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 박윤선 개혁신학연구 -서영일
(띄어 쓰기를 모르는 분이 타이핑하였고, 이후 교정 할 예정 - 관리자)
박윤선의 개혁신학연구
제6장총회신학교
한국교회의 스승
1.합동과 환원
스푸너 사건을 다룬1960년9월의 고려 파 총회는 승동측과의 합동을 결의하였다. 합동안은 그해8월에 총회측의 두 파 가운데 보수파인 승동측이 먼저 제안하였다.1년 전1959년 9월 총회에서 총회 측은 승동과 연동의 두 파로 분열되었다. 이분열의 빌미가 된 것은 박형룡 박사의 재정 남용 문제였다. 당시 총회 신학교 학장이었던 박형룡은 남산의 신학교 부지를 정부로부터 불하받게 해주겠다는 한 브로커의 말을 믿고 이사회의 결의도 없이 3천 만환(당시미화2만 불)을 건네주었다. 이 사람은 그 돈을 가지고 잠적하였다. 이 사건 때문에 박형룡의 사표가 수리되었다. 이때 이미 총회측 내에 두 파가 서로 대립하고 있었는데, 한 파는 박형룡을 옹호하며 反(반)W CC-親(친)NAE성향을 가진 좀 더 보수적인 그룹이었고, 다른 한 쪽은 박형룡을 반대하는 좀 더 진보적인 그룹이었다. 3천 만환사건으로 이 두 파의 골은 더욱 깊어져갔다. 박 형 룡 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박 형 룡 이 사임하게 된 것은 그의 재정남용 때문이 아니라 그의 신학적 확신 때문이었다고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1959년 총회는 완전히 혼란과 소요에 빠져 들어갔고 각각의 그룹은 다른 그룹에 대하여 자신을 합법적인 총회라고 주장하였다. 서울에서 다시 모였을 때 그 회집장소의 이름을 따서 승 동측(친 박 형 룡 파)과연 동측(친W CC파)이라고 불려졌다. 이 분열은 한국교회 역사상 가장 큰 분열이었다. 승 동측에서는 이 분열은 완전히 신학적, 교리적인 것이었다고 규정하였다. 이 두 그룹 사이에 신학적인 차이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였다. 또한 연동 측이 주장하는 것처럼 박 형 룡 박사에게도 도덕적 책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박 형 룡 의 인격을 생각해볼 때 그가 돈을 가져갔다는 것은 믿기 힘든 일이긴 하지만. 그가 건네준 돈이 뇌물로 사용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 문제이다. 승 동측이 연동 측을 신학적 자유주의라고 규정한 것이 박 형 룡 의 재정 남용 사건이 드러난 이후에 되어 진일이라는 점이었다. 연동 측의 후원자였던 미국장로교회(PC USA)도 이 분열은 단지 승 동측이 박 형 룡 의 재정 남용으로 인한 치리를 피하려고 꾸민 일이라고 이해하였다. 또한 반W CC운동은 미국의 분리주의 적인 단체의 문서에 영향을 받은 것이고, 이는 단지 윤리적인 책임을 회피하려는 연막 작전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 분열된 교회의 규모로 보나 서로를 비방하던 혼란과 비행으로 보나 이 분열은 한국 개신교 역사상 가장 추악한 분열이었다.1960년8월 승 동측이 고려 파와의 합동을 제안하였을 때 이것이 받아 들여졌다. 노 봉 린은 고려 파의 이러한 호응에 대하여 두 가지로 그 이유를 든다. 첫째 고려 파의 경기 노회의 문제이다. 경기 노회는 일제하 신사참배 문제에 걸린 사람들에 대한 좀 더 관대한 태도를 취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요구가 총회에서 관철되지 않자 19명의 목사들이 경기노회를 구성하고 “보류노회”라고 부르면서 고려파로부터 독립하였다. 노 봉 린이 제시한 또 하나의 이유는 앞서 이야기한 박 윤선 박사의 안식일 지키는 문제였다. 이 문제로 고려 파는“씻을 수없는 오점”을 남겼다. 고려 파는“이러한 내적인 난제들이 주목받지 않게 하기위하여”합동에 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후일 남 영환이 쓴 고려 파 역사에서는 경기 노회의 문제는 교회당을 둘러싼 소송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보류 노회 측은 박 윤선과 같은 입장을 취하였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에서는 서로 다르지만 노 봉린과 남 영환은 교파 연합이 경기 노회와 박 윤선 박사의 두 문제로 인하여 절박하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남 영환은 더 근본적이고 철학적인 이유를 들었다. 