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순서: 1.원문소개 2.글에 대한 논평)
------------------------------------------
1.원문소개: 1991년 10월 7일(월) 교회복음신문 (김원식 편집국장)
"사랑의 원자탄"의 저자 안용준목사가 고신(高神)측 교단을 고신(苦辛)교단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고신교단에서 고신교단 사람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그만큼 괴롭고 쓰라린 어려운 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고신교단의 생성이 신앙의 순결을 지키기 위하여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옥고를 치루고 나온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초기의 고신 사람들은 마치 청교도를 방불케 하는 철저한 신앙생활인들의 공동체였다. 주일을 성수하려는 노력은 대단했다. 예배에 참석하기 위한 교통수단도 직접 현금을 내는 버스는 이용하지 않았다. 꼭 차를 타야 하는 경우에는 미리 전날 전차표를 구입해 둔다. 물론 외식은 용납되지 않는다.
박윤선박사는 그 당시의 고려신학교 교장이었다. 비행기가 흔하지 않던 시절 배를 이용해서 떠나게 되었다. 그 배를 놓치면 다음 배가 언제 있을지도 모르고 시작하는 학기에 맞추려면 할 수 없이 주일오후이지만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이 교단적인 문제가 되었고 직접적 원인이 되어 학교를 떠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 되기도 했다. 원로 남영환목사가 거창교회에서 목회 할 때였다. 선교사들이 주선해서 나누어주는 구제품을 싣고 토요일에 부산을 출발했는데 중간에서 트럭에 고장이 생겨 수리를 하고 교회에 도착해 보니 주일 아침이었다. 그는 스스로 근신하며 몇 주일을 교회의 강단에 서지 않았다.
학생들은 주일 학교행사에 퇴학을 당하는 일이 있어도 참석하는 일을 거부했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우리나라 언론계의 중진 중의 한 사람인 최낙동씨는 당시의 고려파의 대표적인 교회의 하나인 삼일교회의 학생회의 간부였다. 그는 그 당시 부산사범학교의 학생회장이었다. 그는 학교의 주일 행사에 참석한 일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고 교회를 떠나야 했다. 대학시절도 그리고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훨씬 후에 다시 교회생활에 복귀했다. 그리고 열심히 교회를 섬기다가 갔다. 고신파의 주일성수에 관한 이야기는 수없이 많다.
경건한 생활은 바리새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철저하게 했다. 어디든지 앉은 자리에서는 먼저 고개 숙여 기도하고 음식을 대하면 비록 홀짝 마셔버릴 커피 한 잔이라도 길게 감사 기도를 했다. 아이스케키를 놓고 기도하다보니 얼음은 다 녹아버리고 나무 젓가락만 들고 있더라는 이야기도 있다.
교역자 수양회에서 한상동목사가 장기 한 판을 둔 것이 구설수에 오르기도 하고 교역자의 근엄한 모습을 요구하는 교인들의 요청 때문에 언행을 조심하고 전전긍긍하던 모습이 이제는 한낱 옛날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빌로드(벨벳) 치마를 입고 나오는 사람들은 설교자의 공격의 대상이 되리만큼 검소한 생활이 요구되었다. 오늘의 과소비의 풍조를 생각하면 코미디 같은 이야기다. 그러나 당시의 고신은 교인들에게 근검 절약하도록 강조했다.
사실 퓨리탄이었고 스스로도 그와 같은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다. 설교자들도 누가복음 17장 21절부터 주의 날에 고신 사람들만 들리워 갈 것이라고 장담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만큼 자신있게 철저한 신앙생활을 시키기도 하고 해 온 것이다. 교역자들이 강단에 올라가서 의자에 앉기 전에 반드시 의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를 드린 후에 황송한 마음으로 의자에 앉았다. 기도를 하자고 하면 눈만 질끈 감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버지"라는 소리만 나도 감사와 떨리는 마음으로 눈물이 쏟아지는 분위기가 고신이었다.
