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건설구원 반대론 - 제1장 하늘나라에 대한 올바른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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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늘나라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마치 전통처럼 믿어왔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하늘나라에 대하여 충분히 알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1장에서는 하늘나라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이 무엇인가를 정리했습니다.
그 자체만으로는 표현이 불가능한 하늘나라
우리는 하늘나라에 대하여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작 하늘나라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부분이 확실한 대답을 못합니다. 흔히 하늘나라를 갔다 온 것처럼 말하는 사람도 실상 그 이야기를 들어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꿈을 꾸었더니 하늘나라에 그가 머물 집이 없더라고 말하며, 또 어떤 사람은 쓸 모자가 없어 그 형편이 말이 아니더라고 합니다.
생각건대 어린아이는 어린아이다운 꿈을 꾸며, 어른은 어른에 맞는 꿈을 꾸고, 지혜로운 자는 지혜로운 꿈을 꿉니다. 따라서 꿈은 어떤 형태든 꿈꾸는 자의 의식세계에서 한정을 짓게 마련입니다.
어리석게도 많은 사람들은 하늘나라를 그 자체로서 표현이 가능한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하늘나라는 현실적으로 우리의 믿음으로만 이해가 가능할 뿐이지 그 이상은 표현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하늘나라를 마치 텔레비전을 보는 것처럼 채널을 다양하게 움직이려 합니다.
그래서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부득불 철학의 한 분야인 현상학(phenomenology)을 빌려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보이지 않으며, 경험할 수 없는 천상의 문제를 나타내어진 현상을 빌려 표현하거나 이해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형상학의 주요골자는 환원(reduktion)인데, 그것은 보이는 세계의 존재를 통하여 보이지 않는 형상의 세계로 되어 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또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세계의 존재는 괄호에 넣어져야 하며 이것은 단지 존재하는 세계가 현상학의 바로 그 주제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방법의 목적은 정당한 성경 해석을 위한 마지막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으로서 좀더 어려운 철학 용어를 빌리면 형상적 환원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실제적인 사물에서부터 경험적 요소를 환원하여 사실의 본질을 그의 직접성 또는 구체성에 직관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의 전반적인 계시 형태가 이와 같은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어떤 현상을 통하여 직관, 회상, 상상, 그리고 판단을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어려운 문제를 논의하는 것 같습니다만 사실 하늘나라의 실체는 표현이 불가능하고 단지 나타내어진 현상에서 어떤 사건이 발생한 이후 아주 작은 물리적 사실에서 단서를 잡아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가야 합니다.
이러한 형상학은 착각과 오류에서 진리를 분별하는 방법을 응용한 것입니다. 착각과 오류는 경험된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과는 달리 인식된 것으로 잘못된 경험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현상학은 생소하지만 기독교 현상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기독교 인식론과 더불어 응용되고 있으며, 성경해석의 한 방법으로써 계시론의 기본 방법 중 하나임을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천상적 계시는 비록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여 그 실체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지평적 차원에서 이성에 호소한 것입니다. 따라서 계시는 지상적 개념에서 표현되었지만 그 실체는 단연 하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그 자체만으로는 표현이 불가능한 지상적 개념임을 성경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을 계시의 형태 구조라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인식은 지상적 표현
성경에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지상적인 비유를 통하여 그 개념을 알게 하는 내용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우선 마태복음 13장을 보면 여러 가지 비유가 나오는데, 이것들은 지상적 개념에서 천상적 의미를 찾아 올라가는 표본이라 생각됩니다. 이 비유들이 현실적인 하늘나라에 대한 내용이든 아니면 미래의 하늘나라에 대한 내용이든 모든 무방합니다.
먼저 ‘씨뿌리는 자의 비유’(마 13:1-9)는 하늘나라의 실체적 이해를 위한 말씀으로서 하늘나라의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 말씀의 뿌리가 없을 때, 또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힐 때 주어지는 내용들이며, 반대로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의 비유를 결실의 내용으로 이해시키고 있습니다.
두 번째 ‘가라지 비유’(마 13:24-34)는 예수님의 해설(마 13:36-43)에 근거하여 잘 알 수 있습니다.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 밭은 세상,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아들들, 가라지는 악한자의 아들들,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 추수 때는 세상 끝, 그리고 추수꾼은 천사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의 최종 의미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과 의인들을 구별하여 전자는 “풀부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하며, 후자는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겨자씨와 누룩 비유’(마 13:31-33)도 이와 마찬가지로 전자는 하늘 나라의 성장, 후자는 하늘나라의 확장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 번째 ‘밭의 보화와 진주의 비유’(마 13:44-46)에서 전자는 하늘나라를 소유하기 위한 지혜와 최선의 노력을 의미하며, 후자는 상업의 원리를 일깨워주는 하늘나라의 소유에 대한 귀중한 의미입니다.
