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1987년 5월집회 요약 문답 - 부공2
부공2/자료실/2008년 5월집회 재독 요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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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5/05/월밤집회/마13:53-58(870504/월밤집회)
1. 예수님께서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실 때 고향 사람들이 듣고는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하면서 놀랐다. 놀란 것은 그들이 이제까지 알고 있던 그 이상으로 들려졌고 깨달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은 놀라야 할 정도대로 다 놀란 것은 아니고 그저 놀랄 만한 사실에 하나의 먼 데서 오는 한 향기를 맡아진 거와 같은 그런 정도를 접하고도 그렇게 놀란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지혜와 능력에 대해서 알대로 알았다면 다 기절해서 죽어버린다.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의 지혜와 능력의 범위는 심히 광대해서 무한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감탄하고 놀라는 우주와 영계를, 지은 것이 하나님 말씀이요, 신구약의 초인간의 모든 역사를 이룬 것이 하나님 말씀이다. 얼마나 넓고 큰가?
(1)시간적으로 말하면 영원 전에서 영원 후, 영원한 시간을 다 계산하고 맞추어 가지고 거기에 하나도 잘못됨이나 또 지나침이나 부족함이 없이 말씀하신 이 말씀이니 며칠도 맞지 아니하는 인간들의 지혜와 비교하면 무한한 지혜와 능력의 말씀이라 아니할 수 없다.
(2)종류에 대해서도 인간이 아는 것은, 그 아는 종류보다 모르는 종류가 몇 억억만도 더 넘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지혜와 능력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모든 종류를 다 알고, 전부를 다스리는 능력이니 이 또한 무한한 지혜요, 무한한 능력이다.
(3)한 종류에 대해서도 한 분야의 박사라고 해도 그가 그 분야에 대해서 안는 것은 그 전체의 억억만분의 일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 전체를 아시는, 그것을 지으신 지혜요 능력이다. 얼마나 큰 지혜요 능력인가? 실로 무한한 지혜요, 능력이다.
(4)그 권위에 대해서도 하나님 말씀은 영원히 권위 있는 정확무오한 지혜요 능력이다. 성경(마태5:18)에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리라” 하신 것도 우리들이 알기 쉽게 말한 것이지, 하나님 말씀의 지혜와 능력을 다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답)하나님 말씀은 무한하다. 전지의 지혜요 전능의 능력이다. 이것을 영감으로 깨닫고, 이 말씀의 가치성과 권능을 믿고, ( )중에 듣기도, 행하기도, ( )하기도 하여야 한다.(보기: 전, 소망)
2.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와 능력은 무한하기 때문에 우리와의 거리는 측량 못할 만치 무한히 멀다. 그는 무한이고 우리는 유한이다. 그나마 또 마귀에게 미혹받아 가지고 빛이 하나도 없는, 완전히 죄와 허물로 죽어 있던 어두운 우리들이다. 또한 다져지고 다져져서 무쇠 판대기같이 딱딱한 우리들이다.
이러한 우리에게 작은 것이라도 자기의 주관을 뛰어 넘는 하나님 말씀의 지혜와 능력에 대한 깨달음이나 느낌이 있다는 것은 결단코 나나 어떤 피조물만의 힘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존재의 어떠한 역사로 이루어진 것인가?
(답)영원 전에 목적을 정하신 것에서부터 시작된 ( )의 역사, 도성인신 사활대속의 성자의 역사, 보증자 성령의 역사, ( ) 자체의 전지전능의 역사, 중생한 우리 ( )의 협동역사, 선지사도들의 수종 역사, 자연계시로 주신 ( )들의 협조역사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 일곱가지 큰 존재의 역사로 무한하신 지혜와 능력의 말씀을 들려주시니, 비로소 이 먹장같이 ( )고, 무쇠 판때기와 같이 ( ) 없는 인간들의 심령이 이 말씀의 지혜와 능력을 깨닫기도 느끼기도 하는 것이다.
얼마나 큰 힘들의 큰 역사인지 모른다. 우리는 항상 이 큰 존재들의 큰 역사를 ( )하고 하나님 말씀을 상대하여야 한다.
(보기: 의지, 감각, 어둡고, 만물, 영, 진리, 성부).
3.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 깨달은 것은 참 실상에다 비해서 먼지만치 안 것이지만 그것도 큰 축복이요 큰 은혜이고, 그것을 깨닫게 하시는 분도 알리시느라고 큰 힘 들인 것이다. 그러나 요 깨달음을 딱 따먹는 원수가 있다.
그 원수가 누구인가? 예수님의 말씀의 지혜와 능력을 보고는 놀랐던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자기들이 그 전부터 알고 있던 지식으로 돌아가 가지고 그로 인하여 그 놀람을 다 빼앗겼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 깨달아도 자기가 가지고 있던 기존 지식, 선입적 관념, 주관으로 돌아가서 놀란 깨달음을 저버리고 주관으로 바꾸어 버리므로 ‘놀람’을 빼앗겨 버린다.
만일 빼앗기지 않고 깨달은 그대로 믿고 나아가면 그 무한한 말씀의 지혜와 능력으로 더 깊이 들어가서 얼마라도 충만하고, 어디까지라도 자라, 굉장한 구원을 이루었을 터인데, 이 원수에게 다 빼앗기므로 들은 말씀이 헛일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주관이 우리의 원수중의 원수이다.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답)깨달은 하나님 말씀을 흐리고, 거스리고, 반대하는 자기의 ( )이 진정 원수인 줄 알고, 전적 ( )해 버리고, 깨달은 ( )로 알고, 믿고서는 그것을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보수(保守)가 성장의 방편이다. 말씀의 지혜와 능력을 아는 것만치, 믿는 것만치, 계속하는 것( ) 효력(변화, 복)은 있는 것이다.(보기: 만치, 그대, 부인, 주관)
08/05/06/화새집회/마태13:54-58(870505/화새집회)
1.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그 말씀에 나타난 지혜와 능력을 받고서는 ‘이 사람의 이 지혜와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하고 놀랬다. 그 놀람은 바로 된 놀람이었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나, 들을 때 그 말씀을 통해서, 자기가 이제까지 가지고 있던 주관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받고 놀라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러한 놀람이 있어야
그 말씀이 자기 생활을 변화시키고, 자기도 그 말씀대로 실천할 수가 있지 이 ‘놀람’이 없으면 안 된다. 오늘날까지 이 놀람이 없었기 때문에 들은바 말씀이 자기를 끌고 가지 못하고 자기생활의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이 놀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니 이 놀람이 있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자기를 다하여, 양심을 기울여 들어야 한다.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간다고 하셨다(벧전3:21). 본문의 말씀에서 첫째로 배울 것은 무엇인가?
(답)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을 때 ( )을 기울이므로, 그 말씀에서 자기 주관을 ( )하는 지혜와 능력을 받고, ( )라는 것이 있어야 한다.
(보기: 놀, 능가, 양심)
2.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받고 놀란 것은 그 지혜와 능력의 실상을 다 보고 놀란 것이 아니고, 그 실상의 억억억억만분의 일도 못 보고 놀란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의 실상은 무한하다.
아직 보고 나서 또 보고, 놀라고 나서 또 놀랄 여지가 무한히 남아 있고, 자라갈 것도 무한히 남아 있다. (고전13:3)에 ‘소망은 영원히 있다‘하신 것은 이러한 것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성경 (엡4:13)에는 그 지혜와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가라고 하셨다. 이렇게 큰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우리의 구원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답)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때, 그 말씀을 통하여 ( )한 실상을 가진 하나님의 지혜와 ( )을 받는 다는 것을 알고, 감사와 큰 ( ) 중에 듣기도 하고, 실행도 하여야 한다.( 보기: 소망, 능력, 무한)
3.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랄만한 지혜와 능력을 받은 것은 인간들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다. 그 일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진리, 우리의 중생한 영, 선지사도들, 만물들과 같은 큰 일꾼들이 역사하여 이룬 것이다.
내 노력으로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받는 줄 알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무지무능하고, 악하고, 교만하고, 강퍅한 자이다. 아무도 이러한 우리에게 놀람의 깨달음을 갖게 할 자가 없다.
이러한 우리를 꿰뚫고 놀람으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받게 하는 것은 참으로 큰 역군들의 큰 역사로 이루어진 것이다. 다만 이렇게 큰 역군(役軍)들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주실 때 이것을 받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몸이다.
심신이 받는데 심신 중에 제일 앞장 나서 가지고 받는 자가 양심이다. 양심이 없는 자는, 양심을 쓰지 않는 자는 이것을 받을 수 없다.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답)악하고, 무지무능하고, 교만하고, 강퍅한 우리를 ( )뚫고 말씀을 통해 놀랄만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 )게 하신 것을 깊이 감사하고, 황송하게 여겨서 자기 마음과 몸을 다해서, ( )을 기울여서 하나님 말씀의 지혜와 능력을 받아야 한다.(보기: 양심, 받, 꿰)
4. 하나님이 제일 안타깝게 여기시고, 분개하시는 것은 무한한 실상을 갖고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놀람으로 받았다가 도로 빼앗기는 일이다. 우리는 빼앗기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지혜와 능력을 받으면 그것을 빼앗으려는 세력이 내 안팎에 가득 차 있다. 세상지식, 자기 주관, 세상 등이 그것이다. 자기 안이든 자기 밖이든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받은 지혜와 능력을
반대하고, 부인하고, 저버리게 하는 그것은 다 우리의 원수이다. 그것을 하나님의 지능보다 크게 여겨, 그것을 취하고 하나님의 지능을 저버리므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빼앗기는 것이다. 그 결과는 사망이다.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답)우리는 하나님의 지능(智能)의 ( )하심을 올바로 평가하고, 패역하고 미련한 우리에게 ‘놀람’의 깨달음을 주신 지극히 큰 ( )들의 역사를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 )앗기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반대하고, 저버리게 하는 인간의 어떠한 지능도 다 ( )해 버리고, 하나님의 지능을 굳게 보수해야 한다.(보기: 무시, 빼, 일꾼, 무한)
5. 인간의 지능에 속한 것을 다 무시해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지능을 빼앗기지 않고 굳게 잡아야 한다고 해서 세상을 다 포기하고 염세주의로 살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이 무한한 하나님의 지능을 인정하고 복종하는 것으로 모든 생애를 하라는 것이다. 말씀을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살라고 하면 그렇게 인정하고 복종하고, 이것저것을 하라고 하면 그대로 인정 복종 하는 것이 하나님의 지능의 무한성을 인정하는 자들의 정상의 유일한 생애이다. 결과는 영생이요, 복이다. 이것을 버리고 다른 지능이 있으니 되는 줄 알고,
장담하는 것을 성경에는 다 악에서 나온 것이요, 허탄한 자랑이라고 하셨다(야고보4:13이하). 하나님의 말씀의 지능에 복종으로 살지 않고, 다른 지능으로 살아도 모든 것을 방어도 하고, 건설도 하고, 승리도 한다고 자랑하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자기 수입은 하나도 없는 헛된 일이요, 멸망일 뿐이다. 이것은 천지는 변해도 변치 않고 그대로 되어 진다. 이것 때문에 둘이 한 날, 한 시, 한 밭에서 밭을 갈아도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한다고 하신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답)하나님 말씀의 지혜와 능력을 ( )으로 받아야 하고, 그것의 실상이 ( )함을 알아 큰 소망으로 대하여야 하고, 놀람으로 받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은 지극히 큰 ( )들이 주신 것임을 깊이 기억하고,
그것을 자기나 아무것에게도 ( )기지 말고 굳게 잡아야 하고, 모든 생활을 그 지능을 인정하고 ( )하는 행동으로 해야 한다. 다른 길은 없다.
