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건설구원 반대론 - 제7장 상급이 없다면 + 부록
제 7 장
상급이 없다면 신앙의 소망과 목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드리는 권면과 위로
7
하늘나라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차서 인간의 공로나 공력은 그 영광에 묻히고 말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은 현실의 지상적 문제임과 동시에 영원한 하늘나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상급이 없다고 염려하는 신자들에게 권면과 위로를 드립니다.
권면과 위로
결론을 내리면서 상급을 기대했던 성도들에게 권면과 위로를 드립니다. 혹시 여러분은 깊은 밤 어딘가 알 수 없는 미로의 골짜기를 밤새 걸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러나 조금도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때가 되면 아침의 밝은 태양이 모든 어두움을 몰아내고 미로의 골짜기로부터 방향을 제시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하늘나라의 상급과 무상급에 대한 어두운 골짜기를 헤맨 것 같습니다만 이젠 지난밤 미로의 경험이 소망의 세계로 전환될 것입니다.
6장까지의 긴 내용은 완벽한 무상급론의 완결점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 거의 우리의 인식 범위에서 이해가 될 것이라고 믿어집니다. 하늘나라와 우리의 상급은 거의 각자의 인식에 따라 견해를 달라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인본주의의 야망과 요구로는 전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뒤집어 놓을 수 없을 것이므로 하늘나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합니다.
인식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어느 모임에서 나는 철학교수에게 인식론에 대하여 질문을 했습니다.
“나는 철학 가운데 인식론에 대하여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하여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하여 그가 확실한 답변을 하지 못함을 보고 나는 아쉬워했습니다. 인식론을 다른 말로 바꾸면 기독교 안에서는 영성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성이란 하나님의 성령이 각자의 심령에 들어가는 형태를 말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해석의 정당한 법칙을 경과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의미도 줄 수 없습니다. 흔히 우리는 하늘나라를 우리가 생각하는 지상적 개념으로 추리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절대로 많다와 적다, 크다와 작다, 길다와 짧다 등으로 비교될 수 없는 곳입니다.
또한 하늘나라는 개개인의 관계에서 대립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정말 하늘나라에서 대립이나 차별이 있다면 진정한 하늘나라가 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철학용어를 빌린다면, 이원론 또는 다원론에 입각한 하늘나라는 있을 수 없음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이제 하늘나라의 영광에 대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칼빈은 하늘나라의 상급이나 공로에 대하여 우리 인간에게는 전혀 자격이 없음을 말하면서도 그 영광은 각자가 다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것마저도 부당한 말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의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이해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영광을 계시하는 분이십니다. 이 영광은 택한 백성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시내산에 이르렀을 때 모세를 통하여 이 산에 회집을 시켰습니다. 그때 산 꼭대기에는 구름으로 덮였습니다. 성경의 구름이나 무지개 등은 자연 조건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육일 동안 산을 가리더니 제 칠일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니라” (출 24:16).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현시안적인 계시적 표현은 구름을 통한 영광이었습니다. 영광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카보트’이며 문자적인 의미는 ‘무겁다’, 즉 하나님의 영광이 구름으로 표현되어 무겁게 드리워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시내산에서 그의 백성들에게 알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또 가나안 땅을 향해가는 백성들이 광야에 통과할 때 영광의 구름이 성막과 동행했습니다. 그리고 시온산 위에 솔로몬의 성전이 봉헌되던 날에도 이 구름이 나타났습니다.
역대하 5:13-14을 보면 “그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 속에 그 백성들은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렸습니다.
신약에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영적 임재를 통하여 자신의 영광을 계속 나타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영광이 머무는 곳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드리워진 영광의 본질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탈취할 수 없습니다. 또 소유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합니다. ‘돌린다’는 이 말 속에는 기본 전치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광으로 나타내어 주시면 곧 그것을 되돌려 드린다는 말입니다.
하늘나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리도전서 15:41의 말씀처럼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라고 하여 영광이 우리의 전유물적인 의미를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의존하여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며, 바로 그곳은 하나님과 우리 인간이 공유하는 기쁨의 곳입니다.
하늘나라에서 과연 상을 받을 것입니까? 스스로를 돌이켜보십시오. 하늘나라에서 면류관을 쓸 것입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착용하고 있는 옷이나 구두도 필요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하늘나라는 토탈 패션가게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 상이 없어 염려합니까? 전혀 염려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러한 염려가 하늘나라에까지 그대로 옮겨진다면 하늘나라로서의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는 그렇게 유치한 상 때문에 존재하는 곳이 아닙니다.
