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1979.11.1.목새
본문: 고전15:56-58
제목: 설교자의 자리 - 교인 중에 자기를 앉혀놓고 설교할 것
①설교가 너무 강한 자극으로 계속되지 않도록
어제 수요일 밤에 설교한 교역자님은 박력있게 잘 했습니다. 그런데 좀 주의 할
점은 첫째 그 말을 좀 부드럽게 해야 되겠소. 말을 부드럽게 해야 되겠고, 둘
째로는 그 높고 낮은 고저 청탁이 좀 아롱아롱하여 자연스럽게 되어야 하는데 그만 너무 높은 것만 말했습니다. 높으니까 사람들이 보고 들을 때에 들을 맛이 적습니다. 그러니까 좀 높을 때는 높고 낮을 때는 낮고 고것을 좀 자연스럽게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누가 좀 충격을 줬는지. 고저청탁이 좀 그렇다고 그렇게 충고를 받았는지 그분 이름은 말하지 않겠는데 여기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설교하라고 하니까 너무 또 살살 살살 살살 가다가 갑자기 꽝 이렇게 해 버립니다. 기도도 사람이 깜짝 놀랄만큼 그렇게 합니다. 그 분을 모든 사람이 따라해서 그리 하는데 은혜를 받아도 우습습니다.
②찬송으로 예를 든다면, 가사를 불러보면 곡이 저절로 나오는 것이 좋은 찬송입니다.
사람이 그 뜻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큰 소리가 나오고 또 소근 소근하는 소리가 나오고, 그 설교하는 그 뜻에 똑 그이 노래를 하는 것처럼 해야 합니다. 찬송도 곡을 지을 때 잘 지은 곡은 처음으로 해보는 사람도 그 곡이 잘 됩니다. 잘 짓지 않은 곡은 그것이 안됩니다. 처음으로 하는 사람도 자연히 그것을 따라 할때 자연스럽게 그 곡이 그 가사를 말할 때는 자연적으로 높아지고 자연히 울음소리가 나오고 자연히 낮아지게 되니까 그 가사에 따라서 곡이 자연스럽게 되는데, 별곡들은 꾸며놓아서 높은 것은 일부러 공부를 하지 않으면 못 부릅니다. 그것은 잘못 된 것입니다. 자연히 안되는 것은 그렇습니다.
③명령성이 많으면 처음에만 은혜를 받게 됩니다. 설교는 간증성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하는 투에 명령성이 많은 분들이 있는데, 명령성이 많으면 일시는 은혜를 받습니다. 사람이 처음 한 번 두 번 만났을 때는 은혜를 받아도 그 교회 담임으로 시무를 하게 되면 처음에는 은혜를 끼쳐도 나중에는 그 교인들이 은혜를 안 받습니다. 김명재조사님 이병준조사님이 설교하는 것은 성격이 좀 같습니다. 명령성이 많으니까 몇 번은 은혜를 받습니다. 그래서 교역자를 하나님처럼 이렇게 대우를 하게 되고 은혜를 받는데, 목회자로 모셔서 같이 살게 되니까 좀 보게 되고 달라지게 됩니다. 이러니까 명령성이 많은 그런 설교는 목회를 못합니다.
그냥 한번 듣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은혜를 받을지라도 목회하는 교회에서는 교인들이 은혜를 안 받고 자라지를 않습니다. 설교는 명령성보다는 간증성이 있어야 됩니다. 간증을 하는 것. 그러면 설교하는 사람이 자기는 따로 있고 교인들만 그 말씀을 받을 것이 아니라 자기도 지금 그 시간에 교인들 안에 포함돼 가지고 지금 우리가 이렇다는 그런 간증성으로 해야 합니다. 그 안에 포함되어서 공통성과 의논성이 있어야 됩니다. 자기가 대화해서 말을 하면 상대방에서 응답이 올수 있는 그런 성격의 설교를 해야 됩니다.
④안동지방과 순천지방을 예로 든다면
그때 안동에 집회를 가서 그 지방 사투리 말을 듣고서 놀랐습니다. 아 이곳이 양반 사는 곳이로구나, 이 안동이라는 데는 역사에 아마 불거져나온 그런 악독이나 잔인한 인물들이 나지 않았겠다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왜? 모두 다 말하는 것이 상대방에게 그 화합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자기가 상대방에게 그 친목을 요청하는 저자세적인 그런 성격을 띤 말입니다.