네 번째 ‘그물 비유’(마 13:47-50)는 세상 끝에 되어질 의인과 악인을 갈라놓은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입니다. 이런 비유적 말씀 후에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라고 묻는 것 또한 중요한 내용입니다. 이러한 비유에는 현실적 하늘나라와 미래적 하늘나라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동일시하도록 주께서 가르치신 것이 아님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곡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는 말씀으로 비유의 말씀을 종결짓고 있는데, 이것은 하늘나라의 비밀을 배운 제자들은 풍요로운 복음의 곡간에서 진리를 방출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에는 대부분 이러한 형태로 계시되어 있으며, 이 외에도 얼마든지 하늘나라에 대한 지상적 표현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좀더 하늘나라의 의미를 인식론적 입장에서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하늘나라의 인식을 위한 기초 지식
인식이란 말이 철학용어임에는 틀림없지만 부득불 빌려 사용합니다. 기독교 신학 안에도 ‘기독교 인식론’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식이라고 하여 그다지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의 서재에는 조명 전등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조명 수준 측정기가 부착되어 있는데, 1Lux의 밝기와 5Lux의 밝기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나는 조명 전등의 예를 들어 인식에 대한 해석을 하고자 합니다. 1Lux의 밝기에 해당하는 사람의 인식에는 5Lux의 밝기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은 그 사람의 인식의 입장에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철학적 입장에서 표현한다면 크게 합리론과 경험론으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인식에 있어서 합리론은 절대적으로 보편타당한 인식의 가능을 주장합니다. 그것은 선천적이고 생득적인 이성에 의하여 가능한 것으로서 인식의 기본 능력이란 것입니다.
반면에 인식에 있어서 경험론은 특수적 방면을 중요시하는데, 이것은 경험에서 발생되는 것이며 감각적 경험이 지식의 근원이라고 하여 선천적 인식 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인식은 경험에서 유래하여 경험이 없는 인식은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나의 주장은 합리론이나 경험론을 서로 배타적인 입장에서 볼 필요가 없으며, 이 두 이론의 조화와 통일에서 비로소 인식의 성립이 가능함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안에는 하늘나라의 인식에 대하여 이성과 신앙 가운데 어느 것이 우선인지에 대한 논의가 있습니다 .일반 학문에는 이성이 주요한 내적 원리이지만 신학에서는 신앙이 주역이 된다는 자들도 있습니다.
이 양론에서 서로 순위 주장을 폅니다만 나는 이성이 우선임을 주장합니다. 어떤 입장이든 먼저 하늘나라에 대한 이성적 인식이 없으면 신앙이 주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로마서 11:19-20; 2: 14-15에서 불신자도 어느 정도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도덕의 인식은 가지고 있으나 하나님의 계시를 용납하지 못하여 옳게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을 억압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히브리서 11:3에서 “믿음으로 우리가 아나니”라는 말씀으로 신앙을 우선하는 자도 있습니다.
달란트 비유를 통한 하늘나라 인식
우리는 마태복음 25;14-30에 나타나 있는 달란트 비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이 말씀은 종들에게 맡겨진 책임을 결산하는 때까지 그들의 충성을 요구하는 것에 대한 비유입니다. 마태복음의 말씀을 보면, 종말적 예언에서 1-13절은 종말의 예비성, 14-30절은 종말의 충성심, 그리고 31-46절은 종말의 심판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1절에서 “그대에 천국은…”이라고 하여 하늘나라의 의미를 상기시키고 있으며 14절에 “또”라고 덧붙임으로 같은 의미를 또다시 생각게 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달란트 비유이지만 다시 한번 더 그 내용을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가면서 자기의 소유를 종들을 불러 각각 그들의 재능대로 나눠주었습니다.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또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습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자는 바로 가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두 달란트를 남겼는데,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습니다.
오래 세월이 지나 그 주인이 돌아와 회개하게 되었을 때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두 달란트 받았던 자는 두 달란트를 남겨 주인 앞에 내어놓았습니다. 그 주인은 종들에게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고 칭찬했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았던 자가 와서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에 대한 그 주인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마땅히 네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 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이 달란트 비유는 주님이 종들에게 맡겨진 책무를 잘 감당하여 결산 보고하는 날까지 관리와 책임, 그리고 이익을 남겨야 하는 상업의 의미가 있지만 한마디로 요약하면 충성을 입증해야 한다는 사실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달란트(talent)라는 말은 현실적으로 재능 또는 수식어를 붙여서 천부적인 재능이란 뜻으로 사용됩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한 달란트는 장정의 1년 품삯의 가치임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재능이라는 의미에서 어떤 사람은 피아노나 바이올린 연주가로서, 체육가로서, 문학가로서, 전자 공학도로서 뛰어난 사람임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처럼 어떤 사람이든 크고 작은 달란트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화폐의 가치로 보더라도 달란트란 많은 양의 돈으로써 주인이 그 종들에게 준 자본금이나 투자의 의미를 가지기도 합니다.
