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권욱 석사논문 (천안대학교 Th.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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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논문의 내용
천안대학교의 신학석사학위(Th.M) 논문이며, 내용은 백영희신앙노선에서 성경을 배운 "이근영목사님"이 우리를 중생시킨 "아들의 생명"을 연구분석하였습니다. 이 논문을 /초기화면/연구실/일반자료/에 올리지 않고 /연구실/자료/에 올린 것은 이 논문 내용 중 백영희목사님의 1960년 전후 서울 삼각산기도원과의 관계를 알 수 있는 부분이 있고 또 논문 내용의 발원지를 백영희신앙노선으로 또렷하게 표현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목차
목 차
I. 서론-------------------------------------------------- 1
1. 연구 동기와 목적------------------------------------ 1
2. 연구방법과 범위------------------------------------- 3
II.「아들의 생명」에 대한 이근영의 신학------------------- 6
1. 이근영은 어떤 인물인가------------------------------ 6
2. 총공회 백영희 목사와의 관계------------------------- 14
3. 이근영 목사의 신학, 교회관, 목회관------------------ 19
III.「아들의 생명」에 대한 신학이론----------------------- 23
1.「아들의 생명」에 관계된 용어----------------------- 23
2.「아들의 생명」의 생출근원--------------------------- 32
3.「아들의 생명」에 대한 성경적 근거------------------- 34
4.「아들의 생명」과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성--------- 38
IV. 「아들의 생명」을 주장하는 신학의 특성---------------- 48
1. 신 론 - 성부 하나님의 사역------------------------- 50
2. 인간론 -「아들의 생명」과 인간의 본질적 요소 ------- 63
3. 구원론 -「아들의 생명」과 구원사역------------------ 67
4. 종말론 -「아들의 생명」과 죽음. 부활. 영생---------- 73
V. 이근영 신학에 대한 개혁주의적 이해--------------------- 74
1. 이근영 신학과 개혁주의 신학의 비교------------------ 75
2. 이근영 신학에 대한 개혁주의적 이해------------------ 79
3. 얻을 수 있는 장점----------------------------------- 87
VI. 결론-------------------------------------------------- 88
1. 요약------------------------------------------------ 88
2. 제언------------------------------------------------ 90
3."이근영목사님"에 대한 소개 (논문 중에서 일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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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영은 1934년 11월 18일 경기도 안성에서 부농의 2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남의 부러움을 받으면서 자랐다. 해방 후에는 한학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가져 한학에 대한 식견이 높았다. 그는 독립심이 강하여 비교적 일찍이 도시로 나와서 혼자서 생활하였다. 22살 되는 해인 1955년에 예수를 영접하였으며, 이때부터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새로운 사건들이 그의 삶에서 진행되었다.
도시에 나와 젊은 나이에 시작한 사업이 번창하였는데, 하나님이 그 환경을 바꾸어서 어려움을 당하게 하셨다. 이런 그의 경험은 마치 하나님이 모세를 훈련시키기 위해 미디안 광야로 보내신 것과 유사한 경험이었다. 하나님은 그를 향한 계획을 가지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들어서는 훈련을 시작하신 것이었다. 그런 환란 가운데서 굶어죽으려는 생각으로 산에 들어갔는데, 그는 그곳에서 신비한 영적 체험을 하게 된다. 이러한 경험을 겪으면서 그는 삼각산 제일 기도원에서 총무로 일하게 되고, 그곳에서 신앙의 지도자인 백영희 목사를 만나게 되었다.
