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신앙의 근본 자세 - 이곳을 자주 찾는 분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내용들
1987년 6월 12일 공회와 백목사님 관련 일지를 정리하다가 이 지권찰회 설교 내용을 참고하라는 대목이 있어 면밀히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이 홈의 신앙걸음을 너무 명확하게 너무 은혜롭게 가르치고 있는 설교이기 때문에 자료실로 올렸습니다.
이곳은, 모든 것을 알되, 힘 있는 대로 알도록 연구할 것입니다. 여기 대한 말씀입니다.
이곳은, 그 행동이 그 연구를 따르지 못합니다. 그래도 알아야 할 이유를 말씀했습니다.
우선 해당 설교를 여기에 제목을 붙여 소개 한다음 항목별로 몇 가지를 소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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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87.6.12.금지
본문: 마4:17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간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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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진리 연구의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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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야 회개도 하는 법)
회개라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을 고치는 것이 회개인데, 회개의 순서는 먼저 옳고 그른 것을 아는 것이 첫 순서고, 그다음에는 옳은 것은 취하고 그른 것은 고쳐서 옳은 것으로 확립되는 것이 회개의 순서입니다.
따라서 진리 지식이 없으면 회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진리 지식이 있어 그 지식대로 하지 못한 것을 고쳐서 그대로 하려고 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적당히 알아야 한다는 유혹들)
"진리 지식이 있어 알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행하지 못할 것을 자꾸 알기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의 현 생활과 또 자기의 믿음의 힘과 일치되는 것만이 필요 있지 그 이상을 아는 것이 무슨 필요가 있나? 또 가까운 것만 필요하지 너무 거리 멀면 필요가 있겠느냐?’ 이래 가지고 유혹하는 주장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나라를 향해서 가는 사람들인데, 하늘나라 가는 그 길을 아는 것은 곧 지식이고, 또 길을 알아 가지고 그 길에 삐뚤어진 것을 고쳐서 바로 들어서는 것은 회개고, 또 바로 들어서서 걸어가는 것은 믿음이라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자기의 현 생활에 부합되는 거, 거리가 멀지 안한 거 그런 것만 해도 모자라는데 그 이상 너무 깊이 들어가서 궁극적으로 연구하되 깊이로 높이로 들어가는 것은 도리어 폐단이다. 이러니까 마치 일학년에는 일학년 과정만 가르치지 뭐 대학과정 같은 이런 것을 가르치면 아이들에게는 아무 해당되지도 안하고 소용이 없다.’ 이런 말들을 모두 다 합니다.
그리고‘성경의 진리 해석을 자꾸 깊이 길게 그렇게 하는 것은 필요가 없다. 또 너무 생활이 따라가지 못하는 그런 진리를 말하는 것은 다 지나친 것이고, 외의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신앙 생활로 잡을듯 말듯, 내가 걸어갈듯 말듯, 좀 힘쓰면 걸어갈 수 있는, 국민학교 학생들 가르칠 때에 이미 그 학생들의 그 정도를 맞춰서 자꾸 이렇게 교육해 나가는 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교회들도 그렇게 해야 한다.’ 이 주장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다 이런 이치에 맞추어서 설교하려고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아는 길이 막히면 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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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연구를 제한하는 것은 앞으로 나갈 길을 막는 일)
그러나 이것이 바로 교회들이 타락해 가는 이유입니다.
일반 교회들이 진리를 연구하는 것이 자꾸 ‘인간과 가까운 정도가 좋다. 너무 인간과 거리 먼 그런 것은 해당치 않는다.’ 이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그 진리를 배우고 알아 나가는 것을 자꾸 인간들이 제한을 해 가지고 가르치고 제한을 해서 배워 나가니까 시대가 점점 어두워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나중에는 그만 그 교인들이 ‘어디로 걸어가야 되겠나?’ 갈 길을 알지 못해서 거기서 방황해 가지고 방언파 지시파 신유파 신비파 계시파 불파 .... 뭐 이런 것으로 사람들이 자꾸 나갑니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을 모르기 때문에 좌우로 이리 치우치고 저리 치우쳐 가지고 자꾸 삐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군대를 인도할 때에 그 군대를 앞길로 인도해서 가야 할 앞길이 확실하고 갈 길이 많이 있으면 군인들을 때려 몰아서 갈 수 있습니다. 뭐 아무리 군인들이 간다 해도 힘이 모자라지 갈 길이 모자라서 못가는 그런 것은 없는 길로 인도하는 그런 길이 있습니다.