(보기: 복종, 빼앗, 일꾼, 무한, 놀람)
08/05/06/화전집회/마13:3-9(870505/화전집회)
1. 예수님 당시와 같이 오늘도 신구약 성경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때에는 전지의 지혜와 전능의 능력이 나타나 역사한다. 그 이유는, 첫째로 우리 구원에 필요한 하나님의 지능이 말씀을 통해 나타나기 때문이요. 둘째는 (마태28:19이하)에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증거할 때에는 주님이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갖고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님의 이 성경말씀을 읽든지 듣든지 또 가르쳐 전하든지 할 때에 이 말씀 안에는 전지의 지혜와 전능의 능력이 그 전하는 소리와 함께 나타나서 구원 얻을 자에게 친히 역사하시는 것을 믿고 소망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답)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이 사실을 믿지 ( )고 전하는 것이나, 하나님 말씀을 읽고 들으면서도 그 안의 전지전능의 지능을 보지 못하고 ( )지 못하는 것은 다 외식이요, 거기에는 ( )역사는 없다.(보기: 생명, 받, 않)
2. 무한한 실상을 갖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우리는 그 말씀에서 너무 거리가 먼 먹장 같이 어두운 자요, 쇠 판대기같이 무감각한 자이기 때문에 이를 우리에게 알리고, 깨닫게 하고, 느끼게 하려고,
또 우리에게 역사하셔서 구원이 이루어지게 하려고 힘써 전하시는 그 역사의 큰 협동 존재들이 많이 있으니 그 존재들을 말하면 일곱이 된다. 이렇게 일곱가지가 협동해 가지고 역사해서 우리가 말씀을 깨닫고, 믿고,
현실에서 실행하게 되면 그 역사의 결과로 죄와 사망과 마귀가 깨어지고, 악령 악성 악습도 함께 깨어지고, 영의 병과 마음의 병, 몸의 병이 치료되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깨달은 마음을 자기 주관에게 빼앗기는 것이다. 3가지 병은 각각 어떠한 것인가?
(1)영의 병은 영이 심신을 통치하는 데 ( )한 연약병이다. 영이 자기 심신을 통치하는 통치력이 강한 것만치 성화가 이루어지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권능있게 이루는 하나님의 의의 ( )가 되어지는 것이다. 성경의 신앙의 위대한 자들은 다 영이 강건한 자들이다.
오늘 우리는 중생한 영이 자기 심신을 통치하는 것이 너무 ( )되고 미비하다. 그로 인해서 가장 요긴한 때에 영이 심신을 통치 못하므로 심신이 제 좋은 대로 움직여 돌이킬 수 없는 실패를 거듭하는 우리들이다.
하나님 말씀으로 영병이 치료되고 강건함을 이루어 내 마음과 몸이 어떠한 형편에서도 다른 것에게 피동되지 아니하고 영에게만 ( )되어 움직이는 영의 사람이 되는 것은 그 무엇보다 귀한 권능이다.(보기: 피동, 제한, 병기, 무능)
(2)마음 병은 마음이 악령, 악성, 악습의 ( )를 받고, 사망과 죄에게 지배를 받는 병든 마음에서 해방되어 ( )하는 마음이 되는 것이 마음병이 치료되는 것이다. 자유하는 마음이 되면 곧 예수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이 된다.
이는 주홍 같고 진홍 같은 마음이 성결해지므로 피와 성령과 진리와 항상 ( )하는 마음이 되는 것을 말한다.(보기: 동행, 자유, 지배)
(3)몸의 병은 먼저 죄짓는 ( )이 몸의 병이고, 그 다음에 물질적 병이 몸의 병이다. 죄짓던 습성이 치료되면 ( ) 병도 치료된다.(보기: 물질, 습성)
3. (가라지 비유)
1) 이 비유는 이 세상의 교회에는 마귀가 심은 가라지와 주님이 심은 곡식이 같이 자라는데, 세상 끝에 천사들이 와서 밭의 곡식을 추수할 때 가라지는 거두어 단으로 묶어 가지고 지옥불에 던져 사르게 되고, 곡식은 모아가지고 곡간, 곧 천국에 넣는다는 비유이다. 이 비유에서 가라지는 택자를 가리키는가, 불택자를 가리키는가?
(답)택자로서 그 행위가 잘못된 자를 가리킨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첫째로, 이 비유는 ( )의 실상을 비유하신 것이고, 둘째로, 가라지는 지옥 불에 던져지고, 곡식은 천국에 들어가고 하는 근거를 ( )에 두었기 때문이다.(:41)
즉, 택자로서 넘어지게 하는 것과 ( )을 행하는 자들의 그 모든 행위와 심신의( )은 마지막 때에 유황불 못에 던져지고, 어려워도 하나님의 법대로, 남을 세워주는 자, 곧 ( )로 사는 자는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고 하신 것이다.(보기: 의, 기능, 불법, 행위, 교회)
2) 가라지를 택자로 볼 경우 문제점은 지옥불에 떨어진 심신의 기능만으로 이를 갈며 우는 인격의 행동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인데, 이 문제는 어떻게 되는가?
(1)첫째는 ( )에서 이미 심신만의 행동으로도 그러한 인격적 행동을 할 수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 (롬8:6)에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하신 것이나 (갈5:17)에 ‘육체의 소욕은 성령의 소욕을 거스리고’하신 것이 그것이다.
(2)또 ( )로 우리가 안 믿을 때, ( )은 죽었고, 심신의 작용만으로 살았는데, 그 때도 지정의를 가지고 모든 희로애락의 인격작용을 한 것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심신의 기능이 지옥 불에 떨어져 그 기능만으로 울며 이를 갈 수 있는 것이다.(보기: 영, 실제, 성경)
3) 그 외에도 우리가 이 비유에서 교리적으로 좀 더 신중하게 연구하고 정리할 것은 (1)심신의 형체는 천국에 있고, 형체 없이 기능만 지옥불에 던져저서 불에 타고, 울며 이를 갈고 할 수 있는가? (2)지옥 불에 던져져 타고 있는 우리의 심신의 기능은 나인가, 아닌가?
(3)범죄한 심신의 기능이 불에 타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보거나 그와 대화할 수 있는가, 없는가? (4)나는 천국에 있으면서 지옥 불에 타고 있는 심신의 기능을 본다면 그 고통이 심할 것인데, 천국에도 그러한 고통이 있는가? 하는 것들이 있겠다. 이 비유의 결론적 가르침은 무엇인가?
(답)우리는 주님의 ( )에 감사감격해서 주님의 법을 지키고, 남을 세우는 자로 살아야 한다. 동시에 그렇게 살고 안 살고에 따라 내 심신의 ( )이 영생하는 나의 기능이 되기도 하고, 지옥 불에 던져져 영원히 타기도 하는 이 큰 사실을 생각하면서 평생을 고락간에 ( )로 살아야 한다.(보기: 의,기능, 대속)
4. (씨 뿌리는 비유)
1) 씨 뿌리는 비유에서 씨는 하나님 말씀이요, 밭은 우리 기독자들이다. 옥토에 뿌린 씨가 되면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 결실을 하게 된다. 이는 하나님과 마귀와 사람과의 관계에 완전한 관계를 맺게 된다는 뜻이다. 이는 금내세의 완전한 성공을 가리킨다. 우리의 성공은 다른 데 있지 않고, 옥토에 뿌린 씨가 되는 데 있다. 옥토에 뿌린 씨가 되면 어떻게 해서 그 완전한 성공을 할 수 있는가?
(답)하나님 말씀은 ( )의 지혜요, ( )의 능력이기 때문에, 이 말씀을 인정하고 복종한 결실은 사람이나 마귀나 하나님 상대의 ( )이라는 완전성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보기: 완전, 전능, 전지)
2) 100배, 60배, 30배의 결실이 우리 생활에 있으려면 옥토에 뿌린 씨가 되어야 한다. 옥토에 뿌린 씨는 씨가 잘 심겨서 자기를 삼키려는 그 땅의 여러 요소를 다 흡수하여 자라가지고 그러한 결실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인정하는 데에나, 복종하는 데에는 방해자가 있다. 이 방해자의 방해를 받지 않고 그 말씀이 나를 온전히 점령하여 말씀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대로 복종하는 것이 옥토에 뿌린 씨이다.
우리는 그 방해자의 방해를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그대로 행하지도 못한다. 그 결과 아무리 씨를 뿌려도, 하나님 말씀을 읽고 들어도, 약속하신 결실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방해자가 무엇인가?
(답)방해자는 셋이니 첫째는 길가밭의 세상지식이요, 둘째는 돌밭의 ( )요, 셋째는 가시덤불 밭의 ( )이다. 이 셋의 방해를 받지 (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 말씀 ( )로 깨닫고, 그대로 인정하고, 그대로 실행하는 것이 옥토에 뿌린 씨이다.(보기: 그대, 아니, 세상, 자기)
3) 길가는 인간의 지식을 접하는 중에 마음이 단단하게 다져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나 아무 깨달음이 없는 자를 말한다. 돌밭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려 할 때 어려움이 오면 말씀을 저버리는 자를 말하는데,
그 저버리는 이유는 자기에게 거슬리기 때문이다. 가시덤불 밭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하고 실행하지만 세상염려와 재리(財利)의 유혹 때문에 말씀을 저버리는 자를 말한다. 이 세 밭에는 씨를 뿌려봐야 결실이 없다.
우리는 길가, 돌밭, 가시덤불 밭이 되어 있는 자신을 탄식하고 이 밭을 개간하여 길가를 만든 인간지식, 돌밭의 돌인 자기중심 자기위주, 덤불인 세상을 다 제거해 버리고 옥토에 뿌린 씨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 어떻게 하면 되는가?
(답)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지식이나 자기나 세상과 ( )을 견줄 수 없는, 이 셋을 무한히 탁월해 있는 전지전능의 말씀인 것을 깨달아 ( ) 짓고, 하나님의 말씀에 거슬리는 인간지식과 자기와 세상은 전적 ( )해 버리고 말씀 그대로 알고, 그대로 인정하고, 그대로 실행하여야 한다.
이것이 옥토에 뿌린 씨가 되는 방법이다. 말씀 앞에 부인한 자기나 세상은 더 좋아진다. 그러나 세상 지식이나, 자기나, 세상 때문에 말씀을 부인하고 저버리는 자는 스스로 망하는 길을 가는 것이다.(보기: 부인, 단정, 비중)
5. (누룩비유)
누룩은 깨달음이나 사상, 행동에 있어 악한 것, 잘못된 것을 말하고, 여인은 교회를 말한다. 교회는 개인이든 가정이든 단체 교회든 어느 면으로든지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잘못된 것이 들어와 있으면, 그것으로 인해서 전부가 다 더러워져서 망하게 된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이 누룩 비유이다.
큰 단체에 작은 한 사람이라도 누룩을 발견하고 비록 작은 잘못이라도 그냥 두면 전체가 더러워지는 무서운 것인 줄 알고 그 잘못된 것, 쓴 뿌리를 뽑아 버리려고 기도하고 애를 쓰는 역사가 있으면,
시간이 걸려도 결국은 뽑혀 나가고 치료가 된다. 그러나 아무도 누룩을 모르고 뽑아서 제거하려는 역사가 없으면 그 단체는 시간문제지 조만간에 썩고 만다. 개인도 그 사람의 그 생애에 무엇인가 잘못된 그 생애 하나가 끼어 있으면 그것 때문에 마지막에는 전 생애가 다 썩어지고 만다. 또 가정에도 그러하다.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답)깨어서 자기 자신에게나, 가정에나, 교회에나, 이 조그만한 누룩을 ( ) 줄 알아야 되고, 작아도 이것을 그대로 두면 ( )를 썩게 한다는 것을 알고 이것을 용납지 말아야 하고, 있으면 ( )해야 한다.
작은 한 사람이라도 힘쓰면 하나님이 같이 하셔서 반드시 제거된다. 또 ( )이 가정이나 교회의 누룩이 되어 있지는 않은지 하는 것도 두려운 마음으로 살펴보아야 한다.(보기: 자신, 제거, 전체, 볼)
6.(겨자씨비유)
겨자씨는 작아도 생명 있는 것을 말한다. 올바른 깨달음, 많은 사람들 중에 중생된 한 사람이 겨자씨이다. 한 진리라도 잡았으면 수많은 원수들이 반대하고 대항해도 그것을 두려워하거나 그것에게 피동되지 않고 뽑히지만 안 하면 자란다.