마지막 권면과 위로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상을 받기 위해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의 신앙이 선행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행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누가복음 17:7-10에서 종에 대한 겸손을 교훈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고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고서도 종으로서 의무를 준행했을 뿐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함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것은 현재 우리들의 신분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잃어버린 양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 또는 통치를 경험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겸손이 공로가 되어서가 아니라 단지 그러한 하늘나라를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우리의 것인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바울의 서신에 나타나 있는 사역적 용어로 우리도 즐겨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로마서 8장이나 갈라디아서 4장에는 아들의 명분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하나님 앞에 종이 되기를 원합니까, 아니면 아들이 되기를 원합니까? 이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과연 여러분은 딜레마에 빠질 필요가 있을까요? 이 두 가지 신분 가운데 하나를 택할 이유가 있다면 당연히 아들의 신분을 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14-17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종의 내용이 어떻든 간에 아들에 대한 신분은 아버지의 후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의 신분을 주셨습니다. 하늘나라의 모든 영광과 기쁨을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릴 수 있게 해주신 것입니다.
종은 종으로서의 사역적 내용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아무리 수고를 해도 종에게는 돌아올 분깃이 없고 다만 주인이 허락했을 때만 부분적으로 차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갈라디아서 4:4-7에 “때가 차매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도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후사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했는데, 이것은 율법과 그리스도를 두고 율법 아래에서는 종이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님의 아들 되었음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어떤 내용의 종이든 종은 어디까지나 종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하늘나라의 그 모든 것을 그리스도로 하여금 공유하도록 하셨습니다. 어느 부분도 따로 남겨 두시거나 아니면 부족한 것이 있어 미래를 위하여 비축도 할 필요가 없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다 주셨습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종이었지만 그리스도로 하여금 아들의 신분을 얻었는데도 다시 종의 신분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이것은 사역적 면을 고려하지 아니한 표현입니다.
하늘나라에서 다른 사람보다 더 좋고 더 많은 상을 받겠다는 것은 죄악의 본질에서 생산되는 열매입니다. 이러한 지상적 개념이 하늘나라에까지 그대로 적용된다면 영원한 하늘나라도 별수없이 죄악이 가득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상급이나 상급의 등차를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같이 생각되지만 진정 지혜로운 하늘나라의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하는 아들의 신분임을 깊이 생각하고 감사드려야 할 것입니다.
보상과 은혜
나는 이제 레드 (G.E.Ladd)의 말을 빌려 ‘보상과 은혜’라는 제목으로 보완하려 합니다.
예수님의 교훈들 중에서 여러 구절들이 하나님 나라의 축복은 보상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사상은 공적과 보상의 교리를 상당히 중요시하였고, 어떤 면으로는 이것이 예수님의 교훈에서도 마찬가지로 보인 듯합니다. 장차 핍박에 대한 상과 (마 5:12), 원수사랑에 대한 상 (마 5:46), 순전한 마음으로 구제한 상 (마 6:4), 그리고 금식에 대한 상 (마 6:18) 등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주인과 품꾼 또는 종의 관계입니다. (마 20:1-16; 24:45-51; 25:14-30)
상은 때때로 행한 대로 엄격하게 시행되는 것 같고 (마 5:7; 10:32, 41이하; 25:29), 보상도 때때로 의무를 수행한 정도에 따라서 약속되며 (마 5:19; 18:1-4, 막 9:41, 눅 19:17, 19), 벌도 이와 마찬가지로 측정됩니다 (마 10:15; 11:22, 24, 눅 12:49 이하).
이와 같은 구절들 속에서 예수님의 교훈은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공적 개념과 밀착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유대적인 개념에 의하면, 상은 양적으로 지불되는 보수였습니다.
그러나 보상에 관한 교훈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밝혀주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상에 대하여 언급하셨지만 공적의 윤리를 주장한 적은 없습니다. 신실함은 상 받을 것을 생각하고 실천되어서는 안됩니다. 상 자체는 전적으로 은혜에 속합니다. 상에 대하여 언급된 비유들은 결국 모든 상이 은혜의 문제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많은 신실성을 실천하였을지라도, 그는 아무것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의무를 행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눅 17:7-10). 일한 결과와는 상관없이 신실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상도 있습니다 (마 25:21, 23). 그 보상은 하나님의 나라 자체입니다 (마 5:3, 10).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예비한 자들에게 주실 것입니다 (마 20:23; 25:34). 심지어 봉사할 수 있는 기회까지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마 25:14 이하).
