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본문2-고신에서 가지는 주남선과 백영희의 의미
3.고신에서 가지는 주남선의 의미
주남선은 교파적으로만 본다면 이미 독자교단으로 출발하던 시점에 하늘나라로 가신 분이었다. 그가 아니면 고신이 없을 뻔했다고 해야 할 인물이 아니다. 그는 고신의 중심이었으나 그가 없어도 고신은 고신으로서 오늘까지 존재하는데 별 불편을 느끼지 못할 인물이다. 교계적으로 그 비중과 위치가 훨씬 크게 인식되는 손양원목사님은 생전에 자진하여 고신 범주에서 벗어났고 이 사건은 초기 고신운동에 큰 충격을 주었으나 고신은 자신을 지켜가는데 더 이상 불편을 느끼지는 않았다. 손목사님 역시 처음부터 고신운동에 적극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1)고신의 진리운동에서 교권은 한상동, 경건은 주남선
그렇다면 고신에서 주목사님의 의미는 어떤 것인가? 고신에서는 없으면 안 되는 한상동목사님이, 고신에서 없어도 별 불편이 없는 주목사님을, 고신에서 없으면 안되는 주목사님으로 만들었다. 한목사님 때문에 주목사님은 관심도 없고 또 신앙성격상 맞지도 않게 고신의 최고 자리에 앉게 되었고 오늘까지 고신역사에서는 주남선의 이름이 첫 자리에 있게 된 것이다. 고신을 오늘의 고신으로 출발시키고 자리를 잡게 한 이는 한상동, 그가 왜 주남선을 고신의 중심에 앉도록 모셨을까? 결과적으로 오늘 한국교회사에서 차지하는 고신의 위치는 독보적인 가치를 보유하고 있는 바, 그런 고신의 외형, 고신의 모습에서 빠져도 상관없었던 주목사님이 고신역사에서 뺄래야 뺄 수 없는 위치를 가지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한상동목사님의 고려가 있었다. 주목사님은 교권활동에는 무관한 인물이며 하나님 앞에 숨어 움직이던 분이다. 이런 신앙성격 때문에 한목사님은 주목사님을 고신운동의 중심에 늘 세워 드렸고, 그로 인해 주목사님은 고신운동에 특별한 분이 되었고, 그로 인해 백영희목사님은 고신운동의 심장부로 직행하는 길이 더욱 확고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 한목사님이 주목사님을 적극적으로 앞세웠던 점을 몇 가지 살펴보는 것이다.
2)주남선은 한상동에게 교권에 동원된 경건이었다.
①정치적이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정치적이었던 한상동목사님은 고신의 진리운동 초창기부터 정치적 색채가 강했던 분들을 경계하고 있었다. 교회를 정치적 시각으로 본다면 이런 점은 전혀 뜻밖의 일이 될 수 없다. 주남선목사님은 전혀 사심이 없었고 오로지 신앙내면만 가졌던 인물이다. 어려울 때 함께 했다고 훗날에 몫을 챙길 성향이 아니었다. 진리운동의 필요성만 확실하면 동참할 수 있으며 진리운동이 자리를 잡고 안정된 상태에서 교권이 유지될 때가 되면 주목사님은 소리없이 숨을 분이었다. 이런 점에서 주목사님 만한 분이 없었다. 활동적인 한목사님이 자신을 가리기에 적절한 인물이었다. 현재도 훗날도 대립각을 세울 위험이 없는 인물이었으니 장차 고신대학교가 되고 고신대학원이 될 고려신학교 초대 이사장에 추대한 것이다. 그 시작은 작았으나 교회사적으로나 교회정치사적으로는 장차 대단히 의미 있는 자리가 될 수 있음을 한상동은 알았고 주남선은 몰랐다. 한목사님은 주목사님을 정치적 입장에서 앉혔고, 주목사님은 경건으로 받았다.
②고신의 초기는 자기 홍보를 피할 줄 알았다.