반대하고 방해하는 것들에게 피동되어 자기가 받은 진리를 부정해 버리면 그것이 뽑히는 것이요, 뽑히면 새가 먹어버린다. 그러나 자기만 부정하지 않고 간직하고 있으면 점점 자란다.
나물인데 나무같이 자라서 모든 반대하는 것들이 다 그에게 깃들이고 그를 찬양하게 된다는 것이 겨자씨 비유의 가르치심이다.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답) 우리는 ( )에 속한 올바른 것이면 그 어떤 반대나 어려움에도 양보하거나 뺏기지 말고 그대로 계속 ( )야 한다. 자기만 부정하지 안하고 간직하고 있으면 조만간에 ( ) 때와 같은 자들이 와서 깃들게 되고 자기는 영광스러운 시은자가 된다.(보기: 새, 지켜, 생명)
08/05/06/화후집회/마13:24-30(870505/화후집회)
1. (몇 가지 가르침)
(1)(교리신조) 한 성구에 대한 해석이 서로 다른 경우가 많이 있다. 같은 면이라면 둘 다 같을 수는 없다. 이 경우 교리 하나가 잘못되면 그것이 ( )이 되어 전 교리와 신앙이 부패해질 수 있고, 바로 되면 ( )을 잘 이루어 갈 수 있으니, 이는 매우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보기: 구원, 누룩)
(2)(사죄)중생된 영은 ( ) 역사로 완전사죄를 받았고, 심신은 주님의 대속공로를 의지하여 자기가 스스로 잘못을 고백하고 다시는 범죄 하지 ( )해야 완전사죄가 된다. 물론 법적으로는 사죄가 되었으나
실상적으로 천국에 갈 수 있는, 죄 없는 의의 심신이 되려면 실상적으로 대속을 계속 ( )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만일 죄를 고백하여 회개하고 다시 죄를 지으면 이는 입었던 주님의 대속을 스스로 ( )어 버리는 것이므로 대속의 효력을 보지 못한다.
또 자기가 죄를 회개했다 할지라도 심신의 어느 다른 한 지체가 죄를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그 죄를 회개하거나, 범죄하고 있는 그 지체를 끊어버리기 전에는 모든 다른 지체의 사죄도 ( )이 된다.
그러다가 죽기 전에 주님의 대속공로를 의지하여 그 죄를 회개하거나 지체를 끊어버렸을 때 비로소 미결로 되어 있던 모든 다른 지체의 사죄도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종말의 시간을 모르는 우리이니 회개를 뒤로 ( )면 안 된다.
(보기: 미루, 미결, 벗, 입, 아니, 객관)
2.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의 관계)
1)그 사람이 죄를 회개하고 의롭게 살았다 해서 그 회개의 ( )로 의롭게 되고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 행위가 주님의 대속을 인정하고 바라보며 대속을 입고 사는 행위일 때, 그 대속 공로의 ( )로 의롭게 되고 구원이 되는 것이다.(보기: 은혜, 행위)
2)자기가 현실에서 이 대속 때문에 여러 가지 손해를 보고 어려움을 당해도 이 대속을 인정하고, 실상적으로 벗어버리지 아니할 때, 이 대속은 효력이 있어서 그 심신이 영생으로 구원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건설구원에는 자기의 행위가 가담한다, 또 자기의 행위를 통하여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성경에
행하여야 구원이 된다고 하는 여러 성구들, (예)‘행한대로 갚는다’(고후5:18, 벧전1:17)는 말씀이나 ‘육체로 심는 자는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으로 심는 자는 영생을 거둔다’(갈6:6)는 말씀,
‘반석위에 지은 집은 무너지지 않고 모래위에 지은 집은 무너진다’(마태7:24이하)는 말씀, 또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요 살인하는 자는 그 안에 영생이 없다’(요일3:15)고 하신 말씀들은 그 알맹이를 말한다면,
전부 어떠한 경우에도 주님의 대속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실상적으로 벗지 아니하고 입고 사는 행위를 할 때 그 심신이 영생하는 구원을 얻고, 실상으로 벗고 살면 멸망인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또 (누가10:25이하)에 ‘마음, 목숨, 힘, 뜻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영생을 얻는다’고 하신 것이나 (계3:1이하)에 사데 교회에게 ‘자기를 다하여 온전한 행위를 해야 살 수 있다’고 하신 것들, 또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누가14:32) 하신 말씀들은
주님이 입혀주신 대속을 실상적으로 벗지 아니하고 입고 살아 영생을 얻는 데에는 자기를 다하지 않으면, 있는 것을 다 내 놓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이다. 이는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실제로 얼마든지 체험하는 일이다.
(계3:18)에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하심도 이렇게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 놓는 값을 내야 대속을 벗지 않고 입고 살 수 있으니 그렇게 하라는 말씀이다.
따라서
(로마서8:22)에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탄식하며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하신 것도 이미 객관적으로 대속을 입어 양자된 중생한 영을 갖고 있는 우리들이 이제 몸도 대속을 입고 살아 양자되기를 탄식하며 기다린다는 말씀이며,
(고전3:10-15)에 ‘그리스도의 대속이라는 터 위에 각각의 세운 공력이 있으니, 그 공력이 불타는 자는 해를 입고, 타지 않는 자는 상을 받는다’고 하신 것도 대속을 벗고 산 행위와 그 기능은 심판의 불에 다 타고, 대속을 입고 산 행위와 심신의 기능은 심판의 불에 타지 않고 구원 얻는다는 말씀인 것이다. 이상의 설명을 간단하게 결론하면 무엇인가?
(답)건설구원은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 )를 통해 이루어지는 구원인데, 그 행위 자체를 통하여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 행위가 주님이 입혀 주신 대속을 벗지 아니하고 입고 사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 대속의 공로의 ( )로 구원이 된다는 말씀이다.
그것을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두고 설명할 때 건설구원은 사람의 ( )를 통하여 구원이 이루어진다! 많은 현실을 거치며 하나씩 하나씩 건설해가는 것이다! 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속을 벗지 않고 입고 사는 것마저도 궁극적으로는 전적 주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구원은 전적 하나님의 ( )인 것이다.(보기: 은혜, 행위)
***다만 알 것은***
우리가 주님의 대속을 입고 살지 못하고 벗어버리는 이유는 악의 ( )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고비 고비마다 참 자기가 아닌 원수인 자기 때문에, 자기를 위해서, 대속을 벗어 버리고 행동함으로 영원한 멸망 길을 가는 것이다.
3. 보화와 진주 비유에서 보화와 진주는 건설구원을 가리킨다. 건설구원은 성화(聖化)되어, 하나님을 대리하는 시은(施恩)의 중보자가 되는 것으로 이는 그리스도의 영광과 권세와 즐거움에 동참하는 일이다. 참으로 가치 있고, 영광스럽고, 행복한 구원이다.
이 보화를 만난 사람은 오다가다 만났고 진주를 만난 사람은 찾아 돌아다니다가 만났다 하신 것은, 어떤 사람은 오다가다가 이 구원을 깨달아 잘 믿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인생의 구원 길을 많은 기도와 노력으로 찾던 끝에 깨달아 가지고 구원을 잘 이룬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다.
다만 이 경우의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일치되는 것은 보화와 진주를 발견한 사람마다, 그것을 자기 것 삼기 위해서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그 진주와 보화를 샀다는 점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은
건설구원의 가치를 발견한 자라면, 이를 이루어 받는 일에 자기의 가진 것을 다 파는 것이 마땅하고, 또 그렇게 하는 데에서만 이 구원은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다른 성경이 가르치시는 것과도 일치한다.
특별히 소유를 다 팔아 보화가 들어 있는 밭을 샀다는 것은 우리 생애의 천태만상의 모든 현실이 다 내 구원에 유익만 되도록 하려면 무엇 하나라도 사로잡는 것이 없어야 한다는 가르치심이다.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답)세상의 썩을 것도 가치로 느끼는 사람은 자기의 인생을 다 그것 위해 바쳐 살고 간다. 우리는 자기의 가진 땅엣 것 전부보다 한 건설구원의 ( )가 크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이루어 갖기 위해 믿음으로 사는 일에 소유와 몸과 생명을 ( ) 내어 놓고, 그것의 여하에 ( )없이, 필요하면 다 ( )하여 매진하다가 주님 앞에 서야 한다.
만일 이렇게 살지 않는다면 비록 성직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는 아직 건설구원의 가치를 알지 ( )한 자이다. 우리가 심신의 수지는 다른 데 다 쓰고, 찌끄러기 갖고 믿음생활 하는 것은 참으로 어두운 일이다.(보기: 못, 투자, 상관, 다, 가치)
4. 그물 비유에서는 그물은 교회를 가리키고, 그 안의 고기들은 다 택한 믿는 자를 가리킨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하셨다. 그물의 고기 중에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는 것처럼 마지막 심판 때에
의인 중에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는다고 하셨다. 악인은 자기중심의 사람이 악인이다. 그물 비유는 택함 받은 믿는 자가 자기중심, 자기위주로 생각하고, 계획하고, 말하고, 행동한 그 모든 행위와 그 심신의 기능은 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지옥불에 던져져 영원히 불에 타게 된다는 것을 가르치신 비유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답)악은 하나님과 대립으로 멸망이요, 영생할 수 있는 자기 심신의 기능을 다 ( )불에 던져져 타게 만드는 원수인 줄 알고, 발견되는 대로 이를 배척하고, 꺾어 ( )여야 한다.(보기: 죽, 지옥)
5.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에 관한 말씀에서 서기관은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이다. 특별히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이란 주님을 자기 안에 모시고 전적으로 주님에게 피동되어 움직이는 자로서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을 말한다.
만일 그러한 설교가라면 그가 바로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이다.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마다 새 것과 옛 것을 그 창고에서 내어오는 집 주인과 같다 하신 말씀은 무슨 뜻인가?
(답)천국의 ( ) 된 말씀 증거 하는 자가 이 새 것과 옛 것을 증거 하면 그것이 막바로 하나님이 새 것과 옛 것의 ( )을 내놓는 것이라는 뜻이다. (예)를 들면 그가 ‘이것은 멸망이다’ 했으면,
말뿐이 아니고 말 그것이 곧 멸망의 실상이고, ‘이것은 구원이다’ 했으면 그것이 막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실상이라는 가르치심이다. 참으로 권위 있는 일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 )히 여기고 서기관 노릇을 하기도 하고, 서기관들의 말을 듣기도 한 것을 깊이 ( )하여야 한다.(보기: 회개, 등한, 실상, 제자)
08/05/07/수새집회/히10:19-39(870506/수새집회)
1. 믿는 자에게 중요한 것은 신구약 성경 가운데 모르는 것은 죽는 날까지 바로 알기를 힘쓰는 일을 계속하고, 또 자기가 바로 안 것은 행하다가 하루 일흔 번씩 일곱 번 실패를 할지라도 다시 일어나서 행하여 아는 대로 다 실행을 하려고 애를 쓰는 이 두 가지 노력이다.
우리들이 모르는 것은 상관없다고 제거해 버려서는 안 된다. 또 우리가 행하지 못하는 것은 행할 수 없으니 상관없이 버리면 안 된다. 그것은 다 심판 받을 행위이다. 성경에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얻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리리라” 하셨으니
우리는 모르면 주님에게 알려 주시기를 구하여야 되겠고, 또 잊어버렸으면 찾으려고 애를 써야 되겠고, 또 자기가 아직까지 들어가 보지 못하고 밟지 못한 그런 세계는 들어가려고 자꾸 문을 두드리며 애를 써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답)( )하고 애를 쓰면 알게 해 주시고, 필요한 것은 다 ( )시켜 주시고, 내가 필요한 것을 가졌다가 잊어버렸든지, 아직 필요한 것을 내가 잡지를 못했을 때에는 찾으면 다 ( )게 해 주신다.(보기: 잡, 충족, 구)
(기본구원과 건설구원)
2. 성경(갈라디아서)에 보면 “인간이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를 얻을 자 하나도 없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 하는 것을 갈라디아서 전체에 기록해 놨다. 율법은 신구약 성경이 다가 아니고, 하나님의 전지로 입법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그 높이와 깊이와 넓이가 무한하다.
