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건설구원 반대론 - 제5장 하늘나라와 우리의 공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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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하늘나라에서 상급이 없다면 하늘의 소망이나 기쁨, 그리고 현재의 세상에서 주의 일을 할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자들을 주위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대체적으로 하늘의 상급을 상상할 때 터무니 없는 물질적 보상의 개념으로 간주하려 합니다.
하늘나라의 무상급론에 대한 반론자들의 내용
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하늘나라의 무상급론에 대한 반론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반론에 조금도 염려치 안흔 것은 성경이 말하는 확실한 내용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체적으로 목회자들이나 평신도들은 하늘나라에서 우리가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지상적 개념의 상급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간절히 갈망하며 가지기를 원하는 것처럼 공로보상을 물질적 개념으로 이미 고정되거나 확정적 사실로 믿고 기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제1장에서 제4장까지 많은 성경구절을 인용하여 해석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불충분한 부분을 보충정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되어 재정리하겠습니다.
학교에서 강의하던 중 나는 몇몇 학생들로부터 무상급론에 대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 질문은 단지 상급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가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상급이 없으면 무슨 소망으로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을 할 것이냐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는 신앙입니다.
또 어떤 이는 “하늘나라에서 왜 상급이 없겠느냐? 성경에 죽도록 충성하는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준다고 했으며,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했지 않느냐?”고 반박합니다.
그러면서 “성경에는 상이 있다고 하는데 왜 상이 없다고 하느냐, 나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 말에 대해 나는 성경은 문자적 해석이 되어져야 할 부분이 있고 문자적인 해석이 되어서는 안될 부분이 있음을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마 무상급론에 대한 나의 말에 기분이 상했을지도 모르고 다른 사람들에게 무상급론에 대한 반박의 말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해 봅니다.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나는 여러 주석가들의 주석이나 일반 기독교 책들을 살펴보거나 주변 목회자들이나 평신도들을 만나 얘기를 해보아도 모두가 하늘나라에서 상급이 있다고 합니다.
때로 나는 일반적으로 모두가 하늘나라에서 상급이 있다는 말에 자신의 해석에 대한 회의감을 가지며 실망할 때도 있었으나 칼빈의 주석이나 기독교 강요를 읽으면서 역시 칼빈주의는 무상급임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여기에서 성경해석의 시비는 피하고 기독교 2천년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변함이 없으나 정당한 성경 해석적인 면의 발전은 고무적임을 강조합니다.
지금까지 교회에서 들어왔던 상급은 성도들에게 많은 충성과 하늘나라에서 구원 외에 또 다른 소망을 안겨준 줄 압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늘나라의 상급에 대한 가치성을 어디에 두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하늘나라의 무상급론에 대해 반박과 적대감을 가지면서도 “당신은 하늘나라에서 무슨 상을 받을 것이요?”라고 물으면 구체적인 답변은 못하고 “뭔가 상이 있겠지요. 면류관 또는 열 고을이나 다섯 고을을 다스리며 왕 노릇을 하지 않겠느냐?”는 이런 반문 정도가 고작입니다. 그러면 나는 열 고을이나 다섯 고을을 다스리는 것이 무슨 상급이며, 면류관을 쓰는 것과 왕 노릇하는 것이 무슨 상급이냐고 재반문합니다.
하늘나라에서 상급을 기대하는 자의 수치
나는 프레드 캐더우드라는 사람이 쓴 「오직 주님께만 영광을」이란 책을 읽어 보았는데, 그 내용은 돈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 책의 한 예를 들면 “우리는 하나님께 빚지고 있습니다. 십일조는 모세 율법 이전에 있었으며 그 이후에도 계속 존속합니다.” 등등의 항목을 열거하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의 수입을 사용하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정도의 내용은 우리도 이미 교회 생활을 통하여 잘 알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러한 신앙과 행위를 통해 영원한 상급과 관계를 짓고 있는데, 그것은 큰 모순입니다. 우리 신앙의 행위와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면 그것으로 이미 끝난 것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하나님께 빚지고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채무자가 채권자에게 임무수행을 했다고 해서 상을 받을 권리를 내세울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또 십일조를 드리거나 구제나 선행을 하나든 것으로 하늘나라의 상급을 받겠다는 것도 오만한 행위입니다. 하나님이 율법으로나 신앙으로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은 상급의 대상이 못됩니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믿는 자로서 당연한 의무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네 부모를 공격하라”는 계명을 준수했다고 한다면, 과연 이것이 하늘나라에서 상급을 받을 이유입니까?