따라서 상은 공적과 관계없이 자유롭게 주어지는 은혜이기 때문에, 봉사의 정도에 비례하지 않습니다 (마 19:29; 24:47; 25:21, 23, 눅 7:48; 12:37).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찾아 갈구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눅 12:31).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변호에 의한 것이지 인간의 경건한 행위 때문이 아닙니다 (눅 18:9-14).
관대한 이 은헤의 선물은 소경, 앉은뱅이, 문둥이, 귀머거리를 고치시고 죽은자를 살리시며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 하는 일에 의하여 예시됩니다 (마 11:5). 포도원에서 일하는 품꾼들도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받아야 할 품삯입니다.
이러한 교훈과 관련하여 볼 때, 우리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교훈에 순종한 대가로 주어지는 보상이라고 결론지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전적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적인 선물일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자신을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내 맡기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현재적인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로서 주어질 것입니다.
부록
하늘 나라 상급에 대한 설문조사
부록
하늘나라 상급에 대한 설문 조사
하늘나라에서 상급이 있다는 주장은 어느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목회자 3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의 결과입니다. 불충분한 통계학의 모순을 제거하기 위해 가능한 설문 조사 내용을 가장 적절한 순서대로 나열했습니다.
이 설문은 모두 18문항으로 구성되었으며, 전국 각 지역에서 모인 목회자들의 어느 모임에서 즉시 이루어진 설문 통계이므로 정확하리라 확신하며, 편견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100분율을 기준으로 하여 10%이하는 편의상 반올림하여 처리했습니다.
제 1문항
문 : 하늘나라에 상급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답 : 여기에 대한 답변은 100%가 ‘있다’로 답했습니다. 제 1문항의 ‘있다’라는 대답은 제 10문항과 제 11문항에서 모순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제 10문항과 제 11문항에서 다시 한번 검토하겠습니다.
제 2문항
문 : 상급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누구로부터 그 사실을 들었습니까?
답 : 이 문항의 대답에서 50%는 목회자로부터이며, ‘스스로’가 40%, 그리고 무응답이 10% 였습니다.
제 3문항
문 :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구체적으로 무슨 상급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답 : 이 문항은 응답자들의 주관적 대답이었으므로 소위 5대 ‘면류관’이 50%였으며, 그 다음 ‘믿음에 대한 행실’이라는 대답이 10%, ‘성경대로’가 10%, 그리고 무응답이 10%였습니다. 이러한 대답 중 ‘면류관’이나 ‘믿음에 대한 행실’은 흔히 교회 안에 아무런 신학적 배경이 없는 통례적인 해석의 인식으로 생각됩니다.
‘면류관’을 하늘나라 상급의 통칭으로 생각하는 이들은 제 6문항인 ‘면류관을 쓴다면 옷을 입거나 구두도 신는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문항에서 ‘그렇지 않다’는 응답자가 50%, ‘그렇다’가 40%, 그리고 무응답자가 10%로서 다소 장난스런 질문이지만 확신이 없는 대답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또 ‘면류관’은 쓴다고 하면서도 ‘그렇지 않다’라는 대답도 모순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제 4문항
문 : 상급에 대한 말씀이 성경에 나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답 : 이 문항의 대답은 ‘있다’가 90%, 무응답자가 10%였습니다.
제 5문항
문 : 하늘나라에서 면류관을 쓴다면 어떤 면류관을 쓰고 싶습니까?
답 : 이 문항은 하늘나라의 상급 중 최대 최고의 상급으로 5대 면류관(생명, 의, 영광, 자랑, 썩지 않는)에 100% 대답을 했습니다.
제 6문항
문 : 면류관을 쓴다면 옷을 입거나 구두도 신는다고 생각하십니까?
답 : 이 문항은 제 3문항을 참고하기 바랍니다.
제 7문항
문 : 살아가면서 불평등한 현실 때문에 고민한 적이 있습니까?
답 : 이 문항은 ‘있다’가 80%, ‘없다’가 20%였습니다. 이 문항의 의도는 현실 세상에서도 불평등하다면 많은 갈등과 어려움으로 하늘나라가 될 수 없다는 결론이 주어지는데, 이것은 제 10문항과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 8문항
문 : 불평등한 현실 때문에 고민한 적이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답 : 이 문항은 ‘정치나 사회구조’가 80%였고, 무응답이 20%였습니다.