반대로, 군대는 지금 가려고 서 있는데, 앞으로 전진해야 될 군대가 전진할 길을 모르니까 좌우로 이리 저리 그만 흩어지는 군대가 있습니다. ‘이리 가나? 저리 가나?’ 가기는 가야 될 군대인데 이리 가나 저리 가나 방황해 가지고 흩어지는 군대도 있습니다.
지금 얼마 전까지는 하나님의 교회들이 이리 탈선 저리 탈선 해 가지고 갈 길을 알지 못하고 ‘어디로 가야 되느냐?’ 하는 그것을 모르고 이리 저리 탈선 방황하는 것으로서 나왔습니다. 그것이 왜 그렇게 되었느냐? 사람들이 하나님의 도리를 자꾸 깨달아서 더 깨닫고 또 더 바르고 더 좁고 더 옳고, 더 옳고 더 좁고 더 바르고 더 곧고 이렇게 하려는 것이 정상인데,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온전하심같이 온전해지려는 거기까지를 목표로 두고서 달리려고 해야 하는데, 그런 것을 하지 안하고 사람들이 자꾸 인간에게 맞춰서 하자고 하여 가야 될 앞길에 제한을 하는 것 때문에 흩어지고 탈선하게 되었습니다.
(두 신앙노선: 최종의 한 길을 찾는 길과 중도에서 그만 두는 길)
교인들이 걸어가든지 말든지 신앙 걸음에는 이 길로 가야 된다 하는 제일 좋은 길을 찾으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좋은 길을 찾게 되면 이보다 더 좋고 이보다 더 곧은 길이 없느냐고 이렇게 자꾸 찾아가는 그 방식이 하나 있습니다.
또 한 사람은 ‘그거는 가지도 못할 길이니까 더 좋은 것을 찾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현재 이 길로서 만족하고 이 길을 걸어가도록 만들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미 아는 것을 확고히 알도록 만들고 이미 아는 것을 실행하도록 만들어라.’ 이 면을 주력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를 제재하고 제한하게 됩니다. 그러나 실은 모든 교계들이 이렇게 나가기 때문에 다 어두워져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이 식은 망하는 식입니다. 어쨌든지 못 걸어가도 옳은 것을 알기부터 해 놓아야 합니다. 알고 난 다음 하다가 못 하면 또 힘쓰고 기도하고 이렇게 노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못 걸어갈 길이라도 알아야 회개는 할 수 있는 법)
못 걸어가도 아는 것이 유익된 것은?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에, 회개할 시간도 없고 행할 수도 없는데, 이제 숨이 깔딱깔딱거리는 마지막 시간이지만 알고 있는 사람은 회개는 할 수 있습니다. 알고 있는 사람은 ‘이거는 틀렸다. 이거는 잘못했습니다. 이거 내가 주님 앞에 고합니다.’ 알면 회개할 수 있지만 모르는 사람은 회개도 할 수 없습니다.
이래서, 세상을 떠날 때에 모르는 회개는 못 합니다. 회개하면 사유함을 받을 터인데 사유함을 못 받으면 거기 관련되어 있는 그 모든 심신의 기능은 다 멸망하고 맙니다. 그러나 회개하면, 자기가 행하지 못했으니까 기능을 마련하지는 못해도 있는 기능이 저주받아 멸망하지는 안할 수 있습니다.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일 두 사람이 지금 세상을 뜨는데 여유 시간이 없는데 한 사람은 예수 믿는 이치를 알기는 다 알고 한 사람은 모릅니다. 그러면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어찌 되겠느냐? 자기가 잘못된 것을 알면 고하여 사유함을 받는데, 아는 사람은 사유함을 받으니까 거기 얽매이지 않고 멸망에서 벗어나올 수가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은 고해서 사유함을 받지 못하니까 멸망에서 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물론 멸망에서 나와 가지고 여유 시간이 있으면 의를 건설해 갈 수 있으니 그래서 또 아는 것이 좋을 것이지만 일단 회개하는 데에도 좋습니다.