당시 랍비 문헌을 보면, 자본과 이익은 주인에게 속하여 있었지만 만일 그 종이 히브리인이라면 종은 자신을 위하여 이 악을 가질 수도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입장에서든 주인은 종들에게 적절한 보상을 주었고, 종들은 동업을 통해 이익 배당에 참여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보면 재능이든 자본금이든 종은 주인에게 이를 남긴 사실만을 보고할 뿐입니다. 그래서 두 종은 각각 배를 남겼음을 보고했고, 한 종은 원금을 그대로 반환하여 보고하였습니다.
그 결과 두 종에게는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많은 것을 맡기겠다”라는 칭찬과 보상이 주어졌지만 한 좋은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가지고 있던 한 달란트까지 빼앗기고 바깥 어두운 데 내어 쫓겨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이라고 질책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른 여러 가지 해석의 내용은 차치하더라도 과연 이것이 주는 핵심의미가 무엇인지는 바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나는 강의 시간에 충성된 자의 보상이나 공로가 하늘나라에서 그대로 있지 않냐는 학생들의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교회에서 듣는 성경 해석이나 설교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 달란트 비유가 현실 우리의 삶 속에서 충성된 자가 되어야 하며 이 땅에서 그대로 보상이나 공로가 인정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충성된 자의 보상이나 공로가 하나님 앞에 인정될 것이며, 신앙의 목표가 바로 지상적 공로를 통하여 하늘나라에서 인정받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달란트 비유에서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리라”는 것은 칭찬과 더불어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므로 많은 것을 맡기겠다는 충성의 신임장과 같은 표현입니다.
여기에서 어떤 경우이든 다섯 달란트를 받아 다섯 달란트를 남긴 종이나, 두 달란트를 받아 두 달란트를 남긴 종에게 모두 똑같은 칭찬과 충성의 신임장인 “많은 것을 네게 맡기겠다”고 합니다. 반면에 한 달란트를 받아 땅을 파고 감추어 두었던 종에게는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바깥 어두운 데서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첫째로 충성자와 충성하지 않은 자의 구별이며, 둘째로 충성자에게 어떤 달란트이든 얼마의 달란트이든 칭찬이 같다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늘나라에서 우리의 공로가 인정된다는 것입니까? 달란트의 비유에서 충성된 두 종의 칭찬이 현실적인 것입니까, 아니면 차후 영원한 하늘 나라에서 주어진다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비유 목적이 무엇입니까?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라는 말씀이 차후 하늘나라에서 충성자에게 많은 것을 맡겨 주시겠다는 의미입니까? 아닙니다. 하늘나라에서 충성자에게 부과될 달란트는 하나도 없습니다.
단지 이 비유의 목적은 예수님 당시에 이 말씀을 듣는 자들이나 오늘날 이 성경을 읽는 자들에게 충성과 충성하지 않은 종들의 구별과 충성한 자들에게 주어진 평등의 칭찬을 알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의 세 가지 비유를 보면 그것은 분명히 종말의 현상을 일깨워주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에 대한 진리이며, 현재는 언덕 저 너머에 있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날에 주어질 최종 심판과 어딘가 모를 지안적 하늘나라의 도래 입문에서 주어질 지상적 개념의 칭찬입니다.
마태복음 25:1에 “그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에서 둘 다 “하늘나라는 마치…와 같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늘나라에 대하여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마태복음 25:1-13이 하늘나라의 예비에 대한 비유라면 마태복음 25:14-30은 그와 함께 충성심을 더 부가한 것이며, 이어 마태복음 25:31-46은 양과 염소의 분별로서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나라 곧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생명의 복과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다는 것뿐이지 다른 의미는 전혀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25장의 세 가지 비유는 모두 최종 심판에 걸려 있는 필연적 과정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사야 11:8-9
기독교 변증학을 강의하던 중에 한 학생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어린아이가 독사 구멍에 손을 넣어도 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아마 이 학생은 이사야 11:8-9에 있는 말씀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는 말씀인 줄 압니다.
또 이사야 35:8-10에 보면 천국에 대한 다른 묘사를 발견하게 됩니다.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된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을 범치 못할 것이며 거기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고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얻은 자만 그리고 행할 것이며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원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라”.
