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 고려신학대학원50년사 - 허 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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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교장이 교수중지통고를 받은 것이 부산 남 교회에서 제10회 총회를 마친 다음날인1960년9월24일이었다. 이때는 이미 총회가 승 동측과의 합동을 위한합동추진위원을 내고“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합동을 전제로 하고 추진하기로”결정하고, 총회는 합동추진을 위해 정회한때였다. 승 동측과의 합동은 이때에 거의기정사실처럼 되어있을 때였다. 이결정적인 합동을 앞두고, 이사회는 박 교장에 대한 단호한“징계처리”를 단행한 것이다. 합동을 적극 추진한교회지도자들의 대부분이 당시고려신학교의 이사로봉사하고 있었다. 이교회지도자들이합동에 대한 적극적 자세를 갖게 된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으나, 그 가장 큰 이유 중의하나는 당면한 신학교의위기를 합동으로 극복하자는데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유감스럽게도 이러한 난국의 극복방법은 개혁주의신앙가들이가진 신중한 방법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합동의결과로 신학교의위기극복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여호와의 은혜로운 간섭이아니 었 더 면 고려신학교는 완전히 없어질 뻔 한 더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때우리교회지도자들은 분명히 거듭된 과오를 범하였다고 보게 된다. 이 과오와 그 결과는 우리 신학대학원과 교회에 역사적인 큰 교훈을 남기고 있다.
193)남 영환목사는1960년8월고신계통의 교계지도자8명이 박 형 룡 박사를 위시한 승 동 측 지도자들을 만났을 때는, 이미 박윤선 목사가 떠난 때였다고 말하나 그렇지 않다.Op. cit . .p.476참조. 박 교장은 총회를 마친 다음날(1960년9월24일)이사회로부터 통고를 받은 후
“이리하여나는 교수회와 학생들 앞에서 이 통고문대로, 나는 교장 직은 해임되고(기구변경이 되어)교수직은 중지된 것을 알리고 고려신학교에서 물러나왔다”고했다. 파수군,104호(1960년11월)p.16.그가 총회 후에야 학교를 떠났다는 다른 증거는 그가1960년9월13일의 제152회 교수회의를 주재하고 사무를 처리했다는 사실이다. 이 교수회의에 참석한 교수는 박윤선, 안 용준, 한부선, 김 진홍, 박 손혁, 이 상근교수였다.9월말 그가 떠난 후에야1960년11월3일 이사, 교수연석회의(제153회교수회)로 모여 한상동목사가 회의를 주재했다. 이교수회의 회록에는“한부선, 박윤선 결석”이라고 기록되어있다. 교수회의152, 153회의록참조.194) “주일을 지키는 일에 대하여 란 박윤선 목사의 논문에 답변함”이라는 글은 합동한 후 고려신학교이사회가 없어진 다음,前(전)고려신학교이사 일등의 이름으로1961년2월호에(파수군107호)에 실린 것이다. 당시 승 동측과의 합동과 이글에 실린 단호한 주일성수관은 크게 조화를 느끼지 못하게 한다.
2.총신과의 신학교합병으로 온 시련
1)난국에 빠진 예장의총회신학교
박형룡 박사의3천만환사건:
고려신학교가50년대 후반에 이르러 교회소송문제에대한견해의 차이와, 갑자기 생긴 주일성수 문제를 둘러싼 이사회와 박윤선 교장과의 대립 등으로 진통을 겪어오는 동안, 총회 파(승 동측)계통의 총회신학교도 복잡한정 치환경속에서분열을 겪게 되고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50년대 후반에이학교가 당면한 시험은“총회 파”(경남노회를 축출한 총회에 속한교회를 고려파계통의교회는 이렇게 부름)교회를 분열의위기로몰아가게 되었다. 박 형 룡 박사가1948년5월 고려신학교를 이탈했을 때에, 그는 개방적인자세로 전한국교회를 배경하기를 원했고, 모든 외국선교회와 협력을 도모하기를 원했다. 이런 그의 개방적인태도는 결과적으로 고려신학 측을 독선주의자, 신성파로몰아총회로부터 축출을 당하게 하는데 간접적인도움을 주었다. 그간서울에서장로회신학교를 세우고 거기교장으로 취임하고(1948년6월),총회직영허락(1949년4월)을 받았으나, 그 길이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그의“장로회신학교”가1951년 총회에서“조선신학교”와함께 직영이 취소되고“총회신학교”가신설됨으로 교장자리를 감 부열 선교사에게 내어주게 되었다. 몇 년 후1953년9월에 그가 다시“총회신학교”교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그러나1958년에 이르러 소위남산대지불하3,000만환유용사건으로치명상을입고학교장직을사임해야만하게되었다.이사들도그와함께도의적책임을지고전원사임하게되었다.