이 만남으로 성경을 새롭게 연구하는 방법으로 연경을 3년간 하게 되어 성경 66권을 이해하는데 새로운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백영희 목사의 제자 훈련방법에 따라 믿음으로 돈을 버는 방법을 새롭게 경험하였다. 또 주일학교 전담 전도사로서 사역하면서 교회를 개척하게 된다. 교회를 개척하여 목회 하는 가운데 신학교에서 강의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는 그 당시 매주 월요일 목회자의 모임을 통하여 본인이 깨달은 성경내용을 목회자에게 가리켰는데, 특히 성부세계와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구원론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러한 연구를 20여년간 지속하였고, 이렇게 연구한 것을 책으로 만들기 위하여 준비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기독교 신학개론”(서정 출판사,1995년)이 있고, 미 발행 저서로 “교회론”, “율법과 복음”, “조직신학서(서론, 신론, 인간론, 구원론, 교회론), “구약 강해서 9권”(창세기, 룻기, 출애굽기, 아가서, 요나, 레위기, 학개, 요엘, 말라기), “신약 강해서 7권”(마태복음, 요한복음, 로마서, 고린도전서, 유다서, 요한1.2.3서, 요한계시록)등이 있다. 그 외 “성구사전”과 성경에 나타난 “동식물연구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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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믿기 전 어린 시절(1-21세까지)
이근영 목사는 용인 이씨 36대 손으로 1934년 11월 18일 경기도 안성에서 할아버지 5형제 중 둘째 할아버지의 2남 2녀의 장손으로 비교적 부농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첫째 할아버지가 자손이 없어 양자를 들였기 때문에 본인이 가문의 종손으로 역할 했다. 태어날 당시 고향에서는 소작 농사를 하는 동리에서 유일하게 자작 농사를 하는 집안에 태어났고, 머슴들을 두어서 농사를 지을 정도로 부자 집안이었다. 더구나 아버지가 동네의 이장으로서 마을의 일을 보았고, 그런 계기로 그의 집안은 마을에서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이렇게 그의 어릴 적 환경은 유복하고, 단란한 가정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활달하고 굳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동네아이들의 골목대장으로 애들하고 싸우거나 다투게 될 때에는 언제나 항복을 받을 때까지 싸우는 성격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인 11살에 해방이 되어 학교에 가지 않았고, 그 시기에 천자문 계몽편 명심보감등 2년간 한학을 배웠다. 이런 한학 공부를 통해서 어른을 섬기고 학문하는 자세에 대한 기초가 다져졌다. 그리고 그 후에 다시 초등학교 5학년에 입학하여 초등학교를 마쳤다. 졸업 후에는 안성시내에 있는 친척집에서 낮에는 일하고 야간에 학교가면서 중학교를 졸업하였는데,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낮에 일한 것이 아니고 혼자 공부하겠다는 그의 독립심의 결과였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고등학교에 가지 않고 한약국에서 일을 하면서 한약으로 치료하는 법과 약을 짓는 것을 배웠다. 17세 되는 해인 1950년에 6.25사변으로 인민군이 쳐들어올 때 미군이 한강대교를 폭파하고 두 번째로 평택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병기고를 폭격하고서 처음으로 민간인에게 폭격한 것이 안성시내였는데 그때 첫 폭탄 파편을 맞고 병원에서 1년간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완치가 덜 된 상태에서 퇴원하여 자신 스스로 사약(私藥)으로 치료한 것은 한약방에서 열심히 배운 것을 실제로 실험하는 첫 경험이 되었다.
그 후에 혼자서 살아보겠다는 결심으로 1952년인 19세 되던 해에는 대구로 가서 1년간 혼자서 생활을 하면서 객지 생활을 익혀갔다. 그리고 바로 영등포로 올라갔다. 전쟁 후였기 때문에 영등포에는 피난 갔던 사람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빈집이 많이 있었다. 그런 빈집에 머물면서,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레이션과 버리는 여러 가지 음식으로 식사를 해결하였다. 그러던 중 미군부대에 취직을 하게 되었고, 야간에는 영생고등공민학교를 다니면서 열심히 사는 법을 익혀 나갔다.
1955년인 22살에 미군 부대를 그만두고 효창동 숙명여대 입구에서 식당을 경영하는 여주인 강진수 집사님을 만나게 되어 그 집에서 함께 일하게 되었고, 그분의 전도로 22살에 처음으로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 2 ] 믿은 후 청년 시절 (22-32세까지)
처음 나가게 된 교회가 동대문구 용두동에 있는 수산장 교회(고원영 목사 시무)였다. 일년간 그 교회를 다니다가 합동측 평서 노회의 장로 다섯 분이 동대문 근처에 개척한 낙산교회(임정찬 목사)로 옮기게 되었다. 여기에서 세례를 받고, 주일학교 교사를 하면서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26살이 되는 해인 1959년에 평안교회(김윤창 목사 시무)에 위치한 총회야간신학(지금의 칼빈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가 3년간 일하던 식당에서 그만두고 그곳에서 쌓은 경험으로 용산 고등학교 근처인 후암동 로타리 옆에 이층집을 얻어 한식 양식 겸하는 식당을 차려 2년간 직접 운영하였다.
