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던중 백 목사님 과 관련있는 부분이 사료로 쓰여질수 있을것 같아 소개 합니다.
사료 단편2.
해와 같이 빛나리
심군식 목사 저
1982년 1월 15일 4판 발행
발행 소망사
에서 발췌
백영희 전도사가 종종 찾아왔다. 그는 상복을 입고 삿갓을 쓰고 다니며
지방 교회 성도 들의 헌금을 얻어 식량을 구입하여 가져오곤 하였다.
백 전도사 는 주 목사를 존경하는 후배로서 주 목사의 가족을 자기 가족
처럼 보살펴 주었다.
백영희 전도사는 1910년 7월 29일 , 거창군 주상면 도편리 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 하였고 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신식학문을 배웠다.
16세 시 일본에 들어가 공부 하다가 4년 후 귀국하여 거창군 고전면
개명리 에서 양조장 을 시작했다. 양조장 을 하면서 진한 누룩냄새를
맡으며 인생을 고민 하였다.
마침 윤봉기 전도사 가 길가는 것을 보고 집에 들어오게 하여 복음을
들었다. 윤봉기 전도사는 친절하게 기독교 교리를 가르쳐 주었다.
백영희는 입신하던 날부터 열심 이었다. 믿게된지 삼일이 되던 날,
양조장 을 처리 하였다 . 그리고 십일 후에 누룩 장사도 그만 두었다.
그는 모든 재산을 정리하여 구호 기관 과 복음 기관에 기증 하였고, 논
얼마 만 남겨두어 농사를 하여 생활 하기로 하였다.]
일년 후 세례를 받고 전도 일에 나섰다. 무보수 전도사 였다.
봉산 교회와 봉개 교회와 개명 교회를 맡아 복음을 전하였다.
그가 무 보수 전도인 이 되기까지 그의 신앙의 길잡이는 주 목사 였다.
주 목사의 신앙 인격에 많은 감화를 받았고 특별 지도를 받았다.
백 전도사는 주 목사댁을 자기집 드나들듯이 쫓아다녔고 지극히 작은일
하나 까지 주 목사 의 지시를 받았다. 신사 참배 문제가 일어나자 주
목사는 지방 각 교회를 심방하여 신사참배 못 하도록 가르쳤는데 ,
백 전도사 에게도 여러번 이 문제에 대하여 당부 하였다.
[[ 신사 참배는 제2 계명 과 제 1 계명 까지 범하는 것이니 결코
해서는 안됩니다. ]]
어느날 , 주 목사는 백 전도사 를 만나 조용히 강변으로 나갔다.
강가에 앉은 주 목사는 백 전도사 에게 신사참배 문제 와 일제 의 탄압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이날 받았던 주 목사의 교훈을 백 전도사 는 가슴에 잘 새겼고, 그가
신사참배하지 않게 된 좋은 계기가 되었다.
주 목사 투옥 후 , 백 전도사 에게도 일본 고등계 형사들 이 번질나게
찾아왔다. 그러나 끝까지 백 전도사 는 반대 하였다.
그가 끝까지 신사참배를 반대 할수 잇었던 것은 주 목사의 교훈 때문
이었다고 훗날에 말했다. 그는 약 5년 가까운 세월을 한결같이
주 목사 가족을 돌봐 주었다.
자기 가족의 생계도 막연한 시대에 이웃을 위하여 사랑을 베푼다는 것은
그리스도 의 사랑이 아니곤 할수 없는 일이었다.
( 164-166쪽 )
3. 찾아드는 교역자 와 성도들
주 목사님이 거창으로 돌아왔다는 소문 은 삼군 각 교회에 알려졌다.
매일 처럼 교역자와 성도들이 죽전으로 몰려들었다. 귀찮을 정도로
사람들 은 몰려왔다. 허나 주 목사님은 찾아오는 문안객 들에게 조금도
언잖은 기색없이 친절로 대변 하였다.
자녀들이 아버지를 염려하여 떠듬 거리며 말했다.
" 아버지 ! 자꾸 편찮으신데 사람들이 올 때마다 일어나시어 말씀을
하시니 이래가지고는 참말 로 안되겠읍니다. "
" 아니다. 그냥 내가 하는대로 두어라. 그 분들이 찾아온 것은 내
한 사람 얼굴 볼려고 온 것 아니겠나 ? 내가 그분들을 반가워 하지
않으면 그 분들 의 섭섭함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
" 하지만 아버지는 병중이 아니십니까 ? "
" 내 가 내병을 잘 안다. 내가 다시 회복될 것이란 걸, 나는 기대하지
않는다. "
절망적 인 말을 하시면서도 목사님의 얼굴엔 절망 의 빛이 보이지 않았다.
얼굴은 밝고 평화로웠다. 병 문안 온 교역자 들과 교인들이 오히려 위로
를 받고 돌아갔다.