이 大義(대의)가 그들에게 심리적인 짐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본래목표가 교단형성이 아니라 개혁주의 보수신학을 이 땅에 확립 하자는데 있었던 만큼, 박 형 룡 박사를 비롯한 여타 지도자들이 과거를 회상하면서 눈물로 호소하는 것을 보고 나와서 따로 앉았던 고신 측8명의목사도 이때는 한 사람도 이의가 없었다. 이런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파의 지도자들이 왜 하필이면 바로 이때에 승 동 측과 신학적인 동질성을 느꼈는가? 승 동 측은 보수 적일 뿐이었고 고려 파와 같이 개혁주의 적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는가? 고려 파 경기 노회와의 분열의 주된 원인이 신사참배에 대한 태도였다고 한다면, 승 동측은 과거신사 참배문제에서 관대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던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할 수 없다면 이는 이 연합이 순수한 목적 이었던 것이 아니라 자기 이익과 체면세우기 였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이 된다. 고려 파는 박윤선 박사의 퇴진 문제와 경기노회의 불복으로 內訌(내홍)을 겪고 있었다. 이때 다름 아닌 박 형 룡 박사자신이 눈물로 보수 대 연합을 애원하였다. 고려파가 보기에 이는 나쁜 평판을 잠재우고 체면을 세우기에 알맞은 기회였다. 승 동측의 제안을 거절하게 되면 자만심과 완고함이라는 오명을 하나 더 얻게 될 형국이었다. 연합은 매우 빠르게 진전되었다. 이 연합이 우호적인 사람들이 볼 때에도 이 연합의 과정이“너무 성급하고” “소박한” “早産(조산)인 것처럼 비추어졌다.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였다. 양 측에서는 아무 것도 염려할 것이 없다고 선언하였다. 그들은 이 연합이“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임을 확신하였다. 합동총회가1960년12월13일 서울의 승동 교회에서 열렸다. 기쁨의 눈물이 있는 감동과 환희의 장면이었다. 박 형 룡은 에베소서4:1-14에 근거하여“믿는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라는 제목의 설교를 통하여 연합의 고상한 이상을 실현한 것을 격찬하였다. 이 새 교단의 이름은“합동”으로 정하였다. 밀월 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 하였다. 결국 이 연합은“이혼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사실혼 관계에 들어간 무 계획한 시험 결혼과 같은 것이었다”연합이 이루어진지 채10개월이 못 되어 이 새‘합동’교단에 또 다른 분열의 냄새가 나기 시작하였다. 고려 파의 곳곳에서 승동 측에 대한 불평의 목소리가 들렸다. 신학교문제, 불 공평한 임원선출, 타락과 교권 다툼 등으로 인한 것이었다. 연합을 지키려는 노력도 없지는 않았으나, 한 상동 목사와 그 추종자들은 결국 신학교를 분리하였다. 이는 교단을 분리하겠 다는 신호탄으로서 실제적인 분리는1962년10월에 완료되었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연합이 성사된지34개월 후의 일이었다. 고려 파는 자신들을“환원”이라고 부르고, 계속“고려파”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이전 고려파의 모든 교회들이 다 환원한 것은 아니었다. 합동 측에 남아 있는 교회들도 많이 있었다. 승동과 합한590개의 교회 가운데445개 교회가 이 분리에 가담하였다. 경남 지역에서는90%가 넘는 교회(175개중163개)가 환원한 반면 다른 지역에서 그 비율은40~60%에 불과하였다. 