간에 그는 긴 말을 쓰지 못하고 단 하나 마디 ‘포도나무의 원가지가 되기 위해서 신학교 왔습니다’고만 논문을 썼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박손혁 목사가,
“논문도 쓰지 못하고 이런 한 마디의 글을 쓰는 정도의 실력으로 앞으로 신학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입학을 거절하였는데, 주 목사가 설득을 시켜 입학이 되었다.
백영희 전도사는 주 목사의 여러 가지 배려로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목회에도 놀라운 결과를 얻게 되었다.
제12장
기쁨과 슬픔의 사이
1. 거창 성경학교 개교
성경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은 주 목사의 간절한 염원이었다. 신학교를 이미 시작한 주 목사는 그 신학교를 뒷받침 해 주는 성경학교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1941년 11월. 오종덕 목사가 부산에서 고등 성경학교를 할 뜻을 가졌다는 소식이 왔다. 주 목사는 부산으로 내려가 한상동 목사와 오종덕 목사를 만났다. 그리고 고등 성경학교를 설립하는 일에 뜻을 모두었다.
오종덕 목사는 부민동에 땅을 마련하여 12월에 고등 성경학교를 개교하였다.
오목사는 초대 교장이 되고 주목사와 한 목사는 이사가 되었다. 이 고등 성경학교는 고려 신학교의 부속기관으로 고려 고등성경학교라 칭하였다.
주 목사는 거창 지방에도 성경학교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농촌 청년들의 신앙 자질을 위해서 성경학교는 꼭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는 거창 지방 성경학교를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우선 전담 교사가 필요하였다. 실력이 있고, 신앙 사상이 투철한 신앙인이 있어야 했다. 물망에 오른 사람 중 제일 유력한 사람이 남영환 전도사였다. 남전도사는 강도사로서 이번 노회시 목사 안수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그는 사천 정의동 교회를 시무하였다. 정의동 교회는 미조직 교회로서 청빙이 안되므로 지방 전도목사로 안수를 받으려고 절차를 밟았다.
주 목사는 남 전도사에 말했다.
“거창에서 성경학교를 하려는데 남 조사님이 전임 강사로 수고하여 주십시오” 남 전도사는 갑자기 받는 청원이라 당황하였다. 그리고 목사 안수를 받으려는 때이다. 마음으로 그는 망서려졌다. 그러나 상대가 주 목사다. 신앙의 선배요, 마음으로 존경해 오던 어른이다.
“남 조사님, 목사장립 청원서 들어갔지만 보류시키고 가십시다.”
남 전도사는 주 목사의 간청을 거절 할 수가 없었다. 목사 안수야 다음에 받으면 된다.
“남 조사님, 성경학교 전임 강사이지만 우리 거창읍 교회 전도사로 청빙하는 것이니 꺼려하지 마시오.”
주 목사는 어디까지나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는 말투로 이야기 하였다.
“난 성경학교를 단순히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시작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옥중에서부터 생각해 온 계획 중의 하나를 실행하려는 것입니다.”
주 목사는 잠시 말을 멈추다가 다시 계속하였다.
“남 전도사는 전임강사가 되고 나는 교장이 되어 우리 함께 일을 해 보십시다.”
남 전도사는 완전히 주 목사의 말에 빨려 들어가고 있는 자신을 느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을 도와 힘써 보겠습니다.
남 전도사는 기쁨으로 거창으로 갈 것을 허락하였다.
노회가 끝나고 이어 남 전도사는 거창으로 이사를 하였다.
4월 10일. 성경학교가 개학되었다. 50여명의 많은 학생들이 모여왔다.
과목으로는 구약사기, 대선지서, 신약에서 공관복음, 옥중서신, 요한 계시록, 요리문답 등이었다.
요리문답은 주 목사가 맡고, 그 외의 과목은 모두 남 전도사가 강의를 하게 되었다.
1년, 3학기를 나누어 수업하기로 하였으며, 교실은 죽전에 있는 건물을 이용하였다.
개학 날, 주 목사가 설교를 하였다.
성경학교는 주간으로, 본격적인 교육이 실시되었다.
2. 전임강사 남영환 전도사
남 영환 전도사는 거창 성경학교 전임 강사의 위치에서 성경을 가르치며 주일이면 거창읍 교회를 섬겼다.
즐거움이 있었다.
주님의 일을 하는데 대한 즐거움이었다. 보람을 느꼈다.
남 전도사는 거창으로 참 잘 왔다고 생각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를 이 시대에 사용하기 위해서 단련시켜 주신 것이라고 느꼈다.
주 목사를 도와, 주 목사와 함께 일하게 됨을 생각하니 기쁨이 치솟았다.
남영환 전도사는 1915년 2월 10일, 경북 영덕군 영해면 괴실리에서 태어났다. 시골서 자라고, 산나물 밭곡식으로 그의 뼈는 굵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들어가 대판 모리꾸지에 있는 경판 상업학교를 다녔다. 귀국하여 부모를 도와 농사에 손을 대다가 19세 때, 박명순 씨와 결혼을 했다.
신혼의 즐거움도 가시기 전, 그의 마음은 허영으로 들떠 있었다. 세비로 양복이 입고 싶었다. 흰 칼라의 와이셔츠에 넥타이가 메고 싶었다.
시골에 그냥 눌려 있어 세월을 축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술을 마셨다. 방종한 생활을 해봤다.
그러나 신통하지 않았다.
무엇인가 허물어지고 자신이 짓눌리는 것 같았다. 드디어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마침 집에서 논 판 돈을 장롱 속에 감추는 것을 먼 눈으로 보아 두었다.
한날 밤, 논 판 돈 200원을 훔쳐, 일본으로 건너간 영환은 야하다 철공장에 들어가 일을 하기도 했고, 대판으로 올라가 외칠촌댁에 식객이 되기도 하였다. 외칠촌이 대판 중앙교회 집사로 있었기에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입신하였다.
다음 해인 1938년 3월에 관서 학원대학 신학부 예과에 들어가 수학을 하다가, 신사참배 문제로 공부를 계속하지 못하고 만주로 건너가 봉천신학교 2학년에 편입하였다.
여기서도 일경의 손이 뻗혀 수업을 계속하지 못하고 서평서 정가돈으로 가서 교회를 개척하였다. 그러나 일경의 끈질긴 추적 때문에 다시 몽고로 갔다. 여기서 해방을 맞았다.
그는 1946년 7월에 서울을 들러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진해로 갔다.
진행에서는 박윤선 목사를 모시고 하기 신학강좌를 하고 있었다. 그때 강좌에 참석하였다가 주남선 목사를 만난 것이다.
남영환 전도사는 그 후, 박형용 박사를 모시러 만주로 가던 도중 병을 얻어 요양을 했다. 건강이 회복 되는대로 지방 교회를 맡아 목회를 하였고, 고려 신학교에 다시 편입을 하여 졸업하였다. 강도사가 되고 목사 안수를 받으려는데 주 목사를 만나 성경학교 교사로 초빙되어 거창으로 오게된 것이다.
3. 비극의 제36회 총회
1950년 3월 어느 날. 대구 제일 교회당에서 제36회 총회가 회집된다는 소식이 주 목사에게 날아왔다. 1947년 4월부터 신학교 문제로 총회는 시끄러웠다. 조선신학교 학생 51명이 김재준 교수를 총회에 고발하였는데, 김 교수의 성경관이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것이었다.
1948년 4월 22일. 서울 새문안 교회당에서 모인 제34회 총회에서 김재준 교수를 1년간 미국 유학시키기로 학고 전 교수진도 바꾸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고려 신학교 문제는 총회와 관계가 없으니 노회가 친서를 주지 말라는 결정을 보았다.
5월 20일. 신학문제 대책위원회는 서울 창동교회에 모여 장로회 신학교 개교를 결정짓고 이사회를 조직하였다. 이리하여 총회 안에는 신학교 문제로 금이 생겼다.
대구 제일 교회당에서 모이는 제36회 총회는 시끄러울 것이 분명했다. 주남선 목사는 심신이 피로하였다. 교회 목회만도 힘에 벅찬데, 총회 문제로 더욱 머리를 써야 했고 기도해야 했다.
극도로 심장이 약해졌고, 가슴도 아팠다. 기침이 심하게 나고 가래가 끓는다.
그러나 그의 기도 생활은 변함이 없었다. 총회를 앞두고 철야 기도를 하였다.
밤이 깊은 시간이었다. 쇠약한 그의 몸은 납덩이처럼 무겁게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어 가는 듯 했다. 그런 그 앞에 한 장면이 전개되었다.
안개같은 뿌연 상태에 강둑이 보였다. 거창읍 교회 앞의 강이었다.
비가 오지 않아 물이 바짝 마른 강이었다. 그런데 위에서부터 탁류가 밀어닥치고 있는 것이었다. 강물은 둑을 삽시간에 넘어 흘러 황토물이 교회당으로 밀려왔다. 물살은 교회당 주춧돌을 때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주춧돌은 굳건했다.
눈을 떴다. 어둠이 교회당 마루에 깔려 있었다. 꿈이었다. 총회일이 염려되었다. 황토물이 밀려오듯 교계에 위험이 올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주춧돌이 떠내려 가지 않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낮에 남영환 전도사를 만났다.
주 목사는 지난 밤의 꿈을 남 전도사에게 이야기 하였다. 남 전도사는
“목사님, 저도 간밤에 꿈을 꾸었습니다. 꿈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신령한 꿈도 있지 않습니까?”
하고 말머리를 떼었다.
“그렇습니다. 이야기 해 보세요.”
주 목사의 얼굴에 근엄한 표정이 지나갔다.
“나는 거창 앞 강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습니다. 보니 옆에도 목욕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약신 목사와 심문태 목사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심문태 목사가 밖으로 뛰어 나가지 않겠습니까? 잠을 깨고 일어나 생각하였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총회 때에 심문태 목사가 우리측에 서지 않을 것 같단 말입니다.”
남영환 전도사의 말을 듣고 있던 주 목사의 눈언저리에 괴로운 감정의 조각들이 싸이고 있었다.
4월 21일. 대구 제일 교회당에서 제36회 총회가 최재화 목사 사회로 개회되었다.
개회 벽두부터 회원 자격 문제로 논란이 있었다.
경남노회가 5노회로 총대가 올라왔다. 조선 신학교를 지지하는 3노회 총대와 고려 신학측 총대, 그리고 중간 세력의 총대들은 모두 인정 할 수 없다고 주장하므로 문제는 심각해졌다.
결국 난투극이 벌어지고, 무장경관의 출동으로 총회는 비상정회가 되었다.
치욕의 역사를 남기고 정회된 총회는, 돌아서는 총대원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주 목사는 걷잡을 수 없는 무거운 마음으로 거창에 왔다. 남영환 전도사를 만나 주 목사는 씁쓸한 말을 던졌다.
“남 조사님 꿈 그대로야, 총회가 수라장이 되었지! 심문태 목사는 중간 세력에 가담되었어!”
주 목사의 얼굴에 어두운 구름이 지나갔다.
거창 성경학교는 1년 3학기로 정하여 철저한 교육을 실시하려고 계획을 세워 진행했지만 한 학기로 문을 닫고 말았다. 6·25동란 때문이었다. 동란은 많은 것을 빼앗아 갔지만 거창에도 신비로운 역사를 남겨 놓았다. 거창 성경학교 학생 중에 순교자 한 사람을 내었는 바, 그가 배추달 집사였다. 한 사람의 순교자를 내기 위하여 거창 성경학교는 창설되었는지 모른다.
주 목사는 애초 요리문답을 강의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너무 분주한 목회생활과 당회 일 때문에 한 시강의 강의도 하지 못하였다.
다만 개학식날 설교와 방학식날 설교를 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성경학교는 순교자의 아름다운 혼 심었고, 거창지방의 교회사에 깊은 한 면을 남겨 놓았다.
제13장
살인 명부
1.북괴군 남침과 살인명부
1950년 6월 25일 새벽 5시.
북괴군은 평화로운 이 땅에 포탄을 퍼붓기 시작하였다. 동란이 일어난 것이다. 이 날은 주일이었다. 마귀는 언제나 주일을 이용한다.
오전 11시.l 평양방송은 엉뚱한 보도를 하였다.
“이승만 괴뢰의 침략군에 대한 보복으로 전쟁을 개시했으며, 이것은 정당방위입니다.”
오후 1시 35분. 김일성은 방송을 통하여,
“남한은 지금까지 우 리의 모든 제안을 거부해 왔고 평화통일을 반대해 왔으며, 급기야는 옹진반도의 해주에서 인민군 진지를 공격하여 왔으므로 부득이 반격을 가한 것입니다.”
핏대를 올렸다.
거짓말이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요, 거짓말 하는 자는 마귀의 후예들이다.
26일 낮, 북괴군의 탱크는 의정부를 깔고, 수유리까지 밀고 내려왔다. 이날 오후 서울 상공에는 적기가 날았다.
28일 새벽 1시경. 북괴군의 탱크는 미아리에 접근하여 왔고, 아군과 접전하였으나 불행히도 아군은 밀리고 말았다. 드디어 서울이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
적은 7월 6일, 평택을 짓밟았고, 7월 7일 밤엔 천안으로 밀어 닥쳤다.
7월 15일 토요일이었다. 주 목사는 죽전 사택에서 설교준비를 하고 있었다.
“목사님! 목사님!”
다급히 부르는 소리가 나서 책상 앞에 앉아 계시던 주 목사가 밖을 내다보았다. 먼 친척뻘 되는 청년이 헐떡이며 뛰어오고 있었다.
“왜 그러느냐?”목사님은 마루로 나오면서 조용히 말했다.
“큰일났습니다. 목사님, 빨리 피하셔야 합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거창지방 인민위원회 간부회의에서 작성한 살인명부를 저가 보았습니다.”
동란이 일어나자 비밀리 활동하던 좌익계 인사들은 자기 세상이 왔다고 날뛰며 인민군들이 당도하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인민군이 당도하는 날에는 합세하여 전투를 도울 것이고, 지방 행정을 맡을 것을 꿈꾸며 그들의 일을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청년은 감수성이 예민한 소년기에 좌익계 사람들과 접촉하는 중, 사상이 영글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사무실에서 비밀 살인명부를 보고 호기심에서 표지를 넘기다가 놀란 것이었다. 주 목사의 이름이 첫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목사님, 살인 대상자가 50명이었는데, 그 첫째가 목사님었습니다. 얼른 피하십시오, 큰일납니다. 지금 전쟁은 이북이 우세합니다. 인민군이 거창에 들어오면 그때는 이미 늦습니다.”
말을 하는 청년의 입술은 공포에 젖어 파르르 떨고 있었다. 그러나, 주 목사는 청년의 모습과는 반대로 눈시울을 활짝 펴면서
“고맙다. 그러나 염려할 필요는 없다. 나는 도망가지 않는다. 나는 일을 하여야 해!”
“목사님 당합니다. 피하셔야 합니다!”
“괜찮아! 하나님의 허락이면 당하는 거고,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시면 공중의 참새 한 마리도 떨어지지 않는 법이다.”
청년은 얼굴을 찌푸렸다. 뒤통수에 살며시 손을 얹드니, 고개를 굽히고 돌아서 나갔다.
주 목사는 피신할 수 없었다. 7월 19일부터 거창비아 교역자 수양회가 모인다. 36일까지 계속될 수양회는 주 목사가 없으면 되지 않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혼란한 전시에 교회를 담임한 교역자들이 더욱 더 교회를 사수하여야 하며 이 일에 격려를 해 주어야 했다.
주 목사는 책상 앞으로 돌아와 조용히 설교 준비를 계속하였다.
주 목사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겼다.
그의 생명까지도 이미 맡기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잔잔했고, 주일 준비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2. 교역자의 수양회
7월 19일 수요일. 거창지방 교역자 수양회 날이었다. 삼군(거창, 합천, 함양)지방 교역자들이 모여 들었다.
전시였지만 평상시나 다름없이 교역자들은 거창 명덕학교로 찾아 왔다. 명덕학교는 거창 성경학교 교사로 사용하던 곳이었다. 장소를 이 곳, 강당에 정하였던 것이다.
모두 21명의 교역자들이 모였다. 반가왔다. 전시에 같은 길을 걷는 교역자들이 한 자리에 모이니 더욱 반가웠다.
힘이 솟았다. 모두들 굳게 악수를 나누고 신앙의 격려를 하였다.
이날 모인 교역자는 다음과 같았다.
주남선 목사를 비롯하여, 남영환, 배수윤, 이종대, 안태수, 추교경, 추국원, 백영희, 이백원, 임상율, 정우덕, 이성옥, 하종숙, 조갑득, 이재순, 김상수, 장익진, 강진실, 박기천, 임동선, 장병용 전도사 등이었다.
개회 예배가 시작되었다. 수양회는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시시로 전쟁이 밀려온다는 소문이 계속 들려왔다. 교역자들의 마음은 점차적으로 초조하고 무거워졌다. 주 목사는 교역자들 앞에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분, 우리는 다 하나님께 사명을 받은 사역자들입니다. 교회를 버려두고 물러서서는 안됩니다. 순교를 각오하십시오. 십년 후, 이십년 후에 죽는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지 말고 주님을 위해서 충성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주 목사의 얼굴엔 이미 세상을 포기한 숭고한 빛이 아련히 감돌고 있었다. 교역자들의 마음에 깊고 견고한 신앙의 지층이 쌓이고 있었다.
주 목사는 다시 교역자들에게,
“우리가 이번 수양회 기간에 특별히 할 일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 첫째가 찬송가 가사를 외우는 일입니다. 적어도 20장 이상은 외워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암송하는 일입니다. 유다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외워야 합니다. 유다서는 이단을 배격하는데 꼭 필요한 내용입니다. 어두운 시대가 오면 찬송가도 성경도 우리 손에 들어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한 때, 우리가 세상 노래를 하겠습니까? 암기한 찬송을 불러야지요. 암기한 성경을 암송해야지요. 그러한 때 영적 힘을 잃지 않게 됩니다.”
말을 하는 주 목사의 얼굴은 긴장되어 있었다.
그의 눈엔 초롱초롱 광채가 빛났다. 수양회는 기도하는 일과 찬송가 외우는 일, 그리고 성경 암송하는 일로 계속되었다.
전세는 불리하였다.
7월 20일 오후. 대전이 북괴군 제4사단에 의하여 빼앗겼다. 북괴군 제6사단은 대전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아래로 질풍처럼 내달았다. 20일에는 벌써 전주를 삼킨 것이다. 그들은 안의, 진주 노선까지 뻗을 양으로 계속 남하하고 있었다.
서부전선이 위험하였다. 미 제8군 위커 장군은 24일, 24사단 처어지 소장에게 서부전선을 방어하라고 명령하였다. 진주와 김천 노선은 공비의 소굴인 지리산을 끼고 있었다. 북괴군이 공비와 합세하여 안의, 거창을 거쳐 낙동강에 이른다면 마산이 위험하였다.
미 제24단은 25일 방어를 폈다. 제19연대의 주력 2개 대대를 진주에 두고, 나머지 1개 대대를 안의에 배치하였다. 제34연대는 거창을 방어하기 위하여 사단 사령부를 합천에 두고 작전 계획을 세웠다.
그날 밤이었다. 집회 도중에 배낭을 맨 오십대 장정이 들어왔다. 그는 개성이 있는 어느 교회 목사였다. 저녁집회가 끝나고 그 모사는 교역자들을 보고 말했다.
“어쩔려고 이렇게 태평스럽게 있습니까? 삼십리 밖에 인민군들이 들어오고 있어요.”
주 모사는 그 목사를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우리는 태평스럽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사수하기 위하여 힘을 얻으려고 교역자 수양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괴뢰군 놈들은 악랄해서 목사나 전도사는 우선적으로 살해합니다. 빨리 피하십시다.”
“이 전시에 순교할 각오를 가지고 교회를 사수해야 합니다. 피난을 간들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님도 함께 합시다.”