그 당시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이라 변변한 식당이 없었고, 또한 이근영은 경영에 남다른 솜씨를 발휘하여 주변에 소문이 나면서 근처에 있던 용산 고교와 숭실 고교 교사들이 100여명이 식당의 단골이 되었다. 도 그 식당 주변은 미군들을 상대하는 양공주들이 있는 좀 번화한 동네였고, 그에 따라 출입하는 손님이 많았다. 그러한 환경으로 식당은 그 당시 하루 쌀 3말, 밀가루 3포 돼지고기 소고기 50근 정도의 매출을 올리는 아주 잘되는 식당을 운영하였다. 신앙적으로도 신학교에 다니면서 열심히 신앙생활 하던 때라 믿음으로 장사한다는 신념으로 술도 팔지 않았다. 그때에 찹쌀로 만든 단술인 동동주가 처음 나와서 그것을 팔면 이윤이 많이 남고 단술이어서 술 취하는 것도 아니었고, 또 많은 사람들이 동동주를 찾아서 식당에서 동동주를 팔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술을 팔기 시작한 때부터 식당의 종업원들이 갑자기 도둑으로 변하여 자기를 속이고, 그 때문에 직원을 교체하여 보았지만 그들도 또 도둑으로 변하여서 자신이 속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러한 악순환이 계속되니 음식은 많이 팔려도 돈은 적게 들어왔고, 한 달에 한번씩 결제하던 교사들도 식대도 미루고 잘 주지 않았다. 또 식당 배달원들이 중도에서 돈을 가로채는 일들이 일어나면서 돈을 버는 일에 흥미를 잃게 되었다. 이런 일들이 겹치자 사람들이 미워지며 삶의 의욕이 상실되어갔다. 결국 식당을 그만두고 신학교도 2년 중퇴하고, 그 길로 금식 기도나 하다가 죽으려는 생각으로 삼각산 제일 기도원 윗 골짜기에 있는 바위굴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가 1960년도 겨울이었다.
삼각산 바위 밑 굴에 들어가 6개월 동안 머물면서, 방언기도와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된다. 사람을 보면 그 사람 속의 악한 마음이 보이고, 초목의 새순이 자라나는 소리와 이름 모를 작은 곤충의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음식은 얼마동안 이든지 먹지 않고 있다가 무엇이나 먹고 싶은 생각이 나면, 누구를 통해서 라도 먹을 것을 가지고 와서 먹게 되었다. 또한 말씀의 은혜도 체험하게 되는데, 성경은 한 절 한 절을 읽을 때마다 환상으로 그림책처럼 파노라마로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이해할 수 있도록 깨우쳐주는 경험을 하게 된다. 며칠씩 먹지 않아도 배고픔도 몰랐고, 몇 날이 지났는지 모르며, 겨울에는 몸을 뜨겁게 하고 여름에는 몸을 차갑게 하는 것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 어떤 분이 찾아올 것을 미리 알 수 있는 그런 능력과 그가 와서 무슨 말을 할 것인지도 알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이 생겼으며, 산을 오르고 내려가는 것도 마음먹은 대로 순식간에 움직여지는 도인과 같은 능력을 체험하게 된다.