총회가 회집 되었을 때 합동을 주도하였던 한 상동 송 상석. 황 철도 목사 등은 그들의 잘못을 사과하였다. 그 당시 그는 고려파에서 가장 큰 교회를 담임하였고 교단의 지도자 였으며 무엇보다도 새로 정비된 고려신학교의 교장으로 봉직하고 있었다. 남 영환은 이 환원을 한국의 개혁주의 신앙을 보존하기 위한 불 가피한 선택 이었다고 정당화 한다. 그러나 성급한 연합을 반대하였던OPC한국 선교부는 또 다른 성급한 분리를 비판하였다. “고려신학교를 재 조직하고 환원파를 형성한 고신 측은 장로 교 정치의 정당한 절차를 밟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승 동 측이 물질주의에 빠졌다고 해서 이를 좋아하지 않고 고려 파를 선호하던 한 선교사는, “고려파는 논의조차 하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그들이 승 동 측의 횡포에 대하여 분노한 것은 정당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이를 바로 잡기 위하여 합법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 대신 놀던 구슬을 내 던지고 집으로 가 버렸다. ”이런 일은 한국교회에서는 늘 있었던 일이지만 이 경우는 더 독특하다. 양 측의 잘못을 알고 있던OPC선교부는 양측 모두와 함께 손 잡고 일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선교부는 처음부터 이 연합에 반대하였고 연합한 이후에도 충분히 보조해 줄 수 없었다. 선임 선교사들의 회의에서 선언한“성명서”의 결론도 이와 같다. 승동 측 인사들이 그들의 형제에게 잘못을 범하여 분노를 유발 시킴으로써 결국 분리에 이르게 되었다. 고려 파도 분리 되는 과정을 밟으면서 합법 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어느 한 쪽을 편 들고 어느 한 쪽을 정죄하기가 매우 힘 들다. 이것은 가시 적 교회의 분열이고 불 가시적 교회도 나뉘어 졌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이 불 가시 적 교회가 나누어 지지 않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긍정적으로 표현하면 성령 안에서의 연합을 유지하기 위하여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전적으로 승인할 수 없었던 인위적인 연합 이었지만 이것이 이미 기정 사실화 되었던 것처럼, 우리는 또한 인위 적인 분리도 승인하지는 않지만 받아 들일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선교사라는 다소 객관 적인 입장에서 한국교회를 섬길 수 있는 방법은, 우선 적으로 잃어 버린 자를 찾아 나서는 일을 하는 것이요, 또한 우리가 양쪽에서 초청 받는다면 가능한 한 꼭 같이 우리의 힘을 나누는 것이다. 여기서 강조 되어야 할 점이 있는데, 이는1963년 고려 파의 환원은 한국 장로 교회 역사상 교리 적인 이유를 들지 않은 혹은 교리 상의 이유를 假裝(가장)하지도 않은 첫 번째 대 분열 이라는 것이다. 이미 밝힌 바 있지만1952년 고려 파의 분열은 분명한 신학적 원인이 있었고 또한 고려 파가 분리되어 나가려 한 것이 아니고 교회의 회개를 외치다가 총회 파에 의하여 쫓겨난 것이었다. 1953년 기장의 분열도 신학 적 차이가 가장 중요한 이유 였다. 그러나 고려 파의 환원의 경우, 그들이 분열해 나간 합동 교단은 비록 성급하긴 하였지만 정당한 절차를 거쳐서 연합한 합법 적인 교단이었다. 이 교단이 비 합법 적인 것처럼 “이미 기정 사실화”된“인위적”인 연합이었다고 정당성을 무시할 필요까지는 없다. 모든 교회의 연합은 어떤 의미에서“인위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요, 인위적 이라고 해서 반드시 정당성을 갖지 않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고려 파의 경우 이 합병의 절차는 그 모든 가정에서 법적으로 전혀 하자가 없었다. 