이 외에도 신약성경에 주님이 원하시는 선행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이 말씀을 순종했다고 하늘나라에서 엉뚱한 상을 바란단 말입니까? 그 다음 구절을 보면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위의 말씀에 견주어 볼 때 우리의 선행은 하늘나라에서 상급을 받는 이유가 아니라 단지 아버지의 아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렇지 못한 자는 정말 주님 앞에 수치스러울 것입니다.
프레드 캐더우드는 세상적 현실에 적응하듯이 우리는 자신의 상급이 하늘에 있다는 영적 현실에 적응해야 하며, 미래의 새 생활(하늘나라)을 위해 보화를 투자하든 말든 모든 사람이 똑같은 보상을 받는다면, 내세에 투자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남에게 주어야 할 궁극적 이유는 하나님이 영원한 상급을 약속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공로로 구원을 받은 자는 이 세상 생활에서 선행과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주를 위해 충성하고 믿음을 경주하며 선행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 신앙의 행위가 하늘나라의 상급에만 얽매여 있다면, 정말 부끄러운 신앙일 것입니다.
신상보훈 가운데 주님이 율법의 완성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l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17-20).
이것은 율법의 완전성에 대한 교훈이며,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 즉 자신은 율법의 지극히 작은 것 중 하나를 범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그것을 지키라고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지극히 작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버리고’는 문맥에 따라 다르지만 요한복음 5:18에서는 ‘범하다’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회의 지도자들 중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처럼 자신은 죄를 범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지키라고 가르치는 것은 하늘나라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들이라 할지라도 대부분이 자신은 계명을 범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지키라고 가르친 경험이 있을 줄 압니다. 그렇다면 이미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구언 외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 다음 구절에서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는 것은 이미 19절 상반절에서 우리의 불가능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주님의 완전한 율법에 우리 모두가 겸손하여 굴복하지 않을 수 없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더욱이 20절을 보면 “너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함으로 율법의 의미든 믿음의 의미든 그 기준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늘나라의 ‘작다, 크다’란 의미를 상급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늘나라에서 상급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준수로 그 공효가 하늘나라까지 미친다는 것은 절대로 상급의 우무를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는 주님 앞에 지극히 작은 계명 중 하나라도 지신은 실천하지 않으면서 남에게는 교훈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율법 준수의 공효는 무효인 것입니다.
어떤 경우 율법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자의 크고 작음, 즉 상그븡ㄹ 결정하는 조건이 되다고 한다면,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약 2:10-11)는 말씀에서 상급은 이미 무효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율법의 완성은 모세의 율법보다 완전하여 “살인하지 말라”라는 것 이상으로 남을 미워하거나 노하는 자에게 살인의 율법을 범하는 것이 되며 심판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 “간음치 말라”라는 율법의 완성으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한 가지도 우리의 행위실천이나 정신적 세계에 있어서 주님 앞에 정당할 수 없습니다. 흔히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공로로 받으며 하늘의 상급은 우리의 행위, 즉 율법을 지킴으로 얻는다고 하는데, 이것은 전혀 맞지 않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때 부끄러움과 수치뿐입니다.
현세상에서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
마태복음 19:29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내용과 병행하는 구절이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있는데, ‘여러 배’를 받는다는 이것을 하늘나라의 상급으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을 위해 우리의 소유나 친족관계까지도 포기할 수 있단 말입니까? 역시 이 구절은 우리의 신앙세계에서 하나님을 위해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은총의 내용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여러 배’의 선행 조건인 것입니다.
‘여러 배’ 라는 이것이 하늘의 상급처럼 생각이 되다면,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을 읽어야 할 것입니다.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는 ‘금세에 있어’라는 내용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주를 위해 소유의 희생을 치르면 이 세상에서 ‘여러 배’ 또는 ‘백 배’를 받는다는 역설인 줄 압니다.
