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목사님 옥중에 가족을 돌본 일.
옥중에 있던 주목사님은 일종의 사상범이었고, 그 가족과 접촉하는 것도 사찰 대상이었습니다. 백조사님은 당시 대단히 경제가 넉넉했었습니다. 예수 믿고 모든 사업 모았던 돈을 전부 정리했으나, 3년만에 다시 크게 복을 받았고 일제 말기 수탈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축복으로 경제에 조금도 불편이 없었습니다. 백조사님 자신의 경제로 다 담당했고, 혹 주목사님 사택으로 찾아가는 일에 부탁한 분들은 있었을찌라도 백조사님은 자신의 경제로 그렇게 했었습니다. 백조사님 인근에는 경제로 주목사님 사택을 도울 형편이 되지 않았습니다.
주목사님의 큰 따님, 주경순권사님이 아버지 주목사님이 생각나서 찾는다고 백목사님을 찾는 정도로 가족들과 가까웠습니다. 소개한 내용 뒤편에 "승복을 입고" 주목사님 가족을 챙기러 간 적은 없었습니다.
2.출생 등에 대하여
주소는 거창군 주상면 도평리입니다. "도편리"는 책에서 오자입니다. 일본에 들어간 것이 16세이며 나온 것이 18세였으니 3년이 맞습니다. 양조장을 한 곳은 "고제면"으로 "고전면"은 오자입니다.
3.주목사님 관계
주목사님이 순교를 소원했으나 병사한 것을 두고 평생에 새겼습니다. 그렇게 소원 소원하여도 주시지 않으니 순교의 복이란 자기가 준비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고 그렇게 탄식하였었습니다. 주목사님의 신앙인격 자체는 백목사님에게 평생에 제일 많이 예를 드는 분이었습니다.
고려신학교 입학도 주목사님이 아니었으면 거절될 뻔 했고, 주목사님이 청함을 받은 집회에 백목사님을 보낸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주목사님이 계셨다면 고신은 백목사님을 제거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은 상식입니다.
4.주목사님 성경
백목사님 자신은 기념물이나 기념관에 대하여 대단히 비판적인 분입니다. 이는 기념물이나 기념관 자체가 잘못이라 그런 것이 아니며, 사람을 지나치게 높이다가 크게 잘못되는 경우는 우상으로, 또 일상에서는 깊은 신앙으로 들어가는 일에 보이는 기념물이 감정을 자극하여 감상적 신앙이 되면 깊은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에 방해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은 평생에 주목사님 성경을 소중하게 잘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주목사님이 맡긴 다른 뜻을 아는 분이었고, 감상적 신앙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나갈 분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심군식목사님이 주남선목사님 전기를 쓸 때, 주목사님 성경을 가지고 있음을 처음으로 외부에 말했으며, 그후 고신대학교에서 주남선목사님 기념관을 만든다며 성경을 부탁하였고, 즉시 고신대학교에 기증하였습니다.
5.백목사님 설교에 언급된 주목사님
단순한 연대기가 아니라 주목사님의 신앙에 대한 연구라면, 백목사님의 설교록에 언급된 이상이 없을 것이라는 것은 단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신앙이 되지 않으면 그 신앙을 소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설교록에서 찾아본 주목사님, 손양원목사님, 그분들에 대한 언급에서 백목사님 자신의 신앙은 제일 확실하게 투영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