“나는 어차피 나왔으니 가야 합니다. 지금은 머뭇거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이 때 교역자들 가운데서도 마음이 흔들리는 분들이 있었다. 가족 때문이었다. 그 목사는 밤에 떠나 가고 수양회는 계속 새벽까지 기도회로 진행되었다.
26일 새벽. 큰 은혜가 내렸다. 모든 교역자들의 가슴은 뜨거웠고. 죽음도 무섭지 않은 담력을 얻었다. 주 목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만일 잡혀서 순교를 당하면 다행이겠으나, 그렇지 못하고 이용을 당할 우려가 있을는지 모르니 아예 몇 가지 가결을 지어 둡시다.”
모두들 그게 좋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주 목사는 다음 2개항을 교역자들과 함께 자결했다.
1. 기독교 연맹에 가담하지 말 것.
2. 공민증을 받지 말 것(왜냐하면 공민증은 계시록의 짐승표나 마찬가지 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26일 새벽 기도회로 수양회는 끝났다. 교역자들은 각각 자기 담당 교회로 양 떼를 지키기 위하여 떠났다.
북괴군 제6사단은 호남 지방으로 내려가 여러 항구를 점령하였고, 순천에 모여 들어 동쪽으로 침입할 계획을 짰다.
한편 대전을 점령한 북괴군 제4단은 금산을 누르고 남으로 내려와 거창을 향하였다.
3. 거창 전투
7월 28일. 작열하던 태양이 서산에 얼굴을 감추자 대지에는 서늘한 바람이 일었다. 벼 포기가 검푸르게 자라는 논 주변엔 사람들의 그림자가 없다.
전쟁은 부지런한 농부들을 피난시키고, 벼 포기에 땀을 떨어뜨리지 못하게 했다. 거창의 넓은 벌판과 마을에 어둠이 서서히 깔리고 있었다.
북괴군 제4사단의 대 차량이 안의를 거쳐 위수 골짜기 신작로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위수는 위천과 안의 사이에 흐르는 강을 말함) 부옇게 먼지가 장사진을 이룬다.
생각 밖이었다. 분명, 김천 쪽에서 올 줄 알았다. 그렇지 않으면 무주에서 넘어 올 줄 알았다. 그리하여 미 제34연대는 주로 김천 길을 주시하고 방위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북괴는 전주를 거쳐 들어오는 것이었다. 보고를 받은 연대장 뷰챔프 대령은 위수쪽 산허리에 대기시킨 포 부대에 사격을 명령하였다. 포 부대에서 일제히 집중사격을 가했다. 먼지 속에서 차량이 폭파하는 폭음이 하늘을 치솟았다.
적의 차량은 계속 폭파되고 있었다. 그러나 적의 병력은 엄청났다. 차량은 계속 질주하고 있었다. 대 차량 뒤에는 2개 연대 병력이 줄을 잇고 있었다. 일개 연대 병력으로 사단 병력을 대항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어둠이 짙게 깔리고 있었다. 어둠이 밀려오자 더 이상 사격을 가할 수가 없어 사격이 잠시 중지되었다.
한편 시내를 사수하기 위하여 연대장 뷰챔프 대령은 거창시가에 병력을 원형으로 깔았다. 그러나 자신있는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북괴군 제 사단은 수 개년 단련된 민활 보병이었다. 벌판과 시가지 싸움에서는 자신을 가진 북괴군이었다.
그러기에 넓은 벌판으로 형성된 거창을 사수한다는 것은 연대 병력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34연대 병력은 1천1백50명에 불과했다. 또 장비도 많이 모자랐다.
뷰챔프 대령은 일단 시내에서 맞서 보다가 제3대대 3백여명에게 후군 방위를 맡기고, 양곡부근으로 후퇴할 계획을 정하고 있었다. 거창 시내는 미군들로 가득차게 되었다.
그러나 괴뢰군 정예부대가 낮에 벌써 거창에 밀어닥친 것이다. 그들은 모두 국군 복장으로 들어왔다. 그러므로 유엔군은 그들이 괴뢰군들인 줄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국군복장을 한 괴뢰군들은 유엔군과 함께 섞였다.
거창읍 교회 앞 강둑 아래에 유엔군이 엎드렸다. 강 건너 쪽에는 유엔군과 괴뢰군이 섞여 엎드렸다.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8월의 하늘에는 달이 없고, 별싸락만이 희뿌연 빛을 피우고 있었다.
북괴군 제4사단 소속의 보병들이 다람쥐처럼 소리없이 날쌘 동작으로 기어들고 있었다.
교회당 안에는 기도하기 위하여 몇 분이 들어 있었다. 남영환 전도사와 장익전 여전도사, 그리고 박또임 집사와 신용진씨 그 외 몇 분이 기도하며 밤을 지냈다.
주 목사는 어둠을 뚫고 부지런히 교회로 향하였다. 그러나 집에서 불과 얼마를 못가서 통금 사이렌이 울리는 것이었다. 그냥 가다가는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르겠다 싶어 옆 길로 빠져 죽전 대밭으로 들어갔다. 그곳 대밭 속에서 주 목사는 밤새도록 기도했다.
한편 교회당에 있는 성도들은 소리도 크게 지르지 못하고 조용 조용 기도하고 있었다. 밖이 너무 조용했기 때문에 이상한 예감을 느끼고 조용히 기도하였다.
너무나 조용한 밤이었다.
개 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너무 조용하기 때문에 불안을 느끼기까지 하였다.
새벽 4시가 되었다. 교회당 종 칠 시간이다. 사찰이 밖으로 나갔다. 새벽 기도회를 알리는 종을 치기 위하여서이다.
교회에서 종을 치는 것은 반드시 신자들이 모이라는 뜻에서만 종을 치는 것은 아니다. 예배 시간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또한 교회가 살아있다는 의미에서 종을 친다. 한 사람이라도 신자가 앉아 있다는 의미에서 종을 친다.
전시에는 더욱 그러하다. 교회당에 종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 그 땅은 비극이다. 교회당에 종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 그 땅은 고독하고, 그 땅은 사지인 것이다.
사찰은 종 줄을 잡았다. 그리고 힘있게 당겼다.
종소리가 고용한 새벽 공기를 깨고 요란하게 울렸다.
그 때였다. 종소리를 기다리고나 있은 듯. 종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사격이 가해진 것이었다. 총소리가 거창 창공을 덮었다. 탄환이 불줄기를 이으며 공간에 수 백개의 포물선을 그렸다.
탄환은 교회당 유리창을 뚫고 벽에 박히기도 하였다. 날이 훤히 밝을 때까지 총성은 계속되었다. 한참 조용해졌다가 다시 접전이 되곤 하였다.
오후 3시 경에야 총성이 멎었다. 거창 서쪽의 제3대대가 후퇴하므로써 제34연대는 혼란에 빠지게 된 것이다.
29일 저녁 무렵, 제34연대는 결국 거창을 후퇴하여 산제리의 삼거리로 들어서게 되었다. 미군은 후퇴하면서 도로와 교량을 파괴하였다. 북괴군이 급히 좇아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남영환 전도사는 오후 3시 경에 교회당 밖으로 나왔다. 강둑 아래에 미군의 시체가 3구나 넘어져 있었다. 성경 찬송을 겨드랑이에 끼고 걸어가는데,
“어디 가는 거야?”
“인민군 한명이 길을 막았다.
“교회당에 기도하려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전시에 기도가 다 뭐야?”
“밖에 나돌아 다니지 마시오.”
예외로 말이 부드러웠다.
남 전도사가 주 목사 사택으로 가니, 가족들과 주 목사가 염려하고 있었다.
“무사했군요.”
주 목사의 착 가라앉은 부드러운 음성이 흘렀다.
“하나님께서 지켜 주셨습니다.”
주 목사 댁에서 예배를 드렸다.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주 목사 사택을 임시 예배처로 삼았다. 거창읍 교회 교인들은 400여명 정도였는데, 백명 정도가 피난 나가고 나머지는 가정에 있었다.
주 목사는 이들을 가까운 지역별로 모일 수 있도록 지시를 했다. 여섯 군데를 모이는 장소로 정하였다. 지역이 가까운 가정에 모이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세 곳은 주 목사가 예배인도를 맡고, 세 곳은 남영환 전도사가 맡도록 하였다.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4백명 가까운 교인이 거창읍 교회에 모였지만, 교역자 생활비는 형편이 없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교인들은 교역자 생활비에는 후하지 못한가 보다.
교역자는 의례히 고생을 해야 하고, 생활이 어려워야 하는 줄로만 생각하고 있다. 교역자를 하나님의 종이라고 입으로는 말을 하지만 실제 대접하는 일에는 그렇지 못하였다.
교인들은 교역자를 천사로 대하였다. 또한 천사가 되기를 원했다. 밥을 먹지 않고, 옷을 입지 않는 천사 말이다. 병이 날 염려나, 아무리 뛰어도 피곤하지 않는 그런 천사 말이다.
자녀를 낳지 않고 자녀 교육이나 가정 문제에 하등 구애를 받지 않는 그런 천사가 되기를 교인들은 원한다. 그러나 실은 교역자가 천사가 아닌 것이다. 교역자도 사람인 것이다.
한 끼만 밥을 먹지 않아도 힘이 빠지고, 병에도 약한 사람이다. 교역자의 옷은 천사의 옷이 아니고, 교인들이 입고 있는 그런 같은 천으로 만들어진 옷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특별히 뽑아 세우신 믿음의 사람이다. 믿음은 강해도 인간은 약할 수 있다. 주님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있는 교역자를 후하게 대접하는 것은 곧 주님을 위하는 일이다.
더욱이 전쟁통에 교역자의 생활비가 전달될 리가 없다. 평화로운 때에도 호강의 혜택을 받지 못하지만, 환란 때엔 제일 먼저 고난의 덕을 보는 것이 교역자이다.
교회 회계가 피난 나가면서 맥추 연보한 헌금 5천원과 피보리 4가마를 맡긴 것이 있었다.
“어떻게 될는지 모르니 생활에 쓰십시오.”
주 목사는 이것을 나누었다. 자신이 피보리 1가마니, 남전도사가 1가마니, 추 교경 전도사에게 1가마 보내고, 장익진 여전도사에게 1가마 주었다.
돈도 나누었다. 추교경 전도사는 지산 교회에 파송한 전도인이었다.
앞으로 피보리 1가마로 생활하여 나가야 했다.
매일처럼 보리죽을 끓였다. 보리죽이지만 끊일 수 있는 것만 다행이었다. 보리죽을 먹고도 흩어진 교인들을 찾아 심방하며, 가정 집회를 인도하였다.
4. 폭격 속의 십자가 자세
주 목사는 거리를 걷고 있었다. 교인들의 집을 돌보기 위해 시내로 들어선 것이었다. 그냥 앉아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그런 무더운 한낮이었다.
희뿌연 하늘엔 솜구름이 피어 오르고 하늘에서 내려 쪼이는 따가운 태양열과 땅에서 솟는 지열이 사람을 견딜 수 없게 하였다.
훌훌 벗고 물에 뛰어 들고 싶은 한낮의 거리를 주 목사는 흰 두루막을 입고 모자를 쓰고 오른쪽 겨드랑이에 책 가방을 끼고 길을 걷고 있었다.
그때 공습 경보가 울렸다. 금시 거리에 사람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모두 방공호 속에 숨은 것이다. 그러나 주 목사는 태연히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쌩-”
바람을 째는 소리가 하늘에서 났다.
비행기가 낮게 지나가며 기관총을 난사하였다.
주 목사는 겨드랑이에 끼고 있던 가방을 발 앞에 놓고 두 팔을 십자가 형으로 펴고 서 있었다. 숨을 줄을 모르고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것이다. 얼마 후 비행기는 사라지고 공습 경보 해제 싸이렌이 울렸다.
주 목사는 팔을 내리고 가방을 다시 주워 겨드랑이에 끼고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이 모습을 처음부터 보고 있던 괴뢰군이 있었다.
세 명의 괴뢰군이 주 목사 앞에 나섰다.
“야, 이 늙은이야. 이제 막 무얼 했어!”
귀가 쨍 하도록 소리를 질렀다.
“내가 무얼 했단 말이오?”
“공습 경보가 울리고 피하라고 소리쳤는데도 그냥 서 있었지 않았오!”
“피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잔소리 말아! 양고자들에게 무슨 신호를 보냈지?”
“신호를 보내다니요?”
“스파이 노릇 한 거야! 비행기에 암호를 보냈지? 이 늙은이야!”소리를 빽 지르면서 괴뢰군은 따발총 개머리판으로 어깨를 툭툭 쳤다.
“아닙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사람이란 걸 알렸을 뿐입니다. 나는 목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십자가를 보여 준 것이요.”
괴뢰군들은 주 목사를 끌고 내무서까지 갔다. 두루막을 벗기고 꿇어 앉혔다. 그리곤 얼마간 야단을 치더니,
“앞으로는 조심하시오.”
그리곤 보내 주었다.
집으로 돌아온 주 목사는 수요일 저녁 예배 준비를 하였다. 사택에 교인들이 모여왔다. 아무런 일도 없는 듯 차분히 예배를 인도하였다.
5. 권총 앞에 태연히
유엔군이 후퇴한 거창 시내는 완전히 인민군 세상이었다.
무지한 인민군들은 난폭한 정치를 이끌어 가고 있었다. 폭격기로 인해 파괴된 교량을 놓겠다고 작업을 시작했다. 주로 밤에 일을 했다. 물론 그들은 감독이고 노역자는 시민이었다.
어둠살이 내리면 작업은 시작되었다. 집집마다 인원이 동원되었다. 그러나 주 목사는 일절 응하지 않았다.
거창에서 삼십리 떨어진 곳에 웅양교회 배수윤 전도사가 찾아와 그날 밤을 함께 지냈다. 배 전도사는 그때의 주 목사의 따뜻한 사랑과 권면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고 눈물을 글썽인다.
주 목사의 입에서 흘러내리는 말씀은 생명력 있는 말씀이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리시며 죽어 주셨는데, 우리도 주님 위해 죽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다음 날 오후였다. 가정 예배를 보고 있었다.
“예수가 거느리시니 즐겁고 태평하구나
주야에 자고 깨는 것 예수가 거느리시네
나를 항상 거느리고 나를 친히 거느리네
나를 항상 거느리고 나를 친히 거느리네”
괴뢰군 장교가 찬송 소리를 듣고 들어 왔다.
“이게 웬 소리요, 엉?”
권총을 맨 붉은 가죽띠가 유독 반질반질 빛나고 있었다.
“뭐 하는거요?”
괴뢰군 장교는 얼굴을 찡그리며 계속 질문을 던졌다. 주 목사는 마루에서 내려섰다. 마루가 몹시 높았다. 신을 신고 괴뢰군 장교 앞에 나선 주 목사는,
“수고가 많으십니다. 어서 오십시오.”
하고 그를 맞아 들였다.
마루에서는 여전히 사모님과 어린 자녀들과 배수윤 전도사가 계속 찬송을 부르고 있었다.
“지금 무엇하고 있는거요?”
괴뢰군 장교는 다구쳐 물었다.
“우리 지금 에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주 목사의 음성은 침착하였다. 괴뢰군 자욕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하였다. 그는 까만 눈을 똑바로 쳐들더니 오른 손으로 권총을 잡아 뽑았다.
권총을 뽑아 든 괴뢰군 장교는 총구를 주 목사 가슴에 밀어대면서,
“지금이 어느 땐 줄 알고 야소를 믿고 있소? 동무는 정신 나간거 아니요?”하고 윽박질렀다.
“맑은 정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우리의 할 일은 예배하는 일입니다.”
너무나 태연한 주 목사의 얼굴엔 권총의 위협보다 더 무서운 생기가 감돌고 있었다. 마루에서는 여전히 찬송소리가 계속되었다.
괴뢰군 장교는 자신이 이상한 세계에 있는 듯, 어리둥절하여 흥분된 자기를 수습하였다. 지금 그의 앞에 서 있는 이상한 노인에게 권총을 쏜들 탄환이 들어 갈 것 같지 않는 위엄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분명 공포에 질린 것은 상대방이 아니고 권총을 쥐고 있는 자신이었다. 괴뢰군의 얼굴이 무섭도록 새파래졌다.
배수윤 전도사는 뜰에서 되어진 광경을 바라보면서 찬송을 계속 불렀다.
“올라 가십시다. 같이 예배를 드립시다.”
주 목사는 괴뢰군 장교의 가련한 영혼을 진정 사랑하는 뜻에서 권면을 하였다. 장교는 스르르 권총을 총집에 집어 넣었다.
마루에서는 찬송이 끝나고 주기도문을 암송함으로 예배를 끝내고 있었다.
“동무들은 야소 믿는 일 분수에 넘치오. 예배하는 것 합당하지 않아 권면하러 왔는데 결국 동무들은 동무들 할 일 다하고 말았으니 이래서 되갔소?”
불안한 표정을 지우면서 말을 뱉았다.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장교의 눈이 번뜩 빛을 내었다.
“나 이 앞에 다리 놓는 일 맡은 감독이오. 일 하러 나오시오!”
장교는 돌아섰다.
“종종 오십시오.”
주 목사는 나가는 괴뢰군 장교를 향하여 말을 던졌다. 교량 작업에 나오라고 온갖 성화를 부렸지만 주 목사는 결코 나가지 않았다.
주 목사는 교인들 심방하는 일에 더욱 분주하였고 기도하고 성경읽는 일에만 주력하였다.
6. 거절한 기독교 연맹조직
하루는 내무서에서 인민군들이 주 목사와 남영환 전도사를 호출하였다. 주 목사는 남 전도사와 함께 내무서로 갔다.
책상 앞에서 서류를 뒤적거리고 있던 인민군 장교가 주 목사와 남 전도사를 반갑게 맞아들였다.
“오서 오십시오. 반갑수다, 목사 동무!”
주 목사와 남 전도사는 장교의 오만에 찬 얼굴을 바라보았다.
“예- 오늘 오시라구 한 것은 긴요한 의논이 있어서 그랬수다.”
그는 말의 서두를 장황히 장식하려 했는데 잘 안되는지 초조의 빛을 얼굴에 여실히 나타내고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기독교 연맹을 조직해 달라 이 말입니다.”
주 목사는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서 인민군 장교의 눈을 피하여 옆 창문을 쳐다보았다.
“우리 북조선 인민공화국에서는 기독교 교직자들이 다 기독교 연맹에 가입되었수다. 이 거창에서도 북조선 인민공화국의 정치를 따라야 하므로 반드시 이 일에 협조해야 하겠수다.”
주 목사는 어떤 문제가 부닥치면 침묵하는 버릇이 있다. 주 목사는 입을 꾹 다물고 창 밖에다 두었던 시선을 장교의 얼굴쪽으로 돌렸다.
“말을 해 보우.”
장교는 눈을 부라리고 책상을 꽝 쳤다.
상당히 신경질적이었다.
“하겠오, 아니하겠오, 말을 하시오!”
주 목사는 간단히 대답했다.
“못합니다.”
“뭐라고? 썅, 이 영감쟁이 맞좀 봐야 알간?”
장교는 눈에 살의를 띄우고 역정을 냈다.
“할 수 없으니까 못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썅, 그냥 죽음을 맛 보관?”
전류를 느끼게 하는 음성이었다.
장교의 얼굴엔 살기가 돌았다.
남영환 전도사가 장교 앞에 나섰다.
“여보세요, 선생님. 우리는 죽는 것을 무서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협조를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협조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우리가 협조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못한다는 것 아닙니까?”
남 전도사의 말은 또박또박 철성음으로 내무서 안을 흘렀다.
“그래, 이승만에게는 협조하면서 우리에게는 협조할 수 없다 이말이디?”
“내 말을 자세히 들어 보십시오.”
