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본문5-백영희 신앙의 본질 - 경건의 사람
V.백영희의 신앙본질
이제 한국교회의 정통성이 신사참배를 통해 고신으로, 고신의 세상주의 때문에 백영희의 총공회로 넘어오게 되었음을 1930년대로부터 1960년대까지에서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총공회의 1960년대 이후 역사는 작게는 총공회의 신앙역사가 될 것이고 넓게는 한국교회의 정통사가 될 것이다. 더 확대한다면 칼빈 이후 개혁교는 또 다른 천주교의 모습으로 세상주의를 탈피하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던 바, 초기 개혁교의 모습을 되찾고 오히려 그 모습에서 정상적으로 성장했다면 가져야 할 진정한 후기 개혁교의 모습을 가진 것이 백영희의 총공회 신앙노선이니 세계교회사의 관점에서도 살펴볼 일이다. 이런 교회사적 의미로 나가게 되기전 우리는 백영희의 신앙성격을 좀더 자세하게 관찰하기 위해 그의 신앙을 단면으로 분석하였으면 한다.
1.경건의 신앙
①진정 하나님만을 상대했던 사람
(가.경건의 내적인 면)
백영희, 그는 순간의 생각 속에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상대하며 살았던 사람이다. 혼자 있으면 명상 가운데 하나님과 대화하고, 다른 사람과 함께 있으면 하나님까지 모셔놓고 3자간의 대화로 사람을 상대했다. 모든 교회 안팎의 일 처리에도 하나님을 모셔놓고 하나님의 눈 앞에서 처리하였으니 그는 하나님을 참으로 동행했던 경건의 인물이라고 하겠다. 경건이나 하나님 동행이라는 표현은 우리가 너무도 자주 사용하고 있지만 실상 그렇게 생활 속에서 간단없이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역사 속에서 성프란시스나 산다싱 칼빈 등 불과 몇 사람밖에 손 꼽을 수 없는 신앙의 수준이다. 그가 대인관계에서 늘 첫머리에 떠올리고 지켜 산 제목이 바로 "하나님은 안 보고 사람만 대한 죄를 회개하여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대할 것"이다.
(나.경건의 3갈래 외적인 면)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이렇게 살아갔으니 가족 동지 교계를 향하여 그 처신이 또렷하게 나타났다. 오직 하나님을 기뻐시게 하는 일, 그 범위 안에서 형제 사랑도 희생도 교제도 있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고 하나님이 섭섭해 할 일을 두고는 어떤 인간과 어떤 오해와 비난과 박해와 배척이 생기더라도 단호하였다. 넓게는 일본 총독부나 6.25의 점령군에게는 일언지하에 거절할 일이 생겼으니 늘 생명을 버리고 살았다. 죽음을 사모하여 기다리는 세계에서 살았으니 그는 세상이 감당치 못하였다.
평화시 교권을 두고 흥정하고 접근하는 동지들에게는 그렇게 매정할 수 없었으니 교계에서 제거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교단의 교권을 쥘 수 있는 여러 기회가 있었으나 한번도 주저하거나 뒤돌아 본 적이 없었다. 전국적 지명도를 가진 교회들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도 아득히 초월하고 있었다. 변영태총리시절 총리 부인과 장관부인들이 중심이 되어 청빙하겠다는 간청에 "교회란 특별한 사람을 위해 특별하게 세우는 것이 아니라"고 한마디에 거절하였던 것이 단적인 예가 되겠다. 대통령을 배출한 서부교회였지만 재임 전, 재임 당시, 재임 후 단 한 마디도 광고해 본 적이 없었던 차원에서 살았다.
성공적인 목회의 결과로 돌아오는 교회내의 여러 가지 대접을 두고는 가족 친지들의 인간적 간청이 있을 수밖에 없었으나 하나님 앞에서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난 그이였기 때문에 그렇게 매정할 수 없었다. 그러니 따뜻한 가정과 형제애를 나누기란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형제 친지들이 목회를 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그로부터 가족애를 느낀 이들은 그가 길렀던 신앙의 자녀들뿐이었다. 그의 생전이나 사후 그의 신앙길을 그대로 이어가는 이는 그 신앙의 자녀들이며 그의 육의 형제 친지 목회자들 중에서는 거의 없다.