이사야는 이 두 내용에서 모순적인 구절을 배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호모순이 아니라 사실과 어울리는 해석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나는 이 질문에 되물었습니다.
“여러분! 하늘나라에 독사가 있습니까, 독사 구멍이 있습니까?”
그러나 학생들은 일제히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가령 하늘나라에 독사 구멍이 있다 할지라도 어린아이가 그 독사 구멍에 손을 넣을 이유가 있을까요?”
이번에도 학생들은 모두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하늘나라에는 독사도 없고 어린아이가 독사굴에 손을 넣을 이유도 없음을 설명했습니다. 다만 이것은 지상적 표현으로 하늘나라는 이처럼 평화롭다는 뜻임을 학생들에게 상기시켰습니다.
여기에서 나는 이사야 11:8-9에 대한 주석을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어떤 해석을 보면 구원이 완성된 내세에 만물이 새로워질 것을 가리키고 있는데(롬 8:19-21), 이것은 영적 의미로서 이리나 표범이나 사자나 곰과 같은 악인들도 변화를 받아서 양과 소처럼 유순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9절에서는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며, 그곳에서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하늘나라가 어떤 것일까?라는 우리의 의문은 지상적 개념일 뿐 전혀 그 이상의 의미를 찾을 수는 없습니다.
하늘나라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아직도 부족합니다. 앞서 말한 어떤 주석가처럼 짐승과 같은 악한 사람도 유순해진다는 것은 표현상의 모순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가 주어진 후에 있는 내용으로서 “악한 자들이 유순해진다”가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가 도래함으로써 동시에 즉각적으로 변화된다는 의미이며, 단순히 그 나라에 평화가 가득할 것을 말합니다.
하늘나라에 대한 보다 발전된 인식 문제
누가복음 16:19-31에는 부자와 나사로에 대한 비유가 나와있습니다. 이 비유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부자가 음부에 가야하는 이유가 꼭 부자라는 것 때문일까”라는 의문을 가집니다. 사실 예수님 당시의 비유에 대한 대상자는 누가복음 16:14에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말씀은 누가복음 16:1-13의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합니다. 이 불의한 청지기가 미래를 대비하기 위하여 현재의 기회를 이용함으로써 현명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에 칭찬을 받았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빛의 아들들이 하늘에서 상을 확실하게 받기 위하여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가운데 자신의 가진 것을 사용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이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는 단지 채무자들이 진 부채의 액수를 감하여 줌으로써 미래를 대비했다면, 그 보다 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들의 재물을 나누어주어 영원한 집을 내다보아야 할 것을 예수님이 간접적으로 하신 말씀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부자와 나사로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를 생각해봅시다. 이 비유는 지상세계와 그 다음 죽음 이후에 오는 낙원과 음부에 대한 내용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색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매일 호화롭게 잔치를 열어 즐겼습니다. 반면 나사로라는 한 거지가 있었는데, 그는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라도 배불리려 했지만 그것마저도 개들이 와서 주워먹고 도리어 그 헌데를 핥았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거지가 죽었는데 그는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고, 또한 부자도 죽어 장사되었는데 그는 음부에 가게 되었습니다.
부자가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민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으리라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라고 대답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보편적인 해석 그 이상은 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이 부분에서 부자가 왜 음부에 가야하며, 나사로는 왜 낙원에 가야 하는지를 여러 주석가들의 해석에 맡기고자 합니다. 단지 여기서는 하늘나라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서만 말하고 싶을 뿐입니다.
하늘나라는 일원론이며 지옥은 이원론입니다. 부득불 이러한 철학적 용어를 빌려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은 어떤 경우라도 단순화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 현상계에서는 일원론(monism)이 있을 수 없으며, 이원론(dualism) 또는 다원론(pluralism)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일반 철학자들은 형식의 통일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으로 세계의 통일을 수라는 관점에서 실체 개념의 길잡이로 하여 그 탐구의 결과를 일원론 또는 사유의 일원론 경향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원론의 이론적 근거는 수많은 현상의 사물이 서로 배제를 일삼아 멈춤이 없으며, 사유에 의한 총괄을 용인하는 사실적 유사 관계에 있으면서도 서로 작용하며 이해하고 혼합하며 전환한다는 점에 있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현상하는 사물은 끊임없이 생성 소멸함으로 동일성이 결여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일원론은 일체의 다양성과 변화성을 배제함으로 경험적 실제로부터 얻어지는 일체의 것을 배체하게 되어 도무지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다양성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수의 개념도 없습니다. 다만 일원론뿐이며, 이것은 기독교의 하늘나라만이 얻어질 수 있는 대상이며 설명적 기능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다원론적 다양성에 비해 하늘나라는 일원론적 차원에서 설명이 불가피한 것입니다. 이렇게 현상세계와 음부는 이원론 또는 다원론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좋으면 좋은 것이지 좋다가 나쁘거나 나쁘다가 다시 좋은 것이 아닙니다. 한번 좋으면 그것으로 계속 유지됩니다. 우리는 흔히 하늘나라에서 현실적인 지상 세계의 인식과 좋다는 개념으로 우리의 인식이 머물러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이 땅에서 불행한 생활을 했던 나사로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고 무엇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나사로가 과연 부자의 안타까운 몸부림과 목소리를 주의 깊게 듣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나사로의 일원론적인 낙원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 부자의 형편을 먼저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 중에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봅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이 누가냐 하는 것은 해석상의 문제입니다.
