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인, 오늘 설교를 최고의 설교로)
왜? 그날 죽을지도 모르니까 네가 요것을 알기는 아는데 ‘요것은 내일 가르치고 요것은 명년에 가르치고 요것은 아주 어리니까 후명년에 가르치자.’ 이렇게 말하는 것은 교만에서 나온 것입니다. 생명도 언제인지 모르니까 어쨌든지 네가 이 시간 설교하면 이 시간에 너로서는 최고의 설교라고, 최종의 설교라고, 최정의 설교라고, 제일 가장 곧은 설교를 해야 합니다. 바른 설교 하고, 제일 깊은 설교 하고, 제일 옳은 설교를 해야 합니다.
설교자로서, 이 시간 네가 설교를 만일 하나만 한다면 무엇을 전하고 가겠느냐? 그래서 ‘내가 하나만 설교를 하라고 하면 요것을 설교 하겠다’ 하는 그 설교를 해야 합니다. 또 네가 아는 것을 증거하려면 어느 것이 너로서는 제일 최고고 또 최종이고 최정이냐? 그것을 가르치라 하는 것이 그것이 우리의 지혜요 하나님 뜻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권찰님들이 교인들을 ‘이것 뭐 가르쳐도 행하지 못하는 것을 자꾸 가르쳐 가지고는 소용 없다. 못 행하는 것 자꾸 가르칠 필요가 있느냐?’ 그래 가지고 배움에 제한을 하고, 또 자기가 연구함에 제한을 하고, 또 자기가 익히는 데 제한을 하고 하는 그것은 아주 나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