(다.교회의 맥을 이어가는 시대적 경건)
말로는 쉬우나 진정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자기 눈 앞에 모셔놓고 정권과는 육체생명을 내놓고 교계와는 목회생명을 매장당하고 가족친지와는 의와 정을 단절하기란 어렵다. 신사참배와 6.25는 경건의 심층분석을 2중으로 시험했고 신사참배라는 예비분석에서 통과한 이가 불과 수십이었고 6.25라는 본시험에서 통과한 이는 주남선 백영희로 이어지는 신앙계통만 현재 한국교회에 이어지고 있는 정도이다. 교회사에 이어지는 맥은 끊어졌으나 이 두 사람과 같이 가정과 교권과 정권을 완전히 초월하고 넘어선 경건은 주기철, 김현봉 등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물론 전혀 교회사에 나타나지 않고 숨겨둔 경건은 더 많을 것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②인간 제도에 초월하여 살았던 사람
(가.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나선 신약의 제도)
구약은 정하신 제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상대하였다. 신약은 예수님의 대속 완성으로 각자에게 그리스도가 바로 대제사장이 되셨고 따라서 모든 성도는 하나님을 직접 상대하게 되었다. 하나님을 바로 상대하고 그 말씀에만 움직이게 되는 것이 신약교회의 나갈 길이지만 이런 정상의 길을 걸었던 교회시절은 2천년 교회사에서 불과 2번 정도, 그것도 아주 잠깐만 비춰지고 있다. 초대교회에서 1차로 신약교회의 원형이 잠깐 나타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구약의 제도를 통한 구원론이 교회를 잠식하여 결국 천주교로 결말을 보았다.
하나님 상대를 개인들이 직접 하도록 교회가 협조하고 지원하는 정도에서 그쳐야 할 것이 신약교회인데 오히려 유형적 교회가 나서서 신약교인들에게 하나님을 상대하는 절차를 만들어 이 인간제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바로 만날 수 없도록 차단하고 나선 것이 바로 천주교라는 형태로 신약교회사 1천년을 잠식해 버렸다. 그 시기를 590년대에서 1500년대로 잡고 있지만 그 시작은 벌써 초대교회 도중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오늘 기독교는 이 천주교 역사를 정죄하고 출발했던 교회다. 그러나 천주교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은 제도의 벽을 루터와 칼빈이 전부 제거를 하였지만 그들의 당시에 잠깐 그 모습이 있었고 또 그 개혁기를 막 벗어나는 시점부터 교회는 하나님을 직접 상대하는 경건 대신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인간의 여러 제도들을 개발하였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문화적 배경을 고려한다면 천주교에 못지 않은 제도들이 완벽하게 설정되었다. 1500년 전이라는 시대차이를 고려한다면 천주교 못지 않은 예배의 형식과 절차를 가졌고 교단과 교회마다 그 조직체계의 피라밋구조가 또한 천주교에 못지 않다. 성직자로 대표되는 교회의 타락 역시 천주교를 능가하고 있다. 예배당의 화려함과 정교함 그리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이 하나님과 만날 수 있기에 편리하도록 시작했으나 그 마침은 육체라고 하겠다.
(나.보이는 하나님을 선호하는 것이 타락의 본능)
구약의 모든 의식과 제도와 형식을 벗겨 주고 말씀으로 바로 하나님을 상대케 하였으나, 육체의 눈이 하나님을 봐야 믿겠고 육체의 귀가 청감에 좋은 소리를 들어야 하겠다는 것이 육으로 난 육의 사람이다. 중생된 사람, 영으로 난 영의 사람은 육을 벗어버리고 육 속에 영이 듣고 보고자 하는 바를 사모하고 추구하게 되니 말씀이면 넉넉하게 된다. 결국은 40일간 모세를 보지 못하자 금송아지를 만들어서라도 봐야 믿을 수 있었던 타락성이 오늘에도 잔존하여 말씀의 이치만으로는 만족이 되지 않으니 결국 종탑, 강단을 포함하여 보이는 예배당을 한껏 꾸미게 된다. 그 화려하고 웅장함을 보고서야 하나님의 위엄을 느끼게 된다는 심리이니 천주교가 갔던 길이였고 그 이치는 불교로 통하는 것이다. 보이는 모양으로 꾸며 사람을 위압시키는 것이 전부요 보이지 않는 단조로움과 단순함으로는 도저히 감동이 없다는 것이다.