이것을 다 행할 자는 없다. 다만 주님이 우리 대신 만족한 이행을 하셨기 때문에 이 사실을 믿을 때 그의 공로가 내 것이 되어 의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천국 가는 의인이 되는 것은 우리의 행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엡2:8)에 보면 우리가 은혜로, 공으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성경들을 근거해서 사람이 의롭게 되어 천국 영생하는 구원 얻는 것은 행위로 인한 것이 아니고, 전적 은혜로, 본인이 알기도 전에 이루어진 것인데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이 구원은 믿는 누구에게나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차별이 없다! 하여 기본구원이라 설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을 이 기본구원 하나로만 보면 믿는 사람이 멸망하지 않고 구원 얻기 위하여 자기가 행할 필요는 전혀 없는 것이다. 혹 구원하신 하나님을 대접으로 행한다 할지라도 안 행해 봤자 그거 가지고 조그만치라도 안 행했다 하는 그런 부담으로나 책임으로나 거게 대한 보응은 하나도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고후5:18, 벧전1:17 등)에 보면 “행한 대로 갚는다”고 하는 말씀이 많이 있다. 그런 말씀은 무슨 말씀인가? 그것은 그저 교훈적으로, ‘행해야 되지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하나의 협박적으로 말해서 의를 권면하는 말로 한 것이지 그것이 심판의 정죄까지 따라가서 관련된 것은 아니라 이렇게 해석을 하는 자들이 있으나 이는 너무나도 성경을 에누리 하는 것이다.
더욱이
(누가10:25이하)에 보면 ‘마음, 목숨, 힘, 뜻을 다하여야 영생을 얻는다’고 하셨고, (요한일서3:15)에는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그 속에 영생이 거하지 아니한다’고 하셨다. 이는 분명히 우리가 성경 말씀대로 행하여야 구원이 되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만일 구원을 하나로만 본다고 하면
이제 말한 성경이나 ‘행한 대로 갚아주신다’고 하신 것은, ‘사람이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은혜로 되는 것인데 믿음으로만 받는다"고 하신 성경과 전적으로 모순된다.
또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라고 하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중 순종치 아니하여 광야에서 죽은 수많은 이스라엘인들이나,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 일제 말 신사참배한 우리 선조들은 다 지옥에 가야 한다.
만일 이들에 대하여 회개한 자는 대속 공로로 천국 가고, 회개 안한 자는 지옥 간다고 한다면 이 역시 행위로 천국 구원 받는다는 말이 되어 은혜로 구원 얻는 다는 성경과 모순되고,
또 그렇다면 예수님의 대속은 인간의 행위로 인하여 전적으로 무효화되는 허무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들은 분명히 주님을 믿는 자들이기 때문에 은혜로 천국에 간 것이다. 그러면 믿는 사람들의 행위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여기에서 우리는 성경은, 믿는 사람들이 얻는 구원은 전적 은혜인데, 그저 믿기만 하면 얻는 구원과, 우리의 행함을 통하여 얻는 구원 둘로 나누어 말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성경은 직접 구원을 둘로 말씀하고 있다.
(예)를 들면 (롬8:22)에 보면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며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노니’ 하셨다. 여기 보면 분명하게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인 구원과 우리 몸의 구속이라는 구원,
이렇게 둘로 나누어서 말씀하면서,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는 이미 받았고, 이것을 받은 자들이 이제 탄식하며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는 영이 중생된 영의 구원을 말씀하는 것이고, 몸의 구속이란 심신의 구원을 두고 말씀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고린도전서3:10-15)을 보면 ‘우리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집을 세우는 자이고 마지막에는 불로 그 공력의 어떠함을 시험하여 밝힐 것인데, 만일 그 때 자기가 세운 공력이 불에 타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자기가 세운 공력이 불에 타면 그 사람은 해를 입으리니,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 다 타버리고 얻은 것 같으리라‘고 하셨다. 여기서도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의 구원‘과 ’그 위에 세우는 공력이라는 구원’으로 구원을 둘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공력은 행위와 그 행위로 만들어지는 것을 말하는데, 행위를 잘못해서 그 공력이 다 불타 버려도 얻는 구원이 있고, 행위를 잘해서 공력이 불타지 않으면 그 터가 되는 구원과 함께 그 공력도 불에 타지 않고 그대로 있어 영생하는 구원을 받는 것임을 본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이상의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우리 믿는 사람이 얻는 구원은 전적 은혜인데, 영이 중생되고 육이 부활하여 천국 가는 것은, 믿기만 하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구원이라 하여 기본구원이라 하고, 심신이 영생할 심신으로 성화되는 것은 사람의 행위를 통하여 건축하듯이 하나씩 이루어간다 하여 건설구원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구원을 이렇게 둘로 나누어 말하는 것이 성경을 그대로, 정확하게, 나타내는 것이며, 따라서 구원을 둘로 나누어 설명해야만 ‘믿음으로 얻는 구원과 행위로 얻는 구원’을 말씀하고 있는 성경을 모순 없이 해석할 수 있다. 어떠한가?
(답)구원을 기본구원과 건설구원, 둘로 나누지 않고 하나로 말하는 것은 구원론의 큰 ( )이라 할 수 있다. 구원을 (기본구원)하나로만 알면 우리는 아무 행할 필요가 없어서 건설구원을 ( )을 내든지,
아니고 (건설구원)하나로만 알면 행위를 잘하여야 구원을 받으니 죽을 때까지 구원의 확신도 없이 불안 가운데 신앙생활 하는 ( )의 사람이 되고 만다. 또 구원을 둘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 성경을 올바로 ( )할 수 없다.
이제 말한 (로마서8:22), (고린도전서3:10-15)의 말씀이나 또 (빌립보2:12)에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하신 성경, 행위를 바로 해야 구원 얻는다는 많은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겠는가? 이는 참 중대한 문제이다. 기본구원, 건설구원의 교리는 한 번뿐인 생애를 온전한 신앙생활과 구원으로 인도하는 ( )된 구원의 도리가 아닐 수 없다.(보기: 복, 해석, 불신, 절단, 누룩)
3. 중생한 영은 범죄하지 않는다는 것도 마음과 영을 같은 것으로 보느냐, 마음은 육에 속한 것으로 신비한 물질이요, 영은 마음과 별개의 존재로 하나님의 형상대로의 신령한 존재로 보느냐? 하는 데에서 그 주장이 달라지는데 이도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는 이런 문제들에 관하여 착념하여 연구할 필요가 있다.
다만, 잊지 말 것은 성경의 교리와 신조는 진리이기 때문에 인간 수평선 이상의 무한한 것이다. 오직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성경지식 가지고만 분석하고, 연구하고, 해석해야지, 인간의 주관을 가(加)하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신학자나 목회자는 책임이 막중하다. 그러나 그들에게만 책임을 돌릴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도 명백성을 갖고 있는 성경이 있고,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교리와 신조에도 사욕이 있어서 자기중심의 교리신조를 갖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옳은 것을 찾아보려는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자기가 갖고 있던 교리신조와 안 맞으면 무조건 배척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가장 큰 악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가장 큰 이유는 자기들이 가르치던 것과 예수님이 오셔서 가르치시는 것이 달랐기 때문이다. 다르면 냉정한 양심과 성경을 가지고 따져 보면 될 것인데 그렇지 못했고,
나중에는 알았지만 그것을 인정하면 자기들의 지위, 권세, 명예, 생명이 절단날까 싶어 못하고 예수님을 배척하고 멸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지금도 그러하다.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답)교리와 신조는 성도의 영원한 ( )화복이 달린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는 경솔하게 ( )해버리지도 말고, 경솔하게 받아들이지도 말아야 한다. 악을 버리고, 냉정한 ( )을 써서 성경을 연구해 보아서, 옳으면 이제까지 알고 있던 것과 같으면 좋고, 다르면 이제까지를 버리고 따라가야 한다.
받을 심판이 크니 많이 ( )이 되려고도 하지 말고, 옳은 것이면 이는 열방과 전부를 파괴도 건설도 하는 것이니 수많은 사람들이 뭐라고 하고, 대적을 해도 상관이나 ( )치 말고 굳게 잡고, 듣든지 안 듣든지 전하여야 한다.
(보기: 요동, 스승, 양심, 배척, 생사)
4. 히브리서 10장19절 이하 강해에 대해서는 각자가 깨달은 것을 굳게 잡으십시오!
본 성경의 강해에 대해서는 (5/14:수)오후집회 설교 요약문 참조할 것.
08/05/07/수전집회/히10:37-39(870506/수전집회)
1. 하나님의 말씀은 읽는 것도 복이 있고, 듣는 것도 복이 있고, 지켜 행하는 것이 더욱 복이 있고, 완전한 결실을 맺어서 실상이 이루어지는 것이 복이 더 있고, 이루어지고도 항상 부족감과 감사를 계속하는 것이 더욱 복 있는 사람이다.
아무리 잘해도 ( )함을 모르면 잡것이 섞여서 넘어지고, 또 ( )한 것을 모르면 희망은 없다.(보기: 부족, 감사)
2. 각종 비유 요약
1) 씨 뿌리는 비유
씨 뿌리는 비유에서 요구하시는 대로 우리는 옥토에 뿌린 씨만 되면 인생의 완전한 성공을 한다는 것을 굳게 잡고, 옥토가 되기를 작정하여야 한다. 옥토가 되려면 자기가 깨달은 말씀을 인정하고 복종하는 것을 방해하는 3가지 방해를 다 제거하여야 한다. 세 가지 방해는 길바닥의 인간지식,
돌밭의 자기, 덤불밭의 세상이다. 자기가 깨달은 말씀을 인정하고 복종하는 것을 이 셋이 어떻게 방해해도 이것들에게 하나도 피동되지 아니하고 말씀 그대로 믿고 복종하는 것이 옥토이다. 구체적으로 옥토가 되기 위해 어떻게 작정하고 힘써야 하는가?
(1)온 세상이 뭐라고 말해도 나는 깨달은 진리 요대로 인정하고 행하지, 세상 지식, 세상 ( )에게 피동 돼서 피해보지 않겠다. 작정하고 그대로 하고,
(2)내가 어떤 형편 사정에서 무슨 나로 나타나든지, 이 진리를 ( )에게 절대로 양보하지 않겠다. 이 진리를 죽이고 나를 세우지 않겠다. 그 결과 이 진리가 내 생명도, 내라는 모든 심신의 요소도 완전히 다 먹고 자라도록 하겠다. 작정하고 그대로 하면 돌 없는 옥토가 되는 것이고
(3)또 세상에 참 자살할 만한 사정도 있고, 말라죽을 만한 사정도 있고, 온갖 좋은 세상 나쁜 세상 얼마든지 있지만 그 ( )을 인해서 이 말씀을 중단시키지 않겠다. 내 세상이 다 깨져도 나는 이 말씀대로 단행하겠다. 계속하겠다. 작정하고 그대로 하면 된다. 요것을 굳게 잡자! (보기: 세상, 나, 문화)
2) 가라지 비유
가라지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첫째 가라지를 ( )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에게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또 많은 사람을 넘어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둘째로 중요한 것은 무엇을 보고 알아야 하느냐 인데,
이는 ( )에 두 가지 행위를 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으로 알면 된다. 셋째는 가라지를 정리해 버려야 하는가 인데, 가라지 ( )는 하나님께 맡기고 자기는 그것이 교회에 세력을 가지고 날뛰지 못 하도록만 하면 된다.(보기: 정리, 결실, 알)
3) 겨자씨 비유
아무리 ( )아도 생명 있는 것, 곧 진리나 영감을 받아서 자기에게 심어 놓고 뽑히지만 ( )으면 자란다. 주님의 구속을 힘입어서 받은 진리와 영감에 대한 인정과 복종을 계속하면 자라서 나물인데 나무같이 된다.