장신파의내분과 분열:
이때를 계기로 장신파속에 잠재하고 있던 內分(내분)이 밖으로 크게 드러나게 되었다.1953년6월조선신학교측과의분열이후내적으로세계기독교협의회(The World Council of Churches)의회원교회로남아있기를원하는분들(에큐메니칼측이라부름)과보수적입장을취하여이를반대하는복음주의자들(NAE)사이에있어오던암투가교회정치현장에뚜렷하게드러나게된것이다. 전자의중심인물은한경직목사였고, 후자의정신적지주는박형룡박사였다. 소위3,000만환 사건으로복음주의측은매우큰궁지에몰리게되었다. 박형룡의몰락은복음주의자들의몰락으로여겨지게되었다.그래서양편은신학교이사의다수를차지할뿐아니라.1959년총회총대의다수를얻음으로대세를잡아승리하기위해모든정치적역량을동원하였다.1959년1월각노회가이사를선출하여 파송했다. 그결과는예큐메니칼측과복음주의자들측의비율이40대17로나타나에큐메니칼측에절대유리하게되었으며, 이분들이실행위원을선정한결과12명중8명이에큐메니칼측이요, 복음주의자들(NAE)측에는4명에불과하여완패를당한셈이되었다.그후19분보표쵸OOSnvgpiptt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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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련의 극복; 고려신학교의 새정비
1)소위 三(삼)博士(박사)의성명과합류
복교 선언 후 일어난 큰 파장 속에서 약 두 달 동안 교수들을 잃고 표류해오던 고려신학교는 1962년12월17일에 박 손혁, 오 병세, 이 근삼 세 교수가 고려신학교복교에 합류하여 교수로 취임하게 되고, 다음날에는 고신폐합조처에 따라 서울총신본교에 가서 수업을 하던 졸업생5명이 부산에 내려와 수업에 참여함으로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합류를 기대해온 홍 반식교수가 복교방법에 불만을 느껴 합류를 주저하였다. 그러나3개월 후1963년 새 학년도가 시작되기 직전 홍 반식, 이근 삼, 오 병세 세 교수는 모교를 위해함께 봉사할 것에 합의를 보고 성명서를 발표하게 되었다. 이로써 고려신학교는 교수진이 정비되어 새로운 역사의장을 열어가기 시작하였다. 이들은3항으로 된 성명서에서첫째, “같은 고려신학교출신으로 한국교회봉사라는 같은 목적을 위해외국에서신학을 연구하고 돌아와, 변화된 한국교회의 환경으로 인해 나눠져 있게 되었으나, 품었던 뜻을 관철하기위해 함께 행동하기로 했다”는 것을 밝히고, 둘째. “고려신학교의복교방법은 합당하지않았으나.그동기가순수하고,그정신이한국교회를 사랑하는데 있다는 것을 인정한 다”고했으며, 셋째, 운영을 담당한 이사회와 교육을 담당한교수회의 책임한계를 분명히 할 것을 확인하고, 고려신학교를 위해 동역할 것임을 천명했다. 홍 반식교수와 오 병세교수는 합동후인1961년도에 미국유학을 마치고 귀국 후 바로합동 후 조직된 이사회에 의해교수로 임명이 되어, 홍 반식교수는 부산분교에서 오 병세교수는 서울본교에서 봉사하여왔다. 그리고 이근 삼 교수는1962년에 화란에서 연구를 마치고9월에 귀국하여 잠시 칼 빈 학원의원장으로 취임하여 봉사하고 있었다. 이 세분은 고려신학교초창기 제5회동기생으로서 고려신학교졸업생으로서는 처음으로 거의 같은 때(1954)에 미국유학길에 올랐기 때문에 고신계의 모든 교회들은 이분들이차세대의고신을이끌어갈지도자들로알고위해늘기도했다.그러니이분들은고려신학교와고신교회와서로떨어질수없는내적인연관관계를 맺어온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고려신학교 초창기의 뜨거운 진리운동의용광로 속에 주형 된 분들로서 같은 목적을 가지고 유학하고 돌아온 분들이었기에 종종 개인적으로 서로 다른 환경의 지배를 받고 의견을 달리하는경우가 있었지만은, 공동의 목적을 위해서는 이를 늘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고신 제2세대가 들어서 박윤선, 이 상근, 한부선, 김 진홍, 한상동등 첫 세대가터를 다져놓은 곳에서 그동안폐교의위기를 넘긴 학교를 새로 정비하고 건설하는 사역을 맡게 된 것이다.