예배당과 같은 건물 뿐이 아니다. 설교가에게 가운을 입혀야 하고 강단용 성경을 고급화 하여야 하며 찬양대가 울리는 소리가 청중을 압도하며, 교단의 헌법이 눈 앞에 펼쳐져야 이제 교회가 정상으로 운영된다는 느낌을 가진다. 수도 없는 위원회와 부서들이 조직화되어 도표로 나타남으로 그 조직표 앞에 비로소 순종심이 나오고 있다. 최고의 절정은 목사는 하나님의 종이라 반대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여 구약의 선지자를 신약의 목사로만 한정하는 죄에 나아가고 있다. 전국규모로는 개개교회가 조직을 하고 지방으로는 노회가 전국으로는 총회가 조직되어 아무리 진리에 틀린 결정이라도 전국교회가 교회헌법의 조직과 운영으로 결정해 버리면 그것이 진리가 되고 반대하는 이는 이단으로 정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만하면 천주교와 다른 것이 무엇인지 그 본질적 차이점을 규명해야 할 시점이다. 여자를 교회의 장로로 세우면 정죄받던 교단이 어느날 총회 다수결결의로 여자를 안수하도록 결정하자 그날부터는 여자장로를 거부하면 이단이 된다.
신약의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가 말씀만 들고 성령의 인도를 찾아가는 것으로 전부를 삼았다. 그러나 교회를 세상주의로 만들려는 사탄은 세상에 능한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을 배제시킨 교회 안에다 세상제도와 운영을 서서히 그리고 꾸준히 집어넣고 결국은 세상주의 교회를 만들어 버린다. 물론 교회의 모든 제도가 만들어지고 발달될 때는 "복음을 위해서"였고 또 "하나님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진행이 세상을 향하는 것이 문제였다.
(다.초대교회를 변질시킨 당대의 제도를 초월하는 경건)
초대교회는 하나님을 직접 상대하고 또 그렇게 되도록 했으니 거저 순종만이면 된다. 그후 시대가 인간의 고안으로 세상을 투입하기 시작하여 몰래 넘어온 제도들이 생겨지게 되면 교회의 노선이 둘로 나뉘게 된다. 옳은 노선을 택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인간으로는 세상주의 교회를 따르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특별 인도를 선물로 받은 이들이 생각지도 않았는데 복된 노선에 서게 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시대가 많이 흘러 천주교가 본격 출범하고 또 개혁교가 천주교에 버금가는 진용을 갖추게 되면, 그 제도를 이길 경건의 깊이 경건의 실상을 가진 이들이 아니면 결국은 대세를 장악한 교권 앞에 머리를 숙이고 한 그릇 밥을 얻어먹는 밥통목사들과 교인들이 양산된다. 오늘 뚜렷하게 틀린 제도를 대학강단이라는 직위 때문에 눈감지 않은 신학자는 없다고 단정한다, 특히 교회사 신학자라면.
백영희의 경건은 수백 수천년을 넘어온 제도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만나는데 지장이 되면 그렇게 간단하게 정리를 하였다. 말씀대로 순종하는 일에 진정 장애물이 되는 것은 즉시로 정리해 버렸다. 그의 기준은 오직 하나님과 말씀이었으니 그는 아무도 넘어가지 못하고 주저앉는 교회의 잘못된 제도를 자신 속에 가진 강한 경건으로 전부 정리한 인물이다. 한국교회사에 김현봉과 백영희로 대표될 수 있다. 김현봉은 혼자 일어섰고 또 당대에서 끝이 났다. 그러나 백영희는 고신, 주남선의 경건을 이었고 또 총공회로 아직 이어가고 있으니 교회사가 주목할 일이다. "개교회주의"적 장로교라는 표현으로 요약될 수 있다. 즉 예수교장로회 한국총공회 라는 교회운동으로 한국교회 앞에 그 모습을 보였다. 이미 학문적 가치비교에서는 그 유례가 없고 대체유형이 없을 정도로 초대교회의 모습을 재현하였다. 또 교훈으로는 개혁의 첫 사람들인 루터나 칼빈의 교리 노선을 바로 이어나가고 있다. 백영희의 경건의 의미로 파악되기에 충분한 내용들이다.