가시적인 교회와 불 가시적인 교회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차이 때문에 가시적인 교회의 연합의 중요성을 경감 시킬 수는 없다. 이 세상에서의 가시적인 교회의 연합은 우리가 천상에서 누릴 불 가시적이고 보편적인 영광스런 교회의 반영이어야 한다. 이 두 파가 신학적으로 동일한 노선 위에 있고 또한 기독교인의 연합이라는 고상한 이상을 공유한 가운데 연합을 시도 하였다가 실패 하였다는 점에서 우리의 슬픔은 배가 된다. 재미 있는 것은 남 영환은 환원의 진정한 이유를 한 상동 목사의 조카인 이 근삼이 총회 신학교의 교수로 채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솔직히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려 파의 충실한 지지자인 남 영환은 이 사건을 승 동 파의 교만과 전 회의한 실례로서 들고 있다. 환원의 신학 外的(외적)원인 가운데 하나로서, 박 윤선이 떠날 무렵인1960년과1963년의 고려 파의 변화된 상황도 한 몫을 한다. 1960년 박 윤선 박사가 사임하였을 때 그의 뒤를 이어 줄 유능한 교수가 없었다. 그러나1963년 소장 신학자들이 외국 유학에서 돌아 옴으로 신학교를 운영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결국 긴 안목에서 볼 때 고려 파의 환원은 합동 때보다 한국 교회에 더 나쁜 전례를 남겼다. 편의에 근거한 교회의 분열은 한국 교회의 역사를 통하여 반복되었다. 더욱이 이들의 합동이 실패로 끝나면서 이를 보고 경험한 한국 교회 전체는 교회의 연합을 의심스런 눈초리로 보게 된다. 교단의 합동이란 거의 불 가능한 것이며 그런 두통을 앓아야 할 필요가 없다는 정서가 교회 전반에 흐르고 있다.
2.개혁신학교
고려 파에서 파란을 일으키며 사임한 박 윤선과 그의 가족은 잠시동안 부산에 머물면서 매우 어려운 삶을 살았다. 어렸을 적 친구인 방 지일 목사가 방문하여 보니 박 윤선은 친구들의 도움으로 근근 히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박 윤선이 주석 쓰는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를 위한 후원회를 조직하려 하였다. 그러나 박 윤선은 설교할 수 있는 교회를 원하였다. 강단이 없는 목사는 삶이 없는 목사라고 믿었다. 1961년2월 박 윤선은 서울서대문 충정로에 있는 동산교회의 초빙을 받아 서울로 떠났다. 그는1964년4월까지 그 교회에서 목회하였다. 동산 교회는 연동 측에서 나와서 아직 교단을 정하지 못한 교인들로 구성된 독립 교회였다. 박 윤선은 동산 교회 시절을 이렇게 회상한다. “이 교회는 나의 일생에 잊을 수 없는 위로와 사랑의 원천이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내가 그 교회 개척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자신이 큰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가 신학교를 사임하고 이 곳에서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가 신학교를 사임하고 이곳에서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을지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박 윤선은 목회 사역에만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동산 교회에 부임 한지 두 달이 채 못 되어 그는 신학교를 시작하려 한다면서 O PC선교부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선교 부에서는 교단 과의 관계 때문에 이일을 주저하였다. 처음에는 박윤선과 김 진홍목사 두 사람이 교수였고 15명의 학생이 등록하였다. 이 가운데 12명은 고려 파에서 탈퇴한 보류 파에서, 두 명은 고려 파에서, 한 명은 승 동측에서 왔다. 한국에 도착한지 채1년이 안 되는 하비 칸은“이 갈라져 나간 신학교와 교회를 지원하는 것은 현재로서는 지극히 지혜롭지 못한 일입니다”라고 썼다. 한 달 안에 학생수가 21명으로 늘었다. 