구약 시대의 족장 아브라함이 나사로를 대신하여 부자에게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하늘나라의 원칙을 벗어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실이 그대로 하늘나라와 지옥에서 확대 적용된다면 우선 하늘나라의 의미가 상실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나타난 아브라함은 족장 아브라함의 일인 역할이 아니라 나사로의 대변역할에 대한 제3자적 삽입인물로 하나님의 확고부동한 하늘나라와 지옥의 명확한 경계적 선언임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음부에 있는 부자와 자유로이 대화를 할 수 있다면 낙원과 음부의 구렁을 사이에 두고 서로 지상세계에서 알고 있던 자들이 맘대로 얘기할 수 있다는 논리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다시 음부에 있는 부자에게 대하여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부자는 이원론적 차원에서 먼저 자신의 고통을 이길 힘이 없어 불꽃 가운데서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안타깝게 애원을 합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그러나 사실 나사로는 구렁 저쪽의 음부에서, 평소에 음식 부스러기나마 주워먹고 배불리려 했던 그런 관계의 부자를 보거나 그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나는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토대로 하여 나의 경험담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내가 서울에서 첫 목회를 할 때의 추수감사절이었습니다. 어느 부인이 찾아와 수년 전에 그녀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는데 장례식 집례를 하시던 어느 목사님이 “얘, 아무개야! 어머니를 만나려거든 꼭 예수님을 믿고 하늘나라에 가야 한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부인은 수년이 지나도록 그 말씀이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아 결국 교회를 찾아오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도 잘 알지 못하면서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이러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 목사님이 하늘나라에 가면 어머니를 만날 수 있다고 말한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무언가 불충분함이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사실 그녀가 하늘나라에서 어머니를 만난다는 보장이 확실히 있다고 해도 딸과 어머니로서의 특정인물에 상호 지상적 인식 개념이 불필요하며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 딸이 후에 하늘나라에 간다고 합시다. 그런데 어머니가 하늘나라에서 실종되었다면 이 얼마나 슬픈 일이겠습니까? 왜냐하면 하늘나라에서 그러한 인간관계는 전혀 인식 밖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을 놓고 성경을 찾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게 와서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어 아내를 두고 죽거든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라 하였나이다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아내를 취하였다가 후사가 없이 죽고 둘째도 그 여자를 추하였다가 후사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일곱이 다 후사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을 당하여 저희가 살아날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막 12:18-27, 마 22:23-33, 눅 20:27-40).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이 맘에 들지 않습니까?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오늘날 우리도 이처럼 오해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하늘나라는 이같은 가족이나 인간관계가 없이 모두 천사와 같다고 했습니다. 천사가 결혼합니까, 가족 관계를 가집니까? 아닙니다. 하늘나라에서 구원받은 사람의 삶을 천사와 같다고 하는 것은 역시 전부 이해할 수도 없어도 현재의 인간과 같은 삶이 아님은 확실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하늘나라는 일원론이며 지옥은 이원론입니다. 사실, 낙원에 있는 나사로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으며 음부에 있는 부자를 볼 필요도 없고 또 볼 수도 없습니다. 낙원이면 그 낙원의 천상적 인식에서 기쁨과 즐거움이 충만하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음부의 부자는 자신이 불꽃 가운데 고통을 가지며 구렁이 낀 건너편의 나사로를 바라보고 그 영광스런 행복의 모습을 바라볼 때 그 고통은 더할 것이며, 낙원과 음부의 이중적 고통을 더욱 심하게 가질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내용인 요한계시록에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서는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음부의 내용을 잠시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먼저 부자가 처한 “불꽃 가운데서”라는 장소적 의미와 불꽃이라는 내용입니다. 지옥은 현세적이며 지상적인 인식 개념이 더욱 뚜렷하기 때문에 불꽃이라는 것이 사실적이며, 지금 우리가 보고 경험하는 그대로의 내용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줄 압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저 언덕 너머 우리가 확연히 볼 수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으며, 차후 종말 이후 새 하늘과 새 탕이 도래할 때에야 비로소 인식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 대한 낙원과 음부는 시간적으로 영원한 세계의 의미보다 현실 개인적 삶과 죽음 이후에 있는 즉시적인 입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상에 있는 형제 다섯에 대하여 염려하며 나사로를 통하여 전도할 뜻을 보입니다만 이것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더러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또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대답은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라는 간결한 내용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
이제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여러분은 천년왕국에 대한 문제가 성경해석가들에 따라 견해를 달리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전천년설과 무천년설에 대한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무천년주의자들은 전천년주의자들을 세대주의와 같은 입장에서 보기 때문에 ‘역사적’이라는 말을 붙입니다. 그리고 전천년주의자들은 무천년주의자들에 대하여 후천년주의자들과 같은 입장에서 보기 때문에 무천년주의자들은 그 의견을 달리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천년왕국의 교리적 견해는 다음에 언급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높이기 위해 잠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20:1-10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 일 천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년이 차도록 그 후에는 반드시 잠궈 놓으리라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 천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 나와서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라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우리가 이 말씀에서 확실히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은 천년왕국과 사탄의 심판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것은 현세에 사탄은 결박되고 성도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영원한 하늘나라라고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에서 확실히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은 천년왕국과 사탄의 심판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것은 현세에 사탄은 결박되고 성도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영원한 하늘나라라고 볼 수 없습니다.