이런 소문이 나면서 삼각산에서 제일 큰 기도원인 제일기도원-그 당시 용문산 기도원 다음으로 컸음-에서 일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기도원에서 총무로 2년간 일하게 되었다. 오전에는 박신출 원장이 설교제목을 주면 거기에 맡는 성경구절을 찾아서 설교원고를 작성하였으며, 오후에는 기도원 전체를 관리하는 일을 하였는데, 기도원의 규모가 대 강단이 120평 정도이고 소강당은 30평 규모이며 숙소 50여개와 30여 평의 원장사택을 포함하여 1000여 평에 달하는 여러 시설의 관리보수와 식당관리, 숙소 배정과 퇴실, 외부손님 접객, 기도원의 개인 집회 승인 결정 등 기도원 전체의 살림살이를 하였으며 저녁에는 7시부터 시작하는 집회를 인도하고, 밤 10시 이후에는 산에 가서 새벽 4시까지 기도한 후 4시30분 새벽기도 인도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바쁘게 생활하는 중에 어떤 권사님의 요청에 의해서 처음으로 경기도 미금면 이패리 미금 교회를 개척하여 1년 동안 30명 교인으로 목회 하다가 다시 제일기도원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돌아와서 6개월 후에 부산 서부교회 시무 하는 백영희 목사님이 삼각산 집회를 제일기도원에서 하게 되어 총무로서 집회 장소를 빌려주면서 집회에 오시는 목사님의 설교를 많이 들었는데 백목사의 설교는 남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쉬는 시간에 평소에 의문 나던 성경의 난해 절에 대하여 질문하였는데 시원하게 해결해주었으며 영안이 열려있음을 알게 되었다. 백목사의 지도 받기를 간청하여 승낙을 얻어서 6개월을 기도원에 있으면서 지도를 받게 되었다. 지도를 받으면서 처음에 한 것이 성경을 연구하는 연경을 시켰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성경 1장을 읽고 첫째, 그 장의 내용을 요약하고 제목을 정하고 둘째, 3-4항목의 대지를 정하고 셋째, 그 내용에 대하여 자신이 깨달은 것과 고쳐야할 것을 기록하고 넷째, 같은 방법으로 먼저 쓴 것은 보지 않고 8번 쓰게 하고 다섯째, 8가지를 비교검토 하여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원고에 써서 제출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연경을 하루 8장을 하게 하고 구약과 신약을 격주로 하게 하였는데 이 양은 너무나 많은 양이었으나 꾸준히 잘 해 나갔으며, 그렇게 연경을 한 것을 일주일분씩을 모아 백영희 목사에게 보내면 몇 주 분량을 모아서 평가를 해서 보내주었다. 이렇게 6개월이 지난 후에 제일기도원을 그만두고 1963년도 봄에 부산 서부교회로 내려갔다. 서부교회에서도 2년간 주일학교 (학생 600 여명과 교사 40여명의) 전담 전도사로 있으면서 연경을 계속하였다. 처음 6개월은 아침 먹고 산에 가서 연경만 전념 하게 하였고, 6개월 후에는 낮에는 일을 하라고 하여 경남 미술 교재사에 입사하여 한 학기 동안 외판원을 하였다. 그 경험을 살려 경남 미술 교재사를 물려받아 1년간 사업을 하게 하였으며 밤에는 계속 연경을 했다.
[ 3 ] 목회시작 후 장년시절(32-현재까지)
1965년도에 들어서면서 경남 남해 고현면 도마리의 도마교회로 파송을 받아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2년 간 목회를 하다가 1967년도에 서울 합정동 교회 개척 당시 백영익 목사를 도와 2년 간 교회당 건축을 하면서 학생회를 지도하였다. 1969년도에 신림3동에 위치한 난곡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 난곡교회에서 10년간 목회하면서 재적 170여명 출석 120여명으로 목회하면서 목사가 되기 위하여 1970년에 로고스 신학교에 입학하여 1973년 6월 15일 졸업(제3회)을 하였다. 그 후 1975년 고신 대학원에 입학하였으며, 그 해에 고신 반 고소 서울 노회 전신인 서울 공의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1978년 2월 28일 고신 대학원을 제 32회로 졸업하였다.
1979년도에 다시 서초동에 합정동 교회(부산 서부교회 담임 백영희목사의 친동생인 백영익목사 시무)에서 개척한 서정교회로 옮겨가서 목회를 시작하였는데 교인은 한명도 없었다. 그 교회에서 5년간 목회하면서 재적 150여명에 출석 100여명교회로 성장하였다. 이때부터 신학생 20여명이 모여 공부하는 월요공부를 시작하였고, 매주 월요일에 3시간동안 성경에 대한 전반적인 공부를 하였다. 이렇게 목회를 하면서 신학교를 하고싶은 욕망에서 1984년도에 수원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3년간 목회를 하는 동안 중앙신학교에서 조직신학 교수로 3년간 신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으며, 또 월요공부 대상을 신학생에서 목회자로 바꾸어서 하게 되었다. 서울 상도동에 위치한 로고스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강의하기 위하여 1987년에는 교회를 또다시 영등포구 대림동으로 이전하였다. 이 교회에 있을 때부터 성경을 한절 한절을 강해 설교를 녹음하기 시작하여 현재까지 주일 오전 오후 수요일 설교를 녹음하여 그 테이프를 보유하고 있으며, 겸하여 신구약을 주경식으로 강해하여 원고를 쓰기 시작하였다.