이때쯤 하비 칸은 다른 한국교회의 지도자들과 박 윤선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교회의 연합에 대해 박 윤선과 대화하였는데. 이때 박 윤선은 O PC가 총회 측의 합동 신학교와 함께 개혁 신학교를 돕는 것은 이 양파의 연합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돕는 것이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에 칸 박사는 그가 처음 가졌던 생각을 바꾸기 시작하였다. 그는 박 윤선의 요청을 좀 더 심각하게 고려하게 되었다. 미국 O PC선교 위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박 윤선을 대단히 높이 평가한다. 이것[자신이 개혁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박 윤선에 대한 우정을 표시하기 위한 구체적인 걸음이 될 것입니다. 그는 부산의 신학교로는 돌아가지 않읍니다. 그렇다면 이 단계에서 박 윤선의 대의가 정당한 것이며 그가 이제껏 고수하기 위하여 싸워왔던 원칙들과 진리들이 우리가 가진 원칙들과 진리들과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하지 않겠 읍니까?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 중에 그만이 개혁주의 신앙을 고수하려는 동기를 지닌 유일한 믿을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열정적이며 헌신된 칼 빈주의 자입니다. 우리는 그가 대표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우리의 증거와 우정을 버리지 않아야 한다고 믿읍니다. 교회건물을 차지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법정소송논쟁에서 그가 취한입장은 분명히 존중되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칸은 그 당시 박 윤선을 지원하고 있던 보류파의 입장도 진리와 개혁주의 신앙을 위한 순수한 목소리로서 이해하였다. “우리의 신생 연합 교회에서도 이런 목소리가 들려져야합니다. ”합동 측의 영향력 있는 리더들이 돈을 구하기 위하여IC CC에 접근하는 것을 목격한 하비 칸에게는 박 윤선과 보류파가 유일한 희망이었다. 이상적 진리와 순수를 추구하는 젊은 선교사로서 가질법한 낭만적인 면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칸이 박 윤선에 대하여가진 기본적인이해는 정확한 것이었다. 하비 칸의 합동 측 신학적 입장에 대한 회의가 깊어가면서 박 윤선에 대한 호의적 견해도 점점 커갔다. 여기에 더하여 그는 한 상동목사의 신학적 이유 없는 분리에 대하여는 깊이 실망하였다. 고려 파가 환원한다는 소문이 무성해가면서 칸은 O PC선교부에 박 윤선의 신학교를 도울 것을 강력히 요청하였다. 같은 해9월학생수는40명으로 불어났다. 대부분의 학생수는 합동 측에서 왔다. 박 윤선의 영향력은 점차로 자라가고 있었다. 드디어 O PC선교위원회는 박 윤선이 한국에서 개혁주의 신앙을 증거 해줄 믿을만한 유일한 사람이라는 데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그의 신학교를 돕다가 다른 파의 사람들을 反(반)개혁주의로 돌아서게 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선교 위원회는 박 윤선이 합동 측의 총회 신학교에 교수로 오라는 제안을 받았다는 정보를 얻게 되었다. 만일 박 윤선이 이 제안을 받아 들이면 그는 이미 안정된 신학교에서 자신의 신학적 확신을 전파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이제O PC는 서울이나 부산중의 두 캠퍼스(당시에 총회신학교분교가 부산에 있었다)에 개혁주의의 교두보를 마련하는 것을 지지하였다. 박 윤선이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박 윤선과 그의 신학교만을 도울 준비가 되어있었다. 고려파의 환원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박 윤선은 합동 측 총회신학교의 초청을 수락하였다.