교회의 헌법을 폐지하고 성경법유일주의에 하나님의 역사해 오신 과거를 참고하자는 주장으로 그의 초대교회 재현 정신은 시작된다. 다수결이라는 것이 교회를 세상으로 끌고 가는 원수이니 그 이름이 민주주의라 다수의 인간이 중심되는 민주주의를 절단시키지 않고는 교회의 타락을 방지할 길이 없다는 것이 그의 초대교회 구현의 두 번째 외침이다. 교회의 머리 위에 하나님을 대신 할 수 있고 대체 할 수 있는 상임 교권인 총회장, 산하 교회들을 교권으로 움직일 수 있는 우두머리라는 제도가 들어서 바로 믿으려는 성도의 씨를 다 말려버린다는 절규가 세상이 된 오늘 교회를 향해 외치는 백영희의 신앙본능이다.
신사참배를 해야 한다는 결정, 교단헌법에 의하여 다수결로 결의하고 총회장은 그 결의와 집행에 앞장을 섰다. 그리고 모든 교회의 분열과 속화타락에는 이 3가지 요소가 완벽하게 역할을 맡았다. 3가지를 제거하지 않고는 교회의 타락과 속화는 과거도 앞으로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이 백영희의 깨달음은 그의 높은 경건이 아니고는 나올 수 없는 것이다.
③평생을 자라간 사람
사람이 아무리 못나도 자라만 간다면 된다. 아무리 천사같은 성자라도 그 앞날이 자꾸 타락해 나간다면 아무 가치가 없다. 백영희는 다른 성자들과 달리 그 시작이 거칠었고 또 성자가 되기에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워 하나님과 연결된 자신을 만드는 것으로 신앙의 생명을 삼고 있었다. 이것이 가장 큰 장점이었으니 이 장점 하나는 다른 단점 99가지를 다 고칠 수 있었다.
생명이란 그 속성이 자라가는 것이다. 생명이 정상적이면 반드시 성장이 있게 되는 것이니 하나님 앞에 세워놓은 자신은 하나님 앞으로 자라고 있었다. 대개의 경우, 좀 자라고 나면 올챙이 시절을 생각지 못해서 하나님과 연결이 중단되며 옛사람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신사참배를 승리했던 한국교회의 자랑스런 성자들이 해방후 전부 타락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이다. 그들보다 모든 면에서 어렸던 백영희는 하나님과 연결된 생명의 신앙을 잃어버리지 않고 죽을 때까지 길러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진정 경건의 사람이었다. 그가 모든 것을 다 포기해도 그가 또 그의 모든 전력을 다해서 쥐고 있던 그 생명은 그에게 겨자씨 한 알같이 출발한 시작에서 모든 새들이 깃들이는 데까지 나아가게 하였다.
70세면 기억력까지 감퇴되어 목회 일선에 설래야 설 수 없게 된다. 실재로 일은 못하면서 고비용인 원로인물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으니 좋은 표현으로 포장하되 실은 고려장을 시킨 것이 교회의 은퇴제도이다. 은퇴제도가 불합리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다 틀린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육체와 함께 영능까지 노쇠하는 이들을 교회 유익을 우선하여 강제로 은퇴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나무랄 수 없는 사실이다.
백영희의 경건은 그의 나이 42세에 40명의 교회에 부임하여 60세에 1천명으로, 70세에 2천을 넘겼고, 그의 마지막 해였던 1989년에는 5천명으로 기록되고 있다. 갈수록 그 부흥은 더하였고 마지막 죽던 해가 생애 전체를 대신할 만큼 큰 부흥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주일학교도 42세에 100명이었으나 60세에 1천명 80세에 8천명을 헤아렸다. 개척했던 교회들의 숫자와 그가 평생 인도했던 매년 2차 집회 참석인원, 모든 기록들이 그러했다. 대개 대형교회나 교계적 지도자들이 이룬 업적과는 판이하게 다른 점은 그는 조직과 체제로 이룬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만난 자신의 경건 하나로 이룬 것이었다. 주일학교도 그이 만한 현장 전문가가 없었다. 매주 300여명 주일학생을 단일반에 출석시키던 주일학교 반사가 매번 백영희목사님에게 지도를 받아야 그 반이 유지되는 정도였다. 집회도 평생 단독 강사였으며 설교 한가지 외에는 어떤 특별 순서도 없었다. 진정 생명 있는 경건, 하나님과 연결된 생명이 평생 계속
되었고 이 연결선에서 보급되는 은혜로만 평생을 살았으니, 기독교란 영으로 난 영의 사람이 육의 노쇠를 초월하고 살 수 있음을 이 시대에 보여주었다.