천년 동안 왕 노릇할 자는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동안 왕 노릇하니 이는 첫째 부활이라”는 말씀 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입니다. 천년이라는 시간과 왕 노릇에 대한 견해에 대하여 과연 이 천년을 문자적인 천년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영적으로 볼 것인지에 따라 다릅니다.
또, 베트너(boettner)의 말을 빌리면, 천년은 상식적이며 지상에서 싸우는 교회들과 세상을 떠난 성도들은 지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우리는 이미 천년왕국을 누리고 있으며 교회 시대는 천년왕국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영원한 하늘나라에서까지 왕 노릇할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왕 노릇 한다면 하늘나라에는 지배당하는 여러 계층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흔히 하늘나라에서 우리가 기뻐하며 즐겨 누리는 것을 상급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확신하건대 하늘나라에서의 의미는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상급을 원한다면, 또 상급이 있다면, 천년왕국에서 즉 현재의 교회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동안 왕 노릇할 것인데, 어쩌면 이것이 상급의 의미를 가질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많은 학생들의 질문을 받았습니다.
“ 우리는 교회에서 하늘나라에 가면 상급이 있다고 배웠습니다. 하늘 나라에서 과연 상급이 있습니까?”
하늘나라에서는 상급이 없습니다. 만일 있다면 천년왕국에서 행한 대로 받을 것이지만 이것도 잘못된 견해입니다. 이것은 첫째 부활(계 20:5)이라고 하는 구원의 한 방면의 의미일 뿐 결코 상이나 공로의 뜻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제 여기에서 시간적으로 발전한 전인류의 심판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요한계시록 20:11-15을 살펴보겠습니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로 심판을 받고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따라서 어떻게 보면 천년왕국 후 전인류의 심판 때에 이미 각자의 행위대로 구원과 멸망이 구분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보다 더 완벽한 미래의 하늘나라에 대하여 정확한 인식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역시 요한계시록 21:1-8을 보면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처음 땅과 처음 하늘은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세계를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이 하늘과 땅은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하늘과 땅의 형편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부득불 새로운 하늘나라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하여 우리가 현재 경험하는 하늘과 땅의 인식 개념을 빌려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전혀 하늘나라의 의미를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21:2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우선 “새 예루살렘”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새 시온성(사 60), 재건될 예루살렘(사 54장), 거룩한 땅(겔 48장)의 내용을 인용하여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의 광경과 새 예루살렘은 현 시안적 인식 밖의 문제로서 우리의 인식이나 지각이 그 모든 것을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루살렘이라는 경험적 인식을 빌려온 것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천년왕국 시대의 수도로 보고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궁시대로 취급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 새 예루살렘은 구약성경(사 54-55장, 겔 40-4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이것은 유대인 중심의 사상이었고 요한 계시록의 새 예루살렘은 영원한 하늘나라의 새 표현입니다.
그러면서 새 예루살렘이 전개되는데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라고 말합니다. 이 영원한 세계는 요한계시록 18장에서 세상의 종말을 고한 후에 오는 새 세계의 새 창조를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 18장을 보면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큰 땅이 환하여진지라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 하였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이에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가로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몹시 떨어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또 거문고 타는 자와 풍류 하는 자와 퉁소 부는 자와 나팔부는 자들의 소리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고 등불 빛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너의 상고들은 땅의 왕족들이라 네 복술을 인하여 만국이 미혹되었도다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이 성 중에서 보였느니라 하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바벨론 왕들이 범죄에 직접 가담하여 음행 했고, 땅의 상고들은 바벨론의 사치생활을 방조했으며, 바벨론의 번영에 간접적으로 참여했던 만국은 바벨론이 심판을 받을 때 함께 무너졌습니다.