교회의 이름에 "제일"이라는 말을 피하라고 할 만큼 고신의 초기는 겸손했다. 교인들이 개척을 한다음 "서부제일교회"라는 이름으로 등록하기를 원했을 때, 교단의 총무 일을 보고 있던 분이 하나님 앞에 두렵고 죄송하니 "제일"이라는 이름을 빼자고 하여 "서부교회"라는 이름이 만들어진 예가 있다. 초기 고신의 지도부 분위기를 알 수 있다. 총신측에는 여러 면에서 고신측에 비교가 되지 않는 훌륭한 간판이 두루 많았고 이것을 큰 힘으로 삼았다. 한목사님이 전면에 나서야 했지만 자신이 모든 것을 주도해야 하기 때문에 주목사님을 앞세워야 했던 것이 당시 분위기였다. 주남선목사님은 장차 자신의 이름이 갖게 될 의미도 모르고 고신의 대표 자리로 올라가고 있었다, 한목사님에 의하여.
③물론 다른 사람도 많았으나 굳이 주남선이었다.
평양감옥의 동지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세울 동지들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직은 신사참배 후 진리운동을 시작하는 초기였고 어려울 때였다. 정치적 계산이 늘 깔려 있었지만 경건이 그래도 함께 있었던 시기였다. 이곳은 신앙세계였고 아직까지는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직접 상대할 수 있던 시기였다. 주남선에게서 하나님의 역사가 유별 크게 느껴지고 있었다. 자연 그를 선택하는데는 순수한 신앙적 필연도 있었던 것이다.
④거창이라는 유벽지에서 움직이지 않는 이가 주남선이었다.
현 교통 체감으로는 외국출장을 각오할 이상으로 거창은 고신의 본부였던 부산과 거리가 있었다. 가장 먼 곳이었기 때문에 주목사님이 가지게 되는 자리는 이름만이었다. 물론 회의에 참석했다하여 자신의 의견을 기탄없이 발표할 분도 아니었다. 의견충돌이나 대립을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상대측과 존립을 두고 대립하는 과도기 형편에서 교회가 안정을 갖는데는 긴급한 조처가 필요할 때도 있다. 유벽지에서 모든 의사를 맡겨 주고 서로 믿을 수 있는 대상이란 둘을 찾기가 어려운 법이다. 진리운동에 필요해서 맡으라면 직책을 맡는 것도 진정 십자가를 지듯 맡을 수 있는 이가 주목사님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 짐을 다른 사람이 맡으려 한다면 그는 반가워할 수 있는 분이다. 고신이 총신과의 현장투쟁이 끝나고 분리되는 선포만 남았을 때, 이때부터는 고신 단독의 사람이 시작되는 시점이고 이제부터는 내부 교권투쟁이 시작될 수밖에 없다. 바로 이 시점에 주남선은 자기 갈 날을 계산하고 하나님 앞에 홀로 서고 있었다. 장례식을 앞두고 있었다. 진리운동을 위해서는 사용되어졌어도 교권운동에는 사용되는 것조차 제외가 되었으니, 그는 진정 복된 사람이었다.
4.고신의 외형과 주남선의 경건 선상에서 나타나는 백영희의 신앙노선
1)정통은 정통에서 이어가는 것
한국교회사의 중앙에 우뚝 선 신사참배라는 사건은 승리자라고 자처하는 고신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반대측에 의하여도 그 의미는 부인되지 않는다. 반대측이 오늘까지 주장하는 것은 신사참배 사건의 승리라는 값진 것을 고신교단이 한국교회의 교권을 잡기 위해 이용했다는 것이며 또한 승리자들이 너무 자만했다는 것을 지적할 뿐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신사참배에 실패한 한국교회들에게서는 교회의 정통성을 찾을 수가 없게 된다. 교회의 일부에서 일어난 실수가 아니라 교회가 교회 자체적으로 또 전체적으로 범죄를 하고 여기에 대한 회개가 없다면 교회적으로 정통성을 잃게 된다. 교회가 이렇게 정통성을 잃게 된다면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게 된다. 첫째, 회개치 않은 교회는 그 교회가 가졌던 촛대의 위치를 잃게 된다. 둘째, 교회가 잃어버린 촛대는 그 교회 안에서 그 범죄에 상관이 없는 사람을 통해 다시 이어지게 된다.
