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이단 정죄의 기준이라고 발표되는 "기준들"의 위험성
과거 박영관목사님, 한종희목사님, 또 이곳에 소개하는 최삼경목사님 등은 이단에 대한 대처를 앞장 선 분들입니다. 여기 대표적으로 소개한 글이 있지만, 이분들의 이단 기준은 말할 것도 없이 성경과 교리 기준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기준으로 이단정죄를 하려면, 교계에는 한 교단만 남고 다른 교단들은 전부가 다 이단이 되어야 하는 기괴한 일이 따릅니다.
이단을 이단으로 정죄하는 일은 교회를 위해 크게 수고하는 일이지만, 이단을 가려내고 정죄하는 이들이 정확무오 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이단이라 한다고 다 이단되는 것이 아니며 그들이 제시하는 이단 기준 역시 그들 스스로 세운 기준이라는 것을 참고하는 것이 더 앞서야 할 것입니다.
이곳은 위에 말한 분들의 이단 기준과 같은 기준을 가집니다. 그러나 이런 기준으로 이단이라 할 때는 입 안에 두고 마음 속으로 생각하는데 그치고 있습니다. 외부로 발표할 이단은 기독교가 기독교로 성립되는데 꼭 필수적인 교리 몇가지에 관련되는 경우입니다. 성경 해석을 두고 학자들마다 교단들마다 다 제각각 깨달음이 다를 수 있는데 그렇게 해석이 다른 경우 전부를 두고 이단이라고까지 해야 하는 기준을 다음 글에서는 제시하고 있습니다.
---------------------------------------------------------------------------------------
최삼경목사님의 "교회와 신앙"에 발표된 글
서론: 이단과 성경
1. 이단이란 무엇인가
한국에는 어림잡아 100여 개의 이단이 있는데, 그 중에 외국에서 들어온 소위 외래파는 열 개밖에 없다는 점을 볼 때, "한국교회는 과연 이단의 천국인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 예수, 인간 하나님이 50여 명이나 되며, 숨은 이단까지 꼽는다면 200여 개는 능히 되리라고 본다. 왜 이렇게 이단이 많은가, 그 대책은 무엇인가를 따지기 전에 이단이 무엇인가부터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창세기 3장에서부터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기 시작하던 사탄은 요한계시록 20장에 이르기까지 성도를 미혹한다. 성경은 이들을 "양의 옷을 입은 자"(마 7:15), "가만히 들어온 자"(유 1:3-4), "미혹하는 자"(요일 3:7-11), 또는 "거짓 그리스도, 거짓 예언자"(마 24:24) 등으로 부르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이단이라 하는가?
결론부터 말한다면 한 마디로 이단이란 교리적으로 잘못된 것을 이단이라 한다. 한국의 성도들은 이단문제를 교리와 연결시키지 않고, 윤리문제와 연결시키는 경향이 짙다. 이는 잘못이다. 이 말은 윤리적인 잘못은 교리적인 잘못에 비해 문제가 적다는 말은 아니다. 이단문제는 윤리적인 문제와는 별개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 안식교 같은 이단은 윤리적으로 성결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단이다.
예를 들어보자. 내가 기독교방송국에서 이단에 대한 방송을 할 때 강의 후, 모인 방청인들의 질의를 듣게 되었는데, 교리적인 질문은 단 하나도 없었다는 점이다. 돈 문제나, 성 윤리 등의 윤리적인 문제만 호소하여 강사를 마치 종교경찰로 착각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윤리 문제를 교리 문제보다 덜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단의 문제는 교리적인 문제에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교리적으로 무엇이 잘못되면 이단이며, 어느 정도 잘못될 때 이단이라 할 수 있는가? 한 마디로 모든 교리에서 이단이 발생할 수 있고, 지엽적인 문제가 아닌 핵심적인 교리에서 벗어날 때 이단이 된다.
예를 들어보자. 요한이서 1장 7절에 보면,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라고 했다. 여기에 보면 예수님의 인성을 부정하면 이단이라고 했다. 이 말은 요한이 예수님의 인성을 부정하고, 신성만 인정하는 도케니즘(가현설주의자) 이단에 대한 말이었다. 또한 예수님의 인성을 부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단이 될 수 있다. 예컨대 도케니즘과는 정반대로 예수님의 신성을 제한하던 아리우스도 이단인 것과 같다. 그런 점에서 모든 교리에서 이단이 발생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양성(兩性) 문제만이 아니라, 삼위일체론, 창조론, 인간론, 구원론, 교회론, 계시론, 종말론 등 어떤 교리로부터도 이단이 발생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2. 성경에 대한 이단의 두 가지 입장
성경과 접촉점을 가지지 않았다면 기독교 이단이라고 할 수 없다. 성경과 접촉점을 가지고 있고, 최소한 성경적 분위기를 가졌을 때, 기독교 이단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이단이 보는 성경계시는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성경계시 외에 자기계시를 가진 이단이요, 둘째는 성경계시만 계시로 인정하는 이단이다. 대부분 이단은 성경 외에 자기계시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으나 그렇지만은 않다. 예를 들어 통일교는 성경 외에 「원리강론」이란 자기계시를 가지고 있고, 몰몬교도 성경 외에 「몰몬경」이란 자기계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성경만 계시로 인정하는 이단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오히려 때로는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무서운 이단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실제 예를 들어보자. 보는 사람의 견해에 따라 안식교나 여호와의 증인을 전자에 속한 이단으로 볼 수도 있다. 안식교의 경우 화이트 여사의 대쟁투를 성경 외의 계시로 인정한다고 볼 수 있으나, 표면적으로 그렇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물론 세분하자면 성경만 계시로 인정하는 이단은 둘로 나누어 보아야 한다. 실질적으로는 자기계시를 가지고 있으나 표면적으로 성경만 계시로 인정하는 이단이다. 비록 안식교나 여호와의 증인은 내면적으로 자기계시를 가지고 있더라도 기성교인에 대한 표면적 주장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그런데 왜 이 같은 구분을 하게 되는가. 그 이유는 실질적으로 성경만 계시로 인정하든, 표면적으로만 성경을 자기계시로 인정하든, 여기에 속한 이단이 더 무서운 이단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정통교인들 마음 속에도 이들에게 두려움을 가지고 있으며, 논쟁을 하다보면 오히려 이단자들이 성경을 더 사랑하는 것 같이 되고, 저들은 성경 속에 있고, 우리는 성경 밖에 있는 것처럼 되는 것이다.