이 땅에 탁류와 같은 어지러운 믿음의 터에 한 줄기의 맑은 생수로 고신을 남겨두신 것이라고 믿었던 까닭에 고신에 속한 교인들은 스스로 고신(苦辛)의 길을 택했고 지도자들이 시키는 말에 순종하며 괴롭고 쓰라린 길을 십자가의 길로 알고 따라 나선 것이다.
초량교회에서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나와서 세운 삼일교회는 고신교회의 마음의 지주인 어머니교회로 성장했고 제2영도교회에서 천막을 치고 시작한 복음병원은 국내의 굴지의 의료기관으로 성장했다. 적산건물 한 체를 구입해서 시작한 고려신학교는 학교법인 고려학원으로 성장하여 장엄하리만한 교육기관으로 성장했다. 구제품 양복에다 색깔도 어울리지 않는 넥타이를 매고 누가 보아도 시골티를 면치 못하던 교역자들이 국제신사가 되고 고급승용차의 뒤편에 눌러앉아 채 준비되지 않은 설교원고를 뒤지며 교회를 향해 가고 있다.
이제 고신의 교역자들은 고신(苦辛)을 버린 지가 오래다. 누가 천막예배당 바닥에 깔린 가마니를 기억하는가? 그 가마니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았을 때 시려오던 냉기를 생각하는가?
고신 1세들의 순교신앙을 계승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자기가 받는 물질의 얼마를 농촌선교다 해외선교다 하고 내 놓으면 그것으로 그만인가? 고신은 고신(高神)의 높은 신분의 사람들로 착각하는 것은 아닐 테지만 고신의 참길은 고신(苦辛)이라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는 것이다. 주기철, 주남선, 한상동, 손양원, 오종덕 등등의 고신 선배 신앙인들의 발길을 살펴보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
2.윗글에 대한 논평: 고신을 회고하며 자탄하는 고신인의 글 한편을 보며
(1)50여년 전 고신의 여러 단면을 볼 수 있습니다.
다음 글에서 고신의 50여년 전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글에서 말하듯이 또 우리가 알 듯이 흔하고 흔한 옛날 말입니다. 그러나 그 50여년 전 고신의 경건을 유치한 정도로 보는 것이 오늘까지 우리 공회 신앙노선이었습니다. 50년 전 고신의 최고 성자 한상동목사님이 교역자 수양회에서 장기 한 판 둔 것을 그들이 구설수에 올렸다고 했는데 그후 50년이 지나도록 우리 공회에서는 정상적이라면 집사님 수준에서도 장기 한 판을 그렇게 쉽게 잡지 않습니다. 더구나 집회기간에는 상상도 못합니다. 통제 때문이 아니라 너무도 당연한 자기 관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총공회 신앙이란 이 시대 좁은 길이라고 생각했고 나라이 임할 때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2)고신 최고의 경건이 우리에게는 평신도 수준인 것 같은데
고신의 경건을 초급 정도라고 보는 것이 총공회 신앙노선에 있는 교인들의 시각이라면, 고급에 있는 우리들은 고신보다 더 더 정밀하고 정확한 현미경이 있습니다. 고신 교인이 고신의 옛날과 오늘을 겹쳐보며 탄식을 하고 있는데, 고신 수준에서 오늘 우리를 본다면 우리는 아직도 더 타락하고 속화해도 될 여유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공회가 가진 초정밀 진리 시각으로 백목사님 가신 10여년 세월의 양끝만 수평 비교한다면,
우리는 남이 지적하기 앞서 우리 스스로 탄식할 일들이 분명히 있다고 봅니다.
(3)고신과 총공회를 어찌 수평비교 하겠습니까? 문제는 낙하하는 거리, 속도가 문제입니다.
우리의 속화 속도는, 우리가 우리 복음을 잊어 가는 가속은 고신의 정상수준에서 오늘 고신으로 낙하하는 거리와 그 거리에 도달하는 시간에 비할 수 없는 고공에서 가속을 붙여가고 수직낙하하고 있음을 직감해야 할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낙하지점까지 도달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좀 더 안심하고 좀 더 교권에 눈을 떠라는 말이 아닐 것입니다. 순간 뒤에 파쇄 산화 될 우리를 우리의 시각에서 되돌이켜 돌아갈 곳이 우리에게는 있다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