그 다음 내용을 보면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입니다. 이것은 현세적 구원의 차원을 넘어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영생을 상속받는 지대한 은총의 상급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생은 전혀 인간 자신의 공적이나 공로, 그리고 선행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힘입어 양자된 우리에게 상속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영생을 쟁취할 수 없는 것처럼 하늘의 상급도 쟁취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야고보 형제의 하늘나라에 대한 야망
마태복음 20:20-28(막 10:35-45)에 세베대 아들의 어미인 살로메가 그의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인가를 구했습니다.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마 20:21).
여기에서 “주의 나라에서”라는 말이 매력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아직 그리스도의 나라는 그림자조차 나타나지 않았는데, 세베대의 아들들은 벌써 보통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주의 나라에서 있을 일들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하소서”라는 살로메의 부탁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오히려 그들을 책망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허망한 야망에 눈이 어두워지면 진정한 것을 바라볼 수 없게 됩니다. 그들은 하늘나라 대신에 주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기를 원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구원의 십자가는 뒤로 한 채 엉뚱한 것을 꿈꾸며 높아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의 지상적 메시아인 줄 알았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허망한 꿈을 꾸는 자들에게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이 물음은 그들의
터무니없는 하늘나라의 야심을 시정해 주는 것으로서 십자가와 주님을 따르는 자의 고난을 제시해 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잔을 통하여 그들의 뻔뻔스런 입에 재갈을 채우신 것입니다. 그들은 마치 정의의 전쟁은 두려워하면서 승자의 전리품에만 눈을 돌리는 자들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야심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늘나라에서 모든 것을 가질 터인데, 그 외에 엉뚱한 것을 개인적으로 더 소유하겠다는 것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늘나라는 누구의 것입니까? 하늘나라의 영광을 한 개인만이 소유하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 다음 주님의 말씀은 “내 좌우 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영원한 하늘나라로 우리를 불러들여 유업으로 주신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할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상이나 어느 누가 더 우월할 것인가는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이것은 주님의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관에 있음을 말씀하고 있으나 해석상의 문제는 바로 주님의 심리적인 표현 방법에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아예 하늘나라에는 이런 우편과 좌편이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라고 하실 수 있겠지만 아버지의 영역에 맡기신 것은 그리스도의 목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기회의 통로를 열어주신 것입니다.
요한1서 3:2을 통하여 보더라도 아직 알지 못하는 미래의 하늘나라에 대하여 지나치게 상급이나 우월한 것을 쟁취할 것이라고 우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의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므나 비유에서 상급의 차이
먼저 누가복은 19:12-27을 읽어 봅시다.
“가라사대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그런데 그 백성이 저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가로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노이다 하였더라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들어와서 은 준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 하여 저희를 부르니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그 둘째가 와서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이 와서 가로되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두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는 것을 취하고 심지 않는 것을 거두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는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을 알았느냐 그러면 어찌하여 내 은을 은행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변리까지 찾았으리라 하고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저희가 가로되 저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주인이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나는 위에 나와 있는 므나 비유에서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거나 다섯 고을 권세를 차지하는 것을 상급으로 해석하는 자들을 많이 보아 왔습니다. 달란트 비유는 한 가지 면만을 취급하고 있지만 므나 비유는 이 두 가지를 모두 취급하고 있습니다.
역시 이 두 가지 비유의 공통되는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먼 나라로”라는 장소적 비유를 통하여 자신이 왕권을 얻어 오기 위해 긴 여행을 떠나야 하며, 오랜 시간에 걸쳐 자신의 종들에게 돈을 맡겨 장사하게 하여 이(利)를 남기게 하려는 것입니다. 누가는 이 주인을 ‘어떤 귀인’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므나 비유의 배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주님의 제자들이 많은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세 차례에 걸쳐 수난과 죽으심의 예고를 하시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것이 지상적이며 현실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착각에 대해 주님은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라는 이 비유의 암시적인 내용을 자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과 승천 이후 오랜 세월 동안 각자에게 상업의 원리인 이익을 남기는 달란트나 므나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분명히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 승천과 더불어 재림의 심판주로 오실 때까지 기간을 의미할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하심으로 제자들의 미래에 있을 심리적이며 예언적인 말씀까지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14절 하반절에 있는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노이다”입니다.
