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 박 윤선과 신사 참배 -서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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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최초의 신학적 논문들:바르트 비판
성경주석위원회에서 박형룡 박사를 도우면서 박윤선은 동시에 평양신학교와 평양여자신학교에서 성경원어를 가르쳤다. 또한 이때 그의 최초의 신학적 눈문이라 할 수 있는“바르트의 성경관비판”과“바르트의계시관비판”이라는 두 글을 써서<신학지남>에 실었다. 당시는1920년대에 일본으로 유학간 신학생들이 속속 귀국하여 활동을 시작하던 시기였는데, 일본에서는 바르트가 유일한 신학자로 알려져 있었다. 이 신학자들의 활동이 정점을 이루었던 때는 1930년대였고 특히 대도시 교회들 사이에서 그 영향력이 컸다. 이들의 활동은 선교사들에 의하여 훈련받은 인사들의 영향력이 축소되는 것과 비례하여 점증하였다. 이 새로운 신학은 많은 교회들에서 환영받고 받아들여졌고,“이 상대적으로 잘 훈련받은 그룹은 점차로 교회와 신학교, 그리고 교육기관들에서 지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교회 내에 긴장이 감돌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긴장은 선교사와 한국인 지도자들 사이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한국인 신학자들 사이에서 있었다. 이들은 처음으로 서로 다른 신학적 성향을 드러내었다. 이렇게 갈등이 점등하고 있을 때 박윤선의 논문이 나왔다. 그는 웨스트민스터에서 공부하면서 그의 로마서 주석을 읽고 그의 신학이 문제가 될 것을 알고 있었다. 홍치모 교수에게 털어놓은 바에 의하면 그는 바르트의“원계시”(Urgeschichte)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하여 상당한 시간을 보내었다고 한다. 박윤선은“칼 빨트의 성경관에 대한 비평”이라는 논문에서 바르트의 성경관을 이렇게 요약했다. 빨트는 성서를‘계시’에서 분리시켜 달리 취급한다......성서의 저자들이 피조물이니만치 비록 하나님의 계시가 저들에게 임하여서도 저들은 그 계시를 감당치 못하고 그 계시를 기록해 본 결과 필경 많은 착오를 포함한 인간의 작품을 내인 것뿐이었으니 이것이 성서라고 한다......그러므로 성서가 빨트에서는 옛날에 하나님을 안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계시를 받었던 흔적뿐이고 그것이 만대를 통하여 오고 오는 사람들에게도 期於(기어)히 동일한 의의를 가지지 못한다. 따라서 성서가 빨트에게는 종교생활의 일개참고서이고 기독교 신앙생활의 절대적 규준은 아니다. 박윤선은 이와 같은 바르트의 성경관을“결단코 신임할 수 없”는 견해이고,“비기독교적의 것...예수와 사도들의 성서관과 위반된”것으로 본다. 박윤선은 계속하여 예수 그리스도. 바울. 베드로 등의 성경에 대한 견해를 인용하며, 폴리캅. 어거스틴. 칼빈. 러더포드. 찰스 핫지 등의 신학자들을 동원하여 성경의 무오한 권위를 주장한다. 이런 과정에서 박윤선 자신의 성경에 대한 입장이 극명하게 들어난다. 성경은 인간의 주관적 태도가 如何(여하)함을 불문하고 고유적으로 神語(신어)로서의 절대적 효용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성경에 접촉하야 효과를 얻고 못 얻는 문제는 별 문제니 그것은 신의 섭리와 성령의 감화적 활동여하에 부처 생각할 문제이다. 박윤선이 보기에는 빨트의 성경관은 역사적 기독교와는 상관이 없는 “異說(이설)”에 불과한 것이다. 저의 사상은 기독교의 울타리 밖에서 나서 기독교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와 가지고 자칭 주인공이 되려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 울타리 안에는 참 주인이 계시나니 때가 이름에 이 울타리를 넘어오는 자를 심판하시리라. 한 달 후 발간된<신학지남>에서 박윤선은 바르트의 계시관을 비평한다. 칼 빨트는 세계를 兩(량)세계로 구분하여 一(일)은 원역사세계(Urgeschichte)곧 초시간세계라 하고 他一(타일)은 역사세계, 곧 시간세계라고 한다. 저의 사상은 이 플라톤(Platon)의 이데아 사상에서 取來(취래)된 듯하다. 저의 견해대로 말하자면 이 兩(량)세계는 서로 전타성(totaliter aliter)을 띤다. 환언하면 이 둘은 질적으로 서로 다르다. 따라서 시간세계의 것은 무엇이든지 원역사세계의 것을 이해할 수도 없고 후자의 交涉(교섭)을 감당할 수도 없다. 좀더 알기 쉬운 말로 설명하자면 원역사세계는 하나님의 세계요 역사세계는 인간의 세계인 바 인간과 하나님은 서로 질적으로 다르다. 그 서로 질적으로 다른 이유는 一(일)은 창조자이고 他(타)一(일)은 피조물인 까닭이라 함이 빨트의 견해이다. 