④정사소망에 살았던 사람
(가.큰 죄인으로 살았던 백영희)
하나님 앞에 세워 놓은 자신을 볼 때마다 그는 평생 고개를 들지 못하고 살았다. 모든 사람이 눈이라도 빼 줄 수 있었던 속에서 그는 늘 가장 큰 죄인이었다. 그의 설명을 듣고 나면 과연 백영희라는 인물은 너무도 큰 죄인이며 그는 세월이 지나갈수록 더욱 큰 죄인으로 이해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설명을 듣고 또 그렇게 이해하던 이들은 그의 죄의 실상을 들으면서 자기들 속에는 벗겨보지도 못한 죄가 있어 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러므로 죄가 많았던 교회였고 죄가 많았던 사람들로 그의 주변은 늘 가득찼었다. 그가 평생 눈물을 흘리는 경우는 단 두 가지였다. 바로 자신의 가장 큰 죄를 설교할 때였다.
그 죄는, 주님이 자신을 위해 대신 죽고 자신을 살렸으니 이 큰사랑을 갚지 못한 죄였다. 그의 눈물은 주님의 구원해 주신 사랑을 설교할 때가 아니면 볼 수 없고 또 그 사랑을 갚다가 죽은 사람을 예로 들 때가 아니면 볼 수 없었다. 평생의 그의 눈물은 오직 두 가지 경우였다.
(나.평생 그 사랑을 위해 죽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백영희)
마음은 콩밭이란 세상이치가 있으니 백영희의 평생은 늘 이중에서 살았다. 전도, 심방, 연경, 지도 등 그가 맡았던 일에 그만큼 열심을 부었던 예는 일찍이 없었다. 타고난 건강까지 뒷받침이 되어 다른 사람은 설혹 그이 만큼 복음의 사명감을 가졌을지라도 몸이 따라가지 못해서라도 그만큼 충성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마지막 80 나이에도 왕복 2시간 차를 타고 왕복 1시간 산중으로 걸어가서 기도했다. 하루 3-4시간만 자고 평생 일하는 그에게서 충성이란 저이보다 더 할 수가 없다는 탄복을 금할 수가 없었고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여 책자까지 발간했던 이도 경건과 열심히는 그를 능가할 사람이 없음을 적고 있는 정도이다.
이렇게 활동적이라면 그의 마음은 늘 자기 맡은 방대한 일에 다 쏠렸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의 이런 활동은 다름아니라 자신을 위해 죽으신 주님을 위해 자신도 죽도록 충성하다가 최종적으로는 그를 위해 죽어드려야만 한다는 중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그의 심방, 그의 설교, 그의 전도, 그의 목회는 매일 매일이 순교하는 마지막날로 급박하게 살았다. 오늘 마지막 순교하게 된다면, 오늘 내가 쉴 수가 있겠는가! 그의 설교 10년 분량에 순교라는 단어는 수천번에 이른다. "정사(情死)"라는 단어를 수도 없이 노트에 적어가며 주님께 받은 이 사랑에 감격하고 그 보답은 오로지 그를 위해 죽어드릴 수 있다면.... 이 한 소원이었다. 그리고 매일을 그런 날로 맞이할 수 있는가 하여 죽어버릴 충성으로 다했으니 그의 충성은 아무도 따를 수가 없었다.
하나님 앞에 앉혀놓은 자신에게 가장 먼저 무엇이 보여야 하는지 그리고 하나님께 직접 대면하여 앉았다면 그의 행동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백영희는 그 실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경건의 사람이었다.