인간을 ( )한 인물로 자라게 되어 정처 없는 인간들, 반대하던 인간들이 그 은택으로 살게 된다는 비유이다. 따라서 기독자가 인간을 ( )하여 인간 부자 되는 법도, 또 ( ) 갚는 법도 다 이와 같이 겨자씨를 심어 뽑히지 않고 자라는 것이다. 나만 자라면 다 된다.(보기: 원수, 점령, 초월, 않, 작)
4) 누룩 비유
누룩은 나쁜 것, ( )로운 것을 말한다. 교회는 ( )은 나쁜 것을 그대로 두면 전체를 썩혀버리는 것이니 이를 바로 알아 용납하지 말고 ( )하여야 한다는 비유이다. 우리는 교회는 서로 다른 지체로서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 )체 인식을 가져야 하고, 전체에 대한 책임감을 갖고 누룩을 발견하고 제거하여야 한다.
(보기: 공동, 제거, 작, 해)
5) 보화와 진주 비유
보화와 진주는 건설구원을 가리키는데, 이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말로 보화와 진주의 ( )가 자기 전 재산보다 낫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렇게 깨달아야 마땅한 것이고, 또 이렇게 깨달아야 자기 가진 것을 ( ) 팔아 보화를 자기 것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가치를 진정으로 높게 두는지 안 두는지 하는 것은 그가 이 보화와 진주를 사기 위해 실제로 뭘 ( )느냐 하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보기: 파, 다, 보화)
6) 그물 비유
이 비유에서 그물은 교회, 그물 안의 고기는 바다라는 세상에서 전도되어 교회 안으로 들어와 있는 믿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 중에서 좋은 고기는 그릇에 담고 나쁜 고기는 내어 버리는 것처럼 세상 끝에는 천사들이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는다고 하셨다.
이는 한 교회의 다 같은 교인이라도 ( )은 마지막에는 지옥불에 던져 불에 영원히 타게 된다는 말씀이다. 악인이 누구인가? 자기중심 자기( )로 언행심사하는 자가 악인이다. 따라서 본 비유는 믿는 사람이라도 자기중심의 행위와 ( )은 다 지옥불에 던져져서 영원히 탄다는 것을 말한다.
그만큼 주님은 우리의 생애를 망치는 악을 분히 여기신다. 우리도 주님과 같은 분개로 우리의 원수인 이 악의 자기를 미워하고 부인하여야 한다. 금생과 내세의 기능의 ( )성을 깨닫는다면 악으로 살아 그 기능을 다 멸망시키는 것에 대한 분개가 크게 되나니 여기에 대한 궁구와 사색이 있어야 하겠다.
(보기: 귀중, 기능, 위주, 악인)
7) 천국에 제자 된 서기관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마다 곳간에서 새 것과 옛 것을 내오는 집 주인과 같으니라” 요 진리 깨닫기 참 어렵고, 느끼기는 더 어렵다. 보통은 ‘신구약 성경에 있는 것을 이런 설교도 하고 저런 설교도 하고 다 설교해 내느니라’ 하는 것으로서 해석하지, ‘그가 증거하는 것이 그 ( )을 나타낸다‘ 하는 것으로 깨닫기는 심히 어렵다. 비유에 관한 7가지 말씀을 깨닫고 그대로 계속 믿어 나아가면 굉장한 역사와 구원이 이루어질 것이니, 중요한 것은 깨달음을 자기 주관에게 ( )앗기지 않는 것이다. 받은 ( )를 놓지 않아야 한다.(보기: 실상, 은혜, 빼)
08/05/07/수후집회/히10:19-39(870506/수후집회)
1. (:19)“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예수님의 사죄, 칭의, 화친의 세 가지 대속을 힘입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담력을 얻었나니 하는 말씀이다.
알 것은 아무리 대속을 입었다 할지라도 행동을 대속 벗은 행동하면 건설구원적으로는 대속과는 아무 ( )이 없다. 대속의 효력이 없는 것이다. 또 아무리 대속을 자기가 알고 대속 입은 행동을 한다 할지라도 제가 주님의 ( )이 되어야 하지 제가 제 것으로 남아 있으면 또 소용이 없다. 값을 안 냈기 때문이다.
(보기: 것, 상관)
2. (:20)에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그 길은 예수님이 대속의 공로로 베풀어 놓으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말한다. 휘장 가운데라 말은,
구약 성소는 지성소 성소가 있어서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는 휘장이 가리워 있어 그 휘장에는 짐승의 피를 가지고라야 그 ( )을 열고 들어가지 그리 아니하면 들어가지 못한다. 그런데 주님의 대속공로로 그 길이 뚫렸다는 말이고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하신 것은 십자가 대속 제물이신 예수님의 ( )를 가리켜 말한다. 휘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은 죄 담인데 어찌 예수님의 육체가 그 휘장이 되는가?
예수님이 우리 죄를 다 담당하셨기 때문에 그 휘장은 예수님의 육체가 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육체가 그 죄의 형벌을 완전히 다 받아서 죽으심으로 인해서 그 죄가 없어진 표로 휘장이 갈라졌던 것이다.(보기: 육체, 휘장)
3. (:21)에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있다 그 말은 ( )와 물질계의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집인데 그것을 책임지고 관리하는 중보자 제사장, 곧 ( )이 계시다는 것을 말씀한 것이다.(보기: 영계, 예수님)
4. (:23)에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마음이 주님의 ( )의 공로를 인정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대속의 능력이 와 가지고 그 마음을 완전히 ( ) 마음으로 만들어서 살리는 역사를 착수했다는 말이다.(보기: 새, 대속)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과거에도 양심은 있었고 지금도 불신자의 양심, 모든 이종교들의 양심이 있다. 그러나 주님의 이 대속을 입어서 어두움을 벗고서 보니까 과거에 것은 양심이라고 해도 전부 주관적이요 ( )적이요 악령적일 뿐 아니라 지금의 자기 양심이라고 하는 것도 그렇다는 것을 깨닫고 새 마음이 되었다는 뜻이다. 우리가 양심의 악을 깨달아야 한다.(보기: 죄악, 사욕)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육을 하나님의 ( )으로 씻었다. 말씀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우리에게 정확무오하게 효력 있게 전달해 주고, 알려 주고, 믿게 하고, 바라보게 하고 힘입게 하는 것이니, 이 말은 곧 예수님의 ( )으로 씼었다는 말씀이다.(보기: 댸속, 말씀)
“참 마음과”- 참 마음이라 말은 대속 받은 마음을 말하는 것이니, 곧 거짓부리를 헤치고 헤쳐서 찾은 마음의 ( )을 말한다. 이는 진정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곧 착한 ( )이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보기: 중심, 양심)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대속을 입었으니 참 마음으로 나아간다 말은 착한 양심으로 나아간다는 말과 같은 말이요,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간다 말은 정확히 알고 인정하고 그대로 ( )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말이다. 이게 아니면 하나님께 나아가지는 못한다( :발표, 실행)
(:22)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에게 신구약 성경은 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맺어놓은 ( )이다. 약속하신 이 하나님은 변함이 없고, ( )을 수 있으시니 하는 말이고.(보기: 믿, 계약)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주님의 인도대로 따라 걸어가면 영생이 이루어진다. 존귀가 이루어진다. 하늘과 땅의 것이 다 네 것이 되어진다. 의인이 된다.’ 하신 것과 같은 소망은 변치도 가감도 없는 것이니 네가 그 ( )도, ( )도 흔들리지 말고 굳게 잡아라(보기: 길, 소망)
(:24) “서로 돌아보아” 눈을 위하는 것은 눈에는 없고, 팔을 위하는 것은 팔에는 없고 다른 지체에 있는 것처럼 우리 성도는 그리스도의 한 몸이요, ( )로서 나를 돕고 구원할 것이 다른 형제에게 있고, 또 내게는 그를 돕고 구원할 것이 있으니 서로 피차에 돌아보라. 믿는 사람끼리도 ( ) 믿는 사람도 돌아보라.
(보기: 안, 지체)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피차에 ( )를 범하지 안하도록, 죄와 멀어지도록, 죄를 미워하도록, 죄와 아무 관계없는 사람이 되도록,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도록, 하나님과 밀접한 사람이 되도록,
하나님 ( )의 사람이 되도록 이 일을 너도 열심히 하고, 그 사람도 ( ) 받아 열심히 하도록 해라 그 말이다. 여기다가 뱀의 사랑을 붙이면 안 된다.
(보기 : 충격, 중심, 죄)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뭐 꼭 교회 가야 되나? 꼭 새벽기도 가야 되나?’ 하고 자꾸 모이지 안하는 그것만 연습하는 자들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기도하러, 성경공부 하러, 전도하러, 자꾸 모여야 한다! 그 말입니다.
(: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진리, 곧 예수님의 대속을 바로 아는 그 ( )를 우리가 배웠으니 그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보기: 이치, 돈)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우리가 요것은 죄라는 것을 ( )고 난 다음에 죄를 짓는 것은 짐짓 짓는 것인데, 그 죄는 예수님이 기본적으로는 사하셨는데, 자기가 나서서 그 대속을 벗어버리고 고의로 다시 범죄하면 ( )하는 길이 없다는 말씀이다. 그러면 그거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제는 ( )야 된다. 예수님의 대속을 입은 사람으로 실제로 살아야 되지 살기 전에는 안 된다. 처음에는 말만 하면 되는데 그 다음에는 말만 해 가지고는 안 된다. 이것은 택자에게 하신 말씀이다.(보기: 고쳐, 사죄, 알)
(: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믿는 사람도 그 ( )구원에는 회개 안 하면 심판 받는다. 스스로 대속을 ( )어 버렸으니 예수님의 피 공로가 소용이 없다.(보기: 벗, 건설)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주님의 대속을 입은 자로서 다 알면서 대속을 벗고 살고, 순종하지 않는 자가 대적하는 자인데, 그 죄는 ( )하지 안하면 심판과 하나님이 대적을 소멸시키는 맹렬한 ( )만 있다 하는 말씀이다. 이것은 택자에게 하신 말씀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 죄를 지어도 예수의 피만 믿으면 아무 상관없고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영과 심신의 형체는 그렇지만 심신의 기능은 다르다. 심판이 있다.
(보기: 불, 회개)
(:28) 그 다음에 덧붙였습니다.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모세의 법을 범한 자도 한 사람 증인 가지고는 안 되지만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인이 있으면 죽었거든
(:29)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대속하신 주님의 공로를 멸시하므로 주님을 멸시하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자기를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라고 했으니 이 말씀이 택한 자에게 하는 말씀이 분명하다.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이 피가 우리를 말갛게 깨끗케 씻었으니, 다시는 더럽히지 안해야 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 )지 못하기 때문에 또 ( )혀지는 것도 그렇게 더럽혀지는 것을 느끼지 않는다. 이것이 주님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보기: 더럽, 느끼)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는, 성령이 ‘야야 이렇다, 저렇다. 이래라.’ 실컷 감화로 깨닫게 하고 나니까 그 성신의 감화를 식은 죽 먹듯이 싹 ( )해 버리는 자가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보기: 소멸, 향상)
“이런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이것이 우리 건설구원, 기본구원 얻은 자의 신앙 행위에 관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낙관하고 그라면 안 됩니다.
(:30)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 이 원수는 그의 피로 자기를 깨끗케 함을 입는 그 사람에 대해서 원수를 말한다.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신다고 하셨다. 불택자, 안 믿는 사람들만 심판 받는 것이 아니다.
(:31)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하나님의 손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님은 빼지도 잊어버리시지도 않는다. 이분의 심판이 무섭다.
(:32)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처음 예수 믿을 때, 구속의 도리를 깨달은 후에, 마찰과 싸움의 어려움이 많았지만 다 참고 지나 왔으니 그것을 생각하라.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국가에서, 사업에서 대속을 받은 자로서의 흠 없는 합당한 생활을 하려고 하면
전부가 세상은 적이요, 어두움이기 때문에 ( )적으로 대립이 되는 것이다. 이래서 예수님 때문에, 교리 신조 때문에 고난들이 많은데, 이 고난 받아 보지 못한 사람은 아직까지 예수님을 제대로 믿어보지 ( )한 사람이다. 미나리로 말하면 마디가 생기지 안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언제 떨어질런지 모른다.