그는 이런 바르트의 계시관을“성서의 말슴과 틀닌다”고 일축한다. 박윤선의 설명에 따르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바 양적으로는 다르지만 질적으로 신적 세계와 인간 세계가 구분되는 것은 아니라 한다. 사람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어둠속으로 떨어졌으나 그리스도 예수 안의 구속으로 다시 그 형상을 회복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복원되어 하나님을“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고(롬8:엡4:24)한다. 그러나 빨트는 인간이 피조물된 까닭으로 인하야 하나님에게 比(비)하야 전타성을 가진 것이라 함은 성경과 틀니는 말이다......빨트의 견해에 의하면 인간은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라도 그냥 神(신)人間(인간)의 전타성은 상존되여 인간은 신에게 하등 영속적 교섭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이러케 빨트는 역사계에 속한 것, 환언하면 시간세계의 産物(산물)이란 그 무엇이던지 신과는 전타성을 가지여 다 악한 것이며 따라서 皆(개)是(시)정죄함을 받어야 한다고 한다. 박윤선이 바르트의 인간과 죄에 대한 논의만 언급한 것이 아니라, 바르트의 역사관에도 도전한다. 확실한 역사적 기반이 있음을 부인하는 바르트의 비역사적“신앙”에 대하여 반대하면서 역사(시간과 공간)안에 신앙이 자리잡고 있음을 밝힌 것이다. 신앙이 물론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이지만 그것이 단지 확신(Fiducia)일 뿐 아니라 지식(Notitia)과 승인(Assensus)의 단계를 거친다는 것이다. 신앙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사역에 의한“심적현상”이지만 허무(vacuum)는 아니다. 정통신앙은 역사 안에 나타난 계시를 강조한다. 그러나 바르트는 비록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긍정하는 듯이 보이지만 이것이 구체적으로 역사 안에서 일어난 사건으로는 보지 않는다. 그에게 보통 사람들이 의미하는 역사성이란 중요하지 않다. 박윤선은 한국교회에 대한 경고로서 이 논문을 마감한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동안 別別(별별)한 신학운동을 다 보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그 모든 운동을 함부로 따라 갈 수 없다. 비록 위대한 지식가든지 비범한 언변가 혹은 탁월한 박애가로서 전인류의 주의를 끌 만한 별신학을 設(설)한다 하여도 그 신학이 비성서적인 것이면 우리는 단연 배격한다. 우리에게는 비범한 지식가. 언변가보다도 성경이고 탁월한 박애가보다도 성서이다. 우리는 성서로만 기독교를 알고 기독교를 설명한다. 세계인이 다 성서를 버리고 칼 빨트를 따를 것인가. 우리는 그래도 성서만을 굳게 믿고 그것으로 사상을 다사리고 그것으로 살고저 한다. 박윤선의 신학자로서의 경력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의 입장은 과거 보수적인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이 전하여 준 복음을 그대로 믿는 보수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생애와 신학을 인도할 유일하고 궁극적인 표준으로 믿는 믿음이 분명히 나타난다. 그는 이러한 확신을 교회 안에서 확산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생애를 보냈다. 당시 한국교회의 진보적 신학은, 김재준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서구적 의미에서의 자유주의라기보다는 바르트주의였다. 따라서 박윤선의 바르트에 대한 관심은 해방 이후 최근에 이르기까지 계속된다. 해방 후 그가 쓴 글들은 다음과 같다.“칼빈주의의 기본 원리와 칼 발트의 기본원리,”“칼빈주의 최대 표현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위기신학,” “칼빈 주의 최대 표현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위기신학,”“고전15장에 관한 바르트 해석 선평,”“바르트신학소고,” “신정통신학자들의 면모와 그 성경관,” “칼 바르트의 신학,”“칼 바르트의 신론. 그리스도론. 성령론 비판”등. 그의 주석에도 바르트를 비판하는 글들이 산재해 있다. 실로 박윤선의<로마서 주석>은 거의 매 절마다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과 교회교의학을 비판하고 있다.