제 9문항
문 : 이러한 불평등이 현실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답 : 이 문항은 ‘없다’가 50%, 그리고 ‘어느 정도 있을 수 있다’가 50%로 현실적으로는 불평등의 요소가 제거되기 어렵거나 좀더 평등의 사회가 될 수 있다는 심리적 바람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 8, 9문항은 결국 제 10문항을 의도로 했기 때문에 다음 문항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제 10문항
문 : 만일 하늘나라에도 불평등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답 : 이 문항은 ‘있을 수 없다’가 60%이며, ‘별 상관없다’가 40%였습니다. 그렇다면 제 1문항에서 ‘하늘나라에서 상급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에서 100% ‘상급이 있다’고 한 것에 대한 모순된 대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상급이 있다면 개인마다 등차가 있을 것인데, 그렇다면 지상적 인식에서 상급이 많은 자와 적은 자 사이에 시비와 갈등이 생길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또 ‘별 상관이 없다’는 것은 신학적 해석을 근거로 한 답변이 아닌 모순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제 11문항
문 : 자신은 관연 하늘나라에서 상을 받을 만한 공로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답 : 이 문항은 ‘있다’가 40%, ‘없다’가 50%, 그리고 ‘잘 모르겠다’가 105였습니다. 우선 하늘나라에서 상을 받을 만한 공로가 ‘있다’라고 응답한 40%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공로로 구원을 받았다는 구원의 문제 외에 또 다른 자신의 공로를 세울 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 하고 있는 것입니다.
흔히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럴듯한데, 그것은 자신은 공로를 내세울 수 없지만 우리의 행위 속에 하나님 나름대로의 공로의 판단 기준이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혀 없다’는 50%의 응답자는 제 1문항의 ‘하늘나라에서 상급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내용과 상반된 대답을 함으로 설문 내용의 응답에 대한 일관성이 없다는 데서 많은 목회자들의 성경관과 신학관이 정립되지 못했음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제 12문항
문 : 하늘나라에서 상이 없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답 : 이 문항에서 ‘실망한다’가 10%, ‘실망하지 않는다’가 10%, 그리고 ‘상관없다’가 80% 였습니다.
제 14문항
문 : 상이 있다면 언제 받는다고 생각하십니까?
답 : 이 문항의 응답은 ‘영원한 하늘나라’가 90%, 그리고 ‘최후의 심판 때’가 10%였습니다. 이러한 응답은 ‘최후 심판때’와 ‘영원한 하늘나라’에 대한 확실한 시간적 구분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간주되며, 구원과 상급이 심리적으로 더 지배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 15문항
문 : 당신은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아들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답 : 이 문항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겠다는 것이 100%였습니다. 심리적으로 유도한다는 입장에서 1. 종, 2. 하나님의 아들, 3. 잘 모르겠다 라고 했는데 모두 2번에 응답했습니다. 이 문항은 제 10문항을 보면 더 확실해 질 것입니다.
제 16문항
문 :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과연 상을 원하겠습니까? 아니면 아버지의 후사가 되어 하늘나라에서 상속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답 : 이 문항은 응답자가 100%가 아들로서 상속을 원했습니다.
제 17문항
문 : 상속은 아버지의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을 말하는데, 그 외에 다른 것이 필요합니까?
답 : 이 문항 역시 응답자의 100%가 상속 외에 ‘필요 없다’라고 대답함으로 상급의 유무에 대한 상반된 모순을 나타내며, 제 15, 16, 17 문항에서 하늘나라에서는 우리의 공로나 상급이 없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상속을 받는데, 사유가 아닌 공유의 의미가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제 18문항
문 : 하늘나라에서 개인 소유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답 : 이 문항에서 ‘가능하다’가 30%, ‘불가능하다’가 70%였습니다.
대체적으로 위의 18문항에서 대답한 내용을 보면 하늘나라와 상급에 대한 신학적인 재해석이 요구되며, 응답자들의 일관성이 없는 상급의 이해는 우리의 모두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경우라도 가능하다면, 하늘나라에서 상급이 ‘있다 또는 ’없다‘라는 상반된 성격 해석에 따른 공개 강좌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표시할 내용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