우리는 이 비유에서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주님의 나라를 두고 많은 어려움과 고난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며, 주를 위해 상업의 원리를 적용하여 이익을 남기는 복음의 상인이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달란트 비유는 나눠준 달란트가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그리고 한 달란트로 차이가 있지만 므나 비유에는 나눠준 므나가 모두 동일합니다. 어떤 경우이든 이것은 주님의 지상적 부재(不在) 기간 동안에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며, 일하지 않고 앉아 있거나 누워 있다는 것은 큰 잘못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사실, 이러한 비유도 엄밀히 따지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선물인 구원을 활용하는데 있어서 자신을 적용시키는 자는 하나님께 큰 이익을 드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이러한 충성은 사면을 성실히 수행하는 자신들의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익을 남긴 달란트 비유나 므나 비유가 상급의 원리는 아닌 줄 압니다. 마태는 상급의 표현이든 아니든 간에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했으며, 주님의 좋은 것들로 복된 부요함에 참여할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므나 비유에서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잇는 자에게 주라”는 것은 하늘나라에서 지상에 있는 경제적 관념에 부합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란트 비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나라는 침노하는 자가 빼앗음
어떤 사람은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성경의 전후 관계를 보지 않고 인간의 의지로 노력하면 하늘나라도 침노할 수 있다 하여 역시 상급도 침노하는 자가 차지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펴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이에 관한 성경을 자세히 살펴봅시다. 마태복음 11:12을 보면 “세레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라고 하고 있으며, 같은 내용으로 누가복음 16:16을 보면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성경 구절을 읽을 때마다 정당하지 못한 직관으로 하늘나라를 침노하여 쟁취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에서의 상급도 우리의 쟁취 능력을 통하여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침노를 당하나니”는 침범한다는 말의 수동태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침노를 당하나니”라고 했으며, 누가복음에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은 세례요한의 전파 이후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밀려 들어와서 그들이 하늘나라를 소유한다는 것이 지배적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행위를 따라 심판
이제 그리스도의 심판에 대한 보편성을 생각해봅시다. 로마서2:1-16에 있는 내용을 읽어 봅시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무릇 율법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율법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송사하여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이 말씀의 내용을 요약하면, 유대인은 율법으로 심판을 받을 것이며(롬 2:12), 율법을 가지지 못한 자들은 그들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법, 즉 자신들의 양심에 의하여 심판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이론상으로는 사람들이 선행을 기초로 하여 심판날에 살아남을 수 있음을 시사하지만, 바울은 사람들이 빛에 따라 살지 못했음을 분명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특히, 로마서 2:6-7에 보면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지만 쓸데없고 하찮은 행위를 따라 상을 얻겠다는 우리의 잘못을 제거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무엇으로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까? 흔히 우리는 행한 대로 갚아주시겠다는 주님의 말씀에도 구원 외에 인간의 행위에 대한 상급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구원받은 자들의 구원 외에 그들의 선행에 따라 상급의 심판으로 알고 있지만 두 가지 형태인 영생과 그 반대인 노와 분, 그리고 환난과 곤고로 구별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이전에 영화롭게 하기로 결심하셨던 사람들을 성별시키기 때문에 그들의 선행을 빛나게 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의 어떤 공로나 공적을 보고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본문의 문맥으로 보아 선행자에게 어떤 보상이 주어질 것으로 말하고 있지만 그 보상의 진가나 그러한 것들의 가치를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어떤 행위가 보상을 받기 때문에 그것이 공로가 있는 것으로 추측하거나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반대로 버림받는 자의 사악함을 정당하게 보복하여 벌하심으로써 주님은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그들에게 도로 갚으실 것입니다.
바울은 이어 참고 선을 행하는 자들이 선행을 계속함으로써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이라고 말하지만, 신자들이 영생의 하나님 외에 어떤 다른 엉뚱한 것을 목적으로 하여 획득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할 때에는 반드시 그의 나라의 복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7절 말씀의 의미는 선행하기를 힘씀으로써 썩지 아니함을 얻고자 노력하는 자들에게 준미은 영생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공로로 보상을 바랄 것이 아니라 보상을 받을 각오로 선행을 한다면, 반드시 주님이 주시기로 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는 이 말씀이 진리인 것입니다.