3.두 번째 웨스트민스터 유학
한국에서 주석을 쓰는 일에2년간을 보내고 난 후 박윤선은 다시 웨스트민스터에 가서 공부하였다. 이는“원어와신학”을 더 알기 원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번에는 강의를 듣는 것보다 혼자 연구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박윤선의 성적표에 의하면 그는1938~1939학년에 다음과 같은 코스들을 택하였다.
1938~1939학년
가을학기
시리아어 2시간
연구:히브리어 4시간
연구:아랍어 2시간
연구:성경 아람어 2시간
논문:데살로니가 전후서 2시간
봄학기
연구:히브리어 l시간
연구:아랍어 2시간
연구:시리아어 2시간
연구:골로새서 1시간
논문:변증학(위기신학)8시간
1939~1940학년
가을학기
고급 시리아어 1시간
교회사 4시간
교리적 설교 2시간
논문:변증학 4시간
박윤선으느 언어와 변증학에서는 탁월하였으나 교회사 코스는 통과하지 못하였다. 이 성적표로부터 두 가지의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그가 언어에 전념하였다는 사실로 보아 그는 주석을 쓰기 위하여 준비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의 주석은 원어의 의미와 문법을 강조하는 것이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둘째, 신학적으로는 박윤선은 반틸의 변증학을 공부하였다. 한국에 머물러 있는 동안 그는 한국교회가 이 분야에서 분명한 입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새롭게 깨달았던 것이다. 그의 목표는 단지 기독교 신앙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뿐 아니라 이를 방어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의도는 그가 웨스트민스터에 체류하던1939년에<프레스비테리안가디안>(Presbyterian Guardian)紙(지)에 기고한 글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한국의 종교상황을 말하기 위하여 공자와 부처의 말을 인용하면서 동양종교라는 것이“기껏해야 불가지론”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설파하였다. 또한 유교와 불교의 영향을 오랜 동안 받아온 한국 신자들의 경우 기독교를“유일한 절대적”종교로 보기보다는 단지 가장 좋은 종교로 취급하고, 이 종교가 줄 수 있는 것이“유일한 구원”이라기보다“충분한 구원”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였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기독교에 대한 완전히 잘못된 개념이다. 성경은 기독교가 절대적이고 유일한 종교라고 말하면서 해 아래 있는 다른 모든 종교를 예외없이 거짓된 것이라고 정죄하기 때문이다. 선교지에서 기독교인들은 그 종교관에서 기독교의 유일성과 절대성을 포기하고 포괄적이 되라고 하는 유혹을 받고 있다. 박윤선은 반틸의 변증학에서 이러한 상대주의적 경향에 대항할 수 있는 무기를 발견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나는 모든 기독교인들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변증학 교수인 반틸 박사의 변증학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촉구하는 바이다. 그는 기독교 유신론(Christian theism)을 철저하게 철학적으로 변증함으로 모든 인간의 체계(칸트와 플라톤의 체계를 포함하여)가 의지할 수 없는 것임을 보여주었다. 