남 전도사는 침착성을 잃지 않고, 흥분되는 어조를 조절하면서 차근차근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여기 계신 이 어른은 일제 시대에도 신사참배 반대를 하시다가 투옥되어 수없이 고문을 당하시고 역경을 겪으셨습니다. 평양 형무소에서 6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수난을 당하시다가 해방과 함께 출옥하셨습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위해 제헌국회의원 출마를 거창 시민들이 권유했지만 굳이 거절하셨습니다. 못견딜 정도로 무투표 당선으로 출마를 요구했지만 거절했습니다. 거창 시민들에게 물어 보십시오. 종교는 정치와 구별됩니다. 목사나 전도사가 정치에 가담하라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연맹에 가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종교는 자유 아닙니까? 기독교 연맹에 가입하지 않겠다는 것은 우리의 종교 자유입니다.”
인민군 장교의 얼굴이 서서히 밝아지고 있었다. 남 전도사의 말이 끝나자 장교는 부드러운 말로,
“아 그렇습니까? 일제 압박하에 수고가 많았습니다.”
하고 말을 씹는 것이었다.
“무슨 교파입니까?”
“장로교입니다.”
“그렇습니까? 실은 나도 함경도 있을 때 장로교에 한 삼년 다녔습니다. 어머니가 그 교회 권사였지요.”
좀 전의 살벌한 분위기가 사라지고 미풍이 일 듯 내무서 안은 시원하였다.
“사실은 목사가 정치운동에 가담해서는 아니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목사님, 한 가지만 청을 들어 주십시오.”
하고 말하는 장교의 얼굴은 미소를 띄고 있었다.
“무엇 말입니까?”
주 목사는 궁금한 듯 물었다.
“교인들의 명단을 하나 적어 주시라우요.”
“안됩니다.”
그러나 주 목사의 거절에 장교는 전처럼 역정을 내지 않고 조용히,
“왜 안된다는 거죠?”
하고 질문하였다.
“우리 손으로 어떻게 교인들의 명단을 적어 준단 말입니까? 교역자가 교인을 파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신자라 하지만 내일 신자가 아닐 수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전일에 한 삼년 교회에 다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신자가 아니시지요. 그와 같습니다.”
장교는 고개를 끄덕끄덕 하였다. 수긍이 가는 모양이었다.
“종습니다.”
장교는 주 목사를 한 번 더 흘깃 바라보더니,
“가 보시오.”
하고 정중히 말했다.
주 목사는 나오면서 한 마디 던졌다.
“전일에 에수님을 미등셨다니 계속 믿으십시오.”
그 이후, 인민군들은 주 목사와 남 전도사를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교회에 대하여 별반 간섭을 하지 않았다.
7. 모든 것 주께 맡기고
1950년 9월 1일. 더위는 아직 대지 위에 남아 머물고 있었다. 뜨거운 햇살이 열기를 안고 쏟아졌다.
주 목사는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로 들어섰다. 지방 순회를 위해서였다. 안의를 둘러서 개평으로 들어갔다. 해가 지고 저녁 노을이 타고 있었다.
개평 교회 사택은 이미 인민군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무넹 윗 동리로 올라갔다. 정팔현 장로 집으로 들어갔다. 추교경, 이종대 전도사도 그곳에 와 있었다.
정 장로는 의사일을 보았기에 생활이 촌에서는 좀 나은 편에 속했다. 인사를 나누고 교인들의 동태에 대해서 들었다.
당시엔 삼군(함양·거창·합천)에서 목사는 주 목사 한 분 뿐이었기에 주 목사의 일은 벅찼다. 당회장 시찰장 모두를 겸하고 있었다.
식사 후, 교인들과 개평 교회 제직들이 모여 왔다.
주 목사는 앉은 자리에서 예배를 인도하였다. 찬송을 부르고 성경 마태복음 24장을 봉독하고 그 내용을 설교를 시작하였다.
‘환란 때 신앙을 대비하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다.
주 목사는 조용하면서도 힘있는 어조로 말씀을 전했다.
“주님의 재림 전은 환란의 때입니다. 그때는 불법이 성한 때입니다. 적 그리스도가 도처에서 일어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지금이 그러한 때가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이 환란 때를 신앙으로 잘 이겨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 그리스도 국가는 결국 망합니다. 역사가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독일이 그러했습니다. 일본이 망했습니다. 그들이 다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망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신앙을 바로 가져야 합니다.”
어둠이 짙어지고 있었다.
등잔 불빛을 보고 날벌레들이 모여 들었다. 모기만이 잔인한 소리로 신경을 날카롭게 일으켰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 졸거나 딴 생각으로 얼굴을 옆으로 돌리는 사람이 없었다.
주 목사를 향하여 앉은 성도들의 동공은 초롱초롱 빛을 내고 있었다.
그런데 뒷자리에 앉은 젊은 여자 한 명이 열심히 주 목사의 설교를 필기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두운 불빛 속에서 눈을 아래로 깔고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주 목사는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고 여전히 힘있게 설교를 계속하였다.
“계시록 13장에 보면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하여 일어난 짐승이 권세를 가지고 성도를 해합니다. 이 짐승은 나라를 얻고 백성을 다스립니다. 이 짐승으로 인하여 성도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심하면 죽임을 당합니다. 이 짐승은 자기를 경배하게 합니다. 자기를 경배하지 아니하면 죽입니다.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성도들은 결코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고 차라리 죽음을 택합니다. 죽음을 당할찌언정 짐승에게 경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설교하는 주 목사의 눈빛은 등잔 불빛에 샛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지금은 어둠의 시대입니다. 짐승이 권세를 얻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신앙을 바로 가져야 합니다. 만일 신앙을 바로 가지지 못하고 넘어지면 망합니다. 멸망합니다. 기도로 힘을 얻어야 합니다.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이 환란 때에 끝까지 참고 견디며 순교를 각오하고 신앙으로 싸우면 반드시 승리하게 됩니다.”
주 목사의 얼굴가엔 백전노장의 여유가 역력히 피어나고 있었다.
예배가 끝났다. 교인들과 일부 제직자들은 다 가고, 의사 정 장로와 이종대, 추교경 전도사와 주 목사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였다. 거칠은 구두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험상궂은 사나이 몇이 불쑥 들어닥쳤다.
“동무들, 같이 좀 가 줘야 하겠소!”
느닷없이 말을 뱉고 어깨를 내미는 사람은 정씨 청년이었다. 정씨는 좌익계 치안대원으로 같은 대원 몇과 정 장로댁에 나타난 것이다.
이 정씨 청년은 허순길 박사(현 고려신학대학 교수)의 국민학교 한 해 선배격인 토박이 개평 사람이었다. 정씨는 그 형제들이 모두 좌익계 인물들로 당시 개평에서는 악명 높은 자였다.
그의 동생은 소년단 단장으로 못된 짓을 많이 저질렀다. 자기 집 사랑채를 소년단 본부로 삼고 개평 지방 소년들을 강제로 대원을 만들어 좌익계 일을 도우도록 하였다.
당시 허순길 박사도 그들에게 욕을 보았다. 소년단에 가입하지 않으려 할 때, 정신적 육체적 탄압을 가해 온 것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가까운 사이요, 사상 문제가 없었을 때는 함께 놀던 골목 친구들이었지만, 동란이 일어나자 완전히 딴 사람으로 행사했다.
그의 부친은 보도 연맹 사건으로 죽었다. 그러니 그의 형제들은 원한 관계도 있고 해서 직독히 굴었다.
정씨는 주 목사를 향하여,
“당신이 목사요?”
하고 소리쳤다.
“그렇습니다. 내가 목사입니다.”
“같이 갑시다.”
주 목사는 일어나 신을 신었다.
“당신들도 같이 갑시다.”
정 장로와 두 전도사도 따라 일어났다. 정씨는 함께 온 치안대원들이 그들을 둘러섰다.
정씨가 앞장 서고, 주 목사가 뒤를 따랐다. 그 뒤로 정 장로와 두 전도사가 서고 치안대원들이 뒤에 걸어갔다. 무더운 밤이었다.
정 장로댁에서 내무서까지는 오릿길이었다. 오릿길을 그들은 걸어서 갔다. 내무서에 들어선 정씨는 기세가 등등하였다.
“목사 동무! 무슨 설교했오?”
“성경에 있는 내용을 설교했지요.”
“짐승 설교 했다며?”
“했습니다. 성경에 있는대로 했습니다.”
“재미없는 줄 아시오!”지나치게 분개하는 어조로 말을 뱉았다. 정 장로와 추, 이 전도사도 개별적으로 심문했다.
“욕을 좀 볼 줄 알앗!”
찌릉 찌릉 소리치더니 정씨는 미닫이 문을 열고 밖으로 휭 나가 버렸다. 내무서 안이 조용하였다. 심한 공포가 이 장로와 추, 이 두 전도사와의 가슴을 짓눌렀다.
그 자가 나가면서 던진 말은 기분 나쁜 말이었다.
“욕을 좀 볼 줄 알앗!”
욕을 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 때는 법이 없었다. 총이 법이고, 치안대원 그들의 행동이 정의였다. 그러한 때이므로 겁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의 목숨이 가차없이 짓뭉개지는 공산주의 치하였다.
이 날 주 목사 일행이 연행되어 온 것은 정 장로 댁에서 예배 드릴 때, 뒷자리에 앉아 열심히 설교를 필기하던 그 젊은 여인의 고발로 인해서였다.
그 젊은 여인은 내무서 비밀직원이었다. 그 여인은 주 목사의 설교를 시종 다 필기하여 치안대에 보고했던 것이다.
내무서에 구금된 그들은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불의한 세대가 오면 언제고 이런 변을 당하기 마련인 것이 기독신자이다.
주 목사의 얼굴엔 하등의 공포나 초조의 빛이 없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주 목사는 정 장로와 두 전도사를 바라보았다. 주 목사는 두려움에 싸인 그들에게 입을 열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은 우리편이십니다. 우리가 순교 할 때면 하나님께서 데려가실 것이고, 아직 때가 멀었으면 또 살아나게 됩니다. 염려할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도리어 감사할 것 뿐이지요.”
주 목사의 말을 들으면서 그들의 마음이 안정되었다. 용기가 솟아 난 것이다. 주 목사는 음석을 낮추어 혼자 말처럼 중얼거렸다.
“평양 감옥에서 순교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되지 않더니 이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인가?”
주 목사는 눈을 감고 기도를 올리는 것이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제는 때가 왔습니까? 주님의 뜻대로 하옵소서······”
기도를 마치자 비스듬이 누었다. 주 목사는 눕는가 싶더니 이내 드렁드렁 코를 골며 자는 것이었다. 이럴 수가 있을까? 죽음이 눈 앞에 다가오는 절박한 순간에 잠이 오다니 도저히 속인들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어나! 가자!”
하는 소리만 들리면 끝나는 것이다.
죽는 것이었다. 세상과 관계없는 영인이 되는 것이었다. 육체는 나무 둥치처럼 길 가에 뒹굴 것이었다. 죽음과 삶의 갈림길에서 시간을 기다리는 초조한 그 순간에 잠을 자다니 있을 순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죽음을 눈 앞에 두고 태평스럽게 잠자는 사람이 있다. 주남선 목사 바로 그 분이었다. 정 장로와 추, 이 두 전도사는 깊이 잠든 주 목사가 한없이 부러웠다.
‘모든 것을 주께 맡기라’고 말씀하시던 주 목사는 과연 모든 것을 주께 맡기고 있었다.
초조와 긴장 속에 시간은 흘렀다.
“삑-”
하고 신경질을 짓누르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정 장로와 두 전도사는 반사적으로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주 목사는 여전히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일어나시오!”
치안대원의 날카로운 금속성 음성이 울렸다. 주 목사가 부스스 눈을 비비고 일어났다.
그 때였다.
“아니 목사님 아니십니까?”
뒷 쪽에서 긴 가죽 장화를 신은 사나이가 주 목사 앞에 나섰다.
“목사님께서 어인 일이십니까?”
그는 치안대 대장이었다.
“누구신지 잘 모르겠는데요?”
주 목사는 치안대장의 얼굴을 응시하였다.
“그러실 것입니다. 전 전에 개평 교회에서 목사님께 학습을 받은 사람입니다.”
“아 그래요.”
주 목사의 얼굴에 반가운 빛이 감돌았다.
“목사님이 무슨 죄가 있다고 여기까지 오시게 했는지····· 죄송합니다. 돌아가십시오. 제가 있는 한 다음부턴 이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고맙소!”
주 목사와 정 장로와 두 전도사는 치안대장의 호의로 정 장로 댁으로 다시 돌아왔다. 주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으로서는 정말 알 수 없는 것인가?
다음 날 아침, 교인들이 늦게야 소문을 듣고 인사하러 정 장로 댁으로 왔다.
점심 때였다. 할머니 집사 한 분이 점심밥을 해왔다. 쌀밥이었다. 이 비상시에 쌀밥을 지어 세 그릇이나 담고, 칼치를 구워왔다. 주 목사는 놀란 눈으로 밥상을 바라보며 말했다.
“보리밥도 못 먹는데, 쌀밥이 웬 일이십니까?"
할머니 집사는 굽은 허리를 가볍게 펴면서,
“우리 목사님 대접하려고 정성드려 차린 것 아닌교. 목사님 대접 안하고 누굴 대접해야 하는교? 쌀밥 먹을 가치도 없는 인간들은 쌀밥에 고기반찬에 양 볼이 미여지도록 먹는데, 진작 쌀밥을 먹어야 할 어른들은 고생을 하고 굶주리니 이놈의 세상 빨리 끝장이 났으면 좋겠다.”
할머니 집사는 이마에 송알송알 솟아오른 땀을 주먹손으로 문질렀다. 주 목사의 입에서 찬송이 나왔다.
“구주여 해변서 떡덩이를 떼시어
인민을 먹였으니
영생의 양식을 나에게도
그같이 나누어 주옵소서.”
8. 형님이 별세하던 날
9월 2일, 토요일이었다. 주 목사는 개평에서 주일을 본 교회에서 지키기 위해 거창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읍으로 들어서는 살목의 비탈길을 내려오는데 길이 너무 비탈져 미끄러웠다.
더위가 전신을 감고 있었다. 발에는 먼지가 뿌옇다. 땀이 이마를 타고 언저리를 돌다가 눈 가장자리로 스며드는 것이었다. 손수건을 내어 땀을 닦으며 길을 걸었다.
그 때, 발목이 뼈걱하면서 굽혀져 주 목사는 비탈길에 그냥 주저않고 말았다. 발목에서 통증이 왔다. 다시 일어나 걸으려고 했으나 몸이 중심을 잡지 못한다.
발목을 삔 것이다. 비탈길에 앉은 채 얼마를 있었다. 전신에 비지땀이 솟는다. 거창 시내 하늘을 몇 차례 미 전투기가 날고 폭격이 가해지고 있었다.
남영환 전도사는 이날 교인들 집을 심방하고 돌아가는 길에 주 목사 사택을 들렀다. 주 목사는 아직 돌아오지 않고, 백씨 주남재씨가 마루에 앉아 사과를 먹고 있었다.
주남재씨도 애국지사이다. 그는 초대 거창 군수를 지낸 바 있어 거창에서는 상당한 덕망을 얻고 있었다. 유독 주 목사는 형제간의 우애가 깊었다. 주 목사는 새벽기도를 인도하고 사택으로 돌아가는 길에 급한 일이 없으면 꼭꼭 형님댁에 들어가 인사를 하고 갔다.
죽전 사람들은 주 목사의 이 예의있고 사랑이 깊은 모습을 보고,
“참, 세상에 형제간 치고 저렇게 사이좋은 형제간은 처음 보았어!”
모두들 칭송이 자자했다.
“주 목사는 보통 사람이 아니야. 하늘이 내려준 사람이라구. 형을 어떻게 부모 섬기듯 할 수 있냐 말이야. 만사에 빈틈이 없는 사람이라구······”
남영환 전도사가 들어가니 마루에 안장 사과를 먹고 있던 주 남재씨가 반색을 하면서,
“남 조사, 더운데 수고가 많소, 자 사과나 한 개 먹어요.”
사과를 한 알 내밀었다. 남 전도사는 반갑게 사과를 받아 깍았다. 막 사과를 입에 넣어 한 입 깨물려는 순간,
“우르르 꽝!”
하고 폭탄이 떨어진 것이었다. 폭탄은 사택 사랑채 위에 떨어졌다. 폭격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폭격이 끝나고 조용해 지자 남 전도사는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주남재씨가 보이지 않았다. 방공호 속으로 함께 들어간 줄 알았는데 들어가지 않았는가 보았다.
밖으로 나와 찾아 보았지만 없었다. 혹시나 해서 집으로 찾아가 봤지만 역시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노인이 어디 갔을까?”
모두들 걱정을 했다. 길가나 둑쪽에 시체가 많이 누어 있었다. 주로 인민군들의 시체였다.
주 목사는 이날 어두워질 무렵에 겨우 발을 절면서 들어왔다. 얼마간 출입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지치고 피로에 쌓인 그의 육신을 휴식하기 위하여 발목을 다치게 하신 것인지 모른다.
주 목사는 백씨의 행방불명 소식을 듣고 무척 염려하였다.
삼일 후였다. 죽전 삼거리 모퉁이 집에서 주남재씨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폭격에 쓸어진 집을 일으키는데 시체가 깔려 있는 것을 사람들이 발견한 것이었다.
주 목사는 형님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였다. 자신도 발목을 다치지 않고 줄곧 왔더라면 어떤 변을 당하였을는지 몰랐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겼다.
제14장
생과 사의 길목
1. 이동 교회
교역자 수양회가 끝나는 7월 27일 새벽이었다.
이성옥 전도사는 초조했다. 교회와 집안 일이 염려되었다. 시간만 연장하며 앉아 있는 것은 별 유익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밖으로 나왔다. 추국원, 정우덕, 하종숙 전도사들도 나와 있었다. 새벽기도회를 끝내고 갔으면 좋겠지만 그런 여유가 생기지를 않아 모두들 길을 떠났다.
이성옥 전도사는 그의 시무 교회 합천읍 교회를 향하여 길을 재촉하였다. 거창에서 합천까지는 백리길이었다. 뜨거운 태양이 솟기 전에 길을 줄여야 하겠기에 그의 걸음은 뛰는 듯 빨랐다.
그러면서도 그의 마음 한 구석에는 새벽기도를 끝내고 올 것인데, 너무 급히 서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일기도 하였다.
주 목사의 말씀이 생각났다.
“교회를 지켜야 합니다. 피난을 간다고 안전한 것이 아니요. 난 중에 있다고 해서 반드시 죽는 것도 아닙니다. 생명은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을 위해서만 일해야 합니다.”
뜨거운 말씀입니다.
“우리 서로 어디 있든지 연락을 합시다. 그래야 피차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서로 기도로서 도웁시다. 기도는 최상의 도우는 방법입니다.”
주 목사의 무거운 그 말씀이 이 전도사의 가슴에 뿌듯이 안겨왔다.
나올 때, 목사님께 인사를 드리지 못하고 살며시 나온 것이 썰물 뒤의 갯벌처럼 허전해 왔다.
이 전도사는 복잡한 마음을 정돈하면서 부지런히 걸었다. 권변재를 오를 때엔 벌써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시장기를 느꼈다. 권변재를 넘어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는 움찔하였다.
강 기슭에 진녹색 복장의 괴뢰군들이 쫙 깔려 있는 것이었다.
“늦었구나”
어떻게 해 볼 묘안이 나오지를 않았다.
“주님! 저를 보호하여 주소서!”
기도 밖에 딴 길이 없었다.
그는 기도를 올리면서 줄곧 아래로 치달렸다. 교량을 통과하는데도 그들은 부르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전신에 흥건히 땀이 배어왔다. 주께서 그를 지켜 주신 것이다.
그는 무사히 한 고비를 넘기고 줄곧 신작로 길을 걸었다. 허리를 펴고 활발하게 걸었다. 합천으로 무사히 들어섰다. 교회에 들어가니 가족들과 교인들이 걱정을 하고 있었다.
교인들은 이 전도사의 모습을 보자 반가워 소리쳤다.
“아이구 조사님, 살아오셨군요!”
“그래 어떻게 지냈습니까?”“우리 조사님 돌아가셨는 줄 알았어예!”