또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을 맡은 일꾼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4:1-5을 보면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에게서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내용은 목사든 어떤 직분자이든 일꾼으로서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 충성을 다해야 할 임무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꾼들은 결국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으로 불러질 것인데, 첫째는 사역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며, 둘째는 지나치게 인간 위주의 높은 평가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관리를 맡은 자가 충성하지 않는다면, 주인의 뜻에 합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충성자’를 두고 정직한 마음과 지식을 가지고 참되고 순결한 사역의 임무를 감당해 가는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바울은 판단의 문제를 제시하는 입장에서 5절에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에게서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듯이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각 사람의 특성을 편견과 야심을 가지고 보았기 때문에 한 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에 따라 사람들을 과대평가 혹은 과소평가를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각 개인의 공적을 결정하면서 인간 이상의 권위를 행사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복잡한 것들을 그리스도의 심판의 날까지 그냥 숨겨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행동이나 마음속에는 서로가 잘 알 수 없는 은밀한 것들이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인들처럼 마치 자신들이 판단의 기준이 되어 어떤 사람에게는 면류관을 주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불명예를 준다고 해도 이러한 판단과 심판은 절대로 그리스도께 있음을 말할 수 있습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심판의 날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의 상금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곧 우리의 칭찬을 하나님의 정직하신 판단 기준에 맡길 때 있을 내용입니다.
종과 주인의 대한 착각
우리는 종입니까, 아니면 주인입니까? 우리는 종이라고 하면서 언제부턴가 모르게 주인의 자리에 앉으려 하고 있습니다. 종이 주인에게 당연히 부과된 일을 수행함에는 사례를 받아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우리도 주님께 사례받을 만한 일을 행한 것이 아니고 단지 당연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신 계명이나 명령을 모두 수행했다 할지라도 하지 않으면 안될 의무를 가진 종들입니다. 율법에 명한 어떠한 행위도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언급했습니다. 이것은 또한 필연에 의하여 구속되어 있는 것만큼 그런 경우에는 자발적으로 기분좋게 선을 행한다고 자랑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저 유명한 크리소스톰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소유는 노예가 가지고 있는 재산과 같은 것인데, 그것은 권리상 주인에게 속한 것입니다.”
이런 내용은 예수님의 비유에서도 찾아볼 수 잇습니다. 누가복음 17:7-10을 보면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고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문제가 있습니다. 노에나 종의 신분인 자신이 어떤 경우라도 주인의 요구 이상으로 충실히 일했다는 예는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주님을 향한 충성, 봉사, 그리고 희생 따위는 전혀 맞지 않는 사치스런 사례를 요구하는 종의 오만인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로 주인의 요구에 충분히 충성을 다했다 할지라도 역시 우리의 신분은 노예나 종인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의 행위와 비교해 우리 자신의 행위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사야의 말을 빌리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찐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사 1:1-12)고 하고 있습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 말을 빌리면 종된 이스라엘이나 오늘날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는 어떠한 공로나 공적도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어떻게 자신을 가지고 변호할 수 있는가 하는 이것이 문제입니다.
다윗의 말처럼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 143:2)라는 고백이 곧 우리의 신실한 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 말을 빌리면 종된 이스라엘이나 오늘날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는 어떠한 공로나 공적도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어떻게 자신을 가지고 변호할 수 있는가 하는 이것이 문제입니다.
다윗의 말처럼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 143:2)라는 고백이 곧 우리의 진실한 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종의 신분으로서 주인의 명령에 응할 처신력이 하나도 없습니다. 진정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침묵만이 있을 것이며, 자랑이나 요구 따위는 하찮은 것일 뿐입니다.
여기에서 칼빈의 두 가지 비유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첫째는, 만일 누군가 다른 사람의 호의로 말미암아 밭의 소작권(한국적 개념)을 얻은 자가 소유권의 명의까지 자기의 것으로 하고자 한다면 그 따위의 은혜를 망각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소작권을 상실당해도 마땅할 것입니다.