반틸 박사야 말로 현대주의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폭탄을 터뜨린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당하다. 이 위대한 신학자는 우리가 어떻게 모든 비기독교적 공격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변호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준 사람이다. 그의 체계는 단순한 인간의 사변에 의한 것이 아니고 성경에 제시된 방어의 체계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편이다. 주께서 한국에서 그의 진리를 방어하는데 이 방법을 사용하시기를 박윤선이 그 난해하기로 유명한 반틸 인식론을 얼마나 깊이 이해하였는지는 의심이 간다. 부분적으로는 박윤선이 철학적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반틸의 문체가 특히 외국인들이 이해하기에는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박윤선이 반틸의 변증학을 사용하여 신정통주의와 동양종교를 비롯한 모든 비기독교적인 철학과 종교를 논박하려고 하였다는 점이다. 박윤선은 후에도 그의 저술들을 통하여 이 변증학자의 말을 자유롭게 인용하였다.1979년에도 그는 성경학자로서의 긴 학문적 여정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성경신학>을 쓸 때에도 반틸을 언급했다. 먼저 한 가지 말해 두는 것은 이 논문의 철학적 원리들만은 미국 웨스트 민스터 신학교 변증론 교수 밴틸 박사(Dr. C. Van Til)의 저술인“기독교 인식론”(The Defense of the Faith, Christian E pistemology)에 의존하여 작성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변증은, 인간이 자기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만 알게 된다고 강조한다. 처음에는 반틸의 인식론이 바르트의“신신학”에 대항하기 위한 무기로서 박윤선의 흥미를 끌었지만, 점차로 모든 비기독교적 사상과 신학들을 조망하기 위한 출발점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프레스비테리안 가디안>지1965년4월반틸의70회 생일 기념호에 박윤선은 논문을 기고하였다. 그의(반틸의)신학은 능력이 있고 살아있는 신학이다. 그는 이것을 나에게 나누어주었다. 나는 그의 신학을 알게 되어 주께 감사한다. 그의 형이상학과 변증학은 나에게 진정한 기독교 유신론이 무 엇 인지를 알려 주었다. 특별히1938~39년에 내가 “위기신학”에 관하여 연구한 것이 나에게 진정한 기독교적 계시관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는 계기가 되었다.1936년 8월이래로 나는 성경의 주석을 쓰고 있는데, 이 작업에서 반틸 박사에게 빚진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성경으로부터 도출된 진정한 기독교 철학이 없다면 올바로 성경해석을 할 수 없다. 인간의 자율성은 성경을 바로 해석하지 못한다. 이러한 확신과 반틸과의 학업을 통하여, 그 사상의 내용을 아는 사람조차 많지 않는 았던 시절 박윤선은 바르트와 브룬너의 위기신학을 효과적으로 방어한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그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한때 고려신학교의 교장을 지냈던 분이 박윤선의 장례식에서 조사를 읽었다. 고인의 업적에 대하여 많은 칭찬을 한 후 그는 박윤선이 칼 바르트의 신학을 분쇄하고 한국장로교회를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세운 분이었다는 점을 상기켰다.