여집사 한 분이 눈믈을 글썽이며 말을 씹었다.
“교인들은 다 무사합니까?”
“피난 많이 갔습니다.”
그날 밤이었다. 여집사 두 분과 남집사 한 분이 찾아와서,
“남은 제직들은 우리 뿐입니다. 우리도 피난 가입시더!”
이 전도사의 머리에 문득 주 목사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교회를 지켜야 합니다. 피난을 간다고 안전한 것도 아니고 난 중에 있다고 반드시 죽는 것도 아닙니다.’
이 전도사는 순간,
“나는 교회를 지켜야 합니다.”
하고 힘을 주어 말했다.
“교인이 없는 교회를 지키면 무엇합니꺼? 교인들이 다 피난간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교인들이 모인 곳이 교회 아닙니까? 내일 모두 피난가라고 순경이 통고해 왔심더. 조사님도 같이 가입시더.”
“그래도 남을 사람은 있지 않겠습니까? 그들을 지키고 있다가 인민군 오면 순교를 하지요.”
“참 조사님도 어리석은 소리를 하시네. 인민군이 와서 죽이면 순교가 되지만, 미군이 폭격해서 죽어도 순교가 됩니꺼?”
그 말은 사실이었다.
억지로 죽음을 택할 필요는 없다.
“날이 밝으면 인민군이 쳐들어옵니다. 난 오다가 인민군을 보았습니다.”
이 전도사는 집사들에게 오면서 목격한 인민군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다음 날 새벽기도회 시간을 한 시간 당겨 가졌다. 교인들은 피난 준비를 하여 교회당으로 나왔다.
교회당은 군청 옆에 있다. 군청을 순경 한 사람이 지키고 있었는데, 아침이 되자 순경이 뛰어다니며 피난가라고 성화를 부렸다.
이 전도사는 하루 사이지만 주 목사님 생각이 간절하였다. 거창이 합천보다 먼저 당할 것만 같았다. 주 목사님의 신변이 염려스러웠다.
그때, 거창에서 부산으로 파난가는 거창읍 교회 신자가 들어왔다. 이 전도사도 주 목사님 소식을 알게됨이 무엇보다 반가워서,
“주 목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고 다급히 물었다.
“교회에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 전도사는 교인들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교인은 어린아이까지 합쳐서 모두 열 아홉명이었다. 피난민들의 행렬이 길을 메웠다. 교인들을 거느리고 떠나는 이 전도사의 일행은 이동교회였다.
초계까지 갔다. 합천과 창령의 경계선을 알리는 적포철교를 건너야 했다. 부지런히 걸었다. 사람 홍수에 밀려 길이 잘 전진되지 않았다.
적포 철교까지 무사히 왔는데, 철교를 건널 수가 없었다. 순경들이 길을 막고 있었다. 건너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밀려왔다. 7월 29일은 이렇게 저물어갔다. 밤을 이곳에서 지내야 했다. 인가 가까이에서 지새우게 되었다.
이성옥 전도사는 꿈을 꾸었다. 꿈에 주 목사님이 나타났다. 흰 두루막을 입고 평상시처럼 살며시 웃으신다. 무엇인가 말씀을 하시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잠을 깬 이 전도사는 허전한 자신을 느꼈다.
‘주 목사님은 이미 순교하셨구나, 나를 뒤따르라고 일러 주시나보다.’
이렇게 생각한 이 전도사는 그 자리에 엎드려 기도를 올렸다.
날이 밝고 있었다. 교인들을 불러 모아 새벽기도회를 가졌다.
해가 돋기 전에 아침밥을 지어 먹고, 모두들 길을 떠났다. 철교를 건널 수 있었다. 강둑을 지나 얼마를 걸어갔다. 부산으로 가야 산다고 생각하고 부산쪽으로 계속 걸었다. 조그만한 교회당이 보였다. 이 전도사는 교인들을 데리고 교회로 들어갔다.
텅 빈 교회당이었다. 건평 10평 정도의 작은 교회당이었다. 여기서 밤을 지나기로 하였다. 모기가 말이 아니었다. 피난민에겐 모기가 문제 될 수 없었다.
7월 30일 날이 밝았다. 주일이었다. 주일 예배를 교회당에서 드렸다. 광야 교회 같았다. 광야 40년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하였다.
나그네 길의 인생, 그러나 성도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이 시간은 참으로 흐뭇하고 위로를 받는 시간이었다.
예배 때마다 쏟아지는 은혜, 심령들은 만족과 평안을 누렸다. 이 전도사는 그 밤에 기도하며, 내일의 행진을 위해 잠을 청했다.
다음 날 길을 떠났다. 대구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가다가 많은 위험을 겪었다.
8월 2일에는 청도 뒷산 기슭까지 왔다. 거기서 3일 밤을 민가에 방을 얻어 비교적 편하게 지냈다.
8월 4일 토요일이었다.
“내일 주일 예배만 보고서 떠나도록 합시다.”
이 전도사는 이 곳을 떠날 것을 교인들에게 말했다. 이 전도사는 밤 늦게까지 기도를 하다가 잠이 들었다. 꿈이었다. 주 목사님이 또 흰 두루막을 입고 나타나셨다.
“······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꿈을 깬 이 전도사는 그 의미가 무엇인가 한참 생각하였다.
‘주 목사님이 먼저 천당가셔서 나를 오라는 것인가, 아니면 나를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는 뜻인가?’
이 전도사는 엎드려 기도하였다. 힘이 솟아 올랐다.
8월 5일, 주일 새벽이었다. 기도회를 마치고 자유롭게 기도하는데 한 여신자가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면서 소리쳤다.
“조사님, 큰일났습니다! 저 아래 새까맣게 올라옵니다.”
이 전도사는 침착하게 말했다.
“방에 들어가 기도하시오. 내가 나가서 살피고 오겠오.”
“지금 방 주인이 예수쟁이에게 방 빌려준 걸 후회하고 있어요.”
밖에 나가 보니 인민군이었다. 간밤에 주 목사님 나타나 말씀하신 것은 용기 잃지 말고 잘 싸워 승리하라는 것인 줄로 생각하였다.
그때, 인민군 네 명이 밀어닥쳤다.
“무엇하는 사람이오?”
“교회 전도사입니다.”
“모두 데리고 이리 나오시오?”
교인들과 가족들을 데리고 괴뢰군들의 뒤를 따랐다.
‘이제는 죽는구나. 예수님을 담대히 전하고 죽으리라.’
이 전도사는 마음에 각오를 다지며 따라갔다. 그들은 일행을 산기슭 소나무 아래에 머물게 하였다.
그때 동리 쪽에서
“국군이다!”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전도사는 마음으로 기도하였다.
“주님, 나에게 기적을 베풀어 주시든지, 아니면 담대히 순교할 수 있도록 힘을 주옵소서!”
아래쪽에서 인민군들이 위로 올라왔다.
“전원 전투 준비!”
“골짜기를 이용하여 엎드려!”인민군들은 골짜기로 뛰었다. 이 전도사 일행에게 총질을 할 여유가 없었다. 이 전도사 일행은 삶의 긴 숨을 내쉬었다.
죽음이 눈앞까지 왔다가 사라졌다. 죽음이 목숨의 줄을 끊을려고 가위를 들었다가 그냥 도망친 것이다.
‘살았다!’
이 전도사의 가슴에 뜨거운 것이 치솟았다. 피난이 필요 없음을 그때야 느꼈다.
성경 말씀이 떠 오른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시 46:1-3)
이 전도사는 교인들과 가족들을 데리고 돌아섰다.
“갑시다! 피난이 필요 없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피난처는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피난처입니다. 합천으로 돌아갑시다. 교회로 돌아갑시다.”
이 전도사의 말에는 힘이 솟았다. 모두들 아래로 내려왔다.
찬송이 영혼 손에서 쏟아진다.
"피난처 있으니 환난을 당한 자 이리 오게
땅들이 변하고 물결이 일어나
산 위에 넘치되 두렵잖네”
2. 아버지를 모시러 갔다가
마산 고등학교 재학 중이던 주경효는 6·25동란이 터지자 거창이 위험할 듯하여 아버지 주 목사님을 모시러 거창에 갔다.
“아버지, 누님 계신 마산으로 가십시다. 거창은 위험합니다. 괴뢰군들은 기독신자들을 미워하고 목사님들을 잘 죽인답니다.”
경효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괜찮다. 너나 그냥 있지, 뭘 할려고 여기까지 왔냐?”
“아버지가 걱정이 되어서요.”
경효는 힐끗 아버지를 치켜보곤 시선을 내리 깔았다.
“녀석. 그래, 내가 교회를 버리고 어디로 갈상 싶더냐?”
주 목사님은 효성이 어린 아들의 얼굴은 잠시 더듬다가,
“온 길이니 동생들이나 데리고 가거라.”
속삭이듯 말했다. 경효는 아무리 아버지와 함께 가기를 졸랐지만 허사였다.
다음 날 경효는 경세, 경은이 조카 정신이를 데리고 거창을 떠났다.
삼가에 이르렀을 때였다. 길에서 전투원들에게 붙들렸다.
전투대장이,
“웬 아이들이냐?”
하고 노기띤 어조로 물었다.
“마산으로 피난 갑니다.”
경효가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지금이 어느 땐데 피난을 가?”
“나는 마산에 있는데 아버지를 모시러 갔다가 동생들만 데리고 갑니다.”
“지금, 인민군이 곧 이리로 올 것인데 피난을 가다니?”
“보내 주십시오.”
“안돼!”
큰일이었다. 이 곳을 빠져나가지 못하면 어떤 변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 머리가 찡해지면서 아득함을 느꼈다.
“대장님, 난 목사 아들입니다. 인민군을 만나면 안됩니다.”
“목사 아들이라니, 주남선 목사가 우리 아버지입니다.”
“거창읍 교회에서 계시는 주 남선 목사가 우리 아버지입니다.”
“뭐? 주남선 목사님 아들이라고?”
“예!”
경효는 전투대장이 아버지를 아는 듯한 기미를 보이는 것 같아 반가웠다.
“주 목사님은 내가 잘 알지. 그 분은 나의 생명의 은인이야!”
전투대장은 그가 주 목사님을 알게 된 경위를 이야기 하였다.
지리산 공비 토벌 때의 일이었다. 그는 총상을 입고 거창으로 후송되어 임시병원에 입원되었다. 그때의 임시병원은 거창 유치원이었다.
침대에 누워 신음하고 있었는데, 주 목사님이 아침 저녁 찾아와 위로해 주시며 성경 말씀을 들려 주셨고 위하여 기도해 주셨다. 그는 퇴원되어 다시 전투부대로 배속되어 근무하게 되었다.
그는 그 때의 일을 잊을 수가 없었다. 주 목사님의 따뜻한 사랑과 친절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시간이 나면 꼭 찾아가 인사라도 드리려 생각했는데, 동란이 터지고 전쟁을 하게 되니 아직 찾아보지 못했다.
오늘 주 목사님의 아들을 만나게 되니 감개무량하여 내가 도와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주 목사님의 아들이라니 내가 도와 주어야 하겠군.’
전투대장은 마음으로 결정을 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빨리 뛰어가 저쪽 재를 넘어야 한단 말이야. 그러니 내가 직접 인도할 수는 없고, 사람을 한 사람 같이 보낼 터이니 지시를 받고 지름길을 통하여 마산으로 가거라.”
대장은 장정을 한 사람 안내자로 세워 주었다. 경효는 동생들과 조카를 데리고 장정의 지시대로 산을 넘어 지름길을 타고 무사히 전쟁터를 벗어나게 되었다.
경효는 아버지의 힘이 이렇게 널리 뻗어 있는 일에 대하여 또 한번 가슴에 흐뭇함을 느꼈다.
3. 뱃길에서
하종숙 전도사는 26일 새벽, 초조한 마음으로 교회로 돌아갔다. 그는 온양 교회를 시무하고 있었다. 가족들을 데리고 피난길에 오른 것이다.
괴뢰군이 곧 쳐들어 올 것인데 그냥 있으면 죽는다. 빨리 서둘러 가족들과 함께 위천쪽으로 향하였다.
위천 교량이 파괴되어 있었다. 낙동강 물줄기가 검푸르게 뻗어 흘렸다. 마음은 뛰고 싶지만 강물이 길을 막았다. 나룻배가 왔다. 피난민들이 배에 올랐다. 밀물처럼 사람들은 먼저 오르려고 떠밀었다.
하 전도사는 딸을 태우고 배에 올랐다. 아직 가족이 다 타지 못하였다. 그러나 배는 강기슭을 떠났다. 배가 강 중간에 이르렀을 때, 비행기 소리가 났다.
미 전투기가 강물쪽으로 낮게 오더니 기관총을 난발하는 것이었다. 수면에 떨어지는 총탄이 빗방울 떨어지듯 했다.
당시 인민군들이 주로 민간인복을 입고 거동을 하였다. 미 전투기가 날아와서도 민간인들은 해를 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늦게야 이 사실을 알게 된 미 조종사들은 민간인을 인민군으로 오인하고 폭격을 가하는 일들이 많았다.
비행기에서 폭격이 가해지자 배를 타고 있던 피난민들은 요동하기 시작하였다. 배가 좌우로 끼우뚱하다가 그만 뒤엎히고 말았다.
사람들은 물 속으로 쏟아졌다. 하종숙 전도사도 물에 빠졌다. 하 전도사는 헤엄을 쳤다. 사람들의 처절한 울부짖음이 들렸다.
그때 하 전도사 귀에
“아부지, 살려 주세요!”
비명이 들려왔다. 하 전도사는 헤엄을 쳐서 나오다가 뒤를 돌아 보았다. 땅이었다. 헤엄을 칠 줄 모르는 딸이 물에서 허우적거리며 아버지를 부르고 있었다.
하 전도사는 돌아섰다. 땅을 구하기 위하여 딸 가까이로 헤엄을 갔다. 딸의 몸을 떠밀면서 돌아서 강둑을 향해 손발을 놀렸다. 그러나 그에겐 힘이 없었다.
둘이 동시에 거센 물을 헤치고 나오기엔 너무 지쳐 있었다. 강둑으로 나오지 못하고 하 전도사는 기진하여 물 속으로 잠겨 들었다. 있는 힘을 다 모아 헤어나오려고 했지만 물 속에 잠긴 채 영영 떠오르지 못했다.
하 전도사의 생명은 그것으로 다한 것이다.
4. 순교자 박기천 전도사
7월 26일, 수양회를 은혜롭게 마친 박기천 전도사는 신앙의 확신을 얻고 교회로 돌아왔다.
그가 시무하는 교회는 개천교회였다. 그는 전일 위천면 면사무소 직원으로 있었다.
마태가 세관에서 부름을 받았듯이, 그는 면사무소에서 부름을 받았다.
전도를 받은 그날부터 열심이었다. 위천 교회를 출석하면서 교회 봉사를 잘 하였다. 더욱 은혜를 받자 견딜 수 없었다.
면사무소에 안장 사무를 보고 월급을 받는 평범하고 뜻 없는 생활을 언제까지나 계속할 수 없었다. 뜨거운 그의 가슴은 복음 전파의 길을 재촉하였다.
그는 별로 많은 성경 지식을 갖지 못했지만 열심히 독학으로 성경을 읽고 연구했으며, 노회 전도사 시취를 갖지 못했지만 전도사의 길을 나선 것이었다.
어렵고 힘겨운 좁은 길을 뜨거운 가슴으로 걷고 있었다. 백씨가 몹시 언짢게 생각하고 비난하기까지 했다.
“기천이 자식은 예수를 믿더니 영 정신이 돌았어! 돌지 않아야 그렇게 좋은 면서기 자리를 마다하고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조사 짓을 해?”
백씨는 괜찮게 살았지만 동생을 동와 주지 않았다. 농촌 교회 목회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기쁨으로 그 어려움의 길을 걸어갔다.
6.25 사변이 일어나기 직전에 개천교회로 옮겨 목회를 하였다. 가족은 아내와 아들 하나, 단 세 식구였다.
거창 수양회를 마치고 돌아온 박 전도사는 피난 갈 것을 아예 생각도 내지 않고 열심히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며 교회에서 기도하였다.
8월도 중순에 접어들었다. 인민군은 거창에 본부를 두고 마을마을마다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공산주의 정치가 시행되고 있었다.
8월 27일 지방 행정위원을 뽑는 선거가 있다고 공고가 붙었다.
8월 27일은 주일이었다. 박 전도사는 8월 20일 낮 설교시간에,
“····· 주일은 거룩하게 지켜야 하기 때문에 기독신자들은 투표에 참석해서는 안됩니다. 주일에는 세상 선거 투표에 신자들이 참가할 수 없습니다. 해서는 안됩니다.”
하고 외쳤다. 설교를 듣던 한 청년이 이 사실을 내무서에 고발하였다. 다음 날, 무장한 인민군이 나타나 박 전도사를 내무서로 연행하여 갔다.
내무서는 거창읍에 있었다. 명덕학교를 그들이 내무서로 사용하고 있었다. 내무서에서 인민군은 점잖게 타일렀다.
“투표하는 일에 협조하여 주시오.”
“못합니다.”
“왜 못한단 말이오?”
“주일이기 때문에 못합니다.”
“투표만 하면 되지 않겠소?”
“그래도 안됩니다. 그날은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야만 합니다.”
박 전도사는 내무서에 갇혀 한 주일을 보냈다.
“이제 선거는 끝났오! 그러니 잘못했다는 말만 한마디 하면 내보내 주겠소!”
인민군이 다시 도전하여 왔다.
“안됩니다. 나는 결코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기독신자면 누구나 이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신자들도 다 투표에 가담했단 말이오.”
“그러나 약해서 그렇지 그들이 잘한 일이라고는 생각지 아니할 것입니다.”
“할 수 없군!”
인민군은 박 전도사를 끌고 다니며 내무서 밖의 일을 시켰다. 뙤약볕이 뜨겁게 내리 쬐이는 뜰에서 박 전도사는 일을 하였다.
그 곳에서 200여명의 사람들이 같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인민군들의 비위를 거스린 군민들이었다. 신자는 박 전도사 혼자였다.
9월로 접어든 어느 날이었다. 인민군들은 200여명의 사람을 인솔하여 진주로 가게 되었다. 재판을 받으러 간다는 것이었다. 박 전도사도 끼어 있었다.
작열하는 태양을 머리에 이고, 비지땀을 흘리며 일행은 인민군들의 총 끝에 움직이고 있었다. 함양을 지나서 생초로 들어설 무렵이었다. 진주 쪽에서 한 때의 인민군들이 이쪽으로 행군하고 있었다.
그들은 전세가 불리하여 후퇴를 하고 있는 패잔병들이었다. 그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이쪽 인민군들은 200여명의 일행을 돌아서게 하였다. 다시 거창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행렬은 어수선하였다.
인민군들의 당황하는 품이 심상치 않았다. 끌려오는 양민들은 기회를 보고 있었다. 재판이고 무엇이고 없다. 이제는 총살형이 기다리고 있을 뿐임을 양민들은 알고 있었다.
“뛰자!”
그들은 소근거렸다. 그들은 요행이 묶여있지 않았다. 함양읍으로 들어섰다. 함양읍에서 인민군들은 삽을 거두었다. 수십 자루의 삽을 양민들에게 들렸다.
합양읍에서 나와 목현 쪽으로 집어 들었다. 이미 양민들의 가슴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내리고 있었다.
길을 멈추게 하였다. 바로 신작로 아래 모를 심지 않는 논이 있었다. 인민군들은 양민들에게 삽을 주면서 구덩이를 파게 하였다.
이때, 총성이 귀를 멍멍하게 했다. 장정들이 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필살의 탈주였다. 그러나 이 때 박 전도사는 끝까지 침착하게 행동하더라고 뒤에 사라온 사람이 증거해 주었다.
살아온 사람의 말에 의하면 박 전도사는 조금도 그 몸이 흐트러지지 않고 인격적으로 최후를 기다리는 있는 자세였다고 한다.