이들은 이로부터60년대를 거쳐80년대에 이르기까지 동역하여왔고, 이따금 신학교내외로부터 일어나는 시험과 시련이 있었으나 개혁주의고신교회건설이라는 하나의 목적을 위한응집력은 이모든 것을 슬기롭게 극복해갈 수 있게 했다. 교회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주님은 그의 교회의 필요를 아시고일찌기 이들을 준비시켜 세우셔서 고신의 개혁주의신학의 맥이 실종위기에 있을 때에 이 맥을 이어가게 하시고, 환원 후 고신교회생활의 정착에이바지하게 하셨다.
2)고려신학교의재정착과교회의 환원
고려신학교의재정착
1963년3월 새 학기부터고려신학교는 학사를 재정비하고자리를 잡아갔다. 고려신학교복교이후 부산경남지역 뿐 아니라 전국에 있는 고신교회가 큰 파장을 겪게 되었다. 어떤 분들은 고신복교는 신학교일원화의 합동원칙을 어긴 결과이니. 지금이라도 일원화의원칙으로 돌아감으로교회의분열을막아야한다고했다.다른어떤분들은 영구한 분교를 세우도록해야한다고했다.그러나승동측에있는 대부분의 목사들은 학교를 인단 폐합한 이상 일원화도 영구분교도 있을 수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복교선언 후 송 상석목사는 아무런 협의 없이 독자적으로 복교선언을 한한 상동목사에 대해강한불만을 나타내면서도, 그이입장을 변명하고 옹호하는 너그러움과 정치적 기량을 보였다. 그는 실상합동시합동연구추진위원의 한사람으로 신학교의폐합을 반대하고, “신학교일원화”원칙을 구상하고 포함시킨 장본인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당시고려신학교폐합을 추진해간 한 상동목사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1961년 총회가 고려신학교폐합을 결정한데대한 강력한 항의를 경남노회중심으로 이미 했다. 복교선언 후1963년2월5일대전중앙교회에서전국 노 회장, 증 경총회장 및 총회임원회연석회의가모였을 때에. 그는 한상동목사의 독자적 행동방식에 관하여강도높은비판을하면서도,합동원칙을 외면한총회에그원인을돌리고,그의정신을변홯고복교를지지했다.그는“잘못은한목사에게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총회가 합동원칙을 외면한 총회에 그 원인을 돌리고, 그의 정신을 변호하고 복교를 지지했다. 그는”잘못은한목사에게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총회가 합동원칙을 무시하고 다수로서 고신폐합을 단행한일과 그 시정건의를 도외시한처사는 과오라 아니할 수 없다” “고신복교가 무질서한불법적인 처사라고할지라도 그는말하기를혁명이라고한다.노진현목사말이 혁명이 성공되지 못하면 역적이 된다고 하나우리는 그를 역적으로 만들 마음은 없다.” “그래서 복교방법이 잘못되었다할지라도 그 정신을 이해하는 것이 총회 적으로 유익할 것 같다” . “이단적이설이나 분열을 조장하지 않고 소위정화운동, 보수사상정통신학에 주력하겠다는 것인즉 고신복교를 반대할 하등의 이유는 없다”결론적으로 그는 고신복교를 지지한다고 밝히고, 교회의“분열의 모면은총회의 현명한 처사에 달려있다”고함으로 경고했다. 이제시간이감에 따라 고려신학교는 안정되어갔다. 구고신이 사들이 차츰 의견을 통일하고, 일단고려신학교가 복교된 이상 신학교일원화제의에 응하지 않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들은 늦게나마 고려신학교정체유지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제고려신학교는 자기정체를 다시 찾아 지난날 다져놓은 터전위에자체의전통과 역사를 주의축복 속에 재창조해갈결의를 한 것이다.