2)고신과 주남선으로 이어지는 신앙의 의미는 교회 정통성의 이동경로
①한국교회의 촛대가 고신에서 이어진 해방 교계
"고신"이란 의미는 한국교회의 정통성이 어디를 향하는가를 살필 수 있는 도로 안내판이다. 교회의 조직과 운영이라는 외형은 사람이 붙들고 있지만, 교회가 교회인 이유는 촛대이며 촛대라는 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인도를 따를 때 가지게 되는 "진리노선" 때문이다. 신사참배와 같이 교회가 교회 전체적 차원에서 이방신을 섬긴 범죄는 이 촛대가 옮기게 되는 원인이 되며 이런 범죄에 대하여 회개를 거부하게 되면 촛대라는 진리노선, 교회의 위치를 잃게 된다. 회개는 임시 잃은 위치를 복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지만 회개에는 기간이 있는 바, 회개할 기회를 놓치게 되면 이로써 교회는 역사 속에만 남게되고 현실에서는 다시 태동되고 또 잃은 촛대를 이어가는 교회를 박해하는 세력으로 남게 된다. 성경과 교회역사 전부를 통해 알 수 있다. 천주교의 회개는 당시 교회가 회개를 해야 했고 그 후시대의 손에서 회개가 나타나려면 루터와 칼빈식의 회개가 있어야 교회적 회개가 된다. 천주교는 거부했고 루터와 칼빈을 통해 교회가 가질 정상적인 위치, 정통의 노선은 이어오게 되었다. 천주교의 범죄를 회개할 그 당시 그 책임자, 회개의 고통을 느낄 수 밖에 없는 해당되는 사람은 거부하고 이런 회개의 책임과 고통에 상관없는 훗날 천주교의 반성발표는 회개가 아니라 위장일 뿐이다. 진정한 회개는 루터 칼빈으로 이어지는 이곳으로 옮겨오는 길 하나뿐이다.
한국교회의 신사참배는 일시 촛대의 자리를 잃었던 사건이며 따라서 상황은 유동적이었다. 그러나 해방후 회개의 기회를 놓친 것은 촛대의 자리를 아주 잃어버렸던 사건이다. 당시 승리자들의 교만과 교권확보에 대한 반발로 회개의 기회를 잃어버린 것은 홧김에 자살한 것과 같은 것이다. 당시 그들이 회개를 하려면 신사참배를 하지 않으려는 어려움 이상의 고통이 따르는 것이 모든 환란이 가지고 있는 성질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 따라서 신사참배를 했던 죄 하나에 더하여, 회개할 수 있도록 주신 재시험 기회를 한국교회는 거부하였고 이 죄가 더해지면서 한국교회의 정통성은 고신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객관적으로 표현한다면 교회의 정통성은 고신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주관적으로 표현한다면 교회의 정통성은 고신측을 통해 이어져 왔고 한국교회는 스스로 교회의 위치를 포기하였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교회의 불씨는 어디에 위치해 있겠는가? 두말할 것 없이 고신 계열 중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고신의 역사는 대단히 주의깊게 또 냉정하게 평가되어져야 할 당위성과 필요성을 갖게 된다.
②해방 후 고신의 진리노선이 이어진 곳은 백영희
고신의 죄를 일러 외부에서는 교만죄, 형제를 정죄한 죄 등으로 지적을 한다. 여기서 찾아보고자 하는 것은 촛대의 소재이다. 하나님이 붙들고 다음 시대로 이어가는 생명선을 따져보는 교회의 정통성 문제는 내부에 잠재된 죄문제가 아니라 외부적 죄문제로 확정이 된다. 이런 점에서 고신에게 교만죄가 있었다면 그것은 원인이 될 수 있는데 그치는 것이고 교회사적으로 교회의 정통성을 논할 때는 객관적인 죄를 기준으로 할 수밖에 없다. 고신이 한국교회로부터 교회의 정통성을 넘겨받았던 위치를 포기한 것은 여러 가지가 겹쳤다. 그러나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 것은 바로 예배당 소송건과 유엔군 철수 반대결의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교만, 교권쟁투도 하나님 앞에 죄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죄를 교회가 전체적으로 자신들이 걸어갈 노선으로 정할 때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고신은 교회적으로 결국 예배당 소송이 가하다는 노선을 밝히고 교회의 신앙문제를 불신 판사 앞으로 가져갔고, 유엔군철수를 반대하는 세상 운동을 교회가 하고 나섰으며 이를 지적하는 이들을 교회에서 제거하는데까지 이른다.