(다.무모하게 죽음을 자취하는 정신나간 백영희)
정상적인 우리가 본다면 그는 분명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런 백영희를 보는 우리는 다 정상적인 정신건강을 가졌다는 말이 되겠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되어 날 위해 죽었다는 이 말을 신화나 동화같이 읽는 사람이라면 우리와 같은 정신상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을 실재로 느꼈다면 또 이 사실을 실제 사실로 받아들였다면 미치지 않고는 그 정신이 견딜 수 없어야 함을 혹 생각해 보았는가!
죽기가 두려워 하나님을 버리고 신사참배를 했고 6.25에 피난을 가면서 교회를 버린 우리가 정신이 정상이라면 그는 분명 정신나간 사람이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 죽은 주님을 생각할 때 죽을 생명이 두려워 하나님을 버리는 우리를 그는 미친 사람들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을 맡고 나설 교회를 오늘 세상 한토막에서 팔아먹는 우리를 그는 제정신이 아니라고 하였다. 누가 옳은가? 숫자로 보면 우리가 옳다. 그러나 이치로 본다면 우리는 다 미쳤다. 그는 정상이었다.
자신을 구하기 위해 부모가 비참하게 대신 죽었다면, 그런데 웃으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비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해야겠다. 그 부모를 생각할 때마다 늘 죄스러움에 눌려 살아야 짐승과 다른 사람이라고 해야겠다. 살려준 그 부모의 소원을 생각하고 이왕 죽었던 목숨, 그 생명 다해서 부모의 소원대로 살기 위해 몸부림을 쳐야 사람이라고 하겠다. 그 몸부림의 강도가 바로 그 부모에 대한 자식의 감사의 표현일 것이다.
백영희의 평생은 정사라고 표현한 자신의 글대로 "주님 사랑에 죽는 정사, 마지막 죽음을 주님 사랑함에 바쳐 죽는 정사"로 나아갔다. 백영희와 같이 순교에 살고 순교를 외쳤고 순교를 맞은 이가 역사 교회에 또 있을까! 몇 손가락 꼽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기록이 자세하지를 않아 그러하지 우리 주위에도 손양원, 주남선을 예로 든다면 그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일 것이다.
(라.하나님의 종 백영희목사님의 순교 소식을 전합니다.)
순교를 하되 남들이 순교했는지도 모르고 순교 당한 자의 복이 크다며 순교도 순교의 등급을 가지고 있었던 백영희의 순교, 그의 순교는 그의 소원대로 교계가 다 그렇게 알도록 괴한에게 변을 당한 것으로 끝이 난다. 그러나 그의 순교는 역사에 몇 되지 않은 특이한, 참으로 복된 순교였다. 평화시에 순교를 당하다니! 순교의 의미를 아는 이들 입에서 터쳐 나온 외마디였다. 그들은 50년 전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평양 감옥에 있었던 이들이었다.
백영희목사만큼 순교를 원했다면 주님도 순교를 주셔야 했고 그래서 받은 것이라! 그의 평생을 아는 이들 중에 그에게 섭섭함을 가졌던 이들까지도 이 정도의 표현은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평생 소원 강단에서 말씀 증거하다, 자신이 전한 그 말씀 때문에 설교하던 그 강단에서 순교 당하는 것이라고 하시더니 그렇게까지 소원을 다 이룬 것이라, 참으로 자랑스럽고 참으로 귀한 시대적 선지자를 우리는 옆에서 모실 수 있는 복된 사람들이었다, 평생을 그를 통해 예수 믿는 길을 보여준 그 길을 변치 않고 힘써 지켜 나가리라! 그가 아끼던 주변의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던 각오였다.
세상 언론에서 변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교계 언론 기자들에게 백목사님의 순교소식은 다음과 같이 전해졌다. 그리고 그들은 순교로 한국교회에 타전하고 있었다. 그렇게 교계를 뒤로 하고 교계에 미움을 받고 그렇게 견제를 당해 이단으로까지 정죄하던 교계, 그 교계의 입들이 순교로 그를 알아보게 되었으나 한국교회는 더 이상 그를 볼 수 없게 된다.