이러한 현상과 내용은 로마시대 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마다 볼 수 있는 것이며, 최종 종말적 이 예언은 로마에서 성취될 것인데, 다시는 이 세상이 존재하지 아니할 것을 “큰 맷돌 같은 돌”을 바다에 던진 내용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우리는 새 예루살렘의 외형과 그 성의 재료, 성의 생활, 그리고 음식물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상징으로서 무궁한 하늘나라의 신비한 모습을 현상학적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을 뿐 그 이상은 표현과 이해가 어렵습니다.
어떤 주석가는 새 예루살렘(계 21:9-27)에 대한 주석을 쓸 때 보석상에 직접 가서 보석에 대한 공부를 하고 난 뒤 책을 썼다는 재미난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별 도움이 못됩니다. 상징적 의미나 비유적 의미를 이 땅의 보석을 공부하여 문자적인 해석을 한다면, 그것은 이미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새 예루살렘을 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이러한 보석을 전문가가 아니면 어떻게 그 내용을 다 알 수 있겠습니까? 새 예루살렘으로서 하늘나라의 직접적인 표현과 이해도 어려운데 벽옥과 수정가지 안다는 것은 퍽이나 어려운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언어 철학의 한 방법을 채택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보석들은 하늘나라의 맑음을 표현할 뿐 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비유의 한 형태인 직유의 벽옥을 구약시대에 대제사장의 흉배에 붙이기도 했으며, 또 하나님의 속성으로 청결과 자비를 나타낸다고도 합니다.
어쨌든 벽옥과 수정은 하늘나라의 맑음의 의미를 나타낼 뿐 복잡한 다른 의미를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문의 “맑더라”에서 그 의미를 확실히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숫자에 대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늘나라에서도 숫자가 필요합니까? 사실 알고 보면 하늘나라에는 수의 의미가 전혀 필요 없습니다. 하늘나라에서도 수의 개념이 지상적 인식 그대로 남아 있다면 그것은 큰 모순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절대로 하늘나라는 수의 개념에 영향을 받지 아니합니다.
하늘나라의 인식은 시간과 공간 개념에서만 가능합니다. 시간 개념은 수학적 질서에서 비롯되며 공간 개념은 기하학적 개념에서 비롯됩니다. 그렇다고 하여 수학적 기하학적 개념 자체가 하늘나라의 본질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단지 직관(直觀)이라는 표상(表象)에 불과한 것입니다.
좀 어려운 말을 빌린다면 하늘나라의 영생은 수의 존재적 질서에서 가능하며, 무한성은 공간 표상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하늘나라는 ‘크다’와 ‘작다’가 없습니다. 그 한 예로서 마태복음 5:19-20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여기에서 ‘크다’와 ‘작다’의 개념은 하늘나라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작은 계명 하나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는 뜻으로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의 잘못된 교훈을 시정하는 표현 양식입니다.
그 다음 요한계시록 21:12-17에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그 성에 성곽은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양의 십이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척량하려고 금 갈대를 가졌더라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그 성곽을 척량하매 일백 사십사 규빗이니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문에 열두 지파의 이름이 있고 성터에 열두 사도의 이름이 있는데, 이것은 구약과 신약의 교회요 하늘에서 모든 세대의 성도에 대한 구원의 집합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곽은 네모가 반듯하다고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상징적 의미로서 균형이 잘 잡힌 표현 양식일 뿐입니다.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180m x 12000)으로서 약 2천여km나 된다고 봅니다. 이것은 실로 엄청나게 웅장함을 의미하는 것이지 실제로 하나님 나라의 성곽이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란 것이 아닙니다.
숫자에 대한 상징적 의미에 대하여 예로 들어봅시다. 바닷가에 모래알이 일만 이천 개가 있다고 합시다. 이것은 많음이나 최대량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적음이나 최소량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운동장에 사람이 일만 이천 명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적음이나 최소수가 아니라 많음 또는 최대수의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기에서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란 것은 완전한 크기의 숫자를 뜻하며 ‘일백 사십 사’라는 숫자는 선민의 의미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 다음 하늘나라의 재료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진정 하늘나라의 재료가 이 땅 위의 것으로 되어 있을까요?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 21:18-22을 봅시다.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그 성의 성곽의 기초 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성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정이라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같은 정 금이더라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이 말씀은 과연 하늘나라에도 이런 보석들이 있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단지 상징으로서 그처럼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열거된 보석들의 이름을 모두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나 역시 모릅니다. 사실, 여기 열거된 보석의 분석은 할 필요도 없으니까요.