고신이 이렇게까지 나아가게 되는데에는 주남선과 같이 고신의 정신을 고신의 경건으로 지켰던 이가 일찍 없어진 데에서도 그 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한상동을 비롯한 고신의 지도부는 고신의 정신을 고신의 정치력으로 해결하려 했다. 주남선의 경건이 없어진 상태에서 고신의 정치력만 고신의 지도부에 남았다. 이런 정치력은 고신의 교권을 지키는 데에는 일견 유력하게 보였지만 하나님을 직접 상대하는 주남선의 골방 생활이 세상을 떠나자 인간이 인간만을 상대하던 지도부는 불신 판사 앞에 하나님을 믿는 일을 판결해 달라는 데까지 나아가는 소경이 되고 만 것이다.
그래도 한국교회의 원래 신앙노선을 신사참배에서 굽히지 않음으로 한국교회의 정통성을 지켰던 것이 고신이라면, 고신의 정통성을 배제하는 예배당소송과 유엔군 철수 반대운동과 같은 입장을 반대하다가 제거된 백영희에게서 우리는 고신을 이어 다시 한번 한국교회의 정통성이 이어지고 있음을 확정하게 된다.
3)고신 속에 나타난 백영희, 그리고 그 의미
①장차 고신의 중심부, 경건의 중심부에서 출발한 백영희
고신의 중심부는 부산을 포함한 경남지방이었다. 한국선교초기 선교사들이 서로 담당하는 구역을 정하였고 호주선교부가 부산으로부터 경남 남해안을 따라 서부지역 전체를 맡았다. 바로 이 호주선교부의 선교담당구역에서 거의 모든 신사참배승리자들이 배출되었고 경남 서부지방을 대표할 만한 이가 바로 주남선이었다. 백영희목사님은 1936년 주목사님이 맡고 있던 거창지방에서 신앙출발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는 주목사님의 신앙영향이 지방 전체에 크게 미치고 있었다.
불과 3년만에 닥쳐온 신사참배 전면 탄압 중에서 주목사님이 가장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백목사님 밖에 없었다. 주목사님은 이미 일제 감옥을 드나들었으며 그 고초가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는 이였다. 그리고 주목사님은 옥중 6년을 평양에서 보내며 장차 고신의 중심인물이 되고 또 한국교회에도 뚜렷하게 설 수 있는 단계를 밟고 있었다. 한편 백목사님은 집사로서 자기가 개척한 교회의 온 교인들과 함께 6년간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 신사참배 승리자들에 대한 교계적 평가는 출옥성도냐는 것으로 기준이 잡혔고 백목사님의 특이한 승리는 출옥성도들 중에서만 극진히 평가를 받고 있었다. 출옥성도가 아닌 경우는 신사참배를 피해 국내외를 전전한 이들이기 때문에 승리자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었다. 해방 교계 속에는 신사참배 승리자들이, 신사참배 승리자들 속에는 백영희가 있었다.
하나님은 출옥성도라고 분류되는 고신의 중심인물들을 해방 후 한국교회의 진리운동에 앞세웠다. 그러나 출옥성도 못지 않은, 오히려 더 큰 승리를 했던 백영희는 해방 직후 한국교회의 정화운동 전면에서 하나님은 늘 빼놓고 있었다. 대신 출옥성도로 이루어진 고신의 진리 운동 내부에서 가장 진리에 강한 종으로 또 앞으로 사용할 때를 위해 잠시 고요한 때를 주셨다. 따라서 고신이 해방 후 한국교회와 정통성을 두고 치열한 투쟁을 벌일 때 고신 안에서는 고신을 고신되도록 만드는 진정한 신앙의 실체를 만들던 이는 백영희였다.
②고신의 전 지도부에 의하여 고신의 전면에 등장한 백영희
고신 안에서 끝까지 변질되지 않았던 진정한 고신인, 이런 백영희가 되도록 가장 총력을 기울인 이가 주남선이다. 목사였고 지방 교회 전체의 책임자였으며 고신의 지도부였고 이미 교계의 중심에 섰던 주남선은 시골교회 집사에 지나지 않던 백영희를 자신이 초빙받은 강단마다 대신 세우면서 고신의 보배를 만들고 있었다. 한상동, 주남선과 같은 출옥성도이며 전국의 부흥회를 인도하고 있었던 박인순 이인재 조수옥과 같은 이들이 교계적으로는 한참 후배가 되는 백영희를 한껏 따르고 있었다. 특히 박인순전도사님과 이인재목사님의 경우는 보는 사람들이 지나치다 할 정도였다.