1991년에 로고스 신학교 이사장으로 취임하였으며, 1996년에는 서울 고려 신학원에서 조직신학 교수로 강의하였으며, 1996년 9월 9일 고신개혁 총회장으로 취임하였으며, 1998년에 서울 교려 신학원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리고 수원에서부터 매년 여름과 겨울에 3박4일 일정으로 서울, 경기도 강원도 소재 기도원에서 하루 4차례 10시간 정도(새벽, 오전 오후 저녁)로 집중강의를 하였고, 지금까지도 계속하고 있다. 또한 1984년부터 목회자 중심으로 시작한 월요성경공부를 2001년부터는 평신도로 바꾸었으며 교회를 안양으로 옮긴 후에는 교회를 신축하고 월요성경공부를 현재까지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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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 백영희 목사의 와의 만남
1) 백영희 목사는 어떤 분인가
1910년 7월29일 경남 거창에서 출생하여 27세에 복음을 받고 30세에 목회를 시작하였다. 일제 하의 신사참배와 6.25동란 점령치하의 환란을 이기고 수복직후인 1952년 이래로 부산 서부교회에서 38년간 목회를 하였다. 영감의 설교로 알려진 능력의 예배설교로 교사들을 길러 세계 최대의 주일학교를 만들었으며, 교사를 목회자로 길러 120여개의 교회를 개척하여 예수교 장로회 한국 총공회를 이루었다. 1957년 이래로 33년 간 거창. 대구의 산상 집회에는 2만 여명이 참석하였다. 매주 11회 이상 되는 예배 중에 했던 설교가 182권의 목회 설교록으로 출간되었다. 1989년 8월 27일, 그는 평소에 설교하다 설교단상에서 순교하기를 원한 그의 소원대로 1989년 8월 27일 새벽예배 설교도중에 괴한의 칼에 찔려 순교하였다. 상세한 그의 성장과정과 신앙과정 그리고 목회생활은 총공회 홈페이지인 www.pkist.net에서 백영희 란에서 볼 수 있다.
2) 백영희 목사와의 만남
이근영의 생애에서 언급했듯이 22살에 예수님을 영접한 후 계속 신앙생활과 사업을 열심히 하던 중 사업의 기울어짐으로 스스로 굶어 죽으려고 올라갔던 삼각산에서 영적인 체험을 하고 생활하던 중 제일기도원의 원장의 요청으로 기도원의 총무로 있을 당시인 1962년도 봄에 백영희 목사의 산상집회 장소를 빌려주면서 만나게 되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백영희 목사님의 지도를 받게 되었으며 연경으로 지도를 받은 지 6개월이 지나서는 삼각산 제일기도원 떠나 1963년에 백영희 목사가 시무 하는 서부교회로 옮겨가서 가까이에서 지도를 받았다. 3년여의 기간동안 연경은 물론 장사하는 일을 시작하여 사업을 했고, 주일학교 부장으로 영성을 길러가던 중 1965년도에 남해에서 단독목회를 하게 되었다. 1979년 서정교회에 담임하기까지 약 5년간 백영희 목사님의 신앙의 영향을 받으면서 좀더 깊은 세계인 성부세계와 생명세계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 4 ] 백영희 목사의 목회자료
백영희 목사의 고향인 거창에서의 11간의 목회생활과 부산 서부교회에서의 37년간의 설교록이 182권이 있으며, 목회자료를 연구하는 기관이 두 곳이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하여 연구하는 개인 및 연구단체가 세 곳이 있다.
이 외에도 연구서적과 연구논문 그리고 사전류가 있다. 1979부터 1989년까지 백목사 설교를 녹음한 녹음테이프가 5,000개정도와 영상물이 있으며, 182권의 설교록을 CD로 제작판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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