⑤갈수록 세상이 없어지고 천국만 남은 사람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워 그분과만 살았던 백영희, 그도 분명 이 땅 위에서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인간이었다. 그도 역시 지나간 수많은 종들, 자기 시대를 감당하고 하나님 앞에 교회를 인도하던 지도자들 중에 하나였다. 그러나 한 가지 더 그의 경건이 특별했음은 그의 시작보다 그의 마침에는 더욱 세상이 없어지고 천국으로만 살았다는 것이다.
교회가 세상에 물들어 그 병이 깊어지면 때때로 개혁가들이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그 개혁이 성공한 경우는 희박했다. 대개는 용감하게 시작했다가 중도에 흐려지고 마지막은 결국 그 넓은 세상 물 속에 녹아지고 말았다. 그러나 백영희의 경건은 어떤 세상도 그를 흡수하지는 못했다. 교체되며 당면한 모든 현실 모든 시대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오직 말씀으로 다 정리했다. 그는 공부를 제대로 한 사람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5학년 학벌이 세상 학벌로서 전부였다. 예수 믿고 난 뒤로는 오로지 성경뿐이었다. 신학은 목사가 되는 과정으로 밟았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교회는 오늘에 되살린 초대교회였고 개혁초기의 교회들이었다. 마치 그 방면에 전문학자가 당시 기록을 면밀하게 검토하고 재현하려고 했던 것처럼 그의 목회는 그렇게 모습을 가졌다. 마지막 1989년 순교시점까지 그의 최후까지 그는 교회의 제도를 한번도 고정시켜 나간 적이 없었다. 세상 표현으로 말한다면 끊임없는 자기 개발이며 변화의 몸부림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세상 표현이 나오기 전 그는 40년전부터 그러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러했다. 그러므로 그의 목회에 대한 연구는 시간의 흐름을 따라 당시의 현실을 이해하고 접근하지 않으면 장님의 코끼리 판단이 된다. 주일학교 중간반 학생제도 등 늘 더 유익한 복음의 길을 찾았던 그였으니 이만큼 한국교회에 개혁의 선봉에 있던 이가 있었던가!
그렇다면 너무도 변동이 많고 변화가 많아 전통교회의 정통시각으로 본다면 자유주의 방탕주의라고 의심이 들지 않겠는가. 한국교회가 20년전에 일제히 버린 찬송가를 아직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곳은 백영희 교회 밖에 없다. 50년전에 한국교회에서 사라진 조사님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 곳이 이곳이다. 50년전까지 존재했던 한국교회의 주일모습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는 옳으면 모든 사람이 버려도 붙들고 지키는 보수이다. 고칠 필요가 있으면 모든 사람이 붙들어도 그는 고치는 사람이다. 표준은 성경이며 중심은 하나님이다. 이것이 그의 경건이며 이 경건이 보수와 개혁을 가지고 그의 말년까지 진행하였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그의 경건의 깊이가 초대교회나 개혁초기의 인물들과 같았음을 보여준다.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로 진동했던 봉산교회 부흥회의 소식은 당시 몇 페이지 되지 않았던 단일 기독교계 신문을 통해 보도된 정도였다. 실상은 그보다 더했다. 그는 신비주의자가 아니며 신유주의자도 아니다. 오직 말씀을 가르치는 것만이 그가 한 일 전부였다. 그러나 그는 불을 몰고 다녔고 그와 관련되어 고신의 순교자 3명 전부가 배출된다. 그 주변에 신앙생활 하는 이들은 숫자에 상관없이 자기 재산을 자기 것이라는 하는 사람이 없는 정도였다. 그의 소원이면 가진 모든 것을 다 바칠 수 있는 이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렇게 되면 통일교나 전도관이 발생되어야 했다. 정통 안에는 이 만큼 존경받고 따르는 이가 없고, 또 이 만큼 존경받고 따르는 이치고 이단으로 나가지 않은 이가 없다. 이를 다 가지고 마지막까지 나간 경건은 신약교회사에서 초대교회를 비롯 그리 많지를 않았다. 그의 말 한마디에 생애와 가진 것을 다 바쳐 복음에 헌신할 청년들이 서부교회 안에만 수백명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목회관은 가장 교인생활을 잘 한 사람이 바른 목회를 할 사람이라는 것, 또 하나 목회는 하나님께서 들어쓰시는 객관적 역사를 보여주실 때 인간은 따라가며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라, 사람이 나서서 종들을 선발하고 파송하는 두려운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경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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