4.신사참배문제
박윤선은 죽음이 임박했을 때, 자신이 미국에서 공부하느라고 다른 한국 신자들과 같이 신사참배로 인한 박해에 동참하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고 아들에게 고백하였다. 이 말이 그가 두 번째 미국에 간 것이 신사참배를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분명치 않다. 분명한 것은 그가 미국에서 공부를 끝낸 후에 곧바로 한국으로 오지 않고1939년10월부터 몇 개월 동안 도쿄에 머물렀다. 이때 평양신학교는 신사참배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하여 문이 닫힌 상태였다. 한국교회의 역사상 가장 암울한 시기였다. “신도”는 일종의 세계관 혹은 신화의 체계로서 일본 국가와 일본인의 기원을 설명해 주고 있다. 예배의 대상은“가미”라고 하는데 이는“신”혹은“신들”로 번역될 수 있는 말이다.“가미”는 과거에는 강이나 산을 지키는“정령”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기원전7세기 경 천황의 부족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태양의 여신이 최고신의 지위를 차지하였고 이 천황 가계의 조상신으로서 숭배되기 시작하였다.1868년 “막부”정권을 끝내고 다시 천황이 권력을 잡고 메이지유신을 단행하여 일본의 근대화가 시작되었다. 종교적으로는 신도가 다시 부활하여 황실의 권위를 높여주는 국가주의적 종교가 되었다. 천황은 태양의 여신의 성육신으로 그리고 절대적인 신의 현현으로 여겨졌다. 메이지 헌법에 따르면 천황의 가계는 태초부터 시말까지 일본을 다스렸다고 한다(제1조).그리고 천황은 신성불가침의 존재였다(제3조).천황은 오류가 없는 권세자였다. 일반 대중 사이에서는 천황은 신으로부터 권위를 받은 전 우주의 통치자라는 극단적인 믿음까지도 횡행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정부에 의하여 공식적인 지지를 받았고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일본은 전 세계를 다스릴 운명을 타고 났다는 확신에 까지 이르게 하였다.1878년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자 그들은 신도를 기치로 내걸고 아시아와 궁극적으로는 전 세계를 향한 聖戰(성전)을 개시하는데 국민들을 설득하고 동원하는 도구로 사용하였다. 이리하여 신도 이데올로기는 전국민에게 확산되어 전국은“침묵의 감옥”이 되었고 감히 이들의 군국주의에 대항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일본이 한국을 강제 병합하였을 때(1910),정복자들은 신도를 들여왔다. 처음 얼마 동안은 일본인들과 한일 혼혈인들만 신사에 참배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클락(Allen D. Clark)에 의하면“1930년까지 일본인 외의 다른 사람들을 이 의식에 동참시키려는 노력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전부터도 총독부는 한국인도 신사에 참배하도록 권유받았다.1918년에 이미 총독 하세가와는 신사참배를“천황과 그 제국에 대한 충성심을 고양시키도록 한국인들의 마음을 모르고 일본의 정신을 한국에 이식시키는 데 필요한”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1925년“조선신궁”이 서울 남산에 설립되어, 시내의 중심에 위치한 남산에서 신사가 전 도시를 굽어보고 있는 모양새를 가지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이런 식으로 한국인들의 독립의지를 말살시킴으로써 그들의 확장정책에 필요한 전쟁에서 사람과 물자를 동원하려 하였다.“내선일체”라는 기치하에 그들은 문화를 말살시키고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한국어 사용을 금지하였으며 고대 역사를 왜곡하여 한국이 일본에 원래부터 종속된 것으로 믿게 만들었다. 신사참배만큼 더 효과적인 민족성 말살의 도구는 없었을 것이다. 총독부는 이런 식의 왜곡된 역사와 신화를 발행하여 한국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운명이 어떠한가 그들의 과거를 회상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신사는 일본 고유의 것이었으나, 이들은 일본과 한국을 비롯한 모든 아시아인이 다 같은 혈통, 같은 종교, 같은 신화를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믿게 하였다.內 鮮(내선)은 一 葦(일위)帶(대)水(수)의 땅으로써 양자관계의 심원한 것은 도저히 타민족의 比(비)가 아니다. 즉 내선의 고대에 있어서는 본래부터 적지 않게 神紙(신지)를 같이 했고 제사 종교를 같이 했다. 그런데 중도에 이들 古韓(고한)의 신들은 聖賢(성현)主義(주의)의 그늘에 감추어졌다. 이야말로 조선에 있어 신들의 사망이다. 그런데 지금에 내선동포에 의하여 반도의 땅에 신기를 봉제하게 된 것은 실로 조선에 있어 옛 신들의 부활이라고 보지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일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부정적으로 반응하였다. 