우리는 과거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언제든지 ( )해야 된다. ‘과거에 이런 고난에서도 주님이 나를 구원하셨다. 이런 어려움, 저런 절망 중에서도 나를 구원하셨다.’ 하는 것을 항상 생각하여야 한다( :생각, 못, 필연)
(:33)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남한테 자꾸 이런 비방 저런 비방을 듣고 환난당하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노리개 모양으로 구경거리가 되고 하는 말씀이다. 예수를 바로 믿으면 다 이런 걸 받아야 되고, 또 받게 된다. 그것으로 주님과의 깊은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어떤 사람은 자신이 이런 꼴을 당하지 안해도 이런 꼴 당하는 그 사람을 ( )고 싶고, 그 사람에게 가고 싶고, 그 사람 어려움 당하는 데 눈물은 내가 나고, 그 사람 어려움 당하는 데 기도는 내가 하고, 그 사람 어려움 당하는 데 ( )이 가고,
이래서 어려움 그 당하는 사람의 친구가 되고, 그 사람과 나와 점점 ( )와지는 자가 되었으니 그런 것은 많이 느껴 보았을 것이다. 그것도 못 느끼면 아주 가짜다.(보기: 가까, 동정, 사귀)
(:34) “사귀는 자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주를 위해서 고난 받은 사람은 동정이 된다.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공연히 재물도 뺏긴다. 그런데도 그 길을 가는 것은 영원한 세계에서 주님이 다 ( )아 주시기 때문 이다. 주님 위해서 손해 보는 것은 없어질 것인데, 장차 영원무궁토록 없어지지 ( )할 것으로 다 보상받는다. 이 계산을 대 가지고 살아야 된다.(보기: 안, 갚)
(: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여게 담대함은 주님을 위해서 온갖 종류의 어려움이 올 때에 그 어려움에 벌벌 떨지 안하고 주를 위해서 오는 온갖 ( )을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달게 받는 그 담대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주를 위해서 멸시와 천대 모든 어려움 당하는 것을 ‘그렇게 되면 어쩔까?’하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것 다 비겁한 것이다.
예수 믿는 사람은 주를 위한, 진리를 위한, 자기 신조와 교리를 위한 그 어떤 어려움이라도 무서워하지 않는 이 ( )함이 있어야 된다. 이것이 무궁세계에 큰 상급을 얻는다.(보기: 담대, 어려움)
(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하나님의 뜻을 내가 행하는 것은 어두운 세상에 빛의 생활이라 전부 세상과 반대되는 생활이기 때문에 어려움은 필연인데, 이런 어려움을 당해도 참고 ( )는 것이 필요하다. 필요함은 하나님의 뜻인 하나님의 영광의 찬미, 곧 우리 ( )을 이룬 후에(보기: 구원, 견디)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하늘나라에 있는 영광의 약속. 하나님이 등용하는 약속.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다 자기에게 다 맡겨 주시는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는 말씀이다.
(:37)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예수님의 재림은 잠깐 후이다. 조금도 지체하시지 않는다.
(:38)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주님의 구속함을 믿어 주의 ( )된 자는 하나님에게 오직 (“ ”)로만 살리라.(보기: 예예, 것)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신앙에 후퇴하면 하나님은 섭섭해 하신다. 어떤 일로라도 신앙이 후퇴되면 하나님은 ( )워하신다. 조금이라도 ( ) 앞으로 앞으로, 더 충성으로 충성으로, 더 힘쓰고 더 힘쓰고, 주를 위해서 더 바치고 더 바치고 하는 것이 성도이다.
(보기: 노여, 더)
(: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믿음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의 씨를 가졌기 때문에, 어디서든지 뿍뿍 ( )으로 나아갈 사람이지 뒤로 후퇴할 사람은 아니라는 말씀이다. 후퇴 생활은 ( )의 생활은 아니다.(보기:기독자, 앞)
08/05/08/목새집회/요9:1-41(870507/목새집회)
1. 신학교가 너무 난립하여 있으니 단일 신학교를 세워서 신학의 질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결국 세상지식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는 틀린 주장이다. 이는 사실상 천국에서 세상으로 더 끌어내리는 것이지 신학의 질을 높이는 것이 아니다. 신학의 질을 높이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답)첫째는 성경 ( ) 그대로를 좀 더 익숙히 알아야 되겠고, 더 질을 올리는 것은 성경 본문을 그대로 ( )도록 하는 것이 질을 올리는 것이고, 또 더 질을 올리는 것은 그 성경 가운데 체계적인 도리를 연구해서 바른 교리와 신조를 ( )낼 수 있도록 되는 것이 더 질을 올리는 것이고, 더 올리는 것은 신학생들이 ( )의 충만한 사람들이 되어지도록 하는 것이 더 올리는 것이다.
(보기: 성령, 빚어, 외우, 본문)
2. 기독자가 예수 믿는 것은 사람의 구원의 길이 예수 안에만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기 때문에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이다. 다만 믿는 사람이 어떻게 믿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 곧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의지하고, 어떻게 맡기고, 어떻게 순종해야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데, 이것이 바로 교리신조의 문제이다.
문제가 되는 이유는
우리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교리 신조에 소유, 몸, 생명을 다 바쳐 놓고 살기 때문에 만일 그 교리신조가 잘못된 것이면 그 모든 것은 영원한 멸망이고, 바로 된 것이면 영생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영원한 생사와 화복이 달려 있는 교리신조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 깨달음을 아무것이나 상관없이 경솔하게 받아들이면 안 된다. 더욱이 사는 길은 언제나 한 길 뿐이고 죽는 길이 꽉 차있는 세상이다.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답)우리는 교리신조를 정할 때 그 깨달음대로 살다가 무엇이 어떻게 되어도 그대로 걸어갈 교리신조로, 자기 소유나 몸이나 생명보다 가치가 ( ) 교리신조로 확정하여야 한다. 그리고 실상 그렇게 걸어가야 한다.
만일 그렇게 확정이 안 되면 둬 두고, 이제 전심전력을 기울여 연구하고, 묻기도 하고, 실행도 해보고 해서, 그 결과 ( )의 감화가 자기에게 옳은 길임을 알려 주시고, 행할 용기와 능력을 주시는 것을 받아 ( )하고 걸어가야 한다. (요일2:27)에 자기만 힘쓰면 성령이 다 알려 주신다고 하셨다(보기: 확정, 성령, 큰)
3. (나면서 눈 먼 자의 표적)
1) 이 표적에서 첫째로 가르치시는 것은 인생은 다 나면서부터 심령의 눈이 먼 ( )이라는 사실이다. 사람은 날 때부터 원죄와 본죄로써 완전히 죽어, 유일한 선생이신 하나님과 끊어졌기 때문에, ( )의 지혜가 없는 눈 먼 자이다.
따라서 타락한 인생들은 망할 것, 불탈 것만 보지, 불타지 않는 것, 영생하는 것, ( )된 것은 보지 못하고, 생의 방편도 망할 방편만 알지 참 ( ) 방편은 하나도 보지 못하는 것이 인생들이다. 이 사실이 깨달아져야 한다. 그런데 자기들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그 삐뚤어짐이 그저 있다고 한 것이다(보기: 사는, 참, 성령, 소경)
2) 그러면 날 때부터 눈 먼 자는 누구 죄 때문인가? 부모의 죄 때문도, 자기의 죄 때문도 아니고, 그에게서 ( )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하셨다. 나면서부터 눈 먼 소경이 난 것은 영원 전에 우리의 구원을 목적하신 하나님이 그 ( )을 위해 예정하신,
절대 예정 가운데 들어 있던 것이요, 그 ( )의 때가 되매 하나님 당신이 하시고자 하시는 그 구원의 역사를 위해 그 소경을 ( )게 하신 것이요, 주님에게 데려온 것이다. 우리도 그러하다. 이 광대한 사실을 항상 생각하며 모든 사물을 대하여야 한다( :나, 예정, 목적, 하나님)
3) 주님이 눈 먼 소경의 눈을 띠워 주신 방편은 두 가지이니 첫째는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눈에 발라 준 것이요, 둘째는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명하신 것이다. 본문의 눈 먼 소경은
주님이 발라 준 진흙을 때어 버리지 않고 붙이고 있었고, 주님이 명하신 대로 순종해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은 결과 그 눈이 떠졌다. 오늘 우리들이 성령의 눈을 뜨려면 이 두 가지를 행하여야 한다. 무엇인가?
(1)당면하는 모든 현실은 그것이 비록 갑갑하고 고통이 된다 할지라도 불평하거나 반대하지 말고 ( ) 마음으로 받아서 거기서 신앙생활 하여야 한다. 그 현실은 나로 하여금 ( )의 지혜의 눈이 떠져서
영원무궁한 생명과 평강과 영광의 세계를 실상으로 보고 여기에 땅엣 것을 투자할 수 있는 복된 자를 만들기 위해서 주님이 만들어 주신 것이다. 피조물이 만들어 주신 것이 아니다.
(2)현실에서 ( )을 써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 )을 찾아 이런 저런 방해가 있어도 그대로 순종하여야 한다.(보기: 뜻, 양심, 성령, 단)
08/05/08/목전집회/요9:1-19(870507/목전집회)
1. (몇 가지 지식)
1)우리에게 하나님 말씀의 지혜와 능력을 깨닫게 해 주기 위해서 큰 역군 일곱, 곧 성부, 성자, 성령, 진리, 중생한 영, 선지사도, 만물이 역사하고 돕는 것을 배웠다. 또 그 일곱 역군이 깨닫게 해 주는 것을 우리 심신이 받는 것임도 배웠다.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답)우리는 이것이 사실인가를 궁구하여 ( )어야 한다. 일곱 가지를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면서 하나님 말씀을 받고, 전할 때 믿는 것만치 그 일곱 능력은 우리를 돕는다. ( ) 믿으면 그 큰 능력의 역사가 자기를 돕지 못한다.(보기: 믿, 안)
2)겨자씨 비유에서 한 가지 생각할 점은 생명 있는 겨자씨가 심겨져서 뽑히지만 않으면 자라서 나물인데 나무가 된다고 했는데, 이 때 겨자씨는 땅에 심겨지지만 하나님의 진리는 나라는 밭에 심겨진다. 심겨지는데 심겨진 진리는 무슨 양분을 빨아먹고 자라는가?
(답)내 속에 주님의 ( ) 안에 뿌리를 박고 그 양분으로 자라는 것이다. (엡3:17)에도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하셨다. 즉 깨달은 진리를 주님의 구속을 ( )입어 행해 나가므로 그 진리가 무럭무럭 자라는 것이다.
(보기: 힘, 구속)
3)누룩 비유에서 하나 더 알 것은 누룩은 유월절에는 금물이라는 점이다. 유월절은 애굽에게는 환난의 절기인데 이스라엘에게는 자유와 해방과 큰 수입의 절기이다. 지금도 성도에게 오는 환난은 다 자유와 해방, 큰 수입을 주기 위한 유월절 환난인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 유월절에 가장 엄금한 것이 누룩이었다. 누룩 없는 떡을 먹어야 했고, 집안에 누룩이 있으면 안 되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인가?
(답)성도에게 환난이 오면 제일 중요한 것이 양의 피, 곧 주님의 대속 안에 거하는 것이 첫째 중요하고, 그 다음에는 성도 간에 ( )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을 사랑하는 ( )이 있어야 그 환난을 승리하고 그 환난이 나에게 진정한 자유와 해방, 큰 유익을 주는 환난이 된다는 가르치심이다. 명심하여야 한다.(보기: 사랑, 불목)
2. (나면서 눈먼 자)
1)나면서 눈먼 것은 타락한 전 인류의 ( )이 소경되어 있는 것을 가리킨다. 소경되었다는 말은 타락한 인생은 ( )고 망하는 것만 있는 것으로 볼 줄 알지, 참, 완전, 실상, 좋은 것, ( )하는 것은 하나도 못 보는 자들이 되었다는 말씀이다. 그런데도 자기들은 본다고 하니 삐뚤어져 있으면서도 그것도 모른다는 말이다.(보기: 영생, 죽, 심령)
2)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한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부모의 죄도 아니요, 자신의 죄도 아니고, 그에게서 하나님의 ( )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려 함이라고 하셨다. 선조 아담의 선악과 먹은 죄 때문이라고 하면 맞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게 좁은 생각에 머물면 안 된다. 인류의 타락과 주님의 구속이 다 하나님이 영원 전에 정하신 ( )을 달성하기 위한 광대한 역사로 되어진 것이니, 이 나면서 눈 먼 일도 그러한 ( )한 동기와 목적의 능력 역사로 이루어진 것임을 믿어야 한다. 마음을 넓혀야 한다.(보기: 광대, 목적, 하시)
**참고**이런 것이 다 옳은 교리와 신조인데, 우리가 옳은 진리를 깨달으려면 (롬12:1-2)에 보면 몸으로 산( )를 드려야 하고, 이 ( )를 본받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다.