또 하나는 만일 어떤 노예가 자기 주인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자신이 본래는 천한 사람이지만 자유를 얻은 신분이라는 것을 감추고 나면서부터 자유의 몸이라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이전 노예의 신분으로 다시 되돌아가야 마땅한 자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에게 부여된 호의를 누리는 올바른 방법은 다만 우리가 받은 것 이상 무엇 하나도 주장하지 않고 선한 일의 창시자를 찬미하는 것을 가로채는 일은 적어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율법준수나 선행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혜
우리의 주변에는 주님을 위해 세상에서 인연을 끊고 희생과 봉사를 하고 있는데 하늘나라에서 상급이 없다면 정말 살맛이 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너무나 계산적이며 이기적일 때가 많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의 절대적인 선행과 다른 사람들의 악행을 비교하여 스스로 승리감을 가집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선행에 대한 우월감으로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율법준수나 선행을 스스로 신뢰하거나 자랑을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율법준수나 선행은 인간 자신의 행위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의 내용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여 주장하고 계신다는 것이며, 이로 인하여 선한 행위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율법준수나 선행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 있으며 조금도 우리에게는 공로의 흔적이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어거스틴의 간증고백을 들어봅시다.
“나는 내 손으로 행한 것을 칭찬하지 않겠습니다. 그 이유는 행여나 하나님이 나의 행위를 살피실 때 공로보다는 오히려 죄된 것이 더 드러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내가 말하는 것, 바라는 것은 ‘내 손으로 행한 것을 경히 보지 마소서’라고 할 따름입니다. 내가 행한 것보다 내 속에서 당신의 행함을 보소서. 왜냐하면 당신이 내 행한 것을 보신다면 정죄할 것밖에는 보시게 된다면 거기에는 면류관을 주실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든 내 속에 선행이 있다고 하며 그것은 모두 당신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Augstinus, 「Psalms」시 137:8).
칼빈은 여기에 다음과 같은 해설을 붙입니다. 첫째, 그가 선행한 것이 무엇이라도 있다면 하나도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며, 둘째 설사 선행했다 치더라도 무수한 죄의 무덤 속에 묻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로부터 양심이 행위를 보게 도리 때 확신보다는 도리어 더 두려움과 놀라움을 느낄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자기가 한 선한 일을 전적으로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끝까지 이루어 주시기를 기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선행은 축복의 근거도 아니며 그것은 다만 은혜를 주시는 원인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으나, 이것은 이해상의 문제입니다.
우리 구원의 효과적인 원인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안에 있고 실제적인 원인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에 있으며, 매개적인 원인은 성령의 조명, 즉 신앙에 있고 최종 목적 원인은 하나님의 크신 인애의 영향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긍휼에 의해서 영생의 기업을 주시기를 작정한 자들에게 보통 경륜에 따라 선행을 통해서 그것을 차지하도록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영생은 그리스도의 피공로로 얻는 것이며, 하늘나라의 상급은 우리의 선행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선행으로 영생을 인출한다고 하면, 그것은 모순이 될 것입니까? 이것은 선행으로 영생을 얻는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의롭게 하시고 그 다음에 영화롭게 하시기 위하여 은혜의 일종으로 선행을 수반케 하신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의는 바로 믿음
만일 우리의 의가 행위로 인하여 이루어진다면 이것은 하나님 앞에 완전히 무너져야 할 것이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주께서 주시는 믿음에만 의존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스슷로 오만하여 구원이 하나님께 있다 하면서도 순간적으로 자신 행위에 초점을 맞추려 합니다.
로마서 8:30, 32에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안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주어진 구원입니다.
의는 행위입니까? 믿음입니까? 이러한 물음에 역시 의는 믿음으로 이루어진다고 하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어떤 행함으로 인한 공적에다 돌릴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성경구절로 마음이 기울어집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함이 어떤 큰 가치를 인정받는다면, 그것을 가지고 행위로서 의가 인정된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완전무결한 행위적 율법을 준수할 수 있습니까? 다시 말해서, 털끝 만한 죄책이 없는 경지에까지 이르지 않으면 우리는 스스로 행위를 통하여 의롭게 될 수 없는데도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믿음의 행위가 필요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공로와 하나님의 인정
우리는 공로라는 이 말을 두고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자랑이라도 하듯이 즐겨 사용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공로를 그리스도의 심판에 관련하여 행위에 우선을 둔다면, 그러한 사람의 신앙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어거스딘은 「성도의 예정에 관하여」에서 “인간 공로는 아담을 통하여 멸절되었으니 잠잠할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총이 지배하도록 할 것입니다. 성도들은 자신들의 공로에 아무것도 돌리지 말고 오, 하나님! 모든 것을 당신의 긍휼에만 돌릴 것이나이다. 사람이 갖고 있다는 모든 선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 속에 찬미할 만한 것이 있다면 모두가 자기 자신의 공적으로부터 일어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긍휼로부터 온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거스틴의 말대로 선을 행할 능력뿐만 아니라 전적 타락한 인간으로서 선 그 자체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행위 공로는 아무 가치 없는 쓰레기와 같은 것입니다.