여러분은 계시에 대하여 상상해본 적이 있습니까? 일반적으로 ‘계시’라는 말의 정의는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다’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것은 하나님의 의도와 뜻 그리고 하늘나라의 비밀을 드러내어 놓는다는 것으로, 그 본질적 실상이 표현으로나 인식상으로 어렵기 때문에 부득불 이 세상의 것으로 나타내 준다는 의미입니다.
자, 다시 생각해 봅시다. 과연 하늘나라가 이러한 보석으로 장식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언어 철학의 한 방법으로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는 실제의 정금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직유적 표현을 사용했습니다만 직유는 ‘성의 길’에 대한 직관적 이해일 뿐입니다. 정금에 대해서도 분석을 해야 합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보석 전문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요한도 보석 전문가는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직유나 은유는 이해를 위해 보편적 개념을 불러일으키는 해석과 의미의 한 방법입니다. 그리고 이 정금의 직관적 이해를 위해 “맑은 유리 같은”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맑은 유리’는 정금의 일반적 관점을 말하며, ‘정금’은 하늘나라에 있는 성의 길에 대한 내용입니다. 정금은 맑은 유리와 같은 투명체로서 그 성의 길이 매우 아름다움을 의미할 뿐입니다.
직유나 은유는 그 본질적 주어의 의미를 한정 지워 줍니다. 절대로 그 의미를 확대하여 상상할 수 없는 데까지 이끌고 나가지 않아야 합니다. 따라서 정금에 대한 확대해석은 하늘나라에 있는 그 성의 길에 대한 의미를 오히려 그릇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계시의 한 형태는 좀 어렵지만 현상학적 인식론, 즉 영어로 말한다면 Phenomenological Epistemology인데, 도저히 계시 될 수 없는 하늘나라의 본질적인 의미를 이 땅의 것으로, 그것도 우리가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서 결정지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에 대하여 이해가 됩니까? 그렇다면 이번에는 요한계시록 21:22-27에 나타나 있는 하늘나라의 생활을 살펴봅시다.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돌아오리라 성문들을 낮에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는 밤이 없음이라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고 들어오겠고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 뿐이라”.
여기의 하늘나라는 성전도 없고 해와 달도 없으며, 성문들은 닫지도 않고, 부정한 것도 없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그리스도와 늘 함께 있음으로 성전이 필요 없고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며 어린양이 그 등이 되시기 때문이며, 출입의 자유와 가증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내용도 전혀 이 세상과는 다른 것이므로 하늘나라에 대한 바른 인식이 보다 필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늘나라의 음식에 대하여 22:1-5을 살펴봅시다.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의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로다”.
여기에 대한 주석가들의 해석은 다양합니다. 먼저 “생명수의 강”에 대하여 일부는 옛 에덴에서 발원한 네 강을 연상한다고도 합니다. 또 이 생명수의 강을 성령이라고 영적인 해석을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수의 강” 그대로 이해하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생명수의 강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고 그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가 달마다 맺힌다고 합니다. 이해가 됩니까? 우리가 문자 그대로 해석을 한다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라는 구절에 대하여 매우 큰 모순 점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23절에서는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라고 합니다. 해도 달도 없는데 어떻게 달마다 열두 가지 실과가 맺힌단 말입니까? 그리고 5절에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들은 삶의 풍성함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의미일 뿐입니다.
영원한 하늘나라에서는 시간의 구조가 필요 없고 낮과 밤도 필요 없습니다. 영원은 영원 그 자체일 뿐 시간의 구체적인 배열의 형태인 열두 달의 표현은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말입니다.
또 “그 생명나무의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에서 생명수의 강과 생명나무의 의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강의 발원이 하나님과 어린양이기 때문에 이것은 영원과 영생을 의미하며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는 흔히 헬라어 원어 그대로 “고치기 위해”라고 그 의미를 정리하지만 사실 새 하늘과 새 땅은 옛 에덴이나 낙원의 회복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낙원의 회복이라는 것은 새 하늘과 새 땅과는 전혀 다릅니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만유회복설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해석적 논의는 불가피한 것입니다. 만약 이 시대에 사도요한이 계시를 받는다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아니라 “완전한 새로운 질서 속으로 들어간다”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5절에 “왕 노릇하리로다”는 왕의 지배권이 아니고 왕의 영광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제1장을 공부하면서 어려움이 많았을 줄 압니다. 따라서 이 장은 하늘나라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어느 정도인지를 살펴보는 것으로 끝맺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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