위천 교회 백영희 전도사가 왔다. 그는 일제 수난시 부터 주 목사님을
극진히 위한 분이다. 세상이 다 외면하고 적대시한 주 목사님의 가족
들을 그는 음성적 으로 도왔다. 승복을 입고 배낭에 쌀을 감추어 다니며
그릿 시냇가의 까마귀 노릇을 한 것이었다. 백 전도사는 주 목사님 을
가장 존경하고 신앙의 선배 로 우러러 보았다. 백 전도사 가 머릿 쪽에
앉자, 주 목사님 은 , " 백 조사님. 아랫 쪽에 앉으시오. 얼굴이나 좀 보게.
" 많이 가늘어진 음성이 실날같이 이어져 나왔다. 백 전도사는 주 목사님
의 초췌한 얼굴을 보자 누물이 왈칵 치밀어 올랐다.
지난날 의 얼굴이 그리웠던 것이다. 형편없이 여윈 주 목사님의 모습은
다시 옛 얼굴을 가져올상 싶지를 않았다.
" 아무데도 가지 말고, 내 옆에 좀 있어 주시오 "
언제나 사랑 과 정이 담뿍 담긴 주 목사님의 말은 울적한 백 전도사의 마음
을 따사롭게 어루만져 주었다. 이틀동안 백 전도사 는 주 목사님 곁에 있었
다. 백 전도사는 차마 그 자리를 뜰수가 없었다. 그는 상남교회 집회를
맡아 있었다. 그 날 밤부터 가지도록 된 집회도 연기하고 싶었다.
" 목사님, 사실은 함양 상남교회 집회를 가지도록 되어 있지만 그만 두겠
습니다. 사람 들을 보내어 사정에 의해 연기 되었다고 말하겠습니다.
차마 목사님 곁을 떠날수 가 없군요 .... . "
백 전도사 는 말을 흐렸다. 주 목사님 은 백 전도사 의 말 뜻을 알아차리곤,
" 안됩니다. 백 조사님, 가셔야 해요. " 말에다 힘을 넣었다.
" 그렇지만 목사님 께서 이렇게 편찮으신 모습을 보곤 차마 발이 띄이지
않을 것같습니다. " " 백 조사님, 주님이 기뻐 하는거 는 일을 먼저해야
되요. 주님 의 일을 해야지.."
주 목사님 은 머리맡에 노인 자신 의 성경책을 내밀었다.
" 백 조사님 , 이걸 가져 가시오. 난 이제 성경을 읽지 못하게 되었어.
이것은 백 조사님 이 나보다 더 필요하게 사용할수 있을 꺼야 "
성경을 받는 백 전도사 의 눈 시울 이 뜨거워 졌다. 눈물 이 격류처럼 쏟아
져 내렸다. " 목사님 감사합니다. " " 빨리 가시오, 힘있게 주님 의 일을
해야지. 젊고 건강 하니까, 열심히 해야지. "
백 전도사는 주 목사님이 주시는 성경을 가슴에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목사님 그럼 다녀오겠읍니다. 잡숫기 싫으시드라도 죽물 을 좀 드십
시오. " " ........ "
목사님 은 말없이 백 전도사를 바라 보았다. 주 목사님의 후미진 눈 언저리
에 흔건히 물기 가 고이는가 하더니 주르르 귓 바퀴로 눈물을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 백 조사님 ... 잘 가시오... . "
돌아선 백 목사님의 등 뒤를 향하여 아련히 보내는 것이었다.
(384-387쪽 )
위천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던 백영희 전도사는 집회 삼일째 되던 날
부고를 받고 울었다. < 집회는 뒤로 미루어도 되는데...>
눈이 붓도록 백 전도사는 울었다. " 주님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지! "
주 목사님 의 그 한마디 가 가슴을 찡 때린다.
< 주님 의 일을 그렇게 소중히 생각하시던 어른 ... >
백 전도사는 거창을 향해 달렸다.
( 391쪽 )
5. 빛난 장례식
...
" 노회 장 이니 조의금 들어오는 것은 모두 사모님 께 드려 유족들 의 생계
를 돕도록 하고 장례식 은 간단히 하자 " 고 제의 하였다.
그러나 백영희 전도사 는 ,
" 아닙니다. 앞으로 유족들은 하나님 께 맡기고 장례식을 거대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 은 그의 자녀들 을 분명히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의인 의 자손이 걸식하거나 못사는 법은 없습니다. 이번 장례를 통하여
하나님 께 더욱 영광을 돌리도록 합시다. "
( 392쪽 )
6. 그 뒷 이야기
.......
그해 7월 10일에 위임식을 가졌다. 백영희 전도사는 계속 고려 신학교
에서 수학 하였다. 그는 대단한 뜨거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 후 부산에서 복음을 전하였고, 지금은 서부 교회 목사로 큰 교회를
이끌고 있다. 백영희 목사는 주 목사 별세 직전에 유물 로 받은 성경을
지금 도 보물 처럼 간직하고 그때 일을 종종 회상하고 있다.
(396-397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