이러니까 하나님이 자기에게 알려 주시는 그때에 앎에 대해서는 스스로 제재하지 말고 얼마든지 파고 들어갈 수 있는 건 파고, 얼마든지 좁은 길을 찾을 수 있으면 찾고, 곧은 길을 찾을 수 있으면 찾아야 그것이 자기를 구원하는 길입니다. ‘내가 이 이상 더 할 것 없고, 그 이상 더 좁을 필요도 없고, 더 깊게 알 필요도 없다.’ 이래 가지고 자기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데 스스로 제재해 가지고 중단하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신앙의 발전은 제한이 없는 법)
우리가 걸어가는 신앙생활은 꼭 1학년에서 2학년으로 올라가는 그런 순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면 뭐 순식간에 얼마든지 신앙으로 많이 자라갈 수도 있고 또 얼마든지 성장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인간의 방편으로 제한하는 것은 좋지 못합니다.
이러니까 여러분들이 자꾸 죽는 날까지 알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또 아는 대로 행해 보려고 애를 쓰고, 또 그 알게 된 대로 못 했던 것은 하나님 앞에 고해서 사유함 받고, 또 그대로 실행해서 의를 건설하고 이렇게 자꾸 노력하는 이게 없으면 안 됩니다.
(주일학생들에게도 최고의 지식을 가르칠 것)
그러기 때문에 하늘나라에 대하여는 제한하지 말고 그저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얼마든지 이렇게 자꾸 달음질을 쳐야 하는데 이 달음질을 이것을 인간들의 그 정도에 따라서 달음질을 다 제한하고 마는 그것이 주일학교에도 있습니다. 일반 교회들은 ‘주일학교 학생들이 알아듣도록 동화 같이 이런 걸로 가르쳐야 되지 어찌 성경 그것을 진짜배기로 가르쳐서 되겠느냐?’ 이렇게 말합니다.
‘어린아이더라도 성경은 성령으로만 깨닫지 인간의 그 지능으로는 깨닫는 게 아니기 때문에 어린아이가 오히려 성령에 더 충만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래서 학생들도 진리를 가르치되 가르치는 제가 어느 정도에 있든지 가르칠 때는 자기로서 최고의 진리를 가르치고, 제일 곧은 진리를 가르치고, 제일 좁은 진리를 가르치고, 제일 옳고, 제일 곧고, 제일 바르고, 제일 속하고, 제일 쉬운 그것을 자기는 아는 대로 가르치는 것이 옳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인, 오늘 설교를 최고의 설교로)
왜? 그날 죽을지도 모르니까 네가 요것을 알기는 아는데 ‘요것은 내일 가르치고 요것은 명년에 가르치고 요것은 아주 어리니까 후명년에 가르치자.’ 이렇게 말하는 것은 교만에서 나온 것입니다. 생명도 언제인지 모르니까 어쨌든지 네가 이 시간 설교하면 이 시간에 너로서는 최고의 설교라고, 최종의 설교라고, 최정의 설교라고, 제일 가장 곧은 설교를 해야 합니다. 바른 설교 하고, 제일 깊은 설교 하고, 제일 옳은 설교를 해야 합니다.
설교자로서, 이 시간 네가 설교를 만일 하나만 한다면 무엇을 전하고 가겠느냐? 그래서 ‘내가 하나만 설교를 하라고 하면 요것을 설교 하겠다’ 하는 그 설교를 해야 합니다. 또 네가 아는 것을 증거하려면 어느 것이 너로서는 제일 최고고 또 최종이고 최정이냐? 그것을 가르치라 하는 것이 그것이 우리의 지혜요 하나님 뜻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권찰님들이 교인들을 ‘이것 뭐 가르쳐도 행하지 못하는 것을 자꾸 가르쳐 가지고는 소용 없다. 못 행하는 것 자꾸 가르칠 필요가 있느냐?’ 그래 가지고 배움에 제한을 하고, 또 자기가 연구함에 제한을 하고, 또 자기가 익히는 데 제한을 하고 하는 그것은 아주 나쁜 것입니다.