3.총회신학교
<파수군>誌(지)에 따르면, 박 윤선은1962년11월22일 총회신학교에서 가르치기로 수락하고, 이를 12월13일 총회신학교 졸업예배 때에 공포하였다. 그가 총신에 들어감으로 자연히 개혁신학교는 문을 닫게 되었다. 이와 같은 급작스런 결정의 배경에는 몇 가지의 이유가 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이학교가 정식으로 허가 받은 곳이 아니기에 시청이 폐쇄명령을 내려진 것이다. 한 학기만이라도 끝내게 해달라는 박 윤선의 탄원에도 불구하고 市(시)에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둘째, 박 윤선이 총신으로 부터의 제의를 수락하려 할 즈음에, 개혁 신학교 학생들이 학교 운영에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1960년4. 19혁명이후 사회의 각층에서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박 윤선은 학생들이 공부에 전념하지 않고 학교운영에 개입하려하는 것에 대하여 많은 실망을 느꼈다. 한번은 인터뷰를 하면서 그가 고려 파에 있을 때에 합동 측으로부터 신학교에서 가르쳐 달라는 제의를 받았다고 하여 개혁신학교에서 가르쳤던 일을 건너뛰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합동 측 총회신학교에서 가르칠 때에 그는 이미 고려파와 연합한 합동 측에 개인자격으로 가입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 당시의 일을 매우 긍정적으로 약술한다.1963년부터 장로교 합동 측 총회 신학교에서 교수하는 중 많은 학생들에게 가르치게 된 것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으로 생각한다. 총회신학교에서11년 동안 교수하다가70세를 일기로 은퇴하게 되었다. 그동안 輪番 制(륜 번제)교장 혹은 대 학원장과 교수로 봉직하기도 했는데 그때 잊을 수 없는 일은 한국교회의 기둥 같은 신학자 박 형 룡 박사와 함께 가르친 일이다. 그는 교수시간에 의식적으로 칼 빈주의 신학과 기도, 또한 신실한 신자의 생활을 강조하였다고 한다. 좀처럼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언급하지 않는 박윤선의 글 쓰기 스타일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위의진술의 行間(행간)을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즉 그가 보기에 칼 빈 주의야말로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충실하게 전하는 신학인데, 총신은 여러 가지 면에서 보수적 이기는 하나 칼 빈주의 적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총신이 칼 빈주의 혹은 개혁주의를 표방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에 대한 지식도 부족하고 확신도 가지지 아니하였다. 예를 들어, 다름 아닌“한국교회의 기둥”같은 박 형 룡 박사도 브 룬 너 가1950년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그가 신학교 경건예배에서 설교하도록 허락하였거나 아니면 적어도 강하게 반대하지 않았다.1969년 총신의 학장인 명신홍은 니 이젤(W il helm N ie s el)의 신학이 어떤지 알지 못하고 그를 신학교 채플에서 설교하게 하였다. 박 윤선을 괴롭혔던 또 하나의 문제는 신학교내에 세대주의의 강한 영향력이 남아 있었다는 점이다. 박 윤선은 총신교수 가운데 한 사람이 쓴 전투적인 세대주의를 옹호하는 책이 신학교 서점에서 공개적으로 팔리는 것을 보고충격을 받았다. 또한 그 교수는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에 근거한 세대의 흐름에 관한 도표를 만들어 그 책 위에 걸어놓기도 하였다.1966년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 이상의 교수가 강의실에서 세대주의를 강의하였다. 박 윤선이 거의 단독으로 강의하였던 고려신학교에서는 그가 당해보지 못했던 문제들이었다. 총신에 더 큰 문제가 있었는데 이는 학교공동체의 도덕성에관한 것이었다. 고려 파에서 온 오 병세교수는 고려파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지만(예를 들어 독재적인 리 더 쉽),하나님을 사랑하며 교회를 개혁하려는 순수한 열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총신의 서울캠퍼스는 이러한 사랑과 신앙이 부재하였다. 그가 보기에는 총신에서의 모든 것은“정치와 권력놀음”이었다. 총신 서울 캠퍼스는“학생들을 양산해내는 공장”과도 같았다. 이런 현상은 학생들 사이에도 퍼져있었다. 학생들은 숙제를 적게 달라고 합니다. 내가 시험계획을 발표하면1분에9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항의를 해댑니다. 