9월 28일 수복 후, 남영환 전도사는 황보여한 전도사(지금은 함양교회 장로로 고아원 원장(와 함께 박 전도사의 시체를 찾기 위해 현장으로 갔다.
현장은 비참하였다. 여러 곳에 구덩이가 있었는데 시체가 가득가득했다. 시체는 부패해 있었다.
물이 고인 구덩이에는 시체가 물에 불어 제재소 안에 갔다둔 나무둥지처럼 보였다. 까마귀들이 벌써 눈을 다 뽑아 먹어버려 구멍만 두 개나 있었다. 냄새가 지독하였고 벌레와 파리가 득실거렸다.
시체를 한구 한구 치우며, 박 전도사의 시체를 찾기 시작했다.
숨이 훅훅 막혔다. 수건으로 입과 코를 막았다. 땀이 전신에 흥건히 젖어 들었다. 그 많은 시체를 다 뒤졌지만 박 전도사의 시체는 없었다. 결국 시체를 찾지 못하고 두 전도사는 그냥 돌아왔다.
12월 어느 날이었다. 박 전도사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남영환 전도사는 시체가 있다는 곳으로 찾아갔다. 목현 뒤산이었다.
골짜기를 올라가 능선의 한 소나무 밑에 반반히 누운 시체가 있었다. 시체는 상한 곳이 없이 그대로 있었다. 산까마귀도 그의 눈에 접근하지 않은 채 살포시 그의 눈은 감겨 있었다.
남 전도사는 박 전도사의 시체를 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동역자의 승리적 모습이 그의 가슴을 뜨겁게 하였다.
‘하나님은 순교자의 시체마저도 보호해 주셨구나!’
이상한 일이었다. 어찌하여 이렇게 구별된 죽음을 죽게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무더기로 죽어 같은 구덩이 속에서 썩지 않고 이렇게 동떨어진 곳에 시체가 있는 것이 어인 일인지, 그것은 지금까지 아무도 아는 자가 없다.
며칠 후, 순교자 박기천 전도사의 장례는 거창 시찰장으로 성대하게 치루게 되었다. 이날 주례는 산 순교자 주남선 목사가 집례하였다.
순교자 박기천 전도사가 인민군에게 끌려가던 날, 네 살 난 아들 래영은 발가벗고 흙장난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마지막 길을 마지막 길인 줄 모르고 멍하니 아버지의 뒷 모습을 바라보던 어린 래영이,
26년의 세월이 흘렀다. 순교자 박기천 전도사의 외아들 래영이 자라 30세.
고려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연구과에 입학하여 2학년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전도사가 된 것이었다. 그는 지금 부산 반여동 장산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일을 보고 있다.
5. 순교자 배 추달 집사
배추달 집사는 합천군 묘산면 화양리에서 태어났다.
일찍 부친이 별세하고 그는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어머니가 일찍 복음을 받아 예수를 믿었기에 추달은 어머니를 따라 교회생활을 하였다.
당시 화양리에는 교회가 없었다. 그곳에서 이십리 밖, 관기리에 교회가 있었다. 관기교회였다. 추달은 어머니와 관기교회를 출석하였다.
추달은 학교를 하지 못했고 집에서 한글을 좀 익혔다. 집이 가난하여 먹는 문제가 항상 염려였다.
추달이 뼈가 굵어지자 남의 집 일을 도와 주었다. 머슴으로 들어가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 그의 가슴에도 배움에 대한 염원은 이글거리고 있었다.
추달은 남의 집 머슴으로 있었지만 교회생활을 부지런히 잘 하므로써 교회에서 일찍 집사로 임명이 되었다. 관기교회 집사로서 그는 열심으로 신앙에 불을 지르고 있었다.
1950년 3월이었다. 거창에서 주남선 목사가 성경학교를 시작한다는 소식이 관기교회에도 날아왔다. 소식을 들은 추달집사의 가슴이 뛰었다. 배우고 싶었다. 성경학교에 들어가고 싶었다. 돈이 별로 들지 않아 좋았다.
어머니는 아들의 신앙 문제에 대하여는 어느 부모보다 열정적이었다.
“가서 공부를 하도록 해라.”
어머니의 허락을 받은 추달 집사는 거창으로 가서 성경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학생이 된 추달 집사는 너무나 기뻤다. 처음으로 노트에 글을 썼다. 성경을 체계있게 배우는 일은 그의 가슴을 흐뭇하게 하였다.
날이 갈수록 그의 가슴은 주님께로 가까이 가고 있었다. 그는 기도 시간을 많이 가졌다. 감격할 뿐이었다.
머슴살이로 천대 받으며 지내야 했던 그가 성경학교에 와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는 것은 생각할수록 가슴이 벅찬일이었다. 남영환 전도사가 주로 학과를 가르쳤다.
성경학교의 수업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6·25동란이 터졌다. 성경학교는 조기방학에 들어갔다. 방학식 날, 주 목사님의 설교에 추달 집사의 마음은 더욱 뜨거워졌다.
신앙으로 살되 바로 살아야 하겠다고 굳게 마음을 다졌다. 주 목사님과 같은 훌륭한 인격자가 되고 싶었다. 산 순교자 주 목사님의 행동 하나 하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그의 가슴을 울렸다.
신앙의 길은 참 좋은 것이고, 사람의 품위를 한결 높혀 준다고 생각하였다.
방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도 추달 집사는 계속 성경을 읽었고 노트를 훑었다. 기도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인민군들이 묘산으로 몰려 온다는 소문이 들렸다.
순경들이 피난을 가라고 호령을 했다.
화양리 사람들은 봇짐을 꾸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추달 집사도 어머니와 함께 피난에 나섰다.
피난민들은 낙동강 철교가 있는 합천과 창녕의 경계선까지 갔다. 적포철교가 파손되어 끊어져 통행이 중지된 것이었다. 건너 갈 수가 없었다. 화양리 사람들은 그만 되돌아오고 말았다.
화양으로 돌아온 날은 금요일 오후였다. 그날 밤, 가정에서 추달 집사와 교인들은 구역 기도회를 가졌다. 예배는 정운택 선생이 인도하였다.
정운택 선생(현재 부산시 이사벨여고 교사)은 당시 묘산국민학교 교사였다. 정 선생은 하동 사람으로 사범학교 졸업 후, 묘산국민학교에 첫 발령이 나서 와 있었다.
기도회를 마치자 인민군이 왔다는 소식이 들렸다. 정 선생은 배추달 집사와 함께 뒷산으로 도망갔다. 배 추달은 24살이었는데, 다섯 살은 아래로 볼 정도로 몸이 가늘고 뼈대가 가늘었다.
얼굴이 검고, 죽은 깨가 조금 깔아져 있었다. 그는 관기교회 청년 집사였다.
정 선생과 배추달 집사는 뒷산 깊숙이 들어갔다. 계곡에 숯을 굽던 굴이 있었다. 숯굴에 자리를 정했다.
다음 날, 종일을 숯굴에 있다가 밤이 되어 내려와 먹을 것을 얻어서 올라갔다.
며칠을 지내니 배 집사 어머니가 걱정을 하여 아들을 타일렀다.
“내려와서 집에 있거라. 뒤는 어찌되든 그냥 지내보는 거지.”
“안되요. 정 선생이 그러는데 잡히면 큰일난데요. 괴뢰군은 지독하답니더.”
줄곧 배 집사는 정 선생과 함께 숯굴에서 지냈다.
그러던 어느 주일의 일이었다. 정 선생과 배 집사는 마을로 내려와서 정 선생 사촌 누나집에 들렸다. 이 곳에서 주일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정 선생이 예배를 인도하였다. 부인들이 몇이 참석하였다.
예배가 끝나고 나자 인민군을 앞세우고 지방 치안대원들이 들이 닥쳤다. 그들은 인부동원을 하기 위해 나온 것이다.
예배를 끝낸 이 집 마루에는 청년이라곤 두 사람 뿐이었다. 정 선생과 배추달 집사였다. 치안대원 중에 정 선생을 잘 아는 분이 있었다. 해서 정 선생은 차마 가자하지 못하고 배추달 집사에게 말을 걸었다.
“같이 따라갑시다. 일을 해야 하겠는데······”
“안됩니다.”
“안되다니?”“오늘은 주일이빈다. 주일은 일을 못합니다.”
“예배는 끝났지만, 주일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는데 주일이 다 뭐냐? 지금은 전시야! 나라를 구해야지!”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음은 죄가 만항서 그렇습니다.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들여야 합니다.”
“이 새끼 아주 악질이구나!”
그들에게 명령 불복종은 곧 죽음의 길이다.
“가자!”
배 추달 집사는 그들에게 끌려 내무서까지 갔다.
“저 벼 한 가마를 방앗간까지 져다 주고 가!”
“못합니다.”
“그렇게 해! 그러면 내일 부역을 면해 준다.”
부역이란 탄약을 지고 영산까지 가는 일이였다. 화양에서 영산까지는 백리길이었다. 백리 길을 탄약을 지고 가는 일이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내일 부역을 하겠습니다.”
배추달 집사는 주일을 범하지 않기 위해 탄약을 지고 전쟁터를 나갈 뜻을 밝혔다. 그러나 인민군은,
“그럼 벼 지고 가는 일은 그만 두고, 저 돼지를 몰고 따라가자.”
내무서 앞 미루나무에 매어 둔 돼지를 가리켰다.
“그럴 바엔 벼를 지고 가지요. 돼지를 몰고 가자 함은 나를 시험하는 일ㅇ비니다.”
그러자 다시 인민군은 비를 가지고 왔다.
비를 추다 집사에게 주면서
“자, 그럼 이 마당이나 좀 쓸고 가라!”
“안도비니다. 주일에 마당을 쓸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 쓸라고 명령하심은 나를 시험하는 일입니다.”
“좋아! 그럼 이 비를 받아 들기만 해! 그럼 용서한다.”
“그것도 못합니다. 내가 비를 받으면 마당을 쓸라 할 것이고, 마당을 쓸면 돼지를 몰라 할 것이고, 돼지를 몰면 벼 지고 가자 할 것이고, 그러면 잡일을 다하게 될 것이니 나는 주일을 범하고 맙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비를 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썅, 이 간나새끼!”
인민군의 부릅 뜬 눈알이 금시 뚝 삐져나올 것만 같다.
인민군은 추달 집사를 내무서 안으로 끌고 가 유치했다.
다음 날, 인민군은 추달 집사를 묘산국민학교 뒷산으로 끌고가서 총을 쏘았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하여 스물 네 살의 젊은 청년 집사 배추달은 수교를 당한 것이었다.
관기교회 이대형 집사가 배추달 집사의 시체를 발견하였다.
시체는 두개골과 가슴에 총을 맞은 흔적이 있었다. 두개골에 총을 맞았지만 그의 시체는 험하지 않았다.
타박상의 상처처럼 보였고 얼굴은 평화롭게 미소가 어려 있었다.
마치 찬란한 무엇을 바라보듯 황홀경에 빠진 듯, 그 상태로 굳어 있었다.
이대영 집사는 교회에 알리고 배 집사 어머니에게 통지하여 배 집사 시체를 그곳에 가매장 하였다.
새 옷을 갈아입히고 창호지로 곱게 덮어 관도 없이 가마니에 싸서 묻어두었다. 인민군들의 눈이 두려워 정식 장례를 치루지 못하고 가매장을 해 둔 것이었다. 그 날, 배추달 집사가 끌려가던 뒷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던 정 선생은 치안대원들의 그림자가 사라지자, 윤용환이란 사람의 헛간에 숨어 십오일을 지냈다. 그러나 치안대원들에게 발견되어 끌려가는 몸이 되었다.
저녁 무렵, 허술한 틈을 타서 담을 뛰어 넘었다. 뒷 산을 향하여 뛰었다. 무사히 숲 속에 숨을 수 있었다. 그날부터 나무 뿌리를 파 먹고, 송피를 벗겨 먹으면서 야생동물 같은 생활을 계속했다.
20일이 지났다. 얼굴을 숲 밖으로 내밀고 마을 쪽을 살피니 인민군들의 행렬이 삼거리 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후퇴하는 듯 보였다.
일직이 해가 저물 무렵, 고령 쪽에서 유엔군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살았구나!”
정운택 선생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온 정 선생은 수복 후 고향인 하동으로 돌아가 금융조합 서기 일을 봤다.
그 해 12월 중순. 남영환 전도사는 관기교회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다. 그 주간에 순교자 배추달 집사의 이야기가 나와 장례를 하도록 주선을 하였다.
관을 준비하여 묘산국민학교 뒷산으로 올라갔다. 무덤을 팠다. 교인들이 둘러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가마니가 그대로 나왔다. 가마니에 응겨붙은 흙을 털고 가마니를 풀었다. 시체가 창호지에 싸인 채 나왔다.
수분이 빠지고 곱게 말라 있었다. 창호지도 그대로 있었다. 창호지를 풀었다. 시체가 하나도 부패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창호지에 총 맞은 가슴과 등 쪽에 노란물이 번져있을 뿐 시체는 깨끗했다. 관에다 그대로 넣었다. 흰 꽃상여에 관을 실어 청년들이 메었다.
순교자 배추달 집사의 장례는 시골에서 보기 드물게 성대히 진행되었다. 남영환 전도사가 모든 장례를 집례하였다. 배추달 집사의 관은 그의 집이 있는 화양리 뒷산에 고이 안장되었다.
배추달 집사는 전일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면서도 간절한 소원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그의 소원은 황양에 교회당을 세우는 일이었다.
배추달 집사는 머슴사경 받은 것 가운데서 푼푼이 떼어 주인 집에 맡겨 둔 것이 있었다. 순교 후 주인집에서 내어 놓은 것이 벼 한 섬 반과 돈 15만환이었다. 주인은 배추달 집사 모친에게,
“이것은 추달이 머슴사경 중에 화양에 교회 짓는다고 별도로 맡겨 둔 것입니다.”
벼와 돈을 내밀었다.
이 사실은 듣는 사람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였다. 부산 남교회 한명동 목사는 이 소식을 듣고 화양에 교회를 세우기 위한 위원회를 조직하여 교회당 건축을 서둘렀다.
다음 해, 화양에는 교회당이 서게 되었다. 아담한 교회당이 화양리 마을 중아에 찬란한 십자가 종각을 우뚝 내밀고 서게 되었다.
제15장
1.꿈과 현실의 사이
9월 14일 밤이었다.
주 목사님은 발목을 삐은 이후 심방을 별로 하지 못했다. 보행이 부자유스러워서였다. 교회당에서 기도하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이날 밤도 주 목사님은 교회당에서 밤을 지새우며 기도하고 있었다. 그의 기도 현장엔 바닥이 눈물로 흥건하였다. 그의 기도는 주 앞에서 드리는 진실과 간절함이 있었다.
며칠 째 계속되는 기도에 그는 피로해 있었다. 밤은 소리없이 깊어갔다. 자정이 지나고 시계는 두 시를 육박하고 있었다.
기도를 드리던 주 목사님은 정신이 몽롱하게 흐려옴을 어렴풋이 느꼈다. 겹친 피로와 긴장이 스르르 풀리면서 수렁으로 빨려드는 것이었다.
길을 가고 있었다. 그는 혼자 뿌연 안개 속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어디가 어딘지 분별할 수 없는 어떤 지역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안개구름이 그를 덮고 있었다. 그 속에서 그는 이상한 것을 보았다. 키가 유독 큰 미군 장성이 하늘로부터 상장을 받고 있는 것이었다.
하늘에서 두 팔이 안개구름 속에 나타나 이 키 큰 미군 장성에게 상장을 수여하는 것이었다. 그 키 큰 장성은 맥아더 장군이라고 누군가가 말해 주었다.
주 목사는 눈을 떴다 그는 텅 빈 교회당 마루에 어두움을 깔고 자기 혼자 앉아 있음을 발견하였다.
“꿈이었구나!”
“맥아더 장군이 하늘에서 상을 받다니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주 목사는 계속 맑은 정신으로 나라를 위해 기도하였다. 유엔군과 국군의 승리적 투쟁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 시간에 미 제10군단 원정대는 함포사격 지원부대와 로켓함, 상륙작전에 필요한 장비를 가지고 인천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그 때가 9월 15일 새벽 2시였다.
하늘에는 짙은 안개구름이 꽉 끼어 있어, 당장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처음 격파 지역은 월미도였다. 새벽 5시 정각에 월미도에 폭격이 가해졌다.
5시 30분에 제3대대는 17척의 상륙정에 올랐고, 9대의 탱크가 3척의 상륙정에 실려졌다. 상륙시간은 5시 30분이었다. 공중 폭격이 시작되었고, 함포 사격이 동시에 가해졌다.
6시 25분에 맥아더 장군은 매킨리호 지휘대에 나타났다.
오전 7시 50분에 월미도는 완전히 점령되었다. 월미도에는 북괴군 제226 독립 해병연대 제 3대대와 제918포병 연대가 방어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살육 당하고 1백36명만 포로로 잡혔다. 오후 5시 30분 인천상륙 작전이 시작되었다. 인천상륙 작전은 기적적으로 성공을 거두게 된 것이었다.
2. 환란 때의 교역자 생활비
9월 15일, 인천상륙 작전이 성공되자, 북괴군은 한풀 꺾였다. 남부 전선의 적은 보급로가 끊어졌고, 완전히 오합지졸이 되었다.
9월 23일, 미 제 23연대와 제38연대는 철수하는 북괴군 4사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북괴군 제9사단과 2사단과 4사단이 합천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미23연대와 38연대는 진주와 김천 가도를 막고 적을 봉새하였다. 미 F15 전투기는 합천과 거창에 흩어진 적병 머리에 폭탄을 퍼부었다.
9월 25일, 미 제38연대는 합천에서 거창으로 들어가면서 북괴군 패잔병 소탕전을 가했다. 북괴군은 차량과 중장비를 합천과 거창 사이에 버리고 도보로 도망하였다. 산을 타기 시작한 것이었다.
또한 거창 시내로 들어가 민간인 행세를 하기도 하였다. 이날 오후 늦게 미 공군은 거창을 맹렬히 폭격하므로 파괴시켰다.
북괴군은 이날 제 2,4,9,10사단이 거창에 집결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미 제2사단의 반격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었다.
특히 미 공군의 폭격은 극심한 타격을 가해 주었다. 적은 거창 시내를 점령하고 온갖 힘을 기울였지만 무모한 일이었다. 9월 27일 밤까지 버티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유엔군의 우수한 전투력은 그들의 사기를 여지없이 꺾고 말았다.
적은 트럭 17대, 오토바이 10대, 대 전차포 14문, 야포 4문, 박격포 9문, 탄약 3백톤을 유엔군에게 노획 당했고, 4백50명이 생포되었으며, 2백 60명이 사살당했다.
거창 시내는 북괴군의 시체가 흉측하게 깔렸다. 북괴군 사단장 최현은 나머지 잔병들을 데리고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2천 500명의 북괴군은 거창 시내를 빠져 27일 밤에 산을 타고 줄행랑을 치게 되었다.
9월 28일 아침, 해가 돋자 미 제38연대는 거창에서 전주로 행군을 시작하였고, 제28사단도 남원을 거쳐 전주로 올라갔다. 미 제28연대와 제9연대는 고령·삼가 지역을 소탕하였다.
무서운 전쟁이 휩쓸고 간 거창 시내는 폐허가 되어 있었다. 시민들이 나와 폭격을 당한 집을 일으키고, 파괴된 길을 손보았다. 흩어진 시체들을 산으로 옮겨 매장하였다.
남영환 전도사는 개평 지방을 순회 심방하다가 돌아오고 있었다. 주 목사님과 남 전도사는 폭격이 심한 그 전쟁 중에서도 지방을 나누어 순회를 하였던 것이었다.
주 목사님은 함양 지방을 순회하였고, 남 전도사는 거창 일대와 합천 지방을 돌아 보았다. 남 전도사는 집으로 돌아가면서 걱정을 하고 있었다. 떠날 때, 식량이 없는 것을 보고 떠났다.