이제 그 초점을 구원파 이단으로 돌아가 보자. 이 구원파야말로 자타가 부정할 수 없는 성경만 계시로 인정하는 이단이다. 그러기에 가장 무서운 이단 중의 이단이 구원파이다. 이단이 성도를 미혹하는 자들이요, 성도를 속이는 자들이요, 가만히 들어와 양을 노략하는 자들이라는 점을 볼 때, 성도를 미혹하는 그 힘은 성경만 계시로 인정하는 이단이 더 강하다고 보아야 하고, 통계적으로 그러하다. 그렇게 볼 때 여호와의 증인과 안식교를 경계해야 하고, 더욱 경계해야 할 이단이 구원파이다.
3. 문제는 성경해석이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성경만 계시로 인정하는 이단이 더 무섭다고 했다. 그러나 성경만 계시로 인정하든, 성경 외에 자기계시를 가졌든, 우리 논쟁의 초점은 성경에서 찾아야 한다. 이단 연구에 있어서 두 가지 자세가 있다고 본다. 하나는 현상학적 연구요, 또 다른 하나는 신학적 연구 내지는 성경해석학적 연구이다. 전자의 연구도 중요하다. 그러나 성경해석학적 연구가 이단연구의 핵심이라고 본다. 그 이유는, 앞으로 이단을 교리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정의한 것에 비추어 볼 때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성경이다. 비록 성경 외에 자기계시가 있는 이단이라도 그들이 주장하는 최소 최대한의 성경적 접촉점 그것이 우리 논쟁의 핵심이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이단에 수십년씩 빠졌다가 돌아온 자들마다 정통교회의 이단 비판 서적을 보고, 그들 이단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본인이 볼 때, 이단에서 나온 자들은 이단에 대한 이해는 깊으나 비판의 기준이 약하고, 이단에 빠지지 않고 이단을 비판하는 자들은 비판의 기준은 강하나 이단에 대한 이해가 약하다. 이단자들이 가진 성경 외의 자기계시나 교리기준을 이해하기가 이렇게 어렵다는 말이다. 이것이 이단전문연구가에게도 어려운데 일반목회자나 하물며 평신도야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네 것"은 모르더라도, "내 것"만은 분명히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내 것"이 바로 성경이다. 그런 점에서 성경이 문제다.
특별히 성경해석학적 기준과 방법이 문제이다. 이런 점에서 이단논쟁은 성경해석학적 논쟁이요, 특히 구원파 논쟁은 성경해석학적 논쟁 자체라고 볼 수 있다. 이 책 자체도 그런 점에서 쓰여졌다. 하나의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그 잘못된 해석을 적용하면 결국 사망의 길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잠언 기자는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14:12)라고 했다.
예를 들어 "피 채 먹지 말 것이니라"(창 9:4)는 말을, 수혈하지 말라는 말로 해석하여 수혈을 거부하다 죽어가는 여호와의 증인들을 보라. 그런 점에서 본론의 구원파 교리비판은 성경해석학적 오류를 지적하고 반증하는 것이다.
4. 이단을 사용하시는 하나님
누구든지 하나님의 역사에 사용된다. 사용되는 방법은 두 가지 중 어느 한 가지에 속한다. 하나는 긍정적인 면이요, 하나는 부정적인 면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구약의 바로도 사용하셨고, 신약의 가룟 유다도 사용하셨다. 단지 부정적인 면에서 사용된 것이다.
어느 시대나 하나님의 사람이 있고, 이를 괴롭히는 이단이 있었다. 그러기에 신약 27권중 이단을 경계하지 않았던 곳은 없다. 또한 신앙의 선진들의 글 속에는 늘 변증적 요소를 담고 있다. 초대교회 교부들의 글 속에 이단논쟁이 없는 자는 거의 없다. 바로 하나님께서 이단을 사용하신다는 증거이다.
예를 들어 아리우스의 반 삼위일체론이 아다나시우스의 삼위일체론을 낳게 했다. 이처럼 이단은 정통교회의 신앙적·교리적 약점을 자극하고, 보완하고, 수정하고, 견고히하는데 공헌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원파는 무슨 공헌을 했는가? 어떤 점에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이단인가? 구원파가 생긴 배경은 장로교 신학과 워치만니 사상이다. 권신찬 씨는 장로교 목사였다는 점과 워치만니 사상과 상통하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한 마디로 구원파 문제는 죄와 구원의 문제임을 알아야 한다. 이 점에 대한 기성교회의 약점을 뚫고 들어온 이단이요, 또한 이 점에 대한 신학적 필요를 자극하여 구원의 확신문제를 정립하게 한 것이다.
표시할 내용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