이 말씀은, 우리가 자기 주관을 완전히 죽여 버리고, 자기 소유와 몸과 생명은 완전히 진리에 ( ) 놓고, ‘그런 것들이 어떻게 되어도 깨달은 진리대로 살겠습니다’ 하는 이것이 있어야 하나님의 뜻인 ( )를 바로 분별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과연 실제가 그러하다.(보기: 진리, 바쳐, 세대, 제사)
3) (1)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띄우기 위해 소경에게 해 주신 것은 첫째가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눈에 발라 준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예수님이 만들어 주신 현실은 바로 우리의 눈을 띄우기 위해 주님이 만들어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서 발랐듯이 주님이 만들어 주신 우리의 현실에는 물질과 복음이 섞여 있다. 우리 현실에는 안 믿을 때와는 달리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복음이 얽혀 있는 현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늘 겪는 일반적인 현실은 일반적인 결과만 맺지만 생각지 못했던 특수한 현실은 특수한 결실을 맺는다. 본문의 소경은 주님이 발라준 진흙을 달게 받고 떼어내 버리지 않고 붙이고 있었다. 우리는 주님이 만들어 주신 어떠한 현실도 달게 받아야 한다.
그 현실을 불만하거나 도피하지 말고, 거기서 살아야 한다. 살면서 온전히 기쁘게 여겨야 한다.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하는 것은 어떻게 하라는 말씀인가?
(답)현실이 육신적으로 보면 진흙 발라 놓은 것처럼 참 ( )하고 고통이 되지만, 그 현실을 주신 ( )와 목적과 그 현실로 한 없이 영광스러운 것이 만들어지는 그 ( )를 충분히 알고 기뻐하라는 말씀이다(: 결과, 동기,갑갑)
(2)눈을 띄우기 위해 둘째로 하신 일은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는 명령이다. 이 명령에 순종했을 때 눈이 떠졌다. 실로암에 가서 씻었기 때문에 눈이 떠진 것이 아니라 순종했기 때문에 떠진 것이다.
눈이 떠지면서 갑갑하고 고통스럽던 진흙도 다 떨어져 나갔다. 오늘 우리들이 심령의 눈, 성령의 충만을 받게 되는 둘째 순서는 그 현실에서 주님의 시키시는 것을 순종하는 것이다. 순종하면 어떻게 되는가?
(답)방해가 있어도 ( )을 계속하면, 잠시 잠간 후면 성령의 ( )이 오면서 나에게 갑갑하고 고통이 되던 묵직한 현실도 ( )이 된다. 그것이 나에게 영광이 된다. 이것이 성도의 경험이요 체험이다.(보기: 해결, 광명, 순종)
08/05/08/목후/왕상13:1-34(870507/목후집회)
1. 솔로몬이 죽은 후 그 아들 르호보암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는데, 포악한 정치를 선포함으로, 북쪽 이스라엘 10지파는 감정이 나서 여로보암이라는 왕을 세우고 솔로몬 계통의 왕인 르호보암을 버리고 갈라져 나갔고,
유다와 베냐민 지파는 그래도 하나님이 세운 계통을 배반할 수 없다 하여 르호보암을 왕으로 섬겼다. 그 후에 늘 두 나라 사이에 싸움이 있다가 오랜 후에 북쪽에 있는 열 지파로 되어 있는 이스라엘은 앗수르 나라에게 다 포로 되고 학살되고 해 가지고 그 종적이 없이 아주 전멸되고 말았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교회에서 혹 한 두 사람의 잘못한 그 과실로 인해서 감정적인 충돌이 있을 수 있고, 또 자주 발생할 수도 있고, 그것이 뭐 계속되는 수도 있지만,
그러나 자기의 그 인간 감정의 충돌로 인해서 자기 믿는 신조와 교리를 배반할 수 없다. 또 하나님이 주신 자기의 신앙 계통을 배반할 수 없다 하는 점이다. 과연 그 후에 이 교회사를 보면
많은 교파들의 분열이 있었는데, 다른 이유로 나누어진 경우는 큰 손해가 없지만 감정적으로 그런 교파는 대개는 절단 나 버린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답)자기가 어느 진영이나 교회에 속해 있으면, 그 진영이나 교회에서 잘못 나가는 것이 있으면 거기에 ( )으면서 얼마든지 충고하고, 또 간청도 하고, 끝까지 탈선되는 그 길에서 바로 가도록 하려는 노력을 ( )하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또 기뻐하시는 일이다.
만일 그렇지 않고 사욕이나 악을 가지고 자기를 세우고, 자기를 높이고, 자기 ( )을 짓기 위해서 그 교파에서 갈라져 가지고 당을 세운 것은 얼마 안 가서 차차 차차 비참하게 다 녹아져 버리고 만다.
더욱이 ( )적 충돌로 인해서 이탈되어 나가는 것은 완전히 전멸되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자기가 옳게 해 보려는 것을 거기서 용납지 못하고 ( )아낼 때에는 거기서 대항하고 싸우지 말고 조용히 나와 가지고 따로 복음운동 하는 것이 그것이 성경적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다.(보기: 쫓, 감정, 당, 계속, 있)
2. 하나님께서 야곱의 열두 아들을 이스라엘이라고 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하나님하고 다퉈 가지고서 하나님을 이긴 결과 하나님 앞에 매를 맞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 복종하기로 회개했다 하는 뜻으로 하나님이 주신 이름이 이스라엘이다. 좋은 이름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중에 알맹이가 있었으니 유다지파가 이스라엘 안에 생명체요 중심이었다. 오랜 후에 이스라엘 껍데기는 갈라져 나가서 열 지파가 되었고, 거기 유다라는 지파와 베냐민, 두 지파가 겨우 남아가지고 유다 나라가 됐는데 거기서 우리 메시야가 나왔던 것이다.
그 흐름이 계속되어 나와서 지금도 (계시록11:1이하)에 말씀하신 것처럼 교회 중에는 성전 밖 마당과 성전과 제단과 경배하는 자들의 구별이 있어서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만 측량하고,
그 나머지기는 세상에 줘 가지고서 마흔두 달 동안 짓밟히게 하라 그렇게 한 말씀이 있다. 성전 밖 마당은 심히 넓고, 성소는 작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있으나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으시는 외식 신자들이 심히 많고, 참 분초마다 간섭하시는 알맹이 성도는 아주 적은 것을 말씀하심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자기에게 세밀한 간섭이 있는 경우에 그것이 참 행복인 줄 알아야 되지 거기에 대해서 불만 불평하면 안 된다. 간섭 없는 자들을 부러워하면 안 된다. 이래서 (계시2:-3:)에 보면
신약시대 교회의 진상을 총합해서 나타내는 일곱 교회가 나오는데, 모든 교회는 다 두 쪼가리인 것을 알 수 있다. 라오디게아 교회만 한 쪼가리인데 이는 완전히 죽은 교회이다.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답)언제든지 산 교회는 ( ) 쪼가리인 것이 교회 역사임을 잘 알아야 한다. 이는 필연한 일이다. 교회는 언제든지 둘이 있다는 것을 알아, 우리는 말만 교회지 세상이나 다름없는 ( ) 신자들의 형통한 걸 보고 부러워하지 말아야 하고, 또 잘 살펴서 지체하지 말고 ( )은 쪽에 속하여야 한다. 교회에서 피와 성령과 진리로 한 덩어리 되는 것 외에는 전부 ( ) 짓는 것이요, 심판 받는다.
(보기: 당, 옳, 외식, 두)
3. (젊은 선지자)
1) 여로보암 왕이 자기의 잘못을 지적하는 선지자의 말을 무시하고 해하려 하다가 손이 말라졌다. 그와 같이 교회 역사에 많은 정치가들이 종교가들을 무시하고 핍박했는데, 그런 사람마다 망하고 그 시대도 망한 것을 잘 알고 있다.
신정시대의 성공한 정치가들은 다 정치가이면서 성직자 못지않는 하나님에 대한 열심과 성의를 가졌던 자들이다. 이래서 시대적으로 제사장이나 서기관 같은 종교가들이 부패하지 않고 실력을 갖고 있어서
정치가들을 권위를 갖고 통치하는 시대에는 가장 행복한 시대였고, 반대로 정치가들이 종교가들을 통치하고 종교가들은 그들에게 멸시와 핍박을 받는 시대는 다 불행한 시대였다. 한 교회를 두고 보면 어떠한가?
(답)종교, 곧 ( )의 책임을 맡은 목사가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굳게 서서 정치권을 갖고 있는 장로들을 통솔하고 장로들은 그 교훈에 ( )하고 압도되어 있는 교회는 부흥된다.
그러나 교훈을 맡은 자들이 게을하고 권위 없어서 정치를 맡은 사람들에게 ( )잡혀서 흔들리기 시작하면 그 교회는 아무리 커도 잠깐 망해버리고 만다.
(보기: 붙, 순종, 교훈)
**참고**
여로보암은 하나님 앞에 패역한 자요, 이 젊은 선지자에게도 아주 포학하게 해를 가하려던 자였다. 그러나 이 선지자는 그를 위하여 기도해줌으로 말라붙었던 팔을 낫게 해 주었다.
오늘 우리는 그 사람이야 어쨌든지 자기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복 받는 그게 남아 있어야 우리가 안면이 있지, 아무리 그 사람이 어떤 나쁜 일 했을지라도 나와 관련돼 가지고 있는 일에서 그에게 불행스러운 그것이 맺혀 있으면 그건 좋은 것이 못된다. 이러기 때문에 주님이 사랑하는 자들은 그런 것이 없어지도록 하려고 한다. 여기서 또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는 얼마나 흠점이 없게 하시려고 한다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다.
2) 본문의 젊은 선지자는 하나님에게 요긴하게 쓰이는 유력한 자요, 또 능한 일을 한 자인데 안타깝게도 나중에는 늙은 선지자에게 미혹 받아서 하나님 말씀을 어기므로 사자에게 물려 찢겨 죽는 죽음을 당했으니 그 이유가 무엇인가?
(1)첫째가, 고독했기 때문이다. 외로울 때에 동역 선지자가 오니 반가웠고, 또 그가 나이가 많은 자라 믿을만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묻지 않고 그의 말을 따라 움직이므로 실패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기독자가 신앙걸음을 걸어갈 때 필연적으로 외롭고 쓸쓸해질 때가 있는데, 그 때에 우리는 고독감을 느끼면 위험하니 고독감을 느끼지 않도록 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고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가?
(답)그 외로움을 극복하고도 넘치는 ( )의 주님을 찾아 만나야 한다.