평화시에도 식량이 모자라 어려움을 당했는데, 전시에는 오죽하겠나 싶어 염려를 하면서 집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집에 들어서니 가족들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가족들은 무사했다. 얼굴은 보니 배고픈 상이 아니었다. 제법 얼굴에 기름끼가 돌고 있었다.
“굶어 죽지는 않았군!”
남 전도사는 신통한 생각이 들어서 허공을 향해 말을 던졌다.
“굶어 죽기는요, 전보다 더 부요하게 된 걸요. 년말까지는 식량 걱정 안해도 됩니더.”
부인 박명순 여사가 반색을 하며 남 전도사의 가방을 받았다.
너무나 생각 밖의 일이어서,
“어떻게 된거요?”
하고 물었다.
“뭐가요?”
“식량이 없었을 터인데·····”
“염려 말아요.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까마귀를 통해 먹을 것을 공급하셨는데, 하나님의 사람들을 굶기시겠어요? 교인들이 전보다 사랑이 더 맣아져 교역자 가정 도우는 일에 전력을 쏟고 있어요.”
남 전도사는 말없이 부인의 말에 정신을 주고 있었다. 지방 교회에서도 식량을 가져왔다고 했다. 가조 교회에 전쟁중인데도 식량을 지고 왔다 했다.
주 목사님은 가지고 오는 성도들의 정성어린 식량들을 감사히 받아 자신의 양식으로만 삼지 않고, 두 전도사의 가정에도 적당히 분배하여 준 것이었다.
모든 일에 세밀하고 자상하신 주 목사님이었다. 평화시대 보다 전쟁시에 주 목사님과 전도사들의 생활은 더 나은 편이었다. 환란이 올 때, 교인들의 신앙은 더욱 두터워지기 마련이다.
세상 것에서 신령한 면으로 마음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었다. 평화시엔 현세적이지만 전시엔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내세적이 된다.
사람이 내세적일 때, 신앙은 바른 궤도에 운행되고 있는 것이다. 교역자를 섬기는 일이 신앙의 고저와 관계 된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말이라 할 수 있을까?
3. 뜨거워진 청년들
괴뢰군이 북쪽을 향해서 퇴집하자 거창은 복구 작업이 한창이었다. 주 목사님은 제직회를 열고 우선 급한 것부터 일하기로 의논하였다.
“파손된 교회당을 수리해야 하겠습니다.”
주 목사님 제의에 제직 중 한 분이 즉시 말을 받았다.
“교회당 수리도 문제이지만 사택부터 수리해야 하빈다.”
주 목사님은 머리를 흔들며 일어나,
“아무리 사택 수리가 급하지만 순서가 있는 법입니다. 교회당을 수리해야 합니다.”
결국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어려운 경제사정에서도 교회당 수리를 말끔히 했다. 그 다음 사택을 손봤다. 유치원 건물이 폭격으로 불타 버렸기 때문에 다시 육간 목조건물로 세우고 기와를 덮었다.
12월이 저물어갔다. 신년도 예산을 세워야 했다. 예산위원이 정해지고, 예산을 세우게 될 때, 예산안을 목사님께 상의하였다.
주 목사님은 예산위원들에게 말했다.
“나는 이제 나이도 많고, 건강도 좋지 못해 사면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남영환 전도사님은 곧 목사 안수를 받게 될 것이니, 남 전도사님을 원 교역자로 세워 일 할 수 있도록 예산을 세우십시오.”
예산위원들은 의외의 말에 당황하였다. 허나 주 목사님은 자신의 앞날을 대강 짐작 하시듯 담담히 말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나는 더 이상 일을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좀 휴식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남 전도사님을 원 교역자로 세우도록 주선을 하십시오.”
그러나 당회원들과 예산 위원회에서는 여전히 주 목사님의 생활비를 책정하여 예산을 세웠다.
그날 밤, 청년회 임원회가 모였다. 회장 원영봉 집사는 임원회 석상에서 자신의 마음을 내놓았다.
“우리는 다 죽었다가 살아 난 사람들이 아닙니까? 전과 같은 태도를 버리고 뜨겁게 일해야 하겠습니다.”
원 집사는 전쟁시 부산까지 피난을 갔다가 돌아왔다. 와보니 집은 불타버리고, 구둣방을 하고 있었는데 가죽도 다 타고, 구두 두 켤레 만들 가죽만 남아 있었다. 그는 그것으로 주 목사님과 남 전도사의 구두를 맞추어 드렸다.
원 집사는 전쟁을 겪고 나서 과거의 미온적 교회 봉사가 부끄럽게 느껴져 임원회를 열고 열심히 쏟는 것이었다.
"우리는 우리만 살기 위하여 피난을 간다. 숨어다닌다 했지만 우리 목사님과 전도사님은 생명을 내어 놓고 난 중에서도 주님을 위해 일하시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목사님이 말씀이면 무엇이나 순종해야 됩니다. 또 목사님의 계획이 실행되도록 힘을 모두어야 합니다.”
회원들은 모두 원 집사의 뜨거워진 가슴을 이해하는 듯,
“옳습니다. 우리가 힘을 냅시다.”
의견을 모두었다.
1951년 1월. 청년회 단독 사업으로 지산 교회에 전도사를 파송하였다. 월천 교회를 개척하고, 이백원 전도사를 보내어 일하게 했다.
교회는 은혜가 흘러 넘쳤고, 청년들의 열심은 교회를 더욱 뜨겁게 하였다. 청년회장 원영봉 집사는 3년 후인 1954년 1월 5일, 장로로 피택되어 장립을 받았다.
4. 진찰을 받고
1951년 새해로 접어들자 주 목사님의 몸은 눈에 뛰이게 초췌해 보였다. 그래도 목사님은 좀체 누우시지 않고 계속 심방과 기도 생활에 힘을 쏟았다.
2월 1일 밤, 부산 영도 교회에서 임시노회가 모인다는 통지가 1월 30일 오전에야 전달되어싿.
주 목사님은 남영환 전도사의 목사 안수를 생각하였다. 안수 받는 몇 분이 있어 같이 안수를 받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이날, 남영환 전도사는 서산 교회 집회인도를 위해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남 전도사는 안의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잠시 쉬었다가 길을 떠났다.
얼마를 가다가 남 전도사는 누가 부르는 소리가 등 뒤에서 날아오므로 몸을 돌려 바라보니 추국원 집사가 자전거를 타고 오고 있었다.
추국원은 당시 거창읍 교회 집사였다.
“조사님, 목사님이 부르십니다.”
“뭐 할려고?”
“임시 노회시 목사 안수를 받으시랍니다.”“빨리 갑시다.”
남 전도사는 돌아서서 추 집사의 자전거에 몸을 답았다.
죽전 사택에 들어가니 목사님께서 노회 가실 준비를 하고 남 전도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 조사님 같이 부산으로 갑시다. 비상시에는 비상법으로 노회가 목사를 안수를 할 수 있으니 내일 밤에 안수 받도록 합시다.
남 전도사는 멍멍 할 뿐이었다.
“전보를 쳤습니다. 가시면 됩니다.”
남 전도사는 선걸음에 주 목사님 뒤를 따랐다. 거리에 나왔지만 자동차는 없었다. 날씨는 몹시 쌀쌀하였다. 찬바람이 귓부리를 때리고 지나간다. 거창 시내를 빠져 마산 쪽으로 난 길을 그들은 걸어가고 있었다.
그 때, 군용 트럭이 한 대 오고 있었다. 장작을 가득 싣고 있었다. 손을 들었더니 시원스럽게 태워 주었다.
겨울 해는 짧았다. 그들이 마산에 들어섰을 땐, 밤이 이슥했다. 따님 주경순씨 사택에 들려 밤을 쉬었다.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야 했다. 오후 늦게야 기차가 출발하였다.
영도 교회에 들어서니 임시노회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목사 안수식만 남아 있었다. 남영환 전도사는 예정한 안수일보다 일년 늦게 안수를 받은 것이다.
다음 날. 2월 2일. 주 목사와 남 목사는 복음병원 차로 부평동에 있는 큰 병원에 진찰을 받으러 갔다. 최의선 선교사의 소개로 가게 된 것이다.
최의선 선교사는 전직이 의사였다. 그는 처음 한국에 나와서 선천 미동병원 원장일 보면서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무료진료를 해 주었고 자선에서 힘썼다.
어느 날, 싸움을 하여 심한 부상을 입고 찾아온 청년이 있었다. 최원장은 친절히 치료를 해주고 퇴원할 때,
“앞으로 싸움하지 말고, 착한 사람 되시오.”
하고 타일러 보냈다. 그리고 며칠 후, 드리는 소문은 그 청년이 나가서 살인을 했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최 원장은 크게 충격을 받았다.
“육신 병, 고쳐주어도 영혼 병 고쳐주지 못하니 불행한 일 생깁네다.”
최 원장은 자리를 내어 놓고 본국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신학을 공부하였다.
해방이 되자 선교사가 되어 한국으로 다시 나오게 되었다. 그는 고려신학교에서 강의를 맡았다.
이 최의선 선교사의 소개로 주 목사와 남 목사는 진찰을 받았다. 남 목사는 폐와 심장이 좋지 못했다.
“한 1년간 요양을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의사의 말이었다. 주 목사님에게는 위장이 좋지 못하다고 하면서 휴식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의사의 심각한 표정으로 봐 심상찮은 병세인 듯 했다. 뒤에 안 일이지만 주 목사의 병은 간암이었다. 병원에서 나와 남 목사는 거창으로 돌아가고 주 목사는 쳐졌다. 주 목사는 부산의 뜻있는 목사들을 찾아 만나 상의하였다.
자신은 더 큰 병을 안고 있으면서도 남 목사를 염려하고 동정을 바랐던 것이다.
목사는 십만 환을 마련하여 가창 남 목사 앞으로 우송하였다.
“너무 무리하게 일하지 말고, 이 돈으로 약을 사 가지고 쉬면서 일하시오.”
돈과 편지를 받아 쥔 남 목사는 주 목사님의 따뜻한 인정과 자신보다 남을 소중히 여기는 인간애에 뜨거운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주 목사님은 마산으로 가서 주경순 집사의 집에서 머물렀다. 얼마간 요양을 하면 회복이 될 거라는 생각에 휴식을 가졌다. 그러나 며칠을 쉬었지만 몸은 더욱 피로하였고 좀처럼 회복이 되지 않았다.
제16장
해와 같이 빛나리
1.신앙의 동지가 그리워
이인재 전도사가 제2문창 교회에 집회 인도차 왔다. 이인재 전도사는 집회 주간에 시간만 있으면 주 목사님께 들렸다.
주 목사님은 이 전도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조사님, 이번 집회시 철야기도를 좀 못하더라도 내 곁에 와 있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전도사 역시 주 목사님 곁에 있고 싶었다. 주 목사님 옆에 있으면 세상의 염려나 걱정이 일지 않았다.
집회를 끝마친 이 전도사는 돌아가지 않고 며칠을 주 목사님 곁에서 지냈다. 주 목사님은 주경순 집사 댁에서 한 달 가까이 지냈다. 병세는 점점 악화되어 회복의 가망이 보이지 않았다.
‘가야 하겠다. 죽어도 집에 가서 죽어야지······’
주 목사님은 불현 듯 거창으로 도아가고 싶었다. 교회가 그리웠고, 돌보던 지방 교회 교인들이 보고 싶었다. 거창에서 사모님이 오셔서 거창으로 올라가실 준비를 갖추었다.
2. 거창으로 올라가는 날
부산에 자동차 연락을 하였다.
박병호 전도사가 차를 몰고 왔다. 박병호 전도사는 자동차 면호증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 재건 교회 전도사 일을 보았으나 고려신학교에 입학하므로 교회 시무를 옮겼다.
초량 35번지에 소재한 은혜 교회를 맡았다. 한부선 선교사가 6·25사변으로 본국에 들어갈 때, 그의 자동차를 고려신학교에 맡기고 갔다. 교단적인 급한 일이 있을 때 박병호 전도사를 통하여 이 자동차를 이용하곤 했다.
자동차를 몰고 박 전도사가 주경순댁으로 왔다. 자동차에서 한상동 목사님과 한명동 목사님이 내렸다. 두 한 목사님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감사합니다. 원로에 와 주셔서·····”
주 목사님의 얼굴에 괴로운 미소가 지나갔다.
주 목사님은 부축되어 자동차에 올랐다.
“목사님 안녕히 가십시오. 회복되어 다시 만나 뵙기 바랍니다.”
두 한 목사님, 조수옥 집사와 아는 얼굴들을 뒤로 하고 자동차는 서서히 미끄러져 나갔다.
다시는 만날 수 없을는지 모를 그리운 얼굴들. 보내는 사람들은 한 사람을 보내지만 떠나는 사람은 모두를 두고 떠나간다. 보내는 사람은 한 사람을 잃는 슬픔이지만, 떠나는 사람은 모두를 잃어버리는 슬픔에 젖는다.
주 목사님의 눈시울에서 굵은 눈물 방울이 양볼을 흘러내렸다. 딸의 집이 점점 멀어진다. 이제는 영영 다시 들릴 수 없을지도 모를 딸의 집을 한 번 더 눈에 담아보는 주 목사님이었다.
자동차는 신마산 역을 지나 시외로 빠지는 고갯길을 오르고 있었다. 자동차에는 사모님과 딸 주경순 집사가 합승하고 있었다.
주 목사님은 운전대를 잡고 있는 박병호 전도사에게 말을 던졌다.
“박 조사님, 수고가 많습니다. 나 때문에 이렇게 먼 거리를 자동차를 몰게 되었으니 참 고맙군요.”
박 전도사는 계면쩍게 웃어 보이면서 말을 받았다.
“아닙니다. 당연히 할 일을 하는 것 뿐인걸요. 하여튼 목사님 몸이 빨리 회복되셔야 하겠는데 걱정입니다.”
“나는 이제 틀렸어! 하지만 박 조사님은 몸이 건강해서 참 좋습니다.”
주 목사님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통증이 오는지 얼굴을 살짝 찡그리더니 다시 얼굴을 펴고 눈을 떳다. 그의 눈길이 운전대를 쥔 투박한 박 전도사의 팔목에 멎었다.
“박 조사님, 건강이 보뱁니다. 무리하면서도 뛰는 것만 잘하는 건 아니야. 쉬는 것도 주님의 일이란 걸 이제야 나도 알았어! 쉬는 것도 주님의 일이야.”
느릿느릿 목에 힘을 넣어 말했다.
자동차는 함안으로 들어갔다.
군북으로 해서 의령으로 빠지려는 것이다.
목사님을 위해서 비교적 좋은 길을 택하였다. 장거리 여행이었다.
주 목사님은 음성을 낮추어 말을 이었다.
“손양원 목사는 순교를 했는데, 나같은 사람은 순교도 되지 않았어. 순교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되지······· 나는 원하고 원해도 허락지 않으시니 안되더군, 결국 내가 원치도 않은 약사발을 들고 죽음으로 들어가게 되니 섭섭하다면 이보다 더 섭섭한 일이 어디 있을까?····”
주 목사님은 다시 눈을 살며시 감았다.
자동차는 의령으로 들어섰다. 의령을 지나 삼가에 이르렀다. 사막에서부터는 주 목사님의 시찰구역이다. 수 없이 다닌 낮익은 길이었다. 교인들의 집을 차장 심방한 길이었다.
차를 멎게 하고 교인들을 불러오게 하여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다. 마지막 길인 줄을 알았기 때문에 더욱 간절한 신앙의 격려를 했다.
합천에 들어가자 날이 저물었다. 다시 올 수 없는 합천이었다. 그 밤을 합처넹서 쉬었다.
죽음이 눈 앞에 가까워 질 때, 생에 대한 애착은 이렇게 짙어지는 것인가? 모든 것이 아수비고, 그리움으로 가슴에 밀려왔다. 주 목사는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접견하고 기도하며 격려하였다.
아침이 되어 다시 자동차는 출발하였다. 묘산에 들어가 교인들의 안부를 묻고 만날 수 있는 분들을 다 만났다.
바울이 밀레도를 떠날 때, 장로들에게 권면하듯, 만나는 성도들을 주와 및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고 석별의 눈물을 삼켰다.
자동차는 거창으로 들어가 죽전 사택 문 앞에 멎었다. 주 목사님은 사택 방으로 들어가 눕게 된 것이다.
3. 찾아드는 교역자와 성도들
주 목사님이 거창으로 돌아왔다는 소문은 삼 군 각 교회에 알려졌다.
매일처럼 교역자와 성도들이 죽전으로 몰려들었다. 귀찮을 정도로 사람들은 몰려왔다. 그러나 주 목사님은 찾아오는 문안객들에게 조금도 언짢은 기색없이 친절로 대변하였다.
자녀들이 아버지를 염려하여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버지! 자꾸 편찮으신데 사람들이 올 때마다 일어나시어 말씀을 하시니 이래 가지고는 참말로 안되겠습니다.”
“아니다. 그냥 내가 하는대로 두어라. 그분들이 찾아온 것은 내 한 사람 얼굴 볼려고 온 것 아니겠나? 내가 그 분들을 반가워 하지 않으면 그분들의 섭섭함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허지만 아버지는 병중이 아니십니까?”
“내가 내 병을 잘 안다. 내가 다시 회복될 것이란 걸 나는 기대하지 않는다.”
절망적인 말을 하시면서도 목사님의 얼굴엔 절망의 빛이 보이지 않는다. 얼굴은 밝고 평화로웠다. 병문안 온 교역자들과 교인들이 오히려 위로를 받고 돌아갔다.
위천교회 백영희 전도사가 왔다. 그는 일제수난시부터 주 목사님을 극진히 위한 분이다. 세상이 다 외면하고 적대시한 주 목사님의 가족들을 그는 음성적으로 도왔다.
승복을 입고 배낭에 쌀을 감추어 다니며 그릿 시냇가의 까마귀 노릇을 한 것이었다. 백 전도사는 주 목사님을 가장 존경하고 신앙의 선배로 우러러 보았다.
백 전도사가 머릿쪽에 앉자, 주 목사님은
“백 조사님, 아래쪽에 앉으시오. 얼굴이나 좀 보개.”
많이 가늘어진 음성이 실낱같이 이어져 나왔다.
백 전도사는 주 목사님의 초췌한 얼굴을 보자 눈물이 왈칵 치밀어 올랐다. 지난 날의 얼굴이 그리웠던 것이다. 형편없이 여윈 주 목사님의 모습은 다시 옛 얼굴을 가져올 상 싶지를 않았다.
“아무데도 가지 말고, 내 옆에 좀 있어 주시오.”
언제나 사랑과 정이 담뿍 담긴 주 목사님의 말은 울적한 백전도사의 마음을 따사롭게 어루만져 주었다. 이틀동안 백 전도사는 주 목사님 곁에 있었다.
백 전도사는 차마 그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그는 상남 교회 집회를 맡아 있었다. 그날 밤부터 가지도록 된 집회도 연기하고 싶었다.
“목사님, 사실은 함양 상남 교회 집회를 가지도록 되어 있지만 그만 두겠습니다. 사람들을 보내어 사정에 의해 연기되었다고 말하겠습니다. 차마 목사님을 곁을 떠날 수가 없군요·····”
백 전도사는 말을 흐렸다. 주 목사님은 백 전도사의 말 뜻을 알아차리곤,
“안됩니다. 백 조사님, 가셔야 해요.”
말에다 힘을 넣었다.
“그렇지만 목사님께서 이렇게 편찮으신 못브을 보곤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백 조사님,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먼저해야 되오. 주님의 일을 해야지···”
주 목사님은 머리맡에 놓인 자신의 성경책을 내밀었다.
“백 조사님, 이걸 가져 가시오. 난 이제 성경을 읽지 못하게 되었어. 이것은 백 조사님이 나보다 더 필요하게 사용할 수 있을 거야.”
성경을 받는 백 전도사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눈물이 격류처럼 쏟아져 내렸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빨리 가시오, 힘있게 주님의 일을 해야지요. 젊고 건강하니까. 열심히 해야지요.”