고신교회의 환원:
그동안 옛 고신 측 교회 안에는 신학교의복교는 지지하되 이로 인해서 합동된 교회가 분열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분들이 있는가하면, 합동후승동측의 다수에 의한 교권지배에 실증을 느끼고 고려파의뿌리를 찾아 옛날로 돌아가야 한다는 분들이 있기도 했다. 그런데 차츰 복교를 반대하는 목사들의 지도아래전도사로 봉사하는 고려신학교 학생들이총신부산분교로 옮기도록압력을받게되고,자리를옮겨야하는어려움을당면하게되었다.그러던중고신교회에환원의길을재촉하는사건이생기게되었다.1963년6월 합동총회고시 부는 서울에서 공부하던 중 고려신학교복교선언 후 부산 고려신학교로 내려와 고려신학교제17회로졸업을 하게 된 남 영희, 이 지영, 진학일, 최 만술, 최 진교5명에게 강도사고시자격을 허락하지 않았다. 고시부가합동을 유지해나갈 의지를 가졌었다면, 일단강도사응시를 받고, 다음총회에 문의를 하여 결론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시 부는 복교한 고려신학교졸업생의자격을 전혀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고시부의 이 처사는 어떤 면에서 옛 고신계교회의환원을 강요하게 된 셈이다. 이를 본고신계지도자들은9월에 있을 제48회 총회에서도이들에 대한구제는 기대할 수 없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다수의무기를 가지고 專制(전제)해온 승 동측의 습성으로 보아 그 총회가“일원화원칙”으로 다시 돌아가 고려신학교를 인정하고, 고신졸업생들에게 강도사고시를 허락할 것으로 기대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前(전)고신교회지도자들은 고신교회의 환원운동을 펴기 시작하게 되었다. 이강도사고시불허문제가 환원운동의 결정적인동기를 제공하게된 것이다. 부산시내의고신 측출신교역자들은1963년7월29일에 환원발기회를 조직하고 고신교회 환원운동의 시동을 걸었다. 이 환원발기워원회가 발표한 취지문에서발기위원들은 승 동측이 합동원칙에 명기된 공약을 파기함으로 합동으로부터의 환원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합동선서에 기록된“신학교일원화를2년이 못가서 단일화시키고,” “이사회구성에 있어서 양방동일수제를 폐지”하였으며, “노회명칭과회수를 수로써 결정함으로 합동정신과이념을 무참하게 짓밟았다”고했다. “만일 이대로 지속한다면 우리의 장래는 심히 암담하고 비참할 것은 명약관화의사실”임으로“우리교회를이암흑으로부터구출해내고한국교회의정통신학교육과경건생활의재건설을위하여합동전으로돌아가서진용을정비하고진정한칼빈주의교회건설”을하기원한다고하면서,“합동시의고신측총회장에게환원총회소집과환원선언과재조직을요청한다”고했다.당시환원이란쉬운일은아니었다.전고신측진용안에서도상당히강력한반대가있었기때문이다.이취지문발표가있자환원을반대하는목사들로부터환원반대성명서가발표되었다. 그러나1963년8월8일부산남교회에서환원을지지하는분들이모여부산노회의환원을결의하게되었다.이어전국적으로전라,경북,경기,경남,진주,경동노회가차례로환원하게되어1963년9월17일에는부산남교회에서“대한예수교장로회제13회환원총회”라는이름으로모여합동한지34개월만에고신총회는환원하게되었다.고신총회교회는승동측과의합동으로많은것을잃었다.합동시 590교회였던교회의수가환원시에445교회로줄어들었다.150여교회를승동측에잃게된것이다. 