그런데 순천에도 가서 봤는데 순천에서는 아마 미끈미끈한 그런 외식장이가 많이 나오겠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왜, 거기 사람들은 모두 말하는 것이 간판주의입니다. 그 조그만한 사람도 언어를 사용할 때 "어... 어... 아버지여!" 이렇게 일부러 연습을 해 가지고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그게 뭐이냐 하면 자꾸 나타내려고 하는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는 지방이라는 것을 봤습니다.
⑤설교하는 자는 그 설교를 받는 교인 자리에 함께 앉아 들어야 합니다.
설교는 다 간증이라야 됩니다. 이 말씀이 이런데도 이것을 우리가 하지 못한다, 이렇게 해야 좋을텐데 이걸 못한다, 이렇게 하라고 우리에게 하셨다 이런 식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설교하는 자기는 그만 너무 탁월해서 그 밑에 있는 교인들만 들을 것이라 하니까 그 설교가 차차 많이 하면 할수록 감화가 적습니다. "원래 저렇게 땍땍 거리는 분이라’그곳 교인들은 화합이 안됩니다. 혼자 말해봐야 밑에서 듣는 사람들은 "원래 말은 저리 하는 것이고, 또 우리 생활에는 그 뭐 관련없으니까..."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목회자와 교인이 함께 움직여 가는 그런 것이 적습니다.
그래서 어제 저녁 설교는 그 깨달음은 잘 깨달았는데, 설교하는 사람의 속은 그렇지 않았으나 표현이 그렇게 되다 보니까 그것을 좀 주의해서 간증으로 표현했으면 더 좋겠습니다. 자기도 그 설교하는 내용 중에서, 한쪽은 하나님의 명령 받아서 하나님의 뜻을 자기가 전달하고 또 한쪽은 교인 속에서 자기도 교인들과 같이 그 명령과 그 교훈을 받으면서 그 중에서도 자기가 제일 앞서 행해야 됩니다. 그런데 오히려 행함에는 자기가 제일 말단의 사람으로서 나타납니다. 그러기 때문에 설교하고 난 다음에 그 설교는 하나님이 하셨고 자기는 그 명령을 받고 그 명령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이 조금도 다름이 없이 나타나는 것이 없으면, 그런 회개가 없으면 강단 생활을 몇 해 하지 않아서 나중에 껍데기가 됩니다.
⑥설교가 설교자 자신을 향해 회개로 역사하지 못하는 경우는 불행하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흥사들이 대개 목회를 못합니다. 부흥사들이 목회를 못해요.
부흥사들이 자기가 목회하는 곳에서는 배척을 당하는데, 아 그분이 부흥사로서는 참 가는 곳마다 은혜를 끼치는데 목회자로서는 목회를 못해요. 한 달이나 두 달이나 혹 서너 달이나 있으면 그만 교인들이 권태증이 나서 암만 말을 해야 다른 사람이 그 말을 들어도 감화가 안 되고 이러니까 그만 쫓겨 나갑니다.
박영기 조사님이라고 세상을 떴는데, 그분이 은혜 생활을 잘한 분입니다. 부흥회를 돌아다니다가 사람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아예 목회는 안 되고 이러니까 나는 부흥회나 다닌다 하면서 커다란 가방 둘을 마련해서 하나는 자기 요긴한 서적을 넣고 또 하나는 의복을 넣어서, 가방 둘을 만들어 놓고 이제 집회만 하기로 그렇게 작정을 하고 다녔는데 차차 차차 그 길도 막혀 누가 청해야지. 목회 못하는 사람은 집회를 청하지 않습니다. 목회를 잘하는 사람은 부흥회를 가지 않으려고 해요. 그런 사람들은 집회를 가지 않으려고 해서 그렇지 청하는 것은 얼마든지 많습니다.
또 그 사람도 자꾸 안 갈려고 하지만 어쨌던 목회자는 설교에서 자기가 제일 은혜를 많이 받아야 됩니다. 은혜를 많이 받는다는 것은 은혜를 많이 받았으면 회개할 점이 제일 많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회개할 점이 제일 많게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장로를 세우면 장로는 꼭 교훈 장로를 만들어 교훈을 시켜야
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 설교한 자기 설교에서 자기 회개가 제일 많이 되고 또 참 하나님 앞에 부끄럽고 회개할 것이 많기 때문인데, 만일 그 사람이 회개의 위치, 회개의 길을 잊어버리면 그만 사망이요. 사람은 그 회개의 은혜를 회개하는 그 은혜를 못 받으면 그만 죽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이 회개하는 그 은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