백 전도사는 주 목사님이 주시는 성경을 가슴에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사님,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잡숫기 어려우시더라도 죽물을 좀 드십시오.”
“·······”
목사님은 말없이 백 전도사를 바라 보았다.
주 목사님의 후미진 눈 언저리에 흥건히 물기가 고이는가 하더니 주르르 귓바퀴로 눈물은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백 조사님······· 잘 가시오·········”
돌아선 백 전도사의 등 뒤를 향하여 아련히 말을 보내는 것이었다.
4.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1951년 3월 23일, 오전.
주 목사님은 장로들을 불렀다. 장로들은 목사님 주위에 둘러 앉았다. 주 목사님은 말할 힘조차 없지만 느릿느릿 입에 힘을 모으는 것이었다.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납니다. 나에게 대한 기대와 미련을 다 잊으시고 교회를 신앙으로 잘 이끌어 가십시오. 나의 후임으로는 남 목사님을 보도록 하십시오.”
장로들은 모두 묵묵하였다. 주 목사님의 이 마지막 부탁을 거절할 마음은 장로 중 아무도 없었다. 주 목사님의 그 순교적 신앙 산맥을 이어 줄 사람은 현재로서 남 목사 뿐임을 장로들도 잘 알고 있었다.
“목사님, 그 문제에 대하여는 안심하십시오.”
장로 중 한 분이 입을 열었다.
그날 오후. 주 목사님은 그의 곁에서 염려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앉은 남 목사에게,
“남 목사님, 예배 인도를 하러 가야 하지 않습니까? 수요일인데·······”
하고 말을 떼면서 눈을 껌벅거렸다.
“예, 가야 하겠지만······”
“가세요. 교인들이 모여 드는데 목사가 없으면 되겠습니까? 빨리 가세요.”
“예, 목사님. 예배 인도하고 바로 오겠습니다.”
남 목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온 남 목사는 하늘을 보았다. 찌푸린 날씨가 3월이라곤 하지만 쌀쌀한 바람이 아직 머물고 있었다.
해가 졌는지 벌써 안개처럼 어둠살이 깔리는 듯 했다.
남 목사는 교회를 향하여 발을 옮겼다.
남 목사를 교회로 보낸 다음 주 목사님은 둘러 앉은 가족들에게 신앙을 격려하고 만날 것을 다짐했다. 그리고는 조용히 평화로운 얼굴로 숨을 거두었다.
1951년 3월 23, 오후 6시.
평생 소원 순교이었는데, 순교 직전의 아슬아슬한 고비를 수 없이 넘기시다가 자택에서 가족 친지들이 보는 거운데 눈을 감았다.
향년 64세.
길지 못한 생애였지만 너무 많은 고난과 역경을 그 몸에 지니고 살다 갔다.
거창에서 태어나,
거창에서 자라고,
거창에서 예수 믿어 학습과 세례를 받고,
거창에서 집사되고 장로 장립을 받고,
거창에서 전도사되고 평양신학하고,
거창에서 목사 안수 받고,
거창에서 검속되어 대구, 진주, 부산, 평양 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거창에서 6·25 수난을 겪고,
거창에서 숨지니 그는 거창 사람이다.
그러나 세계 그 어떤 위인들의 생애와 비교하여 모자람이 있을까?
한국이 낳은 세계적 위인, 누가 이 침묵의 성자를 존경하지 않으리!
그는 한국의 남단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여 주었다.
그가 보여준 하나님은 사랑이요, 긍휼이요, 자비요, 진실이요, 불변이었다.
순교는 죽는 것만이 아니고 살아서도 그 생활이 순교일 수 있다는 순교의 다른 의미를 보여 준 사람. 그는 이 땅에 와서 하나님만 보여 주고, 하나님만 증거하다가 갔다.
그는 기도의 위력을 보여 준 사람이다. 평양 형무소에서 주야로 간절히 부르짖던 그의 기도는 다 이루어졌다.
특별기도 제목으로 정하여 기도했던 6개 항목이 그대로 다 이루어짐을 보고 그는 눈을 감았다.
첫째, 말세의 바벨론 우상 제국이 파괴되도록 기도하였는데, 우상 제국 일본은 원자탄 두 개로 파괴되었다.
둘째, 이 땅에 참 신앙의 자유를 달라고 기도하였더니 8·15해방으로 신앙의 자유가 왔다.
셋째, 조선의 자주 독립을 기도하였는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어 완전 독립국이 된 것이다.
넷째, 이 땅에 세워진 모든 신사가 불타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더니 그대로 신사는 다 불탔다.
다섯째, 조선 교회 지도자 교양을 위하여 수도원을 설립하고 새로운 교역자 양성을 목적으로 기도하였는데, 1946년 9월 20일, 한상동 목사와 함께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여섯째, 거창에 성경 학원 하나 설립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은 그대로 이루어져 1950년 4월 10일에 성경 학원이 설립되었고 거기에서 영광스럽게 배추달 집사같은 순교자가 나왔다.
주 목사님의 기도는 이 땅에서 그가 눈 감기 전에 다 이루어졌다.
그의 일생에 한은 없다.
주 목사님은 기도의 사람이었고, 그 기도에 응답을 다 받은 복의 사람이었다.
남영환 목사는 수용일 밤 예배를 인도하시다가 주 목사님의 별세 소식을 들었다. 위천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던 백영희 전도사는 집회 삼일 째 되던 날 부고를 받고 울었다.
‘집회는 뒤로 미루어도 되는데····’
눈이 붓도록 백 전도사는 울었다.
“주님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지!”
주 목사님의 그 한마가로 가슴을 찡하게 때린다.
‘주님의 일을 그렇게 소중히 생각하시던 어른····’
백 전도사는 거창을 향해 달렸다.
5. 빛난 장례식
주 목사님의 별세소식은 부고에 실려 전국 교회에 배달되었다.
듣는 이마다 애석함에 눈시울을 적셨다.
장례는 7일장으로 경남 노회장으로 정하였다.
조문객들이 구름 떼처럼 밀려왔다. 하루 쌀 한가마니와 돼지 한 마리씩이 조문객들을 위해 제공이 되었다. 장례식까지 모든 금전 출납을 백영희 전도사와 조수옥 전도사가 맡았다.
노회 임원들이.
“노회장이니 조의금 들어오는 것은 모두 사모님께 드려 유족들의 생계를 돕도록 하고 장례식은 간단히 하자.”
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백영희 전도사는.
“아닙니다. 앞으로 유족들은 하나님께 맡기고 장례식을 거대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이 자녀들을 분명히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의인의 자손이 걸식하거나 못사는 법은 없습니다. 이번 장례를 통하여 한님께 더욱 영광을 돌리도록 합시다.”
말을 잘랐다.
조수옥 집사는 백전도사의 말에 덧붙여,
“그렇습니다. 조의금은 들어오는대로 다 씁시다. 장례식을 빛냅시다.”
하고 찬성을 했다.
“옳습니다. 그래야 합니다.”
주경순 집사가 다시 말을 받았다.
노회 임원들은 더 이상 우기지 못하고 모든 걸 주님께 맡기고 믿음으로 장례식을 이끌어 가기로 하였다.
조수옥 집사는 마산 인애원에 있던 광목 여러 필을 가지고 왔다. 또 거창 박애원에서 광목을 가지고 왔다. 그 광목으로 수십 벌의 두루막을 만들었다. 삼베로는 두건을 수없이 만들었다.
1951년 3월 29일.
장례식 날이 왔다. 전국 각지에서 교역자들과 교인들이 모여들었다. 모사들은 흰 두루막을 입고 두건을 쓰게 했다. 전도사들은 두건만 썼다.
발인식 예배가 끝나고 상여가 나갔다. 동네를 빠져 들 길에 들어섰다. 구름이 꽉 끼어 있는 하늘에서는 3월 하순인데 진눈개비가 슬슬 뿌리는 것이었다. 먼 산 중허리에 진나 밤 내린 눈이 그대로 쌓여있어 초봄인데도 겨울을 연상케 했다.
찬바람이 벌판을 쓸었다. 상여 앞에서 만사를 든 청년들이 줄을 지었고 뒤에는 흰 옷 입은 찬양대원들이 섰다. 상여 뒤에 유족들과 흰 두루막을 입은 목사님들이 줄을 지었다. 다음은 두건만 쓴 전도사들, 그리고 뭇 성도들이 줄을 이었다.
긴 장례의 행렬이었다. 거창이 생기고 처음있는 거대한 장례식이었다. 장례의 행렬을 바라보는 불신자들의 눈에서도 눈물이 고였다.
공동 묘지로 향하는 길이 사람으로 덮혔다. 이인재 전도사가 소리를 외쳤다.
“개선 장군이 들어가신다. 개선 장군이 들어가는 길이 휜히 트였구나!”
하관식 예배시에 이약신 목사는 독창을 했다.
“예수 나를 오라하네
예수 나를 오라하네
어디든지 주를 따라
주와 같이 같이 가려네.”
찬송은 초 봄의 싸늘한 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참석한 성도들의 귓가에 따뜻한 인정처럼 감격으로 소록소록 담겨졌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산 믿음 좋은 성도들의 장례는 그 장례식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법이다.
조객들과 거창 시민들로 산이 덮혔다. 그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산에서 마련한 음식만 해도 돼지 세 마리에 쌀 세가마니가 불에 익혔다. 밥 그릇, 국 그릇이 모자라 바가지를 사용하기까지 하였다. 거창 시민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거창이 생기고 처음이다!”
그럴 수 밖에.
주남선 목사야말로 거창이 생기고 처음 인물이었다. 이 이후, 또 다시 거창에 이런 인물이 태어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거창이 울고, 한국 교회가 소리내어 울어야 했다.
그 후 1973년 5월 15일, 자녀들의 정성에 의하여 거창 시내가 내다보이는 아담한 동산에 주 목사님의 묘소가 새로 마련되었다.
조각가 신춘범씨가 정성을 기우려 3개월 동안 파고 다듬어 십자가 묘비와 무덤을 덮는 돌ㄹ판을 만들었다.
대리석 십자가 묘비 뒷 면에는 다음의 성구가 새겨져 있어 묘소를 찾아오는 성도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해 준다.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마 13:13).
6. 그 뒷 이야기
한명동 목사님은 주 목사님의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와 한 주간이 지나돌고 상복을 벗지 않았다고 한다.
주 목사님의 별세는 그에게 너무나 큰 슬픔이었고 충격적인 것이었다. 주 목사님을 잃은 허전함은 시간이 흘러도 가시지 않고 오래토록 그의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정말 아까운 분을 잃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한 주가 동안 출입을 삼가고 주 목사님의 인간됨을 되새김하면서 기도와 명상을 보냈다. 뒷 날, 한명동 목사는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무 너무 서운했어! 지금도 주 목사님 생각하면 무엇인가 주는 것이 있어요. 신학교 이사회 관계로 그 먼 길을 여비 한 푼 드리지 못하는데도, 통지만 하면 꼬박꼬박 참석하셨으니! 그 충성심을 누가 따르겠습니까? 목탄차 타고 다니시며 너무 무리하셨어! 아무리 부산쪽으로 교회시무 이동 하시라고 해도 빙긋이 웃기만 하시고 응하시지 않았으니····· 참으로 모범스러운 목회자요, 충성된 주님의 일꾼이였어!”
남영환 목사는 주 목사 별세 후, 주 목사님 유언대로 거창읍 교회 위임 목사가 되었다.
그 해 7월 10일에 위임식을 가졌다. 백영희 전도사는 고려신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대단한 뜨거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 후 부산에서 복음을 전하였고, 지금은 서부교회 목사로 큰 교회를 이끌고 있다.
백영희 목사는 주 목사 별세 직전에 유물로 받은 성경을 지금도 보물처럼 간직하고 그 때 일을 종종 회상하고 있다.
주 목사님의 큰 아들 주경중씨는 주 목사님께서 1946년 9월 26일에 설립한 박애원 원장으로 지금까지 지내고 있다. 1953년 3월에는 거창 고등학교를 창설하고 재단 이상장이 되기도 하였다.
주 목사님의 둘째 아들 경도씨는 일찍이 일본에 들어가 있었고, 해방 후에도 일본에서 사업을 하였다. 지금도 재일 교포로 큰 사업체를 가지고 있다.
주 목사님의 딸 경순 집사는 부친 별세 후에도 동생들의 교육 뒷바라지를 위해 열심을 아끼지 않고 있다.
주 목사님 별세시 고등학생이던 아들 경효는 마산 고등학교 졸업하고 도일하여 일본 명치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나왔다.
그 후 주 경효씨는 서울 중앙교회 장로로 장립을 받아 교회를 봉사하고 있으며, 무역진흥공사, 체신부, 재무부, 경제담당 무임소장관 보좌관을 지냈고, 동국대학에서 강의도 맡았다.
정부 부처와 학계에 머물던 그는 한국 조폐공사 이사도 지냈으며, 지금은 한국 화재보험협회 감사로 일한다. 그는 유독 모친과 함께 부친 투옥 후 고생을 많이 하였기에 지금도 그 때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경세 씨는 마산 호산나원 원장으로 있다가 지금은 한국 화재보험협회 부산지부 과장으로 일하고 있다.
경은씨는 의사 윤창동 씨와 결혼하여 의사의 부인으로 다복하게 지내고 있다.
한편 주 목사님의 사모님 남술남 여사는 그 후 자녀들의 지극한 효성을 받으며 평안히 여생을 보냈다. 자녀들은 장성하여 가정을 가지고 사업체를 이끌어가면서 넉넉한 생활을 하게 되자, 서로 어머니를 모시려 하였다.
그러나 딸 주경순 집사가 혼자였기에 제일 만만히 지낼 수 있어 마산에 머물렸다.
일본에 있는 아들 경도씨가 돈을 보내어 어머니를 위해 아담한 2층 양옥집을 마련하였다. 그 곳에서 자녀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편안한 나날을 보냈다.
동경 올림픽대회 땐 경도씨의 주선으로 일본을 구경하였다.
육 남매 자녀들은 그들의 가정마다 ‘어머니의 방’을 마련해 두었다. 언제나 어머니가 오시면 그 방에 모시는 것이었다. 자녀들은 어머니를 서로 모시려고 선의의 쟁탈전까지 벌였다.
주경효 장로는 어머니가 서울 오시자 ‘어머니의 방’에 어머니를 모시고 안마도 해 드리며 노쇠하여 여윈 어머니 다리도 주물러 드리면서
“우리 어머니 세계최고 미인이다!”
하고 소리치며, 어린 자녀들과 함께 웃었다.
주 장로는 그의 자녀들이 보는 눈앞에서 어머니를 업고 이방 저방을 다니기도 했다. 이 광경을 본 주 장로의 중학생 아들이,
“아버지! 뒷날 우리도 아버지 어머니가 나이 많아지면 아버지 어머니가 할머니에게 해 드리는 것 만큼 해드리겠습니다.”
하고 환하게 웃는 것이었다.
효자 효녀는 유전인가 보다. 남 여사가 마산에서 노병으로 눕자, 일본에서 아들 경도씨가 비행기로 날아오고, 거창에서 큰 아들 경중씨와 지방의 자녀들이 급히 모여 들었고, 경효 장로는 서울에서 비행기로 내려왔다. 그리하여
남여사는 서울 성심병원에 입원시켜 치료했다.
남여사는 말년에 자녀들의 지극한 효성에 둘러싸여 호강을 하시다가 1973년 7월 24일 아침,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조용히 눈을 감았다.
7월 26일 오전 9시에 장례식이 거행되었고, 시신은 주 목사님의 유골이 묻혀 있는 거창읍 묘소의 대리석 십자가 아래에 나란히 안장되었다.
의인은 죽어 하늘에서 해와 같이 빛나고, 의인의 자손들은 땅 위에서 해와 같이 빛난다.
의인의 자손들은 땅위에서 오늘도 남기고 간 부모들의 신앙을 이야기하면서 자신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의 자녀들까지 의롭게 사라야 한다고 다짐을 한다. 세월이 흐르고 나면 인생은 가고 역사만 남는다.
인생이 인생으로 태어나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근본된 생을 살아야 할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지구가 존속하는 한 남아있을 역사에 아름답고 흐뭇한 기록을 수록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의롭게 살다가야 하지 않을까?
구원은 믿음으로만 얻는다.
그러나 현세의 축복과 내세의 상급은 의로운 생활의 결과인 것이다.
제17장
버릴 수 없는 이야기들
-낙수일화는 그 시기를 잘 측정할 수 없어 별도로 모았다-
1. 김중근 집사와 주일
거창읍 교회에 김중근 집사가 있었다. 그는 해방 후 트럭을 한 대 구입하여 운수업을 했다. 당시 거창군에서 트럭은 김 집사가 가진 것 한 대 뿐이었다.
어느 토요일, 김 집사는 부산으로 내려갔다가 거창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산 주 경순 집사 집에 들렀다. 주 모사님은 그 때, 몸이 편찮아 마산 딸 경순 집사 댁에서 좀 쉬고 있었다.
김 집사가 그 곳에 들렸을 때는 해가 기웃기웃 했다.
“목사님 가보겠습니다.”
김 집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 목사님은,
“김 집사님, 아무래도 자고 가야 하겠습니다. 해가 다 됐는데 지금 가면 잘못하다가 주일 범하겠어요.”
하고 만류하였다.
“안됩니다. 하룻밤 자면 손해가 얼마나 많은 줄 아십니까? 목사님 봉급 3배나 손해를 보게 될 겝니다.”
김 집사는 퉁명스러히 대꾸했다. 주 목사님은 그런 김 집사에게 말했다.
“김 집사님, 그래도 주일을 범하면 안됩니다. 주일을 범하면 더 많은 손해를 봐요. 육적, 영적 다 손해 보는 거야. 그러니 주일을 보고 가시오.”
허나 김 집사는 황망히 밖으로 나갔다. 김 집사는 거창으로 향하였다. 가다가 기어이 자동차 고장이 났다. 다음 날, 그러니까 주일 날 오후 늦게야 집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기어이 주일을 범한 김 집사는 주 모사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후회를 했지만 그땐 이미 늦었다. 그 후 김 집사는 막대한 손해를 보게 되어 두고 두고 주 목사님 이야기를 했다 한다.
2. 충성 겸손
임시노회나 정기노회는 부산에서 주로 모였다.
교통이 불편한 때인지라 거창에서 부산 나오는 일은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주 목사님은 불참한 일이 없었고, 별로 늦게 참석한 일이 없었다 한다.
손명복 목사님이 영도 교회에서 모인 임시노회에 일찍 참석했더니 벌써 주 목사님이 와 계셨다. 하도 놀라워,
“어떻게 이리 빨리 오셨습니까?”
손 목사님이 물으셨다.
“도라꾸로 왔어요. 걸어 나오는데 용케 도라꾸를 만나서 태워 주길래 빨리 왔지요.”
그 겸손과 충성된 모습을 26년이 지난 지금도 손 목사님은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하루는 손 목사님이 주 목사님께 이런 질문을 했다.
“목사님 생활비를 얼마나 받습니까?”
주 목사님은 피식 웃으면서,
“많이 받지요.”
말씀하는 그 입모습엔 무거운 자족이 두텁게 깔려 있었다. 한번도 주 목사님은 자신의 생활비에 대하여 말해 준 적이 없었다고 한다.
3. 심부름 다 해주고
주 목사님이 마산이나 부산으로 나가시는 날은 교인들과 지방 교역자들이 온갖 심부름을 다 맡겼다고 한다.
“목사님 성경 한 권 사다 주이소?”
“나도 예.”
“나는 성경 찬송 한 질 사다 주이소!”
“신 한 켤레 사다 주이소.”버선, 양말, 비누, 옷까지 부탁을 했다.
무리한 부탁을 받고도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고 맡아 주었다. 사가지고 돌아오셔서는 장바닥 같이 사온 물건들을 펴놓고는,
“이것이 아무개 집사 것.”
“이것은 누구 것.”