신중성을갖지못한교회지도자들의과오가얼마나심각한결과를가져오게되는것인가를여기서보게된다.당시우리들의선진들은자신들의능력을과신하고순진한군졸들을이끌고적지에뛰어들어가명분없는싸움에심각한상실과무서운상처만입고후퇴하게된어리석은장성들과같았다.합동시총회장이었던송상석목사가사과를하고,합동하는일에 앞장섰던한상동목사가사죄의의미에서은퇴의사를밝히고, 교회지도자들인목사와장로들은일주간자숙하기로했다.사람은실수하고많은것을잃어도교회의주가되신주님은잃는일이없다.그는이교회와신학교를없애려는어두운세력을다시이기시고찾으신것이다.고려신학교는주의은헤로다시한번시련을딛고일어나주께서맡기신개혁주의한국교회건설을위한대사명을수행하기위해환원된고려파교회의사랑과지원을받으며전진해가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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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이대로 지속한다면 우리의 장래는 심히 암담하고 비참할 것은 명약관화의사실”임으로“우리교회를 이 암흑으로부터 구출해내고 한국교회의 정통신학교육과경건생활의 재건설을 위하여 합동전으로 돌아가서 진용을 정비하고 진정한칼빈주의 교회건설”을 하기원한다고하면서, “합동시의고신 측 총회장에게 환원총회소집과 환원선언과 재조직을 요청한 다”고했다.
당시환원이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전고신 측 전용 안에서도 상당히 강력한반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취지문발표가 있자 환원을 반대하는 목사들로부터 환원반대성명서가 발표되었다. 그러나1963년8월8일부산남교회에서환원을지지하는분들이모여부산노회의환원을결의하게되었다.이어전국적으로전라,경북,경기,경남,진주,경동노회가차례로환원하게되어1963년9월17일에는 부산 남 교회에서“대한예수교장로회제13회 환원총회”라는 이름으로 모여합동한지34개월만에고신총회는환원하게되었다.고신총회교회는승동측과의 합동으로 많은 것을 잃었다. 합동 시590교회였던 교회의수가환원시에445교회로 줄어들었다.150여 교회를 승 동측에 잃게 된 것이다. 신중성을 갖지 못한 교회지도자들의 과오가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인가를 여기서 보게 된다. 당시 우리들의 선진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과신하고 순진한 군졸들을 이끌고 적지에 뛰어 들어가 명분 없는 싸움에 심각한 상실과 무서운 상처만 입고 후퇴하게 된 어리석은 장성들과 같았다. 합동 시 총회장이었던 송 상석 목사가 사과를 하고, 합동하는 일에 앞장섰던 한상동목사가 사죄의 의미에서 은퇴의사를 밝히고, 교회지도자들인 목사와 장로들은 일주간 자숙하기로 했다. 사람은실수하고 많은 것을 잃어도 교회의 주가 되신 주님은 잃는 일이 없다. 그는 이교회와 신학교를 없애려는 어두운 세력을 다시이기시고 찾으신 것이다. 고려신학교는 주의은혜로 다시 한 번 시련을 딛고 일어나주께서 맡기신 개혁주의한국교회건설을 위한대 사명을수행하기 위해 환원된 고려 파 교회의 사랑과 지원을 받으며 전진해가게 되었다.
144-170
2)고려 측과 예장의 전격적인합동
단번에 이루어진 밀월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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