(3.공회 내에서 주의할 운동)
(세계교회를 타락시킨 이 운동이 학자들을 통해 공회에도 유입되는 중)
요새 지금 세계에서 이 물이 들어오고 있는데 이걸로 교회가 다 썩었는데 우리 총공회에도 얼마 전부터 그런 운동이 들어옵니다. 원래 우리는 ‘아! 그것보다 그게 진리다. 요것보다 그게 곧다. 요것보다 더 그게 바르다. 요것보다 그게 더 의롭다.’ 자꾸 요렇게 나갑습니다. 자꾸 보다 보다 나은 걸 찾으려고 하는데, 이제는 총공회 안에도 무슨 운동이 나왔느냐 하면 ‘그렇게 나가는 것은 너무 초절적이라서 안 된다. 우리 정도에 맞춰서 그만 보편화하자.’ 이렇게 보편으로 하자 하여 지금 이 교훈의 특수성을 완전히 죽이기로 그렇게 하는 운동이 지금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것이 다 어디서 나왔느냐? 학자들에게서 나오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단단히 정신차리지 않으면 나중에 가서 그말을 들으면 ‘참 그렇다. 이러기 때문에 그만 어중간이 가다가 어지간히 보통 해야겠다. 뭐 그 이상 자꾸 좁게 이렇게 하는 것은 인간이 그렇게 걸어가지도 못하는데 너무 과격해서 그것은 도로 유익이 없다.’ 이러는 유혹이 많을 것입니다. 지금 내가 간단한 시간에 말하지만.
(우리가 택할 길은 최종 한 길을 향할 것)
그렇게 해서 우리 진영에도 그런 운동이 지금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쨌든지 나는 바른 길 곧은 길 좁은 길 갈란다. 제일 좋은 길 갈란다. 진리를 이리도 말하고 이리도 말하고 열 사람이 이렇게 말하면 그중에 제일 올바른 걸 나는 차지하겠다.’ 이런 것이 하나 있고, ‘그 뭐 어지간히 가다가 그만 중간에 3-4가지 길이 나오면 그 정도에서 구별하는 것을 그만 중단하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다. 3-4가지 길이 있어도 그 가운데서 어느 게 옳은고 더 옳은 걸 찾자.’ "이제는 3-4가지 중에서 2가지만 남았다. 둘이면 이제 어지간히 하지 않았느냐?" `아니다. 둘 중에서도 어느 것이 더 옳은 지 그 중에서도 하나를 찾자." 요렇게 하는 사람이 있고, 그만 일반화해서 널펑하게 하는 사람이 하나 있어 우리 공회에도 이렇게 둘이 있습니다.
(교계는 세상과도 어울릴 수 있는 길을 환영)
물론 일반 교계는 그건 없습니다. 옳은 것을 가지겠다 하는 그것은 없고 어쨌든지 인화주의로 해서 그만 일반화되는 그걸 하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서 배운 진리를 다른 데 가지고가서 목회하면 당장 쫓겨날 것입니다. 그곳에서 목회하면 뭐 그 교회가 뒤비지고 야단이 날 것이고 또 그들에게 다 이단으로 정죄받습니다. 하나보다는 둘, 둘보다는 셋, 셋보다는 열에서 중단할수록 세상은 더 좋아합니다. 그러다가 아주 세상하고 다른 것이 별로 없는 그 자리까지 가는 사람은 더 좋아합니다.
저는 견해하기를 하나는 멸망이요 하나는 구원이라. 하나는 성전 밖마당이요 성전과 제단과 경배하는 자라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알려 주실 때에 얼마든지 제한받지 안하고 알도록 이렇게 죽는 날까지 알기를 제가 중단하지 말고 끝까지 알도록 노력하고 또 끝까지 행하도록 노력해야지 제가 ‘요만하면 됐다’ 제가 그것을 제한해 가지고 하는 것은 그거는 망령된 것이요 아직까지 참 안다고 해도 모르는 그 관계입니다.
(다 같이 기도합시다.)
너무도 주님 앞에 나아가는 길은 갈래길이 많고 모양도 많고 형틀도 많고 주장도 많습니다. 주님이 인도하시지 안하시면 주님의 인도하시는 하나만 되는 좁은 곧은 길을 갈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사 주님이 인도하시는 주님에게 피동되는 요것만이 사는 것이지 이래도 저래도가 아닌데 너무도 복잡하고 오묘하게 미혹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우리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시면 우리들도 다 실패됩니다. 아는 데도 실패하고 행하는 데도 실패하오니 우리를 붙드시사 바른 길을 걸어가도록 은혜를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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