해방후 전국규모의 뜨거운 신앙운동은 단연 고신에 있었고, 고신에서 가장 뜨거운 부흥은 백영희에 의하여 주도되고 있었다. 1950년 고신이 제거되기 이전 전국 많은 교회를 성령으로 불바다를 만들었던 그는 1952년부터 고신이 총회에서 외부적으로 분리되는 과정을 밟게 되자 총회측에 속하거나 속하게 될 전국의 많은 교회를 고신측으로 돌려놓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런 전국적 역할과 고신 지도부 출옥성도들을 중심으로 많은 이들이 백영희를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신은 전도사에 지나지 않는 그를 이후 교단적으로 제거하면서도 5년이나 걸리게 된다. 1952년 7월, 백영희는 고신 최고 지도부 7명의 연명 초빙서를 받으며 부산서부교회로 부임을 하게 된다. 고신이 낳은 또 하나의 유명한 부흥사 김창인전도사님이 맡았던 교회였으나 그를 배척하여 교회분규가 있었다. 이런 교회를 맡아 수습할 사람은 고신 안에서 단 한 사람 백영희 밖에 없다는 지도부의 결론이었기 때문이다. 부산으로 오게 된 백영희는 여기에서 결국 고신의 가장 아픈 지적자가 되고 고신으로서는 배제시킨 인물이 되며 한국교회사로서는 고신으로 옮겨진 한국교회의 정통성이 백영희에게로 다시 이어지게 된다.
③고신 안에서 가지는 "백영희"라는 의미
고신은 늘 스스로 공개 인정하는 바와 같이 진리의 교회이지 교세의 교회가 아니었다. 하나님을 차지한 교회이지 사람이 많은 교회가 아니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열등의식이었으며 동시에 고신의 존재이유이었다. 그러나 고신이 해방 후 교계 투쟁 속에서 상대방이 결국은 신사참배 범죄를 덮어버리자 진리는 자신들에게 있다고 선포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소위 한국교회의 정통성을 독자적으로 가졌다는 순간부터 고신은 진리보다 교세, 하나님보다 교단의 지도자들의 교회가 되어버린다. 어느 것이 옳으냐 보다는 어느 것이 교세에 유리하냐는 것이 결정의 잣대가 되었고, 어느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냐는 것보다 어느 것이 지도부의 뜻이냐는 것으로 모든 결정이 있게 된다.
극단적인 예가 예배당 소송문제였다. 교회의 재산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성경까지를 곡해시켰고 지도부가 교단법 절차로 결정한 이런 죄를 반대하는 것은 오히려 불법이 되어졌다. 주남선목사님으로 이어오던 고신의 원래 정신인 경건과 진리노선에 틀렸으니 반대해야 하고 교단법절차로 결정했다면 그 법절차 자체를 성경법으로 고쳐야 하는 것이었다. 교단 지도부 사람들을 보면 찬성을 해야 하나 늘 모시고 있는 하나님을 생각해서 반대를 했으니 경건이었고, 교단법절차를 밟았더라도 성경에 틀렸으면 교단법절차도 고쳐야 하니 진리노선이었다. 이것이 백영희가 고신 안에서 걸어간 길이고 결국 지도부 불복죄로 제거가 된다.
백영희는 고신이 고신인 이유였던 경건과 진리노선의 대표적 인물이었고 그를 제거함은 고신이 고신을 제거함이었다. 외형은 고신이 붙들었고 고신의 진리운동은 백영희에게로 각각 나뉘어 내려오게 되었으니 1959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듬해 1960년, 고신은 고신이라는 이름을 스스로 폐기하고 자신들이 신사참배 죄인들로 정죄하던 회중에 가입해 버리게 된다. 이후 2년만에 반대측과 통합했던 것이 범죄였다고 회개하면서 다시 분리하였지만 이미 신앙노선적으로 고신은 완전 폐기 산화된 이후였다. 명칭 싸움을 피하기 위해 백영희는 고신이라는 이름을 주워들지 않았지만 이 건으로 인하여 진정한 고신은 백영희에게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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