낱낱이 이름을 적어 본인들에게 돌려 주었다고 한다.
4. 흉내 내는 지방 교역자들
삼군 지방 전도사들은 주 목사님을 흠모한 나머지 그의 생활태도를 흉내 내기까지 했다 한다.
주 목사님은 가방을 항시 들고 다녔다. 가방을 오른편 겨드랑이에 끼고 다녔는데 전도사들 중에는 그대로 본 받은 이들이 많았다.
주 목사님이 식사를 하시다가 밥을 남겨 놓는 날이면, 즉각 나머지 밥을 먹어치우는 전도사도 있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주 목사님의 신앙 인격을 그대로 소유하고 싶은 한 염원에서였다.
주 목사님의 걸음 걸이, 앉는 모습, 심지어는 기도체까지 본받는 이들이 있었다. 이는 주 목사님의 은혜를 자신도 받아 보려는 사모의 정에서였다.
마치 엘리야의 은혜를 엘리사가 계승하려는 거룩한 욕심처럼, 지방 전도사들은 주 목사님의 뒤를 다투어 따랐다.
5. 대리 집회 인도
언제인가 그 시기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거창읍 교회에서 삼군 교회 제직 사경회를 연 때가 있었다.
강사(이대영 목사인 듯 함)가 오기는 왔으나 갑자기 편찮았다. 통지서를 내었으니 삼군(함양·거창·합천)에서 교역자를 위시하여 제직들이 모여들었다.
강사가 자리에 누었으니 어떻게 하겠는가?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주 목사님은 강사 목사님과 상의하였다.
강사 목사님은 주 목사님을 서시라고 부탁했다. 주 모사님은,
“그럼 제가 강사 목사님의 원고를 대신 전달하겠습니다. 준비 해 오신 설교 원고를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소용없는 일입니다. 도리어 어색할 뿐입니다. 사울 왕의 갑옷이 다윗에게 거추장스럽게 되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그냥 목사님의 것을 가지고 하십시오.”
강사 목사님의 말대로 주 목사님은 자신의 것으로 설교를 하였다. 그리고 그 밤부터 한 주간을 금식 철야 기도를 시작했다. 금식으로 계속 집회를 인도한 것이다. 놀라운 은혜가 내렸다. 백영희 목사님은 그 때 받은 바 그 은혜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나의 어린 신앙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강사를 오게 해 놓고, 대신 주 목사님을 세워 힘있는 증거를 하게 하셨을 것이라고요.”
6. 외유내강
주 목사님 사택에는 매일처럼 교역자들과 교인들이 들락거렸다. 그러나 주 목사님은 가난한 목사 생활 가운데서도 꼬박꼬박 대접을 했다.
어떤 땐 식량이 없어 밥을 짓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교인들이 알까봐 사모님은 빈 솥에 물을 붓고 물만 끓였다고 한다.
어느 목요일 오후, 강주선 전도사가 주 목사님 사택에 찾아왔다. 밤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그 밤을 함께 지냈다.
옛부터 시골에서는 잠을 잔 손님에게 아침밥을 먹여 보내는 것이 상례였다. 강 전도사는 일찍 떠날 것이었는데 실례가 될 것 같아 밥 때를 기다렸다.
밥상이 들어오는데 외 상이 들어오는 것이었다. 마음이 무거웠다. 주 목사님은 자신에게는 엄격하면서도 남에게 대하여는 한없이 부드러우신 외유내강의 인물이었다.
7. 인내의 의미
안동에 집회 인도로 가시는 길이었다. 부산에서 기차를 탔다. 그러나 기차는 떠날 줄을 몰랐다.
아침 8시에 기차를 탔는데 옛날이라 시간을 지키지 않았다. 기차는 죽치고 앉아 떠날 줄을 모른다. 함께 탄 한명동 목사님이 주 목사님께,
“목사님, 집으로 들어 가십시다. 이 기차 하는 꼴 보니 언제 떠날는지 모르겠군요.”
하고 말하자,
“날 염려하지 마시고 들어가십시오. 타고 있으면 언제인가는 떠나겠지요.”
그냥 주 목사님은 앉아서 기다렸다.
기차는 밤 늦게야 떠나게 되었다.
종일을 기차 안에서 한 마디의 불평도 없이 앉아서 견뎌낸 것이었다.
8. 저절로 머리고 숙여져
해방 직후 손양원 목사가 한참 부흥회를 인도하고 다닐 때의 일이다.
오종덕 목사는 어느 사석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이상한 일이 한가지 있단 말입니다. 부흥사로 전국을 누비며 다니는 손양원 목사는 만나도 별 그런 생각이 없는데, 주남선 목사를 대면하면 저절로 머리가 숙여지는 것이야.”
9. 마산 문창교회 집회 때
해방 후 주남선 목사님은 마산 문창 교회에서 손양원 목사님과 함께 집회를 인도하신 일이 있다.
윤봉기 전도사는 통지를 받고 먼저 문창 교회에 갔었다. 아직 주 목사님은 오시지 않았다. 윤 전도사는 구마산 역으로 주 목사님 마중을 나갔다.
기차에서 내리시는 주 목사님을 보는 순간 윤 전도사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출옥 후, 처음 대면이었다. 아직 옥고의 여독이 그냥 얼굴에 깔려 있는 초췌한 모습이었다.
윤 전도사는 주 목사님의 가방을 받으면서,
“목사님!”
하고 울먹였다.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 있었지만 나오지를 않았다. 주 목사님은 윤 전도사의 손을 꼭 쥐어 주시면서,
“윤 조사 참 반갑군!”말을 흐렸다.
“얼마나 고생이 많았습니까?”윤 전도사는 겨우 이 말 한마디로 하고 싶은 그 많은 말을 대신하였다. 주 목사님의 눈시울에 눈물이 번졌다.
“윤 조사, 난 감옥에서 하루도 윤 조사를 빼고 기도한 일이 없었어요. 어떤 땐 하루에 세 번이나 윤 조사 위해 기도하였지요.”
주 목사님은 눈 가에 번진 눈물을 손수건을 꺼내어 닦았다.
문창 교회에서의 집회엔 은혜가 많았다. 낮과 밤 집회를 손양원 목사님과 교대로 인도하였다. 집회 중 주 목사님은 금식을 하였다.
금식을 하시는 걸 안 윤 전도사가 목사님을 만났다.
“목사님, 감옥에서 고생을 하시고 아직 그 여독이 풀리지도 않았는데 또 금식을 하십니까?”
윤봉기 전도사의 말을 듣던 주 목사님은 빙그레 웃음을 얼굴에 담으면서,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한 마디도 설교를 할 수 없는게 내지요. 나는 내 자신을 잘 알기 때문에 전적 하나님께만 매달립니다. 금식은 기도를 위해서 하는 것이니까, 내가 금식하는 일에 과히 염려하지 마시오.”
주 목사님의 음성은 금식을 하는 사람 같잖게 처렁 처렁 맑았다.
집회에는 은혜가 넘쳤다. 마치는 날, 주 목사님의 얼굴엔 광채가 나는 듯 훤하였다. 금식을 한 표가 조금도 나지 않았다.
윤 전도사는 혼자 생각하였다.
‘이적이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저럴 수가 없는 것이다.’
윤 전도사는 더욱 주 목사님의 신앙을 부러워하였고, 자신도 주 목사님과 같은 능력의 사람이 되기를 갈망하였다.
10. 승리자를 모셔와야 한다.
해방 후 한국 교회들은 어지러웠다. 신사참배 문제로 지도자들은 권위를 잃고 강단에 서기마저 주저 주저 하였다.
경주 지방에 양화성 목사가 있었다. 경주 제일 교회 목사였다. 경동 노회장으로 유능한 붕이었다. 허나 시국 인식 문제로 해방이 되자 권위가 없어졌다. 양 목사는 윤 봉기 전도사를 만났다.
“지금에 와서 목회를 안 할 수도 없고 목회를 할려니 권위가 없고, 어쩔 수 없는 입장이외다. 허니 승리자를 모시고 와서 집회를 하므로써 모든 과거의 불미로움을 씻고 새 출발을 할 수 있게 될 것이 아니겠오. 윤 존사님은 주남선 목사님과 친한 사이이니 부디 우리 경주 지방으로 좀 모시고 오시기 바랍니다.”
윤 전도사는,
“내가 모시고 올 것이 아니라, 목사님이 가셔서 말씀을 해 본시지요.”
하고 양 목사를 바라보았다.
“아닙니다. 난 주 목사님을 모시고 올 면목이 없습니다. 윤 조사님이 수고를 좀 해 주십시오.”
양 목사는 윤 전도사를 세 번이나 찾아와 졸라댔다. 그 무렵 주남선 목사님은 영도 뒷산에서 집회를 인도하시고 거창에 돌아가 계셨다.
영도 뒷산에서는 십일간 집회를 인도하셨다. 교역자들과 장로들의 집회였다. 모두들 은혜를 받고,
“우리가 내려 앉자. 목사 장로들이 먼저 하나님 앞에 자복해야 한다.”
눈물 바다를 이루었다. 일 주일 집회를 끝내곤 장로들은 돌아가게 하고, 목사와 전도사들은 남아 계속 집회를 하였다. 마지막 삼 일 동안은 전체 목사와 전도사들이 금식하며 기도하였다.
주남선 목사님은 이 집회를 인도하시면서도 전 기간을 금식하였다. 집회를 끝마치고 거창으로 돌아온 주 목사님을 윤봉기 전도사가 찾아왔다. 윤전도사는,
“목사님, 피로하시겠지만 경주 지방 집회를 한 주간 허락하여 주십시오.”
간곡히 부탁하였다.
9월 중에 집회하기로 약속을 하였다.
경동 노회에서는 이 집회를 통하여 큰 회개 운동이 일어났다.
“우리가 다 내려 앉자.”
양화성 목사가 앞장을 섰다.
“두 달 동안, 강단에 서지 말고 자숙합시다.”
이렇게 그들은 신사참배 한 죄를 하나님 앞에 회개 자복하였다.
11. 궤변의 어느 장로
주 목사가 거창 경찰서 유치장에 구검되었을 때, 함께 구검된 장로가 있었다.
모진 고문에 견디지 못한 장로는 시국을 인식하겠다고 항복을 하고 석박이 되었다. 이 장로는 교회에 돌아와 교인들 앞에 설 면목이 없었지만 교묘한 말로서 자신을 변호한 것이다.
장로는 교인들 앞에서 비위살 좋게 말을 뱉았다.
“나는 교회를 생각하고 가정을 생각하여 시국을 인식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주 목사는 달라요. 어떻게 되었든 말았든, 자기가 편하면 된다는 그런 심보였습니다. 여러분! 교인을 돌아보지 않고 자기만 아는 그가 목사입니까? 나는 주 목사의 신앙을 의심합니다. 어째서 자기 혼자만 생각하고, 유치장에서 고집을 피우는 것입니까? 나는 교회를 위하고 가정을 위해서 이렇게 시국을 인식하고 나왔습니다. 신사참배 그것이 무엇이 대단한 것이라고 교회도 버리고 가정도 버리는 것입니까? 그런 사람은 천당에도 가지 못할 것입니다.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 우리 기독교의 사상이 아닙니까? 자기가 지옥으로 가드래도 다른 사람을 위하고 노력하고 격려해 주어야 하는 것이 우리 기독신자의 할 일 아니겠습니까?”
말이란 참 묘한 것이어서 아무리 잘못된 것이라도 변호하는 기술에 따라 옳게 보이는 법이다. 장로의 이야기를 들은 많은 교인들이 그 말에 긍정을 하였다. 계속 이 장로는 교인들을 찾아 다니며 이런 식으로 설득을 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올바른 신앙으로 소유한 신자들은 그의 잘못을 꾸짖었다.
“왜 그런 엉터리같은 말을 하고 다니는 거요? 시국을 인식하고 나왔으면 부끄러워 할 줄을 알아야 할 것이지, 그래 잘못을 정당화 하려는 것은 또 한가지 더 악을 행하는 일인 줄 모르십니까? 신사 참배는 계명을 어기는 일입니다. 그러니 목숨을 걸고도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10장 37절에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지 않는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하고 말씀하신 것 아닙니까?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어려움을 참고 고난을 겪고 계신 주 목사의 신앙을 의심하다니, 당신이야 말로 기독신자가 아닙니다!”
12. 어린이를 사랑하는 마음
주 목사님은 어린아이들을 자기 자녀 이상으로 사랑하였다. 거리에 나갈 땐 항시 손수건을 들고 나갔는데, 길 가에서 노는 어린이들의 코를 닦아 주고 눈곱을 일일이 다 Ep 주시는 것이었다.
어떤 땐, 손수건을 미쳐 준비하지 못하여 두루막 자락으로 아이들 코를 닦아주어 두루막 자락이 얼룩지기까지 하였다. 더러워진 손수건과 콧물로 얼룩진 두루막을 빨면서 부인이,
“세상에 남의 아이들 콧물까지 닦아 주는 사람이 어디있담.”
하고 푸념을 토하면,
“미안하오.”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주 목사님이 거리에 나서면 장난꾸러기 어린이들까지 깍듯이 인사를 했다. 주 목사님은 어린아이들을 그의 온유한 몸짓으로 교회에 인도하였다. 많은 어린이들이 주일이면 교회당으로 밀려와 말씀을 들었다.
13. 독립운동 유공자를 찾아서
마산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경효가 방학이 되어 집에 오면 아버지 주 목사님은 아들을 데리고 심방에 나서기도 하였다.
어느 겨울 방학 때였다. 경효는 주 목사님과 함께 심방길에 동행하였다. 냇가를 건널 때 외나무 다리에 올랐다.
옛날 시골의 시내는 보통으로 외나무 다리였다. 곡예사처럼 외나무를 밟고 건너야 했다. 경효는 뛰어가듯 다리를 건넜다. 허나 주 목사님은 몇 발자국 딛지 못해 그만 냇물에 빠지는 것이었다. 경효는 뛰어가 아버지를 부축하였다.
“아버지 왜 그러십니까?”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구나.”
주 목사님의 하체는 극히 힘이 없었다. 그 이유는 일경들의 고문에 하체가 멍들었고, 오랜 형무소 생활로 잃은 힘이 되돌아 오지 않아서 그러했던 것이다.
주 목사님은 함양군 서상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 부자로 사는 어떤 분의 집에 들려 혈색 좋은 노인과 긴 시간 담소하는 거시었다.
그 분도 3·1운동 당시 주 목사님과 함께 독립운동을 한 유지였다. 그 집에서 나와 오형선 장로의 집으로 갔다. 오 장로 부인이 자루에 밤을 한 되 가량 넣어 주어 경효는 가지고 오면서 신바람이 났다.
오 장로 역시 독립운동 유공자였다. 주 목사님은 시간이 나면 옛날이 그리워 독립운동 동지들을 만나서 담소를 나누곤 하였다.
14. 제비 같은 사람
주 목사님이 평양 형무소에서 옥고를 겪고 있던 1943년도의 일이었다. 전국에는 가뭄이 심했고, 특히 거창에는 논, 밭이 뜨거운 태양열에 타들고 있었다.
이때, 거창 거리의 불신자들 입에는 이상한 말이 나돌고 있었다.
“곡식에도 해를 주지 않고, 사람에게도 해를 주지 않는 제비같은 주남고 목사를 가두어 욕을 보이니 하늘이 노하지 않을 수 있나? 변고여! 이는 확실히 변고라고····”
“그러기 말이여, 이런 가뭄을 맞아도 싸지 싸!”
이렇게 가뭄을 주 목사님 박해로 인한 하늘의 노함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15. 죽도록 충성하라
주남선 목사님의 생활 표어는 ‘죽도록 충성하라’였다. 목사님은 이 표어를 교회당 안에 써 붙였다. 주 목사님은 그의 표어대로 평생을 충성으로 사시다가 가셨다.
참으로 죽도록 충성한 주님의 조잉다.
그 후, 이금도 목사님이 거창읍 교회를 시무하시게 되고, 이 표어를 교회당 화단 돌비에 새겨 넣었는데, 주 목사님 자녀들이 대리석 돌비에 이 표어를 새겨 세울 것을 의논하여 일을 추진 중에 있다.
16. 원수는 하나님이 갚으신다
주 목사님이 일경에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으신 것을 친히 목격한 자녀들은 분한 생각으로 마음에 의분이 솟아 올랐다.
‘이 원수를 어떻게 갚을까?’
그 생각으로 가슴이 꽉 메었다. 경찰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업혀 나와 집에서 치료를 받을 때, 자녀들은 너무 아버지의 모습이 처참하여 모두 울었다. 주 목사님은 어린 자녀들을 달래면서,
“울지 마라. 이것이 주님을 위하는 일이다. 주님을 위해 당하는 고생이기에 값있는 고생이니라.”
하고 말씀하셨다. 아직 신앙이 어린 자녀들은,
‘이렇게 안 믿으면 예수님을 못 믿는 것인가?’
생각하면서 아버지를 안타깝게 여겼다.
일본에 건너가 공부하던 주경순은 그곳에서도 조선 사람이란 이유에서 설움을 많이 받았다.
‘나라 없는 설움은 이렇게 큰 것이구나···’
가슴 깊이 맺혀졌다.
기숙사에 한국 학생 7명이 있었으나 고생을 견디지 못하여 5명은 되돌아가고 2명만 졸업을 하게 되었다.
주경순은 그곳에서 공부를 하면서도,
“비록 내가 여자의 몸이요, 너희 나라에서 공부는 할 망정 아버지의 원수는 꼭 갚고야 말 터이다!”
하고 굳게 다짐을 주었다.
그러나 일본에 대한 원수는 그들 자녀들의 손으로 갚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갚아 주셨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라고 하신 성경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17. 눈물의 사람
주 목사님의 기도에는 눈물이 있다. 언제나 그의 기도는 꾸밈이나 의식이 없고 눈물과 진실만이 있었다.
새벽기도 4시에 교회로 나가 아침 9시가 넘어서야 귀가하는데 그의 기도자리엔 항상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어 흘러 마루가 얼룩졌다.
교회당을 청소하는 사찰은 아예 주 목사님 기도자리 옆에 걸레를 준비해 두었다. 주 목사님의 눈물을 닦기 위한 특별 걸레였다.
교회에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그는 자신의 어떤 수단이나 꾀를 생각해 내지 않았다. 눈물의 기도로 하나님께 해결을 맡기는 것이었다.
밤을 밝히며 기도하였다. 금식을 하며 기도하였다. 금식은 간절히 기도 드리는데 좋은 효과를 주었다.
주 목사님을 바로 아는 성도들이나 후대의 사람들이 주 목사님의 눈물을 선지자 예레미야 같다고 한 것은 과장된 말이 결코 아니다.
주남선 목사 약력
1888. 9.14. 거창 동동 28번지에서 출생
1897. 서당에서 한학 수학
1908. 5. 기독교에 입신
1911. 9. 진주잠업실습소 졸업
1912. 6. 맹호은(호주선교사)선교사에게 수세
1914. 1. 거창읍 교회 집사
1919. 2. 진주 경남성경학원 졸업
1919. 2.28. 거창읍 교회 장로장립
1921. 3. 평양신학교 입학
1921. 9. 거창읍 교회 전도사 시무
1922. 8. 신한보(지하독립신문) 사건 군정서 의용병 모집과 군자금 모금운동 사건으 로 검거, 대구·진주 형무소에 구금
1924.12.29. 진주형무소에서 가출옥
1925. 3. 권서일 시작
1930. 평양신학교 졸업
1930. 9.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
1931. 2.22. 거창읍 교회 위임 목사
1940. 7.17.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구금
1941. 7.11. 평양형무소 입감
1945. 8.17. 조국해방과 함께 출옥
1945. 8. 경남노회 노회장 피선
1945. 9. 거창읍 교회 다시 시무
1946. 9.20. 고려신학교 설립초대이사장
1948.12. 고려고등학교 설립초대이사장
1950. 4.10. 거창성경학교 설립, 교장
1951. 3.23. 소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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