민족지<동아일보>는 신사문제를 우상숭배라고 규정하였다. 나무로 형상을 만들어 놓고 여기에 신이 있다, 저기에 영이 있다고 하면서 복을 구하는 것은 모두 우상숭배이다. 사람의 형상 뿐 아니라 일본인들이 귀중히 여기는 것처럼, 거울과 보석과 칼 앞에서 이를 숭배하고 이에 대하여 기도하는 것도 모두 우상의 일종이라고 하였다. 예상할 수 있듯이 가장 강력한 반대는 기독교회로부터 나왔다. 교회는 신사참배가 종교 행위가 아니라 황실의 조상과 다른 영웅들을 안치한 곳에 참배함으로써 애국심과 충성심을 고양시키는 공적인 행위라고 하는 일본인들의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숭실전문의 교장이었던 맥큔(George S. McCune,윤산온)선교사가 평양시내27개 교회의 목사들을 불러서 이 문제를 의논하였을 때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목사들이 무슨 일이 있어도 신사참배에 반대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한 목사는 이 모임을 마치고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신사에 있는 귀신에게 절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신사참배를 거부할 때 우리에게 닥칠 압박이 얼마나 무서운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를 견디지 못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아직 말할 수 있을 때에 선교사님들에게 부탁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이 교회의 신앙을 지켜주시오. 또한 홀드크로프트(Gordon Holdcroft)박사도 북장로교회( P.C.U.S.A.)선교위원회의 요청에 의하여 신사참배의 본질을 면밀히 연구하였는데, 이것이 애국적인 행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마침내 가공할 박해의 홍수가 밀어닥쳤다. 미션 스쿨들은 차례로 문을 닫았다. 교회 가운데도 로마 가톨릭 교회, 감리교, 성결교, 안식교 등이 압력에 굴복하고 침묵하였다. 맨 마지막으로 장로교가1938년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허용하였다. 일본 경찰은 이 총회의 총대들에게 다음 세가지 가운데 하나를 택하도록 하였다.
①총회에 참석하여 신사참배에 가표를 던지든지,
②총회에 가되 이 문제에 대하여 침묵하든지,
③총회에 가지 말든지. 어떤 총대들은 이 세가지 모두를 거부하고 총회에 참석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열차에서 체포되어 총회가 끝날때까지 연금되었다. 그 가운데는 후일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앞장선 김선두 목사도 있었다. 그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한 결정문은 다음과 같다. 我等(아등)은 신사는 종교가아니요,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며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여행하고 追(추)히 국민정신 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하에서 銃後(총후)皇國(황국)臣民(신민)으로서 赤誠( 적성)을 다하기로 기함. 소화13년9월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홍택기 신사참배 가결 동의안은 동석한 경찰들의 물리적 위협 속에서 가결되었다. 그러나 이를 통과시키는 절차에서 문제가 있었다. 의장이‘可(가)’만 묻고‘否(부)’를 묻지 않고 았다는 사실을 그 회의에 참석하였던 선교사들이 증언하였다. 이 불법적인 회의 진행을 문제삼고 항의하려던 선교사들도 경찰에 의하여 제지당하였다. 브루스 헌트 선교사는 회의장 밖으로 끌려나갔다. 경찰의 폭렷성에 의한 것이었다고는 하지만 이 가결이 교회를 대표하던 다수 총대들의 침묵에 의한 동의가 없고 으면 불가능하였다. 물론 그 claanre은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슬프게도 이 결정문은 경찰이 신사참배 반대자들을 핍박하기 위한 무기로 사용되었다. 역사가 이만열은 이 결정은 한국장로교회의 사실상의 항복이었다고 말했다. 신사참배문제에 대한 더 전형적인 평가를 민경배에게서 볼 수 있다. 그는“이 한국교회사 오점의 책임은 당시의 총회장 홍택기에게 있었던 것도 아니고, 총대들의 비겁에 있었던 것도 아니다. 이때의 삼엄한 공기는 현시의 우리들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시세였다”고 이들을 변호하였다. 그러나1938년의 공기가 아무리 삼엄하였다 해도 여전히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내어놓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들은 마치 로마시대에 황제숭배를 거부했던 신앙의 선조들처럼 죽음도 불사할만한 가치가 있는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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