그들은 페이퍼를 내면서도 불평을 말합니다. 그들이 제출한 페이터의 수준은 고등학교 수준입니다. 그리고 제출된 페이퍼 속에서는 노골적으로 베낀 것들도 많이 있었다. 시험 때에도 다수가 부정행위를 하였다. 한번은박윤선이 이 문제를 교수회에 상정하여 재 시험을 치르도록 결정하였다. 그때 학생들은 이와는 관계없는 사건을 가지고 박 윤선이 편견과 미움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재 시험을 거부하였다. 이 문제로 교수들이 다시 모였을 때 박 윤선을 제외한 모든 교수들이 앞서의 결정을 번복하였다. 차 교수는 학생들의 말을 들어주고 기도회를 가질 것을 제안하였다. 후일 총신의 시절을 돌이키면서 이때의 학생들의 자질에 대하여 한탄한다. 신 학도들이 실력 있게 졸업해야 교회의 유력한 일꾼이 될 수 있다. 실력 없는 교역자는 한평생 목회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 사람이 진리를 모르고 일꾼이 되면 모르면서도 아는 체하기 쉽고 한평생 외식하게 된다. 해방이후에 신학교육은 신학졸업자들을 대량 생산 하기 때문에 기독 교계는 전반적으로 俗化(속화)되어가고 있다. 교회가 잘되는 비결은 진실과 영력이 있는 교역자가 인도해야 하는데 그런 교역자는 소수라도 교회의 유익을 준다. 그러나 영력과 진실을 소유하지 않는 교역자는 숫자가 많을수록 교회에 나쁜 영향을 끼칠 뿐이다. 시간이 가면서 학생들은 점차로 나아졌다. 학문적 수준에서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드문드문 진보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1967년에 이르기까지360명의 학생 가운데 45명만이 대학졸업자였다. 교수진의 향상은 또 다른 문제였다. 예를 들어 박 윤선을 포함한 네명의 교수들이 텍사스의 홈스테드 성경학교(Homestead College of the Bible)라는 이름을 가진 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1969).조사해보니 이 학교는 자료집에도 나타나지 않는 학위만 주는 유령학교였다. 박 윤선과 하비 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학위를 받기로 결정하였다. 놀라운 것은 박 윤선도 아마도 동료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학위를 받았던 것 같다. 칸은 이때 박 윤선에 대하여 몹시 실망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그는10년 전의 그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읍니다. 그러나 박 윤선을 옳게 평가하기 위하여는 이 행동만볼 것이 아니라 그가 윤 번제 학장으로 재임하던1964년 이사회에 제출한 다섯 개의 개혁 안도 보아야 한다. 그는 많은 반대와 위험을 무릅쓰고 이를 제안한 것이었다. 역시 이 때문에 그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았다. 또한 이때 새로운 학사규정을 제정하였다. 이 정책 때문에23명의 학생들이 졸업하지 못 하였다. 이 가운데 한 사람은 박 윤선에게 협박편지를 쓰기도 하였다. 후에 사과하기는 하였지만. 우리가 쉽게 상상할 수 있듯이 신학교를 개혁하는 것은 박 윤선 한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그와 같은 뜻을 가진 동료들의 도움을 거의 받지 못하였다. 더욱이 학교의 모든 문제들은 교단의 더 큰문제의 일부일 뿐이었다. 당시 교단은 부패와 교권투쟁과 지역감정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당시 교단은 부패와 교권투쟁과 지역감정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젊은 사람들은 교실에서보다 선배의 삶의 모범을 통하여 더 많은 것을 배운다. 몇 년간 교실에서 가르치는 것으로는 신학교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없었다. 우리는 미래의 세대가 우리가 교회(그리스도의 몸)의 법정에서가지고 있는‘교권’과 권위의 중재적 본질에 대하여 좀 더 성경적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하기위하여 노력을 한다. 그러나 이 변화는 높은 곳에서부터 일어나야 한다. 젊은 사람들이 그 권위를 가지게 되기까지 그들은 너무 오랫동안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그들은 신학교에서 교회정치에 대하여 배운 바를 다 잊어버린다. 그 때에는 이들은 교회정치의 場(장)에서 너무 많은 것을 이미 배운 상태이다. 박 윤선은 반드시 필요한 변화를 위하여 누구보다도 노력하였다. 교리나 신학보다도 그는 생활방식과...
표시할 내용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