이어 크리소스톰은 그의 「창세기 설교」에서 “우리의 행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값없이 받은 뒤에 따라 오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답례요 빚이지만 하나님의 선물은 은총이요 자애요 커다란 관대일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버나드는 그의 설교에서 “공로에 관해서는 자부할 것도 없지만 만일 공로가 없다면 심판을 받기에 충분하다.” 고 했습니다.
나는 자신의 공로가 하나님 앞에 인정되지 않을 것이며, 곧 상급이 상실될 것이라고 불안해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신앙과 교회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공로나 자의식에 지배되는 기준을 둔 상급에 그 목적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확실한 이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공로라고 하는 불안과 초조를 가진다는 것은 말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이렇게 하기도 어렵지만 그 어느 한 부분을 행했다고 하여 그 자체가 공로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자신을 부인”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은 온데 간데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공로에다 마음을 집중한다면 빨리 그 마음을 비워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죄인이며 어느 부분도 하나님 앞에서는 불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들의 삶 속에서 한 부분도 주님을 따르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이 반복하여 그 민족을 깨우쳤듯이 지금도 우리를 깨우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제각기 엉뚱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들어오면 모두가 하나님의 사람인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 자신들의 일에 분주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면서도 자신의 공로를 치켜 세우려 합니다.
선행은 하늘나라 상급의 조건이 될 수 없다
우리는 달란트 비유나 므나 비유를 생각할 때 “착하고 충성된 종”의 대열에 포함되리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보면 전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이나 그리스도의 명령이 요구하는 것만큼 우리는 전혀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령, 모든 것을 다 행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주님 앞에 무익한 종에 불과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가령 율법이나 명령의 완전 준수가 있을 수 없지만 완전한 준수를 했다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무슨 공로가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대인 관계에서 세파에 시달려 때가 묻었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그 말속에는 자신의 때묻음이 자신의 마음속으로부터 하수구에서 오염된 물이 흘러나오듯 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에 의하여 때가 묻었다고 합니다.
누가복음 17:1-4에 있는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진대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과연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한 적이 없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 앞에 칭찬받을 만한 것이 있으면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는 선물인 것입니다.
우리는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최선의 행위라 할지라도 하나님 심판대 앞에 소환당할 때는 인간의 수치와 부끄러움뿐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모독적인 야심 때문에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행함에 대한 보답인 것처럼 여김도 잘못된 것입니다.
간혹 히브리서 13:16을 들어 공로를 인정받겠다는 자들이 있습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라틴어 본문은 “인자와 구제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그와 같은 제물에 보답하신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말의 구조가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말의 변조는 우리를 함정에 빠뜨리는 이유가 됩니다.
칼빈의 말을 빌리면 “그러한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용납되는 것이다.”란 의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규범을 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쳐 주는 것은 우리의 선행이 언제나 많은 불순한 것으로 더럽혀져 있는 만큼 당연히 하나님은 그것 때문에 노하고, 또 분노를 말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함은 상급을 받을 가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세뿐만 아니라 내세에서까지 한없는 은혜로 상급을 받게 되는 것, 곧 이 상급은 영원한 구원입니다.
나는 또 칼빈의 말을 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우리가 은혜를 받으며 은혜 위에 또 은혜를 쏟아 주시는 것을 행위라는 공로에 돌려 은혜로부터 떼내버리는 것은 성경 교훈에 반대되는 것이다.” 고 합니다.
값없이 주시는 선물을 아십니까?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 1:16)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다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55:1)는 말씀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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