(보기: 진리, 위로)
(2)돌아가다가 늙은 선지자를 만난 것이나, 그가 자기가 하나님에게 받은 명령을 아는 것이나, 자기가 정말 배고프고 목마른데 천사를 보내 그것을 해결해 주라고 하셨다고 하는 것 등, 모든 환경조건이 이상하게 하나님의 섭리로 여겨질 만큼 그럴듯했기 때문에 늙은 선지자에게 미혹 받았던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답)우리가 신앙걸음을 걸어갈 때도 이런 저런 환경의 조건을 따라 막연하게 이상하다! ( )하다! 하는 그놈 따라가다가는 미혹 받아 ( )하는 줄 알아야 한다. 그런 걸음을 배격하여야 한다.(보기: 이상, 망)
3) 젊은 선지자는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지만 자기의 걸음에서 주관과 환경에 피동됨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놓치는 데에서 탈선된 걸음을 걸었고, 사자에게 찢겨 죽고 말았다. 이것을 깊이 새겨야 한다. 환난을 거쳐 승리의 면류관을 바라보고 가는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답)우리의 생사화복은 한 분 하나님의 ( )에 있는 줄 알고, 자기 주관에도, 어떠한 환경에도 ( )되지 말고 기도하고 양심을 써서 오직 하나님의 ( )을 듣는 일에 관심을 갖고 집중하여 그 음성만을 따라가야 한다.(요일2:27)
4. 자기에게 명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들을 귀가 있어야 한다. 들을 귀는 신앙양심이다. 양심이 밝으면 하나님과 영통(靈通)이다. 양심을 밝게 해서 그 양심을 써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밝은 양심이 되려면 평소에 양심을 가꾸고 길러야 한다. 양심을 가꾸고 기르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답)양심을 가꾸는 것은 평소에 무슨 일이든지 양심을 ( )하여 앞세우는 것을 말하고, 양심을 기르는 것은 작은 일에서부터 양심대로 자타를 상관 말고 ( )하는 것을 말한다.(보기: 단행, 등용)
08/05/09/금새집회/요9:1-3(870508/금새집회)
1. 나면서 소경된 자에게 주님이 두 가지 해 주신 것 있으니 하나는 침 뱉아서 진흙 이겨 눈에 발라 주신 것이다. 이는 주님이 우리에게 만들어 주시는 현실을 가리킨다.
그것은 겉으로 보면 필요 없는 일이요, 소경된 자기에게 도리어 부담되고 괴로운 그런 일이요 ,이해 못 할 일이지만 주님이 낫아 주시기 위해서 고쳐 주시기 위해서 그와 같이 하신 이 사실을 그 소경은 알았고,
바라봤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원망 불평하지 안하고 기쁨으로 소망을 가지고 주님에게 순종했던 것이다. 그 결과 나면서 소경된 그 사람은 그곳에 모인 많은 사람들 중에 제일 기쁘고 행복 된 사람이 됐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집회에 와서 물질적인 해를 입은 일이 있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 무례함을 당해서 인인관계의 시험을 당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뿐만 아니라 집회마치고 돌아가면 반드시 당장 무슨 일이 생기지 안할지라도 시일을 두고서 생각 못할 여러가지 어려운 일이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그럴 때마다 주님이 진흙 이겨서 눈에 바른 이 도리를 생각해서, 이 ( )은 주님이 소경에게 진흙 발라 준 것과 같으니, 이것으로 통해서 나에게는 큰 ( )이 오겠다. 하는 것을 믿고, 주님 명령에 ( )만 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반드시 소경 눈 뜬 것과 같은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보기: 순종, 은총, 현실)
2. 수많은 사람들이 한 예수님을 만났고 또 한 사건인 나면서 소경된 자를 만났는데 이 건에 대해서 행동은 수많은 행동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한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그 역사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견해하고 행동하는 것이 제 각각 다른 것을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과 예수님이 하시는 한 역사와 예수님의 은혜 역사를 받고 있는 이 사람에 대해서 별별 모양으로 견해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바로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이라는 것을 깨닫고, 여기서 고칠 것은 고치고 가질 것은 가지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이 복음을 제 복음으로 받는 사람이다.
1) 첫째로, 나면서 눈먼 소경과 본다고 하는 자가 있었다.
나면서 눈 먼 소경은 사람이 타락한 그 이후에는 날 때부터 성령의 지혜와 총명이 없어서 하나님이 얼마나 크시며, 세밀하시며, 정확하셔서 당신에게 거슬린 것은 다 멸하고 당신에게 따라서 일치되는 것은 다 생명과 평강이 된다는 것을 보는 눈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줄 알고 눈을 뜨려고 하는 자가 나면서 눈 먼 소경이고, 이것을 모르고 마귀에게 꼬여 가지고 죽고 망하는 그것을 보면서 죽고 망하는 것인 줄 모르고 오히려 살고 평강스럽고 영광스럽다고 거꾸로 보는 자가 본다고 하는 자이다. 나는 어떤 자가 되어야 하는가? (답)나면서 눈 먼 ( )이 되어야 한다.
2) 죄관, 곧 삐뚤어지고 올바른 것에 대한 견해가 잘 못된 사람들이 있었다.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임함입니까? 하고 물은 사람들은 그것이 부모의 죄 때문이든지 본인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티를 잡으려고 질문하는 것인데, 주님은 그것이 틀렸음을 말하고, 그런 것이 아니고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시는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하셨다. 이 말씀이 가르치시는 것은 무엇인가?
(답)사람들은 옳은 것과 삐뚤어진 것에 대해 성경이 아닌 자기 ( )대로의 견해를 갖고 모든 것을 인식하고 상대하고 있는데, 이는 ( )에서 배운 것이요, 잘못 된 것이니 버려야 한다는 가르치심이다.(보기: 세상, 주관)
3) 예수님께서 ‘이는 제 죄도 아니고 부모 죄도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할 때에, 예수님의 말씀을 인정한 사람도 있었고, 의문하는 사람도 있었고, 부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는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답) 예수님의 만 존재관을 (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 )을 부인해 버려야만 한다.(보기: 주관, 인정)
4) 예수님께서 ‘내가 네 눈을 띄워 주겠다.’ 하시면서 진흙을 침 뱉아 이겨 가지고 눈에 바르니까 달게 바르고 소망 중에 그대로 바른 채 있으면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어라’ 하니까 ‘예’ 하고 순종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그렇게 될 때에 많은 조롱도 받았을 것이고, 구경거리도 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눈이 떠져서 전에 그를 알던 사람들이 그를 몰라 볼만치 달라진 사람이 되었다. 우리는 어떠해야 하는가?
(답)주님이 자기에게 어떤 현실을 만들어 주시든지 그 현실은 주님이 친히 당신의 전지 전능으로서 내 ( )을 위해, 필요한 ( )을 다 거기에 결부시켜서 주신 현실인 줄 알고 현실을 원망 불평하지 말고 ( )게 받아야 한다.
그리고
거기서 주님 명령에 순종으로만 통과하면 눈이 열려서 광명의 세계를 보게 되고, 세상과 영광의 나라에 가서 모든 사람이 자기를 몰라볼 만치 달라지는 결과가 있는 것을 알고 ( )하는 이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요셉도 그와 같은 사람들 중에 하나이다. 총리 된 그를 형들이 몰라보았다.
(보기: 순종, 달, 복음, 구원)
***참 조***
우리가 집을 지어도 기초가 있고 기둥 있고 위에 상량이 있는 것처럼 우리 신앙이라 하는 것은 순서 단계가 있어 가지고서 자라가야 되는 것이지 공연히 초절적으로 밑에 있는 모든 신앙 순서는 가지지 안하고 마지막에 꼭대기 결말만 제가 얻겠다고 하는 것은 다 허망한 일이다.
신앙이라 하는 것은 초월 신앙이라야 되지 초절 신앙은 안 된다. 마치 돌담을 쌓는 것이 밑에 돌 놓고 또 그 위에 놓고 이렇게 하듯이 이렇게 한 개 위에 한 개, 한 개 위에 이렇게 포개져서 되어지는 것이 바른 신앙이다. 그것을 알고 그런 순서로 주시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니 현실을 달게 받고, 거기서 순종하여야 한다. 그러면 그 다음 단계를 주신다. 이래서 하나하나 증거를 다 마친 뒤에 우리는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5) 눈이 뜬 소경을 보고 그에 대해 견해하고 행동하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나온다. 그 사실을 부정하려고 애쓰는 자, 인정을 하면서도 탈을 잡으려고 애쓰는 자, 송사하는 자, 감사하는 자, 감사하나 자기 이해를 따라 증거를 회피하는 자 등이다.
우리가 은혜 받아 변화하면 우리에 대해서도 이러한 여러 반응들이 있고, 우리도 다른 사람의 받은 은혜에 대한 반응을 할 때 이런 여러 사람 중에 하나이다. 우리는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다른 사람이 주님에게 받은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고 증거 하는 자 외에는 다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생각할 점 몇 가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만일 나면서 눈뜬 소경이 자기 아들이라고 하면, 바리새인들이 이 예수님에게 대해서 안식일에 이 일 했다고 탈을 잡고, 예수님은 하나님께로서 안 왔다고 이렇게 부정을 했을까? 하는 점이다.
아니다 오히려 ‘이는 참 하나님께로부터 온 권능이다. 이는 참 선지자다.’ 하여 존경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하나님께로 왔다고 그렇게 자기 견해가 기울어졌을 것이다. 이 사실은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는 그 속에 영생이 없느니라.’ 하신 말씀대로 되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 )이 없으면 사물의 깊고 세밀한 그 내용은 찾아 발견할 수가 없고, 그 일에 자기에게 있는 전부를 기울일 수 없어서 ( )정가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 )을 건설하여야 한다.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만일 사랑이 건설되어 있지 않으면 모든 것에 정평 정가는 절대 없다. 사랑의 하나님과는 정 ( )된다! 하는 것을 굳게 잡아야 한다.(보기: 반대, 사랑, 정평)
(2)그 다음에 하나 생각할 것은 눈 뜬 소경의 부모는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자기 아들에게 되어진 사실을 인정은 하고 감사는 했지만 그것을 증거하면 당시 불의의 교권자들에게 배척을 받고 출회를 당할까하여 자기 아들 본인같이 증거하지는 못했다. 오늘도
예수님의 하시는 이 역사를 인정은 하면서도 제게 ( )가 돌아올까 싶어서 증인 노릇을 바로 못하고, 그 ( )의 책임을 전가하는 연약한 이런 교인들도 많이 있다. ( )을 당해도 옳은 것을 옳다 예수를 증거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이런 비겁한 사람도 되어서는 안 된다.(보기: 희생, 증거, 해)
(3)눈을 뜬 소경은 반대도, 조롱도, 권세고, 아무 것도 ( )워 하지 않고 예수님이 낫게 하신 것을 ( )했고, 그로 하여금 부인하게 하려고 거듭 묻는 교권자들에게 오히려 ‘왜 자꾸 묻습니까?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고 합니까?’ 하고 되물었다. 이 자를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이 자가 되어야 한다.
(보기: 증거, 두려워)
(4)이 모든 것을 다 보고 듣고 계시던 주님은 그 모든 핍박의 ( )를 넘기고 성전에 온 그를 만나셨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이 숨어서 내 행동 일동일정을 지금 살피고 ( )보고 계시는 것을 알고, 그분을 바라보면서 그 고개턱이 있는 줄 알고 모든 환난을 이겨 나가야 한다.
또한 그를 만난 주님이 ‘( )를 믿느냐’ 고 물으셨다. 예수님이 내게 대해서 성령의 충만함을 주고, 모든 기적과 능력과 축복을 주신 것도 좋지만, 주님이 하나님의 부요를 나 주시기 위해서 가난해지신 이 사랑도 알아야 된다는 것이다.(보기: 인자, 엿, 고비)
(결론)
많은 인물 중에 내가 될 것은
(1)나면서 ( )된 것 내가 깨닫고, ( )바르고 가서 실로암 못에 씻고 오라는 것 내가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 되어서, 과거에 눈뜨기 전의 나, 영감과 진리의 이 권능의 충만함을 받기 전의 나를 알던 사람이
그 후에는 보고, 그 사람 같다, 비슷하다, 아니다 할 수 있기까지, 성령과 진리와 주님의 은혜로 (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되어, 이 사람 되도록 하여야 한다. 이런 사람이 되려면
이를 가로막는 환난의 ( )턱이 있으니 고개를 넘기까지 받은 은혜를 보존하여야 한다.(보기: 고개, 변화, 진흙, 소경)
(2)다른 사람이 눈을 뜬, 변화를 받은 주님의 역사에 대해서는 그를 ( )함으로 ( )정가하여 진정 감사하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 )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보기: 증거, 정평,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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